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52)

* * *

“피를 많이 흘린 것 빼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좀 어떠세요?”

“죄송합니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제대로 대처를 못 했네요.”

레인이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피가 잘 생성되도록 도와주는 차야. 굳이 부작용을 감수해 가며 혈액석 이용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마셔 둬.”

“감사합니다.”

차를 받아 드는 리암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얽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가슴 언저리에서 찝찝함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로더 백작 역시 상황을 정리하고 올라왔으나 돌기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에단이 다쳤던 것처럼 리암 경도 노려지고 있는 걸까?’

클레리아는 엘라단을 떠올리며 차게 식은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역시 레리안 그 사람이……?’

저택의 모든 고용인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사실상 아무런 일정이 없는 것은 그뿐이었다.

‘에단에게 알려야겠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아직 남은 일들이 있으니까요. 두 분은 쉬고 계세요.”

“클레리아 님.”

리암이 만류하듯 말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간중간 이곳으로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암 경. 일단 빠르게 회복하는 것만 신경 써요.”

그렇게 일러 둔 클레리아가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프라이어스 영애.”

문을 닫는 그녀의 뒤로 레녹스가 그녀를 불렀다.

“캄스턴 영식?”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늘 무심한 얼굴을 고수하던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

“하실 말씀이란 게 뭐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 클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아무래도 영애 말고는 이야기가 통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클레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죠?”

“지금까지는 레리안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가문을 향한 반항심과 오기 때문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벼이 여겼고, 또한 가소롭게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 아무리 봐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 않군요.”

클레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행동을 그저 가볍게만 여겼다니 저 역시 유감이네요.”

“평판도 그랬고 가문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고 생각한 거죠. 저희의 불찰입니다.”

“그래서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레녹스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을 끌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영애도 의심하고 계신다는 거 압니다. 리암 경의 일, 레리안이 꾸민 일이라고 말입니다.”

혈족까지 이렇게 확신할 정도라니.

클레리아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면목 없습니다만, 저 역시 그 녀석이 꾸민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영애께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은밀하게 리암 경을 포함한 몇에게만 언질해 방들을 수색했으면 합니다.”

“방을요?”

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턱을 괬다.

“일어난 일로 봐서는 리암 경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다시금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클레리아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유증이 남아 있는 오늘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리암 경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걸 노리고.”

레녹스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동생으로 벌어진 일에 가문의 위신이 떨어지는 것이 가문을 위해 자라 온 그에게는 여간 곤욕이 아닌 듯해 보였다.

클레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팔짱을 꼈다.

사실상 캄스턴 가에서 레리안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던가.

“영식께서 하신 말은 저도 동의하는 바고,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왜 굳이 그걸 은밀히 진행해야 하죠? 로더 백작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지 않을까요?”

클레리아는 공작가 중 하나를 대표하는 자로 성장했었다.

레녹스에게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로더 백작저에 머물면서 그 주인에게 빼고 일을 의논하겠다는 건, 백작에게 알리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뜻…….

“로더 백작과 상의하지 않는 건, 협력 중 유리한 위치를 빼앗길 위험이 있기 때문인가요?”

레녹스는 그녀의 질문을 예상했다.

가문의 위신을 세워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나, 로더 백작가에게 책잡혀 얕보이는 일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상 로더 가와 캄스턴 가의 동맹에서 캄스턴이 머리 역할을 하는 건 맞으니까요.”

클레리아는 쓰게 웃었다.

누가 야심 많은 정계 후보 아니랄까 봐.

캄스턴 후작이 원하던 대로 성장했는지 레녹스의 논지를 흐리는 말투는 훌륭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흔쾌히 받아들여 줄 클레리아도 아니었다.

“로더 백작에게 말하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확실히 이유를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 로더 백작과 협력해 캄스턴 경을 압박할 겁니다.”

레녹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제안이 거슬린 것이 분명했다.

이미 레리안의 말썽으로 충분히 심기가 불편했을 텐데 클레리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동공을 굴리던 그는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칼리에 님과의 거래를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클레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여기서 갑자기 왜 칼리에 님이?

설마 이곳에 파견되고, 레녹스가 오게 된 것에 칼리에 님이 연관되어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린가요? 칼리에 님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죠?”

