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탈환.
처걱
갑옷을 팔목에 끼워 갖춰 입은 에단의 얼굴에 긴장과 비장함이 서렸다.
그들은 라기에와 잇새의 말에 따라 황궁으로 바로 진격할 채비 중이었다.
흑마법은 술식으로 방출되는 마나를 무효화시키는 성질이 있었으므로 순전히 마나를 체내에서 운용해 몸 자체를 강화해 보호하고. 마법을 자제하고 검술과 검기만 사용해야 했다.
에단과 리암을 제외한 소드 마스터 약 50명 정도가 그 방식에 익숙해져 이제 진격할 준비를 막 끝냈다.
“긴장되냐?”
역시 준비를 마친 리암이 물었고, 에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이번은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우리가 진입하는 순간, 탈리니아스 일족 역시 그걸 감지할 거야. 그렇게 되면 클레리아를 비롯한 안에 남은 이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부디 늦지 않길 바랄 뿐이야.”
낮게 읊조리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암이 입을 뗐다.
“혹시 프라이어스 영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 말에 장갑형 갑옷을 마저 끼던 에단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할 말을 찾는 듯 동공이 흔들리다 눈을 내리깔았다.
“양분했던 마나가…… 뭔가에 동요하고 있어. 공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심기가 어지러워진 것 같아. 내 마나까지 동요하는 걸 보면.”
그의 말에 리암이 에단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괜한 약한 생각 하지 마. 전세는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어. 전력이 늘고 있고, 저들이 예기치 못한 변수까지 생기고 있지. 에단, 프라이어스 영애는 반드시 구할 거야.”
그제야 리암을 바라보는 에단의 시선이 한없이 복잡했다. 이런 그를 보는 것이 처음인지라 리암 역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루더 백작령의 임무 직후, 에단과 클레리아는 오랫동안 극한 상황에서 떨어져 있었다.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런 그의 마음을 리암은 헤아렸다.
“네가 내 등을 맡아줘서 다행이야.”
에단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에 리암이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내가 네 뒤를 든든히 지킨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인정하지 않은 적 없어, 그저 표현이 박했던 것뿐이지.”
갑작스레 솔직해지는 그의 모습에 리암의 얼굴이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뭐 그리 서슴없이 해? 평소대로 해라, 평소대로!”
괜스레 쑥스러워진 리암이 헛기침을 하며 에단의 등을 퍽퍽 내리쳤고, 그제야 에단 역시 긴장감을 조금 내려놓고 웃을 수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케일론이 들어왔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의 말에 언제 장난쳤냐는 듯 두 사람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사들도 준비됐습니다. 뮐 부족과 치유사님들도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최정예로 꾸려진 라스칸트의 기사들이 그들을 맞았다.
“혹시 모르니 황녀님을 부탁드립니다. 블린트 백작과 칼리스터, 프라이어스 공작님들만이 가장 안전하게 그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병력만으로 괜찮겠습니까?”
“최우선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고, 탈환 여력이 된다면 하겠지만 무리는 안 할 겁니다. 안에 상황을 파악한 후, 다시 시일을 도모하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그 말에 케일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귀환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케일론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영애를 꼭 구출하십시오.”
그 말에 에단이 웃었다.
“당연하죠, 당연히 그럴 겁니다.”
히히힝!
여러 무리의 말 울음소리에 세실리아가 느리게 눈을 떴다.
에단과의 대화 후, 상황을 보고받은 그녀는 일단 며칠이나 밤을 새운지라 체력보충을 위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무리가 떠나는 듯한, 어딘가 심상치 않은 소리에 세실리아는 창밖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
전력이 상당해 보이는 일정 병력이 은신처 앞마당에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설마……?’
그녀는 다급히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블린트 백작!”
그녀가 빠져나가는 기사들을 배웅하는 케일론을 보고 소리쳤다.
“전하.”
그가 묵례했으나 세실리아는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지금 나가는 병력은 뭐지? 어디로 향하는 거냐?”
그녀의 물음에 케일론의 얼굴에 잠시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에단이 자신들의 출정을 알게 되면 세실리아가 따라오려 할 거란 걸 일렀기 때문이었다.
