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장 회복, 그리고 다시…….
황태자 안투스의 배신과 서제도 레이셋의 4왕자 사이러스의 모반. 그리고 폐쇄적으로 살아 잊혀가던 바알리시안의 대륙 찬탈은 실패로 끝맺었다.
델 판시온의 게릴라성 침략 역시 빠르게 진압됐다. 도중에 바알리시안의 편에 섰던 소국 몇몇이 밝혀지기도 했으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실패한 지금. 아스칸 대륙에서 고립될 건 불 보듯 뻔했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라스칸트와 갈레노프로였다.
갈레노프는 유명 아카데미인 엘라단의 명예 실추와 사상자, 후에 델 판시온의 침략으로 정세가 많이 어지러워졌다.
다행인 것은 국왕과 왕자가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어 그것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었다.
라스칸트의 피해는 그보다 컸다.
황족 시해와 많은 수의 기사들을 잃었다. 궁전이 일부 파괴된 것은 물론, 수도민의 피해도 있었다.
그런데도 중앙 귀족의 지지와 동맹국의 지원으로 라스칸트의 내부 정세는 건재했다.
그리고 오늘, 라스칸트에서 마련된 동맹 회의에 동맹국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했다.
가장 상석에는 당연하듯 세실리아가 있었고, 그 뒤를 타이엔과 엘빈. 클레리아와 에단을 비롯해 이번 사건에서 위업을 이룬 인물들이 지켰다.
갈레노프에서는 루비나 왕비와 일리아스 공작이 방문했다.
바모른에서는 플로릭 아이문트 대공이 아들과 함께 방문했고, 서제도의 1왕자 라말 역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번 바알리시안의 침략과 사이러스. 그리고 안투스의 모반은 우리 라스칸트를 비롯한 아스칸 대륙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안을 조장하고, 혼란을 야기했으며. 희생이 뒤따랐죠. 그러나 우리는 이겨냈고, 지켜냈습니다. 모두 동맹인 여러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세실리아의 말에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갈레노프를 돕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군요. 하지만 큰 희생 없이 잘 진압했다니 다행입니다. 역시 대국다운 처신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루비나가 언제나처럼 인자한 웃음으로 답했다.
“범상치 않은 침략자들에 대한 특징을 라스칸트에서 발 빠르게 알려왔고, 거기에 대해 대응할 방법까지도 전달해 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역시 라스칸트의 협력에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델 판시온의 침략을 듣고 엘빈이 재빠르게 동맹국들에게 적의 특징과 대응법을 알린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때 서제도의 왕자 라말이 입을 열었다.
“우리 레이셋 역시 라스칸트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정말 적시에 지원군을 보내 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모든 동맹국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의 말에 세실리아가 빙긋 웃어 보였다.
“곧 즉위식을 진행할 거라 들었습니다. 초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군요.”
“당연하지요.”
그가 웃으며 답하고, 잠시 회의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숨을 고르던 세실리아의 눈이 천천히 날카로움을 머금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건 침략이 종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사실 중요한 결정 안건이 있기에 의견을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서렸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알리시안. 즉, 탈리니아스 일가에 대한 안건입니다.”
그녀의 말에 뒤에 서 있던 클레리아와 에단을 비롯한 이들이 올 것이 왔다는 듯 잠시 숨을 멈췄다.
다른 이들도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필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꼭 말해야겠다는 듯 깍지를 꼈다.
“오래전 아스칸 대륙을 지배했던 바알리시안을 지금의 위치로 몰아내고 세워진 나라가 우리 라스칸트를 비롯한 갈레노프와 바모른 등등입니다. 우린 그들의 잔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랬기에 그들을 몰아냈던 겁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다시 우리를 자신들의 아래에 두려 시도했습니다.”
세실리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루비나에게 향했다.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웠음에도 그 자존심 강한 탈리니아스가 땅에 고개 숙여 빌어 우리는 그들을 지금의 장소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훗날 우리가 그들에게 빈틈을 허락하는 일이 되어버렸죠.”
이번에는 그녀의 눈동자가 플로릭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본거지로 도망쳤고, 예전처럼 그곳에 틀어박힐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이 이상 추격하지 않는 건 훗날 우리 후세에게 다시금 그들의 침략을 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실리아가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펴며 사람들을 훑었다.
“나 라스칸트의 황녀 세실리아 펠리시아스는 바알리시안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걸, 동맹국들에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녀의 말에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는 깊은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바알리시안의 침략을 막아내긴 했지만, 흑마법에 대해 곤욕스러웠던 기억이 강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첨가)
그때 플로릭이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 바모른은 탈리니아스와는 조금 더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우리야말로 그들과의 관계를 가장 끊고 싶은 이들일 겁니다. 바모른은 세실리아 황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는 그를 보며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머지 갈레노프와 서제도. 다른 소국들은 비교적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사이러스의 시신을 수습하며 흑마법의 후유증을 확인했습니다. 일전에도 그것에 휘둘린 기사들을 봤지만, 사이러스는 좀 달랐지요. 괴기스럽고, 흉측한 힘이었습니다. 솔직히 레이셋은 다시 그 힘과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후방 배치를 약속하신다면 지원을 생각해 보도록 하죠.”
