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격변 (2)
처걱 처걱 처걱
칼리에는 숨을 죽이며 곁눈질로 계속해서 일정하게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무거운 갑주의 발소리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울렸다.
도서관 안은 그녀를 비롯해 감시하는 인력인 기사들을 빼면 전무했다.
시중을 들어주는 시종들 역시 내몰려 사라진 지 오래고, 세실리아와 클레리아에게서도 누에른의 방에서 나온 첫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질 않았다.
심지어 그곳에 가려는 것도 막혔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궁에서 그들이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기사들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이들로 싹 다 바뀌었고.
‘……역시 그쪽도 무슨 일이 있다는 거겠지. 폐하…… 폐하와 클레리아는…….’
머리 한쪽에서 지끈거리며 통증이 일었다.
누에른이 살아 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래전 그녀의 연인이자 수호 기사였던 알렌이 죽은 후, 누에른은 친우였던 그의 죽음을 기리고자 칼리에를 보호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녀가 안전하도록 파견을 금지했고, 황궁 근처의 수도 지역에서만 활동시켰으며 치유사 관리를 전담시켰다.
거기에 더해 그 스스로가 그녀의 명예 수호 기사를 자청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건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알렌을 향한 죄책감 때문일 것이고, 연인과 기사를 잃은 칼리에를 향한 사죄였을 것이다.
칼리에는 힘없이 허한 미소를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폐하가 제 명예 기사가 되시는 건 거절할 걸 그랬네요. 이런 상황에서 전 도움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녀의 눈앞에 반주검으로 누워 있던 누에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깍지 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결심이 선 듯 칼리에는 천천히 고서가 가득한 책장 사이를 걸었다.
“필요한 걸 찾으셨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쓸데없는 움직임은 의심을 키울 뿐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기사의 강압적인 말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 언제부터 의심을 사는 일이었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뭔가 위협적인 일이라도 꾸밀 거라고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이 늙은 치유사에게서 기사님은 그런 위협을 느끼시는 겁니까? 외려 전 기사님의 허리춤에 있는 그 검이 더욱 위협적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연륜과 함께 녹록함이 묻어나는 능글거리는 말투에 기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딱히 그녀의 말이 틀린 곳도 없었고, 누가 봐도 기사가 위협적이면 위협적이었지 칼리에가 이상해 보이진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쓰읍’ 하는 못마땅함이 가득한 입맛을 다시고 돌아섰다.
“제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나직한 경고 뒤 그가 사라지자 생글생글 웃고 있던 칼리에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서둘러 책자 하나를 뽑아 빠르게 펼쳐 그 안에서 오래된 마나석을 꺼내 품 안으로 감췄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뽑아 놓은 책을 잔뜩 쌓아 시야를 가린 구석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정찰하는 패턴을 확인한 후, 그녀는 서둘러서 숨겨진 쪽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칼리에가 들어선 곳은 아주 작고 낡은 방이었는데,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다음 기사가 정찰을 돌며 그녀가 있는지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칼리에는 서둘러 찾아놓은 낡고 색 바랜, 오래된 거울을 꺼냈다.
통화경이 발명된 초창기의 모델이었다.
쌓인 먼지를 거칠게 문질러 닦고 품에 숨겨온 마나석 위에 통화경을 올리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지잉―.
미약한 소리와 함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통화경에 분할된 화면이 떠올랐다.
<칼리에 님?>
<어머, 칼리에 님!>
분할된 화면에는 각각 수려한 외모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기 파견을 나가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던 치유사의 나머지 인원, 레오나와 제이드였다.
“레오나, 제이드. 수도로 긴급 귀환을 명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돌아와 합류하세요.”
그녀의 말에 레오나와 제이드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들이 아는 칼리에는 절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수도에…… 황궁에 일이 생겼습니다. 서둘러요.”
* * *
통화를 끝낸 칼리에는 서둘러 조심스럽게 방에서 빠져나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너무 늦지 않아야 하는데.’
그녀가 연락을 취한 이들은 치유사의 최고 전력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사실상 치유력이 발현되는 이들은 그것만이 전부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나 이들은 달랐다.
마나 역시 다룰 수 있어, 레오나는 마법에 능했고, 제이드는 마검술에 능했다.
현장에서 실제 대응 능력이 다른 치유사들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수호 기사 외의 다른 인력이 붙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치유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다 해봐야 해.’
전투력이 전무한 치유사들 무리에서 유일하게 전력을 담당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칼리에는 서둘러 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황궁에 바로 올 수 없을 테니 칼리스터 공작가나 프라이어스 공작가와 접촉하라고 했지만…….