그녀의 물음에 레녹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클레리아 님을 보호 및 상황 제어가 가능한 곳으로 보내는 것을 대가로 첫 번째 치유석을 내어 주시겠다 거래하셨으니까요.”

심장이 순간 허하게 뚫려버린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레인 님과 아리스, 리암 경까지 대동하도록 손을 쓰신 것도 모자라 캄스턴 가와 거래해 지키려 하셨다는 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본인의 첫 번째 치유석을 걸고?

클레리아는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런 그녀를 레녹스가 담담한 눈길로 바라봤다.

'역시 몰랐나 보군. 뭐, 우리도 의외이긴 했지. 그 냉랭하기로 유명한 칼리에 에나스가 자신의 치유석을 내걸고 거래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 클레리아란 여자에게 뭔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주변인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에 감탄하다가도, 어쩌면 클레리아의 존재로 캄스턴 가와 공작가의 간극이 더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허탈해지기도 했다.

잠시 동요한 것으로 보이던 클레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를 바라봤다.

“그럼 이번에 영식을 도와드리면, 칼리에 님과의 치유석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해 주신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안을 받아들이죠. 단, 캄스턴 영식. 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다친다면 제안은 무효가 될 겁니다. 그땐 로더 백작에게 알리고, 황실 지원 요청은 물론.”

부릅뜨인 클레리아의 시선이 날카롭게 레녹스를 향했다.

“캄스턴 일가를 향한 조사까지 요청하겠어요. 아시겠어요?”

레녹스는 시선을 낮게 깔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십시오.”

* * *

무심한 손길에 커다란 통이 묵직한 울림과 함께 소리를 냈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을 배회하던 레리안이 심드렁한 눈길로 쌓여 있는 물건들을 내려다봤다. 그의 앞에는 랜턴에 쓰이는 등유가 든 통이 가득했다.

어차피 호위도 그만뒀겠다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 할지라도. 직접 목표들의 방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손수 물건을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고용인들까지 바쁘다지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말란 법도 없었고, 일일이 다니는 게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근래 안 하던 관찰력이란 관찰력은 다 동원해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레리안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기름통에 손을 얹었다.

“딱 적당한 물건을 찾았단 말이지.”

지하에 물류 창고는 저택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위주로 보관했는데. 지금은 구호소 일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고용인들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불에 태워 기화시켜야 하는 물건인데 랜턴 기름만큼 적당한 것이 있을까.

이틀에 한 번씩 방에서 쓰는 랜턴에 기름을 채우는 것 같았으니 오늘 저녁 이 기름이 쓰일 것이다.

레리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일 위에 있는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든 것을 그 안에 털어 넣었다.

‘이거면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겠지.’

여전히 잘난 척 고상함으로 점철된 레녹스의 얼굴이 모함받아 볼 만하게 변할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니 어디 한 번 이번에도 잘 빠져나와 보시라고, 형님.”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통의 뚜껑을 닫고 천천히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 * *

“내일은 피가 많이 늘어서 움직이기 훨씬 편하실 거예요.”

리암의 잠자리를 봐 주며 클레리아가 말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리암의 주변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인과 아리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 때마저도 조용한 레리안이 좀 거슬리긴 했으나 그래도 우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되도록 불침번도 안 했으면 하는데……. 이봐 캄스턴 경, 어때? 오늘만 좀 수고해 주지 않겠어?”

레인이 물었고, 레리안은 시큰둥한 얼굴로 눈썹을 치들었다. 그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 내민 뒤,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글쎄요. 전 임무에서 이미 제외된 몸이라서 말이죠. 제 치유사님의 허락이 없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능청스럽게 하는 말에 클레리아는 노기를 짓누르며 낮게 한숨을 뱉었다.

“오늘만 부탁드려요, 캄스턴 경.”

짜내듯 하는 말에 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하신다면.”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리암과 레인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로 방 밖으로 향했다.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듣고 싶습니다만?”

클레리아의 발이 멈췄다.

이제는 저 남자의 뻔히 보이는 행동에 웃음까지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날 선 채 반응하는 걸 즐기는 거겠지.

클레리아도 더는 그 장단에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캄스턴 경. 정말 친절하시네요.”

지나칠 정도로 웃으며 하는 말에 작위적인 느낌이 뚝뚝 묻어났다.

