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녀님!”
비밀 통로를 통해 방과 방을 옮겨 다니고 있음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들의 추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장식대를 넘어트리고 간신히 손이 닿을 때면 치유력을 이용해 그들을 피했다.
하지만 접선 장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두 사람을 쫓는 기사들의 숫자도 늘어갔다.
“이제 마지막 방이야! 여기만 지나면……!”
지친 듯 세실리아가 통로의 장치를 찾았을 때, 옆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 한 무리가 나타났다.
발견과 동시에 다짜고짜 검이 날아들었다.
미처 피할 틈도, 폭렬석을 던질 틈도 없던 순간, 클레리아가 세실리아를 감쌌다.
콰창!
또 한 번.
안투스를 밀어냈던 것처럼 그녀를 감싸는 푸른 마나의 벽에 가로막힌 기사들이 튕겨 나갔다.
스파크의 잔재가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 공간만 넘어가면 돼.”
열린 문을 통해 두 사람이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를 걸었다.
거친 숨소리와 살기 위한 의지만이 지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발을 재촉했다.
드드드드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방.
문이 열리며 드러난 곳은 클레리아도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여긴 사이러스의 눈을 고쳤던 그 방이야.’
그때도 비밀 문을 통해 나갔던 기억이 있었으므로 클레리아는 기쁜 얼굴로 그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였다.
“멈춰, 클레리아!”
콰앙!
세실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클레리아의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여파에 쓰러진 클레리아가 천천히 일어섰을 때였다.
척척척
뿌연 연기 사이로 들려오는 일사불란한 발소리.
지금껏 그들을 쫓던 기사들의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클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세실리아의 곁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제 남은 폭렬석은 하나뿐이야.”
클레리아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다.
‘저 문만…… 저 문만 나가면 밖으로 통할 수 있는데!’
애가 타는 듯한 마음과는 달리 폭렬석이 터졌던 곳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 두 마리가 어지간히도 궁을 휘저어 놓는군. 그러게 쓸데없는 것들은 진작 치우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거늘.”
싸늘하고 메마른.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말투에 클레리아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알고 있어.
저 목소리.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세실리아를 보호하려 뒤쪽으로 물렸다.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마저 달리 느껴졌다.
이미 방 안은 대적할 엄두도 못 낼 인원의 기사들로 들어찼다.
그러나 저 건너편에서 말한 이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두 사람에게 다른 기사들의 존재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척
갑주가 바닥을 긁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
“……이아스?”
클레리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렝터 자작령에서 찰스 렝터를 대신해 패악을 부렸던 사람.
범상치 않은 기운에 불길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클레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단도 그가 위험하다고 했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어도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쯤은 클레리아도 이미 충분히 느꼈다.
문제는 왜 여기서 갑자기 이아스가 등장했느냐는 것이었다.
‘이상해. 그때는 그저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한 사람에 그쳤다면 지금은…… 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자체가 음침하고 불쾌해. 이런 느낌은 대체 왜?’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반응은 상관없다는 듯 이아스는 가볍게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넌 자작령에서도 그렇더니 정말 성가신 여자로군.”
그런 그와 시선을 맞받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기에 직면했음을 직감했다.
클레리아는 낮게 세실리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황녀님, 어떻게서든 길을 만들면 문을 열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세실리아의 눈이 빠르게 문 주변을 훑었다.
“응, 이번 장치는 문 바로 옆에 있어.”
클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기사들도 문제지만 제일 큰 문제는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해.’
“제가 문 쪽으로 뛰면 곧바로 저 사람에게 폭렬석을 던지세요.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만들 테니까 문을 열리면 바로 나가시는 거예요. 망설이거나 절 챙길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어요? 기사들이 이렇게 많이 몰리는 걸 보면 근처까지 지원군이 온 걸 수도 있어요.”
“너 대체 어쩌려고…….”
세실리아가 불안하게 중얼거렸으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클레리아가 돌진했다.
그녀가 움직임으로 기사들의 시선을 빼앗았고, 이아스의 고개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세실리아가 재빨리 폭렬석을 그에게 던졌다.
콰앙!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자 세실리아는 문을 향해 뛰었다.
이아스에게는 폭렬석이 정확히 맞아들어 갔지만, 클레리아의 사정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사방에서 기사들의 검날이 날아들었고, 그녀의 뺨이. 어깨와 팔이 스치며 붉은 피를 뿌렸다.
“클레리아!”
‘이것만 맞는다면!’
세실리아의 외침을 뒤로한 채 클레리아가 강하게 앞을 막아서는 기사와 몸을 부딪쳤다.
콰창!
