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격동의 3공작가
“아가씨. 씻고 조금 쉬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잠도 못 주무셨잖아요.”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흔들어도 클레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지쳤다.
머릿속도, 마음도.
몸도 전부 지쳤다.
첸시아를 아끼고 특별하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을 받고 함정에 빠져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
답답하고 애통했다.
“아가씨,”
아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불렀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엘튼이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혔다. 이어 아리스가 종일 붙어 그녀의 몸을 주물렀다.
“클레리아.”
연락을 받은 타이엔이 급히 저택에 돌아와 그녀를 달래듯 끌어안아 주었으나 역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일이 충격적이고 찜찜한 건 안다. 나도 칼리스터 공작도. 이슬레이터 공작도 따로 알아보고 있어. 뭔가 알아내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 주도록 하마.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러나 역시 클레리아는 이번에도 그의 옷깃을 꽉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에단은 아무래도 오늘은 못 오려나 보구나.’
그녀가 그렇게 체념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에단이 들어왔다.
“클레리아.”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 다시 굳어 갔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만남을 고대하던 기색이 역력했으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클레리아가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에단.”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흙이 잔뜩 묻은 천 조각이었다.
“렝터 자작도 라밀 경도 사람들도…… 마을도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인 모습이었어.”
믿기 힘든 현실에 클레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을 쥐었다.
그녀도 기억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예전 만남에서 렝터 자작이 입고 있던 겉옷의 조각이었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그녀는 천 조각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역시 에단도 침통한 얼굴로 그녀를 안았다.
“첸시아도…… 첸시아도 오늘.”
“알아, 더 말하지 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어. 왜…… 대체 왜 그 사람들이 죽어야 해? 지키지 못했어. 에단…… 나 그 사람들을 지켜 주지 못했어.”
“네 탓이 아니야. 우리가…… 지키지 못한 거야.”
“이건 거짓말이야, 으흑…….”
기뻐하던 찰스의 모습이.
그와 웃던 라밀 경도, 사람들을 독려하던 인자한 로딜리아의 웃음도.
모두가 함께 정답게 어울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선해서.
지금도 가면 ‘치유사님!’ 하며 반겨 줄 것만 같아서.
에단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손에 쥔 그 흙투성이 천 조각을 마냥 부인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끝내 에단의 품에서 클레리아는 무너져 내렸다.
* * *
“거짓말이지? 지금 장난치는 거지, 에단 경?”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통한 표정이 믿기질 않아서, 레인은 몇 번이고 그를 흔들며 다그쳤으나 대답은 똑같았다.
렝터 자작령은 괴멸됐다고.
지금은 마을 자체가 폐허가 되어 남은 사람이 없다고.
곁에서 듣던 리암 역시 말을 잃었다.
“그 열심히 살겠다던 사람들이 대체 왜! 왜!”
윽박질러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인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하룻강아지는…… 하룻강아지한테 말하지 마! 그 녀석 못 버틸 거야! 알면 그 녀석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러 온 겁니다.”
레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치유사 일 10년 차에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레인은 충격에 휩싸여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칼리에도 놀란 얼굴이었으나 이내 동요했던 기색을 지웠다.
아무래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늘 폐하께서 우려하시던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에단이 가져온 충격적인 소식으로 히리스벨라 관의 치유사 집무실에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클레리아는 누에른의 배려로 며칠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상황을 납득하긴 했으나 기운을 찾지 못해 아리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아리스의 정기 휴가 차례가 되었으나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며칠째 주인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모자와 가방을 잠시 내려놓은 아리스가 클레리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응.”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척한 클레리아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아리스, 어디 가?”
“그게…….”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정기 휴가 날짜가 되어서요. 집에 다녀오려고 해요.”
책을 보던 클레리아는 침대에서 나왔다.
“고향에 가는구나. 내가 진작 챙겨야 했는데. 가족 선물은 준비했고?”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아가씨?”
“응?”
“휴가를 좀 더 미룰까요? 아가씨 곁에 좀 더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클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는 거 오랜만이고 가족들도 기다리잖아. 무엇보다 막냇동생 많이 보고 싶어 한 거 알아. 내 걱정은 말고 다녀와.”
“그럼 금방 돌아올 테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네?”
“응.”
