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격변.
“하…….”
클레리아가 흐려지는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땀이 턱에 애처로이 맺히며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폭주 후에 치유력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능수능란해졌음에도, 누에른을 치료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정말 칼리에의 말처럼 고치는 것보다 죽어 가는 속도가 혀가 내둘릴 정도로 빠르다.
한 부분을 고쳤다고 생각하면 그 주위는 이미 생명 반응이 없는 세포들이 허다했다.
오히려 누에른이 벌써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랄까.
평소에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마나 관리에 힘썼던 육체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다 어쩌면…… 칼리에 님이 예상하셨던 것보다 훨씬 기한이 앞당겨질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아득해져 클레리아는 꼭 쥔 주먹에 얼굴을 묻은 채 몸을 웅크렸다.
무섭다.
견딜 수가 없이 두렵다.
이전까지의 라스칸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황제가 죽어 버린다니.
그는 군주이자 전우이고, 정신적 지주다.
함께 라스칸트의 위기를 격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 버릴지도 모른다니.
클레리아는 자신이 더없이 무능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돼, 클레리아. 흔들리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못 해.”
서서히 고개를 든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누에른을 바라봤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용케 참아 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잠시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하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
근처에 다다랐을 때, 어딘가 이상한 소리에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 시종들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을 바깥에서 갑주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말소리가 함께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 눈에도 위협적인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대거 문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종들은 몇몇 기사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지금 무슨 일인 거죠?”
당혹감에 묻자 한 기사가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상황이 정리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나오셨군요. 황궁은 지금 이 시간 부로 폐쇄되었습니다.”
“예?”
질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대답에 클레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황태자 전하께서 국가 위험 사태를 선포하시고, 혹시 모를 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황궁 봉쇄를 명하셨습니다. 치유사님께서도 이 방 외에는 저희 수락 없이 어디도 가실 수 없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국가 위험 사태? 위험?’
황제가 갑자기 쓰러졌으니 당연히 민감해질 문제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황궁을 폐쇄해 버리다니.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마치 황제의 부재를 사방에 떠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게 오히려 더 타국에 약체로 비칠 가능성이 컸다.
“폐하가 위독하신 건 맞지만 이건 너무 과한 처사입니다. 1기사단장인 타이엔 프라이어스 공작을 뵈어야겠어요.”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기사는 위협적으로 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강압적으로 내려다보며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만나 뵙고 계십니다. 치유사님께는 충분하게 설명해 드린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황제 폐하의 대행이신 안투스 전하의 명에 반발하시는 겁니까?”
클레리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뭐라고요? 황제 폐하의…… 대행이요?”
황제에게 큰 변이 생겨 공석이나 부재 상태가 되었을 경우, 중앙 귀족과 황족이 모여 논의와 투표에 걸쳐 대행을 뽑는다.
결코, 이런 식으로 멋대로 혼자 정하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황제의 대행이라니?
“…….”
기사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섬뜩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그의 외형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은 갑주는 황실을 수호하는 1기사단의 것이 아니다.
클레리아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1기사단…… 근위대 기사들이 아니군요. 당신들 전부…….”
그 말에 답이라도 하듯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방 바깥을 메운 그들을 훑는 클레리아의 눈이 떨렸다.
스르릉
이제 더 말할 이유는 없다는 것처럼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기사가 서슴없이 검을 빼 들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차후 필요하신 건 저희가 조달해 드리겠습니다.”
차갑게 빛을 번뜩이는 칼날을 보며 클레리아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누에른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
쿵
방문이 닫혔다.
* * *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말 그대로. 황궁은 지금 위급 상황이네. 그러니 이제부터 황궁을 봉쇄하겠다는 거야.”
타이엔은 마주한 안투스를 매서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런 명령은 황제 폐하만이 내리실 수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참견하실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타이엔은 은근한 말투로 그가 월권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안투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쓰러지셨어. 그 때문에 지금 내가 황제 대행이지. 그대의 말이 맞지만, 지금 난 충분히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야.”
그의 말을 들은 타이엔의 눈썹이 격동했다.
“폐하가 쓰러지셨다고요?”
“그래,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소행에 휘말리신 것 같아 황궁을 봉쇄하려는 거야. 그러니 공 역시 협력해 줘야겠어.”
“당장 황실 보안을 강화하겠습니다.”
“아니.”
타이엔이 급하게 명령을 내리려 하자 안투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1기사단은 오늘부로 정직 처분이다. 당장 황궁에서 나가 처분이 풀릴 때까지 대기하도록.”
타이엔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진심이십니까? 황실 근위대를 정직 처분하신다는 게요?”
물음에 안투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했지. 그런데 폐하가 정하신 황태자인 나 안투스에게는 그에 걸맞은 충심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연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타이엔은 조금 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황제 대행을 이행하는 나에게 당연히 폐하를 향했던 충심의 방향이 틀어져야 할 터. 근데도 자네는 내 명에는 따르지 않고 의구심만 보이고 있군.”
안투스는 천천히 타이엔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가 쓰러지신 일의 주요 용의자로 황녀가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재밌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어. 세실리아가 프라이어스 공녀와 칼리스터 공자를 꼬드겨 황실 전복을 꿈꿨다는 보고가 있었거든.”
그의 말에 타이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근거 없는 헛소문입니다!”
“그래, 그럴 테지. 아무렴. 그런데 내 말에 자꾸 토를 달며 따르지 않는 그대를 보니 왠지 그 말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 같은 느낌은 뭘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 와중에 내가 근위대인 1기사단을 마냥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황궁 안보는 내 측근의 기사들로 대체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타이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안투스를 바라봤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간 알고 있었던 안투스가 맞는가?
지금 하는 말은 황실의 뼈대를 받치고 있던 3공작가가 반란의 주동자로 비칠 수도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너무도 망설임도 없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내뱉고 있다.
그들이 이제까지 황실에 바쳤던 충정 어린 그 시간을 모조리 부정해 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맞받는 안투스 역시 이런 생각은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다.
외려 그는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하나 알려 주자면 프라이어스 영애는 지금 황제 폐하와 함께 있어. 자네가 더 엇나가면 아까 말한 일로 난 영애를 추궁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늘어져 있던 타이엔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안투스는 굳은 타이엔의 얼굴에 흡족하며 물러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 당장 근위대는 정직 처분을 받아들이고 황궁을 나가 해산하도록. 무리를 이루는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명령 불복으로 간주하겠다. 큰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라면 생명 소중한 줄 알아야지?”
명에 따르지 않으면 그의 기사단원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
냉랭하게 내뱉은 안투스는 대동한 기사들과 함께 타이엔의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아 참, 영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설마 이 황궁에 있는데 무슨 일이야 생기려고.”
능청스레 말하는 안투스는 생전 타이엔은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그렇게 웃어 보였다.
