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52)

제33장. 불안은 점차 확신으로.

“황녀 전하 드십니다.”

안내인의 말과 함께 세실리아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대기 중이던 부마 후보 셋도 여느 때처럼 일어나 그녀를 맞던 중, 순간 모두가 짠 것처럼 동작을 멈췄다.

여태껏 단아하게 차려입고 나왔던 그녀가 원래의 고혹적이고 무게감 있는 원래 자신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그 모습에 후보들은 대번에 변화가 생긴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칼리스터 경부터 함께 대담을 나누자꾸나. 그리고 로드벨 영식은 업무 서류 자중해라. 지금까지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폐하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 없다.”

평소와 같이 돌아온 모습에 세 남자는 말 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지라 말씀하셨습니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타일러가 물었다.

‘클레리아가 주의하라고 경고했던 녀석이었지.’

낮게 깐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세실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단에게 눈을 돌렸다.

“들어가자.”

짧게 말한 뒤 앞장서는 그녀를, 에단이 묵묵히 뒤따랐다.

“마력을 양분하는 건 다 끝난 거냐?”

“예, 전하 덕분입니다. 근데 이제 간택은 더 신경 안 쓰기로 하신 겁니까? 황제 폐하께 정면으로 반박하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장난스레 웃으며 묻던 에단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다른 이유입니까?”

“오늘 중앙 귀족들의 요청으로 폐하와 회담이 있을 거다.”

“회담이요?”

세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밀에 부쳐진 부마 간택이 이제 완전히 기정사실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중앙 귀족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에단은 난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쪽이랄까.

“캄스턴 후작가가 나서기로 했다.”

거론된 가문의 이름에 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캄스턴이요?”

“마침 칼리에가 제안을 하나 한 것 같구나. 나 역시 그것에 덤을 얹어 보기로 했다. 그들은 황제파이긴 했으나 늘 3공작가만큼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싶어 했으니 좋은 기회겠지.”

‘칼리에 님이? 캄스턴 후작가 정도를 움직이려면 보통 제안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제안을? 하지만 믿어도 될까? 차남인 레리안이 황태자와 함께하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인 거지.’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심각해진 그를 보며 세실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마 간택은 오늘 이후로 파하게 될 거다. 그러니 너도 클레리아에게 가 볼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예?”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움직인 것이 소용없어져.”

탁자 위에 놓인 세실리아의 손이 서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 * *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누에른은 심기가 가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중앙 귀족 전체와의 회담을 요청할 줄이야.

사실상 말이 회담이지 세실리아의 부마 간택에 오른 후보들에 대한 불만과 그 일에 중앙 귀족이 배제된 것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리일 것이다.

‘아직 안투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부족한데.’

그러나 중앙 귀족의 불만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폐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자.”

그는 천천히 회담장으로 향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가 들어서자 많은 중앙 귀족의 대표들이 원탁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누에른이 자리에 앉자 모두가 다시 착석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누에른이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짐이 내린 일을 당연히 지지해 줄 것으로 생각했거늘, 중앙 귀족 회담은 참으로 오랜만이군.”

“지당하십니다. 폐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정하신 일에 이렇게 인내심 없이 상소문을 올려 회담을 청하는 것은 폐하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윈터펠로운 백작의 말이었다.

이번 부마 후보에 올라서인지 그들은 노골적으로 간택의 주최자인 안투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공식임에도 이미 여러 날이 진행되었고, 그에 관련해 폐하께서 귀족들에게 이렇다 할 참여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더구나 부마 후보를 고르는 데까지 귀족들의 의견을 배제하시다니요?”

메이스 남작이 조곤조곤하게 반박했다.

“이미 귀족들에게는 안투스 전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정한 후보라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도 허하셨으니 여기에는 문제가 없음이 여실합니다.”

윈터펠로운을 지지하는 갈렉스 자작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대들이 반박하는 것도 이해하오. 하나 간택에 뚜렷한 형체가 잡히면 당연히 그대들과 논의하려 했소.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일에 너무들 신경이 곤두섰군.”