그녀를 감싸는 마나 방어막이 빛을 발하며 사람들이 튕겨 나가는 것과 동시에 클레리아는 휘말리지 않은 기사들에게 치유력을 발동했다.
번쩍!
강한 빛과 함께 끔찍한 몰골로 변한 기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놀란 세실리아가 머뭇거렸으나 지체할 수 없었다.
빠르게 그사이를 내달린 그녀가 벽에 있는 장치를 발동시켰다.
드드드득
마침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클레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세실리아가 클레리아를 부르며 돌아본 순간이었다.
파바박! 콰지지직!
강한 치유력의 빛이 사그라들던 바로 그때, 그 속을 비집고 엄청난 속도로 들어온 손 하나가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꺄악!”
이아스였다.
그의 앞에서 폭렬석이 터져 상처 입었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클레리아는 머리칼을 붙들린 손을 붙든 채 고통에 몸을 버둥거렸다.
잡힌 머리 한쪽 전체가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악스러운 손에 붙들린 채, 클레리아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문제는 그녀를 지키는 에단의 마나 방어막은 여전히 발동하고 있다는 것.
마나가 일으키는 파동과 바람, 거센 저항에 이아스의 손이 사정없이 베였다.
파지지직!
엄청난 스파크가 그의 손을 찢었다. 사방으로 유혈이 낭자했고, 버티는 이아스의 손이 넝마가 되었다.
그럼에도 무서운 건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클레리아를 붙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마나 또한 만만치 않게 저항하고 있었다. 머리칼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클레리아에게도 느껴졌다.
“이익……!”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붙들고 낼 수 있는 치유력 모두를 방출했다.
번쩍!
위협적으로 에너지가 방출되자 그제야 이아스의 손이 풀렸고, 클레리아가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빛이 거둬지고,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손을 이아스가 싸늘히 내려다봤다.
“씁…….”
까무러치던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전혀 휘말리는 기색도 없이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입맛을 한 번 다시고 자신의 힘을 발동했다.
툭 투둑
그러자 끔찍하게 불어났던 살덩이들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세포 과증식이…… 소용이 없어. 통하지 않아!’
더는 시간을 벌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클레리아는 뒤에 있는 세실리아를 돌아봤다.
그녀 역시 놀라 공포에 질려 얼어붙어 있었다.
안 돼, 여기서 붙잡히면…… 나는 그렇다 쳐도 황녀님은 붙잡히면 안 돼!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황궁이 장악당한 뒤 이렇게까지 큰 소동은 없었다. 이 큰 소란의 주동자가 세실리아라는 걸 알면 안투스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안투스에게 지금의 세실리아는 눈엣가시였다. 거기에 후에 죽일 거라는 엄포까지 놓지 않았던가.
지금 붙들린다면 그 일이 앞당겨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대로라면 둘 다 붙잡힐 가능성이 더 커.
저들의 추격을 아주 잠깐이라도 멈출 만한 미끼가 필요해.
클레리아는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에단에게…….”
“……?”
속삭이는 말과 함께 세실리아의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었다.
“클레리아?
“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클레리아는 세실리아를 확 밀치며 떨어졌다. 못해도 자신이 남으며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면 세실리아만이라도 나갈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문밖으로 몸이 기울며 쓰러져 버린 세실리아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문밖으로 확실히 나간 것을 확인한 클레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기다려, 아니야! 안 돼!”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이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세실리아가 필사적으로 닫히는 것을 막으려 문을 붙들었다.
클레리아가…… 아직 클레리아가 나오지……!
“나와, 클레리아! 어서!”
세실리아가 애처롭게 뻗는 손을 그녀는 잡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무사를 바라는 양 웃어 보일 뿐.
“클레리아, 제발!”
절규하는 세실리아가 닫혀 가는 문 사이로 마주한 광경은.
다시 일어나는 푸른 스파크와 클레리아의 어깨를 붙드는 이아스의 모습이었다.
드드드드
쿠궁!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문은 닫혀 버렸다.
* * *
“하앗!”
몰려드는 기사들을 밴 리암이 짧게 도약해 무리로 돌아왔다.
‘이상해, 좀 전보다 추격하는 기사들이 늘었다. 안쪽에서도 일이 있는 건가?’
“서둘러야겠습니다. 전하도 추격받고 계신지도 모르겠어요.”
에단의 말에 알테어가 손으로 가리켰다.
“저깁니다! 저기가 접선할 곳이에요!”
두근!
외침에 그곳으로 향하려던 에단이 잠시 멈칫했다.
‘마나가 다시……!’
격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먼저 도착한 마법사들이 벽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발동했고, 벽이 열리며 안에 있던 세실리아가 나타났다.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녀가 내지르는 이름에 에단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클레리아!”