그 고집이 상당해 실랑이가 있을 테니 세실리아의 합류는 반드시 막으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거기에 세실리아는 이제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상황은 악화된다.
“그건…….”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세실리아가 다그쳤다.
“말해라, 어서!”
일갈에 케일론은 결국, 입을 열었다.
“에단경과 리암 경. 뮐 부족과 치유사 레오나, 제이드 님을 필두로 최정예 소드 마스터 기사들 오십 명이 궁으로 출정했습니다. 안에 남아 있는 아군 구출과 상황에 따라 황궁 탈환을 시작할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런……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나도……!”
“방해입니다.”
순간 더없이 싸늘하고 냉정한 케일론의 말에 세실리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지금 그렇게 감정만 앞선 상태로 함께 하시는 건, 그들에게 짐만 지우는 꼴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전하가 가셔도 전하는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멀어져 가는 에단의 등을 보는 것으로 너무 감정적이 된 것은 사실이니까.(자신이 감
‘정신 차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해. 네가 합류할 만한 조건과 이유를 만들어야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도. 그들을 지킬 수도 있어. 정신 차려, 세실리아 펠리시아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쥐고 거친 숨을 골랐다.
“블린트 백작, 지금 남아 있는 귀족들과 공작들을 회의실로 소집하도록. 지금 당장 수도 상황과 각 귀족의 병력과 상황을 확인해야겠다.”
그녀는 홱 돌아서서 서둘러 은신처 안으로 향했다.
* * *
책상에 앉은 카이론은 울컥이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올려진 서류명단을 눈으로 죽 훑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갈 때마다, 비통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내장이 뚝뚝 끊겨 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서류에는 지금까지 황궁 내에서의 일을 진압 도중, 또는 원인 불명의 이유로 사망한 이슬레이터 기사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보낼 인재들이 아니었다.
이런 일에 휘말려도 안 됐고,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명을 달리할 부하들이 아니었는데.
‘내 기사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나가고 있다. 이건 쓸모없는 소모전에 화살받이로 쓰이는 것과 다름없어.’
화를 억누르듯 떨리며 쥐어지는 그의 주먹을 따라 서류가 무참히 구겨졌다.
타이엔과 엘빈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비난도, 책망도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저 옛날처럼만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진정한 라스칸트의 공작 자격으로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적어도 논의라도, 도움이라도 요청할 수 있다면!
끝없는 후회와 자괴감이 몰려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너져내릴 뻔한 것을 버텼다.
오직 딸을 지켜야 한다는 그 못나고 추하게 변해 버린 부성애 때문에.
카이론은 숨을 크게 고르며 격해지던 감정을 추슬렀다.
물은 이미 쏟아졌고, 후회한다고 해서 어쩔까.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딸에게 달려들어 마음을 돌리지도 못한, 약해빠진 인간일 뿐인 것을…….
그는 명단과 지금 황궁 안팎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내 기사들도 기사들이지만, 황궁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다른 기사들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낮게 중얼거린 그가 주먹으로 입술을 꾹 누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수도를 장악하겠다고 이런 비정상 상태의 기사들이 그대로 나갔으니 엘빈과 타이엔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카이론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반드시 가까운 시일 내에 황궁 진입을 시도할 게 분명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이닥칠 텐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가 엘레나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저벅
안투스는 그를 신뢰를 하지 않는 건지, 카이론은 알현실과 황족이 쓰는 내궁 쪽의 출입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얘기를 몰래 종합해본 결과, 탈리니아스가 궁 내부로 잠입했다는 것을 알았다.
실로 경악했지만, 정작 엘레나는 그 일에 위험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을 재물 삼아 흑마법을 쓰는 탈리니아스의 무서움을, 그저 거사를 도운 동맹이므로 마냥 믿어 버리는 딸의 우둔함에 카이론은 땅을 쳤다.
그러나 저쪽의 반격이 예상되는 이상 더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저벅저벅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엘레나.”
방문을 열자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술을 마시며 유흥에 빠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한심함과 동시에 철없는 딸에 대한 답답한 부성이 마음 판에서 격돌했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레나,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무슨 소리세요? 아버지?”