과연 그들이 제때 도착할 수 있을는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마무리했으니 이제 다시 현실의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그녀는 품에 감춰 뒀던 목걸이를 꺼냈다.
그녀의 눈 색을 닮은 영롱한 초록빛 치유석이 빛을 반짝였다.
칼리에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클레리아.’
*
잔뜩 웅크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클레리아는 움찔 눈살을 찌푸렸다. 밝은 햇살이 그녀의 한쪽 눈에 내리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멍하고 지친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봤다.
마구잡이로 물건을 쌓아 놓은 문 앞은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지난밤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고스란히 보여 주는 흔적이었다.
그래도 하루가 지나니 마음도 어제보다는 안정되었다.
클레리아는 어제보다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안투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렇게 막아 놓은 문을 여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허탈하고 허무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저항해도 그것이 그에게 전혀 위협도, 문제도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이.
클레리아는 일어나 지친 얼굴로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보란 듯이 빠져나가서 당신을 비웃어 줄 거야! 당신이 계획한 모든 걸 수포로 돌려주겠어.’
모든 물건을 치운 후 그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숨을 죽였다. 문 너머의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침내 그가 없다고 판단이 들었을 때 손잡이를 돌리자 ‘철컥’ 하며 문이 열렸다.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밀자 이어져 있는 안투스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예상대로 방은 비어 있었다.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눈을 크게 굴려 살핀 방 안은 제법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왠지 그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는 방도 어지럽고 음산한 기운이 만연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조금씩 대담하게 움직이며 방을 살폈다.
창문을 열어 봤으나 놀랍게도 안투스의 방은 거의 절벽과도 같은 높이에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 방 창문으로 도망치는 건 애초에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뒤에서 사람들을 종용하고 준비했던 것치고는 방이 너무 단순해. 이렇게 흔적이 없을 리가…….’
방을 살펴보던 그녀가 책상에 놓여 있는 안투스의 어머니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살짝 밀었을 때였다.
드드드드
한쪽 벽에 있던 고풍스러운 책장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사람이 오갈 수 있는 틈을 벌렸다.
“비밀 문?”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근처에 다가갔을 때였다.
클레리아는 흠칫 어깨를 떨며 손으로 코를 막았다.
‘약품 냄새! 그냥 약 제조 수준이 아니라 이건 독극물이야.’
잠깐 맡았을 뿐인데도 머리가 어질했다.
클레리아는 치유사복에서 천을 하나 떼어 입과 코를 막은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하, 역시…….”
그곳은 바깥의 방과는 달리 마치 암벽을 깎아 만든 것 같이 거칠고 어두침침한 공간이었다.
촛불 몇 개와 책상 위에 유일하게 있는 랜턴만이 공간을 밝히는 빛의 전부였다. 또 다른 벽면에는 온갖 약품과 실험에 쓰이는 생쥐들을 모아 놓은 용기가 놓여 있었다.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한 거지?”
한 눈에도 오랜 시간을 보낸 듯 손때와 각종 약품의 흔적이 보이는 책상으로 다가가자 그가 자주 쓰는 것으로 보이는 약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유심히 살피던 클레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건 연금술에서 많이 쓰이는 약품들인데? 문제는 이 조합들이 유익한 방면으로 쓰이는 것들이 아니란 거야. 하지만 세실리아와는 달리 안투스가 연금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게다가 일반 연금술에선 이렇게 독한 냄새가 날 리가 없을 텐데.’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책상 옆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한 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라스칸트의 커다란 지도가 벽에 붙어 있었다. 굉장히 오랫동안 공을 들인 듯 지도에는 여러 날짜와 이름과 뜻 모를 표기들이 되어 있었다.
동그라미와 그 위에 엑스 표시가 겹쳐 있는 표식이 가장 많았다.
‘대체 이것들은 뭐지? 라스칸트 전체에 퍼져 있어. 설마 그동안 안투스가 준비했던 계획들을 표시해 둔 건가?’
그녀가 확인하기 위해 지도로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잘도 내 비밀 공간을 찾아냈군?”
화들짝 놀라 돌아서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안투스가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난밤의 일로 그를 보며 크게 동요했지만, 클레리아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가 자신에게 손댈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최대한 덤덤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래, 이곳을 본 소감은?”
“이렇게 은밀한 곳에서 무언가를 많이 준비하신 것 같네요.”
그 말에 안투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마치 자신의 노고를 잘 알아냈다는 듯한 거만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느낀 건 그것뿐인가?”