절규하는 목소리에 그가 이성을 잃은 듯 사람을 헤치고 세실리아에게 다가갔다.
“전하, 클레리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다가온 에단을 붙들었다.
“클레리아도…… 클레리아도 함께 왔는데……!”
그의 옷깃을 붙들고 세실리아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날 살리겠다고 혼자 저 안에……!”
그 말에 에단의 눈에 핏발이 섰다.
“클레리아!”
“칼리스터 경! 그만두십시오. 이 문은 닫히면 안에서밖에 열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탈출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예요. 어떤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아요!”
알테어가 말렸으나 지금 에단에게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쿠오오오!
엄청난 세기의 마나 폭풍이 그를 중심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클레리아!”
열리지 않으면 부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양 그의 주변에 많은 마법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콰쾅! 콰지지직!
격렬하게 쏟아 부어지는 마나 연동과 마법에 지진이 일 듯 건물과 주변 땅이 흔들렸다.
“칼리스터 경!”
만류에도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황녀 구출에 대한 것만 의식하고 있다가 막상 클레리아까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성이 끊겨 버린 것이다.
엄청난 오러를 내뿜는 그의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알테어도, 세실리아도.
다른 까마귀들도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에 감히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리암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에단의 멱살을 붙들어 벽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 멍청아! 정신 차려! 무슨 짓을 해도 문이 열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황궁 건물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이러다 네가 죽는다고!”
거의 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그의 눈을 보며 리암이 소리 질렀다.
“지금 네가 죽으면 저 안에 프라이어스 영애를 지킬 마지막 보루도 사라져 버려, 에단 칼리스터! 고작 그렇게 만들려고 애를 써서 마나를 나눴어?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이 자식아!”
그제야 흐렸던 에단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조금씩 이성의 끈을 붙잡은 그가 천천히 숨을 골랐고, 지축을 뒤흔들며 요동치던 오러의 폭주도 점차 잠잠해졌다.
마치 울 것 같기도.
그대로 좌절해 버릴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다 에단은 돌아섰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귀환한다.”
낮게 읊조리고 그가 먼저 앞장섰다.
그 모습과 굳게 닫혀 버린 문을 번갈아 바라보던 리암 역시 입술을 깨물며 뒤를 따랐다.
* * *
뒤에서 접근한 이아스를 피하려 벽에 붙어 있던 클레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를 짚었던 이아스의 손이 이제는 정말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심지어 뼈가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견디는 것 같던 그도 이번에는 꽤 놀란 눈치였다.
그는 진작 클레리아의 몸에서 손을 뗀 후 묘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때 그 에단 칼리스터란 놈의 짓인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저 계집에게 마나를 양분한 모양인데…… 반으로 나눈 마나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갈가리 찢는다고? 게다가 지금 밖에서 폭주하는 것 같은데 마나 동요와 일체화가 거의 양분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는 유혈이 낭자한 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그의 앞에서 떨고 있는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자칫 손을 잃을 뻔했어. 적당한 반감 정도는 상관없는 것 같지만 살의를 가진 자에게 반응하는 건 분명하다. 일러둬야겠어.’
그는 다른 손을 들어 점차 거리를 좁히던 기사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여자를 데리고 간다.”
그 말을 남긴 후 그는 다친 손을 망토로 감싼 뒤 방을 빠져나갔다.
점차 위협적으로 주변을 둘러싸는 기사들을 배경으로 이아스가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아 버린 클레리아는 조용히 리본을 꽉 손으로 쥐었다.
느낄 수 있었다.
리본에 담겨 있던 마나가 요동쳤고, 그것으로 건물이 흔들렸다.
에단이 밖에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안도했다.
‘전하는 무사하실 거야. 목적은 이뤘어. 그러니 괜찮아.’
그녀는 깊게 숨을 고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각오를 다지며 기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흐음, 황녀와 그 여자가 꽤 요란하게 탈출을 시도한 모양이군요.”
쿠르릉 소리와 함께 궁의 흔들림을 감지한 레리안이 중얼거렸다.
“클레리아가 탈출하려 했다고요?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사람이 어디 쉽게 포기하던가요? 불가능해도 헛된 희망 하나만 보여 주면 잡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게 인간이죠.”
그가 비웃듯 말하던 그때였다.
쾅!
문이 벌컥 열리며 카이론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레리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성큼성큼 들어와 엘레나의 앞에 섰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레리안 캄스턴, 나가라.”
다짜고짜 축객령이었으나 레리안은 딱히 불만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재밌어 하고 있는 듯했다.
“부녀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시길.”
끝까지 사람 심기 뒤집어 놓는 말을 하며 그가 사라졌다.