* * *
“들어갈 수 없다고?”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황궁은 봉쇄되었고, 그 누구도 들이지도, 내보내지도 말라시는 명이십니다.”
에단은 날카롭고 빠르게 문지기와 갑자기 늘어난 경비병들을 훑었다.
어느 하나 눈에 익은 사람이 없었다.
‘전부 새로운 인원이 배치됐어. 대체 이건…….’
“난 칼리스터 공작가의 에단 칼리스터다. 거기에 황궁으로 입궁한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치유사님의 호위 기사기도 하지. 치유사와 호위 기사는 함께 움직이는 건 라스칸트 제국민이면 누구나 알아. 그러니 길을 열어라.”
차캉!
에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으나 가로막는 날카로운 창의 마찰음만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 아까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문지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예외는 없습니다.”
“당장 비키라니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문지기와 에단이 대치하던 그때였다.
긴장으로 한껏 팽창하던 공기를 찢고 한 목소리가 그들을 향했다.
“황궁 봉쇄라고 하지 않았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윗선의 명은 무시하고 보는 안하무인인 건가?”
문지기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레리안, 그가 내려오고 있었다.
전과 같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리안? 네 놈이 어떻게!”
스르릉!
에단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이런. 기사라면 검을 뽑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그렇게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송아지처럼 날뛰면 되겠어?”
레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척! 척!’하는 소리와 함께 에단의 주변을 문지기와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원을 그려 둘러쌌다. 그리고 들고 있던 기다란 창이 일제히 에단의 목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단 역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 채 레리안을 쏘아봤다.
“황궁엔 누구도 못 들어가. 그러니 이만 돌아가지?”
“네놈은 범죄자야. 리암을 죽이려 했던 살해 미수범이라고. 그런 놈이 왜 여기에 있지? 그것도 그런 멀쩡한 꼬락서니로?”
그러자 레리안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내가 리암을 죽이려 했다고? 증거 있어? 여기 누구 내가 그러려고 했다는 거 들은 사람 있나? 보고 받은 사람 있어?”
철면피인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는 목소리를 높여 주변에 떠들어 댔다.
한껏 능청스럽게 둘러보던 그가 히죽 웃었다.
“망상이 지나치네, 칼리스터 경?”
“레리안…….”
이를 으득 가는 섬뜩한 소리가 에단의 잇새를 타고 새어 나왔다.
그러나 레리안은 콧대를 치켜세우며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상황이 변할 기미가 보이질 않자 에단은 천천히 검을 쥔 손을 내렸다.
“그래, 네놈이 리암을 죽이려 했던 것도, 로더 저택에서 다른 이들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다 내 망상이라고 치자고.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레녹스는 어떻게 됐지?”
그의 물음에 순간 레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에단 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달아난 흔적을 봤다. 네 흔적은 명확했지만, 네 형은 그렇지 않았어. 레녹스는 어디에 있지?”
웃는 채로 얼굴을 굳혔던 레리안은 물끄러미 에단을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찢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렸다.
“그래, 그걸 묻는군. 역시나 말이야.”
그는 조용하고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래, 황당하겠지.
어이가 없을 거다.
오밤중에 침대에서 끌려 나온 일이 칠십 가까이 먹은 노인네에게 몇 번이나 있었을까. 아니, 저 양반에게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어쩌지? 그 일, 오늘 내가 저지르게 될 텐데.
레리안은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일을 지켜봤다.
엘레나가 이슬레이터 공작을 끌어들였으니 그 또한 자신의 가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들어선 캄스턴 저택은 순식간에 혼돈에 휩싸였다.
저택 홀은 이미 군데군데 사람들의 피 웅덩이로 참담함이 얼룩져 있었다.
무장한 이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시신이 나뒹굴었고, 그 사이. 캄스턴 후작이 있었다.
이런 참혹함에 한 번쯤 질릴 만도 할 텐데.
소싯적, 전장 좀 누볐다더니, 노익장이라도 과시하는 건지 허드슨 캄스턴 후작은 낯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분노로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자신의 차남을 바라볼 뿐.
“아버지는 절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 이제 한 번쯤 그러실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난 네가 두렵지 않아. 불량품이 무서운 인간은 세상에 없지.”
불량품이라.
레리안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압니다. 제게서 두려움을 느낄 분이 아니시죠. 하지만 아버지, 난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수 있는 약점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멍청하게도 그걸 드러낼 생각만 하고 있지, 숨기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죠. 그게 당신의 불찰입니다.”
레리안이 뒤로 고개를 까딱하자 무장한 몇 사람이 뭔가를 들고나와 레리안의 곁에 던지듯 내려놨다.
쿵
묵직한 소리에 이번에는 허드슨의 눈에도 동요가 일었다.
레리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발을 움직여 옆에 놓인 것을 뒤집었다.
“레녹스!”
그것은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레녹스였다.
그제야 허드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이야!”
아들이라…….
다시 한 번 레리안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레리안은 천천히 레녹스를 향해 앉았다.
“너무 그렇게 기겁하지 마세요. 살아는 있으니까.”
“내 아들에게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 말에 레리안은 검을 빼 들어 손잡이로 이마를 긁적였다.
“뭐 잊으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도 아버지 아들입니다.”
“너 같은 걸 아들로 둔 적 없어! 난 너 같은 불량품은 절대 인정 못 해!”
그 말에 못마땅한 얼굴로 허드슨을 바라보던 레리안이 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끝까지 그렇게 나와 주시니 흔들리고 자시고 할 새도 없군요. 레녹스를 여기까지 살려 온 것도 다행이라 생각되고요.”
그의 말에 허드슨이 무슨 의미냐는 듯 바라봤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레리안의 표정이 무척이나 쓰고, 메말랐다.
“이걸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레리안은 천천히.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마치 예술품을 다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날을 레녹스의 가슴팍에 밀어 넣었다.
“레녹스!”
갈라져 새된 허드슨의 절규가 홀을 울려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느리고, 정확하게.
레녹스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중간에 정신이 든 것 같은 레녹스가 그를 바라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묵직한 검은 그의 심장을 관통했고, 이어 뼈를 부수고 바닥에 꽂혔다.
레녹스의 손이 잠시 레리안을 붙들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손은 처음처럼 다시 힘없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녹스!”
비통한 외침이 몇 번이고, 홀을 울렸다.
자신을 경멸한다고.
넌 불량품이라고.
너 같은 게 내게서, 이 가문에서 나올 리 없다고.
그렇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정하던 아버지가 엉망이 된 몰골로 절규한다.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아끼던 장남의 죽음 앞에서.
푹!
레리안은 묵직하게 꽂힌 검을 레녹스에게서 뽑아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들썩였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레리안은 황망하게, 넋이 나가 버린 얼굴로 시신을 바라보는 허드슨에게로 다가갔다.
