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52)

제34장. 격변.

‘음산하기 짝이 없군. 이런 곳을 왕족이 드나드는 걸 보고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어.’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아 최대한 존재감을 감춘 이들이 재빠르게 높은 나무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숲 깊숙이 자리한 낡은 고저택을 주시했다.

그들은 칼리스터 가에서 이끄는 일명 까마귀라 불리는 잠행 부대였다.

마법과 암행. 때로는 근접전에도 일가견이 있는, 칼리스터가 자랑하는 충실한 정예 부대.

라스칸트 전국, 또는 그 외의 타국에서까지도 활동하며 칼리스터와 황실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은 에단의 명으로 가장 유능한 이들을 추려 사이러스를 밀착 주시 중이었다.

사이러스는 계속 맡은 무역 쪽 일만 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묘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 즉시 포착해 따라붙는 중이었다.

“사이러스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상관으로 보이는 여자의 물음에 건물을 날카롭게 주시하던 이가 답했다.

“이제 한 시간 됐습니다.”

“오가는 다른 이들은?”

“없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자가 잠시 말을 끌었다.

“보이는데?”

다시 재차 묻자 그가 느리게 답했다.

“분명 계속 주시하며 들어간 이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저택에 사이러스 외의 인기척이 있었습니다.”

“……?”

여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할까요? 키리온 님.”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잠입한다. 로이, 그 미심쩍다는 기운은 어떻게 됐지?”

“마법과 비슷한 것이긴 합니다만, 일대의 기척만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잠입은 나, 로이, 카론이 들어간다.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해. 접근하는 인기척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로이, 카론.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이 있으면 바로 도주해. 정보를 수집해 칼리스터에 전달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임을 명심해라.”

그녀의 명과 함께 세 사람이 음산한 기운이 깔린 고저택으로 도약했다.

* * *

사이러스는 낡고 지저분한 큰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아직 채 지지 않은 해로 노을빛이 부서져 텅 빈 유리창을 넘어 간신히 그 공간에 빛을 더했다.

오래전에 응접실로 쓰였을 것 같은 그곳에는 희뿌연 먼지와 고요함만이 자리했다.

사이러스는 조용히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무심한 눈길로, 빛이 닿지 않아 캄캄한 공간에 시선을 던졌다.

“계획을 약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쪽을 오히려 반가워하실 것 같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을 읊조렸다.

사방은 고요했다.

어떠한 답도 들리지 않을 것처럼.

그때 내리쬐는 빛에 허한 먼지만 둥둥 떠다니는 공간 너머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답했다.

“일이 잘 진행되어 가는 줄로 알았는데……. 레리안이란 작자가 잡혔다고?”

고고하면서도 거만함과 오만함이 잔뜩 묻어나는, 여린 남자의 목소리였다.

“잡혔었으나 탈환했죠. 의외이긴 했지만, 뭐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걸로 인해 이제 일에 박차를 좀 가하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 가장 반가운 소리네요.”

이번에는 가늘고도 앳된.

하지만 어딘가 교활함이 묻어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척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저 무저갱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법 섬뜩할 만도 한데, 사이러스는 외려 웃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난 그대들이 지금껏 조무래기들이나 건드리기에 입만 산 야심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군요?”

여자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사이러스를 비꽜다.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아니니까요. 때로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스며들어 반발할 때를 놓치게 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요.”

“반발이 없을 거라 어떻게 자신하지? 예전에도 그들은 집요하게 들러붙었어. 후손이라고 다르진 않을 텐데.”

이번엔 남자의 목소리가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채근했다.

“그도 그렇지만, 그때와 같으리란 법 역시 없죠.”

그 순간이었다.

사이러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날카롭게 시선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쫓는 듯 그의 눈이 이리저리 옮겨가다 곧 한곳에서 멈춰 뚫어지게 노려봤다. 한참을 보던 그는 느리게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도, 응시하던 사이러스도 짜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노을이 점차 기울며 응접실에 비추는 빛은 극소량이 되었다.

