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52)

* * *

황궁에 도착한 뒤 곧장 누에른의 침실로 인도받은 클레리아가 방으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

침통한 얼굴의 칼리에와 세실리아, 그리고 낮게 시선을 내리깐 안투스까지. 방 안에는 소리 없는 애통함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세워 누에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가운데에 누워 있는 그는 사람의 것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퍼렇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설마!’

두려움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클레리아는 간신히 칼리에를 바라봤고,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칼리에 님, 설마…… 폐하께서…….”

그러자 칼리에는 눈을 감고 누에른의 손을 꼭 붙든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아’ 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클레리아가 살짝 비틀거렸다.

정말 혹여라도 이미 승하하신 걸까 봐, 정말 그런 거라는 대답이 나올까 하던 마음이 간신히 안도했다.

정신을 추스른 그녀가 천천히 칼리에 곁으로 다가가자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실리아가 그녀의 손을 애처롭게 꽉 붙들었다. 마치 맞잡은 그 손에 서로 의지라도 하듯 클레리아 역시 그녀의 손을 꽉 붙들며 물었다.

“칼리에 님, 뭘 해야 하죠? 가르쳐 주세요. 폐하께 뭘 해야 하나요?”

그러나 이어 나온 칼리에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원인도, 이유도 파악할 수 없어요. 그저 빠르게, 아주 급속도로 폐하의 온몸이 노화되어 죽어 가고 있어요. 외관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포든 신경이든 근육이든. 모든 것이 빠르게 그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원인을 파악조차 할 수 없기에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클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원인을 찾을 수 없다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유도 없이 이렇게 폐하께서 죽어 가실 리가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클레리아가 채근했으나 칼리에의 얼굴에는 낙심이 가득했다. 그녀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클레리아의 눈이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애달프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실리아.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잃은 안투스.

황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소리 죽여 흐느끼는 칼리에.

비탄에 잠긴 신하들까지.

클레리아는 말아쥔 손에 힘을 주었다.

“폐하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칼리에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빠르면 사흘…… 길다면 닷새 정도일까요.”

“아직 시간은 있네요. 됐습니다. 그거면 돼요. 칼리에 님은 가서 이 증상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지, 이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 대응할 만한 방법이 뭐가 있는지 찾아 주세요. 레인 님을 대기시켜 주시고, 필요하다면 아리스까지 대기를 부탁드립니다. 전 지금부터 최대한 폐하의 몸을 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레리아? 무리예요. 우리가 치유해서 안정시키는 속도보다 죽어 가는 속도가 훨씬 빨라요.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그러나 클레리아는 이미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클레리아!”

칼리에가 누에른의 곁에 다가서려는 그녀를 붙들며 외쳤다.

“이미 겪어 봤잖아요. 플로릭 대공 때는 운이 좋았다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때보다 더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요. 이건 오기로 되는 게 아니에요.”

“가만있을 수 없잖아요.”

클레리아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보고 폐하를 잃을 순 없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는 거잖아요. 사람을 살리는 거! 그게 우리 치유사들에게 주어진 일이잖아요.”

자꾸만 불길한 일이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 나라의 주축이자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누에른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황제를 잃는 것 또한 용납이 안 됐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해. 이대로 손 놓을 순 없어!’

그녀의 모습에 칼리에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세실리아 역시 그녀답지 않게 눈물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두 손 놓고 폐하가 돌아가시는 걸 보느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게 맞겠죠. 아직……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자료를 뒤져 보겠어요. 클레리아가 폐하의 상태를 전담하도록 해요.”

아직 그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칼리에도 결국, 수긍했다.

세실리아 역시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내 연구실로 가서 도움될 만한 것들을 만들어 보내마. 필요한 게 있으면 즉각 시종을 통해 알리도록 해라.”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격해진 감정을 정리하듯 몇 번의 심호흡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부터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 모두 폐하의 침실에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시종분들은 문밖에서 대기해 주시고, 치료를 위한 치유사들로만 출입을 제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안투스가 눈을 떠 클레리아와 지그시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는 간신히, 아주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폐하를 구해내겠습니다. 반드시요. 걱정하지 마세요, 황태자 전하.”

