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52)

챙! 챙캉!

검날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이어 울렸다. 잠시 끊기거나 쉬는 법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에단이 내려치는 검을 받아낼 때마다 엄청난 힘이 전해졌다.

‘악!’ 소리가 나고, 검을 쥔 손이 당장 부러질 것 같아도 레리안은 악착같이 그것을 받아 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봐, 대체 왜 살기를 담아서 공격해 오지 않는 거야? 마치 이건…….”

날 끝까지 살려 두겠다는 것 같잖아.

기분 더럽게.

검을 쥔 레리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에 흑마법의 영향에서도 자유롭고, 클레리아의 가호까지 받는 에단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왜일 거라고 생각하지?”

카캉!

그가 다시 한번 무자비하게 검을 내리쳤다.

간신히 막았으나 이번에는 꽤 여파가 컸던지 레리안이 거의 검을 놓칠 뻔했다.

게다가 그의 검날은 반토막나기 직전이었다.

“빌어먹을!”

고통에 레리안이 비명에 가깝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대로 죽일 듯이 덤벼들란 말이야! 왜 자꾸 무장 해제를 시키겠다는 것처럼 검만 무식하게 내려치는 건데!”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에단이 자신의 검을 세워 느리게 훑고는 그를 노려봤다.

“맞아, 널 무장 해제시키려는 거. 레리안 캄스턴. 너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생명을 위협받았지. 그런데 너만 편하게 원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시겠다? 아니지. 넌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해.”

그의 말에 레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그럴 생각이었나? 그럼 엘레나는? 엘레나에게도 그렇게 할 생각이야?”

“…….”

에단이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이번에는 클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엘레나도 마찬가지죠. 예외는 없어요.”

그 말에 레리안은 두 사람을 보며 비웃었다.

“친구라더니 대단한 우정 납셨네.”

그 말에 클레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친구…… 친구라. 그걸 믿었던 시절도 있었죠.”

그녀의 말에 레리안은 천천히 벽으로 물러서 기댄 채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마치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실제로 그랬기도 했지만.

“난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위기의 순간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를 보듬고 챙기는 게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살았고요. 나는 늘 달려가는 입장이었지만, 엘레나는 아니었죠.”

클레리아는 레리안을 바라봤다.

“그런 관계에 지쳤어요. 더는 감당해 낼 자신도 없었고. 그래서 그만하기로 한 거예요. 당신은 우리가 엘레나를 저버렸다고 말하고 있지만, 먼저 우릴 놓은 건…… 친구로서 대하지 않았던 건 엘레나죠. 당신이나 엘레나나 왜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지 모르겠네요.”

그의 말에 레리안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굳이 이렇게 짚어 주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와 어쩌랴. 그렇게 살아온 것을.

레리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눈엔 당신도 다를 바 없는데? 당신도 우리 탓을 하는 걸 보니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

이번에는 에단이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네가 왜 그렇게 엘레나에게만큼은 희생적인 거지?”

그의 물음에 레리안이 이번에는 에단을 곁눈질했다.

“부모와 형제도 중요치 않던 네게 엘레나가 어떤 존재이기에?”

그 말에 클레리아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러나 정작 추궁당한 레리안은 전혀 동요치 않는 모습이었다.

‘엘레나가 어떤 존재인지라…….’

사실 레리안 그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 엘레나를 위하는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기 때문에 더 생각지 않았을 뿐이다.

캄스턴 후작가에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그 후계자를 뒷받침할 인재로 자라지 못한 그는 실패작이었다. 늘 배척당했고, 행동과 생각 하나하나 지적당했으며 부정당했다.

실패한 인간이란 낙인을 잊기 위해 방탕히 나돌았고, 그렇게 품은 여자들은 한결같았다.

그에게 혹시나 떨어질 캄스턴이란 가문의 부귀나 영광을 기대했거나 또는 그와 마찬가지로 그저 일탈을 위해 생각 없이 유흥에 미쳐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키워 가던 원망과 복수심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 엘레나를 만났다.

기회로 느껴졌다.

평소라면 만날 기회조차 없을 3공작가의 자제 하나를 이렇게 서슴없이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처음엔 순전히 호기심과 그녀의 입지 때문에 접근했다.

하지만 유일했다.

그에게서 가문을 보지도.

말 같지 않은 기대를 품지도.

