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52)

제30장. 철저하게, 처절하게, 버리다.

“이런 미친!”

엘레나는 뜯어 본 서신을 구겨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지금 엘레나는 안정, 또 안정해야 하는 거 몰라요?”-

“어차피 아픈 시늉하는 건데 뭐 어때요? 아무도 없고. 그나저나 클레리아 계집은 왜 자꾸 저딴 걸 보내는 건지!”

엘레나는 분에 겨워 씩씩거렸다.

레리안이 바닥에 나뒹구는 서신을 펼쳐 보자, 방문해 몸을 살피고 싶다는 요청문이었다.

“끈질기군요.”

“그 미련한 고집불통이 어디 가나. 꼭 이상한 데서 고집부리는 건 옛날부터 유명했으니까요.”

“흐음…….”

레리안은 잠시 생각한 후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부르죠.”

엘레나는 화들짝 놀라 레리안을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나한테 그렇게 맛없는 걸 억지로 먹게 하고 되지도 않는 연기까지 시키더니. 이제는 제일 꼴 보기 싫은 계집애를 내 방으로 부르라고요?”

격하게 거부하는 엘레나에게 레리안이 다가가 다정하게 뺨을 훑었다.

“엘레나. 일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완성도를 높이면, 그만큼 의심할 여지를 눈곱만큼도 주지 않는 거예요. 사람들은 당신이 크게 다친 줄 알고 있으니 치유사의 도움을 받는 모양새가 오히려 의심을 피하기 좋을 거예요.”

그의 설득에 생각을 곱씹던 엘레나가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불러서 어떡하라고요? 만난다면 금방 들통날 텐데.”

“우리한테는 아주 능한 약 제조사가 있다니까요? 한두 시간만 엘레나가 애써 주면 금방 원래대로 건강히 돌아올 수 있어요. 겪어 봐서 알잖아요?”

엘레나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손가락을 톡톡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한 번 한 연기, 두 번이라고는 못 하겠나요. 하지만 절대 오래 보고 있진 않을 거예요. 그 계집애 얼굴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아무렴, 내가 모를까 봐요?”

레리안은 잘했다는 듯 엘레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그녀가 볼을 붉히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 독에 능하신 그 분 말이에요, 약 제조에 능하신. 그분은 대체 언제 만나게 해 줄 거예요? 좀 보고 싶은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곧 뵐 수 있다니까요.”

“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러는 건지.”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리자 그가 엘레나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엘레나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거예요. 반드시. 내가 장담하죠.”

그 말에 엘레나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하죠.”

* * *

“이거 참…….”

잔뜩 가라앉은 집무실 내 분위기에 레인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수도는 이슬레이터 영애가 티 파티 중 독살당할 뻔한 사건에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3공작가의 영애가 그리되었으니 다른 또 하나의 공작가 영애인 클레리아도 적잖이 침울해져 있는 상태였다.

칼리에도 적당히 클레리아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레인이 물었다.

“오늘도 이슬레이터 저택에 치유사 파견 수락 요청서 보낸 거야?”

끄덕

클레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거절당했고?”

조심스럽게 되묻자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답 못 받았어요. 어쩌면 오늘은 그냥 무시하거나 다시 거절할지도 모르겠네요.”

칼리에는 그만 신경 쓰라고 타이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프라이어스 저택에서 잠깐 스치며 만났을 때도, 클레리아의 치유사 공표 자리에서도. 엘레나가 클레리아에게 좋은 친우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다과회에서도 어딘가 클레리아가 억지로 참여했다는 느낌이 강했어.’

엘레나가 쓰러진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클레리아는 치유력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중간에 레리안이 거칠게 그녀를 떼어 놨다는 것부터도 3공작가의 혈맹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니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모습을 봤다면 필시 3공작가의 관계에 의문을 품을 게 뻔했다.

‘멀리 본다면 클레리아가 이슬레이터로 치유를 위해 파견되는 게 모양새가 보기 좋겠지. 하지만 문제는 클레리아는 그것부터 생각하는 게 아닐 거라는 거지.’

칼리에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분명 치유사가 되기 전에는 엘레나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고. 소문이 분명 그랬다.

하지만 클레리아는 왜인지 모르게 치유사가 된 이후로, 이슬레이터에 대한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꺼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엘레나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없는 사람처럼 지워버리려는 느낌이야.’

뭐, 이렇게 된 건 두 사람의 사정일 것이고.

오히려 클레리아가 엘레나를 멀리한다면 칼리에는 찬성이었다.

다만 이번 일로 또다시 클레리아가 그녀에게 휘둘리지는 않았으면 했다.

