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52)

* * *

“에단…….”

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클레리아는 나직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앞장선 에단은 그저 거침없이 나아갈 뿐이었다.

사람이 없는 신전 정원 구석에 도착해서야 그는 걸음을 멈췄다.

레리안을 마주한 조금 전까지는 살기를 뿜어 대던 그였는데, 지금은 그저 낙담에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대체 왜 하필 레리안이 클레리아의 수호 기사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후…….”

그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었다.

“에단, 날 봐.”

그 순간 클레리아가 그의 얼굴에 붙들어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치유력을 흘려 그의 두통을 가라앉혔다.

“나 괜찮아, 에단.”

“……클레리아.”

“난 괜찮아. 그런 사람 곁에 있다고 어떻게 되지 않아. 잘 지내고 있을 수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에단은 이를 악물었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첸시아의 일만 해도.

레리안은 수상쩍을 뿐만 아니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위험했다.

그런 사람이 클레리아의 목숨을 지키는 수호 기사라니.

이건 수호가 아니라 담보다.

어쩌면 위험 자체에 그녀를 묶어 두는 일일지도.

황궁에 입궁하는 즉시 폐하께 간청할 생각이긴 했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누에른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첸시아의 사건 때 별개인 것처럼 보였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몰아세우기 위해 안투스와 레리안은 협심했다.

그런 자를 치워 달라 하는 건 안투스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왜 자꾸만 일이 꼬이는 걸까. 널 지키겠다 나섰던 건데…… 되려 널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어.’

자책감과 좌절에 그는 점점 고개를 떨궜다.

몹시도 아픈 얼굴의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질끈 감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나는 약하지 않아.”

그대로 고개가 당겨지고, 에단의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 에단도 힘을 내 줘. 그래서…… 다시 내게 돌아와 줘.”

잠시 머물렀던 따스함이 멀어지며 클레리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여리고 투명한 분홍빛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한 빛을 냈다.

“난 에단이 없으면 안 되니까 반드시 돌아와야 해.”

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거리를 벌리며 웃었다.

“모두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잠깐 떨어져 있다 해도 내 곁에서 에단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 그러니 내 걱정은 마. 섭섭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을 거니까 서둘러 돌아와야 해.”

눈물이 난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하는 건데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난 괜찮을 거니까.

그가 곁에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니까.

에단의 푸른 눈동자가 멀어지는 그녀를 쫓았다.

망연하게 자신을 책망하던 것도.

누군가에게 휘둘려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향한 좌절감도.

모든 게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곳.

오직 머릿속에는 그것만이 자리했다.

에단은 손을 뻗어 멀어지는 클레리아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에단?”

놀란 클레리아가 그대로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강하게 끌어안은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덮었다.

길고 짙게.

갈급하고도 그동안의 애달픔을 쏟듯 입 맞췄다.

입술과 뺨을 감싼 그의 온기가.

머리끝으로 몰려드는 열기와 달뜨는 숨으로 정신이 혼미해져도 싫지 않았다.

클레리아는 그의 옷깃을 힘껏 쥐었다.

“꼼짝 말고 기다려.”

긴 입맞춤 끝에 그녀를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에단이 낮게 속삭였다.

“순식간에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붉어진 클레리아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응!”

* * *

“타일러 윈터펠로운?”

에단이 말한 부마 후보자들의 이름을 듣던 클레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응, 윈터펠로운 백작가의 영식이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

클레리아는 곤란한 얼굴로 턱을 쥐었다.

타일러 윈터펠로운.

회귀 전 엘레나의 또 다른 정부.

자유롭고 방탕한 레리안과는 달리 고리타분할 정도로 엘레나만을 바라보고 그녀를 위한 기사의 정석처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긴 했지만, 특별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설마 그 사람까지 부마 후보가 되었을 줄이야.’

왠지 모를 불길함에 클레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엘레나와 이미 접점이 있을까?

어딘가 찜찜한 표정에 에단이 물었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야?”

그 말에 클레리아는 그를 바라봤다.