가식적인 거짓 사랑을 속삭이며 들러붙는 일도 없었다.

저열하고 악의적일지라도 솔직했고, 그것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엘레나와 함께 있고 이야기를 하며, 일을 꾸밀 때는 오로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뿐이었다. 다른 걸 계산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순수하게 원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가 엘레나를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레리안은 머릿속을 헤집는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뜻이 맞았고, 죽이 맞았기 때문일 뿐이야.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레리안다운 대답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이미 두 사람도 하고 있던 터였다.

대답을 마친 레리안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댔다.

그것을 에단과 클레리아는 조용히 바라봤다.

그러나 적어도 그 전에 있던 긴 침묵에서 엘레나를 향한 복잡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를 향해 뻗었다.

그녀의 손을 휘감아 타고 뻗어 나간 치유력이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흘리고 있는 레리안에게 닿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간헐적으로 칼로 쑤시는 것 같던 통증이 사라졌다.

레리안이 고개를 들었고, 클레리아는 손을 내렸다.

‘역시 흑마법에 잠식당하지 않은 상태라 치유력이 그걸 잠재울 수 있었어. 이제 혼란스러운 건 없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투항해요, 레리안 캄스턴. 도망쳤다 해도 엘레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힐 겁니다. 당신들의 모반은 끝났어요.”

레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이리저리 느리게 휘둘렀다.

“나는 어차피 여기서 끝나. 알고 있어. 그러니 기왕 그럴 거면 할 수 있는 걸 하고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는 게 낫지.”

그리고 내 생각대로 되려면 아무래도 클레리아, 당신 쪽을 노리는 게 더 빠를 거고.

탓!

레리안이 순식간에 도약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클레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클레리아!”

당황한 에단 역시 놀라 급하게 뒤를 뒤쫓았다.

급작스러운 레리안의 태도에 놀란 클레리아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찔러 들어가는 그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검끝이 점차 클레리아의 가슴팍 쪽으로 가까워졌다.

“에단!”

비명과 함께 그녀가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푸욱!

뼈를 부수고, 살점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찰캉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진 검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아무런 통증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클레리아가 천천히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레리안의 가슴 한복판을 검이 꿰뚫고 나온 것이 보였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피가 게워져 나왔다.

레리안을 바라보는 클레리아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등에 꽂은 검을 바라보며 에단이 이를 지그시 물었다.

반드시 생포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는데.

그는 천천히 레리안의 등에서 검을 뽑아 냈다.

그러자 그의 무릎이 꺾이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리안!”

그때였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엘레나가 새하얗게 질린 채 저편에 서 있었다.

* * *

탁탁탁탁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황궁 내부는 여기저기 쓰러진 기사들의 시체로 즐비했고,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더구나 그나마 남은 기사들은 중앙 귀족 연합 기사들에게 제압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숨을 곳이 보일 때마다 몸을 구겨 넣으며 엘레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레리안은…… 레리안은 금방 따라오겠지? 정리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한무리의 기사들이 때마침 그 앞을 지나고, 엘레나는 잔뜩 웅크린 채 그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앞에 뜬눈으로 쓰러져 죽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공허한 그 눈에 그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도망친다고 해서 정말로 이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봐, 엘레나. 모든 것이…… 이루려 했던 것들이 전부가 실패했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슬레이터 각하가 체포되셨어.]

순간 클레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아버지가 체포되셨다고.’

왈칵 눈물이 솟았다.

억척스럽게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으나 복도를 가득 메운 기사들의 시신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혼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어디로?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레리안도, 카이론도 없는 지금 엘레나 그녀는 너무도 무력했다.

할 줄 아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런 시체 더미들을 헤집고 도망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자신이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고 뭘 어떻게 할 수나 있단 말인가.

‘이렇게나…… 이렇게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니.’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기가 막히고 끝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이름만이 떠올랐다.

“레리안…….”

어떻게든 자신을 안심시키려 웃어 보이며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던 그 사람.

엘레나는 울컥이는 울음을 참으며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리안…… 레리안.”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발이 빨라졌고, 마침내 뛰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구두도 벗어 버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마침내 원래 있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

엘레나는 잠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찰캉

검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도 움찔 떨렸다.

“레리안!”

무릎이 꺾이며 쓰러지는 그를 보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비명에 클레리아와 에단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리안…… 레리안.”

