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각자의 자리.
갑작스럽게 등장한 뮐족으로 은신처는 급격히 술렁거렸다.
뮐족의 남다른 외모에 관심이 집중됐다.
“누가 왔다고?”
그때 소식을 듣고 다급히 달려온 레인과 아리스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라기에 님! 잇새 님!”
지금 보고 있는 걸 못 믿겠다는 듯 레인이 반가움에 소리쳤다.
그를 본 라기에 역시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카미드(남자). 아직도 아미드(여자)라고 속이고 있나?”
그의 말에 급하게 레인이 달려가 라기에의 입을 막았다.
“그, 그 오해는 이미 다 풀었거든요. 다른 분들도 계시는데 부디 그 흑역사는 좀 넣어 주세요.”
그가 타이엔의 눈치를 보며 소곤댔다.
타이엔의 딸인 클레리아가 크게 속았던 것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에단이 레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라기에에게서 떼어냈다.
“회포를 풀면 좋겠지만, 일단 상황이 상황인지라. 잇새 님, 라기에 님.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시죠.”
그들은 부족장인 잇새와 통역을 담당하던 라기에를 데리고 옆 방으로 이동했다.
“여기까지는 어찌 오신 겁니까? 마을은 괜찮은 겁니까?”
라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뮐 부족, 걱정할 것 없다. 우린 조상이 지켜 주지만, 너희는 없다. 너희야말로 걱정해야 한다.”
그 말에 에단이 쓰게 웃었다.
“와 주신 건 감사하지만, 상대는 숫자가 많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익숙지 않은 힘을 사용하고 있고요. 쉽사리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에 라기에가 잇새에게 무어라 말을 전달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일단 안면이 있는 리암과 에단에게 맡기고 엘빈과 타이엔은 뒤로 빠져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것을 지켜봤다.
또한, 물수건을 받아 몸을 닦던 제이드와 레오나 역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우리 이미 알고 있다. 어둠에 사로잡힌 놈들, 이 땅 곳곳에서 날뛰고 있다.”
“어둠에 사로잡힌 놈들?”
리암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라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나라 생기기 전에 그놈들이 오랫동안 땅과 영혼을 파괴했다. 그냥 두면 안 된다.”
그 말에 에단이 돌아서서 타이엔과 엘빈을 바라봤다.
라기에의 말인즉, 뮐 부족 역시 바알리시안이 흑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흑마법을 사용하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라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상이 그들과 싸웠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많은 군대 없었다. 그래서 부족민 지키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에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들 조상이 바알리시안과 싸웠다고요? 흑마법을 상대로?”
마법을 쓰는 그들조차 고전하고 있는데 드루이드의 힘만 가진 뮐 부족이 바알리시안을 상대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 말에 라기에가 씩 미소지었다.
“그들의 힘 우리에게 안 통한다. 그래서 어둠에 사로잡힌 놈들이 우리를 없애려고 끈질기게 추적했었다. 그때 많은 부족민을 잃었다.”
대답을 들은 에단이 급하게 라기에의 팔을 붙들었다. 그들의 부족을 없애기 위해 바알리시안이 혈안이 되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급해진 건 다른 부분이었다.
“흑마법이 당신들에게는 안 통한다는 겁니까?”
“우리에겐 완전히는 아니고, 한시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들과 우리가 쓰는 힘의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놀라움이 뒤섞인 감탄사가 에단의 일행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느낌이었다.
기쁨에 에단과 타이엔이 시선을 교환할 때, 라기에가 에단의 팔을 붙들었다. 꽤 단단히 잡는 통에 에단이 흠칫 그를 돌아봤다.
잇새가 라기에에게 뭔가를 말하자, 라기에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 한다. 그때 그 치유사, 아미드. 빨리 구해야 한다.”
그의 말에 에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클레리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녀가 황궁에 잡혀 있는 것까지 아신 겁니까?”
그 말에 라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미드가 이 일의 열쇠다.”
그의 말에 순간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 * *
감금을 위해 도착한 방을 보고 클레리아는 턱 막히는 숨을 애써 골랐다.
이아스가 데리고 온 곳은 또다시 안투스의 방 옆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안투스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당신들 정말 악취미네요. 이렇게까지 날 안투스 곁에 묶어 두려는 이유가 뭐죠?”
클레리아가 앙칼지게 물었다.
이아스가 손을 들어 경비병을 물리며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싫은가? 전하께서 이미 황태자가 그대를 반려로 맞고 싶어 한다고 알려 주셨을 텐데.”
“그런 거 좋을 리도 없고, 할 리도 없어요.”
그 말에 이아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하긴 나라도 그런 놈의 반려는 사양할 것 같군.”
그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배회했다.
‘역시…….’
그것을 빤히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던 것이 맞았음을 알았다.
에단의 마나 방어막에 찢겨 나간 그의 손이 멀쩡했던 것이다.
“손…… 멀쩡하군요.”