눈을 흘기고 가 버릴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잠시 레리안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클레리아는 싱긋 웃으며 그의 당황한 모습에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던 레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싶었더니 이제는 그것마저 없앨 모양이군. 앙칼진 계집 같으니.’

그러나 크게 개의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인이 리암 대신 불침번을 서 달라는 제안을 해 준 것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혼자 깨 있을 명분이 있으면 움직이는 것에도 무리가 없을 테니까.

레리안은 작게 낮은 콧소리까지 흥얼거리며 벗어 놓은 갑주를 닦았다.

그런 그를 곁눈질하던 리암과 레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 * *

자정을 넘어 짙은 어둠이 깔린 시각.

며칠간 분주했던 저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한 밤 속에 자리했다.

일을 도맡아 하던 고용인들조차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고, 치유사 일행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고된 일상에 지친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레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낮게 깔린 연기를 바라봤다.

랜턴의 오일이 불꽃으로 기화하며 연기는 제법 넓게 바닥에 퍼져 있었다.

미리 복면을 착용한 그는 흐뭇한 얼굴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어 있는 레인과 리암을 번갈아 쳐다봤다.

“쯧쯧, 이렇게 허술해서야. 속여먹는 재미도 없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낮춰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한참을 보던 그는 손등으로 레인의 얼굴을 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지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탁!

이번에는 리암의 뺨이었다.

마치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담은 듯한 손찌검이었으나 그 역시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약효는 좋군.”

중얼거린 레리안은 천천히 품 안쪽에서 단도를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치유사 일행 전원을 제거하고 그것을 레녹스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낫겠지. 이유야 황태자 전하께서 적당히 꾸며 주실 테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계획대로라면 걸리적거리는 치유사들을 제거하고, 공작가의 자제 하나와 칼리스터 가와 친분이 있는 아켈리언 가의 자제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레리안은 꽤 좋은 성과라고 자신했다.

그는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 리암의 목으로 단도를 가져갔다.

레인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제압할 수 있으니 가장 거슬리는 리암을 먼저 처리하는 게 좋았다.

달빛에 번뜩이는 검날이 서서히 리암의 목에 닿았다.

“당장 그 검 내려놔요.”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레리안의 손이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클레리아가 방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하…… 어떻게 된 거죠? 잠들지 않다니.”

클레리아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붉어진 눈을 한 채 복면을 쓰고 있었다.

마치 그가 움직일 걸 미리 알았다는 것처럼.

레리안은 픽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설마 내가 움직이길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건가.’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클레리아를 노려봤다.

“자기 차례 정도는 기다리는 게 좋았지 않습니까? 굳이 그렇게 먼저 죽고 싶다고 득달같이 달려들 건 없을 텐데요.”

의도가 들켰음을 감지한 레리안이 더는 감출 것 없이 직구로 말을 던졌다.

“그 검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어쩔 거죠?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라고?”

같잖은 태도에 그가 비아냥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목을 꺾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리암도, 레인도.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모두가 약에 취해 쓰러져 있는데 제까짓 게 뭘 한단 말인가.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는 건 당신 착각이에요. 다시 말하겠어요. 리암 경 옆에서 떨어져요.”

클레리아가 강하게 말했다.

그것이 가소로워서.

그것이 무던히도 아니꼽고 내장이 뒤틀리듯 같잖아서.

레리안은 처음으로 가슴 깊숙한 곳에 밀어 두었던, 클레리아를 향한 경멸과 증오를 내비쳤다.

어쩌다 가문 하나 잘 만나 고생이라고는 쥐뿔 모르고,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만 받아 온 주제에.

고통이란 건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녀는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고 가문을 위한 도구로 살아야 한다는 되도 않는 소리를 부모의 입에서 들으며 무너져 본 적이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 하나 관심도 주지 않고 구원의 손길도 돌아오지 않아 외면받는 걸 상상도 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겁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클레리아의 올곧은 눈을 보며 레리안은 뒤틀린 마음이 더욱 기이하게 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걸로 깨닫길 바라,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해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너도 느껴 봐.

그는 쥐고 있던 칼을 이번에는 그대로 내리꽂을 듯이 쳐들어 리암의 위로 움직였다.

