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불안한 동행.
“다 모인 건가?”
레인이 안에서 비품을 들고 나오는 레리안과 리암을 확인하며 마차 앞에 선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제 제법 파견에 익숙해진 클레리아와 잔뜩 긴장한 아리스가 서 있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일행을 느리게 훑은 뒤 마차 문을 열었다.
“자, 그럼 다들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슬슬 출발하자고.”
아리스와 클레리아가 탄 것을 확인한 그는 돌연 레리안과 리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평소와 다른 행동이었으나 특별히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레리안이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말에 올라타려는 리암의 곁으로 가서 어깨를 세게 툭툭 두드렸다.
다른 때라면 아프다 어쩌다 하며 장난스레 받아쳤을 리암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염려인 걸 이미 아는 듯했다.
레인은 함께 하느라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입장인 리암이 불편할 것이 걱정되었다.
리암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매일 놀려 대고 심술궂게 골려 대긴 하지만 리암을 믿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에단이 경고해 주었듯 레리안이란 작자가 싸울 땐 비열한 수법도 가리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 될 뿐.
레리안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리암 혼자서 세 명을 지켜야 할지도 모르고.
템즈 경이 떠오르며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인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이런 와중에도 정작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말이다.
레인은 아무것도 돕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괜스레 리암의 머리를 퍽! 소리가 나게 때리고 벅벅 문질렀다.
“……!”
깜짝 놀란 그가 돌아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또 왜 그러세요? 아프다고요, 레인 님.”
투덜거리려다 막상 눈이 마주치자 리암은 말을 멈췄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레인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표현이 서툰 분이라니까.’
“여자분들만 있는 마차에 타려니 어색하십니까? 그럼 저도 같이 탈까요?”
“까분다, 머리에 파리 붙이고 다니길래 떼어 준 거거든? 그러게 씻을 땐 박박 씻으라고 했지?”
“지금 그건 뗀 게 아니라 거의 문대신 건데…….”
“뭐야?”
평소 같은 밝은 대화에 레인도 조금은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흘끗 본 레리안이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클레리아가 무슨 일인가 싶어 커튼을 젖히자 그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저는 격려 안 해 주십니까?”
느닷없는 말에 뚱한 얼굴을 하다 클레리아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몸조심해서 호위 부탁드립니다.”
딱딱한 말투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마치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하는 태도였다.
그때 언제 온 지도 모르던 레인이 쏘아붙였다.
“해 달라고 해서 해 준 건데 그 태도는 뭐지? 치유사는 섬기고 지켜야 하는 대상인 거지, 그쪽이 재미 삼아 다니던 곳의 사람들과 헷갈려 방자하게 굴지 않도록 해.”
“이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역시 레리안다운 답변이었다.
레인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려는 것을 클레리아가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저걸 그냥 둬?”
“무슨 말을 해도 저 반응 외의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냥 두세요.”
성질 같아서는 싸움으로 번져도 상관없었으나 레인은 그만두었다.
어차피 파견 임무를 나가는 이상 며칠은 함께 붙어 있어야 하니 클레리아의 말처럼 초반부터 싸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분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아리스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클레리아는 웃으며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히히힝!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 * *
‘지금쯤 파견 임무를 떠났으려나.’
올려진 탁자 위에 얹어진 손으로 에단이 멍한 시선을 던졌다.
며칠째 이어지는 부마 간택을 위한 자질 시험은 엉망으로 변질한 지 오래였다.
만약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거였다면 함께 사냥을 나가거나 각 주요 사항에 대한 의논과 평가로 분주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비공식으로 처리한다는 말과 함께 적당한 허울만 두고 누에른이 손을 떼어 모든 것은 세실리아의 마음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몇 마디의 대화 후에는 느긋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부마 후보들은 자리가 붕 떠 버렸다.
그러나 외려 모두 그것을 은근히 반기는 기색이었다.
하긴 공식으로 발표 나지도 않았으니 그것에 거는 기대가 크지 않을 법도 했다.
로드벨 후작가의 칼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업무를 들고 올 정도였으니까.
끼익
열심히 펜대를 굴리다 문을 열고 나오는 타일러에게 에단과 칼리스의 시선이 꽂혔다.
칼리스의 순서는 이미 지났으니 남은 건 에단뿐이었다.
