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52)

제38장. 예정됐던 최후.

“그럼 일단 연락이 닿은 귀족들은 각자 마련된 곳에서 은거하고 있는 거고. 병력도 준비 중이다?”

세실리아의 물음에 해밀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만 정해진다면 언제든 합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당장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해라. 수도와 황궁을 탈환하러 간다.”

그 말에 회의실에 몰려 있던 귀족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됐다는 기대감이 아닌, 우려가 섞인 반응이었다.

반응이 시원치 않자 세실리아의 미간이 주름졌다.

“이건 내가 원하는 반응이 아닌데, 뭐가 문제지?”

물음에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할 말은 많아 보였으나 심기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세실리아의 앞에 쉽사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양옆에 서 있던 엘빈과 타이엔만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할 뿐이었다.

“공작가는 전적으로 전하의 명에 따를 것입니다.”

알았다는 듯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다른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머지의 대답은?”

여전히 다른 이들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내 명에 문제가 있다면 발언하라니까? 불만은 많아 보이는데 왜 다들 입을 다무는 게냐!”

그녀가 노해 소리치자 뒷짐 진 채 침묵을 지키던 케일론이 입을 열었다.

“두려운 겁니다, 전하. 지금 가장 큰 전력인 소드 마스터, 50명이란 숫자가 빠졌으니까요. 더구나 그들의 계획이 성공했는지도 아직 알 수 없고요.”

그 말에 답답한 듯 세실리아는 원탁을 짚었다.

“그럼 그대들은 내 출정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겠군.”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이 병력은 수도를 탈환할 때 사용할 귀중한 전력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반격할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고, 탈환에 수년이 걸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체셔 자작이 잔뜩 굳은 채 어렵사리 그들이 우려하는 현실을 말했다.

세실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해야 해.

지금 이들을 움직여서 지원 가지 않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있는 시기를 놓치게 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에단은 달라. 그 녀석은 반드시 계획을 성공시킬 거다. 녀석에겐 클레리아가 달려 있으니까.

탁자에 올려진 세실리아의 손이 점차 그러 쥐어졌다.

협력을 전혀 기대할 수 없던 뮐족까지도 그들 편에 서서 움직이고 있다.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절히 맞물리는 일이 또 있을까?

이건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천운이 따라주는 현재, 에단의 부대를 돕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가장 큰 전력인 소드 마스터들만 구성해서 출정을 시킨 것도. 그들이 지금 여기 없다는 것도 모두 그대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겠지. 맞아, 그럴 거야.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 말이야.”

세실리아는 천천히 눈을 떠 안에 있는 귀족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난 책임자이자 선두로 출정한 칼리스터 경을 믿어. 그라면 반드시 계획을 성공시킬 거야.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성공한다 해도 우리의 도움이 더해지면 결과가 달라질 거야. 사람만 구하는 게 아니라 수도를, 황궁을!”

쾅!

그녀는 주먹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우리의 제국민을 구하게 될 거다. 모두 바알리시안이 대륙을 평정했을 때 어땠는지 배우지 않았나?”

그녀의 고개가 체셔 자작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흑마법으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고혈을 쥐어짰는지. 학대했는지 잊은 거야?”

이번에는 해밀턴 백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의 증조부와 고조부가 내리 한 증언을 벌써 잊은 건가? 해밀턴 백작?”

회의실 안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의 말에 동요하듯 모두가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렸다.

“나 혼자서는 못 해. 그대들이 도와줘야만 해.”

혼신이 담긴 한마디 한마디가 자리에 있는 귀족들의 가슴판에 꽂혔다.

“이 나라를 지켜낼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내게 힘을 실어 줘.”

한쪽에 있던 레인과 아리스 역시 피가 나도록 손을 맞잡은 채 이 상황을 숨죽여 지켜봤다.

“전하께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케일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블린트 가는 황녀 전하의 뜻을 따라 병력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의 말에 세실리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고조부께서는 늘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는 안 돼.’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고 하죠.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들의 행실에 진저리를 치셨다고요. 밤에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실 때면 늘 가족이 제물로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리셨다고 하셨죠. 네, 그 이야기들……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군요.”