이미 레리안이 회귀 전처럼 엘레나와 붙었고, 플로릭 아이문트 역시 그때처럼 생겼던 고비를 넘겼다.

과거의 일이 온전하게 다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에단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클레리아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덧붙였다.

“아니, 하지만 그냥 느낌이 안 좋아. 에단, 다른 후보도. 그리고 그 타일러 윈터펠로운이란 사람도 조심해.”

그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의 레이디가 당부하는 거니 그리 해야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시선이 클레리아의 목으로 향했다.

“근데 클레리아. 그 리본 혹시 여분이 더 있을까?”

“응, 탈의실에 가면 있을 거야. 왜?”

“그럼 그것 좀 빌려주겠어?”

“왜?”

되묻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애틋하게 웃었다.

“음…… 찾았다!”

클레리아는 구석에 놓인 바구니에서 여분의 리본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하나를 꺼내 탁탁 털며 후후 먼지를 불었다.

그녀는 허전하게 빈 셔츠 목 부분에 조심스럽게 리본을 달고, 거울에 자신을 비췄다.

원래 하고 있던, 황제에게 하사받은 리본은 에단이 빌려 갔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심오했다.

‘증표로 삼을까 해서.’

그의 말을 곱씹으며 클레리아는 조용히 리본을 쓸었다.

황녀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녀 또한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두 분한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을 독려하듯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벌컥

갑작스레 열린 탈의실 문과 함께 심드렁한 레리안이 나타났다.

고개만 돌린 채 그를 본 클레리아과 레리안의 시선이 묘하게 허공에서 얽혔다.

“여기 계시는군요. 너무 늦으시기에 찾으러 왔습니다.”

“…….”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제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어쩌겠습니까? 당분간은 제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것에 익숙해지셔야겠습니다. 이번처럼 저 이외의 사람과는 단둘이 계시지 마십시오.”

순간 날카로워진 그의 눈이 냉랭함을 뿜었다.

그러나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클레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경과 함께 하는 건 제 마음에 들고 아니고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경께 지금 느끼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여긴 여성 탈의실입니다. 남자분께서 그렇게 함부로 문을 열어젖히시면 안 될 텐데요?”

그녀의 건조한 질타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리안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열었던 문에서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눌리지 않으려는 클레리아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소싯적 버릇이 어디 가나요? 행동이 교정이 될 때까지는 치유사님께서 제동을 좀 걸어 주셔야겠습니다?”

아무리 주변에 의지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해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던 에단은 이제 없다.

웬만한 여자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클레리아라는 여자는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듯 단 한 순간도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맞받는다.

레리안은 그런 그녀가 재밌기도,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됐든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곁에 에단도 없는 건 확인했고.

그는 표정을 굳히며 돌아섰다.

“볼일을 마치셨으면 집무실로 돌아와 남은 일정을 마무리하십시오.”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클레리아는 리본을 꽉 쥐었다.

* * *

클레리아와의 첫날은 종일 히리스벨라 관에서의 집무실에서 보냈다.

탈의실에서 재회한 후, 두 사람은 더는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클레리아의 곁에 있는 이들이 더욱 그것을 막았다.

이리저리 부르고 그에게서 멀리 떨어트리려 하는 것이 노골적이었다.

딱히 눈에서 사라지거나 멀어진 것도 아니기에 레리안도 시답잖은 그 시도들을 그냥 두었다.

“고맙습니다.”

저택으로 배웅을 했을 때 단 한마디. 그것이 오늘 나눈 대화의 끝이었다.

‘앞으로 이 지겨운 짓거리를 더 해야 하다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하군.’

그는 그런 생각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빠르게 시내에 있는 고급 살롱으로 향했다.

그곳은 고급진 인테리어와 개별로 나뉘어져 있는 응접실 형태의 카페로 유명했다.

나뉘어진 방은 은밀하고, 굉장히 사적인 용도로 쓸 수 있었기에 고위층을 대상으로 고가에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는 들어서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따끈하게 우려진 채 놓여 있는 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한쪽 커튼 뒤가 움직인다 싶더니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트리엔이 나타났다.