그 말에 안투스는 다시금 시선을 내리고 침실을 나갔다.

“부탁할게, 클레리아.”

세실리아 역시 그녀를 꼭 끌어 안아 주고 침실을 나섰다.

칼리에 역시 더 지체할 것 없이 기록을 찾으러 나갔고, 방에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누에른과 클레리아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폐하, 최고가 되어야 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반드시 폐하를 되살릴 겁니다. 반드시 폐하를 완치해서 최고의 치유사임을 입증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버텨 주세요.”

* * *

‘흐음…… 너무 과한가.’

하인들을 시켜 준비한 대형 캐리어 네 개가 엘레나의 앞에 줄지어 놓였다.

‘그래도 워낙 필요한 것들로만 채웠고, 레리안도 황궁에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다 했으니 최대한 챙겨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심각하게 돌아가는 상황과는 달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엘레나의 차림새는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철컥

그때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레리안이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고, 앞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거 설마 다 엘레나 겁니까?”

“그래요, 문제 있어요?”

잠시 황당한 얼굴로 캐리어를 훑던 레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엘레나, 당신은 정말! 하하하하……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 큭큭. 이다지도 귀여우면 반칙 아닙니까?”

그는 엘레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진하게 키스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필요해서 챙기다 보니 저렇게 된 걸 어떡해요?”

키스 후, 쀼루퉁한 얼굴로 엘레나가 투덜거렸다.

“압니다. 당신다워서 더 재밌고, 사랑스러워요. 날 웃게 하는 건 정말 그대뿐이군요.”

그 말에 엘레나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런 그녀를 미소 지은 채 내려다보던 레리안이 한껏 붙들었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황궁에서 얼마나 있을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건가요? 예상도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빼낼 거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엘레나는 부채로 손을 탁탁 두드리며 답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리안이 조금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레나.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말이죠.”

“……?”

그녀가 멀뚱멀뚱 눈을 뜬 채 그를 바라봤다.

“3공작가의 위세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각 공작가에는 군대에 버금가는 기사단이 있었다.

그들 전체가 수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 되는 셈이었다.

“모름지기 당신은 이슬레이터의 후계자고, 이제 황태자 전하와 뜻을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명했듯 승기는 우리에게 기울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레리안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슬레이터의 기사단도 이제는 엘레나를 섬겨야 할 시기가 왔다는 거죠.”

엘레나는 그 말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레리안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나 아직 자신은 가주가 아니고, 수도에서 활동하는 아버지가 공작이자 가주로 떡하니 군림 중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슬레이터의 기사들을 자신의 휘하로 둔단 말인가.

그때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레리안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 가루를 탄 물을 먹이면, 기사들은 전적으로 엘레나의 말을 따를 겁니다.”

건네는 것을 받아들며 엘레나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좋은 게 있다면 진작 좀 주지 그랬어요?”

“문제는 그들이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당신의 아버지, 카이론 이슬레이터 공작이죠.”

엘레나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쉽게 따라 줄 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이미 꿰뚫고 있다는 듯 레리안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 마디의 반 정도 되는 아주 얇은 금빛 씰이었다.

“맹약의 룬이라는 겁니다. 이걸 먹이기만 한다면 공작은 온전한 엘레나의 편이 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 후에는 공작도 분명히 당신에게 고마워할 테니까요. 당신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겁니다.”

엘레나는 씰을 받아 들어 빛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금빛으로 빛나기도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처음 보는 기이한 문장도 그랬고.

“맹약의 룬이라고요?”

“그걸 공작 각하께 먹이시고, 당신에 대한 충성을 맹약한다면 그 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그대로 따라오는 거죠. 당신에게 아주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겁니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말이죠.”

그러나 엘레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온 엘레나의 말은 레리안의 예상과 조금 빗나가는 말이었다.