이런 칼리에의 근심도 모른 채 클레리아는 전령이 오기를 기다렸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저,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님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벌떡 일어난 클레리아가 빠르게 다가가 서신을 받고 급히 뜯었다.

“뭐래?”

레인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슬레이터에서 치유사 파견을 받아들인다고 하네요.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클레리아는 자신의 짐을 간단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가야 하면 가야지 근데…… 난 좀 찝찝하다. 그때도 치유 못 하게 막았었고, 몇 번이나 요청도 거절했으면서 이제야 받아들이는 게 어딘가 이상한데.”

레인의 말에 칼리에 역시 동의하듯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피식 웃어 보였다.

“의도가 불순한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사실 불순한 의도로 요청을 한 거라 딱히 이슬레이터 영애와 다르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네요.”

그 말에 레인과 칼리에가 놀란 얼굴을 했다.

“몸 상태도 살필 겸 해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칼리에는 내심 기특함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너무 그녀를 여리게만 보며 보호하려 했던 걸까.

처음 치유사가 되었던 모습에서 성장한 그녀를 보며 칼리에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요, 가서 치유사의 의무도. 3공작가의 공녀의 의무도 다하고 와요.”

그 말에 클레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네.”

* * *

똑똑

“아가씨, 프라이…… 아니, 치유사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말소리를 들은 엘레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알약을 얼른 삼켰다.

레리안이 이 약을 먹으면 기력이 빠지고 심한 몸살을 앓는 것처럼 몸이 힘들 거라 말해 준 것이다.

정말 삼키자마자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녀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누워 대답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안내를 받은 클레리아가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는 그녀를 힐끔 바라본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하녀가 방문을 닫고 나갔고, 클레리아는 천천히 침대 근처로 움직였다.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라고 합니다. 이슬레이터 공녀님의 상태를 살피고자 왔습니다.”

그 말에 엘레나는 당장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차분히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웬일이니? 격식을 다 차리고?”

“치유사의 자격을 우선해서 방문한 것이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하! 그 이야기는 즉 내가 너보다 상전이라는 뜻이네?”

역시 주변에 보는 눈이 없자 엘레나는 속내를 감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뭐 예상과 다르지 않은 반응에 클레리아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실례합니다만, 손목을.”

“뭐하러?”

“공녀님의 상태를 보고 회복을 도울 겁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면 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치유사들의 입지를 위해 클레리아가 저자세를 유지한다는 걸, 엘레나는 그다지 개의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열감으로 인해 파리해진 안색이면서도 기세등등한 얼굴로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안 주면 어쩔 건데?”

“후…….”

결국, 클레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피차 서로 불편한 자리잖아. 금방 끝낼 테니 참아.”

“뭐?”

갑작스레 달라진 태도에 당황할 때 클레리아는 엘레나의 손목을 빠르게 붙들었다.

‘그럼 그렇지. 이 계집애가 순순히 나올 리 없지.’

엘레나 또한 노려보며 잠자코 클레리아의 행동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때 천천히 치유력을 흘려보내던 클레리아는 미묘하게 이상한 기운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유능한 치유사니 이제 됐지?”

하지만 뭔가를 더 느끼기 전, 엘레나가 그렇게 쏘아붙인 후 갑자기 손을 확 빼 버리는 통에 클레리아는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자, 치유해 주겠단 말로 포장 잘한 거 알았으니까, 이제 그 시커먼 속내를 말해 보시지? 왜 날 만나려 한 건데?”

엘레나의 밉살스러운 행동에 클레리아도 치유해야겠다 싶은 일말의 마음을 접었다.

그녀 또한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데포렌 영애,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를 죽일 만한 배짱도 없고. 오히려 네 절친이 됐다고 콧대가 높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네게 해코지하겠어?”

“그걸 내가 알아? 그딴 걸 물을 거면 그 정신 나간 계집애한테 가서 물을 것이지 왜 여기 와서 피해자한테 꼬치꼬치 캐묻고 난리야? 너야말로 제정신이야?”

“…….”

쉽게 입을 열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발끈하는 반응에도 여전히 첸시아와 엘레나의 관계에 의문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클레리아는 다시 물었다.

“왜 데포렌 영애였어?”

“뭐?”

“하고 많은 귀족 영애 중 왜 하필 데포렌 영애를 선택했냐고. 곁에 두는 사람으로.”

클레리아의 물음에 잠시 엘레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머리가 나쁘기로서니 엘레나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클레리아가 봤듯이 그녀 역시 첸시아의 야망을 보았으리라.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했을 수도 있었다.