못마땅함에 가늘게 눈을 떨던 카이론의 시선이 엘레나를 향했다.
“황녀 전하가 탈출하셨다.”
그 말에 엘레나가 노골적으로 인상 썼다.
“하, 결국 나가긴 하셨군요. 뭐,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너도 파동을 느꼈겠지만 에단이 왔었어. 황녀님을 구출한 건 그 녀석이다.”
그의 말에 엘레나는 눈을 내리깐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등졌다.
카이론은 깊은 분노를 억누르듯 눈을 질끈 감으며 짜내어 말했다.
“이제 칼리스터와 프라이어스에게 우리는 완전히 배반자가 되었다. 이게 네가 원하던 거냐?”
“원하지 않을 것도 없죠. 애초에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 따윈 되지도 않았으니까.”
“엘레나! 너에겐…… 너에겐 우리 세 가문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허사가 돼도 상관이 없는 거냐?”
그의 말에 엘레나가 싸늘한 눈초리로 돌아봤다.
“원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그딴 것들에 신경 쓸 이유는 없어요. 3공작가에서 어차피 늘 주목받아야 했던 건 우리 이슬레이터니까. 그들이 그걸 거부했어요. 배반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 먼저 한 거죠.”
“엘레나!”
카이론이 소리쳐도 그녀는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가 나도록 쥔 카이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기사들의 상태가 이상하더구나. 무슨 짓을 한 거냐?”
“명령에 좀 더 수월하게 따를 수 있게 만든 것뿐이에요.”
“대체!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 거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아버지야말로요! 아버지야말로 절 버리려고 하셨죠? 기사단을 끌고 궁을 나가 칼리스터와 프라이어스에게 가려고 하셨잖아요. 아니에요?”
그녀의 추궁에 카이론은 흠칫 몸을 떨었다.
사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은밀하게 궁을 나가 그들과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심장이 찢기듯 고통스러웠고, 어느 순간 기사단원들 역시 꼭두각시처럼 변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일전에 엘레나가 준 음식에 뭔가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대체 어쩌다 자신의 딸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카이론은 한탄스러웠다.
“그게 옳으니까 그러려고 했던 거다.”
“인제야 실토하시네요. 어떻게 제 딸인 절 배신하려고 하실 수 있어요? 레리안의 말대로 맹약의 룬을 먹인 게 다행이에요.”
“맹약의 룬?”
카이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래전 바알리시안 제국 때 유행하던 ‘맹약의 룬’이 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탈리니아스 황족은 오로지 권력으로 사람을 부리는 것을 추구했는데, 이때 생길 수 있는 반발심을 제어하기 위해 흑마법으로 ‘맹약의 룬’이란 것을 만들었다.
부와 명예, 황실의 지지를 조건으로 우방에 서는 이들에게 배신할 수 없도록 ‘맹약의 룬’을 먹여 통제한 것이다.
강제적인 통치에 한몫을 담당했던 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걸, 심지어 자신에게 먹였다고?
그는 그제야 왜 엘레나의 말에 반감을 품으면 곧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는지 깨달았다.
“엘레나, 네가 원하는 것이 파멸인 거냐? 그런 거야?”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에요. 이건 그 와중에 겪는 진통일 뿐이고요. 세상은 제가 원하는 대로 세워질 거예요.”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바알리시안의 흑마법에 접근한 이상 우리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엘레나.”
그는 나직한 말을 남긴 채 방을 나갔다.
“말로라고?”
그가 나간 문을 엘레나는 매섭게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쳤는데, 붙들려 돌아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또다시 안투스의 방 옆으로 끌려가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 도착한 곳은 누에른이 있던 침실이었다.
문을 열고 기사 하나가 그녀를 방 안으로 떠밀었다.
“……!”
내부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설마!’
평소라면 날 리가 없는 심한 악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클레리아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폐하?”
새카만 얼굴.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
이미 오래전 세상의 것이 아니게 된 것 같은 누에른이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폐하!”
아아, 결국은 이렇게.
클레리아는 침대 아래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폐하, 폐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폐하.”
온기도, 힘도 없는. 거죽만 남아 버린 것 같은 손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멋대로 움직였다.
“흐흑…… 폐하.”
클레리아가 흐느끼며 그의 손을 얼굴에 대며 간절히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이리도 허무하게…….
라스칸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평성대를 이뤘다던 평을 듣던 누에른 펠리시아스의 참담한 마지막이었다.
끼익
그때 방문이 열렸다.
“칼리에 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가 안투스와 이아스. 그리고 기사들에게 끌려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 역시 거칠게 방으로 떠밀린 후, 클레리아와 침대로 시선을 번갈아 던졌다.
“하…….”