그간 그녀는 꾸준히 아버지와 대립하고, 그를 위해 대변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이번에도 자신의 제안에 별다른 반발 없이 곧잘 따라올 거라 믿었는데, 갑작스레 엘레나가 행동에 제동을 건 것이다.

레리안이 의아한 속내를 숨긴 채 어깨를 들썩였다.

“엘레나가 원한다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간 공작께 반항하던 당신을 생각해 보면 좀 의외기도 하군요.”

엘레나는 코웃음을 쳤다.

“부녀지간에 그런 말다툼이야 늘 상 있는 일이죠. 내 사람을 모욕했으니 화를 낸 것뿐이고, 어쨌든 아버지는 늘 내게 져 주셨어요. ……이번에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요?”

아버지에게까지 술수를 쓰고 싶진 않았다.

또 한 번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실 거라고.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레리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곁으로 다가와 다독이듯 팔을 쓸었다.

“엘레나의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라면 이번에도 당연히 엘레나의 편을 들어주시겠죠. 그건 분명합니다. 다만…….”

그가 잠시 말을 끌며 망설였다.

엘레나는 조바심이나 인상을 쓰며 재촉했다.

“다만 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찌 됐든 황태자 전하의 편에 섰다 해도 지금 당장은 황제 폐하께서 건재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레이터를 제외한 나머지 공작가에서의 반발은 당연하겠죠. 그런 상황을 공작 각하가 달가워하실까요?”

엘레나는 마치 듣기 싫은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버진 그러실 거예요. 절 생각하신다면 충분히요.”

“하지만 그 과정이 괴로우실 거라는 건 잘 알지 않습니까? 엘레나, 이건 아버님의 그러한 마음의 짐을 덜어 드리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씰을 잘 보도록 해요. 이것은 이름처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공작의 결정과 마음의 짐을 덜어 줄 뿐, 그 외의 위해는 전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레리안이 천천히 그녀가 꼭 쥔 손을 펼쳐 주었고, 그녀는 안에 쥐여져 있던 씰을 바라봤다.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로 작은 물건이 찬란히도 빛을 발한다.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오묘하고도 기이한 그 기운에 시선을 뺏기고, 잠잠했던 마음까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이 작디작은 물건이 한없이 매력적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그녀의 마음을 충동질했다.

두려워할 것 없어.

아버지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함일 뿐이야.

아버지를…….

가문을 지키기 위한 이슬레이터의 적통 후계자인 나, 엘레나 이슬레이터의 선택이야.

그녀의 목을 타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느새 처음 느껴졌던 꺼림칙함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엘레나는 결심한 듯 룬을 든 손을 확 주먹 쥐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 * *

“흠…….”

집무실에 있던 카이론은 잠시 읽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미간을 쥐었다.

어딘가 모르게 갑자기 황궁 쪽이 소란스러워진 느낌은 있는데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궁 정예기사단인 1기사단의 단장인 타이엔에게서도 아무런 말도 없었고, 수도 치안과 각 지방의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3기사단의 칼리스터 쪽에서도 그랬다.

‘황궁에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느끼는 건 나뿐이라는 건가.’

수도 귀족들의 보안을 책임지는 2기사단의 단장인 자신도 느끼는 걸 그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도 없고.

‘입궁해서 폐하를 한 번 뵈어야 하는 걸까.’

그가 심각한 얼굴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뭐지?”

그가 말하기 무섭게 한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들어와 말했다.

“이슬레이터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엘레나가?’

어릴 때 몇 번 재미 삼아 기사단 집무실에 온 적은 있어도, 재미없다며 발길을 끊었던 아이였다. 그런데 제 발로 찾아왔다고?

자신의 딸이지만 정말이지 좀체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기사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카이론은 고개를 끄덕여 엘레나의 방문을 허했다.

“아버지!”

그의 생각과는 달리 꽤 밝은 표정으로 엘레나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이 녀석…… 레리안의 일로 뭐라고 하고 별채에서 쭉 지내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간 아비에게 독했다는 걸 인정이라도 하는 건가?’

새삼 딸의 어리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엘레나를 품에 안으며 카이론은 생각했다.