숨듯이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해밀턴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해밀턴 가 역시 출정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체셔 가도 함께 하겠습니다.”

블린트 가문을 시작으로 하나둘 병력을 지원하는 데에 나서기 시작했다.

“넬로브 가도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각 귀족에게도 출정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감격과 전율에 세실리아는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이 은혜 잊지 않겠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금 심호흡하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준비되는 즉시. 칼리스터 경의 지원과 수도 탈환을 위해 황궁으로 출정한다.”

* * *

엘레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한눈에도 퍼져 나오는 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거기에 더불어 이상한 검은 연기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한 눈에도 예사 연기가 아니었다.

“뭐, 뭐죠? 저건?”

연기는 점차 퍼지기 시작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덮칠 듯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엘레나!”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코앞까지 다가와 카이론이 엘레나를 감쌌다.

결국, 연기는 그들을 덮쳤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마치 의지가 있어 황궁 내부를 속속들이 훑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을 지나간 연기가 점차 빠르게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엘레나는 겁에 질렸다.

“대체 저게 뭐죠? 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러나 엘레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카이론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아버지?”

턱!

부름에 카이론이 거칠게 엘레나의 팔을 붙들었다.

“엘…… 레나. 지금 당장 궁을…… 나가야 한다.”

“아파요! 뭐 하시는……!”

“내 말 들어!”

엘레나가 발버둥 쳤으나 이번만은 카이론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딸의 팔을 꽉 붙든 채 반복했다.

“여길 나가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지켜 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카이론은 뭔가를 떨치려는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연기에 덮쳐진 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식도 희미했다 정신이 들기를 반복하고, 계속해서 다른 누군가가 몸을 지배하려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딴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휩쓸려 버리고 말게 분명했다.

카이론은 결국, 강하게 붙들고 있던 엘레나의 손을 놓았다.

“엘레나, 여기서 벗어나.”

점차 강해지는 지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러다 사리 분별 못 하는 사이 딸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아버지…….”

엘레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카이론이 저렇게 자신만 두고 가는지. 빠져나가라는 그의 말이 왜 이리도 마음에 걸리는 건지.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붙들렸던 팔을 손으로 훑었다. 붙들렸던 곳이 너무도 아팠다.

마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 * *

“카, 캄스턴 후작님!”

보고를 마친 기사가 집무실을 나가려 문을 열다 외쳤다.

레리안이 귀찮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문고리를 붙든 기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뭔데 그러는 거야?”

그는 짜증을 내며 일어나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여전히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한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쫓아가니 알현실이 위치한 내궁이었다.

“뭣 때문에 그러는…….”

히스테릭하게 내뱉던 레리안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알현실 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빛 때문이었다.

‘저건……?’

한 눈에도 평범한 기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빛이었다. 아니, 사실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잠깐뿐이었지만, 나름 호위 기사라며 종일 붙어 있었던 적도 있으니까.

‘저건 치유력이다.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강력한 위력을?’

그때였다.

레리안을 포함한 주변에 있던 기사들 역시 신경이 곤두섰다. 알현실을 비롯한 황궁 곳곳에서 칼부림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레리안은 빠르게 마나를 이용해 내부를 훑었다.

“침입자가 있다. 만만치 않은 상대야, 서둘러서 진압해라.”

“예.”

그의 말에 순식간에 기사들이 문제가 생긴 곳으로 흩어졌다.

난감했다.

가뜩이나 일라이가 일부 기사들을 꼭두각시처럼 무력하게 만들어 제대로 된 기사들이 적어져 일이 늘었는데.

레리안은 눈을 매섭게 치뜨며 알현실 쪽을 바라봤다.

가 봐야 할까?

사실 본궁으로 탈리니아스 왕가가 들어온 후, 그들의 행적에는 일절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관여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맞았다.

알리시아와 일라이는 주요 인물들을 상대하는 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철저히 자신들이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서 사실 편해지기도 했지만 일이 틀어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그때였다.

두근

심장이 동요할 정도의 큰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탈리니아스가 쓰는 흑마법은 일반 마나의 빈틈을 공격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크게 마나를 이용할 인물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걸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강력하고 방대한 마나를 쓴다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 들어왔다.

그때였다.

쿠르르!