몇 번이고 당부한 아리스는 천천히 방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리스?”
클레리아가 부르자 그녀는 다시 난처한 얼굴로 돌아섰다.
“저기, 아가씨.”
“응, 왜 그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시기가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늘 예의 바른 아리스였다는 것을 알기에 클레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어려워 말고 말해 봐.”
아리스는 정말 곤란한 표정으로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그…… 아가씨 책상에 있는 돌 조각 중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돌?”
클레리아는 순간 자신의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연습하며 생긴 치유석들을 넣어 놓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걸 왜? 혹시 동생 주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내가 다른 보석이라도…….”
“아뇨, 그게 필요해요!”
예상치 못한 말에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저 예쁜 보석 같은 느낌인지라 말하는 줄 알았는데 뉘앙스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치유사가 아니면 쓸 수도 없는 돌을 왜?
그때 아리스가 덧붙였다.
“막냇동생이 최근에 천식이 생겼다고 연락을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리스가 염치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리스, 저 돌을 가져가기만 하는 건 소용이 없을 거야. 치유사가 아니면 쓸 수 없거든.”
“네? 그렇지만 그때는 분명…….”
어딘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다.
클레리아는 뭔가 있구나 싶은 마음에 재차 물었다.
“그때라니?”
결국, 그녀는 마치 죽을죄를 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사실 아가씨가 저택을 비우셨을 때, 화병을 깨트려서 크게 배였었거든요. 전에 아가씨가 저 돌로 뭔가 하시던 걸 본 기억이 있어서…… 돌을 썼었어요! 죄송해요!”
큰 사달이라도 날까 아리스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큰 야단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조용하자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클레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설마, 아리스. 너 저 돌을 사용한 거야?”
허락도 없이 손을 대서 아무리 아가씨라 해도 혼내실 줄 알았는데?
아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이 투명하게 색이 사라지긴 했지만요. 허락도 없이 아가씨 물건에 손을 대서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동생이 너무 힘들어한다기에 그래서……!”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클레리아는 아리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리둥절한 그녀와는 달리 클레리아는 너무도 기뻐 어찌할 바 몰랐다.
“아, 아가씨?”
“아리스, 미안하지만 고향으로 가는 거 며칠만 미뤄 주겠어?”
“네? 왜요?”
클레리아는 벅찬 얼굴로 아리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내 생각에 아리스는 보조치유사의 능력을 타고난 것 같아. 칼리에 님께 가서 확인받자! 응?”
“예?”
아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 * *
클레리아와 아리스는 서둘러서 히리스벨라 관으로 향했다.
상황을 들은 칼리에가 능력치를 측정한 결과, 아리스는 정말로 보조치유사의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축하해! 이제 아리스도 엄연한 치유사야!”
클레리아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뛸 듯이 기뻐했다.
보조치유사는 치유력이 내재하여 있지는 않지만, 치유사가 만든 치유석에서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을 말했다.
즉, 치유석만 있으면 일반 치유사처럼의 동등한 치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누에른 때에는 아리스가 첫 번째로 나타난 보조치유사였다.
“세상에, 경사네 경사! 보물들이 다 프라이어스 저택에 숨어 있었구만?”
함께 지켜보던 레인 역시 기뻐했다.
“축하합니다, 동료가 또 늘었군요. 황제 폐하께서 자격을 승인하시고 치하하실 겁니다.”
칼리에도 기쁜 얼굴로 축하했다.
“아…… 저기, 감사합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지 아리스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클레리아는 아리스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았다.
“아가씨?”
“아리스가…… 아리스가 새로운 동료라는 게. 내 눈이 닿는 곳에 소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
벅참으로 떨리던 목소리는 끝내 울먹임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에 칼리에와 레인, 아리스 모두에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근래 클레리아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이었다.
엘라단 아카데미에서의 일도, 에단을 잃을 뻔했던 사건도 간신히 극복하고 있었으니까.
렝터 자작령의 사람들 일과 첸시아의 일은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때에 아리스의 치유사 능력 발현은 더없이 큰 힘이자 위로인 것이다.
게다가 아리스는 클레리아가 알게 모르게 많이 의지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클레리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라도 한 듯 아리스 역시 벅찬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수그러드는 클레리아의 머리를 감싸듯 기댔다.