클레리아는 즐비하게 놓인 약병을 시선으로 훑었다.
“전하께서 연금술에 일가견이 있으셨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나쁜 쪽으로 말이죠.”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입꼬리를 내렸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수긍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아들어가듯 문만 열려도 숨쉬기 힘들어하던 클레리아와 달리, 그는 문 바로 앞에 있음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마치 적응이라도 한 것처럼.
“또? 또 그대가 알아냈거나 알고 싶은 게 뭐지?”
클레리아의 말이 재밌었는지 안투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석연치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클레리아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대화는 정보를 얻을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이 지도. 그리고 이 표기들. 보아하니 거의 20년 전의 날짜들도 보이더군요.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들을…… 황실 전복을 계획하신 건가요?”
그 말에 그는 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런 예상 가능한 일들은 재미가 없는데 말이지. 난 그대가 창의적일 줄 알았는데 좀 아쉽군?”
안투스는 뒷짐을 진 채 방으로 들어왔다.
클레리아가 움찔 뒤로 물러섰으나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들어왔던 그대로 직진해 지도가 붙어 있는 벽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귀한 것을 만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전국에 퍼져 있는 표기들을 훑었다.
“라스칸트에 나타난 치유사들이 유달리 아버님 대에서 적었지? 그 이유가 왜일 것 같나?”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오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음에 가늘어졌던 그녀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그리고 충격에 격앙된 표정을 지은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설마…… 설마 당신!”
그러나 안투스는 클레리아의 그런 반응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생전 보지 못했던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한참을 억누르듯 ‘큭큭’거리던 웃음이 마침내는 ‘하하하!’ 하는 대소로 터져 나왔다.
너무 즐거워서, 너무 기뻐서 멈출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기이하고 섬뜩한 모습에 클레리아는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그래, 맞아! 드디어 내 공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구나. 드디어 내가 공들이고 공들였던 업적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어! 이걸 알리고 싶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는지 알아? 누에른 그놈 앞에서 얼마나 이 희열을 억누르고 살아왔는지 아느냐고? 그대의 표정을 보니 그간의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군, 정말! 정말 최고야!”
미친 듯이 깔깔거리는 안투스와 지도를 클레리아가 번갈아 바라봤다.
동그라미와 엑스가 겹쳐져 있는 표기.
그것은 라스칸트에 나타난 치유사를 제거했다는 표기인 것이다.
‘누에른 폐하 때 유독 치유사가 적었던 건…… 안투스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능력이 발현되자마자 다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었어.’
스무 개 남짓한 그 표시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을 그들이 가여워서.
이토록 잔악무도한 안투스의 행적이 기가 막히고 끔찍해서.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막지 못했다는 것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지도에 관한 건 못 맞춰서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영애의 눈썰미가 대단은 한 것 같아. 내가 연금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다니. 그것도 나쁜 쪽으로.”
안투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는 클레리아의 시선을 즐기는 듯 생쥐 한 마리를 용기에서 꺼내 들었다.
이제는 그가 뭘 할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 클레리아는 망연히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난 독 제조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더군. 이번에 아주 그 덕을 톡톡히 봤어. 물론, 훌륭한 실험 대상들이 있어 준 덕이겠지만. 그게 누군지는 알겠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도를 가리켰다.
“아주 훌륭했어. 실제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야.”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이 해로운 버러지를 죽이는 것에 신경 쓰던가? 똑같은 이치지.”
그는 말과 함께 유리관에 담겨 있던 용액을 생쥐에게 뿌렸다.
찌익! 찍!
그러자 생쥐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거품을 뱉으며 죽어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레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기시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망연자실한 와중에도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의 강한 기시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디서 봤지?
이 비슷한 장면…… 분명히 예전에.
클레리아의 눈에 핏발이 섰다.
회귀하기 전, 딸기주에 독을 타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았을 때.
그때 분명 딸기주에 닿은 새가 저렇게 죽었다. 눈앞에 늘어진 생쥐와 똑같이.
클레리아의 눈이 안투스에게로 향했다.
“내 독은 아주 특별해. 고유하고, 유일하지.”
헛웃음이 클레리아의 입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래, 당신이었구나.
그 딸기주의 독은 안투스, 당신이 만든 거였어.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그때도 엘레나와 당신은…… 이어져 있던 거야.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넋이 나간 듯 클레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불이 일듯 악에 받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당신은 악마야.”
그것을 지켜보던 안투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 * *
해밀턴 백작이 마련한 은신처에는 꽤 많은 황제파의 귀족이 모여들었다.