내키지 않는 듯 한숨을 내뱉은 그가 일어서자 칼리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잘 다녀오십시오.”
제법 싹싹한 그의 태도에 에단 역시 피식 웃음으로 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탁
방에 들어섰으나 세실리아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단 역시 자연스레 한 쪽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가 품에서 리본을 꺼냈다.
그녀가 제법 빨리 만들어 준 덕에 그는 며칠째 이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에단의 몸에서 시작된 푸른 오러가 그가 손을 얹은 리본으로 옮겨 가는 것을 세실리아가 턱을 괸 채 지켜봤다.
“매일 해도 되는 거냐? 마나 오러가 이렇게 한꺼번에 비워지면 네 몸에도 무리가 갈 텐데.”
그 말에 에단이 느리게 눈을 떴다.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났습니다. 어차피 마나는 수련과 휴식을 통하면 서서히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는 물끄러미 붉은 루비 안에 응집되어 몰아치기 시작한 자신의 마나를 바라봤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마나가 제게서 사라진다기보다 축적하는 곳을 양분시키는 것뿐이니까요.”
그 말에 세실리아의 눈썹이 꿈틀댔다.
설마 저 녀석…… 단순히 마나를 담기만 하는 게 아니었어?
그런 무모함이 어디 있느냐고 닦달하려던 그녀는 곧 그만두었다. 평소답지 않은 선택을 하는 걸 보면 그도 꽤 조급하다는 뜻이니까.
‘어차피 내 만류 따위 귓등으로 듣는 녀석이니.’
“쯧.”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소파에 누워 천정을 바라봤다.
“에단, 너 생각해 본 적은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3공작가가 갈라서는 것.”
에단의 눈꺼풀이 잠시 떨렸다.
“네가 주시하는 그 레리안 캄스턴이라는 자가 지금 클레리아와 붙어 있다지?”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듣자 하니 그는 요즘 엘레나 이슬레이터와 친밀하게 지낸다고 하는구나.”
다시금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는 황녀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아주 지나치도록 친밀하게 말이지.”
“……그저 친한 것뿐일 겁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건 오랜 친우를 위한 변명이냐, 아니면 그러길 바라는 네 바람인 거냐?”
“…….”
그녀의 말이 피할 길 없는 정곡을 찌르는 통에 에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네가 그를 주시하는 이유가 이슬레이터 영애에게로까지 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3공작가는 끝이야.”
그녀의 말을 듣는 에단의 눈빛은 점차 메말라 갔다.
그런 그를 한참 싸늘히 바라보던 세실리아는 다시 몸을 눕혔다.
“이만큼 그 관계를 지켜 온 것도 대단한 거지.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기 마련이고, 의미는 변질한 채 처음의 마음은 연약해지는 법이다.”
에단은 쓰게 웃었다.
“저희가 황실을, 이 나라를 제대로 받치지 못할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희들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는 천천히 세실리아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3공작가라는 상징이 무너져도, 황실의 근간이 흔들려도…… 그건 너희의 탓이 아니다. 그러니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다.”
그는 리본 위에 올린 손을 점차 말아쥐었다.
“면목 없습니다.”
“너희들 탓이 아니래도.”
그녀는 돌아누우며 몸을 웅크렸다.
“어차피 이 말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니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에단은 듣지 못했다.
* * *
“이번 임무는 로더 백작령에 새로 지어지는 구호소를 지원하는 임무야. 지방에는 아직 구호소가 수도만큼 구축된 곳은 많이 없어서, 아마 로더 백작이 제대로 세워 황실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나 봐. 규모도 큰 편이라 여러 귀족도 투자한 모양이고. 아마 다 지어지면 치유사들이 정기적으로 출장을 가게 될 지역이 될 거라고들 입소문이 돌고 있다고 해.”
클레리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 구호소나 평민 지원 사업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걸 생각했을 때 대놓고 드러내며 황실 지원에 다른 귀족 투자까지 받는 건 드문 일이었다. 레인의 이야기는 현실이 될 신빙성이 컸다.
“로더 백작에 대해 클레리아는 들은 바가 있어?”
“음…… 그렇기야 하죠. 워낙 영지 운영을 잘하는 편이라 수도 진출을 안 했음에도 폐하의 신임을 얻고 있는 가문 중 하나고요. 아마 지금쯤 꽤 나이가 지긋하실 텐데.”