창틀에 기댄 사이러스의 얼굴만을 간신히 비추던 주홍빛은, 이어지는 적막과 함께 마침내 그의 얼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천박한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낄 곳 안 낄 곳을 구분 못 하지.”

순간 어둠 속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울렸다.

퍽! 퍼퍽!

무언가가 빠르게 ‘쉬익’하며 뻗더니 지붕 한 곳을 빠르게 꿰뚫었다.

“컥!”

은밀히 벽을 타고 있던 키리온이 피를 게우며 옆구리를 붙들었다.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검은 촉수가 그녀의 한쪽 허리춤을 꿰뚫은 것이었다.

‘어떻게? 우리의 기척은 완전히 없앴다. 잠입은 성공적이었는데?’

키리온이 이를 악물고 허리에 박혀 꿈틀대는 촉수를 꽉 붙들었다.

“키리온 님!”

로이와 카론이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촉수를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은 좀처럼 쉽게 빠지질 않았다.

이대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완전히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들은 낡은 지붕 사이에서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딜 가나 쥐새끼는 있다니까. 정말 불결하게.”

따분함이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의 인영이 조금씩 움직인다 싶더니, 사이러스가 있는 곳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옅은 빛이 있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두 명이었다.

“……!”

그들을 확인한 키리온과 로이, 카론의 눈이 부릅뜨였다.

‘탈리니아스?’

그들은 다름 아닌 바알리시안의 왕족인 탈리니아스 일가의 공주와 왕자였다.

새하얀 피부와 백발, 거기에 기묘함을 풍기는 은안.

탈리니아스 왕가의 완벽한 외형 그대로였다.

거기에 공주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은 기이함을 넘어 불쾌한 음산함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키리온 일행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듯 그들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크왑!”

순간 공주의 손과 이어진 촉수에서 이상한 기운이 훅 불어 넣어졌고, 키리온이 경련을 일으키며 다시 피를 토했다.

“흑마법이야!”

짧게 중얼거린 로이가 검을 뽑아 촉수를 잘라냈다.

이어 분리된 촉수 일부가 키리온의 몸에서 빠지며 검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으욱…….”

“가야 합니다. 서둘러야 해요!”

상처를 붙든 키리온을 카론이 부축했을 때였다.

푸욱!

옆에 있던 로이의 얼굴을 촉수가 꿰뚫었다.

‘죽는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어!’

키리온과 카론이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고 저택을 벗어났다.

“아아, 제대로 혼을 내 본때를 보여 주려 했는데 벌써 가면 어떡해?”

“알리시아가 이렇게 손수 나서 주는 건 드문데, 버릇이 없네. 천박한 것들이.”

알리시아라 불린 여자가 싱긋 웃으며 힘을 줘 양손을 펼쳤다.

멀리서부터 다급하게 빠져나오는 키리온과 그녀를 부축한 카론을 보며 까마귀가 놀란 얼굴을 했다.

“도망쳐! 지금 당장 퇴각한다!”

“키리온 님? 카론, 로이는?”

그러나 물었던 까마귀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저택에서 순식간에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온 촉수에 그대로 가슴이 꿰뚫렸기 때문이었다.

“흩어져! 에단 님께 배후에 바알리시안의 탈리니아스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려야 한다! 어서!”

피를 게우면서도 키리온이 다급하게 필사적으로 외쳤다.

“으아악!”

“아악!”

그러나 그녀의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어떻게……. 어떻게 나름 일류라 자부하던 우리가 이리도 무력하게!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알리시아의 촉수에 대한 공포는 점점 더 커졌다.

키리온도, 부축하는 카론도 동료들이 난자당하며 지르는 비명에 사색이 되었다.

쉬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그들의 등 바로 뒤까지 이어졌다.

‘따라잡힌다!’

죽음의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강렬한 통증이 어깨로 전해졌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돌아본 키리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바로 등 뒤까지 따라온 것을 알아차린 카론이 몸으로 막아 대신 꿰뚫린 것이었다.

“카론!”

“가세요, 에단 님께…… 반드시 우리가 본 것을…….”