그녀는 첸시아의 사건 이후 거의 칩거하다시피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공포에 떠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레리안은 피식 웃었다.

“거기서 뭐하는 겁니까? 델토른 영애. 이리 와서 앉으시죠.”

그의 권유에 트리엔은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불안함은 여전한지 앉지는 않았다.

“안색이 안 좋군요. 어디 아픈가요?”

“좋을 일도 없죠, 황제 폐하의 진노를 간신히 피했으니까요.”

레리안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첸시아의 가문은 일가친척이 8촌까지 모두 척살 당했다.

먼 친척이었던 델토른 후작가는 다행히 그 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첸시아를 지원하고 있었기에 눈총은 피할 수가 없던 것이다.

사실 후작가라는 직분이기에 더욱 문책당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간신히 그것을 면했다는 걸 트리엔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대가 첸시아의 방에서 가져다준 이 목걸이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레리안은 품에서 증거 품목으로 쓰였던 목걸이를 꺼냈다. 예전에 엘레나가 첸시아에게 호의를 가장해 주었던 것이었다.

그걸 트리엔이 레리안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냥 단순히 이상한 물건이 있다면 조사해야 하니 가져다 달라는 말을 너무 쉽게 믿었어. 프라이어스 영애의 독살 건 말고도 뭔가 더 있는 듯 싶은데…….’

트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큰일에 얽힌 것은 분명한데 아는 것이 없으니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늘 레리안의 부름도 어쩔 수 없이 응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쪽에서 드리는 소정의 보답입니다.”

그는 품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나 트리엔은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레리안은 웃었다.

그럴 테지.

델토른 후작가가 돈이 부족한 가문도 아니고.

하지만 돈을 내민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리엔이 발버둥 쳐도 그들에게는 고작 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받지 않으면 첸시아에 버금가는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트리엔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받으시죠, 델토른 영애. 다시 사교 모임 하셔야지요? 설마 첸시아 꼴이 나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죠?”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차게 식은 손을 내밀어 트리엔은 금화 주머니를 쥐었다.

그야말로 치욕, 그 자체였다.

“감사합…… 니다. 캄스턴 영식.”

볼 만하게 질려 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캄스턴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조용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방 안에, 세 명의 남자들이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각기 가문을 대표하는 자리인지라 그들이 입은 옷은 화려하고도 정갈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치장되어 있었다.

왼쪽 가장자리에 앉은 이는 타일러 윈터펠로운이란 자로 백작가의 영식이며 묵직한 검술과 매너로 유명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앉은 이는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20대 후반의 칼리스 로드벨이라는 후작가의 영식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잘 웃는 탓에 이 자리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가운데에 앉은 에단 칼리스터만이 팔짱을 낀 채 잔뜩 날이 서 침묵을 지켰다.

타일러는 적당히 모른 척하는 모양새였고, 칼리스는 갸웃거리며 분위기가 살벌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안내에 세 사람이 일어섰다.

이윽고 한껏 우아하고 청초하게 꾸며진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래 가지고 있던 기질이 있기에 그 꾸며짐 사이사이로 고혹적이고 고고한 자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타일러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고, 칼리스는 대놓고 얼굴까지 붉히며 감탄을 내뱉었다.

에단만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스타일은 세실리아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행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이상 얼마나 저 꾸밈을 당한다고 히스테리를 부렸을지 알 만했다.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세실리아가 작게 ‘씁’ 하는 소리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녀가 안내받은 자리로 들어와 서자 세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윈터펠로운 백작가의 타일러 윈터펠로운입니다, 전하.”

“칼리스터 공작가의 에단 칼리스터입니다, 전하.”

“로드벨 후작가의 칼리스 로드벨입니다, 황녀 전하.”

“그만 자리에 앉아라.”

황녀가 짧게 답하고 앉자 나머지도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마주하고, 세실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앞에 앉은 세 사람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낯간지러워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생각도 못 한 해괴한 짓거리인지.