만약…… 만약 정말로 엘레나가 불경한 흑심이라는 걸 품었다면 말이다.

엘레나는 말없이 클레리아를 쏘아보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교활하게 웃었다.

“왜 데포렌 영애를 선택했냐고? 궁금하니?”

“…….”

“그 여자, 너 같았거든.”

클레리아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그것을 본 엘레나는 더욱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랑 닮았어, 그 첸시아란 여자. 아, 둘이 안면 있는 사이지? 다과회 구석빼기에서 가끔 함께 있었잖아. 안 그래?”

명백한 도발.

그 저열한 저의에 클레리아의 눈매가 서서히 차가워졌다.

“네가 내 옆에서 사라졌으니 어떡해? 널 똑 닮은 대체품을 찾았을 뿐이야. 그리고 그 역할에 성실했고. 뭐, 이렇게 날 뒤통수 치긴 했지만. 아! 그런 거 보면 너랑 정말 똑같지 않아? 이렇게 내 옆에 있다가 사람 뒤통수 치는 게?”

엘레나의 입가에 점차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어때? 내 곁을 떠나 배반하고 심기를 거스른 대가는 이런 거야.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훗, 나도 참. 정이란 게 무서워. 고작 그 어린 시절 함께 보낸 것이 다 뭐라고. 일말의 걱정스러운 마음이 남아 그래도 살피러 와야겠다 여겼는데, 차라리 잘됐어. 고마워, 엘레나. 마침내 나는 너에게 인간다운 예의도, 존중도. 배려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달했어. 널 위해 시간 낭비하는 건 이게 마지막일 거야.”

클레리아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너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매듭지어 줘서 고마워.”

“하! 그럼 그렇지. 너야말로 그 속이 시커매. 치유사의 자격으로 왔다더니 이게 무슨 태도람? 너야말로 너 자신을 좀 돌아보지그래?”

감정적으로 속내의 말을 끄집어내는 엘레나와 달리 클레리아는 표정을 지운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나는 네가 우리 프라이어스와의 관계를 끊겠다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어.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도 같은 뜻이시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한 후 클레리아는 방문으로 향했다.

“나도 네 얼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 저택에 얼씬거리지도 마!”

엘레나는 힘이 빠졌음에도 베개를 힘껏 문 쪽으로 던졌다.

물론, 클레리아의 발 근처도 못가 떨어졌지만.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클레리아가 잠시 발을 멈췄다.

씩씩거리며 그것을 지켜보던 엘레나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야? 왜 안 나가?”

“하나만 더 솔직하게 물을 게.”

클레리아가 그녀를 돌아봤다.

“엘레나 너. 이번 일과 관계없는 거 분명하지?”

엘레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빽 악을 썼다.

“지금 내가 자작극이라도 했다는 거야? 끝까지 재수 없어!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발악에 가까운 몸짓에 클레리아는 문을 닫았다.

놀란 하녀들의 배웅에도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빠르게 이슬레이터 저택을 빠져나갔다.

‘엘레나, 부디 이 일과는 상관없길 바랄게.’

* * *

저택으로 돌아온 클레리아가 지친 기색으로 로비에 들어왔을 때였다.

“클레리아.”

“에단?”

언제 왔는지 그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어디 갔다 와?”

“이슬레이터 저택에. 엘레나를 보고 왔어.”

그 말에 에단이 인상을 썼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었다.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엘레나가 심술부리는 거, 어렸을 때처럼 마냥 봐줄 생각도 없고.”

“그래.”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에 안심한 듯 에단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연통도 없이?”

“아, 그게.”

저택에 온 목적이 생각난 듯 에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금 뒤 황제 폐하의 참석 하에 재판이 열릴 거야.”

“재판? 설마 데포렌 영애의 처분이야?”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리가 예상치 못한 증거를 잡은 것 같아. 물증이 확실하니 폐하께서도 더 시간 끌 필요 없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3공작가의 일원이 다쳤으니 그만큼 더 화가 나신 것도 있고.”

클레리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첸시아의 상황이 예전 내 상황과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일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에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아?”

“응. 에단, 그 재판 나도 참관하고 싶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데리고 가려고 온 거야.”

“그럼 일단 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얼른 내려올게.”

“응.”

클레리아는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첸시아는 함정에 빠진 것 같아. 하지만…… 왜? 뭣 때문에 그녀가? 증거라는 건 또 어떤 거고.’

심란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녀의 발이 빨라졌다.

* * *

다그닥다그닥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사이러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라스칸트. 이른 시일 내에 벌써 두 번째 방문이군.’