“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렇게 근엄 빼면 시체인 것 같던 사람이 아까의 일로 고작 몇 분 만에 세월의 풍파를 다 맞은 것처럼 너절해졌다.
주저앉은 채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와 레리안이 시선을 맞췄다.
“레녹스가 죽은 게 그렇게 슬픕니까?”
그제야 조금은 이성을 찾은 듯 허드슨의 눈이 분노를 담아 그를 향했다.
“내가 그렇게도 그리고 그렸던 대로 반응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악마 같은 놈.”
레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악마 같은’이 아니라 악마가 되기로 스스로 결정한 겁니다.”
그는 천천히 검을 허드슨의 목에 가져갔다.
“그렇게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장남의 곁으로 금방 가실 테니.”
“우쭐대지 마라. 불량품의 말로는 뻔해. 다시 쓸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어. 그저 남은 건 폐기. 그뿐이다.”
그 말에 레리안의 눈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날카로운 검날이 허드슨의 목을 막 파고들 때, 그가 나직이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널 놔버리듯 두는 게 아니었어.”
촤악
뜨거운 피가 레리안의 얼굴을 덮었다.
쿵
자신의 옆으로 쓰러진 후작의 시신을 보며 레리안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놔버리는 게 아니었다고?
그 말은 끝까지 붙들고 가르치려 노력했어야 한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사고를 치기 전에 애초에 그 싹을 잘랐어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그간의 행동을 생각한다면 의미는 여지없이 후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지막 빛을 잃어 가던 허드슨의 눈동자와 마주하고 나니 왜 선뜻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는 걸까.
레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뒤에 선 무장한 이들에게 말했다.
“캄스턴 저에 있는 기사들에게 전해.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건지, 아니면 후작이 입버릇처럼 말하며 가르치던 실리대로 살 건지 선택하라고. 이제 이 저택의 주인은 나니까.”
그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캄스턴 저택의 창문으로, 떠오르는 해가 서서히 빛을 비췄다.
레리안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그런 그를 에단이 말없이 노려봤다.
“뭐, 레녹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알려줄 건 아닌 것 같고. 뭐, 잘 살겠지. 그 잘나신 양반이. 어디서든 못 벌어 먹고 살겠어? 큭.”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레리안이 시선을 회피했다.
“칼리스터 경은 남의 집안 사정에 너무 관심이 많네. 지금 자기 일도 해결 못 하면서 말이야. 한 가지 사족을 하자면…… 이제 캄스턴 후작은 이 몸이야.”
“……?”
커졌던 에단의 눈이 서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저 말은 레녹스도, 캄스턴 후작도 이미…….
‘더 시간을 끌 수 없어.’
에단은 조용하고 빠르게 주변에 있는 이들과 지원을 올 수 있는 멀찍한 거리의 인원을 계산했다.
‘단번에 튕겨 내면 승산이 있어. 다만 황궁 안에 들어서까지도 귀찮은 일이 이어질 것 같다는 게 문젠데…….’
“그만둬.”
마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레리안이 경고했다.
“그때처럼 일격으로 날려 버릴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지금 넌 그럴 상황이 아니야.”
“무슨 소리지?”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자 레리안은 재밌다는 듯 손을 비비며 웃어 보였다.
“넌 지금 볼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반동분자이기도 하거든.”
그 말에 에단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것이 재밌는지 레리안의 입가에서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무슨 말이야? 그게?”
“네가 까딱 잘못했다가는 황궁 안에 있는 사람이나 저 밖에 있는 사람. 둘 중 하나는 골로 간다는 뜻이야.”
“……!”
에단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안에 있는 건 클레리아를 말하는 것일 거고, 밖은…… 설마 아버지?
예상치도 못한 일에 다시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였다.
“모두 창을 거둬라.”
한껏 경직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고, 레리안과 에단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는 기사단원과 함께 나온 이슬레이터 공작이 있었다.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
에단이 기쁜 얼굴로 그를 불렀고, 레리안은 카이론과 눈을 맞춘 후 불쾌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런 그가 몹시도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무슨 일인지 카이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에단에게 향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장 집무실로 저와……!”
에단이 다급히 설명하려 하는데 카이론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칼리스터 경은 자택으로 귀환해 근신하도록. 다른 황명이 있을 때까지 자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라. 또한, 3기사단 역시 정직 처분으로 해산될 테니 무리 지을 생각은 추호도 않는 게 좋아.”
“근신이라고요? 지금 저보고 근신하라고 하신 겁니까? 게다가 3기사단이 정직…… 해산이라니요!”
에단이 외쳤으나 카이론은 인상만 쓴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황명에 반할 생각은 접도록. 그렇게 되면…… 즉결 처분이다. 알겠나? 당장 돌아가.”
“각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이 침통히 불렀으나 카이론은 그대로 돌아서서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물러나 있던 레리안과 눈이 마주쳤으나 잠시 노한 시선을 보낼 뿐 그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두고 문지기와 경비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볼모인 처지에서 구해 준 걸 감사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나라면 그럴 텐데 말이지.”
비통함과 분노가 뒤섞여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에단은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며 멀어지는 레리안을 바라보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3기사단의 상황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타이엔이 안투스와 대면해 경험했듯 비슷한 상황이 엘빈 칼리스터에게도 반복되고 있었다.
단지 그의 앞에 있는 것이 윈터펠로운 가의 타일러라는 점만이 달랐을 뿐.
갑자기 들이닥친 타일러와 기사들로 인해 엘빈의 집무실은 터질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타일러가 전달하는 3기사단의 정직과 해산 처분에 엘빈이 격분했고, 타일러 역시 냉랭하게 그것을 받아쳤다.
잠시 평화를 가장한 날카로운 대화들이 오가고.
마침내 긴장감이 극으로 치달아 버린 것은 안투스가 황제 대행이라 밝힌 시점부터였다.
“대행? 감히 폐하가 건재하신데 대행이라고? 겁도 없이 3공작가 중 하나인 나 엘빈 칼리스터의 앞에서 그딴 말을 함부로 지껄여?”
우당탕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통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타일러는 동공으로 그것을 쫓다 다시금 싸늘하게 엘빈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각하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 아닙니다. 통보일 뿐이죠.”
“뭣이?”
“감히 네놈들이 칼리스터 각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거냐!”
“각하! 이들은 지금 모반을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처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스르릉! 스릉!
엘빈과 함께 있던 3기사단의 기사들이 검을 뽑았고, 동시에 타일러와 함께 집무실에 들이닥친 기사들 역시 검을 빼 들었다.
자칫 바로 혈쟁이 일어나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사정없이 찢겨나갈 것처럼 그들 사이에 있던 공기가 팽창하는 가운데 타일러와 엘빈이 서슬 퍼런 시선을 맞받았다.
“누에른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빈사 상태시죠. 그렇기에 전하께서 대행을 맡으셨습니다.”
