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52)

* * *

어찌나 신경질적으로 외쳤는지, 그 근처에 있던 시녀들과 클레리아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시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모두 토끼 눈이 된 상황이었다.

클레리아는 세실리아를 눈치를 얼른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제국에서도 유명한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30이란 나이에도 결혼이나 연애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황제 또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었고.

그런 그가 느닷없이 그 무언의 약속을 깬 것이다.

적잖이 충격받은 세실리아는 의자 손잡이만 틀어쥔 채 거친 콧김을 뿜었다.

아버지의 독단에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습이었다.

“황녀 전하.”

팍!

클레리아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녀가 괘씸하다는 듯 손잡이를 세게 내리쳤다.

“내 생각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이 무슨 망측한 변덕이시란 말이냐! 농이어도 그 도가 지나치다, 당장 아버님을 뵈어야겠다. 채비해라!”

“저, 전하. 다만 이번 부마 간택은 비공식적인 일로, 조금 지켜본 다음에 공적으로 돌릴 것인지 고민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면 될 것을 조금 지켜본다는 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챙강!

분이 극에 달한 듯 그녀가 탁자 위에 있던 컵을 쳐 박살 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세실리아가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나. 나름 널 위로한답시고 불러들였는데…… 내가 그럴 상황이 못 되는구나. 이만 돌아가겠니?”

격하게 화가 났음에도 차분히 말하려 애쓰는 모습에 클레리아는 정말 황녀와 자신이 서로를 많이 아끼게 됐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겠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폐하와 대화를 나눠 보십시오. 전하.”

“하하, 그래. 대화…… 대화, 나눠 봐야지.”

다시금 올라오는 분을 누르듯 세실리아가 살벌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달리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클레리아는 천천히 정원으로 향했다.

“그래, 잘난 폐하께서 내 부마 후보로는 누굴 점찍어 두셨다고 하느냐?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여지는 두셨느냐?”

자리를 비켜 주자 점차 세실리아의 노여움 가득한 비아냥이 더욱 커졌다.

“전하, 그것이…….”

딱히 시녀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나쁜 소식을 가져온 그녀는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황녀의 분노에 머리를 조아렸다.

“들은 대로 고하라!”

다시 한번 세실리아의 일갈이 이어졌다.

호통에 클레리아는 어깨를 움찔하며 늘 돌아가는 마법을 걸어 줬던 고양이의 턱을 만졌다.

“에단 칼리스터 경을 포함한 세 명의 후보가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

대답에 놀란 건 세실리아만이 아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클레리아가 고개를 돌렸고, 당혹감에 찬 세실리아와 눈이 맞았다.

냐아-.

그 순간 클레리아는 그대로 정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하필 고른 후보 중 칼리스터 경이 있다니.

사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그만한 부마 후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마 정도에 그칠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딸과 충신을 이용할 분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이런 짓을!

세실리아는 기가 막혀 이리저리 방 안을 배회했다.

돌아가기 전에 본 클레리아의 얼굴은 정말…….

어처구니도, 할 말도 없어 세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녀석들을 뻔히 아는데. 그걸 이어 주겠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이런 꼬락서니라니!

너무 당황스러워 그녀는 뭘 어찌해야 하는지 판단도 서질 않았다.

“일단…… 일단 아버님께 가자.”

“폐하, 황녀 전하께서 알현을…….”

“비켜라!”

시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실리아가 그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올 것이 왔군.’

누에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얼굴로 깃펜을 내려놓았다.

화가 난 얼굴의 세실리아가 누에른을 노려보았다.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반응을 보아하니 들었구나.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일단 두고 보겠다 하지 않았느냐.”

“비공식이든 공식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갑자기 제 생활에 딴지를 거시냔 말입니다!”

“아비가 되어서 딸이 혼자 늙어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란 말이냐?”

“지금껏 그러셨잖습니까. 이제 와 왜요!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그러셔야 하지 않습니까!”