결국, 그녀는 몇 시간을 공들여 꾸민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 버렸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는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노골적으로 이 자리에 관심도 없고, 성가시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래, 황제 폐하의 변덕 때문에 그대들이 고생이 많군. 하나 벌어진 일이니 이 기간에 서로의 행실에는 충실해야 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의 입에서 같은 대답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작위적인 상황에 신경이 거슬리는 듯 세실리아는 인상을 구겼다.

“그럼, 윈터펠로운 영식. 날 따라오거라.”

마련된 방에 차례로 불려 가고, 각자와 2시간 동안의 대담이 이어졌다.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명목이었으나 앞서 들어갔다 나온 타일러나 칼리스의 표정은 영 이상했다.

타일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으나 칼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딱히 황녀의 반응을 기대하거나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성사된다 한들 정략혼이라는 점에서 로맨틱한 감정을 접어 두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차례가 되어 들어가려는 에단에게 칼리스가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심기가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참고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는 싱긋 웃어 보이며 대기하고 있던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심기가 안 좋다고. 그럴 수밖에.’

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정말이지 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세실리아는 머리에 장식되어 있던 핀을 풀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눈동자만 굴려 그것을 흘끗 바라본 에단은 별 관심 없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질색하시는 것치고는 네 시간은 잘 버티시지 않았습니까?”

“버틴다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내가 오죽 지루하면 저 세금 관련 책자를 다 읽었겠니! 넌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게냐?”

그것을 본 에단이 칼리스의 언질을 떠올렸다.

설마 상대를 앉혀 놓고 자신은 책만 읽었단 말인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정말 세실리아는 만만치 않았다.

에단은 두꺼운 책자를 들어 살피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고정하십시오, 밖으로 새 나갑니다.”

“흥, 황실 건축물을 우습게 보는 거냐? 여기서 비명을 질러도 밖에 있는 얼간이들에게 들리지도 않을 거다.”

“그렇습니까? 그거 마음에 드는군요.”

에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것을 보며 세실리아 역시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팔에 낀 보석과 걸치고 있던 망사를 벗어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았다.

스윽

그녀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에단의 앞에 내밀었다.

“이번 간택을 참아 주는 조건으로 안투스 녀석에게 받아 낸 인사 명단이다. 그놈과 친교가 있는 자들이지.”

사교성이 없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명단은 정말 짤막했다.

“믿을 만한 겁니까?”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내놓으라 요구해서 얻은 것이다. 그놈이 설마 곧이곧대로 했으려고?”

“그럼 전혀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 한 가지 소득은 있다.”

붉게 칠해진 손톱을 반짝이며 그녀의 손가락이 이름 두 개를 가리켰다.

“레리안 캄스턴. 그리고 서제도의 4왕자 사이러스 울렌가르. 다른 이름들은 모두 거짓이라 할지라도 내게 준 이 명단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있다. 대외적으로 친분을 밝히긴 했어도 뒤집어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은 확실하게 그 녀석과 함께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내게도 내걸어 보여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단 계산인 거지. 그러나 오히려 그 녀석이 멍청하게 힌트를 준 거다.”

그 말에 에단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 둘을 추적해라. 특히나 캄스턴 영식 말고 4왕자를.”

세실리아는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싸늘하게 읊었다.

“캄스턴은 이러나저러나 내국인이야. 우리의 눈을 피하려면 타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겠지. 그렇다면 움직임도 훨씬 대범했을 거다. 그렇게 안심했을 때 비로소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 엘라단 아카데미부터 조사하거라.”

역시 세실리아다.

머리가 비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

캄스턴에게 주목하고 있던 그와는 달리 그녀는 훨씬 멀리 보고 있었다.

“일국의 왕자를 감시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 될 겁니다.”

에단이 능청스레 웃으며 대꾸하자 세실리아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네 녀석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잖느냐? 실력 발휘해 보아라.”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하께서도 되도록 주변을 주의하셔야 하겠습니다.”

“알고 있다.”

“이 부마 간택에서도 말이지요.”

그녀의 미간이 꿈틀댔다.

“타일러 윈터펠로운, 그를 조심하십시오.”