흐려지는 시야를 간신히 참아내며 카론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카론!”

그리고 있는 힘껏 키리온의 가슴팍에 던져 넣었다.

그녀의 몸과 부딪힌 이동석이 번쩍 빛을 냈고, 이어 키리온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카론의 거친 숨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숲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흠…….”

알리시아는 펼쳤던 손을 거두었고, 그와 동시에 넓게 사방으로 뻗쳐 있던 시커먼 촉수들도 빠르게 회수됐다.

“아깝게도 한 마리가 도망갔네. 미안하게 됐어. 수습 좀 해야겠는데?”

그녀의 말에 사이러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입가를 내렸다.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제는 진도를 좀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알리시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신의 오라버니인 일라이를 바라봤다.

“그냥 두겠다는 건가?”

일라이의 물음에 사이러스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안투스가 움직일 테니까요.”

사이러스가 말하며 품에서 검은 종이를 꺼냈다.

그것을 창틀 나무에 펼치자 아무것도 없던 종이에서 문양들이 나타나며 붉은빛을 내다 사그라졌다.

“두 분께서도 이만 돌아가셔서 채비를 좀 하셔야겠습니다.”

그의 말에 탈리니아스 남매가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뭘 그까짓 일로 준비까지.”

이어 곧 뿌연 안개가 방 안에 들어찬다 싶더니 탈리니아스 남매의 모습이 흐려졌고, ‘팟’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사이러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검지로 톡톡 창틀을 두드렸다.

‘이제 거사가 시작되겠군.’

* * *

“부마 간택이 중단되었습니다.”

시종이 전달하는 말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안투스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예상했다는 듯 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시간을 벌긴 했으니 썩 나빴던 건 아니다.”

그때 그의 탁자 위로 붉은 문양이 서서히 드러나며 불꽃이 일었다.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탁자가 타들어 가는데도 안투스의 표정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문양은 진하고 붉게 자신의 모습을 불사르다 점차 불길이 사그라들어 탁자에서 자취를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드러난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사이러스의 신호로군. 그럼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어.’

그가 천천히 자리에 일어섰을 때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레리안 캄스턴 님께서 형제인 레녹스 캄스턴에 의해 구속되어 이송 중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

되묻는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것같이 놀람도, 궁금함도.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질 않았다.

안투스는 천천히 옷을 갖춰 입고, 시종을 향해 돌아섰다.

“아버님께 알현을 청해라.”

누에른은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에게 지지 세력을 만들어 주려다 외려 귀족들의 반감만 샀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성과가 없었다.

그는 ‘끄응’하는 소리와 함께 썼던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쥐었다.

칼리에가 집무실로 들어와 안투스는 황제의 자격이 없는 걸 그만이 외면하고 있다 책망하던 것이 귓가에 맴돌았다.

“씁…….”

하필이면 이렇게 심란할 때 그것이 다시 기억날 건 뭐란 말인가.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끼는 충신에게 한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황족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던 캄스턴 후작까지 나서 안투스의 제안을 트집 잡는 걸 보고 나서야 누에른은 자신이 무모한 짓을 너무 노골적으로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모했겠지.

그저 황제의 명이라는 이유로 그걸 억누르고 싶었고, 귀족들이 눈 가리고 따라 주길 바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번 일로 안투스보다 세실리아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복잡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때였다.

“폐하, 안투스 황태자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누에른은 짧은 한숨을 토했다.

세실리아의 부마 간택이 중단되었다는 걸 들은 거겠지.

대충 안투스가 온 연유를 파악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해라.”

시종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서는 안투스는 어딘가 상심한 듯도, 못마땅해 보이기도 했다.

“왔구나, 얘기 들었느냐?”

집무실에 온전히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누에른이 물었다.

“누님의 부마 간택이 취소된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투스는 돌리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바로 본론을 말했다.

“네가 애써 주었다만, 귀족들의 불만과 참여가 제외되어 반발이 있었다. 그들의 의견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어서 부마 간택은 취소되었다. 다음에는 더 철저히 준비해 일을 진행했으면 싶구나.”