누에른은 불편함이 가득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진정하라는 경고였다.

세실리아는 황제의 집무실에 밀고 들어온 실례도 있는 만큼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네 수준에 맞는 이들로 구성을 했다. 그러니 그렇게 노여워할 일이 아니야.”

“지금 그것 때문에 그런 줄 아십니까? 제 생각 뻔히 아시면서 부마 간택을 하겠다고 하신 것도 모자라 칼리스터 경까지 넣지 않으셨습니까!”

“칼리스터 경은 공작가의 일원이자 후계자고. 엘라단 사건부터 시작해 치유사의 호위 기사로서 활약이 대단하다. 게다가 명실상부 라스칸트의 1기사이고 실력자야. 부족함이 없단 말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그냥 저 혼자 살다 가고 싶습니다. 혹여라도 황위를 노린다 의심받을 여지는 남기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아버님이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냥 그리 안타까이 여기시는 안투스만 끼고 사시라 그렇게 제가 엎드려 살았던 거 아시면서 왜!”

배신감에 누에른을 향한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조용히 지켜보고 정하겠다 하는 거다.”

“아버님답지 않게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하다못해 칼리스터 영식은 빼주세요. 그 녀석은…… 그 녀석은 연모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명문 귀족가의 사내라면 그런 것쯤은 접을 수 있는 야망과 배포가 있어야지. 영식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아버님!”

그러나 누에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내가 그리 아끼는 안투스라고 했느냐? 그래, 그 때문이다. 세실리아 너에게 부마를 두려는 건 그 탓이다.”

세실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

“이건 안투스의 제안이란 말이다.”

* * *

쾅!

경을 칠 상황의 연속이었으나 누에른은 그 어떤 노여움도 보이지 않았다.

안투스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딜 내놔도 눈에 띄는 외모나 분위기는, 아버지를 닮은 덕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손에서 놓으며 후계자라는 이름에서 멀어졌다.

그저 유흥과 사치를 즐기고. 변덕을 취미로 사는 그런 황녀의 이미지를 스스로 굳힌 것이다.

[저는 결혼 따윈 하지 않겠어요. 얽매이는 모든 건 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도 그것만은 손대지 마세요.]

누에른은 그 언젠가 어린 나이에 당돌한 태도로 카랑카랑하게 말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무언의 지지로 존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깨 버렸으니 이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누에른은 마침내 황태자로서 두각을 보이려는 안투스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세실리아의 말대로 이번 간택으로 무작정 부마를 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대신들에게 안투스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각인할 필요는 있어. 그때까지만…… 그래, 그렇게 될 때까지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세실리아가 서 있던 자리를 묵묵히 바라봤다.

* * *

“안투스!”

허공을 찢는 듯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황자궁을 울렸다.

‘아버님께 쫓아가 항의할 건 예상했지만,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군. 아니, 오히려 세실리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가.’

안투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넘기던 자료를 내려놨다.

쾅!

“안투스!”

“누님.”

세실리아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아마 열 살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속을 내색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그녀를 이렇게까지 동요시켰다는 것에 안투스는 남모를 희열을 느꼈다.

그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맛대로 조종하는 느낌이랄까.

입가를 비집고 비실비실 새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그가 물었다.

“왜 그리 소란이십니까?”

“소란? 소란이라고 했니? 지금 폐하를 뵙고 오는 길이다. 부마를 간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게 너라고?”

그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누님도 혼인을 더 늦추지 마셔야지요.”

“나는 비혼주의자다. 너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순간 그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알지만 누님께서 한가하게 혼자만의 삶을 외치시는 것도 조금 자중하셔야겠습니다. 근래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운 걸 아시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도 희생해서라도 진화할 생각을 하셔야지요.”

“뭐가 어째?”

세실리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안투스에게 기가 막혔다.

지금껏 내가 저를 어찌 대했는데.

저를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데 감히!

꽉 쥐어진 주먹이 분에 겨워 부들부들 떨렸다.