만약 그대로 손에 힘을 준다면 검은 리암의 가슴 정중앙에 내리꽂힐 것이다.

“착각하고 있나 본데 당신은 내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어. 내가 당장 당신 목을 부러뜨리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거야.”

섬뜩하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차라리 잘됐네. 당신 주변인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똑똑히 지켜봐. 그걸 다 보고 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일 테니까.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당장 그만둬, 레리안.”

그 순간 어두운 그림자로 가려져 있던 구석에서 낮은 경고가 들려왔다.

레리안 역시 미처 몰랐는지 흠칫 어깨를 떨며 경계하듯 어둠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자 마치 그 안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달빛 아래에 얼굴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레녹스였다.

“하, 네놈도 여기 있었단 말이야? 둘이 짜고 치고 날 감시했다는 거지?”

형의 얼굴을 본 순간 레리안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하나라도 방해꾼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칼을 빠르게 내렸다.

“네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네놈이 불순분자라는 것만은 확실해졌어. 레리안 캄스턴.”

순간 내리꽂는 힘이 막힌다 싶더니 허공에서 손이 멈춰 버렸다.

언제 깼는지 리암이 그의 단도를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검날에 베인 손을 타고 바닥으로 선명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나 리암은 개의치 않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옭아매듯 검과 레리안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감히 내 뺨을 쳐? 리암 경, 이놈 혼쭐을 내줄 거니까 단단히 붙들고 있어.”

레인 역시 벌게진 눈을 한 채 의식을 되찾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놈들……!”

레인은 그를 비웃으며 약통을 흔들었다.

“방에서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지 정말 샅샅이 뒤졌거든. 랜턴 기름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뭔가 이용할 줄 아는 건 그쪽만이 아니라고. 각성제를 미리 먹어 두길 잘했지.”

레리안은 조용히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들은 각성제로 수면 효과를 상쇄하고 자신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과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인과 리암은 그를 속이기 위해 복면까지는 하지 않아, 클레리아와 레녹스보다 눈이 훨씬 붉었다. 수면 연기가 아주 영향이 없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리암의 움직임이 둔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역시 제일 거슬리는 자를 먼저 제거해야겠다는 판단이 서 레리안은 있는 힘껏 리암을 뿌리쳤다.

그러자 단도가 그의 손에서 뽑히듯 빠져나오며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동시에 가슴팍을 발로 차 리암이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래서? 그래서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한 명만 사라지면 너희 제압하는 건 나한텐 식은 죽 먹기거든.”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머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역시나 몸이 조금 둔해진 리암이 살짝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하려 했다.

레리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검을 바꿔 들고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리암이 손을 침대 곁에 뒀던 검으로 뻗었고, 동시에 레리안의 단도도 그의 가슴 쪽으로 뻗어갔다.

콰창!

막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절명할 상황, 그때 낯선 단도 하나가 두 사람의 일말의 사이를 비집고 날아가 그들 곁에 있는 창문을 산산이 부쉈다.

정말 극한에 가까운 틈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것이라 레리안은 본능적으로 리암과의 거리를 벌리고 말았다.

“거기까지. 레리안 캄스턴, 검을 내려놔라.”

너무도 익숙하고 그리웠던 목소리.

클레리아는 천천히 돌아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에단!”

매서운 눈초리와 함께 살기 그득한 오러를 흘리는 그가 서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어떻게? 어떻게 저놈이 여기에? 부마 간택이 이렇게 빨리 끝났을 리가!’

점차 방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레리안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챙!

그가 정신이 팔린 사이 리암 역시 강하게 손을 쳐내 레리안의 손에서 단도를 떨궜다.

‘읏’하는 신음과 함께 레리안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서렸다.

에단은 천천히 그의 앞에 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목에 겨눴다.

리암을 제일 먼저 제거하려 했다는 건 나머지 인원이 어떤 짓을 해도 자신이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암이 당하고 나면 모두가 잘못됐겠지. 모두가 잘못된다는 건 클레리아를 돕거나 보호할 인물들을 최대한 제거해 버린다는 뜻이었을 거고.

결국은…… 클레리아를 죽이기 위해 그 많은 이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려 했을 거라는 거지. 역시 이놈이 곁에 있도록 두는 게 아니었어. 황명이라 해도 어떻게든 거부해야 했어!