그는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것이 눈에 조금 익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르다는 느낌은 들어도 계획이 그만큼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레리안 캄스턴이라는 자…… 예상보다 더 추진력이 좋군. 준비성도 좋은 것 같고.’

그는 힐끗, 자신과 함께 타고 있는 두 사내를 바라봤다.

“라스칸트 국경을 지났다. 저녁이 되기 전에 수도에 도착할 거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어딘가 섬뜩한 결연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황제가 속전속결을 좋아한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야. 한 나라의 수장이면 그만큼 신중하고 신중해야 하거늘. 뭐, 우리에게는 오히려 잘됐다. 그 급한 성정이 우리에게 틈을 만들어 줄 거야.”

그의 말에 사내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사이러스가 살벌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너희의 희생은 앞으로 우리가 건국할 왕국의 영광스러운 밑바탕이 될 것이다. 영예로운 죽음이니 망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희의 목숨으로 맹세를 증명해라.”

그들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듯 주먹을 들어 가슴에 올렸다.

“베푸신 은덕, 반드시 갚습니다. 왕자님께서 건국할 나라의 영광을.”

“왕자님의 나라에 광휘를.”

그들의 대답을 들은 사이러스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창문 쪽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돌렸다.

* * *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내리깐 클레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상황도, 이 공기와 분위기도 모두 다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을 맞은 편에서 지켜보던 에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클레리아?”

차게 식은 손에 온기가 느껴지자, 그녀는 에단을 보며 굳었던 입매를 끌어올렸다.

“응, 괜찮아. 다만 첸시아가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뭐 하나 제대로 의심해 볼 만한 것들도 없고. 이 상황이 너무 불쾌해서 그래.”

“그래, 나도 어딘가 탐탁지가 않은 건 많은데, 아무래도 너와 내가 수도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보니 쉽사리 낄 수 없기도 해.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 측에 증거가 보고가 되었다고 발표됐으니 일단 지켜보는 게 맞는 것 같아.”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했습니다.”

마부 알만의 말과 함께 그들은 마차 밖으로 내렸다.

거대하고 위엄 있는 황실 법원 대리석 건물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때도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쿵쾅거리는 심장에 클레리아는 잠시 주먹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몇 번 호흡을 가다듬고 에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큰 재판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공개 재판이 아닌 덕에 정말 극소수의 중요 인물들만 참여했는데. 레리안은 물론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외부인이 있었다.

사이러스 울렌가르.

서제도 레이셋의 4왕자, 그가 특유의 냉랭함을 풍기며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자리했다.

“왜 서제도 4왕자가 여기에?”

에단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곧 관계자가 다가와 그들의 자리로 안내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법관이 들어서고, 이어 누에른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재판장 내의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누에른을 뒤따라 예상치 못한 안투스가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이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기로 유명했기에 그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조용, 지금부터 이슬레이터 영애 독살 미수 사건 재판을 시작한다. 법관은 재판을 진행하라.”

“예, 폐하. 죄인 첸시아 데포렌을 들여라.”

법관의 명에 안쪽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첸시아를 양쪽에서 포박해 끌고 나왔다.

잡혀 가는 걸 본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식음을 전폐했는지 양 볼은 움푹 패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그녀는 질질 끌리다시피 나와 중앙 죄인석에 섰다.

“죄인 첸시아 데포렌은 엘레나 이슬레이터 독살 혐의로 이 자리에 섰다. 인정하는가?”

“아, 아닙니다. 저는…… 전 그러지 않았습니다.”

상석에서 내려다보는 누에른의 눈가가 움찔 찡그려졌다.

법관이 황제를 바라보자 누에른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혐의를 부인하니 내게 제시된 증거와 증인들을 부르겠다. 그대가 결백하다면 타당한 반박을 하도록.”

그러자 레리안이 가장 먼저 묵례한 뒤 나섰다.

“이슬레이터 영애가 첸시아 데포렌을 가엽게 여겨 곁에 두고 호의를 베푼 이후, 저 여자는 행해지는 사교모임마다 동행하며 이슬레이터 영애의 영역을 탐내 월권했습니다. 말을 가로채고, 분위기를 흐리는 등. 절대 귀족 영애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죠. 그 행동들이 이슬레이터 영애를 향한 동경에서 질투로 변질한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첸시아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월권이라뇨! 전 이슬레이터 영애께 누가 될 짓은!”

“감히 폐하의 앞에서 거짓을……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군, 첸시아 데포렌!”