안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누님도 들으셨겠지만, 누님께서도 휘말리신 엘라단 사건부터 서 제도의 4왕자까지 근래 벌어진 일에 관련이 있습니다. 주모자가 라스칸트인이고요. 그럼 폐하와 제국의 입지가 어떻겠습니까? 누님의 뜻을 알지만 오랜 고심 끝에 제안 드린 겁니다. 누님도 제 뜻을 함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가 갑작스레 달래듯 돌변하자 세실리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엘라단에서의 습격 후, 그녀는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걸러야 하는지 황녀궁부터 은밀히 뒤집던 것이다.

아버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혹여라도, 만약이라는 전제하에 안투스의 동향도 살피려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세실리아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누에른이 막은 덕에 아직 외부까지 세세한 이야기가 나간 것은 아니지만, 안투스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마 간택이라는 엄청난 짓을! 그것도 내정자까지 점 찍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순히 따라 줄 생각도 없지만, 이 일로 그녀 또한 얻는 것이 있어야 했다.

고심하는 것을 눈치챈 안투스가 흘끗 바라보다 세실리아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너무 민감히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누님. 만약 성사되어도 칼리스터 경은 위치나 그 능력이 부마 자격에는 충분하며, 또한 섣부른 선입견을 우려해 당분간 아버님께서 비공식으로 지켜보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셨으면 합니다.”

세실리아는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하! 네 일이 아니라고 아주 여유롭구나? 네 말이 아니더라도 아버님께서 철회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일단은 물러가마. 단, 내게도 조건이 있다.”

안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너와 친분이 있는 자의 명단을 내놓아라. 제국만이 아닌 타국의 인사까지.”

그녀의 말에 가늘게 호선을 그리던 안투스의 눈이 살짝 뜨였다.

“그거면 누님의 노여움이 조금은 풀리시겠습니까?”

“고려 정도는 해 보마. 거짓 없이 내놓아야 할 것이야.”

다시 그가 미소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요, 누님의 명이신데요.”

세실리아와 안투스는 나누는 말과는 달리 매서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세실리아가 먼저 돌아서는 것으로 대담을 끝냈다.

쾅!

들어왔던 것처럼 거친 문소리와 함께 세실리아가 방을 나갔다.

그것을 보던 안투스의 얼굴에서도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망할 것.”

* * *

‘무슨 일이지.’

황녀의 부름을 받은 클레리아를 마중 나가려던 참에 에단은 뜻밖의 서신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엘빈 칼리스터에게서 온 것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므로 즉시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것.

클레리아부터 챙기고 가려 했으나 서신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보고 결국 마음을 접었다.

아버지의 반지.

그것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만의 신호로 가문이 관련된 위급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결국, 리암에게 마중을 대신 부탁하고 그는 말 머리를 돌렸다.

연통을 받은 후 서두른 덕에 에단은 제법 빠르게 저택에 도착했다.

중앙 홀로 향하자 집사인 안드레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버님은?”

“각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올라가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엘빈의 분위기가 어지간히 안 좋았는지 저택의 고용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에단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한 채 엘빈의 서재에 도착했다.

똑똑

“아버님, 에단입니다.”

“들어와라.”

서재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보였다.

조용히 문을 닫자 그제야 엘빈은 돌아서서 아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지? 위급한 상황이라니…….”

에단이 그의 책상으로 다가가 반지를 내려놨다.

“폐하께서 황녀 전하의 부마 간택을 비공식으로 진행하신다고 한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마 간택이요? 황녀 전하가 반대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 의견조차 무시한 채 밀어붙이시는 것 같다. 황태자 전하의 의견이라더구나.”

에단이 인상을 썼다.

근래 첸시아의 일로 정계에서 안투스의 사건 해결 능력을 좋게 보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늘 황위를 그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폐하께서 아무래도 그 여세를 몰아가고 싶으신 건가.’

