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52)

제39장. 우리들의 내일.

“하……. 그러니까 아까 내가 고른 것들로 그냥 끝내자니까?”

“아뇨, 전하께서 고르신 것들은 화려하기만 합니다. 관능적인 면을 돋보이게 할 거라면 적당하겠지만 대관식용은 아니에요.”

클레리아는 단호했다.

세실리아가 계속 취향대로 복식을 골라 대는 통에 대관식 드레스 디자인은 늦어질 대로 늦어졌다.

그 덕에 클레리아는 오늘은 무조건 조건에 맞춰 가봉을 마칠 생각이었다.

종일 투덜거리는 세실리아의 불평에도 귀를 닫고 말이다.

“나랏일을 먼저 해결하신다고 대관식을 미룬 지도 벌써 7개월이에요. 더는 황제 폐하의 자리를 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요.”

클레리아의 말에 양팔을 들고 있던 세실리아가 귀찮다는 얼굴로 팔을 내렸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들 때문에 황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참…….”

그러자 클레리아가 웃으며 한쪽에 놓여 있던 보주와 홀을 가져와 세실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 고이 잘 놓여 있는 화려한 왕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 왕관의 주인은 전하세요. 전하가 아닌 그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답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세실리아의 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전하가 즉위하시면 라스칸트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황제를 얻게 되는 겁니다. 저는 믿어요.”

세실리아의 눈빛이 떨렸다. 그리고 엷은 미소를 띠며 그녀가 살짝 클레리아의 턱을 건드렸다.

“그리고 내 곁엔 가장 강력한 치유사이자 조력자인 네가 함께이겠지.”

“물론이죠, 전하.”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많은 감정과 신뢰. 그리고 애틋함이 서렸다.

* * *

팍!

경쾌한 소리와 함께 투박한 나무토막이 반으로 시원하게 갈렸다.

카이론은 이마를 덮는 땀을 훔치며 다른 나무를 자르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클레리아가 서 있었다.

“온 건가?”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간단히 사 온 빵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곧 세실리아 전하의 대관식이라지? 자네가 바쁘겠군.”

“네, 그래서 거사를 치르기 전에 확인차 들렸습니다.”

“타이엔과 엘빈은 잘 지내고 있고?”

“…….”

클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론 역시 대답을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흘러내린 소매를 걷어붙였다.

“엘레나는 2층 자기 방에 있네.”

그 말에 클레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옆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슬레이터 부녀는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캄스턴 저택에서 발견된 시신과 증거들로 인해 간신히 형을 면했다.

하나 사형만 면한 것이지 중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작위와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고, 카이론은 마검술을 봉인당했다.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만 남겼으나 불만은 없는 듯했다.

카이론은 딸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동지와 나라를 배신했다는 자책감에 모든 것을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엘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황실에서 허한 사람 외에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이, 추방당한 곳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조금의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것에 의지를 잃은 모습이 맞을지 모르겠다.

똑똑

클레리아는 잠깐 기다린 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허락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들어오라고 다정히 권하지도 않을 테니.

방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엘레나가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한 시간 거리 안에는 인적이라곤 없고, 오로지 너른 들판만이 펼쳐져 있는 외진 곳이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들판에 엘레나가 하염없이 시선을 던졌다.

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빵을 좀 사 왔어. 생활하는 데 특별히 불편한 건 없어 보이는구나.”

여전히 엘레나는 대답이 없었다.

클레리아도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늘상 하던 혐오와 무시의 의미가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 클레리아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캄스턴 후작가를 정리하며 레리안의 방에서 나온 로켓이 달린 목걸이였다.

안에는 엘레나의 머리칼이 분명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다가가 창틀에 목걸이를 두었다.

“레리안 캄스턴의 유품이야. 어떻게 하든 이건 네가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후 클레리아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레리안이 죽었을 때, 그녀는 엘레나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온 감정을 다 토해 내듯 그렇게 솔직하게 우는 건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엘레나에게 다른 아쉬움이나 미련이 남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에 밟혔기 때문일 뿐.

‘나머진 엘레나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클레리아는 이슬레이터 부녀의 추방지를 떠났다.

클레리아가 탄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엘레나의 눈이 창틀에 놓인 목걸이로 향했다.

그녀는 목걸이를 집어 살짝 힘을 줬다. 그러자 로켓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고, 안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왔다.

그것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레나는 다시 로켓을 닫고 조용히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 * *

세실리아의 대관식 당일.

수도 본트리스는 정말 떠들썩했다.

각국의 귀빈들이 연달아 방문했고, 대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제국민이 몰렸다.

그 인파가 어마어마해 황궁 앞 광장이 꽉 미어질 정도로.

뎅 뎅 뎅

종소리가 울리고, 대 사제 바르오다스의 앞으로 아름다운 세실리아가 섰다.

황금색과 백색. 그리고 화려한 붉은 빛으로 장식된 세실리아는 한편으로는 고귀하고 성스러워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위엄있었다.

“이타와 배려의 상징인 르누엘룻의 뜻에 따라, 세실리아 펠리시아스를 라스칸트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한다.”

바르오다스의 선언과 함께 그녀의 머리에 왕관이 얹어졌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휠체어에 타고 있던 칼리에가 뒤에 서 있던 클레리아에게 손을 뻗어 꽉 붙들었다.