혹여나 싶어 했던 일이 역시나가 되었다.

어설프게 덤벼들어 매운맛을 봤으니 다음에는 철저히 준비해 대응해야 했다.

누에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앙 귀족들의 반발이 꽤 있었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지만, 그들의 심기를 건든 건 분명해. 당분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새롭게 공략할 것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그의 말에 안투스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서서 자신의 발끝만 바라봤다.

사랑하는 아들이 상심으로 풀이 죽은 것 같아 누에른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너무 기죽지 말아라. 네가 황태자 자리에 어울리는 적절한 모습만 증명한다면 그들 역시 나를 지지했던 것처럼 널 지지할 거야.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뿐이다.”

그 말에 숙였던 안투스의 고개가 점점 들렸다.

그는 한쪽에 시종이 마련해 두고 간 다과상을 바라봤다.

“네, 여부가 있을까요. 늘 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는 차를 우려 따르고, 데워진 우유를 섞었다. 그리고 각설탕 한 개와 소매 안쪽에 감춰 뒀던 무언가를 함께 넣어 스푼으로 저었다. 탁한 갈색을 띤 설탕이 녹으며 차가 묘한 색을 띠었다.

안투스는 그렇게 차 두 잔을 들고 와 하나를 누에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저 부족한 하나의 제안이었을 뿐인데 아버님께서 애써 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제게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중앙 귀족까지 설득시키지 못한 제가 부족했던 것이죠.”

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시인하고 인정하는 법 없이 침묵만 하던 것에 비해 큰 발전이었다.

누에른은 그런 안투스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는 아들의 성장이 뿌듯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근래 네가 정말 많이 성장한 것 같구나. 이번에는 아쉽게 되었다만 이 아비는 네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낼지 기대가 된다.”

안투스는 미소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런 그를 보며 답이라도 하듯 누에른 역시 차를 마셨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중앙 귀족들에게 쩔쩔매십니까?”

차를 음미하던 누에른의 눈동자가 서서히 안투스를 향했다.

“아버님은 황제 폐하가 아니십니까? 중앙 귀족은 말 그대로 귀족일 뿐이지 황제가 아닙니다. 어느 누가 건방지게 황제의 말에 반발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떤 황제가 그 반발을 두려워하지요?”

고분고분하던 좀 전과는 말투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누에른의 자질이 부족해 일어난 것이라는 책망처럼 들렸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안투스?”

나직이 묻는 말에 그가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왜 우월함을 타고났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 못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황족은 고결하고 고상하며 완벽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등 동물들이 이견을 제시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점차 어딘가 자신만의 세계에 휩쓸리듯 안투스는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말을 쏟아 냈다.

늘 소심하고 음침하게만 생각했던 아들에게서 평소보다 더욱 심한 뒤틀림이 느껴졌다.

위화감.

이건 위화감이다.

제국 라스칸트와도.

심지어 혈족인 펠리시아스 황가와도 전혀 조화되지 않는 이질감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우리 펠리시아스 황족이 제국의 군주로 군림은 하고 있으나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중앙 귀족처럼 수발이 되어 줄 충신이 필요한 거고! 현명한 왕은 절대 자신의 부하와 국민에게 하등 동물 같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아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누에른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일어서며 일갈했다.

“그러시니까 아버님의 시대가 끝나려는 겁니다.”

안투스가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근래 자신의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도가 넘는 태도였다.

감히 황제를 향해 혀를 차다니!

게다가 내 시대가 끝나려 한다고?

패륜에 가까운 행동에 누에른의 눈에 불길이 일었을 때였다.

몸 한쪽의 균형이 순간 기우뚱하며 무너지는 것 같더니, 그는 순식간에 집무실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억…… 컥…….”

사지가 뻣뻣해지고, 기도가 막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누에른의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불규칙하게 크게 경련했다.

안투스는 천천히, 그리고 불결한 것을 보는 것처럼 신음하는 그의 곁에 다가가 고개를 기울여 바라봤다.