그 순간이었다.

“외람된 말이오나 폐하. 문제의 요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캄스턴 후작이 입을 열었다.

묵직한 말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후보들이 어떤 성향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들로 편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3공작가의 칼리스터 경을 후보로 올리신 것이 문제가 되지요. 아시다시피 3공작가는 황제 폐하의 굳건한 충신들이지만, 그들과 황실이 사돈을 맺게 되면 그 힘의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중앙 귀족의 존재가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까지 추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누에른이 가장 고심하고 있던 부분을 캄스턴 후작은 가감 없이 찔러 들어왔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고요하고도 냉철한 시선으로 누에른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그 후보들을 세우는 것에 안투스 전하께서 일조하셨다면 저희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거니, 귀족들이 안투스 전하에 대한 신의를 어찌 보이겠습니까?”

누에른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 * *

“우리가 나설 일도 없었군.”

회담장을 나오며 엘빈이 타이엔에게 말했다.

중앙 귀족 회담이다 보니 바쁜데도 불구하고 3공작가의 공작들도 함께한 것이다.

“원래도 직언 잘하시기로는 유명했지만, 캄스턴 후작이 폐하를 상대로 그렇게 세게 나가실 줄은 몰랐는걸.”

타이엔의 말에 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타이엔이 한 발짝쯤 뒤에서 걷고 있는 카이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의외였어. 레리안 캄스턴 영식은 안투스 전하와 접점이 있는 것 같던데. 정작 아버지인 후작은 전혀 아닌 것 같다는 거지. 이봐, 카이론. 아는 거 있나? 요즘 엘레나가 레리안 캄스턴 영식과 어울린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카이론이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말없이 둘은 묵직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가 아는 게 없나, 카이론?”

다시 한 번 타이엔이 물었다.

“내 딸이 어디 내 맘대로 되던가. 자네가 더 잘 알면서 하하. 단속을 좀 해야지 이거야 원.”

그는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려 버렸다.

그런 그와 타이엔을 엘빈이 중간에서 번갈아 봤다.

결국, 카이론이 먼저 돌아가 할 일이 있다며 가 버렸고, 엘빈과 타이엔만이 남았다.

“아무래도 요즘 이슬레이터 쪽이 좀 이상하지?”

“……카이론이 엘레나에 관해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좀 걱정되는군.”

타이엔의 말에 엘빈은 씁쓸히 웃었다.

“뭐, 자식 걱정은 나도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 * *

‘하, 어떻게 하면 이 짜증 나는 상황이 좀 더 나아질까.’

레리안은 레녹스와 대화 후,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테라스로 나왔다.

머물러야 하는 곳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곳이고, 생각지도 못한 껄끄러운 두 놈에. 얼굴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치유사 일행까지.

레리안은 지금 상황이 인생의 역대급 괴로운 순간이라 자신했다.

“하…… 엘레나. 당신이라도 같이 있으면 그나마 재미라도 있을 텐데. 아니, 심심하진 않을지도 모르지. 툭하면 깨부수니 요란할 거고.”

이럴 때 하필 생각나는 게 엘레나, 그녀라니.

레리안은 새삼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테라스를 배회하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레녹스 녀석이 여기 와 있는 건 예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마냥 나쁘게 볼 일일까?

어쩌면 이걸 다른 방면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번 한 모함이니 두 번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는 ‘흐음’ 소리를 내며 검지로 톡톡 입술을 두드렸다.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격정적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로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 * *

물품 목록 정리를 마친 클레리아는 숨을 돌리며 장부를 덮었다.

“하…… 드디어 끝났네. 내일은 물건이 들어오는 거 보고 더 채울지 말지를 결정하면 되겠어.”

뻐근해진 목 주변을 풀다 그녀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아까 너무 심했나. 누가 봐도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백작을 따라나선 레리안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가지 못하게 했다면 괜한 시비에 자신이 곤란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돌아와도 불평과 시비로 불편해지는 건 마찬가지였겠지.