“윈터펠로운 영식을?”

에단은 잠시 그를 언급하던 클레리아를 떠올렸다.

어딘가 난처한 기색은 역력했으나 그 말만큼은 철회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 쉽게 그런 당부를 하지 않는 그녀기에 가볍게 넘기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후보로 있는 한 세실리아가 부딪힐 사람이기도 하니 알리는 것이 맞았다.

“클레리아가 그러더군요. 이유를 잘 설명할 순 없는 것 같은데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흠, 그 아이가 그랬다면 맞겠지. 알겠다.”

에단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유도 묻지 않고 바로 신뢰하시는 겁니까?”

“너보다 백배는 더 신뢰 있는 아이다. 문제라도 있느냐?”

에단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뇨. 기뻐서 그럽니다.”

“흥, 능구렁이에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는 네놈과는 천지 차이지.”

그녀가 긴 소파로 가 누우며 입을 비죽거렸다.

에단은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클레리아에게서 받아 온 치유사 정복에 다는 리본이었다.

“이건 폐하가 하사하는 리본 아니냐?”

“네, 클레리아의 것입니다.”

“이것을 왜?”

멀뚱히 묻는 그녀를 향해 한층 어두워진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연금술에 능하신 전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세실리아는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진지함을 느끼며 리본을 받아 들었다.

그녀와 있을 때 이런 식의 부탁은 좀처럼 하지 않는 그였기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리본에 달린 보석을 제 마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세실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부마 간택이 시작된 지 이틀째.

클레리아의 수호 기사를 레리안이 맡게 된 지도 어느새 나흘째였다.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다른 치유사들과 이야기하는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어디 파견이라도 나가거나 하면 좀 쫓아다니면서 빈틈을 찾아볼 텐데 요즘은 집무실에만 붙어 있어 유심히 살피는 건 무리가 있었다.

칼리에가 무언가를 시킬 때마다 따라나서려 하면 레인이 곁을 가로채질 않나. 아리스라는 계집은 수습 기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거야 원, 이렇게 주변인들이 나서서 철벽을 치면 누가 누굴 감시하는 꼴이 되는 건지.’

그는 못마땅함에 입술을 뒤틀었다.

그때 사제 하나가 집무실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저, 치유사 클레리아 님을 찾는데요.”

“전데요.”

그녀가 일어서자 사제가 다가와 서신을 건넸다.

“새로운 파견 임무에 배정되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집무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당혹스러운 표정의 레인이 리암을 바라봤고, 아리스 역시 불안한 시선으로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하, 노골적이구만.’

레리안은 의도가 선명한 그들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으나 상관없었다.

기다리던 기회가 왔으니까.

그때였다.

쾅!

조용한 분위기를 깬 것은 다름 아닌 칼리에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나와 클레리아의 손에 들린 서신을 가져왔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무서운 얼굴로 낮게 말했다.

“난 가 볼 데가 있으니 모두 이만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레인이 무어라 그녀를 부르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돌아서서 집무실 밖으로 향하는 칼리에의 얼굴은, 무척. 아주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으니까.

* * *

또각또각또각

어딘가 힘이 잔뜩 실린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칼리에는 표정을 굳힌 채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간의 이야기는 대충 에단에게 전해 들었었다. 깊게 말하지도 않았지만, 어디 황궁을 드나든 세월이 몇 해던가.

어떤 이가 위험하고 어떤 이를 멀리해야 하는지는 오랜 시간 이미 수없이 경험했다.

레리안이 처음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대번에 에단이 말하기 꺼리던 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 또한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를 보며 질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다.

이런 작자를 붙여 놓고 파견이라니.

서신 끝을 쥔 칼리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황제 궁의 문지기에게 말하자 그는 움찔 놀랐다.

칼리에는 웬만해서는 늘 황제가 먼저 불러야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이렇게 나서서 황제를 만나러 왔다고 하는 일은 없었다.

생소한 일이었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전했다. 그리고 온 답신은 더욱 문지기를 놀라게 했다.

알현실이 아닌 집무실로 그녀를 안내하라는 것.