엄청난 소리가 알현실 쪽에서 들려왔다.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이상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연기가 갑자기 물밀 듯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그를 덮치고 지나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가 연기가 사라졌을 때쯤 천천히 몸을 폈다.

두근!

심장이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또다시 격동했다.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뭔가에 이끌리려 했다.

레리안은 순간적으로 체내의 마나를 강화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런데도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한 것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쓰며 벽을 짚었다.

분명하다.

일이 틀어지고 있어.

“엘레나.”

무언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제일 먼저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는 건 엘레나의 모습이었다.

레리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억척스럽게 발을 옮겼다.

* * *

카캉!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날을 제이드와 에단이 쳐냈다. 더불어 레오나가 마법으로 몰려드는 기사들의 발을 얼리거나 불덩이를 날려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문제는 주춤거리기는 해도 달려드는 걸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라기에와 잇새 역시 쉼 없이 그들을 물어 던지거나 휘둘러 쳐 막았다.

“정신 차려! 너흰 라스칸트의 기사들이야. 너희가 따라야 하는 건 저들이 아니란 말이다!”

에단이 소리쳤으나 흐리멍덩한 눈으로 시체처럼 덤벼드는 기사들은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클레리아가 치유력의 장벽을 물결처럼 일렁여 그들을 회복하려 해도, 이미 너무 오랫동안 잠식당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레오나와 제이드. 에단을 보호하기 위해 치유력 보호막을 펼쳤다.

콰앙!

갑자기 큰 충격과 함께 옆 벽이 부서지면서 옆에 있던 클레리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그녀의 앞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

클레리아가 눈을 들자 날이 시퍼런 검을 치켜든 카이론과 마주쳤다.

그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 순간.

카캉!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와 함께 에단이 그의 검을 맞받았다.

“각하, 정신 차리십시오! 적은 우리가 아닙니다! 누가 진짜 적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카이론은 에단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검을 부딪쳐 왔다. 요령도, 기술도 없이 오직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것이 전혀 그답지 않았다.

검을 쳐내며 본 그의 눈은 생기가 없었다. 산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흐리고 공허한 눈빛이었다.

“부하들이 죽어 나갑니다. 각하의 기사들이요! 부하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대체 이 꼴이 뭐란 말입니까!”

안타까움이 배가 되고, 그것은 곧 원망과 절규가 되었다.

카이론, 본인에게만 닿지 않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클레리아의 눈에, 카이론의 가슴에서 기이한 기운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건……?’

쿠아앙!

이상한 것을 감지한 순간, 엄청난 소리와 함께 에단과 칼을 맞대고 있던 카이론이 날아가 버렸다.

레오나와 제이드가 상대하던 기사들 역시 추풍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어디선가 새로운 기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중앙 귀족들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클레리아에겐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들을 날려버린 이를 바라봤다.

타이엔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폭발시키듯 터트린 검기와 오러의 열기로 옅은 증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카이론, 감히 내 딸과 제자에게 검을 휘둘러?”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분에 휩싸인 그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듯 숨죽였다.

콱!

일격을 고스란히 맞은 카이론은 바닥에 검을 꽂아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커억!”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토해졌다.

“어디까지 추락할 셈이냐. 3공작가의 이름을 어디까지 내던질 생각이야!”

아직 검에 의지한 채 피를 게우는 그에게로 타이엔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가 멱살을 붙들었다.

“우리에게 검을 겨눌 거냐? 정녕 우리와 싸울 거야? 이제라도 제발 정신 차려 카이론!”

거칠게 흔드는 타이엔을 카이론이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카이론, 제발…….”

타이엔이 애처로이 오랜 벗의 이름을 불렀다.

“윽!”

순식간에 카이론이 검을 휘둘렀고, 빠르게 거리는 벌렸지만, 타이엔은 아슬아슬하게 팔을 베였다.

간절한 부름도 카이론은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침통한 얼굴을 하던 타이엔이 검을 바로 잡았다.

“잠깐만요!”

클레리아가 외치며 두 사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카이론의 가슴에 손을 댔다. 그리고 강하게 치유력을 흘려 넣어 그의 가슴을 잠식하고 있는 것을 집어삼켰다.