“그래서 실망인가?”
“조금은요?”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내는 모습에 이아스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도 당돌하다 느꼈는데 지금 보니 여전하군. 아니, 외려 더 겁이 없어진 건가? 하긴, 남의 저택을 오밤중에 홀로 뒤지고 다니던 걸 생각하면 처음부터 겁이 없었던 것도 같군.”
클레리아는 숨을 죽였다.
사실 놀라고 있는 건 그녀였다.
늘 검부터 뽑아 낼 것처럼 살벌한 기운을 풍기던 이아스가 이렇게 순순히 대화를 이어 갈 줄 몰랐으니까.
“왜 하필 지금이죠? 왜 하필 이때 라스칸트를 침공한 거예요?”
“바알리시안과 라스칸트는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다. 라스칸트의 건국 시초 자체가 그렇지 않던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
“아뇨.”
클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의 방식은 이상해요.”
이아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 한쪽을 말아 올렸다.
“이상할 게 뭐가 있지? 우리도 여력이 안 되면 게릴라 작전을 펴는 거지.”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름 호의적으로 대꾸하던 이아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당신들의 주군인 탈리니아스가 자존심이 엄청나게 세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죠.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의 황태자와 손을 잡고, 옆 제도의 왕자가 한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이상한 일이잖아요.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면서도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그리도 쉽게 손을 잡았죠? 너무도 충동적이고 급작스러운 결정이잖아요. 결코, 탈리니아스답지 않은…….”
“…….”
그녀의 말에 이아스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납게 눈을 번뜩일 뿐.
“시대가 변했다고만 해 두지. 그보다 이제 정말 당신이 걱정해야 할 거리가 왔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투스가 호위병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클레리아의 어깨 또한 흠칫 떨렸다.
“어차피 저자는 당신의 몸에 손댈 수 없으니 잘 살아남아 봐.”
비웃듯 말하고 떠나는 그는 안투스에게 짧게 묵례하고 방을 나섰다.
여유로운 척했으나 방에서 벗어난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탈리니아스답지 않다? 하, 우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 * *
이아스와 클레리아를 번갈아 보던 안투스가 호위병을 물렸다.
“무슨 얘길 했지? 탈리니아스 대공이 대화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데.”
“……대공이라고요?”
“그래, 그는 탈리니아스 대공이다.”
‘방계…… 였구나, 어쩐지.’
묘하게 이아스에게서도 알리시아와 일라이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전하, 절 감옥으로 보내 주세요. 아니면 외진 탑 꼭대기라도 좋아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두세요.”
안투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불편한가? 꽤 아늑하게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어차피 전 인질이니 그에 맞는 곳에 있겠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대는 인질이 아니야. 엄연한 우리 사람이지.”
그 말에 클레리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제가 그쪽 사람이라고요? 천만에요. 전하야말로 착각하고 계시네요. 전 단 한 번도 그쪽에 선 적 없습니다.”
안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 네게 좋을 텐데…….”
“전하야말로 정신 차리세요!”
클레리아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가 제발 제대로 알아차리길 바랐다.
아까 알리시아와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라스칸트가 완전히 무너지고 바알리시안이 들어섰을 때, 안투스의 입지는 없어진다.
그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는 건…… 처분뿐이다.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왜 안투스는 모르는 거지?
“뭣 때문에 그렇게 바알리시안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후계자 전철만 밟으셨다면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셨을 거예요, 왜 그 복을 스스로 차시냔 말입니다!”
“나는 그 불결한 핏줄이 아니니까!”
거칠고 갈라진 안투스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핏줄이 아니라고?’
클레리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안투스는 분명한 누에른과 과거 1황후의 후손이다.
핏줄이 아니라는 건 대체?
그때 안투스는 퀭하고도 날이 선 시선으로 클레리아를 노려봤다.
“난 그 망할 놈의 핏줄이 아니야. 고결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탈리니아스. 그것이 나의 핏줄이다.”
황당함 그 자체였다.
그들과는 피가 1도, 어느 접점도 없는 안투스가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안투스는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 뜯듯 쥐었고, 그의 머리칼이 순식간에 손에 딸려 사라졌다.
“……!”
이어진 끔찍한 몰골에 클레리아가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투스는 그간 가발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벗겨진 가발 아래로 참상이 펼쳐졌다.
두상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울퉁불퉁했고, 머리카락은 죄 빠져 있었다. 군데군데 남아 힘없이 늘어진 몇 가닥이 오히려 더욱 그를 더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그동안 유달리 퀭하고 비쩍 마른 몰골도.
가발을 써서 저런 참상을 가려야만 했던 이유도.
클레리아는 서서히 알아차렸다.
독.
그것 때문이었다.
지독한 독을 제조하며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해 망가진 것이다. 독 제조 밀실에서 뿜어지는 유독 가스에도 그가 멀쩡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레리아의 경악은 상관없는 듯 안투스는 책장으로 가 숨겨 두었던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건……?”