그녀의 말에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지 작년에 별세하고 손자가 작위를 이었다는 것 같아. 1년여가 지났는데도 영지에 큰 손실이 없는 걸 보면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거겠지.”
“아, 칼 로더 백작님이 작고하셨군요. 저도 꽤 어릴 때 한 번 뵌 게 다인지라…….”
“그래, 아무튼 가게 되면 꽤 바쁠 거야. 우리한테 적당한 체계 구축을 바라는 것 같으니까. 아리스는 이번 기회에 구호소 돌아가는 내용을 익힐 수 있을 테니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네, 레인 님.”
아리스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기대 반, 긴장 반인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거란 격려의 의미로 팔을 두드리며 클레리아가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번져 있던 미소가 천천히 풀어졌다.
늘 에단이 있던 그곳에, 냉랭한 표정을 한 낯선 레리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역시 흘끗 눈동자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치 예상치 못한 가시에 스치기라도 한 듯 가슴팍이 시큰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마차 안으로 돌렸다.
“레인 님, 그럼 로더 백작령에는 언제쯤 도착하게 될까요?”
“음…… 뭐 급한 게 아니라 여유 있게 갈 거니까. 오늘은 여관에서 묵고 내일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군요.”
클레리아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바라보는 레리안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웃었다.
멀건 시선으로 한참 동안 보던 그 또한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 * *
마을에 도착해 묵을 여관을 정하자 때 맞춰 해가 졌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아리스가 레인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가 리암이 들어간 방으로 향한 탓이었다.
“레인 님, 리암 경과 방같이 쓰시게요?”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클레리아가 재빨리 귓가에 속삭였다.
“레인 님 남자분이야.”
“뭐어?”
토끼 눈이 된 그녀가 클레리아와 레인을 번갈아 봤다.
말하는 걸 또 까먹은 레인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고, 아리스는 클레리아에게 떠밀려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방에 들어갔다.
“담부턴 미리미리 말씀 좀 해 주세요.”
“응. 일부러 그런 건 아냐.”
“알아요.”
둘이 들어가고, 레인도 들어가 침대에 짐을 던졌다. 뻐근한 몸을 기지개로 푸는데 방문 앞에 멀뚱히 선 레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안 들어 오고 뭐해? 복도에서 잘 셈이야?”
그러나 리암과 레인을 차례로 훑은 그가 싱긋 웃었다.
“전 숙녀분들과 방을 함께 쓰는 게 낫겠는데요.”
‘저 파렴치한…….’
레인이 정색하며 나가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아 끌고 들어왔다.
“그 불순한 입 닫고 들어오기나 해.”
끌려 들어온 레리안은 불만인 표정이었으나 리암도, 레인도 일찍이 그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모두가 잠든 시간, 레리안은 창문을 열고 푸르게 빛나는 달을 바라봤다.
그는 책상 위에서 연기를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코와 입을 수건으로 막았다. 그러고는 창틀에 앉아 손을 뻗었다.
그가 차고 있던 팔찌의 보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손바닥에 놓인 쪽지를 감싸자마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엘레나,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거지?’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는 이용 가치가 있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었다.
물론 치유사라는 힘에 한해서.
그랬기에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의 목숨줄은 끊지 않기로 한 것이 무언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들의 목적을 방해하고 훼방 놓는다면 사실상 전제는 수포가 되는 게 아닌가.
레리안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사이러스와 안투스.
이 둘이 가장 그녀의 제거를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안투스가 클레리아는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딴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는 잠시 시선을 돌리며 엘레나를 떠올렸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던 말이 그녀에게서 나온 순간을 기억했다.
멋대로 굴면서도 3공작가를 향한 태도가 불분명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적개심을 제대로 드러냈으니까.
‘그 말이 나오길 가장 고대한 게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지.’
그는 계획을 짤 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은 싹부터 치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클레리아는 진작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목표가 맞아떨어져 의기투합하고는 있지만,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는 어찌할 수 없었다.
‘후일을 위해 살려 두는 거겠지만, 거슬리는 인물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어쩌다 사라진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
그 순간 다시 한번 그의 팔찌에 박힌 보석이 빛을 냈고, 그가 손을 뻗자 검은 연기와 함께 쪽지가 나타났다.