클레리아와 에단. 칼리에와 레인. 아리스, 리암, 레오나, 제이드.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엘빈과 타이엔까지.

모두가 왠지 모를 가슴 벅참에 잠시 숨을 죽였다.

푸른 하늘을 뒤덮는 종잇조각과 꽃가루의 숫자만큼이나 밝은 미래가, 광장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 *

새벽을 한참 넘어선 시간에도, 축제와 연회는 벌어졌다.

앞으로 3일 밤낮으로 황실에서는 귀빈들을 상대로 축하연이 이어지고, 제국민은 제국민대로 베푸는 잔치에 축제 분위기가 이어질 터였다.

“연회 한번 엄청나군.”

가벼운 칵테일을 내밀며 에단이 말했다.

“그러게. 세실리아 전하 때가 가장 왁자지껄한 것 같네. 아니, 이젠 황제 폐하시지.”

그 말에 에단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연회를 즐기는 사람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곱씹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넌 폐하의 고문관이자 치유사 총 책임자로. 난 3기사단의 새로운 단장으로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지.”

“응, 지난 7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클레리아의 대답에 에단이 잠시 침묵했다.

“이 요란한 연회가 끝나고 나면 다시금 우리는 정신없는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그 말에 클레리아가 곁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에단은 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담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요 며칠이 전부일지도 몰라. 프라이어스 영애, 혹시 바쁜 일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제게 하루만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클레리아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내어 드린다면 어쩌시려고요?”

그러자 에단이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작년에 저희 영지에서 봤던 그 풍경, 다시 함께 보시기로 약속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에단이 클레리아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것을 보며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오고, 곁을 지키고 봐 왔으면서.

어떻게 매번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는 걸까.

클레리아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 느낌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하루 정도는…… 제 시간을 내어 드려도 좋을 것 같군요.”

두 사람은 그 길로 함께 말을 타고 황궁을 벗어났다.

*

“이 짓을 3일은 더 버텨야 한다니. 정말 귀찮기 그지없구나.”

술과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이 축하연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되자 슬쩍 자리를 빠져나온 세실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폐하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

언제 붙었는지 그의 뒤에서 케일론이 말했고, 세실리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나저나 에단과 클레리아가 안 보이는구나.”

“그분들이라면 아까 황성을 빠져나가시는 것 같더군요.”

“황성을? 어딜 가기에?”

황실 주요 인물들이 연회 기간에 어딜 간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그녀에게 케일론이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미소 지어 보였다.

“그간 바쁘셨지 않습니까. 못다 한 말을 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세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런 중요한 일에 나를 빼고……!”

그러나 곧 곁에 선 케일론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도 이젠…… 내 마음대로 황궁을 나설 수도 없으니.”

그러자 케일론이 뒷짐을 지며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황제 폐하로서의 정식 활동을 시작하시는 날은 내일 정오부터입니다. 소중한 친우를 위해 밤중 나들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폐하. 해가 낮 가운데에 들기 전에만 돌아오신다면 말이죠.”

그 말에 세실리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정오 전까지라면 말이지.”

* * *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칼리스터 영지에 도착한 클레리아와 에단은, 저택의 옥상까지 쉬지 않고 올랐다.

난간에 서 바라보자, 작년 그때처럼 온갖 꽃들로 뒤덮인 풍경이 달빛을 은은히 머금고 있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면서도 클레리아도, 에단도 그 절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속…… 지켰구나.”

클레리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응.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에단의 손이 천천히 클레리아의 허리와 뺨을 감쌌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것이 지독히도 달콤해 정신이 혼미했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에단이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클레리아는 그 순간이 너무도 황홀해 꿈인지 생시인지 잠시 헷갈릴 지경이었다.

에단은 천천히 자신의 품에 손을 넣었다.

“더 빨리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도록 지체해 버렸어.”

품에서 나온 손에는 그의 눈을 닮은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폐하? 리암 경과 아리스……. 레인 님까지? 어떻게 여기에?”

세실리아의 얘기를 들은 그들이 그녀를 데리고 급하게 칼리스터 영지로 온 것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누구의 축하도 없이 둘이서만 보내려 했어?”

세실리아의 핀잔과 함께 아리스가 앞으로 나와 꽃으로 만들어진 장식을 클레리아의 머리에 달아주었다.

이어 세실리아가 턱 짓을 하자 에단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그런 불행한 사달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니, 성년이 되기도 훨씬 전부터 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의 레이디, 클레리아. 너와 함께 숨을 쉬고, 너와 함께 살아가며 많은 것을 같이하고 볼 기회를…… 나, 에단 칼리스터에게 주겠어?”

코끝이 찡해졌다.

왈칵 눈물이 솟아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마음만은 너무도 따스하고 기뻤다.

클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응,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너 하나뿐이었어, 에단 칼리스터.”

그녀의 말에 에단 역시 활짝 웃으며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는 클레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짝 짝 짝

행복에 벅찬 두 사람을 위한 작은 박수가 이어졌다. 소박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축하였다.

“사랑해, 클레리아.”

“나도. 나도 그래, 에단”

무수한 꽃잎이 둘을 축복하듯 눈처럼 휘날렸다.

너무도 아름답고 눈부신 여명 빛이, 마주 보고 활짝 웃는 두 사람 사이로 비쳤다.

-공녀, 치유사로 살다 완결-

공녀, 치유사로 살다 5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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