한눈에도 아주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알 수 있는 백발 가발이었다.
안투스는 그것을 몇 번이고 조심스런 손길로 쓸어내리다 아주 경건하게 천천히 들어 올려 머리에 썼다.
“나는 탈리니아스의 핏줄이야. 사정이 있어 이 지옥 같은 펠리시아스의 이름에 갇혀 있었을 뿐이다.”
미쳤다.
안투스는 제정신이 아니야. 진작 미쳐 버렸어.
알리시아가 혀를 차며 제정신이 아니라 했던 게 이 뜻이었나?
그렇다면 그들은 더더욱 바알리시안을 건국하고 안투스를 살려 둘 생각이 없을 것이다. 같지도 않은 오점 같은 인간이 자신들과 같다고 떠들어 대는 걸 참아 줄 리 없으니까.
안투스는 비쩍 마른 거죽 아래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는 몸을 흔들며 무언가를 느끼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과대 망상과 피해 망상에 빠져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던 안투스는 독의 부작용까지 더해져 완전히 미친 게 분명했다.
‘라스칸트가 이리된 건…… 저 사람의 저런 모습을 진작 간파해 내지 못한 우리 탓일지도 몰라.’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양팔을 벌린 채 그 순간에 취해 있던 안투스가 서서히 눈을 떠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바알리시안이 재건국되면 우리는 그대의 정신을 붕괴해 능력만 이용할 생각이야.”
잘못 들은 걸까?
정신을 붕괴해?
클레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정신을 붕괴해서 능력만 이용한다니. 최면이라도 걸겠다는 건가요?”
그 말에 안투스가 씨익 웃어 보였다.
“말 그대로 산 시체를 만들어서 치유력만 뽑아 쓰겠다는 거지. 내가 제안한 일이긴 하지만 정말 기발하지 않아? 내게 지금 잘 보여야 그 사태를 좀 더 미룰 수 있을걸?”
인제 보니 안투스 역시 사람 버러지로 아는 건 일라이와 알리시아 못지않았다.
클레리아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반려로 삼겠다, 어쨌다고 말씀하시더니 하는 짓은 파렴치한이 따로 없으시군요.”
가시 돋친 말에도 동요하는 법 없이 안투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왜 널 반려로 삼겠다고 했을 것 같나? 그대에게 관심이 있어서? 천만에. 그간 넌 황족도 건들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이제 더는 아니지. 내가 손대지 못하는 건 세상에 없다는 걸 보여 주는 것. 넌 그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냐, 프라이어스 영애.”
충격을 받은 클레리아가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것을 본 안투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산송장 되는 걸 조금이라도 유예시키고 싶다면 내게 대하는 태도를 신중히 해야 할 거야. 프라이어스 영애.”
탁
그 말을 끝으로 하얗게 질린 클레리아를 남겨 둔 채 문이 닫혔다.
* * *
똑똑
문을 두드렸음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다.
에단은 혹시 몰라 잠시 기다려 봤으나 여전히 정적만 맴돌자 짧게 한숨을 내뱉고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해가 중천임에도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란 커튼은 다 처져 있고, 오랫동안 방문이 꼭꼭 닫혀 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답답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부유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겁니까? 적어도 황궁을 벗어난 것은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요.”
에단이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밝은 햇살이 쏟아져 방을 밝혔다.
그가 침대 쪽으로 향했으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늘도인가.’
그는 이미 익숙한 듯 소파 뒤쪽의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으로 향하자 붉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세실리아가 몸을 말고 웅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씁쓸히 내려다보던 에단은 그녀에게 키를 맞추려 무릎을 꿇었다.
“아침도 제대로 안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식사를 준비시킬 테니 점심은 좀 챙겨 드십시오.”
“그 아이를 두고 왔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어 들린 세실리아의 얼굴은 침울함이 가득했다.
“바로 코앞이었는데. 함께 나올 수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남겨 뒀어.”
“대신 클레리아가 필사적으로 전하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에단의 말에 세실리아의 눈이 흘긋 그에게로 향했다.
“클레리아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전하가 충분히 나올 시간을 버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덤덤히 말하며 에단은 그녀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세실리아는 구출된 뒤 제대로 된 목욕이나 정돈을 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팍!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받자마자 에단의 가슴팍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원망해! 나 때문에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고 탓하고 질책하란 말이다! 그렇게 참고만 있지 말고 제발 그렇게 하라고! 내가 네 녀석 앞에 조금이라도 면목이 설 수 있게…….”
세실리아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클레리아가 탈출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에단과 클레리아의 사이를 잘 알고 있던 터라 그 죄책감은 더욱 심해 보였다.
에단은 바닥으로 떨어진 물수건을 묵묵히 바라보다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하면 좀 편해지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지금 맘 편히 계실 상황이 아닙니다. 죄책감이나 자신의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생각조차 사치죠.”