‘그렇다면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는 게 나았을 거야.’

찝찝해도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복도로 나오는데, 레리안이 모퉁이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아! 캄스턴 경!”

장부를 전달할 백작의 위치를 묻기 위해 달려갔을 때였다.

“어?”

막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건 레리안이 아니었다.

머리 색도, 생김새도 무척 닮았지만, 레리안과는 다르게 안경을 쓰고 메마른 시선이 매우 인상적인 남자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아는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남자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프라이어스 영애. 전 캄스턴 후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레녹스 캄스턴이라고 합니다. 레리안의 형이지요.”

“캄스턴 경의 형님이요?”

이 사람이 여기에 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인지라 클레리아는 입까지 벌린 채 놀라고 말았다.

“이 저택을 구호소화하는 것에 투자하고 있어 방문하게 됐습니다.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설마 캄스턴 가에서 투자를 하고 계신 거란 말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캄스턴 가가 이런 곳에까지 투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제까지 중앙 쪽으로만 활동하지 않았었나?’

생각에 잠긴 그녀를 레녹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로더 백작을 찾는 거라면 아마 1층 로비에 있을 겁니다.”

그는 클레리아의 품에 있는 장부를 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

인사 전하는 와중, 그는 꾸벅 묵례한 후 먼저 자리를 떠나 버렸다.

“형제가 참 닮은 것도 같고, 전혀 다른 것도 같고. 희한하네.”

한 명은 능구렁이에 시비 걸기 대장이고, 한 명은 쌀쌀맞은 태도로 저 할 말만 하고.

그러나 제멋대로인 점은 레리안이나 레녹스나 비슷한 것 같았다.

클레리아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 * *

오후 내내 보이지 않던 레리안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얼굴을 비쳤다.

그것마저도 좀 늦게 등장했다. 모두의 시선이 식당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꽂혔다.

일동 조용해진 분위기에 눈을 굴리던 레리안이 여느 때처럼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모두 내가 그립기라도 한 겁니까? 반응 한번 일관됐군요. 뭐 딱히 기분 나쁘진 않네요.”

능글맞은 그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문 채 다시 식사로 눈길을 돌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리안 역시 적당히 웃으며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 캄스턴 경. 오늘 경의 형님을 뵀어요. 와 계신 거 알고 있으신가요?”

클레리아가 문득 낮에 봤던 레녹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놀란 듯 리암과 레인,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레리안만이 수프를 뜨던 수저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치유사님이 제 형님을 뵌 건 미처 몰랐군요.”

“경인 줄 알고 아까 잠시 오해를 했었거든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클레리아 역시 더 대화를 기대하지 않고 레인을 바라봤다.

“아, 레인 님. 아까 보니까 창고에 추가 주문하려던 비품을 찾았거든요. 그래서 백작님께 드렸던 보고서를 좀 수정했으면 하는데요.”

“응, 그러도록 해. 아마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집무실에 계실 거야.”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익

그러자 몇 술 뜨지도 않은 레리안 역시 따라 일어섰다.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캄스턴 경, 식사 다하신 건가요?”

“네, 뭐 별로 생각도 없었고. 배만 채우면 그만일 것 같아서 말이죠. 무엇보다 제 치유사님이 움직이시니 저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걸음 클레리아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늘 종일 다른 일로 치유사님 곁을 비웠으니 말이죠.”

얼굴 근처까지 바싹 붙어 속삭이는 통에 클레리아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뺐다.

“가시죠.”

그를 바라보며 클레리아는 낮은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레리안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그저 무시가 답이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표정을 굳힌 채 식당 밖으로 나갔다.

“만약 캄스턴 경이 내 수호 기사로 왔으면 난 위경련으로 진작 쓰러졌을 거야. 불쌍한 하룻강아지. 쯧쯧.”

레인이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리암 역시 매서운 눈초리로 지켜봤다.

* * *

똑똑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걸까. 식사라도 하러 가셨나.’

클레리아가 뚱한 표정을 짓자 뒤에 서 있던 레리안이 귀찮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리를 비우신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시죠.”