살짝 취기가 돌았는지 그녀가 멍하게 물었다.
“곧 라스칸트 쪽에서 황궁을 되찾기 위한 반격이 있을 거다. 그건 굉장히 격렬한 싸움이 될 거고…….”
카이론은 엘레나의 팔을 붙들어 끌어당겨 귓가에 짜내듯 말했다.
“그들은 탈환에 성공할 거다. 우린 패할 거야.”
그 말에 멍하던 엘레나의 눈이 경직되었다.
“대체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죠?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은 처음 들어 보네요.”
그녀가 가볍게 웃어넘기려 하자 카이론은 강하게 다시 한번 딸의 팔을 붙들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 넌 패배할 거란 말이다. 그렇게 되어 붙잡힌다면…… 우린 죽는다.”
엘레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단호한 카이론의 얼굴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때였다.
카이론이 뭔가가 느낀 듯이 묘한 표정을 짓다가 알현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엘레나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향했고,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을 가진 빛이 맹렬한 기세로 뿜어지고 있었다.
* * *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날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쓰러지며 내는 기사들의 신음이 얽혔다.
입구에 가장 많은 기사가 포진해 있었으나 상상했던 것만큼 뚫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맹목적으로 끈질기게 달려드는 건 대부분 이슬레이터 기사단원들이었다. 그 외는 윈터펠로운 가와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었는데, 타이엔과 엘빈이 이끄는 기사단만큼 소드 마스터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항은 심했지만, 포기도 빨라 진영은 쉽게 무너졌다.
“이대로면 내궁까지 진입하는 것도 시간문제야, 에단.”
리암이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여긴 우리가 통제할 수 있어. 넌 할 일이 있잖아.”
“하지만 리암. 아직 완전히 내부까지 진입한 건…….”
그러나 리암이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넌 프라이어스 영애를 찾아야 해. 그게 더 급해.”
그 말에 라기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카미드. 우리가 돕는다. 그쪽은 치유사 구해라. 상황이 급해지면 우리 뮐족이 합류한다.”
그까지 나서자 망설이던 에단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주저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리암, 부탁할게.”
그의 말에 리암이 씩 웃어 보였다.
“무리하지 마, 절대로.”
“하라 해도 안 해. 나도 돌아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마지막 리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곧 다시 봐.”
에단은 그렇게 말한 뒤 돌아섰다. 그리고 계획대로 제이드와 레오나가 그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점점 더 요란하게 들려오는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에단은 애써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이 뚫어 준 길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
그는 서둘러 달리는 발에 박차를 가했다.
스칵!
순식간에 허공을 가른 검에 앞을 가로막던 네다섯 명의 기사들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앗!”
등 뒤에서도 세 명의 기사들이 나타났으나 마나로 신체 능력을 키운 에단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막아 냈다.
뒤이어 제이드와 레오나가 합류해 손쉽게 제압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두 사람이라 큰 전력이 됐다.
“어때요? 클레리아에게 양분해 준 마나의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나요?”
“알현실 쪽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경비를 서는 기사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고요.”
반격하려 꿈틀거리는 기사의 목에 칼을 찔러넣은 제이드가 다가와 낮게 말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기사들이 충원되는 기미가 보여요.”
“네, 저기 모퉁이만 돌면…….”
순간 에단이 눈을 부릅뜨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칼리스터 경?”
레오나가 급하게 비틀거리는 그를 붙들었다.
그러나 에단은 급격하게 치솟은 심장 박동과 거친 호흡에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예?”
레오나가 급하게 치유력을 흘려 넣으며 강제로 그를 안정시켰다.
간신히 진정된 에단이 숨을 고르며 입을 뗐다.
“마나가…… 어떤 거대한 기운에 휩싸여서 함께 공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격동하는 걸 느끼는 건 처음이에요, 윽…….”
버거운 듯 그가 신음을 흘렸고, 그런 그를 레오나가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바라봤다. 치료를 하려 해도 그의 몸 자체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명하는 마나가 문제였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레오나, 저기…… 저걸 좀 봐.”