그의 말에 세실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단순히 전하와 제 감정을 풀기 위해서라면 말씀대로 해 드릴 수 있지만, 전하는 지금 위치를 자각하셔야 합니다. 안투스 황태자가 반역을 일으켰기에 중앙 귀족들은 세실리아 전하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전하께서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세실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이 복잡해진 그녀의 시선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클레리아는 다음 황제를 구한 겁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자신의 잘못만 자책하고 계실 겁니까?”
에단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클레리아가 남겨진 게 전하의 탓이라고 여기시겠지만, 어찌 됐든 구하지 못한 건 접니다. 전 남을 탓할 여유가 없어요. 클레리아 역시 알면 허락하지 않을 거고요. 제가 전하께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이제 위치를 제대로 자각하시고, 우리를 이끄십시오. 당신의 수족으로 움직일 준비는 끝났습니다.”
“에단…….”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도 구하지 못한 부하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다시 구하러 가면 되지 않습니까?”
세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지 너희에게 이걸 다 어찌 갚을지…….”
그녀는 몇 번의 큰 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한참 만에 뜬 그녀의 눈은 다시 예전의 카리스마를 그득히 머금은 채였다.
“지금 우리의 병력 상황은?”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은 에단이 답했다.
“각 귀족들의 병력이 은밀히 집결 중입니다. 다만 안투스를 따르는 기사들이 이제 황궁을 벗어나 수도의 제국민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으므로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최대한 빨리 황궁을 탈환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작게 쪼개진 무리라면 합류하거나 접근하기도 전에 쳐내질 가능성도 있어.”
“압니다. 그러니까 시선을 잡아끌 미끼가 필요하죠.”
“미끼?”
세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여기엔 뮐 부족이 와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날에 황궁으로 정예 부대가 잠입할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뮐 부족이라고? 내가 모르는 새에 대체 무슨 일이 이뤄지고 있는 거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실리아가 물었다.
그러자 에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뮐 부족에게는 녀석들의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라면 황궁.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클레리아를 탈환할 수 있습니다. 잠입하게 되면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를 구해야 합니다. 뮐 부족에 말에 의하면…… 클레리아가 이 모든 일의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세실리아의 입술이 놀라움에 작게 벌어졌다.
* * *
‘대단하군. 실로 매혹적이고 기이하며 파괴적이야.’
사이러스는 아직도 내뿜은 힘의 여파로 웅웅거리는 팔찌를 바라봤다.
그것은 일라이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흑마법을 지니지 않거나 배우지 않은 자도 흑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그들의 라스칸트 입성을 돕는 대가로 흑마법에 대한 정보 교환과 힘의 사용을 위해 받은 것이었다.
이로써 사이러스는 애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게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지니지 않은 힘을 사용하는 것인지라 몸에 부담은 갔지만.
그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시체들과 곳곳에 흩뿌려진 피 가운데 그가 서 있었다.
시신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사이러스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한 사람 앞에 섰다.
눈도 못 감고 숨을 거둔 그의 눈에는 아직도 채 흐르지 못한 눈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발로 툭 건드린 사이러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1왕자는?”
그의 물음에 어디선가 나타난 그의 하수인이 고개를 숙였다.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폴린 왕자가 작정하고 도피시킨 듯합니다.”
대답에 사이러스는 못마땅한 듯 뿌득 이를 갈며 입술을 틀었다.
‘뭐, 이 광경을 봤으니 돌아올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 당분간은. 일단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나.’
그가 생각을 곱씹을 때 하수인이 뒤에서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지?”
사이러스가 불쾌함을 담아 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와, 왕자님의 직속 기사단으로 수도 입성이 수월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본 후, 우릴 따르는 귀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조금…… 이질적이니까요.”
사이러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빈정거렸다.
“대업을 이루는 와중에 고작 그까짓 일로 내 심기를 건드는 건가?”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그의 말에 사이러스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잠시 주눅이 들었던 하수인이 크게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수도 입성 때는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지금 그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사이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거나 간혹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계속해서 빠르게 증가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의 말에 사이러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궁 안에서 어떻게든 버티던 1왕자 라말과 3왕자 폴린을 습격해 몰아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아직 서 제도에는 저항 세력이 많았다. 정권교체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에 손실이 생기는 건 좋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고 있는 기사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해서 보고해라.”
“알겠습…… 전하? 괜찮으십니까? 손이…….”
그의 말에 사이러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팔찌를 낀 손이 저릿저릿하다 싶었는데 군데군데 검은 반점이 생기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손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던 사이러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저릿함을 떨치려는 듯 손을 몇 번 세게 쥐었다가 피고는 하수인을 바라봤다.
“탈리니아스 왕가의 일원은 알리시아와 일라이, 이 둘이 전부던가?”
“대공인 이아스 탈리니아스를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
대답을 들은 사이러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유혈이 낭자된 사이에서 깊은 고뇌에 빠진 그의 모습은 섬뜩했다.