“아뇨, 내일 아침 일찍 준비시키신다고 하셨으니 지금 해야 하는 게 맞아요. 내일은 오후부터 물건이 도착할 거고. 모레 임시로 사람들을 조금 받아서 운영도 해 볼 생각이니 미룰 수 없어요.”

단호한 말에 레리안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까다롭긴.’

그가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려던 그때.

철컥

문이 열리며 의외의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브랜든 로더가 아닌 레녹스였다.

“아, 저기. 로더 백작님을 찾아왔는데요.”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클레리아가 어눌이 말했다.

그가 나올 줄은 레리안 역시 예상치 못했는지 얼굴이 볼만하게 구겨져 있었다.

레녹스의 눈이 빠르게 동생과 클레리아를 가늠했다.

“들어오십시오.”

“백작님을 뵈러 온 거라서…….”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런 거냐고 답하고 문을 닫을 줄 알았는데, 레녹스는 제법 빠르게 클레리아의 말에 답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클레리아가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몸에 손이 닿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없는 기운에 클레리아는 이끌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렇다면 저도.”

“아니, 기사님은 밖에 계십시오. 제가 영애를 해할 일도 없을뿐더러 이 일은 관련자들끼리 의논하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끼어들 틈도 없이 레녹스의 기세에 밀려 클레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난처함에 돌아봤으나 레리안 역시 딱히 그의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살벌하게 노려보긴 했지만.

결국, 복도에 그를 남겨 둔 채 문이 닫혔다.

“불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나름 영애도 동생을 불편해하는 기색이기에 이렇게 행동한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클레리아가 어느새 멀찍이 떨어진 레녹스를 돌아봤다.

“아뇨, 딱히 불편하진 않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렇지.”

“뭐 그렇다면 썩 나쁘진 않군요. 로더 백작에게 전하실 말이 뭡니까?”

사설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통에 클레리아는 그가 서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놓여 있는 서류 중 아까 그녀가 건넨 보고서를 집었다.

“물품 정리 목록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침 일찍 주문하신다고 하셔서 변경 사항을 전달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셨군요. 표시해 두시면 승인 사인해 놓겠습니다. 저 역시 구호소가 돌아가는 걸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 브랜든도 제 사인을 보면 별말 하지 않을 겁니다.”

클레리아는 간단히 서류를 수정하고 레녹스에게 내밀었다.

받아 들어 묵묵히 읽는 그를 지켜보다 클레리아가 물었다.

“형제가 꼭 사이좋으란 법은 없지만, 두 분은 유독 더 안 좋아 보이네요.”

“영애의 말씀처럼 사이좋지 않은 형제인 거죠.”

“단순히 싫어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의 눈동자가 읽어 내려가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느리게 앞에 서 있는 클레리아에게로 고개가 들렸다.

“단순히 형제로서의 싫은 정도가 아니라…… 두 분이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다고 느껴져서요. 어딘가 모르게 로더 백작님도…… 영식과 같은 눈으로 캄스턴 경을 바라보시고요. 왜인지 묻는다면…… 실례가 될까요?”

단칼에 질문을 자르거나 타인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레녹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불쾌함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 대한 배척 역시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클레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캄스턴 경의 어딘가 비틀려 있는 그 태도가 신경 쓰이니까요. 타인이 아닌 가족에게까지도 그렇게 구는 걸 보면……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요?”

“그렇습니까.”

그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창틀에 몸을 기댔다.

“캄스턴 가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제들이 나타나 후계자로 지정되면, 그 외의 형제들에게는 가혹한 교육 기간이 이어집니다. 아니, 캄스턴 일가만이 아니죠. 명문이라 불리는 귀족 가문은 이러한 경우가 많죠. 아마 3공작가이신 프라이어스 영애께서는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클레리아는 부정도 긍정도 않은 채 레녹스를 바라봤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들어는 봤다. 간혹 후계자 경쟁이 치열한 가문에서 밀려난 형제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교육 과정을 거친다고.