클레리아의 눈물의 뜻을 알아차린 칼리에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툭 투둑
오랜 주군이자 벗이었던 남자가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도 강하게만 보였던 그가 너무도 무기력하게.
칼리에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며 눈물만 흘렸다.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할 줄 알았다면……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이라도 한번 할 걸 그랬을까.
미운 적도, 원망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내 친우였다고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할 것을.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아 헝클어진 누에른의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그 모습을 클레리아가 조용히 흐느끼며 지켜봤다.
못마땅함과 따분함을 담은 안투스와 이아스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드르르륵
갑작스럽게 침실 한쪽 벽에서 소리가 나며 전혀 알지 못했던 비밀 문이 나타났다.
“너무 늦으신 거 아닙니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신파극을 참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버러지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 좀 궁금해서 지켜보느라. 뭐, 다 그렇듯 천박한 것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하네.”
안투스의 말을 느긋하게 받아치며 어둠 속에서 점차 모습을 드러낸 인물들.
그들은 바알리시안의 왕족인 알리시아와 일라이였다.
바알리시안을 다스리는 탈리니아스 왕족의 등장에 칼리에와 클레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라스칸트와 바알리시안의 관계를 아는 이라면 이들의 등장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라스칸트의 황태자인 안투스는 전혀 거리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들과 조우했다.
그 모습을 경직된 채 바라보는 것은 클레리아와 칼리에 둘뿐.
“표정이 볼만하네? 마음에 들어.”
알리시아는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클레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칼리에의 곁에 바싹 붙었다.
도망칠 곳도, 도와줄 이도 없는 이곳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칼리에와 클레리아, 서로뿐이었다.
“겁에 질린 모습 딱 좋아. 우릴 보는 시선은 늘 그래야 해. 경외하거나, 두려움에 우러러보거나.”
일라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둘을 시선을 내리깔아 보며 말했다.
“상황은 정리되어 갑니다. 곧 열어 둔 국경을 통해 군대가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시 바알리시안을 재건국할 수 있는 거죠.”
‘재건국?’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클레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며 안투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말을 꺼낸 그의 얼굴은 외려 이해할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경과 기대.
벅차오르는 듯한 감동에 젖은 얼굴이었다.
‘펠리시아스 황가와는 원수나 다름없는 바알리시안을 다시 세우려 하면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도무지 안투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러운 게 있으니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좀 치워도 되겠지?”
그때 알리시아가 말했고,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
그것들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클레리아와 칼리에의 사이를 지나, 곧장 누에른의 시신에 꽂혔다.
“지금 무슨 짓을……!”
클레리아가 놀라 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촉수가 찔러 들어간 부분부터 부서지기 시작한 누에른의 몸이 순식간에 모두 재로 변해 허공으로 기화하듯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급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칼리에도, 클레리아도 황망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어떤 대응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흩어지는 누에른의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는.
“거슬리는 걸 치우니 이제 좀 있기 편해졌네.”
촉수를 빠르게 회수한 알리시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폐하께 지금……!”
슈슈슉!
클레리아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 질렀으나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알리시아의 손에서 날카로운 촉수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들어 그녀의 목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리시아의 싸늘한 경고에 클레리아는 주먹을 쥐며 몸을 움츠렸다.
반응이 만족스러웠던지 알리시아는 촉수를 거둬들였다.
한발 물러섰음에도 앙칼지게 노려보는 클레리아를,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쳐다봤다.
한동안 시선을 맞받길 잠시, 알리시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얘기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방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얘기?”
일라이가 묻자 그녀가 손가락을 느릿하게 들어 클레리아를 가리켰다.
“저기 서 있는 저것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오만한 말투였다.
클레리아는 엘라단에서 처음 봤던 그들의 모습과 분위기를 떠올렸다. 마치 세상에 저들 외에는 모조리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한 거만했던 모습.
앞에 있는 지금도 그때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이 약간 다르다면 다를까.
“어때, 너도 혹시 생각 있니?”
마치 크게 선심을 쓴다는 것처럼 알리시아가 물어 왔다. 그것이 오묘하게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해 클레리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본 알리시아는 입술을 길게 찢어 웃었다.
클레리아의 반응이 매우 흡족하다는 것 같은 미소였다.
“저것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비키지.”
일라이와 이아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딱히 말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안투스의 태도였다.
저렇게나 거슬리고 오만방자한 태도인데 이상하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외려 자꾸 그들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태도였다.
누에른에게 드러낸 적대감이나 세실리아를 대하던 오만한 태도와는 너무도 판이했다.
그렇게나 불만투성이였던 사람이 어째서 저들에게는 이런 저자세를?