“그들은 지금 라스칸트에 있을 테니 바알리시안 내부에 주요 인물은 빈 채라고 보는 게 맞겠군.”
“왜 그러십니까?”
하수인의 물음에 사이러스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당장 최소 인원으로 정예 부대를 꾸려라. 바알리시안으로 보내야겠다.”
오랜 시간 나라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탈리니아스 왕가였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허하지 않았던 그들이 자신과 안투스의 손을 잡은 건 왜일까.
지나칠 정도로 그들을 경외하며 빠져 있는 안투스에게 단순히 감동해 그럴까?
자신과는 득실 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지나친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그들이 고작 그런 이유로 그랬을 리는 없었다.
사이러스는 경솔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단순히 접하지 못했던 인물들에게서 느끼는 신비함과 그들의 힘이 지닌 기묘함에, 탈리니아스가 직접 외부로 나온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그저 너무 고립되어 있던 그들이 이제 라스칸트에 대한 복수심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여겼는데…….
‘완벽하다고 여겼던 흑마법에 문제가 있고, 그것으로 내가 피해를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는 뻐근해져 오는 손을 옷으로 가리며 발길을 돌렸다.
“실력 좋고, 충성심이 깊은 자들로 최대한 빨리 구성해라.”
피 웅덩이를 빠져나가는 그를 향해 하수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수도 본트리스 곳곳으로 안투스의 기사들이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수도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을 감지한 제국민 사이에서도 반발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도 멀리 새롭게 피어나는 연기를 바라보며 일라이는 천천히 오른손을 주물렀다.
‘아무래도 제멋대로 살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저항이 좀 있는 편이군. 라스칸트가 그간 얼마나 개차반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알겠어.’
그는 못마땅한 듯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그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느끼는 힘의 한계를 다른 것에 신경 쓰는 것으로 잊으려 하고 있었다.
손을 주무르는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변할 때쯤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며 알리시아가 방으로 들어왔고, 곧 창가에 서 있는 일라이를 발견했다.
“레리안이 이슬레이터 기사단을 수도에 배치했다고 해. 꼴 같지 않은 반항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듣자 하니 금방 진화될…….”
심드렁하게 말을 잇던 알리시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일라이에게 한걸음에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일라이?”
“그게…….”
언급하고 싶지 않았으나 일라이는 곧 포기했다. 영혼이 이어져 있는 알리시아에게 숨길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힘이 바닥나고 있어. 덕분에 리바운드로 몸이…….”
그의 말에 알리시아가 빠르게 자신의 힘을 일라이의 몸으로 일부 전이시켰다.
흑마법의 기반이 되는 검은 마나가 연기처럼 새어 나와 일라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고통이 가신 듯 그가 낮게 안도의 신음을 흘렸다.
“본트리스의 제국민을 제압하기 시작했으니까 제물은 곧 채워질 거야. 그때까지만 버텨.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하고.”
그녀의 말에 일라이가 쓰게 웃으며 다정하게 알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하지만 사이러스가 마음에 걸려. 내 몸이 이런 지경이니 아마도 내가 준 마구(魔具)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텐데. 교활한 녀석이라 우리 상태를 금방 눈치챌지도 몰라.”
걱정스러운 말에 알리시아가 일라이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상관없어, 눈치채서 뭔가 한다 해도 그때쯤이면 흑마법을 위한 재물은 준비될 거고 우리 힘은 완전해질 거야. 이러나저러나 우리를 대적하는 건 죽고 싶어서 안달 난 것과 다름없어.”
공격형인 알리시아에 비해 검은 마나를 수용해 정신력으로 쓰는 일라이는 그 피로도가 상당한 편이었다. 흑마법의 바탕이 되는 인간 재물에 대한 의존도나 소비도 훨씬 큰 편이었고.
그랬기에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라이를 돌보고 어르는 것에 알리시아는 익숙한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과 뺨. 눈꺼풀과 이마를 오가며 부드럽게 달래듯이.
그러자 일라이 역시 답하듯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알리시아가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심해, 일라이. 라스칸트가 우리 손에 들어왔어. 탈리니아스 왕가를 우리가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이제 문제도 아냐.”
그녀의 말에 일라이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응.”
“근데 이제 슬슬 정리하고 싶은 게 있어.”
한참을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일라이의 등을 쓸던 알리시아가 속삭였다.
“정리하고 싶은 거?”
서서히 몸을 떨어트린 일라이가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수도가 접수되고 있으니 치유사들도 정리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젊은 쪽은 방향이 정해졌지만, 늙은 쪽은 필요성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잖아? 딱히 쓸모가 없다면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그 불길한 것을 둘이나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말이지.”
그녀의 말에 일라이가 턱을 쥐며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전에 이아스의 얘기를 들어 보니 그 젊은 치유사의 능력을 증폭시킬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 그 늙은이는 그쪽에 이용하는 건 어때?”