손을 벌벌 떨며 그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무릎 꿇은 채 주저앉은 그의 곁에 다가와 몸을 낮춰 바라봤다.

“레리안…….”

떨리는 목소리에 흐려진 그의 눈동자가 엘레나에게 향했다.

“왜 여기 있어요.”

피투성이가 된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레리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눈물로 젖은 엘레나의 뺨을 만졌다.

“그래도 마지막에 당신 얼굴을 보니 좋긴 하군요.”

“레리안…….”

그의 손을 붙든 채 흐느끼는 엘레나를 보는 레리안의 눈이 흔들렸다.

“모든 건 내게 뒤집어씌워요. 알겠어요?”

그리고 천천히 기대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악당의 말로란 이런 거죠.”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정신이나 차려 봐요. 응? 레리안, 레리안!”

엘레나가 클레리아를 돌아보며 소리 질렀다.

“넌 치유사잖아! 살려, 살리라고!”

그러나 클레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에단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리안, 그가 치유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치유하려 들면 어떻게든 받지 않으려고 발악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에단과 클레리아는 너무 잘 알았다.

“클레리아!”

엘레나가 소리쳤으나 클레리아는 차마 나설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레리안! 레리안!”

아무리 불러도, 흔들어도 대답은 없었다.

축 늘어진 그를 안은 채 엘레나가 절규했다.

* * *

한번 밀리기 시작한 모반 잔당들은 허무할 정도로 제압되어 갔다.

이런 오합지졸을 상대로 그렇게 휘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 정도였다.

“적들의 상태가 불안정해 아마 오늘 안으로 황궁 탈환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주요 인물들의 포획일 듯합니다.”

곁에서 보필하던 케일론이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정리되어 가는 잔당들을 바라보는 세실리아는 굳게 다물던 입술을 느리게 뗐다.

“안투스의 행방은?”

“칼리스터 경과 프라이어스 영애의 말에 따라 도망친 흔적은 있지만, 도중에 끊겼습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한 거군.’

세실리아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타들어 가는 꽃장식이 달린 거대한 기둥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곳으로 걸어가 기둥을 잠시 더듬었다.

드드드드드

어느 한 부분에 손이 닿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기둥 벽면이 움직이며 숨겨진 통로가 나왔다.

그것을 본 케일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족만이 아는 비밀 통로다. 비상시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 안투스의 기운을 추적해 봐라.”

그녀가 비켜섰고, 케일론이 마나를 흘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곳을 통해 도망친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기운도 말이죠.”

그의 말에 세실리아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가자.”

그녀의 명에 따라 케일론과 기사들이 앞서 비밀 통로로 들어섰다.

* * *

“일라이! 정신 차려 봐, 일라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그를 부축한 알리시아가 급하게 안투스의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라면 아직 버틸 수 있을 거다.”

급하게 문을 닫으며 보조 잠금 장치를 발동시킨 안투스가 말했다.

“일라이. 정신 차려 봐. 응? 내 말 들려?”

알리시아가 일라이를 침대에 기대어 앉히고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식은땀 범벅이 된 그는 눈에 띄게 혈색이 어두웠다. 숨 쉬는 것도 거칠고 불규칙했다.

그의 흑마법을 위해 재물이 보충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그의 체내에 있는 흑마법은 일라이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까의 싸움으로 알리시아의 체력도 꽤 고갈된 상태였기에 섣부르게 힘을 나눠 줬다가는 그녀 역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라는 대로 다 해 주었는데도 이 꼴이라니! 내 일족의 힘이 고작 이거였단 말인가?”

‘내 일족?’

알리시아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두려움에 떨던 안투스가 눈앞의 위협이 사라지자 다시 전과 같은 안하무인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대들은 뒤에 있고 더럽고 추한 짓은 우리가 모두 도맡아 해 주었는데도 저것들 하나 제압을 못 해? 고작 이 정도로 우리 바알리시안을 되찾겠다고 설레발을 친 건가? 이제 어쩔 거지? 대체 어쩔 거냔 말이야!”

그가 갈라지는 쇳소리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 입 닥치지 못해!”

앙칼지게 소리친 알리시아가 손을 뻗자 촉수가 뻗어 나가 안투스의 목을 휘감았다.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구석에서 벌벌 떨던 주제에, 위협이 사라지니까 다시 주둥이만 살았군? 그리고 내 일족? 우리? 그냥 놔두니 천박한 게 주제를 모르고 설쳐? 헛소리 계속 지껄여 봐, 어디까지 입을 나불거릴 수 있는지 한번 볼 테니까!”