그때 제이드가 그녀를 불렀고, 레오나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에단이 알현실이라 말했던 쪽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저건…… 치유력이야.”
알아본 레오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클레리아……!”
그들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에단이, 가슴을 움켜쥔 채 달리기 시작했다.
* * *
콰아아아!
처음에는 신기한 눈초리로 보던 알리시아도. 체면도 잊은 채 약간은 경외의 눈길을 보내던 일라이도 시간이 흐르자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아무래도 그들이 지닌 힘과는 상극이다 보니, 치유력을 가까이 두면 둘수록 불편하고 온몸이 옥죄는 듯한 불쾌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말없이 지켜보던 이아스 역시 미간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오직 안투스만이 마치 자랑스럽다는 양 빛 속에 자리한 클레리아를 보며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흡사 그녀의 폭주가 자신의 입지를 더 확실히 굳혀 주는 것 같달까.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 그쪽이 말하던 폭주 상태로 만들었으니 얼른 마비시키는 약을 먹여!”
알리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안투스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힘의 기세가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말이죠. 전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그는 품에서 파란 물약이 든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아스 경이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만?”
거만한 그의 말에 이아스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으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해도 그는 천천히 안투스 쪽으로 움직여 약병을 받아 들었다.
“힘을 내뿜고는 있지만, 무아에 빠진 상태라 아무런 저항도 못 할 겁니다.”
이아스가 점차 클레리아가 내뿜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엄청나군. 힘이 가진 기운만으로도 주변을 전부 압도하고 있어. 소드 마스터의 오러하고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내장이 뒤틀리듯 온몸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흑마법과 상충하는 힘이라더니, 거부감에 구역질이 나는군.’
온몸에서 이는 거부감을 이겨내며 클레리아의 앞에 선 그는 칼리에의 손을 붙든 채 무방비 상태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클레리아는 의식이 없는 듯 멍한 시선으로 칼리에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녀의 턱을 쥐었다. 클레리아의 고개는 너무도 쉽게 들렸다.
이아스는 천천히 턱을 눌러 입술을 벌리고 안투스에게 건네받은 약병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럴 리 없음에도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 클레리아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괘념치 않고 약병을 기울이던 그때.
콰콰쾅!
엄청난 소리가 나며 알현실 문이 터져 나갔다. 함께 날아간 벽면 파편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깜짝 놀란 이아스가 클레리아와 거리를 벌렸다.
알리시아와 일라이 역시 놀라 몸을 움츠렸고, 안투스는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카캉!
그들이 눈을 들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검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먼저 났다. 그리고 그 일격에 이아스가 알리시아가 있는 곳까지 죽 밀려났다.
“……?”
놀란 얼굴로 알리시아가 고개를 들자, 뿌옇게 인 흙먼지 사이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클레리아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정확히 그녀의 얼굴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에단이었다.
“레오나 님, 제이드 님. 클레리아와 칼리에 님을 부탁합니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박한 게 감히 어디다 그 무식한 걸 들이밀어?”
잔뜩 노한 알리시아의 몸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이 벼려진 것 같은 촉수가 뻗어 나갔다.
콰창!
정면으로 찔러 들어온 촉수가 에단의 검날에 막혔다. 더불어 측면으로 들어오던 또 다른 촉수는 체내의 마나를 강화해 보호막으로 변형시켰던 제이드의 몸에 튕겨져 나갔다.
솔직히 통할지 의문이었던 탓에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가 안도했다.
당황한 건 알리시아 쪽이었다.
지금껏 흑마법이 이렇게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다시 한 번 촉수를 휘둘렀다.
캉! 카캉!
에단이 검을 휘둘러 거의 모든 공격을 쳐냈고, 제이드와 레오나 역시 그녀의 공격이 통하질 않았다.
“왜…… 왜 통하질 않지? 이 천한 것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내 힘이 통하질 않느냔 말이야!”
발악하듯 지르는 소리에 에단의 입가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너희가 무슨 배짱으로 라스칸트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그 순간이었다.
챙!
갑자기 달려든 이아스 공격을 에단이 받아 냈다.
“상대를 제대로 골라야지.”