“저는 아가씨 곁에 늘 있을 거예요. 곁에서 늘 아가씨께 잔소리하고 곁을 지킬 거예요.”
“응. 축하해, 아리스.”
겨우 진정한 클레리아가 환하게 웃자 그제야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아리스 역시 그녀를 따라 웃으며 클레리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꿈만 같아요, 아가씨.”
* * *
엘레나는 황실에서 내려온 공문을 천천히 손아귀에서 구겼다.
레리안 역시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첸시아의 죽음과 자작령의 괴멸로 클레리아가 정신적 타격을 꽤 받았다고 들었다.
소식을 듣고 엘레나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기뻤다. 스스로가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고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첸시아의 죽음이 좀 껄끄럽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콧대 높던 클레리아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껄끄러운 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드디어 그 괘씸한 계집애에게 크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리스라면…… 그 클레리아 계집애의 전속 하녀 말인가요?”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말아 쥔 엘레나의 손이 떨렸다. 고작 천한 하녀 따위까지 치유사의 능력이 있다고?
왜?
대체 왜?
왜 클레리아 주변에만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데?
아무 힘도 없던 게 어느 날 갑자기 치유력을 가지더니 모든 것을 내게서 앗아 갔어. 사람들의 관심도, 에단의 마음도!
이제야 겨우 그 낯짝이 꼴 보기 좋아지나 했더니 또 치유사라고?
부욱 북! 북!
결국, 참지 못하고 엘레나는 황실 공문을 세차게 찢어발겼다.
황실 모독죄에 해당할 짓임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마비됐다.
레리안은 피식 웃으며 조각을 모아 그릇에 담고 불을 붙였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 오른 그녀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더는 못 미뤄요, 레리안. 그분을 만나게 해 줘요. 지금 당장 그러지 않는다면 당신과는 끝이에요.”
그는 팔짱을 끼며 음산하게 웃었다.
“엘레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분을 만나서 어쩌려고 그러죠?”
그 말에 엘레나가 이를 갈며 답했다.
“누구도 모든 걸 가질 수 없어요. 이번 기회를 통해 난 그걸 클레리아에게 똑똑히 가르쳐 줄 거예요.”
* * *
깊은 밤, 검은 망사가 내려진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엘레나가 걸음을 서둘렀다.
레리안과 그의 일행들에게 안내를 받아 창문이 막힌 마차를 몇 번이고 갈아탔다.
얼마나 이동한 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때쯤 그들은 음산한 기운이 도는 외딴 저택에 도착했다.
“엘레나, 그분을 뵙기 전에 한 가지 묻죠. 이 앞으로 나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래도 상관없습니까?”
엘레나는 코웃음을 쳤다.
“예전의 삶? 내 것이었던 것을 모두 뺏기던 삶을 말하는 건가요? 난 그딴 것에 미련 없어요.”
그러나 묻는 레리안은 평소와 달랐다. 능구렁이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묻죠. 오늘 이 선을 넘기면 당신은 완전히 우리와 한배를 타는 겁니다. 후회 없는 겁니까?”
엘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레리안의 눈을 바라보며 동시에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는 에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그들을 축하해 주는 많은 사람도.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부릅뜬 엘레나가 대꾸했다.
“이슬레이터의 이름을 걸고. 나는 당신과 당신이 모시는 분에게 내 목을 걸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수만 있다면요.”
레리안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평소와는 다른 빛으로 번뜩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각오 받아들이죠.”
램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엘레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은 음산한 복도를 걸어 낡고 거대한 방 앞에 섰다.
똑똑
그가 노크하자 엘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끼익
문이 열리고 벽난로 앞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슬레이터 영애가 뵙기를 청합니다. 드릴 제안이 있다고 하더군요.”
일렁이는 불길에 남자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흔들렸다.
엘레나는 숨소리를 낮춘 채 그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엘레나 이슬레이터입니다.”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춘 뒤 고개를 든 순간, 엘리나는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턱 막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안투스였다.
“화, 황태자…… 전하?”
안투스가 여기에 대체 왜?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레리안에게 향했으나 그 또한 음흉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제국의 한 마을을 괴멸시키고, 황녀가 있던 아카데미를 테러하도록 지시한 게…… 황태자라고?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준 독과 가짜 피가 효과가 좋았다지?”