기사단을 몰수당한 이도 있었고, 가택 구금된 이들도 있다 했다.
공작가의 손발을 묶은 후 노골적으로 그 외의 세력을 옥죄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럼 이제 황태자인 안투스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는 겁니까?”
해밀턴 백작이 물었고, 시선을 교환하던 엘빈과 타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의 주축인 것으로 파악되는 이상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 그렇다면 폐하는 어찌 되신 겁니까?”
그의 말에 엘빈이 미간을 구겼다.
“칼리에 님과 프라이어스 영애가 급히 황궁으로 불려 갔으니 위독하셨다고 보는 중일세. 프라이어스 영애는 몰라도 칼리에 님은 황실 관련된 일이 아니면 긴급 호출이 될 일이 없을 테니. 하지만 그 이상은 우리도 아는 게 없어. 폐하의 생사만이라도 확인이 된다면 좋을 것을.”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인과 아리스가 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일이 터진 직후 타이엔이 급하게 두 사람과 접촉해 이곳으로 피신시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황궁 쪽은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거기에는 클레리아와 칼리에가 남아 있는 것 같았고.
“클레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레인 님?”
“괜찮아, 하룻강아지가 쉽게 당할 리 없잖아. 그리고 치유사는 귀중한 인재야. 그놈들도 생각이란 게 있다면 해코지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아리스를 다독였지만, 레인 역시 떨리는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파견을 나가며 겪었던 위험한 일들은 수두룩했지만, 이런 식의 일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레인과 아리스는 일단 이곳에 있으며 그들의 안녕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사람들의 불안한 분위기를 훑던 엘빈이 타이엔에게 낮게 말했다.
“캄스턴 후작께서 안 보이시는군. 당연히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저택에서 버티실 생각인가.”
대화를 엿들은 에단의 얼굴이 굳었다.
황궁에 찾아갔을 때 레리안이 말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캄스턴 후작은 자신이라던…….
의아해하는 두 사람에게 그가 조용히 말했다.
“캄스턴 후작가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쪽은…….”
말끝을 흐리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감지한 타이엔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그때 조용히 팔을 낀 채 심각한 얼굴을 하던 체셔 자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자리에 이슬레이터 공작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실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실 모인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그것이었다. 가문의 존폐도 그렇지만, 그들의 가장 큰 힘이자 지원군이 될 3공작가가 완전체인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타이엔과 엘빈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카이론에게 연통을 넣거나 접촉하려 시도했지만, 이슬레이터의 기사단과 카이론은 황궁에 일찍이 들어갔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설마 고립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타이엔의 실력과 충심을 아는 두 사람은 그것을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을 아끼고 있을 때 체셔 자작 옆에 있던 콜먼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황실에서 처분되던 시종 중 몇을 구했는데…… 외람된 말씀이나 그들이 전하길, 처분하던 기사 가운데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의 기사단원들이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조용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공기가 얼어붙어 버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황태자가 일으킨 반란에 이슬레이터 공작가가 가담했다는 소리니까.
그건 곧 배신이라는 뜻이었다.
라스칸트를 떠받치는 3공작가의 분열, 그것이었다.
경직된 귀족들 사이에 엘빈과 타이엔은 더욱 곤욕스러웠다.
아무리 불같은 성격에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 강한 친구라지만, 공과 사는 반드시 구분하는 사람이라 믿었으니까.
‘카이론이 설마 그럴 리가…….’
부인하고자 해도, 목격자가 있는 이상 함부로 말을 올릴 수 없었다.
그의 행적으로 지금 공작가의 신뢰가 깨져 버린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때였다.
“보고가 있습니다.”
리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에단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전해 듣는 족족 에단 역시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
엘빈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는 눈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서제도에서 긴급 지원 요청이 왔다고 합니다. 4왕자 사이러스가 모반을 일으켰다고, 적통 후계자인 1왕자 라말과 그의 보좌 3왕자 폴린이 라스칸트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갈레노프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델 판시온 일당의 테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바모른국과 그 주변국 역시 그 일당들에게 피해를 입고 있는 모양입니다.”
“델 판시온? 과거 바알리시안 제국을 추종하는 그들?”
“서제도의 4왕자가 모반?”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부적인 문제가 일어난 건 라스칸트만이 아닌 것이다.
‘사이러스 왕자가 안투스와 손을 잡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는 건가?’
에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서제도나 갈레노프 등은 라스칸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동맹이었다.