누에른의 몸이 크게 떨렸고, 부릅 뜨인 눈과 벌어진 입에서 눈물과 침이 줄줄 흘렀다.

그는 간신히, 아주 간신히 기이하게 뒤틀려 굳는 손을 뻗어 아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안투스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손에서 빼냈다.

“이 나라는 잘못됐어. 국민도, 저 밖에 가증스럽고 기고만장한 귀족들도. 심지어 당신도 잘못됐지. 난 섬겨지기 위해 태어났어. 아름답고, 완벽하고, 고결해. 그런데 어째서 저런 버러지들이 두려워 굽신거려야 하지? 당신은 왜 내게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끕…… 끅!”

누에른이 흡사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안투스는 그런 그에게서 거리를 조금 벌리고 앉아 얼굴을 들여다봤다.

“당신이 망쳐 놓은 세상을 내가 제대로 돌려놓을 거야. 완벽한 이들이 제대로 섬김받고 열등한 것들은 기어야 하는 세상으로 말이야. 천박한 것들이 바닥을 기는 건 당연한 거야. 당신도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분수를 모르고 까부니까 이런 꼴을 당하잖아? 앞으로 이 라스칸트는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은…….”

안투스가 검지를 내밀어 핏발이 선 누에른의 이마를 멀찍이 밀어냈다.

“이만 퇴장하도록 해. 당신은 이 나라에 더는 필요 없으니까.”

악착같이 안투스를 쫓던 누에른의 동공은, 결국 눈꺼풀 뒤로 스르륵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 * *

“기습이요?”

수도로 귀환하는 도중, 치유사 일행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결국, 수도에서부터 레리안의 소식을 받지 못한 탓에 에단이 알아본 결과. 그를 태웠던 구금 마차가 기습을 당했고, 레녹스와 레리안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에단이 붙여 보냈던 칼리스터 가의 기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불안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레녹스가 배신한 건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개입이 있던 건가? 칼리스터 기사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당해 버렸을 줄은…….’

에단은 이를 꽉 물었다.

일부러 믿을 수 있는 기사들을 대동해 급하게 내려와 레녹스에게 붙여 보낸 건데. 어찌 이렇게 쉽게…….

결국, 그냥 있을 수 없던지 에단이 말머리를 돌려 클레리아가 있는 마차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현장을 방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클레리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불길한 일로 떨어져야 한다니.

하지만 그녀 역시 사건 현장을 에단이 가 보는 것이 맞는다고는 생각했다. 또 그렇게 생각할 그였고.

“리암 경이 치유사님들을 모시고 귀환하길 부탁해. 나도 최대한 이쪽 일을 마무리 짓고 뒤따르는 것으로 하지.”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리안 녀석이 탈주한 거라면 곤란해. 우리가 그놈의 시커먼 속내를 알았으니 가만있을 리 없다고. 폐하께 보고드려야 할 것 같으니 서둘러.”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고, 도착하면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께도 레리안에 대해 바로 알리도록 해. 그리고 절대 저택에서 나오지 말고. 알았지?”

창문에 바싹 붙어 있는 클레리아를 향해 에단이 당부했다.

“응, 그럴게. 에단도 조심해.”

“상황만 확인하고 바로 뒤쫓아 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는 피식 웃어 보이고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 보고한 이와 함께 빠르게 그들과 멀어졌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는 클레리아를 향해 리암이 말했다.

“저희도 귀환을 서두르죠.”

“네, 리암 경.”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클레리아는 창문에서 떨어져 바로 앉았다.

* * *

현장에는 이미 근처 마을의 수색대가 도착해 상황을 수습 중이었다.

대여섯이나 되는 기사들의 시신이 한쪽에 정리되어 있었고, 엉망으로 터져나간 마차의 잔해는 아직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에단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마부석 쪽과 마차 주변의 땅도 무언가 공격을 받았는지 폭발하며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다.

그는 가장 폭발의 여파가 커 보이는 잔해 부분으로 다가가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렸다.