치유력이 닿는 순간 심장에 새겨진 검은 기운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곧 클레리아의 힘에 먹히듯 잠식되어 서서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헉!”

빛을 잃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고, 카이론은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내상이 그제야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타이엔? 엘빈?”

뚜벅 뚜벅

그때 묵직한 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세실리아 황녀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님!”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세실리아 역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무사히 탈출하셨군요. 혹시나…… 정말 혹시나 잘못되셨을까 봐…….”

“네가 날 지켰어. 네가 날 살렸어, 클레리아. 무사해 줘서…… 정말 고맙다.”

마지막 말이 떨리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클레리아와 세실리아는 마주 본 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어 몇 번의 숨을 고른 세실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카이론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클레리아를 볼 때와는 달리, 무던히도 냉랭하고 날카로웠다.

“이슬레이터 공작. 아니, 카이론 이슬레이터. 진작 그대의 공작직이 박탈당했다는 건 예상했겠지.”

“…….”

카이론은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날 배신한 건…… 이 나라를 배신한 건 그 어떤 이유라도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에 타이엔은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별 대단한 이유도 아닙니다. 그저…… 딸을 지키고 싶다는 어리석고도 미련한 이유였죠.”

“난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를 즉결 처형시킨다 해도 시원찮을 지경이야.”

세실리아의 말에 엘빈과 타이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세실리아가 분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어. 그대의 처분은 아쉽지만 잠깐 미루도록 하지. 결박해.”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나와 카이론을 손을 묶었다.

그는 제정신이 든 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붙들려 나가는 카이론이 엘빈과 타이엔의 곁을 스칠 때 아주 잠시 멈칫, 그들을 바라봤다.

“내 딸을…… 엘레나를 죽이지 말아다오.”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기사들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카이론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내부를 정리한 리암 역시 그들과 합류했다.

“탈리니아스 일족은?”

“안투스와 함께 도망쳤습니다.”

에단의 대답에 세실리아가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안투스라는 이름에 반응한 것이겠지.

그녀는 생각을 곱씹는 듯 입술을 깨물다 다시 입을 열었다.

“위험 요소를 남겨 둘 순 없어. 추적한다.”

그녀의 말에 에단과 제이드가 그녀를 말렸다.

“전하께서 직접 추적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들의 힘은…… 상대하기 까다롭습니다. 추적은 다른 이에게 전담하시고 전하께서는 다른 귀족들과 합류하십시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가 전하와 동행하며 보호하겠습니다.”

케일론이었다.

그의 등장에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블린트 백작님? 어떻게 여기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라이어스 영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쓰게 웃었고, 에단은 시선을 거둬 다른 곳에 눈을 뒀다.

“난 추적에서 빠지지 않아.”

그때 세실리아가 단언했다.

“블린트 백작과 함께 탈리니아스와 안투스를 추적하겠다. 탈리니아스도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 있지 않을 거다.”

그녀는 조용히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었다.

“그 녀석을…… 안투스를 봐야 해, 반드시.”

가만히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케일론의 앞에 섰다. 그리고 머뭇머뭇 손을 뻗다 조심스레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댔다.

닿는 순간 생전 처음 느껴보는 온화함이 몸에 퍼지는 걸 느낀 케일론이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이제 마음대로 마나를 이용해 마검술을 쓰셔도 됩니다. 흑마법은 백작님께 위협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뒤로한 채 이번에는 세실리아에게로 향했다.

클레리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역시나 생소한 온화함이 그녀의 몸을 타고 퍼져나갔다.

“제 힘이 전하를 지켜드릴 거예요. 그러니 원하는 바를 이루고 오세요.”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는 어쩔 거지?”

“잔당을 제압하고 찾아야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누구?”

“또 다른 배후, 레리안 캄스턴입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해. 그리고 저항이 심할 시…… 처분도 허한다.”

그녀의 말에 에단도, 클레리아도.

자리에 함께한 모든 이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표정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평범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어설프고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황제,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가자, 블린트 백작. 안투스의 기운을 추적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케일론과 세실리아가 기사들 일부를 데리고 모습을 감췄다.