라스칸트가 어지러운 이때 그들 역시 심상치 않은 문제가 생긴 것은 서로의 지원 요청을 막으려는 수단임이 분명했다.
“서제도와 갈레노프가 침략받고, 라스칸트의 황실 전복까지……. 갑자기 언급된 델 판시온을 생각하면 어딘가 바알리시안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착각입니까?”
콜먼 남작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말 배후에 바알리시안이 있어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이건 황실 전복이라는 내란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쟁.
그것의 시작이었다.
더구나 라스칸트와 갈레노프, 바모른 등의 나라들은 바알리시안과 척을 진 적대적 관계에 있다.
과거 바알리시안 제국과의 전쟁이 재연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인지되자 사람들 사이에 말이 사라졌다.
어떤 말을 하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큰 충격에 사로잡힌 까닭이었다.
오랜 시간 정적이 그들을 장악했고, 마침내 타이엔이 그것을 깼다.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는 더이상 라스칸트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아스칸 대륙 전체가 관련되어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겠지.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황실이 제대로 힘을 갖춰야 동맹국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일 테니. 이제 해야 하는 일은 정해졌어.”
그는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천천히 살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있던 내용일 테지.”
그는 크게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모두 잘 듣게. 우리는 누에른 폐하를 잇는 다음 황제로 황녀 세실리아 펠리시아스 님을 추대하고, 황태자 안투스 펠리시아스를 끌어내린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고 미뤄 왔던 그 말.
그 결정이 타이엔의 입에서 나오자 낮은 신음 같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이제부터 황제파 귀족인 중앙 귀족의 목표는 단 하나, 황녀 세실리아와 칼리에 에나스,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와 황궁 탈환을 목표로 정한다.”
그때였다.
“황실 마법사들이……!”
칼리스터의 까마귀로 보이는 자가 다급히 들어왔다.
“뭐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에단이 물었고, 그가 덧붙였다.
“황녀 전하의 탈환을 위해 지금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까마귀들의 보고에 의하면 키리온 님이 당한 기운과 비슷한 기운이 황궁에서 느껴진다고 합니다.”
에단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녀석들은 대체 왜 상의도 없이 그렇게 독단적으로……!”
엘빈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에단이 그를 말렸다.
“지금 그런 걸 논할 때가 아닙니다. 지원을 가야 해요. 이대로는 전하의 안전도. 마법사들의 귀환도 다 허사가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에단…….”
“가겠습니다. 가야 합니다.”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움직임이다.
아마도 마법사들은 안투스가 아직 제대로 황궁을 장악하지 못했을 거란 계산으로 움직인 거겠지.
하지만 라스칸트 외부 상황까지 전해 들은 이상 그건 오산이었다. 그랬기에 에단의 말을 엘빈은 흔쾌히 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호한 아들의 얼굴을 차마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리암이 곁에서 나섰고, 엘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심해라.”
*
도망치듯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 클레리아는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투스는 그저 비웃었다.
도망쳐 봤자 그의 손이 닿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녀의 모든 행동이 부질없음에 그의 입가에 절로 실소가 번졌다.
안투스는 그런 그녀의 두려움을 즐기기라도 하듯 서두르지도, 바로 뒤쫓지도 않았다. 그저 저 부실한 문 너머에서 떨고 있을 클레리아를 상상하며 이 상황을 즐겼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아는 클레리아 역시 문고리를 틀어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문고리를 붙들고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지듯 주저앉은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척스레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그렇게 있길 몇 분.
톡 톡톡
망연한 얼굴로 창문을 바라본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벌떡 일어나 있는 힘껏 창문을 열어젖혔다.
“냐아!”
창문을 두드린 건 세실리아의 고양이였다.
문을 엶과 동시에 그 고양이가 폴짝 뛰어 클레리아의 품에 안겼고. 이 상황에서 유일한 버팀목이라도 되는 양 그녀는 고양이를 있는 힘껏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어떻게 온 거야? 응? 너 어떻게 왔어?”
작고 작은 미물이건만, 그것이 주는 안도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그 작은 온기에 눈물이 터졌고, 클레리아는 급하게 창문 밖을 두리번거렸다.
안투스의 방처럼 창문 주변에는 뭔가를 오르내리거나 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없는데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온 걸까?
그녀가 고양이를 들어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다 클레리아는 황녀를 처음 만나러 갔던 때를 기억해 냈다.
‘수수께끼를 따라가다 처음 만났던 고양이…… 바로 이 녀석이었지!’
“설마 너 여기까지 온 게 마법으로?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거야?”
그 말에 고양이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울었다.