“빠르군. 안 자고 있던 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가 조용히 쪽지를 펼쳤다.
내용을 확인한 레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회가 적당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치워 버리도록 해요.>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번 파견의 목적은 정해졌다.’
레리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품 안에 넣고 있던 단도를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리암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유려하고 섬뜩한 움직임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을 그의 얼굴 위로 움직였다.
당장에라도 목덜미에 깊숙이 단검을 박아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레리안은, 천천히 리암의 머리칼을 칼날로 들어 넘겼다.
그러나 리암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채였다.
분명 조금이라도 수상한 인기척이 있으면 바로 깼을 그였는데 이상했다.
레리안은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길은 정해졌으니 유희를 즐기자고.”
탁자에서 낮게 연기를 깔며 타는 약을 바라보며, 그의 코와 입가를 덮은 복면이 묘하게 움직였다.
* * *
“괜찮아? 리암 경?”
어딘가 멍한 얼굴을 하는 그를 보며 레인이 물었다.
“잠이 덜 깨는 기분이네요.”
그가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레리안이 핀잔을 줬다.
“불침번 바꾸자고 깨우는데 어지간히 안 깨더군. 기사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 덕분에 한잠도 못 잤으니까 오늘 백작가에 도착하면 나 먼저 잘 테니, 그리 알라고.”
“내가 못 일어났다고?”
“몇 번을 깨웠는지 알기나 해?”
그의 말에 리암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깬 기억이 없는 건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레인이 리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치유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몽롱하던 기운도, 피곤함도 깨끗이 사라졌다.
“요새 힘들었나 보다. 지체 말고 바로 말해. 회복시켜 줄 테니까.”
“네, 죄송합니다.”
찝찝함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리암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캄스턴 경도 이리 와, 못 잤다니까 체력 회복시켜 줄게.”
그러나 그는 손을 들어 거절했다.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누가 제대로 불침번만 서 준다면 체력이 부족할 일은 없겠죠.”
뼈 있는 말에 리암이 노려봤으나 말은 없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찝찝함을 안은 채 그가 출발 채비를 위해 방을 나갔다.
‘안투스 전하가 주신 약물들이 효과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는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레리안이 따랐다.
* * *
‘장난하자는 건가?’
지난밤, 일이 재밌게 될 거라 여겼던 것과 달리, 레리안의 얼굴은 불쾌함으로 가득 일그러져 있었다.
못마땅했던 동행 덕에 설명을 귓등으로 들었던 게 문제였을까.
조용히 말을 몰던 레리안은 결국, 인내심을 잃고 앞서가는 리암의 곁으로 말을 가져갔다.
“이봐, 정말 이 방향이 맞아?”
마침 지도를 넣던 리암이 그를 돌아봤다.
“맞는데, 무슨 일이지?”
“확실해? 정확한 거야?”
묻는 말에 답도 않은 채 채근하는 그를 리암이 싸늘하게 바라보다 허리춤에 넣었던 지도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탁!
“그렇게 못 미더우면 직접 확인하시던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지도를 받아든 그는 서둘러 펴 방향을 확인했다.
리암의 말대로 목적지는 그들이 향하는 곳에 표시되어 있었다.
‘망할, 대체 뭐야?’
레리안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탓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클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캄스턴 경, 무슨 일이죠? 문제라도 있나요?”
물음에 그는 아차 싶은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지도를 접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전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클레리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신경 쓰였으나 당사자가 딱히 해명하지 않으니 별수가 없었다.
“자, 확인했으니 다시 챙겨 둬.”
던지는 지도를 다시 받아 든 리암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레리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기분이 싸한데.’
레리안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
“하하…….”
레리안이 어이가 없는 웃음을 낮게 흘렸다.
정오가 지나자 비로소 목적지 역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큰 저택이었기에 다른 이들 역시 감탄 중이었으나 레리안은 그들과 조금 달랐다.
‘레녹스와 아버지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줄이야.
레리안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것을 모르는 나머지는 그저 건물 규모에 감탄할 뿐이었다.
히히힝!
마차가 안뜰로 들어섰고, 대기하고 있던 집사와 하녀들이 허리를 숙였다.