“제이드 님과 레오나 님은 칼리에 님을 모시고 서둘러 은신처로 귀환해 주십시오. 칼리스터 공작 각하와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께는 나머지 잔당 제압을 부탁드립니다. 리암도 그렇게 해 줘.”

“하지만 에단, 레리안을 추적하는 것에 함께 가는 것이…….”

“간청합니다!”

타이엔의 말을 에단이 가로챘다.

“간청드립니다. 그에 대한 추적은 제가…… 저와 클레리아가 하게 해 주십시오.”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타이엔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알았네. 자네가 정 그렇다면 그러도록 하지.”

그의 말에 엘빈이 놀란 듯 쳐다봤으나 곧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알았다. 조심하거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합류하도록 하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클레리아도 한쪽에 서 있는 라기에와 잇새에게 다가갔다.

“라기에 님도, 잇새 님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절명의 순간에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여러분이 없었다면 이렇게 있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러자 늑대의 모습을 한 라기에가 친근하게 주둥이로 클레리아의 얼굴을 슬쩍 밀었다.

“아미드(여자), 열쇠일 줄 알았다. 뮐족 모두가 알았다.”

클레리아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러분의 몫을 모두 해 주셨어요. 그러니 이제 안전한 부족의 품으로 돌아가세요. 나머지는 우리 라스칸트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정말 괜찮겠나? 아미드?”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키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에 라기에와 잇새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다.”

둘은 그곳에 있는 사람 주변을 몇 번 어슬렁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스스로를 잘 돌봐라.”

그렇게 말한 뒤 라기에와 잇새는 황궁 밖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클레리아가 에단의 곁에 섰다.

“에단, 레리안이 있는 곳에…….”

“엘레나도 있겠지. 아마도 말이야.”

클레리아가 흐리던 말을 에단이 마무리 지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아 어지럽게 얽혔다.

“가자. 마음 단단히 먹어.”

“알아.”

그렇게 두 사람은 알현실을 나섰다.

* * *

레리안은 몇 걸음 가다 멈추길 반복하며 벽을 붙든 채 숨을 골랐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제 의지가 약해질 때를 노려 자아를 앗아가려고 했다.

“설마 이게 그 흑마법의 부작용인가.”

아까 심상치 않은 검은 연기부터. 이건 분명 일라이의 정신 지배 흑마법이었다. 문제는 레리안, 그가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고.

일전에 엘레나에게 전달해 이슬레이터 가의 기사들에게 먹였던 가루 역시 안투스와 그가 협력해 만든 정신 지배 효험이 있는 약이었다.

그 약에 간혹 이상한 반응을 보이던 기사들이 있었다. 그저 부작용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들은제대로 약이 듣지 않아 혼란스러워하거나, 효과가 과해 적을 분간하지 못하고 눈앞의 모든 것에 공격성을 뗬다.

‘후자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지만…….’

그런 이들을 향해 자신이 자행했던 일을 떠올라 레리안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는 그런 기사들이 나타나면 하자품이라 부르며 즉결 처분을 명했었으니까.

그랬던 그가 하자품이라 부르던 이들과 처지가 같아진 것이다.

레리안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발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간신히 엘레나의 방 근처에 다다랐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앙칼진 목소리가 문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꺄아아악!”

콰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검이 꽂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이어졌다.

‘엘레나?’

레리안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단숨에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쾅!

“엘레나!”

문이 열리자 피 나는 팔을 붙들고 벽으로 바싹 물러난 엘레나와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꽂힌 검을 빼내는 타일러가 보였다.

“윈터펠로운?”

레리안이 중얼거렸으나 타일러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뽑힌 검을 서서히 들었다.

“하, 설마 네 녀석도 부작용에 걸린 거냐?”

평소 자아가 강하면 부작용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안투스가 흘리듯 말한 적이 있었는데.

레리안과 타일러. 둘 다 그쪽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네 녀석이 더 추하다는 건, 아마 지금의 네 꼴을 본다면 너도 동의하는 바겠지. 난 외려 감사해야 할 지경이군.”

스르릉

레리안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시선이 고정된 타일러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당장 거기 서요!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나 엘레나예요. 엘레나 이슬레이터! 날 모르겠어요?”

엘레나는 피가 흐르는 팔을 붙든 채 덜덜 떨었다.