‘지금 그걸 말하는 건가?’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늘 황제 폐하의 총애를 갈구하는 가문이었기에 그러한 과정은 당연했습니다. 후계자가 되지 못한 대부분은 가문에서 퇴출당하거나 가문의 힘 없이 홀로서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따르는 편이지만…… 뭐, 그렇지 않은 이들도 종종 등장하는 법이죠.”

담담히 말하는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도, 분명 레녹스 역시 어딘가 애써 외면하는 것이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캄스턴 경도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건가요?”

“그 녀석에게는 좀 더 가혹했을 겁니다. 고압적인 강요는 어릴 때부터 워낙 견디질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클레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싫어했다면…… 그냥 하고픈 대로 두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요?”

그 말에 레녹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몇십 년이나 이어져 오던 가풍입니다. 게다가 친교를 맺은 여러 귀족도 따르고 있는 체계죠. 그런 것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3공작가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 우리가 얼마나 자괴감에 빠질지 상상도 못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클레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상 몇 년에 한 번씩 나올 것 같은 인재가 공작 가에서는 세대마다 나왔다. 황제가 총애하는 이유도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았다.

유전자조차 다를 것처럼 뛰어난 그들을 향한 시샘이 얼마나 클지는 당연했다.

그저 자신이 저들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잊고 살았을 뿐.

말이 없어진 그녀를 보며 레녹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공작가를 탓하려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랬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살아남으려 이런 체계가 갖춰진 것뿐이니까요. 아무튼, 레리안은 그 과정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쪽이었고, 가문은 더욱 그걸 찍어누르기 위해 가혹해졌죠. 그 결과가 지금의 그입니다.”

레녹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 너머에 있을 레리안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교육 과정이라는 게 대체 어떻기에 그러죠?”

그녀의 물음에 처음으로.

레녹스의 얼굴에 희미하고도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비틀린 성정을 갖게는 충분한 정도겠죠. 이건 내부 사정이니 영애께서도 그만하셨으면 싶군요.”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표정은 빠르게 지워졌지만, 클레리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설마…….’

클레리아는 짧게 묵례하고 방을 나가려 돌아섰다. 문 근처까지 갔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다시 레녹스를 돌아봤다.

“그럼 영식께서는 어떠신가요? 그 관례…… 가주가 되신 후에도 여전히 따르실 건가요?”

어느새 평소와 같이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던 레녹스가 건조한 시선으로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건 많은 반발을 야기시키는 법입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동생이 겪은 상황을 동정하는 것 같던 빛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에 클레리아는 적잖이 실망해 버렸다.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문고리를 잡았을 때, 레녹스가 덧붙였다.

“그러나 모든 준비가 되었을 때 필요한 부분을 개선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 말에 클레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인즉, 아직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의 아버지 허드슨 후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면 바꿀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레녹스는 닫힌 문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불편한 표정이 역력한 레리안이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일 보셔도 괜찮았을 텐데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레리안은 클레리아의 말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노려보듯 한동안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보고서만 수정하시는 줄 알았더니 꽤 걸리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좋은 소리가 오갈 것 같지 않아 클레리아는 먼저 앞장서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남의 얘기 재밌으셨습니까?”

다다랐을 때쯤, 레리안이 다시 물었다.

“남의 얘기요?”

“안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레녹스가 제 형인 걸 아셨으니 제 얘기가 오갔겠지요.”

물론 얘기를 나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레리안은 그들의 대화를 심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험담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했을 뿐인데.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기세야.’

그가 점차 클레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말씀해 보십시오. 재밌으셨습니까? 그 자식이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아버지의 선택을 받아 그저 형제를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는 그런 교활한 놈이 뭐라 지껄였죠?”

“캄스턴 경, 잠시 진정을……! 영식은 그런 말을 하지 않…….”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클레리아의 발아래가 훅 꺼졌다.

“……?”

철렁하는 마음과 함께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계단 아래로 기울어졌다.

떨어진다!