레리안이 괘씸하다는 듯 일갈하자 그녀는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데포렌이 이슬레이터 영애를 투기해 벌인 일이라는 주장에 뒷받침이 되나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니 다음 증언을 듣도록 하지.”

누에른의 말에 이번에는 곁에 있던 안투스가 나섰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제게는 몇 안 되는 친우가 있습니다만, 그중 하나가 서제도의 4왕자 사이러스 울렌가르입니다. 그가 엘라단에 교수로 재직 중이온데, 엘라단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제게 연통을 해 왔죠. 이상한 물건을 받았다고 말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시종은 무언가를 꺼내 법관 앞에 놓았다.

첸시아는 엘레나 독살에 갑작스럽게 엘라단 아카데미가 언급되자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그에게 전달된 찻잎입니다. 일부가 주방으로 배달되어 귀빈들에게 대접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명을 독살한 바로 그 찻잎입니다.”

안투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이슬레이터 영애가 쓰러지던 날 전달된 것도 이 찻잎이라 하더군요.”

클레리아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딘가 익숙했던 그 느낌, 그래서였던 거야. 엘라단에서 교수가 마시고 쓰러졌을 때 느꼈던 맛과 향. 어딘가 묘하게 신경 쓰였던 건 그 때문이었어!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자 그 역시 께름칙함을 느낀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때 사이러스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저는 그 당시 모르는 발신인으로 온 것이기에 손대지 않았으나 설마 그것이 주방에까지 전달됐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엘라단 아카데미의 사건은 그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지요.”

첸시아는 벌벌 떨며 찻잎을 바라봤다. 그건 분명 엘레나의 부탁으로 건네받은 상자를 보내며 자신이 신경 쓰는 차원에서 함께 넣었던 것이었다.

단지 호의였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흔해 빠진 찻잎이지 않던가! 4왕자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기에 그저 헛된 마음 한 번쯤 전달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저는…… 제가 그런 것이!”

“이 찻잎은 데포렌 영지의 특산품이더군요.”

사이러스가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첸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음, 의외의 발언을 한 것은 누에른이었다.

“같은 찻잎에서 벌어진 사건이란 것은 알겠다. 그러나 이슬레이터 영애와 첸시아 데포렌. 그리고 그대 4왕자와 접점이 전혀 없지 않은가.”

그 물음에 사이러스는 곤란한 얼굴로 잠시 입을 가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데포렌 영지와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무역을 하는 중입니다만, 몇 년 전부터 저 여자로부터 소름 끼치는 집착을 받아 왔습니다. 아마도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폐하.”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가 어찌 일국의 왕자님께 그런 짓을!”

첸시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돼! 거짓말!

그를 좋아한다고 말을 한 적은 있어도 결코, 쫓아다니거나 소름 끼칠 정도로 집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은 지방 귀족이고 그는 일국의 왕자가 아닌가!

단지. 정말 단순한 이상형이었을 뿐이다. 호감으로 점철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뿐인데 어째서!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무엇 때문에?

첸시아가 억울한 듯 소리쳤으나 그녀를 향한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폐하, 첸시아 데포렌은 치밀하고 계획적이었습니다. 이슬레이터 영애의 호의를 등에 업고 사이러스 왕자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가 받아 주지 않자 그를 죽이려 했더군요.”

안투스의 말에 사이러스가 손을 들어 기사들이 누군가를 끌고 나왔다.

그들은 엘레나의 옆에 무릎 꿇려졌다.

“이자들은 폐하께서도 잘 아시는 델 판시온이라는 집단의 암살자들입니다. 해상과 내륙을 오가며 약탈과 습격을 일삼는 이들의 흔적이 엘라단 사건 때도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정보를 얻어 잔당 몇을 생포했습니다.”

그리고 사이러스가 품에서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첸시아가 전에 엘레나에게서 받은 목걸이였다.

“사주의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본 누에른의 눈이 서슬 퍼런 기운을 머금었다.

“말하라, 그대들이 정말 데포렌의 사주를 받았는가?”

“사, 사이러스 왕자님의 암살을 주문하며. 의심을 피하고자 다른 이들도 몇 암살할 것을 사주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사이러스와 마주쳤다. 그들은 더욱 머리를 조아려 바닥에 이마를 댔다.

“거짓말…… 거짓말입니다. 저는 억울해요! 이런 자들을 만난 적도 없어요! 폐하! 제발!”

그때 또다시 레리안이 나섰다.

“그럼 저 보석은 뭐죠? 저걸 당신에게 엘레나가 선물했던 것이라는 건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것을 봐 주십시오.”

그는 품에서 꺼낸 족자 하나를 꺼내 펼쳤다.