그 말에 움찔 엘레나의 어깨가 떨렸다.
첸시아를 모함할 때 쓴 독이 안투스가 준 것이란 말인가?
예전부터 어딘가 음울한 기운은 있었지만, 이런 불순한 일까지 지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젠가 엘레나는 자신의 아버지 카이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 전하는 입지가 매우 약하시다. 우리가 황실을 지지하고 있으나 그분이 역량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 안투스 전하 때의 제국은 위태할 수도 있어.]
‘왠지 지금 느낌은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느낌인데.’
때마침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안투스가 물었다.
“그대는 이 나라에 만족하고 있나? 폐하의 통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나?”
“……예?”
“듣자 하니 그대가 사랑하는 이를 치유사가 뺐었다지?”
그 말 한마디에 엘레나는 그를 만나고 생겼던 불안감이 한꺼번에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예, 그러합니다.”
안투스의 입술이 기이하게 벌어졌다.
“나는 그것을 돌릴 수 있다.”
“……?”
“나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어. 그대가 나의 편에 서 준다면.”
엘레나는 거칠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불합리하고 천한 것들이 판치는 나라를 뒤엎고 내가 새로 만들 진정한 위엄 있는 나라를 위해 함께 하겠나?”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다보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손을 잡으면 돌이킬 수 없어.’
그럼에도 그녀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어 안투스의 손을 잡았다.
“전하께서 건국하실 그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레리안과 안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게 할 제안이 있다고 했지?”
그의 물음에 엘레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러쥔 손에 힘을 줬다.
“치유사 클레리아와 수호 기사 에단을 찢어 주세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는 듯 안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에단 칼리스터를 황녀 전하의 부마로 세워 주십시오.”
* * *
능력이 증명되고, 황제는 곧바로 아리스를 치하했다. 남작의 지위와 수도의 저택을 하사한 것이다.
평민이자 고용인으로 살던 그녀에게 이제 귀족의 삶이 펼쳐졌다.
더불어 가족들이 걱정 없이 살 집도 생겼고. 프라이어스 가는 아리스의 동생들에게 교육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단 며칠 만에 완전히 삶이 뒤바뀌자 아리스는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조치유사 정복을 입고 첫 출근을 한 그녀는 멍한 얼굴을 했다.
“앞으로 나도 치유석 열심히 만들어 놓을게. 우리 아리스가 쓰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고, 고마워요. 아가…….”
“또, 또!”
클레리아는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말 허리를 잘랐다.
“이제 아가씨가 아니라 클레리아라고 부르라니까?”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이제 가릴 것 없이 친구로 지낼 수 있어. 전부터도 우린 친근했지만, 이제 진짜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너무 기뻐.”
그 말에 아리스 역시 기쁜 듯 얼굴을 붉혔다.
“으, 응.”
익숙해지려면 분명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던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함께 할 수 있음에 실감 나지 않는 것은 클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 새로 들어온 두 번째 하룻강아지를 위해 준비한 거야.”
그때 레인이 순간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아리스 앞에 툭 놓았다.
“이건……?”
열어 보니 암갈색의 투명한 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레인이 만든 치유석이었다.
“이, 이 많은 걸 제게 주시게요?”
놀라 토끼같은 눈을 뜨는 아리스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처럼 외로운 영혼이 집에서 뭐 할 일이 있나? 어차피 비상시를 위해 만들어 놨던 여분 가져온 거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모자라면 또 말하고.”
정기적으로 치유사들에게 치유석을 얻어야 하는 보조치유사의 수고로움을 레인이 한 번에 해결해 버렸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며 리암과 에단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리스 님도 함께 계시는군요. 전 이미 잘 아실 테고 이 친구는 리암 아켈리엔 경이라고 합니다.”
에단이 경어를 쓰자 아리스는 당혹감에 손을 저었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에단 역시 다정히 웃었다.
아리스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을 법도 한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줌에 감사했다.
그때 리암이 다가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했다.
“리암 아켈리엔입니다. 보조치유사님인 아리스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왕이면 리암 경이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세요.”
“하지만 제가 감히 이름을 어찌…….”
그러자 그는 씨익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클레리아 님과 에단의 친한 분이라면 제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세요.”
아리스는 연달아 일어나는 기쁜 일들에 감격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네, 리암 경.”