“치유사님들과 그 수호 기사님들을 맞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차례로 마차에서 내릴 때, 건물 안에서 백작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브랜든 로더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정중히 인사한 그가 눈을 들어 클레리아 일행은 천천히 쭉 훑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레리안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빠르게 일행에게 눈을 돌렸다.
“이 저택을 프란테 지방의 가장 규모가 큰 구호소로 만들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치유사님들께서 잘 살펴보시고 지도 부탁드립니다.”
“규모도 크고, 이런 좋은 사업을 도와달라 청하신 거니 저희도 기대가 큽니다.”
레인이 대표로 대답했다.
“그럼 일단 이곳 상황을 설명해 드릴 테니 응접실로 가시죠.”
예의는 바르나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인상적인 그가 앞장섰고, 일행이 뒤를 따랐다.
클레리아만이 멀뚱히 레리안을 보고 있다는 것만 빼면.
‘뭐지. 로더 백작? 아주 잠깐이지만, 엄청나게 경멸하는 시선으로 이 사람을 봤어.’
바로 뒤따르지 않는 그녀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레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클레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레리안은 상관없다는 듯 불쑥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속삭였다.
“이봐요, 프라이어스 영애. 충고 하나 할까요? 눈치 빠른 것도 적당히 숨기는 게 좋아. 그런 녀석들은 일찍 죽거든.”
팟!
클레리아가 거칠게 몸을 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당신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는군요?”
“그게 제 매력이지 않습니까?”
레리안은 재밌다는 듯 히죽 웃으며 앞으로 안내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럼 이제 안으로 드셔서 일행과 합류하실까요, 나의 치유사님?”
클레리아는 어금니를 꾹 깨문 채 그를 노려보곤 빠르게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런 모습을 레리안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천천히 따랐다.
* * *
로더 백작의 말에 의하면 이 저택은 예전에 친교를 다진 다른 귀족에게 선물 받은 것이며, 백작의 저택과는 거리가 꽤 있는지라 휴가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 업무가 바빠지는 통에 방치되었다고.
“저택과 주변 규모를 따졌을 때 그냥 빈 채로 놀리는 것보다 투자해봄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어 이렇게 구호소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제일 뒤에서 잠자코 듣던 레리안의 입가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로더 백작의 겉보기만 그럴싸한 얼토당토않은 말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구호소? 저들보다 어린 동생들을 피 말려 학대하던 이곳을 사람들 구제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비틀리는 입가와는 달리 그의 눈은 분에 사로잡혀 번뜩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에게 원하시는 일이 정확히 뭔가요?”
“각 방이 구호소 시설로 쓰이기 적합한지를 봐 주시고, 그 밖에 주방이나 필요한 시설들을 더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거기에 인원 규모라던가 환자나 도움이 필요한 평민들의 이송을 위한 이동 통로도 봐 주십시오.”
클레리아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저희도 구비해 놓은 상태이니 일이 과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백작이 고갯짓하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호소 문을 열기 전까지 총괄을 맡은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앞장서는 브랜든과 레리안이 곁을 스쳤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주한 그들의 눈빛은 뚜렷했다.
하나는 싸늘한 괄시로.
또 하나는 증오와 경멸로.
그러나 브랜든은 능숙하게 표정을 지우고 응접실을 나갔고, 레리안도 일행의 마지막에 뒤따랐다.
* * *
묵을 곳을 배정받은 뒤 그들은 쉴 것 없이 곧바로 건물 살피기에 나섰다.
레인이 꼭대기 층부터 객실을 확인하고, 클레리아가 주방과 세탁실. 아리스가 창고와 비품실을 맡았다.
“저, 치유사님.”
넓은 주방과 동선을 확인하던 클레리아에게 언제인지 로더 백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백작님?”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 기사님을 모셔가도 되겠습니까? 물건을 옮겨야 할 것 같은데 마침 일손이 좀 부족합니다.”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레리안이 대답을 가로챘다.
“어쩌죠? 수호 기사는 치유사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말이죠. 백작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셔야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클레리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으나 그는 능청스럽게 브랜든을 바라봤다.
그러나 로더 백작의 태도가 더 놀라웠다.
단칼에 나서서 거절하는 것도 무례하게 느꼈을 텐데 조금의 동요도 없이 클레리아만 보고 있었다. 마치 레리안의 의견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그 태도에 레리안이 표정이 굳어갈 때쯤 클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네. 기사님이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캄스턴 경, 백작님을 도와드리고 오세요.”