레리안의 시커먼 속내에 근접할수록 에단의 머리로 열기가 몰렸다. 가슴은 차게 식고, 검을 쥔 손끝은 냉랭함과 무정함에 더욱 견고해졌다.

자칫 입이라도 잘못 열었다가는 그대로 목을 벨 것 같은 노기 가득한 눈으로 에단이 레리안을 노려봤다.

“널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와 다른 치유사 및, 수호 기사의 신변을 위협한 죄로 황궁의 재판에 넘기겠다.”

그러나 에단의 경고에도 레리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처럼 여유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포박해라.”

에단의 명에 그와 함께 온 기사들이 우르르 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잠시만, 칼리스터 경. 레리안은 제가 구금해 황궁으로 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곁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레녹스가 기사들의 등장에 급히 나서 앞을 막아섰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레녹스 캄스턴?”

어찌나 분이 극에 달했는지 에단은 레녹스에게 경어와 존칭조차 붙이지 않았다.

자신의 친우와 다른 치유사들. 거기에 클레리아마저 해를 가하려 한 레리안을 향한 그의 노기는 어쩌면 당연했다.

“레리안 캄스턴은 당신의 혈족이자 동생이야. 그대의 말을 내가 믿어야 할 이유가 있나?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에단이 성큼 다가서 찍어누르듯 노려보며 레녹스를 압박했다.

“저도 면목 없습니다. 레리안을 숨기거나 빼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역시 이놈을 황궁 재판장에 넘길 것에 찬성합니다. 다만 시끄러워지기 전에 저희 캄스턴 가에서 수습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라는 겁니다. 칼리스터 경이라면…… 저희 캄스턴 가의 노력을 아실 텐데요.”

레녹스의 눈이 번뜩였다.

에단은 못마땅함에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물론, 캄스턴 후작이 나서서 부마 간택이 무산되도록 힘쓴 것은 맞았다.

비록 칼리에와 거래가 있었다 할지라도 장남이자 후계자인 레녹스 역시 직접 내려와 이렇게 레리안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까짓 정도에 해당하는 하찮은 일일 뿐이었다.

성격대로라면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레리안을 끌고 수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에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일로 세간에 캄스턴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불순한 소문이 돈다면 그들은 결코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알게 모르게 서로의 이득을 위해 함께 움직이고는 있으나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캄스턴 영식.”

조금 전보다는 한결 이성을 찾은 듯 에단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대동한 기사들을 데리고 캄스턴 경을 수도로 이송하십시오. 지금 당장 연통을 넣을 것이니 제가 알린 시간에 이송이 완료되지 못하면 그 책임을 캄스턴 가에게 묻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제야 레녹스는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적어도 세간에 캄스턴 이름이 나돌며 시끄러워지기 전에 약간의 시간은 번 셈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클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에 받아들인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에단은 곁눈질을 해 둘을 노려보고 있는 레리안을 바라봤다.

“난 저놈의 목을 당장 치고도 남았을 겁니다. 알겠습니까? 똑바로 처신하는 게 당신과 당신 가문에 이로울 겁니다.”

묵직한 경고와 함께 에단이 머리를 까딱하자, 기사들이 레리안을 감싸 그를 포박했다.

“지금 당장 출발해라.”

그의 명에 레녹스가 묵례한 뒤 서둘러 끌려나가는 레리안과 함께 방을 나갔다.

“리암 경!”

상황이 마무리되자 레인이 리암에게 달려갔다.

크게 배인 손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가 안도했다.

레인이 서둘러 그의 손을 치료했고, 에단은 자신이 던진 단검으로 깨진 유리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돌아온 거구나.”

그 말에 에단의 시선이 곁에 다가온 클레리아에게 향했다.

그녀가 기쁨 반, 안도 반인 얼굴로 그의 옷깃을 붙들었을 때였다.

에단은 급하고도 애절하게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서 리암이 크게 다쳤다면?

그래서 제때 지키지 못하고 모두와 클레리아를 잃었다면?

끝없는 불안이 품으로 전해지는 체온과 숨소리로만 간신히 달래졌다.

“이런 밤중에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런 그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 듯 클레리아 역시 손으로 등을 다독였다.