의문투성이였으나 자신을 주시하는 알리시아와 대치하느라 클레리아는 더 생각을 진행시키지 못했다.
“밖에 있을 테니 끝나면 부르십시오.”
이아스가 말하며 칼리에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칼리에 님에게 손대지 마! 칼리에 님을 데려갈 거라면 난 더할 말 없어.”
다시 또 헤어지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디에 어떻게 있게 될지 알 수 없음에 클레리아가 다급히 칼리에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그녀에게서 강한 마나 저항을 경험했던 이아스가 노련하게 칼리에의 팔을 놓으며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것을 확인한 클레리아는 더욱 칼리에를 자신의 뒤로 깊숙이 숨겼다.
“그러지 마.”
그때 그것을 본 일라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봤자 그 노인네 명만 재촉하는 건데 그러고 싶어?”
태연한 말투와는 달리 섬뜩한 내용에 클레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들었어, 네 몸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어서 살의가 있는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지? 이아스가 아주 호되게 당했던 모양이야.”
그가 헤죽거리며 이아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너에 국한된 거잖아? 네가 아무리 감싼다고 우리가 그 노인네 목 하나 못 칠 거라고 생각해? 쯧쯧쯧.”
일라이가 검지를 들어 흔들며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다면 오산이야. 뭐,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 줄까?”
심드렁하고 나른한 일라이의 말이 그 어떤 날카로운 칼날보다 예리하게 클레리아의 가슴팍에 꽂혔다.
사람의 목숨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는 그의 생각이 말투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지체 없이 실행해 보이겠다는 의지도.
결국, 클레리아는 칼리에 앞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걱정하지 마.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약속할게, 이래 봬도 나 약속 잘 지켜. 어떤 상황에서 만날 거라는 건 장담 못 하겠지만.”
알리시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런 섬뜩한 말들을 어떻게 티끌 하나 없이 맑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걸까.
이아스는 질려 버린 얼굴을 하는 클레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칼리에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자리에는 온전히 알리시아와 클레리아 둘만이 남았다.
긴장으로 낮게 숨을 몰아쉬는 클레리아와는 달리, 알리시아는 곧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진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방금 살해 위협을 하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으니까.
더불어 그녀의 외형 또한 그것에 한 몫 더했다.
너무도 깨끗한 느낌의 백발과 하얀 피부. 거기에 신비로운 하얀 눈동자는 기이하면서도 묘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끊임없이 뿜어냈다.
무시무시한 흑마법 따위는 절대 관련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도 경박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미적 감각은 있었나 봐. 방을 그럴싸하게 꾸며 놨네?”
클레리아는 두 주먹을 그러쥔 채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주시했다.
마치 어린 소녀가 잔뜩 들떠 데뷔탕트 무대를 돌아보는 것처럼 한참 방을 구경하던 알리시아가 클레리아를 돌아봤다.
“대답 좀 하지? 아까는 겁도 없이 잘도 말을 꺼내길래 좀 재밌을까 싶었는데 지루해지려고 하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쪽에겐 그저 가소로울 뿐 아닌가요? 아니, 그보다 버러지처럼 여기는 존재가 말한다고 듣기나 할지가 의문인데요.”
싸늘하게 대꾸하는 클레리아를 멀뚱히 바라보던 알리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재밌잖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날뛰는 게 참 인상적이란 말이야.”
외모와는 다르게 섬뜩한 말을 쏟아내는 그녀에게서 다시 이질감이 밀려왔다.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왕 대화 나누기로 했으니 나도 하나 묻죠. 이렇게 궁금했다면 엘라단에서는 어째서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이 행동한 거죠?”
클레리아의 물음에 고민에 빠진 것처럼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알리시아가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녀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몇십 배의 무게를 가진 것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
마치 엄청난 무게의 납덩이가 방 전체에 있는 모든 것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
털썩!
영문을 알 수 없음에 혼란스러워하던 클레리아의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리는 꼴이 되었다.
“위치가 틀려먹었잖아.”
무시무시한 압력이 머리를 짓누르는 통에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런 클레리아의 앞으로 알리시아가 천천히 다가가 섰다.
“재밌다, 재밌다, 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그래, 엘라단에서 너와 제대로 대면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했니? 그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어떤 식으로라도 너와는 만날 사이였고. 굳이 서두를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야. 엘라단에서 널 봤던 건 본 요리를 먹기 전에 약간의 흥미를 돋우는 정도의 유흥이었달까?”
그때 알리시아의 발이 바닥을 짚고 버티며 하얗게 된 클레리아의 손을 지르밟았다.
“버러지와 나같이 고귀한 존재가 동등할 순 없지, 안 그래? 지금 모습이 딱 너한테 어울리는 위치야.”