놀라서 철렁 내려앉은 마음과 함께 속절없이 몸이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클레리아의 두 눈에 레리안의 표정이 똑똑히 박히듯 보였다.

덤덤하다 못해 싸늘한 눈매로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가.

그녀는 두 눈을 꽉 감았다.

“클레리아 님!”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그녀를 찾아 올라오던 리암이 아래에서 소리 질렀다.

턱!

금방이라도 아래로 구를 것 같던 몸이 멈추었다.

클레리아는 가늘게 떨며 감았던 눈을 떴다.

허공으로 뻗었던 손을 어느새 레리안이 잡아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히 잡은 그 상태 그대로, 레리안은 그녀를 당기지도 않고 손을 놓지도 않았다.

애매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동요 없이 그는 클레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일……?”

리암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레녹스 역시 그 상황과 마주했다.

자칫 문제가 생길까 싶어 그도 리암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자리에 못 박히듯 섰다.

레리안은 가소롭다는 듯 냉랭한 시선으로 리암과 레녹스를 훑었다.

‘칫, 홧김에 몰아세우긴 했는데 하필 이 상황이 될 건 뭐지. 반사적으로 붙들기는 했는데……. 역시나 표정들 한번 볼만하군. 내게서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 못 했다는 듯이 말이야. 뭐, 알고는 있었어도 기분 더러운데.’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리암과 레녹스의 눈빛에 실소가 터지려 했다.

그는 자신에게 붙들린 클레리아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정쩡한 상태로 구해 주지도, 놓지도 않는 자신에게 그녀가 느끼는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되고 있었다.

‘괘씸해서 더 일을 쳐 주고 싶지만 뭐, 장난은 이쯤으로 할까.’

레리안은 ‘씁’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손을 끌어당겼다.

“꺄악!”

그러자 그대로 딸려간 클레리아가 그의 옆으로 패대기쳐졌다.

“클레리아 님!”

그제야 리암이 정신없이 뛰어 올라왔고, 레녹스 역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너무 놀라 몸 전체가 후들거렸다.

클레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참다못한 리암이 레리안의 멱살을 붙들었다.

“클레리아 님을 계단에서 떠밀다니, 제정신이야?”

레리안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뭐? 내가 떠밀었다고? 미쳤나, 사람 모함하는 것도 작작 해!”

“그럼 왜 클레리아 님이 계단을 구를 뻔하실 건데? 네가 분명히 몰아세우는 걸 봤다고!”

“몰아세워?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그렇게 계단으로 밀었다면 치유사님을 그렇게 붙들었겠어? 머리가 멍청해서 방금 본 게 뭔지 제대로 모르는 모양인데, 조금 전 그건 ‘사람을 구하는 행위’라는 거다. 제대로 알아 두라고.”

“구해? 그게 구하는 거라고? 누가 봐도 그건 사람 명줄 잡고 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수호 기사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미친 자식아?”

격분하는 그를 보면서도 레리안은 비웃음을 흘리며 리암의 손을 뿌리쳤다.

“그저 영애의 표정이 절경이었기 때문에 잠시 고민했을 뿐이야. 나한텐 좀처럼 다른 표정은 안 지어 주시잖아? 좀 즐겼을 뿐인데 너무 야단법석이네. 안 그래? 형님?”

능청스럽게 웃으며 레리안은 레녹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 레녹스 역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유도했다는 듯 레리안의 입가에 더 큰 미소가 번졌다.

“이 일의 책임은 형님에게도 조금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자신의 얘기를 한 복수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직도 치기 어린 태도를 벗지 못하는 그에게 레녹스는 혀가 내둘러졌다.

레리안은 놀란 마음에 아직도 떨고 있는 클레리아의 곁으로 가서 몸을 낮춰 시선을 맞췄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하지만 제게 너무 박하시지 않습니까? 덕분에 흔치 않은 영애의 표정을 볼 수 있어서 전 참 좋았는데 말입니다. 제 장난이 너무 짓궂었다면 사과드리죠. 그래도 불미스러운 일 없이 잘 구해 드렸으니 됐잖아요?”