가뜩이나 일라이가 위독한데 꼴 같지 않은 것이 옆에서 앙알대는 꼴을 참아 줄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저 추한 걸 치워야겠어.’

알리시아는 눈을 묘하게 뜨며 점차 안투스의 목을 죄는 촉수를 들어 올렸다.

“컥…… 커헙. 이게 무슨 짓…….”

그의 발이 무력하게 바닥에서 떨어졌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다른 손을 펼쳐 흑마법을 발동했다. 그러자 안투스의 몸을 검은 연기가 천천히 휘감았다.

“으읍!”

그가 괴로운 신음을 터트렸다.

푸왁!

“……?”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연기는 곧 힘없이 퍼져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왜 이러지?”

일라이처럼 흑마법을 유지할 힘이 없는 건가?

그녀가 몇 번 손을 쥐었다가 폈으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럼…….’

그녀는 힘을 풀어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안투스를 놓아 버렸다.

“컥, 커억! 크흡!”

벌게진 눈으로 캑캑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알리시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초리로 혀를 찼다.

“재물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엉망이란 말이냐? 한 나라에 황태자였다는 놈이 어떻게……. 쯧쯧쯧.”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되지 않는 놈이었다.

알리시아는 의식을 잃어 가는 일라이와 바닥을 나뒹구는 안투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저런 못난 놈을 의지해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무모했다.

두 번, 세 번. 몇십 번을 곱씹어도 이건 무모했다.

꽉 깨문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돌아서 얕은 숨을 헐떡이는 일라이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어리석었어, 일라이. 좀 더 제대로 준비를 해야 했는데.”

하지만 그 말 역시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내뱉는 말일 뿐.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바알리시안은 죽어 가고 있었다.

외부와 그 어떤 교류도 없이 내부에서만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다 보니 날로 부족한 것들이 늘어갔다.

게다가 흑마법을 위해 주기적인 인간 재물이 필요했고, 그것은 곧 반란과 인력 부족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흑마법을 쓰고, 다시금 인간 재물이 필요하고.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과거 바알리시안의 영광이 필요했다.

큰 영토와 걱정할 필요 없는 인력. 그리고 사람의 수.

어린 시절부터 과거의 영광을 듣고 자란 그들이 그것을 돌파구로 여기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쫓기는 마음에 조급히 벌인 일은 허점투성이였고. 그 결과는 지금처럼 참담했다.

“감히…… 동족을 이런 식으로 대해? 너희의 못남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말란 말이다! 난 내 몫을 했고, 지금은 너희가 몫을 해낼 차례야!”

이제 좀 살만해졌는지 안투스는 목을 쥐고 다시 악을 써댔다.

자신도 별수 없어서 함께 도망친 주제에 남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는 짓거리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잘하는 놈이다.

가뜩이나 침통한 마음을 헤집는 안투스에 알리시아가 이를 갈았다.

“동족? 누가 네 동족이야? 이 더러운 것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다시 한번 그의 몸통을 휘감았다. 그리고 동시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콰창! 쾅! 콰앙!

무시무시할 정도의 괴력으로 알리시아의 촉수가 안투스를 쥐고 흔들었다. 가구와 벽, 천장에 인정사정없이 그를 처박았고, 그는 종잇장처럼 무력하게 휘둘러졌다.

철퍼덕!

말 그대로 안투스가 피떡이 되자 그제야 만족한 듯 알리시아는 그를 내던졌다.

넝마가 된 그가 기이한 형태로 널브러진 채 경련했다.

“오냐오냐하며 봐주니 뵈는 게 없지.”

“크윽, 크으으…….”

신음을 내뱉으며 안투스가 움직였고, 힘겹게 그가 손을 뻗은 곳에는 탈리니아스의 특징과 꼭 맞아 떨어지는 백발 가발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피 묻은 손으로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하, 너란 인간도 참으로 지독하군. 그 지경이 되었음에도 정신 못 차리는 거냐?”

그녀가 싸늘히 내뱉었을 때, 일라이가 격하게 발작을 일으켰다.

“크업!”

“일라이!”

그녀가 다급히 다가가 붙들었으나 이내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진 게 분명했다.