일반적으로 정말 은밀한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면 신하들은 대부분 알현실에서 만나는 것이 정석이었다.

집무실은 황가의 일원 정도만 드나드는 것이 법도였으니까.

의아해도 황제의 명이니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어 안내인이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기본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칼리에가 오늘따라 이리도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세운 모습이라니.

‘어딘가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기에 안내인은 곧 집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먼저 폐하께 아뢰겠습니다. 폐하, 칼리에 에나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녀는 여전히 허리를 곧추세운 채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대신 긴장한 안내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온전히 누에른과 칼리에만이 남았다.

한창 집무를 보던 중이었는지 그는 깃펜을 쥔 채 물끄러미 칼리에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칼리에는 작게 묵례했다. 평상시와 다른 행동에 누에른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보게 된 분노한 칼리에의 모습이었다.

“그대가 이렇게 화가 난 걸 보는 건 이십 년 만인 듯하군. 치가 떨릴 정도로 분에 겨우면 늘 이렇게 내 앞에서도 오만방자하게 굴지.”

그럼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에 든 서신을 들어 보였다.

“클레리아에게 파견 임무를 내리셨더군요.”

“그런데?”

“못 미더운 사람을 곁에 붙이신 것도 모자라 그 둘만을 따로 내려보내시겠다니. 클레리아는 폐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에 보내는 것이야.”

“아뇨, 죽으라고 등 떠미시는 거지요.”

칼리에는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내뱉었다.

“그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건 폐하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무리한 명을 내리십니까?”

“그는 안투스가 신뢰하는 자야. 그런 자에게 내가 신의를 보이지 않으면 황태자에 대한 의구심만 커질 뿐이야.”

“그거야 폐하의 사정이시지요!”

칼리에의 언성이 높아졌다.

평소의 누에른이라면 진작 그녀를 감옥에 처넣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안투스에게 힘을 싣는 일이야. 그대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관해야 합니다. 클레리아는 제 부하이자 딸이고 가족이니까요. 그 아이가 위험해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누에른은 무거운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누구든 클레리아의 주변인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칼리에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스럽긴 해도 그는 명을 물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리하고 있다.

누에른은 분명 누가 봐도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이 아니라면 안투스가 적자임을 증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랬기에 무리하는 것이었다.

불쌍한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가진 권력과 술수를 쓰고자 하는 것. 그것이 부족한 아버지의 마음이었으니까.

침묵하며 생각을 돌릴 마음이 없어 보이자 칼리에가 결국 인상을 썼다.

“결국, 또 다른 알렌을 만드실 생각입니까? 그런 미련한 고집을 못 버리셔서요?”

그 말에 누에른의 눈가가 꿈틀댔다.

“칼리에, 선을 넘지 마라.”

“선을 넘은 건 폐하십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투명한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때, 그 순간. 폐하께서 고집만 부리지 않으셨어도…… 알렌이 폐하를 구하기 위해 방패가 되진 않았을 겁니다.”

지난 30년이란 세월 동안 그들의 입에서 절대로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금기와도 마찬가지였던 그 이야기가 기어이 칼리에의 입에서 나왔다.

누에른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그때 고집만 부리지 않으셨다면! 폐하도 무사하셨을 거고, 알렌도 제가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단 말입니다.”

칼리에를 지켜보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 사람을 뺏어가 놓으시고…… 또 그러시려는 겁니까?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미련 때문에?”

누에른의 손 아래 놓였던 문서가 그의 손길을 따라 구겨졌다.

“그간 단 한 번도 폐하를 원망하는 언사 따위 해 본 적 없습니다. 그저 충성만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 견디지 못하게 만드신 건 폐하십니다.”

“나와 알렌, 그리고 그대 사이의 일을 프라이어스 영애에게 빗대 말하지 마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음이야.”

결국, 칼리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안투스 황태자님이 황위에 맞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걸 폐하께서만 외면하고 계십니다.”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다. 칼리에 에나스.”

안투스의 얘기에 누에른의 눈에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안다.

