소설리스트

2화 (2/90)

깊게 잠겨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가을의 말에 태준이 지그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은인, 정도라고 해 두죠.”

태준이 아직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은 가을을 멀찍한 곳에 선 채로 살펴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잠에 취한 듯 가을의 눈이 또다시 감겨 왔다.

“ㅈ…… 핸드…… 세……·.”

가을이 뭔가를 중얼거리자 태준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가을이 힘겹게 손을 들자, 태준이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손을 잡아 달라는 뜻인가 싶었지만 태준은 절대 여자를 만질 수 없었다.

“미안한데 손은 잡아 줄 수가 없어요.”

뭔가를 찾듯 손가락을 까닥이던 가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보호자가 오고 있다니까…….”

점점 작아지는 태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을의 눈이 다시 감겼다.

얼마 뒤.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마치 돌림노래처럼 응급실 안에 울려 퍼졌다.

“드르릉……·.”

“드르르릉.”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서 나는 소린지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커커컥크으으으컥.”

어디선가 들려온 천둥 같은 소리에 가을이 번쩍 눈을 떴다.

누군가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엄청난 코를 골고 있었다.

“드드등····· 크윽…….”

응급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에 가을이 손을 들어 누군가의 머리를 흔들었다.

“커커컥…… 어??? 조감독님!! 스읍, 정신이 드세요?”

가을보다 더 정신없어 보이는 스크립터 지영이 침 흘린 자국을 닦으며 벌떡 일어났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놀란 얼굴을 하던 가을이 아직 잠겨 있는 목을 풀 듯 기침을 몇 번 한 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김 감독님이 저보고 가 보라고 하셔서요.”

“김 감독님이?”

“조감독님한테 전화하셨다가 아셨나 봐요. 갑자기 병원에 가 보라 해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가을은 ‘STN’ 채널에서 한창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시간을 지나서’의 조연출이었다.

스타 피디인 김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드라마는 얼마 전부터 생방송에 가까운 촬영이 이어져 가을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무더위 속에서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근데 내가 왜 병원에…… 아.”

병원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몰랐던 가을이 그제야 횡단보도를 건너다 기억이 끊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영을 쳐다보았다.

“……혹시 여기에…….”

“네.”

“남자 한 명…… 있지 않았어?”

“아무도 없었는데요??”

“그래? 검은색 옷에 얼굴은 엄청 하얗고 머리랑 눈이 새까만,”

“헉! 소름.”

“왜?”

“그거 딱 저승사잔데…….”

심령프로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는 지영이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저승사자……?”

그러고 보니 생김새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몽롱한 상태였지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잘생긴 얼굴 뒤로 후광이 비쳤다.

그렇게 생긴 저승사자라면 앞뒤 안 가리고 따라가는 불상사가 생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은인, 정도라고 해 두죠.]

“뭐야. 나 데리러 왔다가 살려 줬다는 뜻인가??”

“설마, 실제로 보신 거예요? 아니면 꿈??”

“……꿈인 것 같은데.”

분명 휴대폰을 달라고 얘기하면서 손까지 들었는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딱 꿈에서 겪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스튜디오가 걱정돼 휴대폰을 찾던 가을은 자신이 입술만 달싹거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으으으으, 꿈이면 차라리 다행이죠. 현실에서 본 사람도 많아요.”

출연했던 경험자들이 생각나는지 지영이 깊게 숨을 내쉬며 몸을 한번 으스스 떨었다.

“근데, 무슨 꿈이었어요??”

“음…… 손을 잡느니 어쩌느니 한 것 같은데…….”

“그거 잡으면 큰일 나요! 손잡는 순간, 사이좋게 삼도천 건너는 거예요.”

무서워하는 지영과 달리 가을은 짧았던 꿈이 오히려 아쉬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엔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 표정 때문이었을까.

눈을 떴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던 가을이었다.

무슨 저승사자가 사람을 그렇게 걱정스럽게 쳐다봐.

설마, 그런 식으로 홀려서 데려가는 건가……?

가을이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지금 몇 시야?”

“2시 10분이요.”

경찰서에 도착한 게 12시쯤이었으니 두 시간가량이 지난 상태였다.

“조감독님 잠든 것 같다고 해서 지켜보다가 저도 깜빡 잠든 거 있죠.”

그때 의사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어나셨네요? 두 분 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의사의 말에 가을과 지영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30여 분을 코를 골며 잠든 두 사람이 어찌나 안쓰러워 보이는지 깨우지도 못하고 지켜보던 의사였다.

“바로 퇴원하실 건가요?”

“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가을의 상태를 설명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일사병 증상과 과로가 겹친 것 같은데, 좀 더 정확한 건 CT나 몇 가지 검사를,”

“아뇨, 괜찮아요.”

가을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시고 수분 섭취 많이 하세요.”

“저 근데, 선생님.”

자리를 이동하려던 의사가 가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지나가던 분이 발견해서 데리고 오셨어요.”

“혹시…… 얼굴이 엄청 하얗고 머리는 새까만…… 사람 같지 않게 잘생긴 남자분?”