검은 연기가 덮친 후 가 버린 아버지가 이상했던 찰나였다.

그때 타일러가 지키러 와 준 줄 알고 기쁘게 맞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부르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타일러는 자신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

“레리안! 제발 타일러를 좀 어떻게……! 꺄악!”

휘두르는 검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을 때 레리안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어딘가 아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타일러와는 달리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에게 가고 싶어도 중간에 타일러가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스칵!

다시 한번 검이 허공을 갈랐고, 몸을 뒤로 빼다 날에 다른 팔이 스쳤다.

쿵.

결국, 쓰러져버린 엘레나가 공포에 질려 타일러를 바라봤다.

챙강!

“……레리안.”

엘레나가 다시 위로 들리는 검을 막으려 팔을 들었을 때, 레리안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그의 검을 맞받았다.

“늦어서 미안하군요. 우리 본 지 좀 된 것 같은데…… 나 보고 싶었습니까?”

이런 와중에도 농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엘레나는 허탈한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가 온 것이 기뻤다.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와요? 빨리 그거나 앞에서 치워 줘요!”

카가각!

레리안은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며 타일러의 검을 멀리 밀어냈다.

“그러게 작작 좀 하지, 지독하게 미움 샀군. 뭐, 지금 같아서는 엘레나에게 그런 취급 받았다고 해도 전혀 모를 것 같지만.”

비아냥에도 타일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챙강!

다시 돌진해 들어오는 그의 검을 쳐내고 한 바퀴 돌아 그의 어깨를 베어냈다.

푸악!

타일러의 어깨에서 솟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쓸 수 없게 된 한쪽 팔을 늘어트린 채 다른 손으로 쥔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꽤 위협적인지라 레리안도 몇 번을 받아내며 피하고 다시금 검에 살의를 실어 내리쳤다.

서걱

챙강!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을 쥔 타일러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끔찍한 모습에 엘레나가 인상을 썼다.

처걱 처걱

팔이 잃었는데도 타일러는 멈추지 않았다. 더욱 기괴한 걸음걸이로 계속해서 다가왔고, 레리안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가 그쪽의 역할인 모양이야. 원망은 말라고.”

푸욱!

계속해서 다가오는 그의 가슴팍에 레리안은 그대로 검을 꽂아 넣었다.

가슴 한복판을 비집고 들어옴에도 시체처럼 계속해서 걸어 들어오던 타일러의 입가에서 한줄기 피가 흘렀다. 그리고는 천천히 무릎이 꺾이며 마지막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일라이의 흑마법에 영향받고 있던 레리안이었기에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고된 결투였다.

널브러진 타일러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레리안이 크고 느리게 숨을 골랐다.

“괜찮습니까? 엘레나?”

그가 돌아보며 묻자 엘레나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타일러를 노려보다 레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안도가 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리안은 빙긋 웃으며 엘레나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궁 내부에 일이 생겼습니다. 피신하는 게 좋겠어요.”

“아버지가…….”

앞서던 그가 돌아봤다.

“아버지가 이상했어요. 빨리 성을 나가라고 당부했고요. 게다가 타일러도 저렇게 이상하고. 큰 문제가 생긴 건가요? 그래요?”

재촉하는 물음에 그는 고통을 삼키듯 숨을 고른 뒤 엘레나의 뺨을 쓸었다.

“일단 당신이 안전한 게 가장 중요해요. 궁을 빠져나가면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죠.”

다시 끌어당기는 그를 엘레나가 유심히 바라봤다.

“레리안, 잠깐만요. 기다려 봐요! 어디 안 좋아요? 얼굴색이 나쁘잖아요!”

하지만 레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심 그녀의 걱정이 기쁘면서도 마음이 급해져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알현실 쪽에서 계속해서 커다란 기운들이 폭발적으로 방출됐었는데 지금은 조용했다.

‘이건 그쪽의 일이 정리됐다는 뜻이야. 문제는 우리 쪽에서 했느냐, 다른 쪽에서 했느냐는 부분이지.’

자신이 이렇게 된 것도, 타일러가 저 모양이 된 것도 보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피신부터 하고 말하죠. 자리부터 피합시…….”

