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52)

제29장. 눈엣가시를 치워야 할 때.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아, 아가씨. 진정…….”

철썩!

“진정? 지금 네 눈에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어?”

쨍그랑!

뺨을 맞고 나가떨어진 하녀의 뒤로 마구잡이로 던져 대는 물건들이 벽과 가구에 맞아 박살이 났다.

“아아아아악!”

이제는 이불과 베게까지 찢어발기는 통에 엘레나의 손에도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씁…….”

난리통에 들어온 레리안이 보다 못해 그녀를 붙들었다.

“자자. 그만 진정해요, 엘레나.”

“나한테 어떻게 이러느냔 말이에요!”

몸부림을 치던 그녀는 레리안의 강압적인 힘에 겨우겨우 행동을 멈췄다.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던 하녀들도 레리안의 고갯짓에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폭풍이 지나갔군요.”

“흑…… 흐윽.”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엘레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공자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까 더 싫었던 거예요! 그 계집애한테만큼은, 그 계집애만큼은!”

“하…… 그래요. 네네, 당신이 옳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요.”

“흐아앙…… 정말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클레리아 따위!”

그 말을 들으며 레리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자자, 누가 듣겠습니다. 그런 말은 우리 마음속으로 하자고요. 네? 그나저나 칼리스터 경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그 말에 눈물을 훔치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데포렌 남작 가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순간 레리안의 표정이 싸늘히 식었다.

“그래서 뭐라 답했습니까?”

“너희가 날 버렸는데 같이 어울릴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렇게 말했어요.”

“뭔가 더 묻진 않던가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모습에 레리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잘했습니다. 이제는 알려 주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척척 해내는군요.”

“흐윽…….”

그러나 아직 에단의 일에 상심한 엘레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고, 레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 * *

“도련님!”

에단이 돌아오는 것을 발견한 안드레가 마중 나왔다가 식겁하며 달려왔다.

“이슬레이터 공작 저에 가셨던 게 아닙니까? 대체 이게 무슨?”

“별일 아니니까 소란 떨 거 없어. 아버님께도 함구하도록 해.”

외출 후 돌아온 에단의 얼굴에 상처가 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

“난 이제 쉴 거니까 그리 알아 줘. 내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방으로 향했다.

“하아…….”

문을 닫음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지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거울에 가 얼굴을 비추자 왼쪽 뺨에 길게 베인 상처가 보였다.

‘격하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에단의 대답을 들은 엘레나는 그야말로 격분했다. 그리고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중 날아든 유리컵에 그대로 에단이 얼굴을 맞은 것이다.

놀랄 법도 한데 엘레나는 오히려 더욱 마구잡이로 물건을 던졌다.

엘레나를 대하는 것이 이제는 한계였다.

3공작가라는 혈맹으로 간신히 유지되고는 있으나, 사실 이슬레이터 공작이 아니었다면 엘레나의 행실 덕에 진작 깨졌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거의 패악질이라고 불릴 정도니 언제 어느 때에 공작 저 밖으로 얘기가 새어나갈지 모르겠어. 막을 수조차 있는지 장담도 못 하겠고.’

그는 엄지로 살짝 상처 근처를 훑었다. 그러자 찌릿, 하는 날카로운 통증에 움찔 눈가가 떨렸다.

‘엘레나가 실망할 걸 알고 일부러 한 번 정도는 맞아 줬지만. 더는 감당이 안 돼.’

다시금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단은 그녀와 연을 끊길 바랐다. 왜냐면 엘레나는 에단이 클레리아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꽤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공개적으로 약혼을 청하는 등 계속해서 그를 힘들게 했다.

‘이제 더 이슬레이터 저로 갈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 * *

“엘레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레리안의 부름에도 그녀는 그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낯을 보니 한숨도 못 잔 게 분명했다.

“불면은 피부에 최악이라니까요.”

그의 말에 그녀는 눈알만 도르륵 굴려 바라봤다.

“의논은 잘하고 왔나요?”

무심하게 묻는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칼리스터에서 데포렌 남작가를 언급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슬레이터 저로 찾아온 것도 있으니 이번 일은 이제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길게 주목받아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마무리?”