묵묵히 말을 아끼며 머리를 굴리는 아들을 보며 엘빈은 씁쓸한 얼굴로 반지를 천천히 손가락에 꼈다.

“네 이름이 언급됐다고 한다.”

“……예?”

잠시 에단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스쳤다.

“부마 후보로 거론되는 셋 중 네가 섞여 있다더구나. 에단, 넌 부마 후보가 되었다.”

에단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폐하께서 우리 공작가를 상대로 그런 결정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나도 그리 믿고 싶다만 사실이다. 곤란하게 되었어.”

에단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께서 긴급 상황이라 하신 거였나?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전 할 수 없습니다.”

“에단.”

“아버지, 전 절대로 황녀 전하의 부마가 될 수 없습니다.”

“…….”

결연하고 단호한 그의 눈동자를 보는 엘빈의 눈이 흔들렸다.

“너…….”

“전 클레리아를 사랑합니다. 황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설마 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처럼, 엘빈의 입술을 비집고 한탄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또각또각

액세서리와 몇 가지 물품을 가지러 본관에 들른 엘레나는 조용히 챙긴 것을 들고 별채로 향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안투스와의 만남이 있고, 3일이 흘렀다.

좋은 제안이라며 곧 연통을 주겠다던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설마 전하께서 날 가지고 노시는 건 아니겠지. 레리안도 설마 함께 짜고?’

그때 갑작스레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주춤, 엘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

앞에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의 카이론이 서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물품 몇 가지를 가지러 갔었던 거예요. 불쾌해하실 거 없어요, 별채로 곧장 돌아갈 거니까요.”

“오늘 폐하께서 비공식적인 하명을 내리셨다. 황녀 전하의 부마 간택이 이뤄질 거라고 하더구나.”

그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홱 쳐들며 그를 바라봤다.

“정말이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가…… 내 제안을 들어주셨어! 그 계집애에게서 에단을 떼 주신 거야!’

희열의 미소가 번지려던 찰나, 카이론이 덧붙였다.

“요즘 들어 나라 안팎으로 이례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엘레나, 뭐 들은 것이 없느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얼굴에 번지려는 미소를 서둘러 거뒀다.

“그걸 왜 제게 물으세요?”

그러나 어딘가 씁쓸한 얼굴의 그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사교 모임에서 나랏일이 오갈 게 있나요,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지요. 전 들은 게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지나쳐 가려는데 카이론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 말을 믿으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네 주변의 인물들이 최근 시끄러웠던 일과 관계 있었으니까.”

한쪽 가슴이 뜨끔했지만, 엘레나는 표정을 관리했다.

어차피 그녀는 안투스와 함께 하기로 했다.

아버지도 원하는 것을 이뤄 줄 수 없다면……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아버지가 잊으신 모양인데 3공작가의 인물은 클레리아와 에단만이 아니에요.”

그녀는 쓸쓸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향해 냉랭하게 뱉었다.

“저 또한 그런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더구나 전 음모에 빠져 독을 마셨던 피해자예요. 아버지의 이런 질문 불쾌합니다.”

그렇게 쏘아붙인 후, 그녀는 서둘러 별채로 향했다.

“엘레나, 본관으로 들어오거라.”

나직한 말에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내가 널 너무 몰아세웠다. 아비가 잘못했으니 이만 본관으로 들어오거라.”

카이론의 기세가 예전보다 수그러든 것이 의아하면서도 엘레나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고요.”

마지막까지도 쏘아붙인 그녀는 별관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카이론은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엘레나, 제발 내 손에 닿는 곳에 있거라.”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재로 향했다.

* * *

‘내가 뭘 들은 거지.’

황녀의 정원에서 돌아온 후, 다리가 풀려 한동안 황궁 벤치에 앉아 있었다.

들은 게 잘못된 걸까? 싶다가도 그녀의 눈에서 사라지기 전, 세실리아와 메를린 후작 부인의 표정이 너무도 생생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폐하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딸인 세실리아의 마음도, 공작가에게는 무리한 충심을 요구하는 것도 자제하던 분이 대체 왜?