“뭐라? 그럴 리 없다! 폐하가 위중하시다면 보고를 받지 못했을 리 없어!”
그렇게 말하는 한편으로 엘빈은 불안했다. 칼리에와 클레리아가 급하게 황궁으로 불려갔다는 걸 에단에게 전한 게 그였으니까.
‘설마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불려갔단 말인가?’
엘빈이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을 물릴 기색이 보이지 않자, 타일러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틀며 품을 뒤졌다. 그리고 통화경을 들어 마나를 흘려 비췄다.
“……!”
통화경 안에는 많은 경비대에 포위되어 목에 창검이 겨눠진 에단의 모습이 비쳤다.
그것을 짧게 보인 타일러는 마나 연동을 끊고 다시금 통화경을 뒤에 있는 기사에게 넘겼다.
“지금 보신 건 황궁은 보안상의 이유로 봉쇄 조치 되었고, 그곳을 각하의 자제인 에단 칼리스터 경이 막무가내로 출입하려 해 벌어지고 있는 실시간 상황입니다. 황궁은 칼리스터 경을 경계하고 있어요. 1기사단도 이미 정직 처분을 받고 해산되었습니다. 왜겠습니까?”
그의 말에 엘빈의 미간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이 칼리스터 공작가, 프라이어스 공작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각하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더 들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저들을……!”
엘빈의 곁에 있던 이가 검을 들고 달려들려 할 때, 타일러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누구라도 거기서 움직이면 에단 칼리스터는 죽는다.”
그 말에 기사들과 엘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안투스 전하께서 말미를 주었다는 걸 감사히 생각하셔야지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 모두 반역죄로 진작 끌려갔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보고에 대한 진위 파악 전까지 기사단 해체로 끝내주신 걸 감사해야 할 겁니다.”
담담히 말하고 있어도 타일러의 뒤에 오만방자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엘빈은 꿰뚫어 봤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숨어 있다 튀어나와 가장 주축인 이를 등에 업고 주요 인물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간 윈터펠로운은 존재감이 미미했던 귀족 중 하나였으니까.
당했다.
완전히.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존재감 없이, 자격도 없이 지내던 안투스가 이렇게 대담하게 일을 벌일 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저 누에른이 건재하기에 그가 황제가 되는 날은 멀었다고.
아직 그를 가르치고 바르게 이끌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엘빈은 천천히 손을 들어 기사들을 저지했다.
“기사단을 해산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는 건가? 안투스 전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 건가?”
“차후에 다른 명이 있으시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습니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던 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도록 하지.”
“각하!”
엘빈의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여기서 당장 이들과 함께 타일러를 쳐 이긴다고 해도 다음이 문제다.
바로 칼리스터는 반역자로 찍힐 것이고, 제국민은 진실도 모른 채 칼리스터를 몰아세울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황궁 봉쇄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많은 전력을 확보해 놓은 상태라는 것.
‘차라리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타이엔과 카이론을 만나 논의해서 제대로 전세를 엎을 기회를 찾아야 해. 내 기사들을 허무하게 이런 곳에서 잃을 순 없어.’
타일러는 그의 마음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요. 3기사단원들은 오늘 단장님 덕에 목숨을 부지한 줄 알아라. 각하께서도 명심하십시오. 이 이후에 무리 짓는 낌새라도 보이면 그 즉시 명령 불이행과 반역의 죄를 묻게 될 테니.”
그렇게 타일러와 그의 기사들이 엘빈의 집무실을 나갔고, 그제야 3기사단원들은 자신들 때문에 엘빈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에단의 몫까지 더해.
“각하…….”
그의 집무실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쾅!
나가는 도중 타일러는 급하게 3기사단 건물로 들어오는 에단과 마주쳤다.
“너……!”
그의 눈에 불이 일며 당장 멱살을 쥘 듯 다가섰으나 에단은 곧 걸음을 멈췄다.
타일러 뒤에 있던 기사들이 그를 보고 일제히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기에.
에단은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애써 골랐다.
“네 녀석이 아버지께 온 거로구나. 네 놈이 레리안과 손을 잡다니, 윈터펠로운은 그리도 보는 눈이 없군? 그러니 중앙 귀족에서도 만년 없다시피 했던 거야.”
그 말에 타일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말이 맞지만…… 애석해서 어쩌지? 그래도 이번에는 그 덕을 좀 본 것 같거든.”
그렇게 대꾸한 뒤 지나쳐 나가려던 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행동하다 한순간 볼모가 되는 꼴이면, 아버지께 너무 볼썽사납지 않은가? 칼리스터 경?”
에단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역시 날 미끼로 아버지를 위협하고 있던 건가.
그가 완전히 기사들과 사라지기 전 에단이 그를 향해 말했다.
“언젠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타일러 윈터펠로운.”
* * *
“꺄아아악!”
들려오는 비명에 엘레나의 어깨가 흠칫 들썩였다.
황궁 내부로 들어서는 길은 어수선했다.
여기저기 기사들의 제압으로 기존 황실 시종들이 짓밟히고 있었고, 그 사이를 레리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엘레나가 걸었다.
“생각보다…… 좀 불편하군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원래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게 늘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라서 말이죠.”
나들이 복장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엘레나와 사람들을 제압하는 기사들의 분위기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녀를 이끄는 레리안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지만, 엘레나는 잠시 이런 복장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괜히 아끼는 옷을 입었어. 잠자리만 뒤숭숭해지게.’
그렇게 그녀는 이전에는 가 보지 못했던 황궁 깊숙한 곳으로 점점 더 들어갔다.
황족이 아닌 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을 넘어 더 깊이 들어가길 몇 분, 레리안은 무척 호화로운 방문 앞에서 섰다.
“엘레나가 묵게 될 방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갖 금장식과 귀한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 드러났다.
“여긴?”
“원래 황제의 후궁이 쓰던 방 중 하나인데 뭐, 누에른 폐하께서는 후궁을 두지 않아 비어 있던 곳이지요. 보안도 잘 되어 있는 편이고, 엘레나에게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여서 골랐습니다. 이제 우리가 로열라인이 아니겠습니까?”
방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둘러보는 그녀를 대신해 레리안이 손을 튕기자 하인들이 서둘러 트렁크들을 일제히 옮겨 방으로 들여놨다.
“한동안은 이곳에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윈터펠로운과 그 수하의 가문들이 황궁 내부를 정리 중이고. 아무래도 나라 안팎으로 약간 잡음이 있겠죠.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 방과 내가 지정해 준 곳만 돌아다니는 게 좋을 겁니다. 또한, 움직일 땐 나도 동행하는 게 좋을 거고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난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거 질색이니까 어려운 건 레리안이 맡아요. 우리 아버지와 기사단까지 빌려줬는데 나까지 요란한 일에 휘말리게 만드는 건 염치없는 짓이라는 거, 알죠?”