“흠흠…… 거 오랜만에 재회라 기쁜 건 알겠는데 말이야. 여기 환자 있거든? 애정 행각은 좀 나가서 해 줄래? 거참 남사스럽게 말이야.”

레인의 말에 클레리아의 얼굴이 붉어졌고, 고개를 든 에단은 짓궂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레인 님. 리암.”

“이봐 그런 모습으로 말해 봤자 하나도 안 반갑거든?”

“하하, 좀 봐주세요. 떨어져 있는 동안 죽을 것 같았단 말입니다.”

에단이 클레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하는 말에 모두가 굳어 버렸다.

지금 보는 사람이 에단 맞나?

정말 그 에단이 맞아?

민망함에 홍당무가 된 클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레인과 리암 역시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 차마 나오지 않는 말에 입을 벙긋거렸다.

“시끄럽고 당장 나가!”

레인이 빽 소리 지르는 덕에 클레리아가 에단의 팔을 잡아끌었다.

“리암, 고맙다.”

끌려나가는 와중에 에단은 리암을 보며 감사를 전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인지라 리암의 입에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버렸다.

“됐고, 클레리아 님과 회포나 풀어.”

그렇게 나가는 둘을 보며 리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변하는지 몰라. 얼굴도 두껍네, 두꺼워!”

민망함과 당혹감에 레인이 잔뜩 투덜대자 리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 * *

“에, 에단. 잠깐만.”

리암과 레인이 있던 방에서 나온 후, 에단은 급하게 빈방을 찾아 클레리아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를 품에 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런 그는 처음인지라 클레리아도 적잖이 당황해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감싼 힘이 억세 좀처럼 밀려나지 않았다.

“에, 에단! 잠시만! 잠깐만!”

“왜?”

너무도 능청스레 묻는 통에 클레리아의 목덜미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 좀 놔줘.”

“싫은데…… 너무 보고 싶고…… 너무 그리웠어. 그래서 놔주고 싶지 않아.”

에단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결이 고스란히 목덜미로 전해지는 통에 클레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놓아줄 기미가 보이질 않자 체념한 듯 클레리아는 그의 등을 쓸었다.

“너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걱정되고 불안하고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어. 이렇게 안고 느껴야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되는데…… 그게 나빠?”

며칠 못 봤을 뿐인데.

그답지 않은 칭얼거림이 클레리아는 기분 좋으면서도 온몸이 간질거렸다.

그녀 역시 부끄러움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나도 많이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네가 없는 게…… 너무도 이상했어.”

그제야 에단은 천천히 떨어져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하나하나 마치 세세하게 점검이라도 하듯 살피며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뺨을 보듬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으응,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 * *

덜컹덜컹

흔들리는 구금 마차 안에서 레리안이 싸늘하게 마주 앉아 있는 레녹스를 바라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결국, 날 책임지고 데려가겠다는 건 가문을 위한 일일 뿐이었군? 대단해. 역시 형님다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버지를 빼다 박았군.”

천천히 레녹스의 눈이 뜨였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구금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의 눈이 번뜩였다.

“네가 등유에 사용한 물건. 누가 준 거냐. 연금술이나 화학식은 재주가 없으니 스스로 한 건 아닐 테고.”

레리안이 싸늘하게 그를 노려봤다.

“알아서 뭐 하려고?”

“개조한 폭렬석을 만들어 준 사람이 준 물건이냐?”

레리안의 입에서 실소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형님이 주워 간 거로군. 그래, 그게 없어진 걸 알았을 때부터 찝찝하긴 했는데 그런 거였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런 위험한 물건을 대체 누구한테서 받은 거냐.”

레녹스의 물음에 레리안이 웃던 것을 멈춘 채 그를 응시했다.

“알면? 감당할 수 있겠어?”

그의 물음에 레녹스의 눈썹이 꿈틀댔다.

“못할 텐데?”

약 올리듯 비아냥거린 레리안은 천천히 마차 벽으로 등을 기댔다.

나른하고도 시큰둥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거 알아? 형님? 난 계획도 좋아하긴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생기는 즉흥적인 상황도 좋아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 짜릿하잖아?”

레녹스는 한숨을 쉬며 짜내듯 말했다.