레리안이 싱긋 웃었다.

“엘레나가 도와줘야겠어요.”

그의 말에 엘레나가 삶의 의욕을 잃은 듯 시큰둥 대답했다.

“그러던가요. 계획이 뭔데요?”

“엘레나가 독을 마시는 거예요.”

“네?”

잘못 들은 건가?

너무도 태연한 말에 엘레나가 기겁하며 정색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 물론 당연히 해독제를 먹을 거고. 몸에는 절대로 아무 이상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을 할 것 같아요?”

“아뇨, 절대. 죽을 일은 없습니다. 우린 이쪽 분야의 최고를 모시고 있거든요. 날 못 믿겠어요? 아, 입에 좀 많이 쓰긴 하겠죠, 훗.”

하지만 여전히 엘레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앙칼지게 노려보자 레리안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엘레나가 나에게 그랬었죠? 꼴사나운 건방을 떠는 걸 그냥 두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는 손바닥을 펼쳐 종이로 싸인 뭔가를 보여줬다.

“이제 그 이유를 실행시킬 때가 온 거예요. 생각해 봐요. 칼리스터 경이 손수 여기까지 행차할 정도면 이슬레이터의 이름이 나온 걸 상대가 민감하게 받아 들이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제 그 의심을 완전히 없애 줘야 하지 않겠어요? 감히 고결한 당신을 의심하게 내버려 둘 건가요?”

‘하’하는 코웃음과 함께 엘레나는 레리안의 손바닥에 놓인 것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지요?”

“두말하면 잔소리.”

그렇게 말한 엘레나가 크게 하녀를 불렀다.

“예, 아가씨.”

어제 일로 잔뜩 긴장한 하녀가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왔다.

“데포렌 남작 영애에게 상의할 것이 있다고 연통 넣도록 해.”

“예.”

하녀가 나가고 엘레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굉장히 흥미진진한 일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 * *

“정말이세요?”

“네.”

“정말 제게 이슬레이터 저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의 준비를 맡기신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설마 내 말 못 믿는 거예요?”

능청스러운 엘레나의 연기에 첸시아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다만 너무 기뻐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울먹였다.

공작가의 영애와 함께 티 파티를 다니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그녀의 저택에서 있을 티 파티를 책임지게 된다니. 이보다 더한 자리 굳힘과 친목의 증거는 없을 것이다.

첸시아는 세차게 뛰는 가슴과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벌써부터 고귀하고 돈 많은 공자들이 구애를 위해 줄을 서는 느낌이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할게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이슬레이터 영애께 걸맞은 그런 완벽한 티 파티를 준비하겠어요!”

첸시아가 맹세하듯 외쳤다.

“네, 기대할게요.”

엘레나는 음흉한 웃음을 애써 숨기며 환히 웃었다.

* * *

“아가씨, 초청장이 왔어요.”

아이문트 대공의 일 마무리 후, 황제는 약간의 휴가를 포상으로 내렸다.

그 덕에 모처럼 집에서의 휴식을 즐기는데 예상치 못한 초대장이 온 것이다.

“초대장? 내게 그런 걸 보낼 사람이 없을 텐데?”

세실리아라면 황궁 전령을 보냈을 것이고. 그녀가 치유사 일로 바쁘다는 건 제국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기에 클레리아에게 사교 모임 초청장을 보내는 중앙 귀족은 없었다.

“음?”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뜯는 순간, 클레리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초대장은 다름 아닌 첸시아가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특별한 장소를 빌리거나 한 것이 아니라, 엘레나의 티 파티를 도맡아 이슬레이터 저에서 연다는 것이었다.

‘이건 오래전 내 생일 축하연을 엘레나에게 맡겼을 때와 똑같은 일이야.’

귀족들 사이에서 절친한 이를 위해 대신 파티를 열어 주거나 총괄해 주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이었다.

사교계에서는 그만큼의 친분과 신뢰를 공식화하는 일이기에, 지니는 의미가 엄청났다.

그런 일을 첸시아에게?