엘레나를 달래던 레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복도 모퉁이 쪽을 노려봤다.

“왜 그래요?”

그녀의 물음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뒤쪽으로 엘레나를 숨겼다. 그리고 짜기라도 하듯 에단과 클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 어쩐지 기분 더럽더라니. 가장 싫은 불청객을 만나는군.”

“레리안…….”

에단이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마주했다.

“클레리아? 에단? 너희가 여긴 어떻게?”

엘레나가 질색하며 말했다.

대충 상황이 어떤지 아는 레리안과 달리, 엘레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눈앞의 상황만 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인 카이론은 이미 붙들렸다는 걸.

또한, 그녀가 잡히면 어떤 죄명을 받게 될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안 한 얼굴이었다.

아니, 붙잡힌다는 가정조차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대치한 상황에서 클레리아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엘레나, 이제 그만해. 그만둘 때가 됐어.”

“그만둬? 뭘 그만두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여전히 철부지 같은 태도에 에단 역시 만류했다.

“클레리아 말이 맞아, 엘레나. 그 어떤 걸 해도 이제 소용없어. 그러니 깔끔하게 포기하고 받아들여. 더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거 이거 오랜만에 재회한 친우들의 대화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구만.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두 사람은 아직도 엘레나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에만 열중하는 건가? 참으로 좋은 친구의 표본이야. 안 그래?”

레리안이 끼어들어 엘레나를 그들과 반대편으로 등 떠밀었다.

“갑시다. 저들과 더 대화해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곳을 벗어나려던 그때, 클레리아가 외쳤다.

“이슬레이터 각하가 체포되셨어.”

엘레나의 발이 우뚝 멈췄다.

“뭐라고?”

“각하는 반역죄를 물어 수감되셨어.”

“거짓말. 거짓말이야! 어디서 되지도 않는 주둥이를 놀려!”

그러나 클레리아와 에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불길함에 레리안을 바라봤으나 그 역시 이번에는 아무런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그랬나.’

심상치 않은 줄은 알았지만, 그까지 이미 잡혔을 줄이야.

내심 예상한 그와는 달리 엘레나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엘레나를 밀었다.

“레리안?”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가 돌아보자 레리안이 빙긋 웃었다.

“이제 숙녀는 물러나 주시죠. 멋있는 척은 저만 해야 하거든요.”

그는 엘레나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 속삭였다.

“최대한 몸을 숨겨서 궁을 빠져나가십시오. 정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엘레나. 지금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이슬레이터 각하가 체포됐습니다. 여기서 붙잡히면 우린 반역죄예요.”

레리안이 엘레나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저들에게 잡히면 사형이라고요. 알겠어요? 여긴 내게 맡기고 일단 몸을 피하세요.”

‘사형’이란 단어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가요.”

다시 한번 레리안이 그녀를 밀었고, 떠밀린 엘레나는 어렵사리 한 발짝 한 발짝을 뗐다.

죽기 싫어.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런 강한 마음이 그녀의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엘레나가 문득 레리안을 돌아봤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는 소리 없이 ‘어서 가요.’라 말할 뿐이었다.

애통함과 동시에 두려움이 엘레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레리안은 지켜봤다.

“너답지 않은 짓을 하는군. 당연히 엘레나를 버리고 먼저 도망칠 줄 알았는데.”

둘을 조용히 바라보던 에단이 말했다.

그러자 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네 녀석이 날 어떻게 봤는지는 상관없지만. 나도 나름 그녀 하나에게만은 멋지게 남고 싶어서 말이지.”

그는 들고 있는 검을 한 바퀴 돌려 단단히 바로 잡았다.

안다.

아무래도 여기가 나의 끝이겠지.

엘레나와 다시 함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혹여나 기회가 온다 해도 여기서 끝내야만 해. 그게 그나마 엘레나에게 갈 죄목을 더는 일이다.

그는 다시금 고통으로 얼룩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저 사람…… 제정신이 남은 것 같다 싶었는데, 역시 흑마법에 완전히 잠식당한 게 아니야.’

그때 레리안이 자세를 잡았다.

“엘레나를 추격하는 건 포기해. 내가 죽을 힘을 다해 막을 거거든.”

에단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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