그의 말에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생이자 연인인 그녀였지만, 일라이도 그녀의 이런 미소를 볼 때마다 소름 끼침에 혀가 내둘러졌다.
“좋은 생각이네. 그 치유사의 힘을 뽑아내기 시작하면 우린 리바운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더는 일라이가 아픈 일도 없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힘을 이용하는 것보다 깡그리 다 없애 버리고 싶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알리시아는 어딘가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지난 과거를 곱씹는 모습 같기도, 조금은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뺨을 일라이가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신경 쓰지 마, 알리시아. 지금은 그때와 달라.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일은 없을 거야. 바알리시안이 무참히 꺾이던 그때와 같지 않아. 그러니 그 치유사에 대해 걱정은 하지 마, 알리시아.”
그제야 알리시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일라이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응. 우리 때는 그때와 다를 거야.”
* * *
지난번,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다 그대로 갇혔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칼리에는 외진 탑에 홀로 구금되어 있었다.
워낙 외딴곳인지라 도움을 청할 수도, 혼자 도망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며칠 전에 클레리아가 있던 본궁 쪽이 어수선한 것 같던데 설마 탈출을 감행했던 걸까? 맞는다면 제발 무사히 성공했다면 좋겠는데.’
그녀는 품 안쪽에서 치유석을 꺼내 매만졌다.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 클레리아를 만나게 되면 그녀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누에른이 그렇게 되고 오래전에 그에게 줘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는 이미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에 목맨다고 달라질 건 없었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클레리아에게 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 아이라면 내 첫 치유석을 유용하게 쓰겠지.’
상황이 상황인데도 클레리아를 생각하면 괜스레 웃음이 났다.
칼리에는 그것을 마음에 위안 삼으며 애써 불안함을 달랬다.
그때였다.
쿵쿵쿵쿵
문밖에서 갑작스럽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칼리에가 벌떡 일어서서 최대한 벽으로 물러섰다.
쾅!
급하고 격한 소리는 방, 바로 앞까지 이어지더니 곧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치유사 칼리에 에나스.”
들어선 이는 누에른의 방에서 본, 눈빛이 기분 나쁜 이아스라는 사람이었다.
“전하가 부르신다. 나와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심장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몸이 먼저 감지라도 한 걸까.
목이 아플 정도로 마른침을 삼킨 그녀는 천천히 무장한 기사들 사이로 발걸음을 뗐다.
* * *
“…….”
알현실로 들어선 칼리에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상석을 바라봤다.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누에른과 펠리시아스 황가가 앉아 있던 그곳에. 이제는 라스칸트가 완전히 바알리시안이 된 것같이, 냉랭하고 고고한 표정의 일라이와 알리시아가 앉아 있었다.
분명 익숙한 곳인데 너무도 달랐다.
칼리에가 입을 꾹 다문 채 어떤 예도 갖추지 않고 바라보자, 알리시아와 일라이의 눈초리 역시 시시각각 더 차가워졌다.
“예를 갖춰라.”
이아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가와 칼리에의 어깨를 짓눌렀고, 그 덕에 그녀는 바닥을 짚고 주저앉았다.
“라스칸트 것들은 하나같이 못 배워 먹은 티가 나.”
알리시아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빈정댔다.
“……못 배운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나의 주군이 아니기에 예를 차릴 생각도, 고개를 숙일 생각도 안 한 것뿐입니다.”
담담히 읊조리는 그녀를 보며 일라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지. 강제적으로.”
그 순간 엄청난 기운이 일라이에게서 뻗어 나가 직격으로 칼리에를 강타했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과 함께 사지가 무언가에 붙들리듯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야말로 대자로 바닥에 엎드려져 버렸다.
강압적이고 압도적인 힘에 칼리에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일라이, 그만해. 어차피 저것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그까짓 자존심과 충심이 정말 보잘것없었다는 것을.”
그 말에 순식간에 칼리에의 사지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던 힘이 사라졌다.
“이제 우릴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았겠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는 칼리에를 보며 일라이가 경고하듯 싸늘히 내뱉었다.
그러나 칼리에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굳혀 일어섰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인 압박에 힘겨운 것은 맞았으나 결코, 두려워 벌벌 떨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일라이와 알리시아 역시 남모르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두 사람도 칼리에와 마찬가지로 내색하지 않았고, 그런 그들 사이에 신경전으로 인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늘 그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야. 이제 벌어질 일을 위한 전야제 정도의 느낌이나 낼까 싶어서.”
칼리에는 시선을 내리깐 채 알리시아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재미없네. 어떤 얘기를 해도, 어떤 위협을 해도 그대가 영 반응이 시원찮으니. 그럼 계획을 좀 변경해 볼까? 그대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로.”
알리시아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있지, 우리 바알리시안이 무너졌던 그날. 사람들은 펠리시아스 일가를 필두로 너희 그 3공작이 우리를 무너뜨렸다고 알고 있지. 그런데 그거 알아? 사실은 한 명이 더 있었어.”