그녀는 발에 점차 힘을 실었고, 절로 ‘악’ 소리가 나왔으나 짓누르는 압력을 버티느라 클레리아는 이를 악문 채 견뎌야 했다.
“네 자리를 잊지 마.”
속삭임 후 방 안을 짓누르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클레리아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대체…… 이 알리시아란 여자 어떻게 된 인간인 거야?’
클레리아가 두려움 반, 경계심 반인 눈초리로 올려다보자 알리시아는 만족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아주 좋네, 그 얼굴. 그럼 이제 대화를 다시 이어 가 볼까? 난 말이야, 어릴 적부터 선왕께 이 궁전에 대해 듣고 자랐어. 얼마나 멋지고 화려했는지. 이 궁을 지은 게 탈리니아스 왕가의 얼마나 큰 업적인지 말이야. 그래서 이 궁에 오는 것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이 황궁이 탈리니아스 왕가가 지은 거라고? 그럴 리가. 지어진 자리가 똑같은 건 맞지만, 더욱 크고 화려하게 새로 지었다고 알고 있는데?’
의문이 들었지만 클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그녀는 묵묵히 알리시아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어떻게 움직여도 제압당할 가능성이 컸기에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최대한 침묵했다.
“이 궁을 지은 게 우리라니까 믿기지 않는 모양이구나?”
알리시아의 물음에 클레리아는 힐끔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렇지?”
재차 물었고,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만 같을 뿐, 겉모습도 세워진 크기도 다르다고 들었으니까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너무도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듯 한참을 웃다 눈에 고인 눈물을 찍어냈다.
“이래서 너희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거야. 이 황궁은 껍데기에 불과해. 우리가 지은 탈리니아스의 궁전 위에 덧씌워 세운 것뿐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쓰던 비밀 통로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니?”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는 이 방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밀 문이 열렸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정말로? 그럼 황궁을 지을 때 새로 만들었던 비밀 통로 외에 탈리니아스만이 알고 있던 비밀 통로가 남아 있었다는 건가? 저들은 그걸 이용해 들어온 거고?’
기가 막히고 허탈했다.
물론, 그 당시 바알리시안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웠기에 이곳에 그들이 다시 접근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기에 벌인 일이겠지만.
결국은 그때의 안일했던 생각 덕에 이렇게 반격의 여지가 생기고 말았다.
클레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나라의 인간들이 모자라다는 건 너도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클레리아의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알리시아는 콧대를 높이며 흥얼거렸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첫날이니까. 너도 네 위치를 자각한 것 같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렴. 오늘 같은 날은 더 없을 테니까.”
헛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조금 전까지는 짓누르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기분 좀 좋아졌다고 뭐든 물어보라니.
섬뜩하고 강압적인 모습으로 무장하고는 있지만, 알리시아에게는 변덕스러운 어리숙함이 군데군데 묻어났다. 아직 청소년의 앳된 티를 못 벗은 탓인 듯했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클레리아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바알리시안을 다시 건국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안투스 황태자는 어찌 되는 겁니까? 한 나라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알리시아가 심드렁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나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정말 그 녀석은 정신 나간 녀석이야.”
라스칸트에 입성하기까지 가장 크게 협력하고 도움을 줬을 안투스인데, 그에 대해 말하는 알리시아의 말투는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사이러스 왕자 같은 경우는 우리의 흑마법을 동경해서 우호를 맺었지만, 그놈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지. 불결함의 극치지. 참 너희도 불쌍해. 주군이란 것이 정신머리가 나가버렸으니. 쯧쯧.”
어떻게 하겠다는 확언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말로 유추했을 때. 안투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는 지금 이런 걸 알고 돕고 있는 걸까.
클레리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동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던 안투스를 떠올렸다.
생각에 잠긴 클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난 치유사들이 싫어.”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클레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 탈리니아스 왕족은 대대로 치유사를 싫어했지. 아버지는 치유사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떨곤 하셨어.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기만 했는데 지금 눈앞에 그대를 보니…….”
알리시아는 마치 매우 기분 원수를 보기라도 하듯 이를 뿌득 갈았다.
“왜 그리 싫어하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 넌 참 불쾌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말하던 알리시아가 시선을 거둬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희 황태자가 치유사를 없애겠다고 했을 때 전폭적인 지원을 했는데 기어이 살아남는 것들이 있더라고. 널 포함해서. 참 끈질긴 것들이야.”
누군가 가슴을 세게 내리치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치유사들을 죽인 것에 일조하셨다는 뜻이군요.”
“너흰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특히 우리 탈리니아스에게는 말이야.”
클레리아는 조용히 늘어뜨렸던 손을 말아쥐었다.