레리안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방에 붙어 있는 테라스 쪽 커튼을 젖혔다.
“자, 그럼 황궁에서 보내는 화려한 첫날인데 뭘 할 거죠? 바깥이 소란스러우니 역시 방에서 머무는 게 나으려나요?”
엘레나는 그의 옆에 다가서서 아직 황궁에서 일어나는 아수라장은 전혀 모르는 듯 고요한 수도 본트리스를 바라봤다.
“아뇨. 황궁에 온 김에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말에 레리안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클레리아. 여기에 있죠? 걜 만나고 싶어요.”
* * *
“하…….”
클레리아는 손에 들린 조촐하다 못해 성의 없기 짝이 없는 쟁반 내용물을 보며 기가 막힌 한숨을 내뱉었다.
말라 버려 돌이라 해도 믿을 딱딱한 빵 한 조각과 물.
그것이 그녀가 오늘 받은 식사의 전부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차후 마련해 주겠다고? 하……. 어림도 없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푸대접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어차피 그녀는 지금 거의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니 제대로 된 식사를 줄 거라는 생각조차 무리였을까.
이쯤 되니 정말 감옥에 갇히지만 않았을 뿐,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클레리아는 잠시 분이 섞인 숨을 내뱉다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이도 잘 들어가지 않는 빵을 뜯어 먹었다.
‘어떻게 해서든 체력도, 기력도 보존해서 빠져나가야 해. 에단과 아버지. 모두에게 알려서 이 사태를 진정해야만 해. 그러니 난 이런 취급이라도 너희 의도대로 절대 당해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억척스럽게 빵을 다 먹어치우고 물까지 깨끗이 비워 냈다. 그리고 다시금 누에른의 옆에 앉아 그의 상태를 돌봤다.
끼익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노크도, 어떠한 예고도 없이 침실 문이 열렸고. 클레리아는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구나?”
아닐 거라고.
애써 외면하고 일부러 더 생각지 않으려 했다.
설마 그녀라도 그렇게까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거라고.
그렇게 에단과 수십 번 애써 외면했는데. 그 얄팍하고 자위적이었던 믿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문을 열고 클레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다름 아닌 엘레나 이슬레이터였다.
버틸 거라고 다짐하며 억지로 씹어 삼켰던 거친 빵이 그제야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차라리 맞는다면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끝까지 뒤에서 숨은 채 있길 바랐는데.
아수라장이 된 황궁 내부의 사정과는 달리 누가 봐도 당장 호사스러운 나들이를 나가도 이상할 것 없는 차림새의 엘레나가. 게다가 위중한 상태로 누에른이 누워 있는 침실에 들어오면서도 낯색 하나 바뀌지 않는 저 얼굴이.
클레리아의 가슴을 무던히도 답답하게 하면서도 깊은 배신감에 차오르게 했다.
“…….”
눈을 마주친 이후로 놀란 기색이더니 곧 싸늘하게 식어 버린 클레리아의 시선에 엘레나가 문을 닫았다.
“몰골을 보아하니 대우가 나쁘진 않았나 보네. 운이 좋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여전한 비아냥거림도 완벽히 척을 진 상대라 생각하니 감응이 일지 않았다.
그런 감정들도 조금이나마 애정이란 것이 남아 있어야 생기는 것일 테니까.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클레리아의 반응에 외려 엘레나가 인상을 썼다.
“뭐야, 사람 말 대놓고 무시하는 거야? 넌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내 속 긁는 거 하나는 아주 잘하는 것 같아.”
끼익
그때 클레리아가 아무런 대꾸 없이 일어섰다.
그 모습에 엘레나가 잠시 움찔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들고 있던 쟁반을 정리해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너 사람 말하는 게 말 같지 않아? 이곳에 갇힌 꼴이 된 주제에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한 척할 수 있을 것 같아?”
앙칼진 엘레나의 말에 클레리아가 그제야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거니?”
“뭐가?”
되묻는 말에 클레리아가 거뒀던 시선을 다시 엘레나에게 뒀다.
“폐하가 쓰러지신 걸 보고도 넌 아무것도 묻지 않는구나.”
“…….”
방에 들어선 후 끊임없이 말을 꺼내던 엘레나는 그제야 조용해졌다.
당연히 묻지 않을 수밖에.
황궁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미 레리안을 통해 모두 설명을 들은 이후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황제 누에른이 저리된 게 뭐 어때서?
그는 클레리아를 총애했고, 이목을 끌게 했다.
기고만장하도록 배경을 만들어 준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아닌가.
치유사의 등장으로 인한 당연한 절차든 아니든 엘레나에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클레리아를 공표한 그때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꼬였다고 생각했으니까.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틀어졌으니까.
에단과의 약혼부터 꼴 보기 싫도록 나대는 클레리아까지.
그래, 그래서 오히려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전달 들었을 때는 놀라움 반 통쾌함 반의 기분이 들었다.
클레리아를 옹호하지만 않았더라도 폐하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업보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누워 있는 누에른을 쏘아볼 때, 클레리아가 다시금 물었다.
“궁금해하지도, 놀라지도 않는 건 폐하께 무슨 일이 있는지 이미 알기 때문인 거지? 그렇지?”
“그래. 그래서? 그게 나빠?”
태연히 대꾸하는 그녀를 보는 클레리아의 눈이 시시각각 매서워졌다.
“아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나쁘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 하지만 네 대답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엘레나 이슬레이터, 넌 폐하가 쓰러지신 연유에 대해 아는 거구나? 그렇지?”
‘아!’
순간 정곡을 찔린 것에 엘레나가 아차 하며 손으로 입을 가릴 듯 들어 올렸다. 중간에 멈추긴 했지만, 클레리아가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저렇게 속도 감추지 못할 거라면서 이런 기가 막힐 일에 겁도 없이 가담했단 말인가? 엘레나 이슬레이터, 너란 사람은 정말……!’
클레리아는 낮게 시선을 깔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 난 여기 갇힌 꼴이야. 누구와도 접선할 수 없고, 내 목숨줄은 너희가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지. 그러니 알게라도 해 줘. 누구야? 폐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설마…… 엘레나 너야?”
물음에 엘레나는 인상을 썼다.
“미쳤어? 내가 이딴 짓을 왜 해? 내가 이렇게 위험한 짓에 직접 손을 댈 것 같아?”
“그럼 말해 봐. 네가 이 일을 벌인 사람과 손을 잡았다는 건 알겠어. 넌 이런 일을 벌일 배짱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꾸몄겠지. 말해 봐. 레리안이란 그 사람이야? 아니면 타일러 윈터펠로운? 그도 아니면?”
몰아세우듯 점차 커지는 클레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레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하라니까!”
분을 참지 못한 클레리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물러서! 내가 지금 너랑 희희낙락거리려고 온 사람으로 보여?”
“나도 너랑 희희낙락할 생각 없어. 폐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말해!”