와아아아!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망쳐 온 비밀 통로 쪽에서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알리시아가 급하게 창문과 이리저리 도망갈 곳을 찾았으나 무리였다.

안투스의 비밀 실험실 외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일라이…….”

자포자기한 듯 알리시아는 일라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며 울먹였다.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

알리시아는 그를 부축해 간신히 일어섰다.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자 곧 어두운 기운을 한껏 내뿜는 새카만 문이 열렸다.

“나도…….”

그녀가 발을 떼려 할 때 안투스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다니.

정말 끈질기다고 여기며 돌아보자 피투성이가 된 그가 손을 뻗고 있었다.

“나도 같이…… 형제…… 여.”

“하…….”

정말 지독할 정도로 대단한 집착이다.

“어리석은 것. 넌 탈리니아스였던 적도 없고 될 수도 없어.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그렇게나 집념을 보이다니…….”

그러나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안투스는 피를 게우면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탈리니아스다. 고귀하고…… 순결한……. 나는 펠리시아스가 아닌…… 탈리니아스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알리시아는 조소했다.

그러나 비참한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일라이와 자신이 겹치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이곳에서의 일도 끝이지만.

돌아가도 모든 것이 끝이겠지.

“너나 우리나 비참한 말로인 건 분명하군.”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일라이를 데리고 문으로 들어갔고,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얼굴 뼈가 부러져 어긋난 안투스는 제대로 뜨이지 않는 눈을 들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덜컥

저벅저벅

때맞춰 벽에 있던 돌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세실리아가 걸어 나왔다.

“안투스?”

방으로 들어선 세실리아가 눈을 의심했다.

그는 피로 붉게 물든 가발을 꼭 안은 채 엉망이 된 몰골이었다.

솔직히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가발을 꼭 쥐고 간신히 숨을 내뱉고 있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고, 얼굴 뼈도 어긋나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게 네가 그리도 바라던 모습인 거냐?”

그녀의 말에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눈앞도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꼬락서니가 네가 그리도 염원하던 것이냐 물었다.”

세실리아가 재차 묻자 몸을 떨던 그가 힘겹게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로 케일론이 나서려는 것을 세실리아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어차피 저 상태라면 얼마 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안투스는 기를 쓰고 자신의 실험실을 향해 기어갔다.

그를 지켜보기 위해 근처에 다가간 세실리아가 유독한 기운에 인상을 쓰며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끄으윽’하는 기이한 소리를 내뱉으며 안까지 들어간 안투스는 마치 가장 안도하는 공간을 찾은 것처럼 몸을 말았다.

그를 지켜보며 세실리아는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울컥울컥 솟았다.

‘저런 녀석을 위해 아버지는 그리도 바보같이 구신 겁니까? 저런 놈을 위해 저는…… 그 오랜 시간을 미련하게 나돌았던 거고요? 고작 저런 녀석을 위해?’

세실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폐하는 네가 태어난 후, 널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던 적이 없다. 안쓰러워하고, 지키고 싶어 했고. 모든 걸 주고 싶어 했다. 네가 태어나고부터 나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분은 내겐 황제일 뿐이었고, 오직 널 위한 아버지였지.”

그녀는 천천히 떨고 있는 안투스가 있는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넌 네 핏줄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다른 핏줄을 갈구했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 어떠냐. 넌 네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느냐? 지금 이 모습이…… 진정으로 바라던 네 모습이야?”

천천히.

피가 터져 붉게 물든 눈으로 안투스가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고결하고…… 고귀한…….”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끝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다른 것을 동경하고 패륜을 저질러 패악을 부리던 안투스는 그대로 숨을 거뒀다.

세실리아는 뜨여 있는 흐리멍덩한 안투스의 눈을 감겼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안투스의 방을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세실리아의 뒷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가득 차 있었다.

* * *

“후…….”

어지러워진 상황을 틈타 이아스는 흑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자리를 피했다.

가장 위험한 자리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사방 천지에 라스칸트 기사들이 깔려 있었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본국으로 귀환하신 모양이군.’

자신 이외의 강력한 흑마법을 지닌 기운이 순식간에 황궁에서 사라졌다.

하나는 꽤 안정적이었지만, 다른 한 기운이 굉장히 불안정했다.

아마도 일라이의 기운일 터.

그는 시선을 낮게 깔았다.