“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집무실은 영 재미없다면 오기 싫어했지 않느냐.”

“뭐, 제가 못 올 곳 온 거 아니잖아요? 별채에서 지내느라 아버지를 통 못 뵌 것도 있고 해서요.”

짝!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손뼉을 치자 하인이 은쟁반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들어왔다.

“요새 황녀님의 부마 간택이니 뭐니 해서 나라 안팎으로 많이 시끄러웠잖아요. 아버지도 많이 골치 아프셨겠다 싶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준비했다. 그리고 카이론을 등진 채 준비된 샌드위치 안에 맹약의 룬을 집어넣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랑 이렇게 얼굴 마주하고 식사한 것도 너무 오래됐더라고요. 제가 너무 아버지께 매정했죠?”

그 말에 카이론은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엘레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그간의 서운함에 대한 답이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아버지께 사과도 드릴 겸, 간단히 요깃거리를 준비시켰어요. 예전에 서재에서 늦게까지 일하실 때 제가 종종 만들어 드렸잖아요. 마침 물어보니 끼니도 거르셨다고 들었어요.”

엘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카이론의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맛있게 드셔 주셨으면 좋겠어요.”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준비된 차를 마셨다.

쟁반을 내려다보던 카이론의 얼굴에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부녀가 마주 앉아 웃어 본 게 언젠지……. 참 기분 좋구나.”

그의 손이 샌드위치로 향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엘레나의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맞을까?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옳은 걸까?

이 선택이 정말 괜찮은 거야?

굳건했던 마음이 막상 아버지를 마주하자 흔들렸다.

그런 엘레나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카이론의 손이 막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

엘레나의 부름에 카이론이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두 눈을 엘레나가 멍하니 들여다 봤다.

[후에는 공작도 분명히 당신에게 고마워할 테니까요. 당신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겁니다.]

레리안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뇨, 맛있게 드시라고요.”

“그래, 고맙다.”

엘레나는 잔 속의 차로 시선을 내렸고, 카이론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렇게 집무실 안에는 차를 호로록거리는 소리와 조용히 음식을 씹는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솜씨가 좋구나. 덕분에 허기가 가라앉았다.”

남김없이 음식을 먹은 카이론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깨끗이 비운 접시를 들여다보던 엘레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 절 사랑하세요?”

“당연하지.”

“절 아끼시나요?”

“그렇다마다.”

카이론은 고개를 갸웃하며 딸을 바라봤다.

당연하고도 귀여운 질문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딸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지켜 주실 거죠? 제가 지켜 달라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주실 거죠?”

조곤조곤하던 물음이 이제는 갈급하게 그에게 꽂혔다.

새삼스레 왜 이러는 걸까.

카이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하대도. 왜 자꾸 당연한 걸 묻는 게냐?”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엘레나가 나직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맹세할 수 있으세요?”

어딘가 좀 이상함에 카이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동시에 딸을 향한 따스한 미소 또한 지우지 않았다.

레리안과 지내더니 아버지가 내어 주던 듬직한 지원이 그리웠던 걸까?

카이론은 웃으며 답했다.

“하늘에 걸고 맹세하마.”

두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간 그의 가슴, 심장 쪽에 뜨끈한 기운이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느낌에 카이론이 놀란 얼굴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런 그를 엘레나는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대체 뭐지?’

타는 듯한 작열감이 심장쪽을 한동안 머물다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몰아쉬던 그가 눈을 들어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

더없이 차갑고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딸.

아비가 고통스러워함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맹세, 제대로 받아 갑니다. 고마워요, 아버지.”

“엘레나?”

알 수 없는 의구심만을 남긴 채, 숨을 헐떡이는 카이론을 버려 두고 엘레나는 집무실을 나갔다.

* *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서둘러 말을 몰고 칼리스터 저에 도착한 에단의 눈에 집사와 이야기 하며 마차에 오르려는 엘빈이 들어왔다.

에단은 좀 더 말에 박차를 가해 급하게 들어가 말을 세웠다.

“아버지!”