황녀에게 다녀올 때마다 늘 데리러 오던 에단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온 리암 경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클레리아를 찾아 들어오기까지 했으니까.

겨우 그의 배웅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그러나 너무도 얼이 빠진 그녀의 모습에 리암 역시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멍하니 테라스에 서서 점차 남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멀리 저택 정문으로 누군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에단?’

눈보다도 발이 더욱 빨랐다.

클레리아는 자각하기도 전에 정문을 향해 뛰고 있었다.

“에, 에단!”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를 보며 그가 말에서 내렸다.

“클레리아.”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서로를 마주 봤다.

“들었구나.”

아닐 거라고 계속해서 부인하던 것이 정말 현실이라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사실로 확정되어 버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널 보러 왔는데…….”

에단이 점차 고개를 떨궜다.

“면목이 없네.”

그 순간 따뜻한 클레리아의 손이 그의 두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네 탓 아냐, 누구의 탓도 아냐.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거야. 그러니까 우리 좀 더 지켜보자.”

그 말에 에단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클레리아를 끌어안았다.

“기억해, 내게는 너뿐이야. 반드시 없던 일로 돌릴 거야. 그렇게 만들게.”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이 상황을 바로 타개할 수 없음에 몹시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에단은 그대로 홱 돌아서 말을 타고 클레리아에게서 멀어졌다.

클레리아의 처연한 눈만이 하염없이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 * *

“새로운 여흥이요?”

엘레나가 무슨 수작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전하께서 엘레나의 제안이 꽤나 마음에 드신 모양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에게 여흥거리를 주라 하셨습니다.”

“무슨 속내이신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레리안은 씩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얼굴선을 손으로 훑었다.

“특별히 나도 전하에게 동의한 일입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당신도 심심하지 않겠어요?”

“비우다니…… 어디 가요?”

물음에 그는 가슴을 펴며 꽤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엘레나가 잊고 있는가 본데, 나 이래 봬도 라스칸트의 2기사입니다. 날 원하는 곳은 늘 많지요.”

그 말에 샐쭉하게 입을 내민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바쁜 몸이면 진작 가지 뭐하러 나한테 붙어 있었대요? 신경 꺼 줄 테니 어서 가 보시죠?”

그러나 그 모습도 귀엽다는 듯 그는 엘레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너무 심술부리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일하러 가는 겁니다.”

“일? 당신이?”

오히려 그 말에 못 믿겠다는 듯 웃음을 흘린 건 엘레나였다.

그러나 레리안은 개의치지 않았다.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에게 갑니다.”

“……!”

엘레나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구겨졌다.

“그 계집애에게 간다고요? 왜요? 당신이 가서 뭘 어쩐다고?”

“워워, 진정해요, 엘레나. 흥분할 거 없어요. 대외적으로는 부마 간택에 뽑힌 칼리스터 경의 부재를 채우러 가는 것이지만, 실상은 감시하러 가는 거죠.”

그는 야릇하게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우리의 목적은 그녀를 제거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뚱해진 엘레나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귀엽다는 듯 그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후, 레리안은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나도 태자 전하께 동의한 겁니다. 내가 곁을 비울 동안 당신이 적당한 유흥을 즐기길 바라니까요.”

그는 뭔가를 준비한 듯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부마 간택에서 우리의 목적은 칼리스터 경을 찢어놓는 것만이 아니에요. 황녀를 지켜볼 눈이 필요하기도 하죠.”

엘레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을 때, 그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훤칠하고 수려한 인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인사하세요, 윈터펠로운 백작가의 영식인 타일러 윈터펠로운입니다.”

어딘가 덤덤하고 단정한 모습에서 에단의 느낌도 조금 풍기는 사내였다.

그는 레리안의 말에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던 엘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타일러 윈터펠로운, 이슬레이터 영애께 인사드립니다.”