이번 침공을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귀환은 최후의 수단이라 했다. 아니, 최후가 아니라 침공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국 귀환은 피할 길 없이 자멸을 선택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그런 그들이 본국으로 귀환했다.

“바알리시안 재건국은 물거품이 되었군.”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재건국을 생각한 것조차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순간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에 닿았다.

“검을 놔라.”

이아스의 눈이 검을 들이민 자를 향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이던 리암이었다.

이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작령에서 봤을 땐 치유사와 칼리스터에게 휘둘리기만 하던데. 오늘 보니 또 기사가 맞기는 했군.”

“그쪽이 날 어떻게 봤든 상관없어. 검을 놔라.”

그러나 이아스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전투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투항할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을 봐. 너희의 계획은 실패했다. 네가 여기서 버틴다고 뭔가 달라질 것 같나?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에 이아스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일라이와 알리시아의 흑마법이 소진되어 가듯 방계인 그 역시 다르지는 않았다.

흑마법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긴 하나, 흑마법의 부작용에서 그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알리시안 내부의 흑마법의 부작용이자 저주는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고,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제물이 없다면 그것에 갉아 먹히는 것도 시간문제.

알리시아와 일라이가 포기한 걸 그가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아스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정해진 결과로군.’

왕가에 충성하며, 알리시아와 일라이를 대신해 정말 부지런히 발로 뛰었다.

대공으로서의 위치도 잊고 온갖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말단 부하 나부랭이가 할 일도 도맡았다.

그러나 바알리시안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검을 느슨히 쥐고 있던 이아스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싫다면?”

챙!

순간 번뜩이는 눈을 치뜨며 이아스가 리암의 검을 올려 쳤다.

그러나 이미 예상한 듯 리암 역시 가볍게 거리를 벌리며 그와 대치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서 발악까지 하지 말란 법은 없지.”

“그래서 네게 남는 게 뭐지? 필요 없는 소모전일 뿐이야.”

“소모전? 글쎄. 너에게나 그러겠지.”

그는 검을 바로 쥐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게 항복보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도약했다.

치고 들어오는 그를 보며 자세를 취한 리암 앞으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카캉!

강한 힘으로 그것을 밀쳐낸 건 엘빈이었다.

“칼리스터 공작 각하?”

리암이 말했으나 물러서 있으라는 듯 그는 리암의 어깨를 붙들었다.

엘빈에게 밀려난 이아스가 다시 돌진하려 할 때. 엘빈과 리암을 스치고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선수 쳐 이아스에게 향했다.

콰악!

그리고 뻗은 검에 이아스의 복부가 뚫려 그대로 검과 함께 벽에 박혀 버렸다.

“크악!”

찔러 넣은 검의 주인은 타이엔이었다.

“네놈이 내 딸과 칼리스터 경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물을 흐렸다던 그놈이로군.”

찰캉

그 말에 검을 놓은 이아스가 맨손으로 복부에 박힌 검을 붙들었다.

“물을 흐려? 하하, 그저 난 내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죄라면 그게 죄지. 어차피 너희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나 내가 내 나라를 위한 마음이나 거기서 거기야. 고귀한 척하지 마라.”

타이엔은 그가 더 반항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검을 놓고 몸을 바로 했다.

“우린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뺏진 않는다.”

타이엔의 말에 이아스가 웃었다.

“그게 어때서? 강한 자가 올라서고…… 강한 자가 갈취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법칙이지.”

대리석 바닥 위로 번져가는 피가 점점 더 많아졌다.

동시에 이아스의 말도 느려졌다.

“강했기 때문에 가졌고…… 강했기 때문에 빼앗은 것뿐이야.”

그는 천천히 피 묻은 손을 타이엔에게 뻗었다.

“고귀한 척 모두를 지키려 하지만……. 그런 너희들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지.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희보다 솔직했던 것뿐이다. 그게…… 뭐가 어때서…….”

그 말을 끝으로 이아스는 숨을 거뒀다.

몸부림에 가까운 발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자포자기한 몸짓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끝맺을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단조롭고 무미한 저항이었다.

“모두를 지킬 수 없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빼앗는 쪽에 서지도 않을 거다. 그것이 라스칸트와 바알리시안의 다른 점이다.”

타이엔의 나직한 말이 힘없이 늘어진 이아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 *

‘힘이…….’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일라이에게 받은 마구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큰 힘이 요동치다가도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동시에 팽창과 수축을 격하게 반복했다.