“그렇다면 왜 절 살려 두신 거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진작 죽이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맞아. 죽이고 싶었어.”
알리시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너무도 쉽게 수긍해 오히려 그것이 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그런데 마침 안투스가 괜찮은 제안을 해서 말이지. 그리고…… 너도 눈치챘겠지만, 그 녀석이 널 반려로 두고 싶어 하거든. 그래서 잠시 보류했을 뿐이야.”
클레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려?
제안?
어느 하나 끔찍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 제안이란 게 뭐죠?”
“뭐, 나도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그건 네 미래의 남편에게 가서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알리시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밖에 있던 이아스가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래야 네 표정이 재밌어질 것 같거든. 가서 물어보렴.”
그것을 마지막으로 클레리아는 양팔을 붙들린 채 방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들이 방에서 완전히 나간 후, 알리시아는 시선을 낮게 깔아 덩그러니 혼자 남은 방 안을 천천히 훑어봤다.
“드디어 이뤘어요, 아버지. 늦지 않게 바알리시안을 구하겠어요.”
그녀의 낮은 중얼거림이 허공을 맴돌다 사그라졌다.
* * *
“델 판시온의 기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한 건 그들이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병사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 병사들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타이엔의 물음에 보고병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의지는 없는 것처럼…… 뭔가에 조종당하듯이 공격성만 띤다고 합니다.”
옆에서 듣던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녀를 탈환하러 궁에 갔을 때, 마주쳤던 이슬레이터 기사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의 상태가 지금 들은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다쳐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저 돌격만 하는 모습이었다는 건가?”
그가 묻자 보고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의 말에 엘빈이 턱을 쥐었다.
“전에 한 자료에서 본 적이 있어. 탈리니아스 왕가가 군사를 이용할 때 주로 썼던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에 노출된 병사들이 지금 말한 특징을 가지게 된다고 말이야.”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건가?”
“그렇지, 그게 다루기 훨씬 쉬울 테니까. 원래부터 탈리니아스 왕가는 자신들 외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그저 도구로만 삼았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야.”
“우리의 발목을 잡기에는 충분하고요.”
에단이 덧붙이자 회의실 안은 ‘끙’ 하는 앓는 신음이 낮게 깔렸다.
“고, 공작 각하!”
그 순간 보초병 하나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잔뜩 예민해진 사람들의 시선에 날이 섰다.
“그, 그게…….”
그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모두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레오나! 제이드!”
가장 먼저 알아본 타이엔이 둘의 이름을 외쳤다.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 오랜만입니다.”
보초병이 데려온 이들은 다름 아닌 칼리에의 부름을 받고 급히 수도로 귀환한 제이드와 레오나였다.
워낙 개별로 각기 활동하는 이들인지라 칼리에 외에는 연락책이 없기로 유명한 치유사들이었다.
그들의 존재와 비밀을 알고 있는 엘빈과 타이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런 시국에 두 사람은 정말 큰 전력이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을 만나게 된 탓에 두 사람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건가? 응? 자네들과는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타이엔은 서둘러 그들을 안으로 맞았다.
“칼리에 님으로부터 긴급 회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는 길에 이상한 녀석들을 만나서…….”
제이드와 레오나가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만났던 상대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놈들이 어딘가 조종당하는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던가?”
엘빈의 물음에 레오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떻게 아셨죠?”
“…….”
엘빈과 타이엔은 침묵하며 시선을 주고받기만 했다.
그 뜻을 알아차린 레오나가 걱정이 담긴 한숨을 낮게 내뱉었다.
“설마 요즘 주변국들이 연달아 습격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놈들의 소행인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생각보다 일이 엄청 심각한 것 같군요.”
제이드 역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일단 잘 왔네. 그놈들에 대해서 좀 말해 주게, 아직 정보가 많이 부족하거든.”
“저희도 그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곤욕스럽긴 했는데요.”
레오나가 뒤를 가리켰다.
“저분들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살아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어쩌다 도움을 받긴 했는데 저분들이 찾는 사람이 마침 저희와 겹치더군요. 칼리스터 경을 찾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앞으로 나섰다.
“저를 말입니까?”
“오랜만이다, 카미드(남자).”
순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단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건 상황을 지켜보던 리암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벅 저벅 저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새하얀 늑대 털을 뒤집어쓴 사람 몇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건강미가 넘치는 구릿빛 피부와 강직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라기에 님! 잇새 님!”
리암이 반가움에 소리쳤다.
에단 역시 생각지도 못한 손님의 등장에 믿기지 않는 얼굴로 감격에 겨운 감탄사만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라기에가 씩 웃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뮐족, 은혜를 갚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