“……!”

순간 그는 흠칫 마나를 흘렸던 손을 뗐다.

‘이건 엘라단에서의 폭렬석과 기운이 같다.’

그는 빠르게 다시 기사들의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여파의 폭렬석 여러 개가 마구잡이로 터졌다면 기사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에단은 지금은 흐릿해졌으나 사람의 기운이 남아 있는 흔적을 발로 훑었다.

‘레리안은 살아 있다. 녀석은 탈출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레녹스는…….’

그의 기운은 다른 기사들처럼 흐렸다. 존재감이 확실치 않았다.

에단은 마차 잔해를 수습하러 나서는 수색대를 보며 발길을 돌려 말에 올랐다.

“보고서는 황궁으로 빠르게 전달하도록.”

짧게 명령한 에단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뭔가 불길해, 서둘러야겠어.’

* * *

“그래도 다행히 별일 없이 잘 도착했군요.”

리암의 도움을 받아 클레리아가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리암 경께서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그래요. 이번 파견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이리저리 다치고 치유사님들께 걱정 끼치고, 볼품없었는걸요. 에단이 옆에서 봤다면 무진장 놀려 댔을 겁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그가 웃었지만, 클레리아는 그런 그가 한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에단이 없는 와중에도 리암은 셋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클레리아를 위해 윽박지르고 나섰다.

이런 사람이 에단의 친구라는 것에, 그들을 지켜 주는 수호 기사라는 것에 그녀는 감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암 경.”

옆에 있던 아리스 역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레리안의 습격을 받았던 그날 밤,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아리스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숨어 있게 했었다.

그렇기에 리암에게 일어난 전후 상황을 그녀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아리스의 인사에 리암이 얼굴을 붉혔다.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아리스 님께도 아무런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혹시 그쪽에도 일이 있을까 봐 어찌나 조바심이 났던지.”

“리암 경이 위험하셨던 게 더 컸죠.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어딘가 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보며 클레리아가 커다랗게 눈동자를 굴렸다.

‘흐음……?’

한참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리암이 정신이 든 듯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럼 이만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은 에단에게서 전갈이 올 때까지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아, 혹시 아리스 님은……?”

그의 물음에 클레리아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리스도 우리 저택에서 있을 거예요. 그게 안전할 거고 안심도 될 테니.”

“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두 분 다 쉬십시오.”

멀어지는 그의 모습에서 아리스의 눈이 한참이나 떨어질 줄 몰랐다.

‘그렇구나, 아리스.’

클레리아는 수줍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만 우리도 들어가자. 좀 쉬고, 짐도 풀어야지.”

리암의 뒷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리스가 어깨를 움찔 떨며 어색하게 웃었다.

클레리아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 * *

“하, 그래서. 부마 간택은 무산되었다는 건가요? 안투스 전하께서도 꽤 자신하셨던 것 같은데 좀 맥빠지네요.”

엘레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네, 중앙 귀족의 반발이 꽤 거셌다고 하더군요. 특히나 캄스턴 후작가에서. 폐하께서 후작의 촌철살인에 꼼짝도 못 하셨다는 후문입니다.”

“캄스턴? 캄스턴 후작이요?”

엘레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캄스턴이라면 레리안의 가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안투스를 감싸고 도는 황제를 공격했단 말인가?

‘레리안이 황태자 쪽으로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후작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편하게 닦아 놓은 길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 다른 노선을 탈 건 뭐람? 하여간 노인네들 답답한 건…….’

그녀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자 타일러가 조용히 덧붙였다.

“캄스턴 경은 후작가 쪽에서 별다른 힘을 못 쓰는 듯했습니다. 장남인 레녹스와 후작이 주축으로, 예부터 철저히 황제파였으니까요.”

그의 말에 엘레나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했다.

‘레리안…… 그렇게 오만하게 굴더니 결국 뒤로는 가문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던 건가요? 당신이란 사람도 참…….’

씁쓸함과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나직이 그녀가 내뱉었다.

덜컹

그때 엘레나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이어 조금 초췌한 모습의 레리안이 들어섰다.