그의 말과 동시에 에단과 이아스의 칼부림이 시작됐고, 제이드와 레오나가 클레리아와 칼리에를 데리고 뒤로 빠졌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때 다시금 알리시아의 촉수가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사정없이 휘두르는 것은 물론, 주변의 집기와 가구들까지도 마구잡이로 그들에게 던져졌다.
늘 지켜보는 태도를 고수하던 일라이까지 힘을 방출해 합세했다.
늘 알리시아의 강력한 힘에 마무리되어 그가 나설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조바심내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스물 스물 기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제이드 일행을 덮쳤다. 그러자 온갖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이 두 사람을 잠식하며 정신을 뒤흔들었다.
푸슉!
집중이 흐트러지자 몸을 보호하던 마나 보호막에 틈이 생기는 것을 알리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파고들었고, 레오나와 제이드 역시 날아드는 촉수와 정신 공격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격렬한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안투스는 혼이 빠져나가 구석에 몸을 웅크려 피했다. 아니, 사실은 겁에 질려 있었다. 늘 은밀하게 움직이던 그에게 이렇게 극렬한 싸움에 휘말릴 일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황궁 안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그가 이런 상황이 익숙할 리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가 어찌할 바 모를 때 알리시아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이 멍청한 게! 대체 뭘 하고 앉았어! 네 독을 쓰든 뭐라도 해!”
그러나 안투스는 인상만 쓴 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그런 안투스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저리 못난 꼴이라니!
그러나 그 때문에 그녀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레오나와 제이드는 클레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말을 걸었다.
폭주를 멈춰야만 했으니까.
“클레리아. 클레리아, 정신 차려요. 힘의 방출을 멈춰요. 칼리에 님은 괜찮아요. 다시 제대로 치유하면 돼요! 그만 해요!”
“클레리아,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나 좀처럼 그녀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발견한 알리시아는 공격 노선을 바꿨다.
어찌 됐든 이아스와 맞붙고 있는 저 에단이란 자만 없애면 나머지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알리시아의 공격이 이아스와 가세했고, 에단은 갑작스레 늘어난 공격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쓸 수 없는 것이 타격이 컸다.
동시에 정신 압박을 여전히 일라이가 제이드와 레오나에게 걸고 있었으므로, 양쪽 다 조금씩 전세가 기울어갔다.
푸악!
결국, 알리시아의 촉수가 에단의 얼굴을 스쳤다.
터진 상처를 타고 핏방울이 튀었다.
“클레리아!”
“클레리아 치유사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다급한 외침에도 여전히 그녀는 도통 반응할 줄 몰랐다.
“클레리아!”
그 순간 커다란 에단의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알리시아도, 일라이도. 이아스와 안투스까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야.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거 알면 가만히 있을 네가 아니잖아! 돌아와.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네가 있어야 해! 있어 줘야만 해!”
“에……단?”
흔들어도, 뺨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던 클레리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빛을 잃은 채 흐렸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에단!”
이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간절히 그리고 그렸던 그 이름을, 분명하고 똑똑히 그녀가 외쳤다.
* * *
어둡고 공허한 공간.
따스하면서도 쓸쓸하고, 텅 비었지만, 꽉 차 있는 곳이었다.
클레리아는 익숙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예전 처음 회귀 때도 느꼈고, 첫 폭주를 했을 때도 느꼈던 공간이었다.
‘또 온 건가.’
몸도 생각도.
느껴지는 모든 것이 나른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의욕도 솟지 않았고, 늘 어딘가 얼이 빠진 느낌이었다.
<또 만나는구나.>
예의 그 목소리가 클레리아를 맞았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여기에 오는 것 같네요.”
<좋지 않은 일이라 여기니 조금은 서운한걸. 하지만 여길 계속 찾아오는 것도 네가 아니더냐?>
내가?
내가 이곳을 계속해서 찾아오는 거라고?
이해되지 않아 클레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네게 모든 걸 주었는데 일이 생길 때마다 도망쳐 오는 건 너로구나.>
순간 클레리아는 가슴 한구석이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에요. 소중한 사람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
공간 너머에서 들려오던 다정하고도 온화한 목소리는 침묵했다.
“저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 때문에 누군가가 다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보고 싶지 않았다고요.”