“이것은 위조된 서류들입니다. 엘라단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녀는 왕자님을 시해하기 위한 시행 연습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작은 마을을 상대로 말이죠. 여기 이 렝터 자작령으로 위조 문서와 함께 사주한 델 판시온의 일부를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그 마을은 괴멸 상태라고 하더군요. 4왕자님께서 잡아 온 이들이 직접 증언한 일입니다.”

그 순간 에단과 클레리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렝터 자작령이라고?’

클레리아는 순간 순하게 웃던 찰스 렝터를 떠올렸다.

첫 파견 임무를 나갔던 그곳이 괴멸 상태라고?

“여기 서명을 보시면 가명이긴 하나 필체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별사가 이미 그녀의 필체라고 확인도 했습니다.”

첸시아는 물밀 듯이 쏟아지는 엄청난 일들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엘레나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도 기가 막히는데 이제는 엘라단 사건의 주범이자, 한 마을을 괴멸시켜 버린 추한 집착녀의 이미지까지 뒤집어써 버렸다.

“왜…… 대체 왜 내게 이러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러한 행보를 눈치챈 엘레나 님과 말다툼하는 것도 여러 하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엘레나가 독에 당하기 전에 제게 이런 말을 했었죠. ‘첸시아가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 같다. 사이러스 왕자님에 관련된 일이냐 물었더니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꼭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될 뻔했었죠.”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나열되는 증거와 증언에 재판장 안의 모든 이가 숨죽였다.

‘치밀해,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해. 황자와 후작가의 공자. 게다가 타국의 왕자까지 증언했으니 의문이 생겨도 피력하려 나서기조차 쉽지 않아. 하필 그 찻잎이 데포렌 영지의 특산품이라니.’

클레리아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느끼며 씁쓸하게 첸시아를 바라봤다.

아래로 꽉 붙든 클레리아와 에단, 두 사람의 손만이 미심쩍은 이 상황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역시 침묵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누에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죄인 첸시아 데포렌은 반박할 증거나 증언이 있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서명도, 찻잎의 원산지도.

모두가 그녀와 관련이 있고, 안면조차 없는 옆에 꿇려진 낯선 사내들은 그녀에게 사주를 받았다는데.

하지 않은 일도 이미 자신이 한 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뭘 더 부인한단 말인가.

무방비 상태에서 당해 버린 첸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억울함에 울며 입만 벙긋거렸다.

“폐하…… 제발, 저는 결백합니다.”

그러나 3공작가와 지방 마을의 괴멸. 게다가 타국의 왕자와 대륙 전체가 주목했던 엘라단 사건까지 언급된 이상 누에른의 진노는 극에 달해 보였다.

반론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차갑게 내뱉었다.

“즉시 데포렌 일가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하고, 남작을 비롯한 일가를 참형에 처한다. 그리고…….”

그의 섬뜩한 눈빛이 번뜩였다.

“그에 8촌에 해당하는 친인척 모두를 멸문하라.”

“폐하!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저는 왕자님께 그런 적도 없고! 영애의 차에 독을 타지도 않았습니다! 폐하!”

쩍쩍 갈라지는 비통한 외침에도 재판장 내의 사람들 시선에는 경멸만이 가득했다.

법관 봉이 두드려지고,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면서도 첸시아는 우짖었다.

그 모습이 지난 자신과 겹쳐 클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은 알지만 동요하지 마, 클레리아. 폐하가 보고 계셔.”

에단의 낮은 속삭임에 클레리아는 심호흡한 뒤 표정을 관리했다.

“이것으로 이슬레이터 영애 독살 건은 마무리한다. 사이러스 왕자와 안투스. 그리고 캄스턴 영식은 알현실로 오도록.”

“이자들은 어찌할까요?”

아직 무릎 꿇려진 두 사내를 향해 기사가 물었다.

“즉결처분하라.”

섬뜩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는 검을 꺼내 들었다.

푹!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 모습에 클레리아는 에단의 손을 있는 힘껏 붙들었다.

죄인들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누에른과 다른 이들이 재판장을 나갔다.

그렇게 사라지기 전, 에단과 레리안의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묘한 웃음을 흘린 채 모습을 감췄다.

“우리도 이만 가자.”

“에단, 나…….”

“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일단 나가자. 여기서 벗어나서 얘기해.”

클레리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워 그의 부축을 받으며 법원을 나섰다.

히히힝!

서둘러 마차에 오른 후, 황실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에단이 입을 열었다.

“자작령에서 봤던 그 샤도레 남작이라 서명되어 있던 위조 서류. 아무래도 그 서명이 첸시아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야.”