“냐아.”
그 순간이었다.
공간이 어그러지며 빨려 들어가는 친숙한 느낌.
황녀의 정원으로 가던 그때와 똑같았다.
‘세실리아 님!’
이 느낌이 이처럼 반가울 때가 올 줄이야!
클레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 느낌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녀의 모습은 방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되어야 해. 되어야만 해! 반드시!’
윤기 나던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졌고, 밝았던 안색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평소의 세실리아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초췌한 모습으로, 그녀는 손톱을 무차별 잘근잘근 씹어댔다.
안투스가 가고, 방에 있는 재료와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그녀는 이동석 하나를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넣을 수 없어 난감하던 찰나-정보를 넣으려면 목적지 관련된 물품이 있어야 한다-옷에 묻어있는 클레리아의 백금발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했다.
정말로.
정말로 기적 같은 우연이었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얼마나 미친 듯이 그녀의 정보를 이동석에 옮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가.
마탑에서 선물 받은 고양이에게 이동 마법이 걸려 있으니 고양이를 클레리아에게 제대로만 보낸다면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잘 되기만 한다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양이가 사라진 곳만 바라보는 세실리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거야!”
된 걸까?
의도대로 되긴 한 걸까?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어도 마법도 함께 혼용해야 하는 어려운 술식이었다.
마법에도 능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실리아의 불안은 더욱 커져 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기대가 좌절로 바뀌어 가자, 세실리아는 곧 울음을 터트릴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휘오오오!
강한 바람이 정원 안에 몰아쳤고, 그 안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는 클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클레리아!”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세실리아는 바람이 잦아들자마자 그녀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클레리아! 클레리아!”
“황녀님!”
그녀를 알아본 클레리아 또한 부둥켜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졌던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공포에 떨었던 두 사람이 마침내 의지할 곳을 찾은 양 서로를 꽉 붙들었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건 아니에요?”
한참 후 간신히 진정한 클레리아가 떨어져 황녀를 살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여전히 ‘끅, 끅’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만 흘렸다.
클레리아는 그런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쌌다.
“황녀님이 잘못되셨을까 봐 걱정했어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도 널 두 번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다. 너무 무서웠어.”
엉망이 된 머리칼을 클레리아가 매만져 주자 한참을 훌쩍이던 그녀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넌 좀 괜찮은 거니? 안투스 그놈이 해코지하지 않았어?”
그 말에 클레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서둘러 미소를 띠었다.
“네, 괜찮았어요. 그보다 황녀님, 시종들은…….”
“그놈이 모조리 데리고 가 버렸다. 아니, 데리고만 갔다면 다행이겠지만. 정신 나간 놈을 감싸고 도셨단 걸 아시면 아버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실지……. 아, 클레리아. 아버님은 좀 어떠시냐?”
그녀의 물음에 클레리아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이미……. 폐하의 방에서 쫓겨난 것도 며칠 전이었거든요.”
그 말에 세실리아가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 애써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췄다.
“그래. 상황이 이 지경인데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내 욕심이겠구나.”
그렇게 몇 번이고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세실리아가 일어섰다.
“황궁을 벗어날 준비를 하자. 클레리아.”
“예? 황궁을요?”
안투스가 모조리 봉쇄해 버렸는데 어떻게?
“틀어박혀 있는 동안 기를 쓰고 통화경 비슷한 걸 만들어 마탑에 있던 황실 마법사들과 잠깐 교신했다. 그들이 지금 우릴 구하러 오기로 했어. 그러니 그들과 합류해야 해.”
그러나 클레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설레설레 저어졌다.
아무리 마법사들이라 해도 황궁 안에는 마검술을 쓰는 기사들을 안투스가 이미 단단히 준비시켜 놓았다.
마법사의 수가 그들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황궁은 안투스가 완벽하게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을 세실리아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마법만이면 모르겠지만, 혹여 근접전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모두 죽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달리 보면 이건 기회야. 이 황궁을 벗어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녀는 분주하게 무언가를 챙기는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녀 전하를 내가 지켜야 해.”
[클레리아, 똑똑히 들어. 내가 가르쳐 주는 건 치유력을 일종의 호신술로 바꾸는 기술이야. 탐탁지 않더라도 익혀 둬야만 해. 분명히 쓸 일이 있을 테니까. 특히나 너라면 말이지.]
렝터 자작령에서의 첫 파견을 마치고, 그녀를 은밀하게 불러낸 레인의 말이었다.
솔직히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가 워낙 강조하고, 당부했기에 익혀 두긴 한 상태였다.