철썩!

“난 당신 재밌자고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엄청난 소리와 함께 레리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터져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럼 에도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뭐, 이 정도 상처쯤은 제 치유사님이시니 당연히 치유…….”

능구렁이 같은 말을 늘어놓던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클레리아의 경멸 가득한 시선을 마주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럴 일은 없겠군요. 화가 많이 나신 듯하니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위험하니 오늘과 같은 행동거지는 좀 조심하십시오. 계단에서 조심해야 하는 건 상식이잖습니까?”

끝까지 밉살스러운 말을 남기며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리암이 낮게 경고했다.

“오늘부로 넌 호위에서 물러나. 치유사님들의 호위는 전부 내가 전담한다. 거역할 시 명령 불복종과 임무 불성실 이행으로 폐하께 고하겠다.”

그의 말에 레리안은 아주 기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것 참 잘됐네. 따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참 고생이 많아, 아켈리언 경. 응?”

* * *

레리안과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난 뒤, 다음 날 클레리아는 리암을 따로 불렀다.

어제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는 것이 먼저여서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 당부했지만, 역시 파견이 끝날 때까지 알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리암 경.”

“아닙니다. 그나저나 레인 님과 아리스 님께 어제 있던 일을 알리지 말라니. 진심이십니까?”

리암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클레리아는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인상 썼다.

“그 사람이 곁에만 오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레인 님이 아시면 가만히 있을 성격도 아니시고. 소동이라도 생긴다면 구호소 일도 밀릴 거고, 캄스턴 경과 함께 해야 하는 시간만 늘어날 거예요. 그건 저도 사양이고요.”

리암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아마 아는 즉시 본때를 보여주겠다 레리안 녀석을 쫓아가시겠지. 크게 다툼이라도 나면 여기에 묶여 시간만 더 질질 끌게 될 거고 말이다.

일단 맡은 임무부터 끝내고 빠르게 귀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에 두 사람은 레리안에 대해 나중에 더 논의하기로 했다.

“두 사람 뭐해?”

마침 창고로 레인이 들어오며 물었다.

“아무것도요.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좀 꺼내 달라고 부탁드리고 있었어요.”

클레리아가 흠칫 놀라며 얼버무렸다.

“그런 걸 뭐하러 리암 경한테까지 가서 물어봐. 나한테 물어보면 될걸. 자, 어떤 거 꺼내 줘?”

“아, 괜찮아요. 확인했어요.”

“그래? 알았어.”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식장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튼, 치유사님.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마시고, 어딜 가든 꼭 제게 말씀하십시오. 아셨죠? 눈에 안 보인다고 안심할 인물이 아니니까요.”

클레리아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단에서도 에단 혼자 무리하게 호위를 맡느라 그 사달이 났었는데…… 리암 경까지 셋을 한꺼번에 떠맡게 해 버렸네.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그때 한 하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 기사님. 죄송합니다만 안쪽 창고 쪽에 붕대와 소독분, 환자복이 충분한지 좀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쪽 인력이 여의치가 않아서요.”

“알겠습니다.”

리암은 천천히 더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푸쉬시

한참 장식장 사이를 가로질러 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뭐지?’

그 순간이었다.

장과 맞닿아 있는 기둥 쪽에서 ‘쩡!’하는 소리가 났다.

놀란 그의 머리 위로 기둥 일부가 부서지며 높은 장식장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쿠구궁!

갑작스러운 굉음에 안에 있던 모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리암 경?”

가장 가까이 있던 클레리아가 서둘러 달려갔다.

도착하자 허옇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무너져 내린 돌 더미와 부서진 장 파편 사이에 쓰러져 있는 리암이 보였다.

“리암 경!”

클레리아가 달려들어 돌덩이와 나무들을 치워냈다.

그러나 리암은 머리에 직격으로 맞은 듯 벌건 피가 바닥에 흥건히 퍼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리암 경!”

달려온 레인 역시 그를 발견했다.

그는 서둘러 다가가 리암의 머리에 난 상처를 치유했다.