“지금 가라고 하신 겁니까?”
레리안이 진심이냐는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절할 요구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까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곁에 있는 게 더 불편했으니까.
그녀까지 등 떠밀자 레리안은 당했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치유사님께서 뜻이 정 그러시다면 가야죠. 예, 가고 말고요. 앞장서시죠. 로더 백작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클레리아가 질리는 얼굴을 했으나 로더 백작의 반응은 여전했다.
다만, 한심하다는 듯한 느낌이 시선에 좀 더 더해졌을 뿐.
싸한 분위기의 그들이 함께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클레리아가 저도 모르게 죽였던 숨을 서서히 토하듯 내뱉었다.
‘뭐지,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
‘쳇, 클레리아 계집…… 아까 농담 좀 했기로서니 바로 복수하려 드는 건가.’
레리안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코웃음을 쳤다.
뚜벅뚜벅뚜벅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레리안은 눈매를 치떠 앞서 걷는 브랜든을 노려봤다.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이 작자까지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안일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건물로 올 건 뭐란 말인가.
그는 동공을 굴려 복도를 둘러봤다.
그때 그대로였다.
여름날의 휴양을 즐겼던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며 이를 갈았던 그 날과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목을 졸리는 것 같은 갑갑함에 레리안은 인상을 썼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클레리아가 있던 곳과도 꽤 멀어졌는데 좀처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같지 않자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 왔다.”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브랜든이 답하고는 복도 제일 안쪽에 자리한 문 앞에 섰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대한 서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뚱한 얼굴로 들어서는데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뚜벅뚜벅
“……?”
발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레녹스.
레리안의 형인 그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리안은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하. 짐을 옮기니 마니 하는 게 핑계일 줄은 알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올 줄은 또 몰랐네? 당신도 내 형님의 개처럼 사는 거 여전합니다? 브랜든 로더?”
“말조심해, 레리안. 난 로더가의 가주이자 백작의 신분이다. 경거망동했다간 옛날처럼 봐주지 않아.”
“봐줘? 네가? 오히려 형님의 개가 되어서 착실하게 명령을 수행하던 게 아니고?”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하던 레리안이 갑작스레 돌변해 윽박질렀다.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부족하다는 거다. 나와 브랜든은 사업을 함께 하는 엄연한 동업자야. 관계를 얄팍하게 깎아내리기에만 급급한 네가 알 리가 없겠지.”
브랜든은 발길을 돌려 서고 밖으로 향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자리를 마련했으니 대화 나누도록 해. 아, 그리고 레리안. 레녹스는 너희가 여길 떠날 때까지 함께 머무를 예정이다. 그러니 허튼짓할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쿵
“뭐? 이렇게 둘만 두고 간다고?”
레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외쳤으나 브랜든은 가차 없이 서고를 나가 버렸다.
여전히 일방적인 태도에 혀가 내둘러졌다.
레리안은 단념한 듯 헛웃음을 흘리며 레녹스를 돌아봤다.
“그래, 그 잘난 차기 캄스턴 후작께서 수도 일까지 내팽개치고 오신 이유. 한번 말해 보지?”
* * *
한낮의 햇살이 창으로 고스란히 비추는 서고는 평화로워 보였다. 그 안에 싸늘히 대치 중인 두 사람을 제외하고.
레리안은 비딱한 자세로 형인 레녹스를 노려봤고, 레녹스 역시 거대한 책장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 보면 분명 할 말은 있는 것 같은데. 사람 불러 놓고 시선으로 압박하는 건 아버지께 아주 잘 배운 모양이야?”
결국, 숨 막힐 것 같은 적막을 이기지 못한 레리안이 비아냥댔다.
그의 말이 끊기자 다시 한번 적막이 흘렀다.
“……브랜든은 무슨 생각으로 여길 구호소화 하겠다는 거지? 이 저택은 우리 가문에서 친교의 의미로 지어 줬던 거잖아?”
레리안에게 이 저택이 익숙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로더 백작가와 캄스턴 후작가는 예부터 친밀해 이 저택 역시 친분의 의미로 캄스턴 쪽에서 건설해 준 것이었다.
그 탓에 여름마다 캄스턴 형제는 이 저택으로 휴양을 오곤 했었다.