‘이렇게 불안정하게 들쑥날쑥 요동친다면 흑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그 증거로 아까부터 힘을 발동시킬 때마다 계속해서 무효화되길 반복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이 서제도가 이 내 손 안에 떨어질 텐데!’

쾅!

그가 분함에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사이러스 님!”

그때 누군가 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바알리시안으로 급파했던 정예원들 중 하나였다.

“바알리시안 내부 정보를 가져왔나? 그쪽은 어떻지?”

그의 질문에 복면을 벗은 정예병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이…….”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의 그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어서 말하지 못해!”

답답함에 다그치자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바알리시안은 사실상 쇠망한 상태였습니다. 살아남은 국민이 거의 없었고, 토지도. 마을이나 도시, 수도조차도 모두…… 쇠퇴해 나라의 기능을 진작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뭐라?”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의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흑마법의 근원지인 나라가 쇠망했다니.

그 절대적인 힘을 지닌 나라가 몰락이라니!

순간 말을 잃을 정도로 사이러스는 충격에 휩싸였다.

“사, 사이러스 왕자님?”

정예병이 그를 불렀으나 혼란스러운 그의 눈이 갈피를 잃은 채 허공을 헤맸다.

그 순간이었다.

치지지지

마구를 쥔 손에 불꽃이 인다 싶더니 곧 엄청난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왕자님! 아아아악!”

정예병이 마구에 손을 댄 순간, 마구가 순식간에 그의 생명을 흡수하며 정예병이 미라가 되어 버렸다.

“아악!”

그러나 폭주하기 시작한 마구는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극치에 다다랐다.

‘이, 이걸 손에서 놔야 해!’

그러나 생각처럼 마구는 사이러스의 손에 눌어붙듯 떨어질 줄 몰랐다.

콰가각!

“으아아악!”

결국, 마구가 손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동시에 그의 팔에 있는 생기를 빨아들였다.

고통스러운 비명에 측근들이 들어왔으나 아무도 사이러스 주변에 접근하지 못했다.

마구의 폭주가 점점 사그라들고 드러난 그의 팔은 처참했다.

팔 한쪽이 말라비틀어져 쪼그라들고 부서진 마구 조각들이 들러붙듯 박혀 괴이한 형태로 뒤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겁에 질렸을 때, 밖에서 느닷없는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창문에 밖을 확인한 한 명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여, 연합군이다. 아스칸 대륙의 연합군이 왔어!”

라스칸트를 비롯한 바모른과 갈레노프국에서 함께 파견한 연합 지원군이, 1왕자 라말을 돕기 위해 도착한 것이다.

사이러스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라말을 조금만 더 압박하면 됐는데 하필 지금!

그러나 연합군의 등장에 겁먹기 시작한 그의 측근들은 점점 더 동요했다.

더군다나 갑자기 이상한 힘을 가지고 나타났던 그가 계속해서 나약해지더니 이제는 처참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걸 보고도 상황이 나빠진 걸 눈치 못 챈다면 더 이상할 일이었다.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나가자, 그다음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연합군의 함성은 사기가 더 높아졌고, 더욱더 수도 깊숙이 전진했다.

텅 빈 집무실 안에 남은 사이러스는 숨을 헐떡이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피어나는 연기 사이사이로 자신이 이끌던 병사들이 무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은 병력은 도망치거나 투항하기 바빴다.

마구가 망가져 버린 지금 정신 지배가 풀린 군사는 더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안투스는? 일라이와 알리시아는? 한 통의 연통도 없는 건가? 지원도 없어? 이딴 불량품을 주고 거래를 하려 했다는 건가? 감히 이 사이러스에게?’

분노에 치가 떨렸지만, 그것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다면 그쪽도 일이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

“하…….”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사이러스 왕자를 찾아라!”

건물 아래쪽에서 연합군의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봤던 그는 허한 표정으로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가 창틀 위로 올라섰다.

눈을 감자 비명과 함성이 마치 그와는 상관없는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사이러스 왕자의 집무실입니다!”

쾅!

외침과 동시에 문이 부서졌고, 한 무리의 기사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이러스 왕자는?”

그들이 집무실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의 흔적은 없었다.

그저 활짝 열린 창문의 커튼이 바람을 따라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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