레리안과는 달리 예의가 잘 배여 있는 태도였다.

“에단 칼리스터와 더불어 부마 후보에 오른 이입니다. 윈터펠로운 경이 부마 간택 동안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겁니다. 그러니 저 대신 곁에 두고 시간도 보내시고, 더불어 엘레나가 그들의 동태를 살펴 주세요.”

그의 말에 엘레나가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타일러를 빤히 쳐다봤다.

생긴 건 다르지만, 어딘가 에단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에 마음이 동했다.

그녀는 마음에 든 듯 빙긋 웃으며 검지로 타일러의 얼굴을 훑었다.

“그 역할, 한번 잘 해 보도록 하죠. 윈터펠로운 경,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슬레이터 영애.”

흡족한 얼굴을 하는 엘레나를 보는 레리안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이 빠르고 날카롭게 그녀와 타일러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렸다.

“오래전부터 영애를 뵙고 싶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왜 그런 생각이 드셨을까요?”

어느새 자연스레 담소가 이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레리안은 돌아섰다.

“가는 건가요?”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다녀오도록 하죠. 즐거운 시간 보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방의 문을 닫았다.

“…….”

레리안은 붙든 문고리를 잠시 내려다보다 홱 돌아서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 * *

에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방 한쪽에 서 있었다.

그의 무심하고 날 선 시선을 뒤로 한 채 고용인들은 서둘러 배달된 옷가지들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부마 간택에 오른 이상 며칠간 계속해서 황녀를 상대해야 하기에 그에 걸맞은 옷들이 배달된 것이다.

기사로 임할 때는 단단한 갑주만 착용하던 것과는 달리 이번 옷들은 세련되고 멋진 연회복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에단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건 칼리스터 저택의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아직도 멀었나?”

옷과 재단 천의 행렬이 이어지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에단이 물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도련님의 몸에 맞춰 가봉하고, 배색과 액세서리까지 맞춰야 하니까요.”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군.”

당장 다 때려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간택을 위한 일이니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젠장…….”

낮게 중얼거린 그는 결국, 저택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따로 만나 일러두려 했지만, 왠지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서였다.

그는 레이먼이 내주는 말에 올라 곧장 히리스벨라관으로 향했다.

*

“그렇군요.”

전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긴 했으나 막상 클레리아의 반응을 보자 리암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간택 후보가 된 이상 에단의 평소 일정은 모두 중단되기에 수호 기사의 역할 역시 중단되었다고 전한 참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 같았지만, 덤덤히 받아들이기에는 무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도 에단 같은 인재를 부마로 묶어 두실 생각은 없으실 겁니다.”

클레리아는 쓰게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한 건데요.”

꾸벅 인사하고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는 클레리아를 보며 리암 역시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서로 좋다 하는 이들이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이니, 친우로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아리스와 리암의 눈이 맞았다.

침울해하는 클레리아가 신경 쓰였던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향해 리암은 안심하라고 씩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 또한 살짝 묵례한 뒤 클레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귀엽네.’

리암이 쪼르르 가는 아리스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끼익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리암이 놀란 듯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의 반응에 레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문 쪽을 바라봤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클레리아 역시 눈을 부릅떴다.

문을 연 장본인은 능청스럽게 안을 한 번 훑어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꽤 소박한 집무실이군요.”

그는 터벅터벅 들어와 클레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거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부터 칼리스터 경을 대신해 치유사님의 수호 기사로 임명된 레리안 캄스턴이라고 합니다.”

순간 클레리아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뭐? 네가 클레리아 님의 수호 기사를 맡는다고?”

경악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레리안의 성정을 겪어본 리암 역시 격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을 말없이 눈을 굴려 살핀 레인과 칼리에 역시 경계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치유사 집무실의 분위기를 굳힌 레리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능청스레 웃었다.

“1기사님이 자리를 비우게 되셨으니 당연히 다음 타자가 맡는 것이 도리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리암을 보며 대꾸했다.