늘 이곳에서는 어떤 감정도 일지 않을 것처럼 정적이기만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전혀 달랐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어지는 이 끔찍한 광경들을 봐야만 하는 건지.
<예전에도 그렇게 말한 아이가 있었지.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아이였어. 유일한 내 벗이자 수족이었지.>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함을 담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겐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던 쌍둥이 형제가 있었단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체계를 잡은 후,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 나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혼돈을 퍼트렸지.>
클레리아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말려도,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지. 사랑하는 형제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날이 괴로움만 더해 갔어. 그런 날 보고 벗이었던 그 아이가 말했단다. 자신이 나 대신 내려가 그것을 막겠다고 말이지. 그래서 내 힘을 나누어 주고 인간들에게 보냈다.>
그때 캄캄한 공간에서 서서히 아주 작은 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서서히 그 크기가 커졌다.
어둠을 삼키고 잠식하듯 커진 빛은, 사람의 형상이 되어 천천히 클레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빛이 무던히도 찬란하고 따스해 눈이 부셨으나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혼돈을 결국 몰아냈다. 소명을 마치고 그 아이는 내가 인간들의 의지를 믿었던 것처럼 그들 틈으로 녹아들어 더 간섭하지 않으려 사라졌지.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인간들 사이에서 환생했고, 나는 기뻤다.>
빛의 일부가 마치 사람처럼 손을 뻗어 클레리아의 얼굴에 닿았다.
<그러나 늘 선하기만 하던 그 아이는 모함에 빠져 죽고 말았지. 잠재웠던 내 형제가 재기하려 하던 여파에 휘말리고 만 거야. 그것이 방관자이던 내가 마음을 돌린 이유란다. 넌 약하지 않아. 네게 모든 걸 주었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면 돼.>
툭, 투둑
이상했다.
전혀 상관도 없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설디낯선 이야기일 뿐인데 어째서 이리도 눈물이 나는 거지.
뺨에 닿은 그 빛이 너무도 살갑고 그리운 느낌이었다.
클레리아는 그것을 붙들고 오랫동안 참아 왔던 울음을 터트리듯 하염없이 흐느꼈다.
<넌 잘하고 있어. 내 바람은 오직 네 행복뿐이란다.>
[클레리아!]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멀리. 아주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듯 공간을 울렸다.
<널 부르는구나. 이제 가 보렴.>
그렇게 점차 멀어지며 붙들고 있던 빛이 천천히 클레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
아주 어렴풋이.
흐리고 흐린 기억 속에 누군가를 향해 ‘르누엘룻 님!’이라 부르며 들꽃을 꺾어 내밀던 아이가.
그리고 그것을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누군가의 모습이.
마치 눈을 뜨면 바로 사라질 것 같은 꿈처럼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고마워요.
목이 메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차마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멀어지는 빛에게서 돌아섰다.
“에…… 단.”
나 여기 있어.
꽉 잠긴 것처럼 막힌 목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
클레리아는 있는 힘껏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을 굴렀다.
“에단!”
* * *
검을 맞부딪치고 있는 이아스의 눈이 흔들렸다.
분명 조금 전 약을 먹이려 할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작 이 녀석이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신이 돌아왔다고?
여전히 엄청난 치유력을 뿜어내면서도 클레리아는 레오나의 부축을 받아 서서히 일어섰다.
그것을 본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클레리아! 폭주를 멈춰요!”
제이드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녀는 지금 막 정신이 든 사람치고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제이드와 레오나를 다독였다.
“폭주는 이제 내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며 클레리아가 에단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온화한 기운을 가진 치유력이 그를 감쌌다가 사라졌다.
“마법을 써, 에단.”
“하지만……!”
“날 믿어.”
그 말에 에단이 몸을 강화했던 마나를 일순간 폭발시키듯 방출하며 검을 휘둘렀다.
콰앙!
엄청난 검기와 오라가 뒤섞여 일대를 휩쓸었다.
“쿠억!”
검을 맞대고 있다 그대로 맞은 이아스가 밀려난 채 피를 게웠다.