* * *
새롭게 나타난 보조치유사에 대한 기쁨도 잠시, 누에른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지방 귀족인 남작가의 영애가 그간의 일을 모두 꾸몄다.
이 일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사실 에단과 클레리아만이 아니었다.
황제 누에른 역시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첸시아를 벌한 것은 그녀를 구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제도의 4왕자가 개입하고, 심지어 안투스까지 나섰다. 지나치게 들어맞으니 외려 그것을 반론하는 일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이러스가 데려온 델 판시온의 일당도 문제였다.
그들의 조직 이름을 해석하면 ‘진정한 제국을 위하여’다.
즉, 과거의 바알리시안을 추종하는 테러 집단인 것이다.
그 일당이 일에 관련되었다는 것이 제국의 입장으로서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너무 철저히 모든 게 들어맞았어. 문제는 이것이 그저 개인적인 원한으로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뒤에 감춘 무언가가 더 있는지가 중요한데…….’
참 이러면서도 애매한 것이.
늘 조용하고 숫기 없다고만 여긴 안투스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하는 모습이 꽤 기특했다는 것이었다.
사건 자체에 의문도 없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칼리스터 가를 시켜 조사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뚱한 얼굴로 깃펜을 집어 들었다.
똑똑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노크 소리에 누에른은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들라 일러라.”
안투스가 들어왔고, 황제는 웃으며 아들을 맞았다.
“왔구나. 이번 사건에 네 공이 크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누에른은 물끄러미 안투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조용히 침묵했다.
“사이러스 왕자와 합이 좋더구나.”
“그가 이상한 점을 알려 주면 부하들을 시켜 알아보는 식으로 서로 정보를 잘 교환한 덕이었습니다.”
“그렇군, 정보 교환이라…… 그런데 말이다. 이번 일에 대한 증거들이 지나치게 완벽히 들어맞는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더냐?”
역시 돌려 말하는 건 모르는 누에른다운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안투스 역시 예상했었다.
“얽힌 일들이 너무 어마어마해 치밀하게 준비한 덕이죠. 아버님께서 늘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사를 진행할 때는 그 어떤 틈이 생겨도 그것으로 영향받지 않을 만큼 완벽해야 한다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적용했죠.”
그의 대답에 누에른의 얼굴에 제법 감탄이 서렸다.
안투스에게서 그런 대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 말대로다. 하하,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왠지 기쁘구나.”
누에른은 마침내 늘 부족해 보이던 아들이 조금은 마음에 차는 느낌이었다.
“그래, 할 얘기는 이제 되었다. 돌아가 보아라.”
황자가 짧은 묵례 후 나가려다 발을 멈췄다.
“아버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이번 일로 저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인정하셨다면…… 감히 조금 더 나아가 제안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제안?”
누에른은 집었던 깃펜을 도로 내려놓았다.
“네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안투스는 고개를 조아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저 하나 생각난 것이 있어 오래전부터 말씀드리기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말해 봐라.”
그의 수락이 떨어지자 순간 안투스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엘라단 사건 이후, 그들에게 생긴 우선적인 목표.
제일 거슬리는 인물을 치워야 했다.
“누님에 관한 일입니다.”
“세실리아를?”
“누님께서 특별히 혼기를 신경 쓰시는 건 아니지만, 이제 더 늦기 전에 혼처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혼처라고? 그 녀석이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아버님의 황권 강화와 더불어 가장 적당한 부마 후보가 있습니다.”
누에른이 눈을 빛내며 흥미를 나타냈다.
“칼리스터 공작가의 에단 칼리스터 경을 누님의 부마로 추진하실 걸 제안합니다.”
* * *
“흐음…….”
안투스가 나가고 누에른은 늘어 버린 문제거리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에단 경만큼 적합한 자가 없으나 세간의 눈이 부담스러우시다면 몇 명의 부마 후보자를 추려 내정자를 감출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나뿐인 누이의 혼사이니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평소답지 않게 눈을 빛내며 자신 있게 하는 말에 차마 바로 반대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면 세실리아가 가만있지 않겠지.’
그러나 제대로 성사만 된다면 안투스에 대한 여론을 굳히는 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칼리스터 가가 부마가, 황실의 사돈이 된다면야.