‘정말 레인 님의 말대로 될 줄은…….’
클레리아는 가만히 내려다보던 두 손을 힘껏 말아쥐었다.
“네, 전하. 우리 같이 황궁을 벗어나요.”
세실리아가 그 말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교활한 녀석에게 이대로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어. 그놈 말대로 방에 틀어박힌 김에 나도 뭐를 좀 만들어 뒀지.”
그녀가 돌이 든 주머니를 흔들었다.
“놈들이 우리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이 폭렬석으로 되돌려줄 거야.”
그래도 세실리아는 아직 그녀만의 패기를 잃지 않은 것 같아 클레리아는 안도감에 빙긋 웃어 보였다.
“마법사들이 오는 것도 한계는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접선 지점까지는 가야 해. 복도만 좀 지나면 황족만 아는 비밀 통로들이 있다. 그곳을 통해 가자.”
“네, 알았어요.”
세실리아는 벽 곳곳에 있는 조그마한 문을 열어 키우던 동물들이 피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복도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준비됐지?”
“네.”
“간다.”
긴장감에 심장이 격동했다.
철컥!
이어 세실리아의 손길에 문고리가 돌아갔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빨리!”
그러나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세실리아가 폭렬석 하나를 던졌고, 복도를 지키던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세실리아와 클레리아는 서로의 손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방금 났던 굉음 덕에 뒤편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들려왔다.
“거기 서!”
순간 그들의 앞에 또 다른 기사들이 나타났고 세실리아가 폭렬석을 던졌다.
쿠앙!
급하게 기둥 뒤에 숨었던 두 사람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칼리에 님도 모셔가야 해요!”
“하지만 칼리에는 아직 어디 있는지 몰라! 일단 합류하고 나서 다시 얘기해!”
그때였다.
콰악!
갑자기 나타난 기사의 검이 빠르게 둘 사이를 갈랐고, 대리석 바닥에 꽂혔다.
“……?”
다행히 피한 클레리아는 마주한 이를 보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달려든 이는 다름 아닌 이슬레이터의 기사단 갑주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레나와 만났을 때 이슬레이터 각하께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다그쳤지만, 사실 정말로 그들이 안투스 쪽에 섰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사의 눈이 이상하다는 점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검이 휘둘려졌고, 클레리아는 급하게 주저앉아 검을 피했다.
“클레리아!”
쾅!
세실리아가 던진 폭렬석이 정확히 기사의 가슴을 맞춰 격렬한 폭발이 이어졌다.
“황녀님!”
그때 뒤에서 덮치는 또 다른 기사가 나타나, 클레리아가 손을 뻗었다.
“으아아악!”
그녀의 손이 갑옷에 닿는 순간, 갑자기 하얀빛이 번쩍! 했고, 이어 기사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뭐한 거야?”
고꾸라진 기사를 본 세실리아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힘을 발휘한 클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의 온몸이 기이하게 부풀어 갑주 사이사이로 살이 터질 듯 비집고 나온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물에 놀란 듯 클레리아 역시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정신 차리려 애쓰며 굳어 있는 세실리아를 끌었다.
“시간 없어요, 전하. 점점 더 많이 몰려올 거예요!”
“아, 알았어. 일단 이쪽으로!”
주춤거리던 세실리아가 복도 한쪽 벽에 멈춰 서서 뭔가를 하자 비밀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서둘러 그 안으로 몸을 숨겼고, 이어 벽 너머로 우르르 몰려가는 기사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세실리아와 클레리아는 잠시 계단에 앉아 숨을 골랐다.
“폭렬석 이제 두 개 정도밖에 안 남았네. 재료가 워낙 적어서 이 정도가 한계였어.”
“그럼 이제는 되도록 제가 나설 테니 황녀님은 정말 안 되겠다 싶으실 때만 폭렬석을 쓰세요.”
세실리아는 몸을 일으키며 이제 거추장스러워진 주머니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버렸다.
“아까…… 전하께서 폭렬석을 맞춘 기사 말이에요. 이슬레이터 가의 기사였어요. 그런데 눈이…… 전혀 생기라곤 없는 것처럼 이상했어요. 살아 있지 않은 느낌이 들 정도로.”
클레리아의 말에 세실리아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세실리아는 클레리아의 손이 닿자 끔찍한 몰골로 변했던 기사를 떠올리며 궁금증에 입술을 달싹였다.
클레리아가 가진 힘은 치유력인데 그녀가 손댄 사람이 끔찍하게 변해 버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광경이 꽤 충격적이었기에 그녀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세포 과증식이라는 거예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클레리아가 먼저 말했다.