“그건 모르겠는데, 안경 쓰신 남자분이었어요.”

의사가 응급실에 있던 명석을 설명하곤 자리를 이동했다.

꿈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었길 바랐던 가을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혹시나 했는데.”

“저승사자라니까요.”

가을이 단호한 표정을 한 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튜디오에 있다가 온 거야?”

“네. 근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검사도 하고 가시지.”

“검사는 무슨. 과로라잖아.”

“그럼 카페에 가서 좀만 더 쉬다 가세요.”

“스튜디오 가 봐야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하면 되죠.”

“걱정하실 텐데.”

“김 감독님은 걱정하셔도 돼요. 사람을 잡아도 좀 잡아야지. 스태프들 좀 봐요. 남들이 보면 좀비 드라마 분장한 줄 알걸요?”

지영의 말에 가을이 피식 웃었다.

“방금 의사가 한 말 들으셨죠? 푹 쉬라는 거.”

“그건 감기 걸리면 술 마시지 말라는 거랑 똑같은 말이야.”

“감기 걸릴 때 술 마시면 안 돼요?”

“안 되지, 근데 넌 마시잖아.”

“헐, 그래서 바로 스튜디오로 가시게요?”

술을 좋아하는 지영에게 딱 맞는 예를 든 가을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데다 DNA 검사가 신경 쓰여 머리까지 아팠지만 일을 뒤로할 수는 없었다.

가을이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설마 김 감독님한테 전화하시게요??”

“응.”

“스토토토옵! 아이~ 조감독님. 가을 언니이~~.”

지영이 가을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이참에 저도 조금만 쉬게 해 주세요오오오~~ 네?”

가을 못지않게 과도한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지영이 가을의 팔을 끌어안았다.

하루에 두세 시간 자고 나와 일하는 건 기본이고, 집에 들어가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일 정도로 고된 촬영이었다.

지쳐 보이는 지영의 모습에 가을이 생각을 바꿨다.

“그럼, 잠깐만 쉬고 가자.”

가을 역시 반나절만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자신이 빠지면 그 업무는 고스란히 다른 사람의 몫이 되어 그럴 수 없었다.

“점심도 먹고 들어가면 안 돼요? 저 아직 밥도 못 먹었어요.”

배를 움켜쥐는 지영의 모습에 가을은 결국 카페에 들렀다가,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스튜디오로 복귀했다.

가을이 스튜디오에 오자마자 김 감독은 짧은 걱정과 함께 건강관리도 제대로 못 한다는 잔소리를 해 댔다.

성치 않은 몸으로 스튜디오에 나온 가을은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후, 고된 촬영에 합류했다.

* * *

대규모 실내 공연장 안을 바쁘게 오가는 가을의 이마에서 굵은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장소 협찬을 하기로 한 공연장 측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촬영이 불가함을 알려 와 어쩔 수 없이 다른 공연장을 대관해 촬영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관 비용으로 제작비가 오버되자 스태프들의 촬영 환경은 더 열악해졌고 덕분에 조연출인 가을의 일은 쌓여 갔다.

Rrrr-

며칠간 기다리던 박 형사의 전화에 가을이 서둘러 구석진 자리로 이동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박 형사님.”

-결과 나왔다.

가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어떻게 됐어요?”

-박선호 아니야.

“아…… 그래요?”

-신원 확인돼서 가족에게 연락하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됐다.

“네……. 감사해요, 박 형사님.”

-그래. 나중에 통화하자.

안도감이 몰려든 가을이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선호가 살아 있다는 희망이 이어졌다.

전화를 끊은 가을이 휴대폰 사진함에 저장된 선호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20살의 선호가 웃고 있었다.

“조감독님!”

누군가 가을을 찾는 소리에 가을이 몸을 돌렸다.

얼마 전 가을의 일을 돕던 FD가 말없이 그만둬서 할 일이 두 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스태프들의 용건을 해결한 가을이 카메라 팀으로 향했다.

“카메라 동선 바뀐 거 체크해 주세요.”

리허설 때 바뀐 동선을 한 번 더 전달한 가을이 꼼꼼하게 체크된 콘티를 들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진짜? 너도 봤어?”

“그냥 스치듯 봤는데도 엄청 잘생겼더라.”

“나도, 배우나 모델인 줄 알았잖아.”

조명팀으로 향하던 가을이 바쁜 와중에 수다를 떨고 있는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저기,”

“조감독님도 보셨어요?”

“네? 뭘요?”

“‘STN’ 대표님이요.”

“아뇨.”

“진짜 잘생겼어요. 저~ 멀리서 걸어오는데 피지컬이나 분위기가 완전 쩔어요.”

“오오~ 그래요?”

스태프들을 향해 리액션을 해 준 가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고, 일단 여기 의자부터 둥근 형태로 놔 줄래요?”

“네에~”

가을의 지시에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먹고사는 게 바쁜 가을에게는 친분도 없는 누군가가 잘생긴 것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찰싹, 찰싹.