그러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누에른의 입에서 ‘끄응’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실은 그간 과도한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3공작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안투스의 제안은 그 선을 넘는 것이었다.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고민했으나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투스의 평판이 좋아진다면야.
누에른에게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기를 불러오라.”
* * *
터벅터벅
클레리아는 오랜만에 세실리아에게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부름을 받았다.
대공 아이문트의 치료 후, 귀환길에 버려지고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첸시아의 일과 렝터 자작령의 충격이 겹쳐 집 안에만 있었던 터라 외려 황녀의 부름이 다행이었다.
그녀가 억지로라도 부르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동굴로 파고들었을 것 같으니까.
휘오오오
여전히 격한 바람에 머리칼을 붙든 그녀는 세실리아의 정원에 도착했다.
“왠지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그녀가 중얼거리며 돌아섰을 때였다.
“클레리아!”
부름과 함께 갑자기 클레리아는 격한 포옹에 사로잡혔다.
“화, 황녀님?”
“괜찮은 거니? 끼니는 잘 챙기고 있고?”
세실리아는 놓아준 뒤에도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넘기는 등 이리저리 한참 살폈다.
“저, 전하. 저 괜찮아요.”
그렇게 살피길 몇 분, 드디어 성에 찼는지 그녀는 클레리아와 눈을 맞췄다.
“처형장에서 네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세실리아는 자연스럽게 클레리아에게 팔짱을 끼고 방으로 이끌었다.
“그 영애의 일은 안됐다만, 네 몸부터 챙기거라. 중앙 귀족인 이상 살면서 한 번쯤은 볼 일이지 않았느냐.”
“……예.”
“그리고 들었다. 첫 파견 나간 곳이 지금 폐허가 되었다며. 왜 자꾸 이런 흉흉한 일이 생기는지.”
그녀는 방에 도착해 거울 앞에서 긴 머리칼을 손으로 묶어 올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제 좀 전처럼 조용했으면 싶구나.”
“네, 저 역시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쓸쓸히 말하는 클레리아를 세실리아가 홱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기곤 의자에 앉혔다.
“새로운 보조치유사가 네 전속 하녀였다고?”
“네, 그러합니다.”
세실리아는 검지로 볼을 톡톡 건드리며 감탄한 얼굴을 했다.
“어쩜, 네 주변에는 인재가 넘치는구나.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치유사와 보조치유사를 한꺼번에 얻으셨으니 폐하가 널 정말 총애하실 거다.”
클레리아가 난감히 웃었다.
“제가 어떻게 한 것도 아닌걸요.”
“그래도 그리 연관 지어 생각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 인복이 있다는 말이 어쩌면 널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황공합니다, 전하.”
클레리아는 쑥스러움에 웃었다.
“다음에 올 때는 그 아이도 한번 데려와 보겠니? 보고 싶구나. 오랫동안 네 곁을 지켰다니까. 선물도 하나 할까도 싶고.”
순간 클레리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황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진심이었는지 그녀는 자신의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황녀님의 신임을 받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레리아의 말에 세실리아는 낯뜨겁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자자, 낯 뜨거운 인사치레는 이쯤 하고, 사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칼리스터 영지에서 쉬고 오라고 명했는데 잘 쉬고 온 거니?”
아…….
순간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이렇게 물으시는 건 무슨 일이 있을지 이미 예상을 다 하셨단 말씀인가?
순간 부끄러움에 뒷덜미가 뜨끈해졌다.
세실리아는 좀 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은근히 물었다.
“에단과 너, 둘 사이가 좀 발전은 있는 거니?”
“저, 전하께서 그걸……!”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머리에서 김이라도 나려던 그때였다.
“전하! 황녀 전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세실리아의 전속 시녀인 메를린 후작 부인이 들어왔다.
한참 놀려먹으려는데 흥이 깨진 세실리아가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봤다.
“무슨 소란이냐! 담화 중인 거 안 보여?”
“송구합니다, 전하. 그러나 급히 드릴 말이 있어서.”
황녀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조곤조곤하던 그대가 이리 소란을 피운 이유가 있겠지. 그래, 말해 봐라. 무슨 일이야?”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의 부마를 간택하신다 합니다.”
“뭐?”
경악에 찬 세실리아의 높은 목소리가 방 안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