“예전에 파견 때 위협받은 후, 레인 님이 치유력을 이용한 호신술이라며 가르쳐 주셨어요. 쓰기 싫은 것도 알고, 유쾌한 방법도 아니지만. 저한테는 꼭 필요할 거라고요.”
“하…… 그놈 뺀질뺀질하기만 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제법인 구석도 있네?”
일부러 장난스럽게 답했으나 클레리아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조용히 클레리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저 보기만 한 자신도 이렇게 놀랐는데 그걸 직접 한 본인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사람을 구하던 치유사였고, 평소 클레리아의 성정을 생각했을 때 가장 충격받은 건 어쩌면 그녀였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 프라이어스 영애.”
그 말에 클레리아가 세실리아를 올려다봤다.
“몇 번이고 그대는 최선을 다해서 날 구해 주고 있어. 그것이 비록 괴롭고 원치 않던 방식의 일일지라도…… 날 구했다는 것만은 확실해. 내가 알아. 그러니 그대의 그 참담한 심정, 내가 모두 내가 떠안고 가겠어.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져.”
그 말에 클레리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붉게 물들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반드시 지켜 드릴게요, 황녀 전하.”
* * *
“쉴드!”
콰창!
펼쳐진 둘러싼 푸른 방어막이 허무하게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 뒤에 서 있던 술자인 마법사가 당황하던 찰나, 다음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허공으로 흩어졌다.
대열과 짜 놓은 전술을 잊은 지는 오래, 살기 위해 불덩이를 날리고 방어막을 치며 무리는 산발적으로 흩어져갔다.
황실을 대표하는 마법사이자 마탑의 현자라 불리는 그들이었다.
비록 제국이 태평성대에 들어서 전투적인 면모가 쓰이는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밀리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황녀의 탈환을 외치며 들어간 황궁은 마법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무언가에 취한 듯 달려드는 이상한 낌새의 기사들.
다른 일부는 희귀한 기운을 머금은 채 그들의 마법을 되받아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되받아친다기보다 취약한 부분을 알고 그것을 순식간에 꿰뚫어 마법을 무효화시켰다.
마법이 통하지 않자 그다음은 그들의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시퍼런 검날이었다.
근접전에 취약한 마법사들은 허탈하게 스러져 갔다.
들어갈 때는 30명 남짓했던 숫자가 순식간에 절반이 되어 버렸다.
“이대로는 황녀님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가는 것조차 무리겠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로 마법을 날리던 마법사가 소리쳤다.
“후퇴……후퇴를…….”
이 작전의 실행을 지시했던 알테어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지 못한 듯 그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알테어 님!”
누군가가 치는 소리에 뒤로 돌았을 때였다.
바로 뒤에서 서슬 퍼런 검날이 빛을 받아 번쩍이며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있었다.
알테어는 등골을 타고 돋는 소름과 함께 온몸이 굳어 버렸다.
그가 숨조차 멈추고 내리꽂히는 검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카캉!
검날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뒤를 노리던 기사를 누군가가 밀쳐냈다.
“알테어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턱하고 막혔던 숨을 토해 낸 그가 기적처럼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카, 칼리스터 경!”
에단과 리암이 칼리스터의 까마귀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알테어는 에단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마법 술식은 소용없습니다. 마나 자체를 몸에서 운용해 빈틈없이 보호하십시오. 일단 지금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에단의 당부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전달했다.
“접선할 곳은요?”
“폐하의 기밀 알현실이네. 공용 정원과 만찬실 외곽을 지나야 해.”
스콱!
알테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단이 단검을 던졌다. 그러자 조용히 다가오던 기사가 목을 틀어쥐고 그대로 쓰러졌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 인원으로는 얼마 못 버텨요. 시간 내로 전하를 못 뵙는다면…….”
에단이 잠시 이를 꽉 깨물었다.
“우리도 수확 없이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알테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마법사의 절반이 당한 상태에 그가 등장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상태였으니까.
“저희와 함께가 아니라 독단적으로 움직이신 대가입니다. 이번 일은 알테어 님께서 실수하셨습니다.”
노골적으로 잘못을 지적당한 것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따질 수는 없었다.
짜내듯 말하는 에단의 모습을 보니 그가 화를 억누르고 있음이 느껴진 탓이었다.
게다가 이미 부하를 잃은 사람이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서두르십시오.”
굳은 얼굴의 에단을 선두로 나머지 마법사들과 리암, 그리고 까마귀들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