“네가 직접 알아내면 되잖아! 그렇게 잘나신 몸이잖아, 너. 너 그렇게 사람들 총애 못 받아서 안달 난 사람이잖아? 근데 왜 내게 물어? 천하의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가 모르는 것도 있어?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눈을 부릅뜬 채 악쓰는 엘레나의 팔을 클레리아가 거칠게 잡아챘다.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는 왜 안 보이시지? 아무렴 네가 이렇게까지 엇나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분이 아닌데!”
그 말에 엘레나가 비웃음을 흘리며 클레리아를 조롱했다.
“우리 아버지가 날? 왜? 아무리 너랑 에단이 날고뛰어도 카이론 이슬레이터는 내 아버지야. 내 편을 들면 들었지 너희 편을 들지는 않아!”
그 말에 클레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 각하께 무슨 짓을 했어? 설마 이슬레이터 각하께까지도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 엘레나 이슬레이터! 너 대체 얼마나 엇나가려고 이러는 건데? 어? 대체 뭘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 정신을 차릴 건데! 네 아버지잖아! 네 혈육이잖아! 가족이잖아!”
그 순간.
엘레나는 처음으로 클레리아가 두려웠다.
지금껏 불안하고 불분명하게 느끼던 모든 것들이 괜찮다고. 이건 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모두가 그녀 스스로가 바로 서기 위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듯 독려하던 것을 한꺼번에 질책당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인지하자 갑작스레 온몸이 떨려 왔다.
엘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껏 팔을 붙들고 있는 클레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해! 네까짓 게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이 꼬락서니를 하고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어?”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네 선택의 끝은 비참할 거야, 엘레나 이슬레이터. 후회해도, 용서를 빌어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라고.”
“네 걱정이나 하시지? 너야말로 여기서 살아나갈 수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클레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널 보러 온 건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야. 네가 누리던 모든 것들, 다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거라고 말해 주러 온 거야.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아니면 혀 깨물고 죽고 싶어질 테니까.”
엘레나는 표독스럽게 내뱉고 손으로 몸을 탁탁 털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계집애다.
한때 친우라고 여겼던 것이 수치스러워 지워 버리고 싶을 정도다. 왜 진작 이런 계집애에게 그리도 미련을 못 버린 걸까.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섰다.
“이미 대세는 우리에게 기울었어. 너야말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렇게 내뱉은 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잠시 커졌던 엘레나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참 궁금해.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는지. 난 그리 오래 못 간다에 걸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무장한 기사들이 황제 침실로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죠? 폐하가 위중하십니다! 이렇게 함부로 우르르 몰려들다뇨!”
그러나 그녀의 호령이 무색하게도 기사들은 클레리아를 감싸고 순식간에 손을 포박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난 황제 폐하를 간호해야 하는 치유사입니다! 당장 이거 풀어요!”
“당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안투스 전하께서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이제 볼일이 끝나셨으니 다른 곳으로 모시라는 명입니다.”
“다른 곳? 다른 곳이라면…… 그게 대체 어디로!”
그때 한 기사가 클레리아의 눈을 검은 안대로 가려 묶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풀어요!”
비명에 가깝도록 소리 질러도 그들은 그저 클레리아를 결박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버둥거리며 끌려가야만 했다.
발버둥을 칠수록 붙들린 팔을 죄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폐하! 폐하! 엘레나 당장 그만두라고 해! 정말 더 늦어지기 전에 당장 멈추라고 말해!”
“나한테 후회할 거라고 엄포 놓던 방금 그 여자는 어디로 갔나 몰라? 내게 했던 대로 해 봐. 이들이 놔줄지 혹시 알아?”
“엘레나 이슬레이터!”
클레리아의 비통한 외침에도 엘레나는 그저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지켜봤다.
“폐하! 누에른 폐하!”
멀리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어디선가 레리안이 나타나 엘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라던 회포는 잘 풀었나요?”
“회포랄 것도 없어요. 그저 앞으로의 위치를 상기시켜 줬을 뿐…….”
흥분이 가득했던 엘레나의 시선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것이 조금 의아했던 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쓸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클레리아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처음으로.
레리안은 처음으로 엘레나를 만난 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조금은 긴장한 듯 지켜보던 중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돌아가요.”
어딘가 맥이 빠져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은 착각일까?
먼저 앞장서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리안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 * *
“꺄악!”
거칠게 등 떠밀린 클레리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앞으로 머무실 곳입니다. 조용히 지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란을 일으켜봤자 내려지는 명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탁
나직한 경고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레리아는 서둘러 눈이 가려진 안대를 벗어버렸다.
“여긴?”
생전 처음 보는 방이었다.
아무리 황궁을 드나들었어도, 그들이 생활하는 황궁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클레리아는 급하게 일어서서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철컥
밖에서 잠긴 건지 문고리가 헛돌았다.
“열어요! 제가 없으면 폐하가…… 폐하가 당장 잘못되실지도 모른다고요! 이런 말은 없었잖아! 당장 문 열어!”
그러나 모두 물러가기라도 해 버린 건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있는 힘껏, 클레리아는 문을 두드렸다. 흔들고 때리고, 발로 차고 몸으로도 들이받았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통증에 물들고 나서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하…… 칼리에 님…….”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클레리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 *
어둠이 깔린 깊은 밤.
안투스는 조용히 누에른의 방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방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그를 알아보고 예를 갖췄다.
“지시대로 그 치유사는 치웠고?”
“명하신 즉시 방에서 빼내 지정하신 곳으로 옮겼습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안투스가 음산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방으로 들어갈 테니 너희는 복도 끝으로 자리를 옮겨 보초를 서라.”
“예? 하지만 혹시 전하께 위험이라도 생기면…….”
그 말에 안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니야. 그러니 내 명대로 하도록.”
경비병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곧 묵례로 답했다.
끼익
이어 안투스가 누에른의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몇 개의 초만이 밝히는 방안은 약해진 누에른의 숨소리만큼이나 처량했다.
그의 존재감이 미미해진 방 안으로 들어선 안투스는 천천히 자신의 아버지가 투병으로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클레리아가 끌려나가고, 더욱 나빠진 안색 위로 촛불의 빛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오래 버티시는군요. 사실 하루 정도면 오래 버티는 거겠거니 싶었는데 이때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치유사의 덕만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누에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 근처로 귀를 가져갔다.
낮고 힘없는 숨소리가 끊길 듯 간신히 이어졌다.
안투스는 다시 허리를 펴 그를 내려다봤다.
찬찬히 누에른의 눈썹과 이마, 눈매. 콧대와 수려한 얼굴선.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마치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듯 그렇게 세세히 살폈다.
“왜 내게 거짓말한 겁니까?”
한참이나 그렇게 침묵하던 안투스가 물었다.
“내가 당신 아들일 리가 없어.”