“캄스턴 경?”

타일러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엘레나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나의 레이디, 돌아왔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엘레나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꼴이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뭐, 이러저러한 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불결해서 싫으십니까?”

엘레나는 인상을 쓰며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레리안의 얼굴과 흙먼지가 묻은 손을 닦아 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레리안은 피식 웃으며 뒤에 있는 타일러를 슬쩍 돌아봤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둘의 그런 모습을 봐도 특별히 동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레리안은 못마땅한 듯 ‘쯧’하는 소리를 내고 엘레나의 손길을 느꼈다.

“가서 옷 갈아입어요. 하인들에게 준비하라고 해 둘 테니.”

“고맙군요, 엘레나. 하지만 그 전에.”

그는 타일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간단히 필요한 것들을 챙겨 준비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필요한 거요? 방금 돌아와 놓고 어디 가나요?”

“네. 갈 곳이 있죠. 뭐,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도 있고 말이죠.”

엘레나와 타일러가 모르겠다는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황궁에 갈 겁니다. 그러니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세요, 엘레나. 그리고 윈터펠로운 경.”

레리안은 그제야 타일러를 제대로 의식해 불렀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테니 차질 없이 준비해 주십시오.”

말을 들은 타일러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그는 물끄러미 레리안과 시선을 맞추다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엘레나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 먼저 실례하죠.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엘레나.”

타일러의 입에서 엘레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레리안의 눈썹이 잠시 꿈틀댔다.

하지만 타일러는 곧바로 방을 나갔다. 레리안은 엘레나를 향해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다음 계획에 황궁이라면……?”

의미심장하게 묻는 그녀를 향해 레리안은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 * *

짐을 풀고, 간단한 식사 후 목욕을 하니 파견 후 쌓인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클레리아의 손길이 점차 어떠한 생각에 얽매이듯 느려졌다.

‘에단은 돌아왔을까?’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리암을 헤치려던 레리안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가 정말 탈주한 거면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 연통해야겠어.’

그녀는 서둘러 서신을 써서 접었다. 그리고 집사를 부르려 방문으로 다가섰을 때였다.

똑똑

“아가씨.”

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엘튼?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물음에 앞으로 나온 것은 황실 전령이었다.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님의 앞으로 온 급한 전갈입니다.”

“네?”

그녀는 썼던 서신을 내려놓고 그가 건네는 전갈을 건네받았다.

펼쳐 읽어 내려가던 클레리아의 얼굴이 시시각각 푸르게 질렸다.

“클레리아, 무슨 일이야?”

아리스까지 나와 그녀에게 물었다.

서신을 다 읽은 클레리아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엘튼과 아리스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대. 나와 칼리에 님은 지금 즉시 입궁하라는 명이야.”

“……!”

그녀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 * *

클레리아는 정신없이 치유사복으로 갈아입었다.

‘폐하가 쓰러지시다니? 왜? 무슨 이유로?’

누에른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 관리가 잘되어 있었고, 또 스스로도 신경을 쓰기로 유명했다.

주변 귀족들도 그에게 문제가 생길 건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게다가 유능한 치유사들까지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그런데 긴급 전갈이 올 정도라면…….

클레리아는 순간 아득해지는 정신에 심호흡했다.

그녀가 서둘러 머리칼을 올려 묶고 돌아설 때 문득 탁자에 놓인 리본에 시선이 갔다.

에단이 로더 백작저에 나타나고 빌려 갔다가 돌려준 그 리본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여분의 리본을 천천히 내려놓고 그가 돌려준 리본을 집어 들었다.

‘증표 삼아 빌려 간다고 했었던가.’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결의가 묻어나는 손길로 목 부분에 리본을 달았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처럼, 이 리본에 깃든 에단의 기운이 분명 도와줄 거야.’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충격적인 소식으로 인해 어지럽고 두려운 표정의 그녀가 서 있었다.

“정신 차려, 클레리아. 칼리에 님을 도와야 하는 건 너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클레리아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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