그래, 휴양. 말이 휴양이지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주먹 쥔 레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브랜든 말 제대로 안 들었나? 어차피 비어 있는 채로 놀리고 있었으니 구호소로 변경해 쓰임새를 찾겠다는 거고 투자자도 생겼으니 결정한 거야.”
마침내 레녹스의 입이 열렸다.
그의 말은 어떤 감정도, 억양도 없는. 석고상이 내뱉는 말처럼 지독하게 사무적이었다. 형제를 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설마 그 투자자가 캄스턴이라는 건가? 그래서 형이 온 거고?”
그 말에 레녹스가 시선을 돌렸다.
“투자자는 맞지만 온 건 조금 다른 이유랄까. 그건 뭐, 네가 알 바는 아니다.”
“하! 그렇지. 귀하신 분이 하는 일을 나처럼 비천한 망나니 나부랭이까지 알 필요 있겠어? 그럼 그 고귀한 일 잘 처리하셔. 쓸데없는 일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돌아서는 레리안의 등 뒤로 레녹스가 낮게 읊조렸다.
“왜 네가 프라이어스 영애의 수호 기사가 됐지? 수작질이라도 한 거냐?”
그 말에 레리안이 입술을 뒤틀며 그를 향해 저열한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와 그쪽이 날 무시하느라 잊었나 본데 난 내 힘으로 시합에서 2기사 자리를 차지했어. 유능한 내가 중책을 맡는 건 당연해.”
“전시도 아닌 곳에서 상대의 뒤를 잡고 비열하게 공격하는 행위로 차지했대도 말이지. 그렇게 가문의 이름에 또다시 먹칠하고 말이야.”
그 말에 레리안의 눈매가 점차 더욱 매서워졌다. 입가에 여유 있게 번져 있던 미소도 점차 사라졌다.
“내가 그런 게 한두 번인가? 새삼스럽게 왜 이래?”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은 거냐?”
레녹스가 순간, 예고도 없이 정곡을 찔러 왔다.
질문의 방향이 급작스럽게 바뀌자 레리안 역시 표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관리하려 애쓰긴 했지만.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안투스 전하께서 황위를 잇는 건 기정사실인데 왜 굳이 그렇게 선 긋듯 말하지? 설마 그 일에 의의라도 있는 거야?”
레리안이 묘한 웃음을 띠며 그를 건드렸다.
그러나 동생을 바라보는 레녹스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그는 시선을 돌리며 한심하다는 듯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폐하는 굳건하시다. 먼 훗날의 얘기를 지금 꺼내는 건 시간 낭비야. 외려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다. 너, 프라이어스 영애를 감시하려는 거냐?”
그 말에 미소를 띤 채 벌어져 있던 레리안의 입술이 서서히 닫혔다.
단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 레녹스의 예리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도 아니라면…… 너야말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 생각하고 있는 거냐?”
레리안의 눈가가 잠깐 움찔하고 떨렸다.
그는 가슴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단도를 떠올렸다.
레리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노려봤다.
입을 다물고 감정을 지운 얼굴로 마주한 두 사람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나 역시 감시자로 온 거니까.”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리안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자신이 움직이는 것처럼 레녹스 역시 같은 목적으로 온 게 분명했다.
물론, 자신은 클레리아를 목표로. 그는 자신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 다를 뿐.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군. 대놓고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저쪽에서도 상당한 조건을 내걸었을 게 분명해. 아니라면 레녹스가 쉽게 움직였을 리 없으니까.’
정리가 끝나자 레리안은 천천히 바지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래, 무슨 얘길 하러 여기까지 행차해서 따로 불러냈는지 알겠군.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이제 형님 볼일 봐.”
레리안은 천천히 돌아서 서고의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레리안, 조용히만 있다면 나도 이 이상으로 너와 부딪힐 일은 없다. 그걸 바란다면 수작 부리지 마라.”
그의 말에 문고리에 손을 얹었던 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작?”
그의 고개가 레녹스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형님이나 나나 각자 목적을 위해 왔잖아? 그렇다면 그것에 충실할 뿐인 거야. 지켜내지 못하면 빼앗긴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간단하다고 아버지와 형님이 귀에 못 박히도록 그렇게 말했잖아?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고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하자고.”
쾅!
거슬리게 닫히는 문소리에 레녹스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