“레리안, 후작가는 조만간 내가 잇게 될 거다. 그러면 그간 있었던 부당한 체제는 손을 볼 생각이야. 그러니 네 녀석도 인제 그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도록 해. 치기 어린 오기나 반항심으로 어디까지 갈 셈이냐?”

그의 말에 레리안이 천천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고, 그 웃음은 점차 미칠 듯한 광기를 머금은 채 커졌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체제를 바꿔? 당신이? 아버지가 그걸 두고 보고? 나보고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녹스의 눈을 들여다보던 레리안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설마 진심인 거야? 그래?”

레녹스는 침묵했다.

그 의미가 물음에 대한 긍정이란 것을 알았기에 레리안은 경멸을 담아 인상을 썼다.

“참 희한하지.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때를 놓치는 걸까. 형님, 형님과 아버지는 나를 놓쳤어. 캄스턴 가의 차남이자 당신의 동생인 나를. 당신들이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잃은 거야.”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레녹스가 미간을 좁혔다.

“당신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돌아갈 길 따위는 생각지 않거든. 난 더 돌아갈 길이 없어. 돌아갈 곳도.”

그때였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콰앙! 쿠콰앙!

굉음과 커다란 진동이 연이어 이어졌다.

안에 있던 기사들도, 밖에 있던 기사들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던 레녹스의 눈앞도 순간 번쩍했다.

구금 마차의 뒤가 터져나가며 비명과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폭발로 여기저기로 튕겨 나간 사람들 사이로, 바닥을 마구잡이로 구른 레녹스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저벅저벅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앞에 누군가 다가와 섰다. 간신히 올려다보니 그의 앞에 선 것은 레리안이었다.

그의 뒤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죽 서 있었다.

레녹스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속절없이 당해 버려 숨이 끊어진 기사들의 널브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습에 당한 것이다.

레녹스는 다시 천천히 앞에 서 있는 레리안을 올려다봤다.

“아버지가 당신 꼴을 보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데.”

이어 레녹스의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레리안의 눈이 더없이 차가웠다.

“나는 당신들이 있는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괴한들이 레녹스를 짊어졌고, 곧이어 레리안은 그들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 * *

레리안과 레녹스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루더 백작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긴, 아마 그쪽에서 먼저 구호소 시설을 구축하고 사업에 대한 말을 꺼냈을 텐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혹스러웠겠지.

게다가 캄스턴 형제가 동시에 방문했다가 사라진 것 역시 그에게는 찜찜한 의문을 남긴 듯했다.

레리안이 기름에 타 놓은 약 때문에 지난밤 깨어 있던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그러나 에단이 나서 적당히 상황을 설명하고, 이른 시일 내에 캄스턴 가로 그가 방문하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됐다.

루더 구호소라 이름이 붙은 저택에는 임시로 마을에 있는 환자들을 받았고, 그 일정은 훌륭하게 소화되었다.

“이르면 내일모레쯤은 의사진과 간호 인력이 파견될 겁니다. 루더 구호소가 제대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네요.”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클레리아가 말했다.

“치유사님들 덕분입니다.”

브랜든이 묵례로 답했다.

사실, 그는 구호소 사업은 크게 생각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할 일이 늘어 귀찮다는 듯한 뉘앙스의 표정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벌린 일에는 충실한 성격이었기에 구호소는 제법 운영을 기대할 만했다.

“당분간 캄스턴의 개입 없이 혼자 운영해야겠지만, 잘하겠지?”

“루더 쪽도 경영은 꽤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 그다지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닐 거예요”

클레리아의 말에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품들을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고 마무리할 때쯤, 진료할 때부터 모습을 감췄던 에단이 나타났다.

이런 날에는 좀처럼 곁을 비우지 않는 그였기에 클레리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에단, 어디 갔었어? 무슨 일 있어?”

별일 없겠거니 하며 물었으나 그의 얼굴은 꽤 어두웠다.

“에단?”

어딘가 불안해져 오는 마음에 클레리아가 채근하듯 다시 그를 불렀다.

“……레리안 캄스턴이 아직 황궁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 한두 시간쯤은 오차가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상해. 아무래도 우리도 빨리 귀환을 서두르는 게 좋겠어.”

그의 말에 클레리아의 얼굴도 굳었다.

‘레리안이? 설마…… 레녹스는 그래도 약속을 어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두 사람은 채비를 위해 서둘러 일행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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