알리시아와 일라이. 안투스도 그 위력에 /휩쓸려(첨가)/ 바닥을 굴렀다.
“마, 말도 안 돼. 갑자기 이게 말이 돼? 역시 살려 두는 게 아니었어!”
입가에 흐르는 피를 거칠게 문지른 알리시아가 소리 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많은 수의 촉수가 뻗어 나와 순식간에 클레리아에게로 향했다.
콰창!
그러나 마검술을 쓰기 시작한 에단에 의해 모조리 막혀 버렸다.
방출되는 마나의 틈으로 알리시아가 미친 듯이 촉수를 휘둘렀으나 소용없었다. 파고들 새도 없이 클레리아의 치유력에 그것조차 메워지고 있었다. 마나의 빈틈마저 치유력이 재생시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이 안 돼! 마나까지 재생한다고?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절규하던 알리시아가 순간 말을 멈췄다.
오래전 선왕이 죽기 전에 했던 초대 치유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괴물.
말 그대로 괴물이라 했다.
탈리니아스 일족이 어떻게도 손써 볼 수가 없는 괴물이었다고.
그랬기에 치유사는 멸족시켜야만 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껏 초대 치유사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었는데!’
탈진 상태가 되어 그녀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시선을 맞받고 있는 클레리아는 여전히 폭주 상태임에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멸하는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단죄하듯 바라봤다.
“감히…… 감히 너 같은 천한 것이 날 그런 눈으로 봐?”
히스테릭한 절규와 동시에 알리시아의 몸에서 수십 개의 칼날 촉수가 산지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창문을 부수고 벽을 긁으며 일제히 클레리아에게 향했다.
콰창!
혼신을 담은 일격이었으나 그뿐이었다.
에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마나 쉴드에 부딪쳐 접근조차 못 하고 막혀 버렸다.
“이건 거짓말이야.”
알리시아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가 제이드와 레오나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일순 뭔가 흘러드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치유력이 요동쳤다.
“두 분도 이제 마나를 자유로이 쓰셔도 될 거예요. 칼리에 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세요.”
“하지만 두 사람만으로 여길 어떻게 버티려고요!”
“칼리스터 경과 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감히 싸우는 와중에 한눈을 팔아? 우리가 우습게 보여?”
일라이의 몸 주변으로 새카만 오러가 모여드는가 싶더니 곧 엄청난 크기의 기둥이 되었다. 기둥은 솟구쳤다가 순식간에 온 사방으로. 황궁 내부로 퍼져 나갔다.
“일라이!”
“공격해, 알리시아.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알리시아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불렀으나 그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결국, 이를 으득 간 알리시아가 다시 한번 촉수를 휘둘렀다.
그때였다.
쿠르르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려 댔다.
무서운 기세로 점점 다가오던 굉음은 곧 알현실 벽 한 면이 와르르 파열음으로 뒤바뀌었다.
연기에 몸을 움츠렸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자 먼지 사이로 엄청난 열기를 뿜어 대는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라기에 님?”
클레리아가 놀란 듯 소리쳤고, 곧 집채만 한 몸집의 늑대와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단 한 번. 그대를 구한다고 약속했다. 약속 지키러 왔다.”
느닷없는 등장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클레리아와 안면이 있는 걸 알아차린 알리시아가 그들을 공격했다.
“크와아!”
쩌렁쩌렁한 울음소리와 함께 라기에의 꼬리가 알리시아가 휘두른 촉수를 쳐냈다.
티끌만 한 상처 하나 없는 모습에 알리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둠에 사로잡힌 자들의 힘,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섬뜩한 그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라기에의 좌중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렸다.
그냥 듣기만 해도 고압적인 터라 알리시아와 일라이의 기세 역시 꺾여 들었다.
그때였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의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와 검을 휘둘렀다.
일라이의 힘에 정신지배를 당한 기사들이었다.
그 덕에 클레리아 일행은 탈리니아스 일족에게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하십시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이아스.”
일라이를 부축하는 알리시아에게 이아스가 말했다.
“무사하십시오.”
그는 짧게 말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알리시아는 일라이를 부축해, 구석에서 넋이 나가 있는 안투스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당장 피신할 곳으로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