비뚤어진 애정쯤이란 건 진작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끝내 그걸 놓지 못하는 아비의 마음은…….

칼리에도 그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투로 대꾸했다.

“어차피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리란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꺾지 못했던 고집이 지금이라고 꺾이겠습니까. 클레리아를 보내시겠다면 알겠습니다. 단, 제 제안을 들어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두 번 다시 제 얼굴을 보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칼리에…….”

그가 짜내듯 불렀으나 그녀의 표정 역시 단호했다.

“폐하께서 안투스 전하를 지키시듯, 저 또한 제 아이를 지켜야겠습니다.”

* * *

다음 날 집무실에 온 클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 임명된 파견 임무에 레인과 리암은 물론, 아리스까지 동행하게 된 것이다.

레인과 리암이 함께 한다면 안심이 되겠지만, 아리스까지라니.

기본적으로 보조치유사에게는 수호 기사가 지명되지 않는데. 치유석이 없으면 치유력을 못 쓰는 한계 때문에 거의 수도에서만 활동하는 탓이었다.

그래서 남아서 공부 및 수습 생활을 거쳐야 하는데 이번 파견 임무 동행으로 대신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잘됐다! 이번에도 함께라니!”

‘저놈이랑 보내기 싫었는데’라는 말을, 레인이 눈치껏 레리안을 보며 삼켰다.

“에단도 안심하겠군요, 무엇보다 아리스 님이 함께 가신다니 더 잘됐습니다.”

리암의 말에 아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아리스까지는 생각지도 못한지라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클레리아가 칼리에를 바라봤다.

그녀는 늘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인자하게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건 레리안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된 것으로 알고, 파견 준비하도록 해요. 난 잠시 구호소 쪽을 돌아보고 와야겠어요.”

칼리에가 겉옷을 챙기며 말했다.

“아, 저기…….”

클레리아가 그녀를 부르려 했으나 칼리에는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칼리에 님.’

그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클레리아는 그녀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레리안이 자연스레 쫓으려 할 때 그녀가 홱 돌아섰다.

“캄스턴 경은 집무실에 남아 있도록 해요.”

“하지만 치유사님이 움직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저도 동행하는 것이…….”

“남으세요, 명령입니다.”

단호한 말에 레리안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사이 클레리아는 재빨리 칼리에에게로 뛰어가 버렸다.

“허…….”

‘저 계집’이라고 중얼거리려다 그는 곁에 바싹 붙은 레인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클레리아가 엄격할 땐 장난이 아니야, 암.”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그렇게 중얼거린 레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졌다.

‘흥, 단체로 사람 하나 머저리로 만드는군.’

레리안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남은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아 버렸다.

“칼리에 님!”

왜 저리도 빠르게 피하듯 가 버리시는 걸까.

분명 이번 일은…….

“칼리에 님!”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클레리아는 간신히 그녀를 붙들었다.

“클레리아, 파견 나갈 준비를 해야죠.”

“하아, 하아. 칼리에 님, 이번 일 칼리에 님께서 힘을 써 주신 거죠?”

“…….”

그녀는 대답 대신 웃으며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그런 칼리에의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다.

‘칼리에님, 우신 건가?’

순간 마음 한구석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무리해서 힘을 쓰신 거야, 분명히 그런 거야.

클레리아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칼리에 님, 무리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에요. 칼리에 님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그녀는 애틋하게 웃으며 클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무리하지 않았어요. 난 오랫동안 침묵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지키고 싶은 것이 없는 건 아니에요.”

왠지 그렇게 말하는 칼리에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거니까 클레리아가 미안해할 건 없어요. 가족을 지키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녀는 꽉 붙들고 있는 클레리아의 손을 두어 번 다독였다.

“파견 조심해서 잘 다녀와요, 클레리아. 조심, 또 조심해서 무사히 와야 해요?”

그 말을 남기고 칼리에는 마차에 올라 구호소로 향했다.

“칼리에 님…….”

그 모습을 지켜보는 클레리아의 머릿속에 ‘가족을 지키는 건 당연하잖아요?’라는 그녀의 말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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