그 모습에 마차에 타려던 엘빈이 행동을 멈추고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도착하는 거냐? 부마 간택이 중단되자마자 로더 백작이 세운 구호소로 갔다고 들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리아랑 다른 치유사님들이 걱정돼서요.”

“그래, 리암의 호위로 잘 귀환하셨다고 하는구나. 너도 쉬어라.”

“낯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들의 물음에 엘빈이 잠시 침묵했다.

“아무래도 황궁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예?”

엘빈은 잠시 주변을 살피며 에단을 가까이 끌어 속삭였다.

“칼리에님과 프라이어스 영애가 긴급 전갈을 받고 급히 입궁했다는 소문이 있다.”

에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돌아온 지 반나절도 안 되어서 도로 부르신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꽤 심각한 일이라고 봐야겠지. 아직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기밀 사항이다. 나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어.”

그의 말에 에단의 숨이 거칠어졌다.

“당장 황궁에 가야겠습니다.”

“그건 알았다만, 그 전에 잠깐. 귀환 중에 너만 빠지게 된 연유가 뭐지? 혹,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버지의 물음에 에단은 잠시 잃었던 이성을 간신히 붙들었다.

“……캄스턴 후작가의 레리안 캄스턴. 그 녀석이 리암을 살해 시도했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다른 치유사님들을 노리려 했고요.”

그 말에 엘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악했다.

“그럴 리가! 대대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 하는 캄스턴 가에서? 아무리 둘째가 망나니 소리를 듣기로서니 그런 무서운 짓거리를 꾸몄다고?”

“망나니 정도가 아니라 음흉한 무언가를 꾸미고 있기도 하죠. 때문에 그와 관련되거나 의심이 가는 곳에 까마귀를 붙여 놨는데…….”

“허…… 이번에 부마 간택으로 후작가에서 움직이는 걸 보고 여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아들 하나 건사 못했다고 한탄하더니 진짜였군.”

엘빈이 충격받은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일단 전 황궁으로 가야겠습니다.”

에단의 말에 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일단 나도 주시를 하고 있으마. 너도 아는 것이 있으면 바로 연통하고.”

엘빈이 탄 마차가 빠르게 저택을 벗어났고, 에단은 말을 바꿔 타려 마구간으로 향했다.

“……?”

순간 싸한 느낌과 함께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

불어오는 바람에 피 향이 섞여 있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노려볼 때였다.

“에단…… 님.”

순간 나무 사이의 그림자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대를 알아본 에단이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키리온!”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까마귀들의 수장 중 하나인 키리온이었다.

평소 날렵하고, 은신에 최적화된 데다 암행 실력도 좋아 많은 활약을 하던 이였다.

“키리온! 정신 차려, 키리온!”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린 그녀의 입가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게다가 위급상황에만 쓰는 이동석을 쓴 건지 주변에는 토해낸 피와 토사물의 흔적이 가득했다.

“누구 없어! 여기 얼른……!”

에단이 다급히 사람을 부르려 할 때 키리온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전…… 곧 죽습니다. 딴 사람 부르지 마시고…… 제 말을 들으세요.”

힘겹게 말을 잇는 그녀를 보는 에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리춤을 붙들고 있는 키리온의 손을 치우자 시커먼 재로 죽어가는 상처가 드러났다.

“대체 이 상처는……?”

“말씀하신 서제도 4왕자 사이러스를 추격하기 위해…… 정예들을 뽑아 이동했으나 발각되었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누군가와 접촉 중이었고…….”

잠시 말을 끊고 허공을 바라보며 키리온이 지친 한숨을 토해냈다.

“매우 위급하고 긴박한 상황으로 인지했습니다. 그 와중에 공격받았고요…….”

그녀는 끔찍한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절 제외한 정예 부대 전원 사망했습니다.”

“전원이?”

에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믿을 수 없었다.

칼리스터의 까마귀들은 실력이 뛰어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는데, 그런 그들 사이에서 뽑은 정예들이 모두 당해 버렸다고?