갈수록 더 빠듯해지는 촬영 일정에 두어 시간 쪽잠을 자고 나온 가을이 쏟아지는 하품을 참으려는 듯 자신의 뺨을 쳤다.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이었지만 어제 아침까지 오기로 한 대본이 오후가 되어서야 나오자 날이 선 김 감독의 짜증을 받아 내느라 피로도가 심해진 상태였다.

거기다 김 감독의 말을 전할 때마다 작가의 짜증까지 보태져 가을은 언제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몸의 피로도가 한계치에 이르렀지만, 가을은 언제나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Rrrr-

휴대폰 소리에 가을이 전화를 받았다.

“정가을입니다.”

-저 보작인데요. 촬영 들어갔어요?

“아뇨. 왜요?”

-샘이 18신 대사 바꾸면 가만히 안 두시겠대요.

“또 대본 안 넘기신대요?”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가 쓴 대사가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고치는 김 감독과, 그럴 때마다 대본을 늦게 보내는 작가 사이에서 두 사람만 고생하고 있었다.

처음엔 서로 상의를 하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젠 신경전을 벌이며 툭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김 감독과 작가의 잦은 불화로 아슬하게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누군가 교체되는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린다고 될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네…… 고생하세요.

가을이 김 감독이 콘티를 짜 둔 대본의 18신을 확인했다.

빨간색 연필로 정확히 두 줄이 쫙쫙- 그어져 있었다.

“이런, 18신.”

가을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이건 또 어떻게 전달을 해야 김 감독이 마음을 돌릴지 눈앞이 캄캄했다.

대본을 주지 않겠다거나, 김 감독을 반쯤 죽이겠다는 작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달할 수는 없었다.

김 감독의 기분을 티가 나지 않게 살살 맞춰야 10개 중 4개는 그대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이 가을의 몫이었다.

“조감독님.”

땀을 뻘뻘 흘리던 스태프 한 명이 가을에게 다가왔다.

“지금 엑스트라 차량 도착했다는데요.”

가을이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여기 너무 더우니까 차에서 대기하라고 해 줘요.”

가을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 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냉방시설이 고장 나 공연장 안은 찜통이나 다름없었다.

땀으로 옷이 푹 젖은 스태프를 보던 가을이 관리실에서 받아 온 AS 기사 연락처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예 기사님. 아까 전화드린……. 아까도 한 집만 더 가면 되신다고……. 아아, 예.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정가을!”

“네, 감독님!!!”

김 감독의 부름에 목청 좋은 가을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울렸다.

“하여간 목청하고는.”

주연 배우와 동선을 맞춰 보던 김 감독이 손 선풍기를 돌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에어컨 어떻게 된 거야?”

“방금 통화했는데요. 한 시간 안으로 오신답니다!”

“더 늦으면 네가 고치든지, AS 기사를 납치해 오든지 해.”

“넵!!”

김 감독이 인상을 쓰며 티셔츠 목 부분을 들어 손 선풍기를 밀어 넣고 몸을 돌렸다.

야외 촬영은 촬영 감독의 몫이었지만, 열정이 끓어 넘치는 김 감독은 종종 현장에 나와 지휘를 했다.

가을이 다시 한번 공연장을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상태를 체크했다.

가을은 언제나 김 감독이 시키기 전에 알아서 일을 해내었다.

천만 영화를 몇 편이나 찍은 김 감독은 최근 연출한 드라마까지 큰 성공을 거뒀지만 다혈질에 막말을 일삼는 성격 탓에 버티는 조연출이 없었다.

그런 김 감독 밑에서 영화 세 편과, 드라마 한 편을 찍으며 무려 3년을 버텨 낸 게 가을이었다.

‘김은봉 감독 밑에서 3년.’

이 말 한마디면, 이 바닥에선 얼마나 독종인지 단번에 설명이 됐다.

덕분에 가을은 성격만 빼면 최고인 김 감독 밑에서 실력과 함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멘탈을 갖추게 되었다.

무대 위로 피아노가 운반되는 걸 지켜보던 가을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했다.

곧 특별출연을 약속한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 팀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오늘 찍을 신에는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여자 주인공이 오케스트라와 협주한 무대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에 공연을 왔다가 특별출연을 하게 된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 팀은 빠듯한 스케줄 때문에 짧게 리허설을 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가을이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찾을 때 마침 오케스트라 팀 매니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가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네??”

밝은 표정으로 통화를 하던 가을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어제까지도 아무 말씀 없으셨잖아요. 지금 와서 갑자기 이러시면…… 사정은 이해하는데요, 저희도 대관이 오늘까지라 다른 오케스트라 팀을 섭외하기가 불가능해요.”

팀 매니저의 얘기를 듣던 가을의 목소리가 절실해졌다.

“어떻게 잠깐이라도 촬영이 안 될까요? ……저희 사정도 생각해 주세요. 짧게 몇 컷만 찍고,”

-정말 죄송합니다.

“매니저님! 30분만이라도…… 매니저님!!”

가을이 애타게 불렀지만, 팀 매니저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던 가을이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가을!”

김 감독의 목소리에 등골에서 흘러내린 땀과 함께 가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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