그 말에 칼리에가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흥미를 돋웠다는 생각에 알리시아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우습게도 우리 탈리니아스의 방계였지. 워낙 우리와는 반대된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사실상 거의 없는 존재나 다름없어 신경 쓰지 않았어. 어찌 됐든 그 방계가 바알리시안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야.”
칼리에의 눈썹이 ‘결정적인 역할’이란 부분에서 움찔 떨렸다.
“흑마법을 다루는 우리 탈리니아스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의 힘이 발휘된 거였지. 일족에게 배신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칼리에는 못마땅하게 말하는 알리시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펠리시아스와 3공작가 외의 다른 이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으니까.
“진짜 재밌는 건 이제부터야.”
알리시아는 마치 비밀을 선심 쓰며 알려 준다는 것처럼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안투스와 손을 잡은 즉시, 라스칸트 내에서 치유력이 발현되는 치유사들을 제거할 수 있는 한 모조리 제거했어. 왜일까?”
바알리시안이 무너지던 얘기를 하던 중에 왜 갑자기 치유사 이야기를?
칼리에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 순간이었다.
“펠리시아스와 3공작을 돕던 마지막 그 인물이 바로 최초의 치유사였거든.”
칼리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 * *
“이슬레이터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수도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 같아. 본트리스가 근래 꽤 시끄러워졌어.”
리암이 말에 에단이 숨을 낮게 내뱉었다.
“근데 기사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보고는 계속되고 있어. 그 덕에 제국민이 틈을 놓치지 않고 대항하는 것 같고,”
리암은 그렇게 말하고 강조하듯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황궁을 장악하긴 했어도 왠지 모르게 놈들의 기세가 꺾이고 있는 느낌이야. 허술하단 느낌도 강하고. 에단,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황궁에 잠입해서 프라이어스 영애와 궁을 탈환하는 게 맞지 않겠어? 더 시간을 끌어 봤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을 게 없을 텐데.”
그 말에는 에단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뮐족이 날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강조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섣불리 진입했다가 궁지에 몰리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제일 큰 건 흑마법을 마주했을 때 다른 기사들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희생이 따를 테니까.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 하지만 준비는 마쳐야지. 라기에 님의 말처럼 소드 마스터 급의 기사들에게 자신의 마나를 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을 익히게 해야 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리암 역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칼리스터 경! 급히 만나 보셔야 할 분이 오셨습니다.”
한 기사가 급하게 들어와 말했다.
“누굴 말이지?”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고하는 기사를 옆으로 물리며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칼리스터 경.”
“……블린트 백작 각하?”
방으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케일론 블린트였다.
서둘러 왔는지 약간 흐트러진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강직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에단은 그의 등장이 놀랍기도, 반갑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들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전력이 하나라도 아쉬울 때였으니까 말이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오는 길이 평탄치 않았을 텐데.”
에단은 서둘러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국경을 지키는 블린트 일가였기에, 분명 델 판시온의 습격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여기에 왔다는 건?
의자에 앉으며 케일론은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며칠 전 델 판시온 일당으로 보이는 놈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접전이 꽤 격렬했지만, 다행히 진압했죠.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이상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행스러움 반, 의아함 반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적들의 인지 능력과 전투력이 점차 줄어들던가요?”
케일론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기를 장악하려는 바알리시안의 세력 역시 마찬가집니다. 용두사미라 느껴지긴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준이 아니란 게 문제라면 문제죠.”
그 말에 케일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경이 판단한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리암과 에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소립니까?”
“타국 역시 델 판시온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건 이미 아시겠죠? 그러나 지금은 모두 진압 중이거나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끝났다는 겁니까?”
케일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부 상황은 안정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여기로 오기 전에도 바알리시안 국경과 맞닿은 곳에서 다수의 군사가 움직인다는 정보를 받았는데 도착했을 때 이미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죠.”
케일론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의 상황도 그들이 나서기만 하면 금세 종료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우려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수월해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바알리시안 관련해서 위협적인 건 탈리니아스 왕가뿐일지도. 그 외의 문제는 사이러스나 안투스. 그들을 따르는 잔당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때 리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케일론에게 물었다.
“그런데 백작 각하, 국경을 이렇게 비워 두셔도 괜찮은 겁니까?”
그 말에 케일론은 빙긋 웃었다.
“그 일에 관해서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에단을 바라봤다.
“바모른 국의 플로릭 아이문트 대공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바알리시안으로의 진격 역시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또한, 다른 국가에서의 협조문도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에단은 서서히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언제인지도 모르게 라기에와 잇새가 방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외지인의 등장에 케일론이 적잖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의외의 인물들의 등장에도 그랬고, 특이한 뮐 부족의 외형에도 놀란 듯했다.
“카미드(남자), 준비됐다.”
에단은 그 말을 듣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치유사, 지금 구하러 간다.”