키리온은 힘겹게 에단의 옷깃을 붙들었다.

“싸우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접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대비를…… 해야 합니다. 쿨럭!”

키리온이 기침하며 울컥울컥 핏덩이를 토했다.

“키리온!”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황망히 허공을 헤맸다.

“배후가 있습니다. 사이러스 왕자 혼자 벌인 일이 아니에요. 에단 님…….”

흐린 그녀의 눈동자가 에단을 향했다.

“……탈리니아스가 뒤에 있습니다. 부디 때맞춰 그들을 저지하십…….”

키리온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힘을 잃었고, 입가를 흐르는 피는 그렇게 죽 이어졌다.

간신히 옷깃을 붙들었던 손만이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키리온?”

에단이 부름에도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아아아

에단이 애통해하는 와중에 재로 변해 가던 그녀의 상처가 점차 몸 전체로 번져 갔다.

이윽고 검은 재는 키리온의 전신을 집어삼켰고, 삽시간에 그녀의 온몸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람의 몸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단은 생전 보지 못한 충격적인 일에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탈리니아스? 바알리시안의 그 탈리니아스 왕가? 그들이 배후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서서히 일어나 허공으로 솟구치는 키리온의 재를 바라봤다.

“이건 설마 흑마법?”

전신이 떨렸다.

라스칸트가 건국된 이후로, 아스칸 대륙에서 흑마법은 사라졌다.

아니, 바알리시안의 내로 국한되었을 것이다.

즉, 그 외의 나라에서는 몇 세대가 교체되는 시간을 보내며. 흑마법을 상대했던 이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까마귀가 당해 버린 것도 그런 이유인 거야. 흑마법을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대응하지 못했을 수밖에.’

에단은 떨려 오는 손을 꽉 쥐며 서둘러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 * *

“전하, 안투스 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자신의 연금술 연구실에 있던 세실리아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이 시국에 그 녀석이 날 찾아왔다고? 왜?’

그러나 찾아온 것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부마 간택이란 일을 벌였으니 더는 녀석을 곱게만 볼 수 없어.’

낮게 그르렁거리듯 숨을 내쉬며 세실리아가 응접실로 나갔다.

그녀는 불만과 경계가 가득한 얼굴로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안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 난 칼리에와 클레리아에게 줄 물건을 만들러 다시 들어가 봐야 하니 용건만 간단히 말해라.”

쌀쌀맞게 말했으나 안투스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 일에 대해 논의 드리러 왔습니다.”

챙그랑!

“공석? 아버님은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니다. 유능한 치유사 둘이 매달려 살리려 애쓰고 있어! 어디서 감히 폐하의 생사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냐? 같잖은 것이!”

세실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밀어낸 유리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그러나 안투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분명 옛날 같았다면 움찔거리거나 눈을 내리깔았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공석이 아니라 대행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 물론 그 대행이 누님은 아닙니다.”

“뭐야?”

세실리아가 날카롭게 되묻자 안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대행 자리는 황태자인 이 안투스가 대신할 겁니다. 누님.”

“네가 감히 무어라고 아버님의 대행을 한단 말이냐!”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황태자가 아닙니까? 아버님께서 지정하신 적통의 후계자 말입니다. 그냥 황실의 핏줄만 타고 태어난 누님과는 천지 차이지요.”

“하, 하하! 하하하하!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황태자? 황제의 대리? 그게 어느 오합지졸 나라의 헛소리더냐? 부마 간택 하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네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이더냐? 그것이?”

첨예하고 노골적으로 깎아내림에도 안투스의 입가에서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누님께서 반발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그리되었으니까요. 그저 전 그 사실을 알려 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혹여 딴 생각하실 거면 일찍 접으시라고 말이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벌써 그리되었다고?

누구 마음대로?

누구 뜻대로?

세실리아가 일갈하려던 때 안투스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황궁은 지금부터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봉쇄할 거거든요. 보고가 들어왔는데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죠. 어떤 내용인 줄 아십니까?”

순간 안투스의 눈이 날카롭고 매섭게 번뜩이며 세실리아를 노려봤다.