그는 못마땅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매우 불손하게 누에른의 뺨을 툭툭 쳤다.
“당신과 나는 눈썹 하나, 손가락 하나조차 닮은 것이 없는데 어찌 내가 당신 아들이지? 왜 날 속인 거야?”
안투스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로 답을 구하듯 누에른을 향해 물었다.
사실 그는 누에른을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다. 외적인 면은 어머니와 외가를 빼다 박았기에 정말 누에른의 핏줄이 맞느냐는 항간의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핏줄이 맞았고, 외척을 쏙 뺀 외모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아버지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나 그에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강압적인 아버지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머니의 부재. 거기에 살갑지 않은 누님과의 관계와 늘 비교당하는 삶은 안투스를 스스로 지나치게 몰아세우기 충분했고, 그렇게 그는 점차 망상에 사로잡혀 음울해져 갔다.
이렇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강제적으로나마 붙들어 줄 누에른도, 세실리아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고민했습니다. 왜 나는 이곳에서 겉도는 것인가. 왜 나는 배척받는가. 어째서 늘 강요받는가.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죠.”
안투스는 식은땀에 젖은 누에른의 이마를 쓸었다.
“당신들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고결한 내가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배척하고 몰아세우고 짓누른 거지.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테니까.”
그는 천천히 커다란 두 손을 들어 황제의 코와 입을 막았다.
간신히 숨을 유지하던 누에른의 몸이 점차 발작하듯 튕겼고, 이윽고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뒤틀렸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몸은 안투스를 밀어내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불규칙하게 몸을 튕기는 그의 반응이 점차 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누에른의 온몸이 축 늘어졌다.
처연하게 늘어진 누에른을 내려다보는 안투스의 눈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지자 그제야 안투스는 손을 뗐다.
살짝 벌어진 누에른의 입술 사이로, 숨도. 그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쟁이의 말로는 이런 법이지.”
그는 나직한 말을 남기고 천천히 방을 나갔다.
그렇게 누에른의 침실에는 고요히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만이 불을 밝혔다.
* * *
철컥
지쳐 쓰러져 바닥에서 잠들었던 클레리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밖은 이미 어두워진 채였다.
어찌나 문을 열려 발버둥을 쳤는지 손이 퉁퉁 부어 아렸다.
그녀는 아픈 손을 매만지며 소리가 들려온 문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분명 문 너머에서 나는 소리였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대고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스륵 저벅저벅 스륵
분명한 인기척에 클레리아가 흠칫 놀라 물러섰다.
분명, 이 문 바깥에 사람이 있다.
그렇게 그냥 걸어 다니는 기척과는 달랐다.
‘대체 뭐지? 이 방 너머에 뭐가 있는 거야?’
전혀 가늠조차 되지 않음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얹고 힘을 줬다.
철컥
낮과는 달리 문고리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이렇게 쉽게?’
낮에는 그렇게 한꺼번에 몰려와 결박까지 해서 가둬 두고는 갑자기 문이 열린다?
전혀 이해할 수도, 달가운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도망이라도 칠 수 있는 구실이 있다면 붙들어야 했기에 클레리아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어지러이 굴리던 시선이 무언가와 마주치고는 그대로 멈췄다.
아니, 사실 너무도 소름 끼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그대로 얼어 버린 게 맞았다.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안투스였다.
그가 정복을 벗으며 크라바트를 풀다 문을 여는 클레리아와 마주친 것이었다.
‘대체 왜 황태자가 여기에?’
당혹스러움 그 자체인지라 서둘러 바깥을 살피고 클레리아는 더욱 경악하고 말았다.
그곳은 분명 안투스의 침실이었다.
그러니까 클레리아는 정확히 안투스의 침실에 딸린 별실과도 같은 방에 지금껏 감금되어 있던 것이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차라리 외진 탑 꼭대기라던가 지하 감옥에 가둘 것이지 이런 곳에 감금하는 의도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불쾌하고 불길한 사람의 바로 옆에!
싸늘한 눈으로 클레리아를 바라보던 안투스는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지금 이 상황도 당혹스러운데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클레리아가 주춤주춤 물러서다 서둘러 문을 닫았다.
탁!
그러나 순식간에 문을 잡아챈 안투스의 손에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지? 나와 마주한 게 그리도 싫은가?”
“반가울 리는 없지요, 전하.”
이를 악문 채 온 힘을 다해 문을 닫으려 힘을 줬으나 그가 막아선 탓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클레리아의 대답에 안투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렇게 독대한 적이 거의 없지 아마? 이번 기회에 담소라도 나눠 보는 게 어떤가?”
“아뇨, 할 말 없습니다.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문을 놓아주시죠.”
그러나 그녀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안투스는 열린 문틈으로 발을 집어넣어 더욱 간격을 넓히고 있었다.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의중도, 태도도. 그 어떤 것도 불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 자리가 기분 나쁜 벌레가 들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쾅!
그러나 힘으로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안투스가 단번에 문을 밀어 열어젖혔고, 클레리아는 그대로 밀려나 버렸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채 그와 대치했다.
힘으로는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파악한 안투스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조소하며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내가 뭘 했다고 그리 무서워하는지 모르겠군.”
“황제의 대행이 되셨다고요. 귀족들의 의견 수렴도 없이 그런 중요한 자리를 혼자 멋대로 정하실 순 없죠. 게다가 시종들을 전부 내쫓으시는 걸 봤습니다. 그리 행동하시는 걸 봤는데 어떻게 전하를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죠?”
클레리아의 말에 안투스의 입가에 비릿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말은 바로 하지. 지금 영애는 경계가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지 않나?”
클레리아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해도 결코, 지금 얕보여서는 안 됐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클레리아를 보며 안투스가 희미하게 다시 미소를 짓고 천천히 다가갔다.
“전부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 어차피 국민도, 귀족도. 모두가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법도인 것을. 하물며 치유사마저도 말이지.”
다가오는 그를 피하려 자꾸 물러서던 클레리아의 뒤가 벽으로 가로막혀 버렸다.
그녀가 당황할 때도 안투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다지도 신비롭고 강한 존재를 어째서 황실만을 위한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인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자 그가 손을 들었다.
안투스의 앙상한 손이 클레리아의 백금발 머릿결을 마치 아름다운 것에 취한 듯한 손길로 살짝 쥐었다 놓았다.
무서웠다.
늘 존재감 없다고만 생각했던 안투스에게서 이런 두려움을 느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석연치 않음과 두려움.
불길함과 불쾌함.
그는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것을 뒤섞어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풍겨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클레리아는 두려움 반, 오기 반으로 그의 눈을 똑똑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선황제들께서 왜 그리 하지 않으셨는지 이해도, 알 수도 없으시다면…….”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황태자의 자격이 없으신 거죠. 아니, 황족의 자격조차 없으신 겁니다.”