라말 왕자가 몸을 사리듯 소극적인 자세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번에 사이러스로 인해 자신을 따르던 측근들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침략당한 나라 중 가장 크게 궁지에 몰렸던 터라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루비나 또한 입을 열었다.
“우리 갈레노프 역시 라말 왕자와 같은 의견입니다. 우리 발렌도르 국왕께서는 이번 일로 건강이 크게 나빠지셨습니다. 조금은…… 좋지 않은 상황도 생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엘라단의 일도 그렇고, 계속해서 시국이 어지러운만큼 아무래도 적극적인 지원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후방 지원이라면 갈레노프 역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그녀의 말에 세실리아는 적잖이 실망한 기색이었으나 이해했다.
그때 에렌타 국의 셀림 공주가 발언했다.
“에렌타는 세실리아 전하와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녀는 세실리아의 뒤에 서 있는 클레리아를 바라보며 강건한 눈빛으로 웃었다.
“언제 어느 순간 힘을 함께 모아야 하는지 배웠고, 또한 이번 일로 함께하는 일이 옳다고 증명되었으니. 라스칸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엘라단 아카데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녀였다.
에렌타에서도 일이 터지고, 셀림은 가장 최전방에 나서서 싸웠다고 들었다.
역시 클레리아가 아카데미에서도 느꼈듯, 셀림은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 큰 인물이 될 게 분명했다.
클레리아는 작게 그녀에게 묵례했고, 셀림 역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들 이후, 몇몇의 나라에서 라스칸트와 뜻을 함께할 것을 밝혔다.
충분한 병력이 모였음을 확인한 세실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바알리시안 섬멸에 대한 사안은 통과되었고, 모두가 출정에 동의했음을 밝힙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회의실 안에 사람들 얼굴에 결의가 비쳤다.
* * *
“나도 갈 거야.”
“클레리아.”
에단이 말리듯 말했으나 클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 이제 예전에 내가 아니야. 달라졌어. 에단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그러니 나도 함께 갈 거야. 아니, 가야 해. 그래야 지킬 수 있어.”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봤다.
아직 정리되지 않고, 많은 피해를 입은 황궁과 수도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라스칸트는 이제 괜찮아. 다시 일어설 일만 남았어. 하지만 바알리시안에 가는 건 그렇지 않아. 난 갈 거야. 누가 다치도록 그냥 두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단은 천천히 클레리아의 뒤로 다가가 끌어안았다. 그리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에, 에단?”
“…….”
뜨거운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뒷덜미를 덮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클레리아가 그의 손을 풀려 애썼다.
“그, 그나저나 에단의 방도 엄청 좋구나. 역시 황궁에 있는 방이라 그런가? 세실리아 님이 주요 귀족들과 치유사들이 황궁에서 지내라고 하셔서 이런 곳에서도 지내본다, 그렇지?”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려 횡설수설 말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깍지를 낀 에단의 손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는 더욱 얼굴을 깊게 묻었다.
이윽고 에단의 입술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에단!”
새빨갛게 달아오른 클레리아가 비명에 가깝게 소리 질렀다.
“에단, 놔줘!”
“싫어.”
어딘가 서글프고, 애달픈 느낌의 입맞춤이 그녀의 목선을 타고 느리게 이어졌다.
“죽을 것만 같았어. 눈앞에서 널 놓쳤을 때.”
들려온 말에 클레리아는 몸부림을 멈췄다.
“솔직히 황녀님을 원망했어. 네가 끝까지 함께 나오려 하지 않은 걸 원망했어. 하지만……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았기에 버텼어. 죽고 싶고, 모든 걸 놔 버리고 싶었는데…… 그래도 버텼어. 널 위해서. 나 조금은…… 칭찬해 주면 안 될까?”
그의 말에 클레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나야말로 에단이 나눠 준 마나 덕에 살았어.”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었다.
“네 힘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다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
애틋함이 가득한 눈이 에단의 눈과 마주했다.
그의 손이 그리움과 애달픔을 담아 클레리아의 뺨을 훑었다.
“그 시간을…… 그 순간들을 견디게 한 건 에단, 너야.”
클레리아는 안투스가 위협하던 때를 떠올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에단의 뺨에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에단이 그런 그녀의 뺨과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내 손에 닿는 곳에 있어. 그보다 멀어지는 건 용서 안 해.”
“응. 두 번 다시 너와 절대 떨어지지 않아, 절대로.”
서로를 그리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두 사람의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에단의 키스가 애처롭게 이어질 때마다 클레리아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부우!
세실리아와 타이엔, 엘빈을 필두로, 전시 나팔 소리가 라스칸트의 바알리시안 섬멸 기사단 출정식을 알렸다.