“이건 착오가 분명해. 직접 가서 다시 확인하겠어.”

스쳐지나 가려는 리암의 어깨를 레리안이 강하게 붙들었다.

“건방도 적당히 떨어. 그쪽이 칼리스터 경과 붙어먹은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

방금 전까지 웃는 낯이었던 것과는 달리 온몸으로 냉랭함을 뿜어내며 레리안이 낮게 속삭였다.

그는 금세 또 얼굴을 바꾸며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럴까 봐 잘 챙겨 왔지.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임명장. 못 믿겠으면 확인하라고.”

그가 리암의 품으로 안기듯 밀어 넘겼다.

정말 그 안에는 누에른의 친필 서명과 함께 레리안의 수호 기사 임명장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리암 역시 불쾌한 숨만 씩씩댔다.

‘하필 에단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리안, 저 사람이.’

클레리아 역시 이 상황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엘레나와 친밀한 사람이 아닌가.

첸시아 사건 때의 그의 활약 때문일까.

그를 에단의 대신으로 정한 누에른의 결정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경계의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클레리아를, 레리안은 이죽거리며 바라봤다.

그때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순간 레리안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돌아서자 문에는 서늘하게 바라보는 에단이 서 있었다.

* * *

순간적으로 공간을 짓누르는 에단의 살기가 퍼졌다.

그냥 마주친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뿜어내는 적의에 레리안은 순간 숨이 막혔다.

레리안이 못마땅했던 리암도 말리지 않았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재차 물었다.

레리안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긴? 치유사 클레리아 님의 새로운 수호 기사로 임명받았으니까 왔지, 안 그럼 뭐하러 왔겠어?”

그 말에 에단의 미간이 어그러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당장 따지려 나서는데, 그가 에단의 가슴팍에 서신을 던졌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시지? 칼리스터 경.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임명장이다.”

그러나 에단은 받아든 서신을 펼치지 않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간택 후보가 된 이상 모든 기본 일정이 취소되는 줄은 예상했으니까.

다만, 레리안이 클레리아의 수호 기사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거짓말하지 말라며 당장 제압해 버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리안은 백색 갑옷까지 제대로 착장했고, 웬만큼 확실한 뒷배가 없다면 이렇게 나설 인물도 아니었다.

적어도 상대를 할 자리와 안 할 자리 정도는 구분하는 작자니 굳이 서신에 쓰여 있는 황제의 필체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에단은 서서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시합에서 뒤를 공격해 남의 순위를 강탈하는 저열한 짓거리를 하는 자임을 모르셨으니 그리하셨겠지. 그렇지 않나? 캄스턴 경?”

그 말에 레리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 역시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 치유사님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아주 잘 지켜 드릴 거니까.”

레리안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유리한 건 그였다.

그리도 소중히 여기는 클레리아가 당장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는데 에단 칼리스터 따위가 어쩐단 말인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건 그란 사실을 아는 레리안은 여유만만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에단 역시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리암을 바라봤다. 작게 고개 숙이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얘기 나누시죠.”

그렇게 말한 에단은 클레리아의 손목을 붙들고 집무실을 나갔다.

“잠깐, 치유사님을 지금 어디로……?”

에단의 돌발 행동에 레리안이 둘을 막으려 할 때였다.

“자아, 새로 온 호위 기사라고?”

그의 앞을 레인이 가로막았다.

“……뭡니까?”

“뭐긴 그대가 섬겨야 하는 치유사님이지. 새로 왔다니 늘상 하는 걸 해야겠네.”

“늘상 하는 거?”

레리안이 불량하게 되뇌자 레인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래, 이제부터 레리안 캄스턴 경의 신상을 탈탈 털어 보자고?”

‘뭐?’

히리스벨라관에 온 후 처음으로 레리안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서렸다.

“무서워할 거 없어. 새로 오는 사람은 다 하는 거라니까?”

레인이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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