“황녀가 3공작가를 부추겨 반란을 도모한다고 하더군요. 황실 전복을 꿈꾸고, 이번에 폐하가 쓰러지신 것 또한 배후에 있다고 말이죠. 그리하여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봉쇄령을 조치했습니다. 3공작가와 연통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세실리아는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

제멋대로 굴기 위해 황궁을 봉쇄하는 거면서 폐하가 쓰러진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 해? 그것도 폐하에게 반기를 들어 황실 전복을 꿈꾼다는 명분으로?

세실리아의 입가에 천천히 살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네놈의 짓이구나. 엘라단에서 나와 칼리스터 경, 프라이어스 영애를 노린 것도. 부마 간택을 이용해 칼리스터와 날 한꺼번에 치우려 한 것도. 지원을 요청하지 못하도록 이 황궁에 발을 묶고 황실 전복이라는 누명을 씌워 옭아매는 것도 전부 처음부터 황실을 이 꼴로 만들려는 네놈의 가증스러운 수작질이었어!”

고고한 자태로 다리를 꼰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안투스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세실리아는 분노로 온몸이 떨려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널 죽인다면 어찌 될까?”

한순간이었다.

세실리아가 앞에 놓인 병을 깨 안투스에게 돌진했을 때였다.

“당장 그 조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전하.”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나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민 것은, 부마 간택 때 봤던 타일러 윈터펠로운이었다.

클레리아가 경고했던 그 인물!

그녀가 힘껏 손을 뻗어도 유리 파편은 안투스의 목 근처도 향할 수 없었다.

챙그랑

세실리아는 천천히 손을 펴 파편을 놓았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파편이 바닥을 굴러 느리게 느리게 휘돌았다.

마치 비통한 그녀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승리라도 한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피워 올리는 안투스에게 솟아나는 살의를 세실리아는 간신히 억눌렀다.

“누님도 참…… 그 성질 안 죽이시면 명만 재촉할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감히 황제 대행에게 흉기를 휘두르다니요. 벌로 모든 시종을 물리겠습니다. 시종 없는 생활, 누님께는 그다지 번거로운 일은 아니시지요?”

그가 손을 까딱였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기사들이 거칠게 시종들을 데리고 나갔다.

“꺄아악!”

“아악!”

섬뜩한 비명이 퍼졌고, 세실리아의 숨이 거칠어졌다.

“내게서 그냥 떼어 놓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저들에게 손대지 마!”

“아랫것을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입니다. 누님께서 참견하실 일이 아니에요. 아니면…….”

안투스가 서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님이 계시는 이 작고, 어여쁜. 이 방마저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 이놈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날 죽이고 싶은 거야. 하긴 그게 아니라면 이 사달을 내지도 않았겠지.’

세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누님은 이곳에서 열심히 돌이나 만들면서 거사가 끝나길 기다리세요. 뭐, 끝난 다음에 누님의 운명은 장담 못 하겠지만. 아, 만드시는 물건들도 치유사들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또 모를까. 그냥 적적한 거 위안 삼는 셈 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제야 안투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간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꼴같잖게 거들먹거리던 세실리아가, 저렇게 허옇게 질린 모습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미친 듯이 웃으며 조롱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내장이 다 뒤틀릴 정도다.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가며 안투스는 타일러와 함께 문으로 향했다.

“황제는 죽을 겁니다.”

문을 나서기 전 안투스가 말했다.

“아무런 치료도, 아무런 시도도 못 해보고. 치유사들이 말한 기한을 넘길 새도 없이 그렇게 비참하게 말이죠.”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그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로를 짜 놨거든요. 누님도 원한다면 근사한 말로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이왕이면 사람들 뇌리에는 남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좋은 모습이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든.”

“꺄아아악!”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시 시종들의 비명이 맞물려 울려 퍼졌다.

혼자 남은 세실리아는 비명 사이에서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근사한 말로? 근사한 말로라고?”

세실리아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5권에서 계속

공녀, 치유사로 살다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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