“하.”
공포심에 떠는 주제에 어떻게든 시선을 맞춰 오는 저 당돌함과 앙칼지게 대꾸하는 모습에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안투스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그녀의 목 근처로 손을 뻗었다.
“그런가? 그런데 어쩌지? 이제 이 나라의 황제는 내가 되었는데?”
꼿꼿하게 바라보던 클레리아의 눈동자가 그제야 흔들렸다.
“……네?”
“그러니 널 취하는 것도 이젠 내 마음이야.”
섬뜩한 말과 함께 그의 손이 클레리아의 목에 닿았을 때였다.
파지지직! 파바박!
강한 스파크에 안투스가 황급히 손을 뗐다.
파직 파지직
푸른 스파크가 그들의 주변에서 잔재처럼 남아 불꽃을 튀겼다.
아주 잠깐이었을 뿐인데도 휘말렸던 손이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안투스는 이제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바꾸며 인상을 썼다.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을 한 거지?”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과 차갑게 식어 덜덜 떨리는 두 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푸른 스파크 사이로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안투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수작질을 한 거냐고 물었다!”
노기가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에단에게서 돌려받았던 리본 브로치를 꽉 쥐었다.
그것을 본 안투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군. 이건 그 칼리스터의 애송이 짓인가? 엘라단에서 그놈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놨어야 하는 건데.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끝까지 말썽이군.”
그의 말을 들으며 클레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우며 그를 노려봤다.
“에단은…… 당신이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에 안투스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 과연 그럴까? 하지만 상관없어.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그놈이니까. 네가 내 손아귀에 있는데 안절부절못할 건 내가 아니지.”
불안과 공포가 방 안을 넘실거리며 그녀를 휘감음에도, 클레리아는 자신과 함께 있는 에단의 존재를 느꼈다.
나는 여기에 있어.
난 너와 늘 함께 있어.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의 마음이.
목소리가.
온기가 바로 곁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에단이 내게 이 브로치를 돌려주기 전에 뭔가 장치를 해 놓은 거야.’
클레리아는 리본을 꽉 쥔 채 안투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 해도 당신은 날 손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어. 에단이 그렇게 두지 않아!”
여유롭던 안투스의 시선이 점차 냉랭하면서도 건조해졌다.
자신의 방 옆에.
그것도 볼모로 잡혀 덜덜 떠는 주제에 저 여자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간혹 주춤거리긴 하나 그 심지만은 고개가 꺾일 줄 모르는 채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넌 절대 우리에게 범접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치 아버지 누에른과 누이 세실리아에게서 보였던 그런 후광이 그녀에게도 있는 양 말이다.
배알이 뒤틀렸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저 꼴 사나운 여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그러나 조금 전 손으로 느껴졌던 고통의 기억이 워낙 세 선뜻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래, 지금 당장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프라이어스 영애. 사람은 언제나 방법을 찾게 되어 있어.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아. 그쪽을 보호해 주는 게 없어진 후나 걱정하는 게 좋을걸?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부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클레리아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안투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천천히 돌아섰다.
“시간은 많아, 오늘 대화는 이쯤으로 하지. 다음 대화를 기약하자고. 어차피 그대의 자리는 여기. 내 방 바로 옆일 테니까.”
탁
그가 나가자 가까스로 억눌렀던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문으로 다가간 클레리아는 미친 듯이 방 안의 물건을 모아 문 앞에 쌓기 시작했다.
의자를 가져와 문고리를 막았고, 갖가지 장식장으로 그 곁을 채웠다.
온갖 것을 쓸어 쌓은 후에야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그녀는 넘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툭, 투둑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눈가를 비집고 터져 버렸다.
그녀는 안투스가 듣지 못하게 최대한 울음소리를 참으며 두 손으로 리본 브로치를 꽉 쥐었다.
‘무서워…… 무서워, 에단……!’
방구석에 숨듯이 몸을 만 클레리아는 혼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 * *
어둠이 깔린 칼리스터 저택은 긴장과 긴박함으로 정적이 흘렀다.
외부의 눈을 피해 고용인들을 대피시키고, 공작과 에단 역시 서둘러 저택을 떠나는 중이었다.
황궁은 이미 장악당했고, 수도의 주요 기사단 역시 해체당했다.
이대로라면 공작가의 사람들 또한 언제 어느 때에 누명을 써 투옥될지 몰랐다.
아니, 투옥이 아니라 즉결 처분일지도 모르지.
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작정하고 밀어붙이는 상대에게서 전승하리라는 보장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연통이 닿은 프라이어스 공작과 후일 도모를 위해 일단 수도와 멀지 않은 곳에서 전략을 짜기로 한 것이다.
다른 까마귀들의 소식통에 의하면, 안투스는 황제파인 몇몇 중요 귀족들에 대한 압박에 들어갔다고 했다.
서둘러야 했다.
“에단 님.”
서글픈 눈으로 부르는 집사를 보며 에단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대들이 안전한 게 우선이야. 그러니 지금은 스스로를 위해 우리 말을 따라 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마지막 인원까지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에단은 씁쓸한 표정으로 텅 비어 버린 저택을 돌아봤다.
이 지경이 되어 버리다니.
더 기가 막힌 것은 제국민은 지금 수도와 황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나라가 존망에 해당하는 위협에 직면했음에도 말이다.
타국의 침략은 확인하기 쉽지만,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내란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정권에 내몰리는 건 고스란히 국민의 몫인데도.
그가 단전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억눌렀을 때였다.
두근!
순간 심장이 빠르게 격동했다.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나들이 그 충격에 날뛰었다.
에단은 잠시 벽을 붙든 채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충격을 잠재우려 숨을 골랐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의 표정이 굳어갔다.
‘클레리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
신변에 변화가 없는 지금 그에게서 마나가 이런 파장을 보일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건 분명 그녀의 브로치에 양분한 그의 마나가 반응했다는 것!
에단이 불안한 눈을 들어 황궁 쪽을 바라봤다.
‘클레리아에게 무슨 일이?’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일이었는데 정말로 그녀를 위협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에단? 무슨 일이냐.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확인차 들어온 엘빈이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물었다.
애써 거친 숨을 고르며 에단이 표정을 감췄다.
“아닙니다. 저택에 남은 이는 없습니다. 이대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서두르자. 해밀턴 백작이 외곽에 숨겨 놓은 은신처가 있다고 하는구나. 거기로 가야겠다.”
빠르게 앞장서는 엘빈을 뒤따르며 에단은 천천히 손을 말아쥐었다.
‘괜찮아. 마나의 변화는 더 이상 없었다. 클레리아는 안전해. 내 생명이 이어지는 한, 클레리아는 무사하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에단 칼리스터. 한 시라도 빠르게 그녀를 빼내 와야만 해.’
결의가 묻어나는 그의 옆얼굴을 창백한 달빛이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