“응, 데포렌 영애는 대체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린 거야? 그 사람은 절대 이 정도의 일을 벌일 배짱이 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증언하는 이들의 신분도, 증거도 그렇고. 쉽게 반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본인 스스로도 무덤을 판 느낌도 있고.”

“에단……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설마… 설마 엘레나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건…….”

클레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 생각이 맞는다면 엄청난 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건 없어. 그러니…… 그건 차차 생각하자.”

말하는 투를 보니 그 역시 내심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3공작가를 뒤흔들 수도 있는 일에 일단 클레리아 역시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녀는 낮은 한숨을 뱉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엘레단에서 문제가 됐던 차가 데포렌의 특산품이었다는 것에도 놀랐는데 더욱 충격인 것은 렝터 자작령의 이야기였다.

클레리아는 에단의 손을 붙들었다.

“에단, 나 내일 렝터 자작령에…….”

그러나 에단이 그 말을 잘랐다.

“여기 있어.”

“에단.”

“괴멸 상태라면 몇 명이 몰려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내가 기사단을 모아 되도록 빠르게 다녀올 테니까 클레리아는 수도에 남아 있도록 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임무도 받지 마.”

“하지만…….”

두려움에 클레리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렝터 자작도, 마을 사람들도 서로 그렇게 응원했었는데.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이 다정하게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에단도 조심해.”

“그럴게.”

* * *

‘에단…….’

그는 클레리아를 저택에 바래다준 뒤 곧바로 칼리스터 저의 기사들을 모아 렝터 자작령으로 향했다. 아마도 밤새 쉬지 않고 달릴 테니 아마도 내일 오후쯤에는 소식을 들고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쿠르르릉

번쩍!

에단이 떠나고 해가 지자 하늘이 요란하게 울며 비를 뿌렸다.

왠지 오늘 일어난 비극에 대해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클레리아가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볼 때였다.

똑똑

돌아서자 집사 엘튼이 문을 열고 있었다.

“엘튼?”

“저, 아가씨. 전령이 왔습니다.”

‘이 시간에?’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비에 잔뜩 젖은 우비를 입은 전령이 꾸벅 인사를 했다.

“프라이어스 영애께 전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발로니아 감옥에 투옥 중인 첸시아 데포렌이 뵙기를 청합니다.”

“첸시아 데포렌?”

이런 시간에 전령을 보낼 정도면 얼마나 간수들에게 간청을 한 걸까.

기회를 얻으려 고신당했을지도 몰랐다.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전달받았으니 돌아가세요. 가 보도록 하죠.”

“아가씨! 이런 늦은 시간에 그것도 감옥이라뇨!”

“아리스, 내 겉옷 좀 챙겨 줘. 걱정하지 마요, 마부 알만과 저택 경비병 한 명을 데리고 갈 거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아버지께도 내가 어디로 누굴 만나러 갔는지 연통해 두도록 하세요.”

그러나 엘튼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의 우려를 느낀 클레리아는 웃으며 그의 팔을 쓸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청할 정도면 얼마나 급한 일이겠어요. 나도 꼭 해 보고 싶은 얘기가 있기도 하고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엘튼.”

결국,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투둑 툭

우비에 달린 모자를 벗자 빗방울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벽돌로 지은 감옥은, 비가 오니 그야말로 음산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비가 새고, 습한 기운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도 이 불쾌하고 서늘한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으니까.

“여깁니다.”

간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발로니아 감옥의 깊숙한 안쪽이었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참형에 처 해지는 중죄인이다 보니 외딴곳에 갇힌 모양이었다.

간수는 문을 열어 주고 독대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또각 또각 또각

클레리아는 심호흡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 쇠창살 앞에 섰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발걸음에 맞춰 울림을 멈췄다.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한 인영이 움직인다 싶더니 천천히 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 프라이어스 영애?”

“데포렌 영애.”

찰캉!

다급히 첸시아가 창살을 붙들었다.

클레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와 주셨네요,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어요.”

일렁이는 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나도 그대가 내게 연락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먼 곳에서 울리듯 천둥소리가 그 간격을 메우다 사라졌다.

“왜 와 달라고 했나요?”

세찬 빗소리를 뚫고 클레리아가 물었다.

“왜 날 모함했어요?”

기다렸다는 듯 묻는 허황한 질문에 클레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냐 반문하려는데 첸시아가 고개를 저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아니야. 당신이 아니죠. 프라이어스 영애가 날 모함한 게 아니죠. 그래요, 이미 알고 있어요. 아는데…… 알고 있는데.”