정신을 잃은 듯했던 그가 다행스럽게도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그제야 클레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근처에 있던 로더 백작도 창고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다행스럽게도 빠른 치유 덕에 무사한 리암을 확인하고, 그는 바닥에 흥건한 피에 시선이 옮겨 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했으나 그는 한쪽으로 빠르게 비켜섰다.

“일단 여기는 저희가 수습할 테니 방으로 올라가서 상처를 마저 돌보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레인에게 부축받은 리암은 흘깃 무너져 내린 기둥 쪽을 바라봤다.

‘낡은 흔적이 적어. 어쩌면 이건 누군가 일부러…….’

그러나 곧 이어 오는 두통에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흠…… 역시 치유사들이 근처에 있을 땐 안 되겠어. 괜히 귀한 물건들만 소모하게 되는군. 뭐, 좀 과한 성과가 나서 즉사를 바랐는데 리암 녀석, 운이 좋다고 할지.’

사고가 일어난 곳과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서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주시하던 레리안이 ‘칫’ 소리를 내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는 손안에서 굴리던 무언가를 꽉 쥐며 입술을 뒤틀었다.

‘역시 밤을 노려야 하나.’

그가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을 때였다.

“……?”

콱!

순간 엄청난 악력이 멱살을 쥔 채 그대로 레리안을 벽으로 밀쳤다.

“컥!”

몰아붙인 건 레녹스였다.

그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레리안을 노려보았다.

“수작질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하…… 누군가 했더니. 다짜고짜 무슨 개소리야? 수작질이라니?”

“방금 창고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켈리언 경이 다쳤어. 네가 한 게 아니라는 말이냐?”

“장난쳐? 사라지라고 해서 여기서 죽치고 있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수작질을 해? 형님이야말로 같잖은 의심으로 생사람 잡지 말라고!”

레리안이 거칠게 레녹스의 손아귀를 뿌리치려 했으나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애에게 손대기 어려우니 곁에 있는 아켈리언 경부터 치우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고?”

“증거 있어? 증거 있으면 대보시던가. 그럼 순순히 불어 줄 테니까. 그게 아니면 형님이야말로 이런 저질스러운 협박 그만두시고!”

파팍!

이번에는 반드시 손을 떼어내겠다는 듯 레리안이 억척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목을 감고 있던 크라바트 또한 엉망으로 뜯겨 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가문을 망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거다.”

“그럼 열심히 지켜보셔. 안 그럼 뺏길 테니까.”

그들이 하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레리안은 쾌감을 느꼈다.

무섭게 노려보는 레녹스를 뒤로한 채 레리안은 웃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느리게 숨을 고르던 레녹스는 레리안이 떠난 자리를 묵묵히 바라봤다. 그렇게 느리게 시선을 옮기던 그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었다.

‘이건…….’

집은 것을 꽉 쥔 채로 레녹스 역시 그곳을 벗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레녹스는 집어 온 것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크기가 작긴 했지만 폭렬석이었다. 폭발과 함께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물건.

그러나 그것이 뿜어내는 기운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

‘뭔가 성질에 변화를 꾀했거나 다른 추가적인 기능을 배합한 것 같군. 폭렬석은 원래도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인데 누가 이런 식으로 개조를…….’

이건 보통 실력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위험한 물건인 만큼 안정화가 중요한데 이 폭렬석은 굉장히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기로 이용되기 적절하게 개조되었다는 것.

그는 검지로 조심스럽게 폭렬석을 건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을 레리안이 떨어트리고 갔다는 말은 죽어도 로더 백작에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협력 상태라 해도 그 또한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의 저택에서 캄스턴 일가의 사람이 무언가 수상한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협력이 깨어질 뿐 아니라 백작가에 책 잡힐 여지를 주는 것이었다.

“하아…….”

레녹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건 혼자서는 처리할 수가 없다. 레리안은 바보가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내 눈을 피해 일을 꾸미려 할 텐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린 듯 폭렬석을 한쪽에 잘 숨겨 둔 채 방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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