에단의 등 뒤로 말을 탄 클레리아가 단단히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다른 치유사로는 제이드와 레오나가 함께 했는데, 레인과 아리스는 수도에 남아 수습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출정식에 나와 에단과 클레리아, 리암을 전송했다.
“하룻강아지. 꼭 가야겠어?”
왜인지 모르게 레인은 울먹이고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고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는 많이도 울었다.
“제가 가야 다른 이들을 지킬 수 있어요. 레인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제 괜찮아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요.”
사실 레인 역시 그녀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고생을 한 클레리아가 다시 전장에 나가는 것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무사히 돌아와. 상처 하나라도 나서 왔다가는 혼쭐을 내줄 거야!”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알았어요.”
아리스 역시 클레리아와 에단의 무운을 빌고, 리암에게 다가갔다.
“아켈리언 경.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녀는 리암의 머리색을 닮은 리본에 훌륭한 금색 자수를 놓아 그에게 내밀었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리암은 허리를 숙여 아리스가 표끈을 건넨 손에 입 맞췄다.
“돌아오면 아리스 님께 드릴 말이 있으니 꼭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손을 거두는 아리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흠흠.”
두 사람을 바라보는 클레리아와 에단의 눈초리에 리암이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말을 몰아 기사들 사이로 숨었다.
부우우!
다시 한 번 전시 나팔이 울렸다.
“무사히 다녀와.”
히히힝!
에단의 말이 우렁차게 울고, 이어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꼭 그럴게요.”
레인과 아리스의 배웅을 뒤로한 채 라스칸트의 섬멸 기사단은 바알리시안을 향해 출정을 시작했다.
* * *
바알리시안 섬멸이 시작되고, 전쟁이라 여겼던 라스칸트 연합군의 생각은 달라졌다.
바알리시안에 입성하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가혹했고, 처참했다.
저항이 심해서가 아닌, 국민의 처지가 난민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탈리니아스를 지원하러 들어오던 바알리시안 부대를 플로릭의 도움으로 케일론이 격퇴한 후, 다른 지원군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였다면 그 이상의 병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게 분명했다.
바알리시안의 국민은 굶주렸고, 노예 제도와 같은 철저한 계급 사회로 그 차별이 심각했다.
흑마법의 기운으로 땅이 죽어가 식량도 부족했다.
외부와 교류를 하지 않는 탈리니아스의 고집 덕에 자급자족하던 바알리시안의 국민만 죽어나고 있던 것이다.
세실리아는 구제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남기고, 탈리니아스의 궁전으로 진군했다.
그들의 항거는 미미했다.
궁전을 지키기 위해 싸워도, 곧 투항하거나 힘을 잃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왕족 침실로 들어선 순간.
함께한 모두가 침묵했다.
알리시아와 일라이가 서로의 손을 꼭 붙든 채 침대 위에 누워 숨을 거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에 생기를 잡아먹혀 둘 다 미라와도 같이 흉측하게 비쩍 말라 있었다.
피 볼 것을 감안한 행군이었으나 그 끝은 허탈하고, 허무했으며. 모순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행스럽게도 평화로웠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연합군은 바알리시안을 구제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돌렸다.
탈리니아스에게 오랫동안 착취당했던 국민은 순순히 흡수되는 것을 환영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갈레노프와 서제도의 지원군은 각기 그들의 내부를 정리하기 위해 돌아갔다.
라스칸트 병력과 다른 소규모 병력들은 남아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을 썼다.
클레리아를 비롯한 치유사들이 특히나 흑마법에 과하게 노출되지 않은 이들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주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라스칸트 수도의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라스칸트로 옮길 것인지, 또는 이곳에 병력을 남기고 귀환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찰나.
클레리아가 대안을 제시했다.
“이 땅을 뮐족에게 주는 것은 어떨까요? 치유사도 치유사지만,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민족이기에 그들의 힘이 미친다면 흑마법에 오염된 땅을 더욱 빨리 정화하고 안정시킬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제대로 된 영토를 주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녀의 말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세실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다만 다른 동맹국에서 반대한다면 좀 곤란해지는데…….”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주변국은 뮐족에게 그 땅을 주는 것에 반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흑마법이 물든 곳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외려 떠맡기 싫어하는 눈치였달까.
그에 반해 뮐족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우리 뮐족, 따뜻한 남쪽에 가 본 지 오래됐다. 그 땅이 우릴 부른다. 울고, 하소연하며 기다린다. 뮐족이 그 땅, 치유한다.”
바알리시안의 땅을 혹여 맡아줄 수 있느냐는 요청에 라기에는 흔쾌히 수락했다.
부족 내에서는 그 땅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을 외려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흑마법이 스민 땅이라는 골칫덩이를 해결하게 된 후, 세실리아와 그녀의 병력은 라스칸트로 귀환했다.
생각지 못한 음모와 배신. 그리고 가슴 아픈 희생을 일으켰던 바알리시안의 찬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