떨리던 목소리는 결국 울음을 토해 냈다.

“정말 혹여라도.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날 모함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바보같이 멍청하게 이용당한 내가 너무 한심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미안해요, 그래서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울음과 비통한 하소연이 빗소리와 뒤섞였다.

첸시아는 창살을 붙든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나는 언감생심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그저 무역 일로 몇 번 왔다 갔다 하시는 걸 멀리서만 봐서. 그저 너무 멋진 분이셔서 이슬레이터 영애의 물음에 이상형은 사이러스 왕자님 같은 분이 좋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정말 그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죄가 되나요? 이렇게…… 내 가족과 가문이 멸문당할 만큼?”

클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 참담함을 클레리아 자신 또한 알고 있으니까.

“제가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하시댔죠? 프라이어스 영애.”

“클레리아라고 부르세요.”

그 말에 첸시아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날 위해 주는 말을 해준 건 클레리아뿐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보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을 모욕했던 날…… 클레리아는 내가 이런 상황까지 몰릴 걸 알았던 거죠? 그렇죠? 대가 없이 무언가를 퍼주듯 베푸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걸 가르쳐 주려 했던 거죠? 이제는 바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

클레리아는 씁쓸히 시선을 내렸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당신이 걱정돼서 말했던 건 맞아요, 진심이었어요.”

첸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정말 바보였군요.”

첸시아는 천천히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내일 처형장에 꼭 와 주세요.”

“첸시아.”

“와 줘요. 부탁할게요, 클레리아. 날 경멸하는 사람들만 눈에 담게 하지 말아요. 적어도…… 적어도 날 조금이나마 안타까워하는 사람의 눈을 보며 죽게 해 줘요.”

클레리아는 손을 그러쥐어 치맛자락을 쥐었다.

끼익

“면회 시간 끝입니다.”

간수의 말에 클레리아는 간절한 얼굴의 첸시아를 바라봤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클레리아가 간수를 따라나서자 첸시아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클레리아.”

* * *

밤새도록 퍼붓던 비는 해가 밝아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그쳤다.

비극적인 상황과는 달리 너무도 맑고 개운한 아침 햇살에 클레리아는 비통한 눈길로 그것을 지켜봤다.

첸시아를 만나고 돌아온 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첸시아의 와 달라는 그 간절한 말이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클레리아는 어제 나섰던 차림 그대로. 처형대가 마련될 황실 앞 광장으로 향했다.

공개 처형은 흔한 일이 아니기에 광장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클레리아는 가장 멀찍한 뒤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따로 마련된 관중석에는 황실 일가와 이 사건의 중요 참고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이슬레이터 공녀님의 독살 사건 진범이 잡혔다면서? 질투에 눈이 멀어 그랬대.”

“어제 황실 기사단이 대거 출발했잖아? 그게 그 친인척을 전부 척살하러 간 거라는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도 유분수지, 어떻게 감히 3공작가의 귀한 분을 건드릴 생각을 해?”

“뭣 모르는 지방 귀족이라잖아. 그러니 뭘 알고 날뛰었겠어?”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니 벌써 첸시아의 이야기가 많이 퍼진 모양이었다.

‘타국이 관련되어 있다거나 엘라단 사건과의 연관성은 폐하께서 입막음 단단히 하신 모양이구나. 자작령의 일도 그렇고.’

그때였다.

부우우

나팔 소리와 함께 안내인이 소리쳤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황녀 전하께서 납십니다.”

그러자 광장에 있던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충정을 드러냈다.

그들이 관중석에 앉고, 사람들이 일어서며. 클레리아는 황실 일가의 표정을 살폈다.

안투스와 누에른은 별 감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세실리아는 불쾌하다는 표정이 지배적이었다.

“죄인 첸시아 데포렌을 대령하라!”

멀리 첸시아가 포박되어 끌려 나왔다.

사람들의 고성과 욕설 속에 처형대에 오른 그녀는 기사들에 의해 무릎이 꿇려졌다.

“죄인 첸시아 데포렌은 이슬레이터 공작가의 엘레나 이슬레이터를 독살하려 한 살인미수죄와 갖가지 불경한 죄들을 물어 참형에 처한다.”

모두가 누에른을 바라봤다.

그의 오른손이 올려졌다가 망설임 없이 내려졌다.

신호와 함께 클레리아의 고개가 홱 처형대로 향했다.

‘첸시아!’

그녀와 눈이 맞았다.

<고마워요.>

콱!

분명 들리지 않을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높이 치솟은 도끼날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첸시아 데포렌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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