* * *
뜻밖의 말에 칼리에는 저도 모르게 가빠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최초의 치유사가 함께해, 우리 탈리니아스를 궁지로 몰아넣었지. 그래서 우리 왕가는 오랫동안 치유사의 존재를 증오했고 경멸했어. 다행인 건 그 후에 라스칸트에서 나타난 치유사들에게서 최초의 치유사가 가진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였지. 당신들에게 그 존재가 전해지지 않은 건 그 치유사가 일이 끝나고 홀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 거야.”
마지막 말에 조금은 맥이 탁 풀렸다. 어쩌면 그 치유사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칼리에는 다시금 숨을 골라 진정하며 물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아까 말했잖아. 여흥을 돋는 일이랄까? 사람은 희망이 생기거나 중요한 걸 알게 된 후의 반응이 좀 더 격해지거든.”
철컥
그때 알현실 문이 열리며 클레리아가 안투스에게 떠밀려 들어왔다.
“칼리에 님?”
그녀를 본 칼리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은 저의가 순수할 리 없었다.
안투스는 자기 일을 마쳤다는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켜봤다.
“이제 주요 인물이 모두 모였네.”
알리시아가 말했다.
“주요 인물?”
“그래, 이제 재밌는 일을 할 거거든.”
일라이가 손을 들자 기사 두 명이 칼리에의 양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칼리에 님께 손대지 말아요!”
클레리아가 날카롭게 외쳐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널 어떻게 이용하려고 하는지는 이미 안투스에게 전해 들었을 거고. 우리에겐 치유사가 두 명씩이나 필요하지는 않아.”
그 말에 칼리에와 클레리아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알현실 안을 자유로이 누비며 나른하게 말하는 알리시아의 속내가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다.
그 탓에 클레리아는 신경을 더욱 곤두세웠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둘이나 있는 치유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한 명으로 줄이는 게 좋겠지?”
순간 클레리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칼리에를 바라봤고, 그때 다시금 알리시아의 입이 열렸다.
“그냥 없애도 상관은 없는데 이아스에게서 재밌는 걸 들었어. 그 엘라단 사건에서 네 능력이 증폭됐었다고 했거든. 폭주라고 했던가?”
푸욱!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리에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알리시아의 손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순식간에 그녀의 배 한복판을 뚫었고, 허공으로 뜨거운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클레리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들려오는 알리시아의 말로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이왕 힘을 뽑아내려면 최상의 상태인 게 좋잖아? 그러니 폭주해.”
그녀의 입술이 잔혹하게 호선을 그렸다.
“폭주 상태가 되어 칼리에를 치료해. 아니면 이 여자는 죽어.”
상황이 이해되는 순간, 핏발이 선 클레리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큽…… 크윽.”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물음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동시에 칼리에의 입가는 점차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한 번 폭주했던 이는 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일반 치유사보다 훨씬 높거든.]
언젠가 폭주에 관해 설명하던 레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건 클레리아에게 문제되지 않았다.
사아아아
클레리아의 몸에서 치유력이 뿜어지기 시작했고, 이어 그 기운에 닿은 칼리에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폭주까지는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겪은 후, 다른 치유사들보다 훨씬 힘이 강하고 자유자재로 다뤘기 때문일 뿐이었다.
알리시아와 일라이. 이아스와 안투스까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듯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클레리아는 엄청난 힘을 쏟아 내고 있었으나 알리시아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의 촉수는 여전히 칼리에의 가슴팍에 꽂힌 채 빼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 실망스럽네. 폭주라고 했잖아. 이럴 거야?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야?”
“아아악!”
칼리에의 비명이 알현실을 울렸다.
알리시아가 촉수를 이리저리 비튼 까닭이었다.
[단 한 번, 스위치가 켜지는 건 어렵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아.]
수명이 줄어든다거나, 몸이 위험해진다는 경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울컥이며 피를 토하는 칼리에의 모습과 흰 바닥과 대비되도록 고이는 핏물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의 비명이.
이 상황을 즐기는 알리시아와 일라이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에도, 인간성마저 버린 듯 동요하지 않는 이아스와 안투스의 모습에 몸서리가 쳐질 듯 끔찍했다.
참혹했다.
클레리아는 있는 힘껏 달려가, 칼리에를 붙든 기사들을 뿌리치고 촉수에서 그녀를 빼냈다.
콰아아아!
눕힘과 동시에 바닥으로 피가 흥건히 번지며 클레리아의 몸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위력의 치유력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뿜어지는 힘의 여파에 알현실 내부는 광풍이 일고,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에 휩싸였다.
이에 일라이와 알리시아, 이아스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폭주한 치유사의 치유력이라고?”
일라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클레리아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엘라단에서처럼 무아의 지경에 빠진 그녀는 오로지 칼리에를 살려야만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대로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 버티겠어.
더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혼자서는…… 더는 이걸 견뎌 낼 수가 없어.
“도와줘…… 도와줘, 에단.”
간절히.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