그것도 3공작가 중 하나인 이슬레이터가 지방 귀족인 데포렌에게?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대로 주최를 한다면 다음날 가십거리는 떼 놓은 당상이겠지.

‘그런데 날 초대했다고? 이건 아무리 봐도…… 악의적이잖아.’

첸시아는 클레리아가 사교 모임 자리를 불편해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지난번 만남 때 그녀는 클레리아에게 질투하지 말라며 추하다고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가.

초대장을 보낸 저의가 너무도 가벼워 불쾌했다.

그럼에도 클레리아는 초대장을 쉽사리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레나가 첸시아와 어울리는 건 이상했다. 첸시아가 그녀를 잘 따르고 떠받든다 해도. 첸시아 역시 야망이 지나치게 큰 사람이었다. 그런 둘이 언젠가 부딪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게다가 그 옛날 사교모임에 적응하지 못해 침울해하는 그녀와 나름 정을 나눴던 사이가 아닌가.

첸시아가 야망에 눈이 멀어 실언하긴 했어도, 지난 정에 클레리아는 아직 그녀가 걱정됐다.

무엇보다 엘레나의 저의가 불순하면 불순했지, 선하게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한쪽에 그냥 치워 두려던 클레리아는 결국, 다시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아리스. 내 드레스 좀 점검해 주겠어?”

* * *

“흠…… 색은 이게 나을 것 같고. 안개꽃이랑 튤립, 아네모네 메인이 나으려나.”

첸시아는 유심히 들고 있는 종이를 살펴봤다.

수도 본트리스에 있는 유명한 꽃집이란 꽃집 카탈로그는 몽땅 가져온 것 같다.

엘레나가 지정해 준 큰 유리 하우스를 채우려면 돈이 빠듯하겠지만. 일이 잘 성사된 후 따라올 것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살피는데 누군가 다가와 어지럽게 놓인 카탈로그 하나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이 저택의 주인인 델토른 후작의 딸이자, 첸시아의 친인척인 트리엔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첸시아는 그녀의 집에서 친척의 자격으로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워낙 수도에 오고 싶어 하는 그녀를 안타까이 여긴 트리엔이 인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요즘 그녀의 눈초리는 쌀쌀맞기만 했다. 그럴 것이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첸시아가 갑자기 엘레나의 호의를 업고 기세가 등등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중앙 귀족들은 없었다. 문제는 뭣 모르고 콧대가 높아지는 첸시아였지.

그 때문에 트리엔까지 위신이 적잖이 떨어져 버렸다. 작은 사교 모임 안에서는 요즘 첸시아의 거동에 대해 말이 많았으니까.

“이 비싼 카탈로그들은 어디서 구했니?”

냉랭한 물음에 마른 침을 삼킨 첸시아가 이상할 거 없다는 듯 대꾸했다.

“하녀를 시켜서 가져오라 했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중요한 일?”

트리엔은 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중요한 일이란 게 이거 말이야?”

“응.”

“이슬레이터 영애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뭐, 그분께서 정하신 일을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너 이대로 괜찮겠어?”

그녀의 물음에 첸시아가 시치미를 뗐다.

“그게 무슨 말이야?”

트리엔이 우아한 손짓으로 카탈로그를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데포렌 남작님의 상단 하나가 또 위태롭다던데. 너 며칠 전에 이번 달뿐이 아닌 다음 달 유흥비까지 우리 집사에게 가불해 갔잖아?”

순간 첸시아는 뜨끔하며 어깨를 떨었다.

사실 데포렌 가에서 첸시아에게 할당되는 돈이 있지만. 델토른 후작의 배려로 이곳에서의 유흥비를 약간 지원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비용을 받는 족족 몽땅 써 버렸다는 점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새 드레스와 액세서리에 돈을 쓰고 있는 걸 트리엔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내 아버지의 돈도 들어갔으니까 상관이 없지 않지.”

“어차피 나 쓰라고 할당해 주신 돈이잖아. 그것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않아?”

트리엔은 딱히 더 뭐라 덧붙이진 않았다. 처음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 표정을 빼면.

“그래, 네 일이니까. 남작님으로부터 통신석 요청이 와 있어. 가 봐.”

트리엔의 말에 첸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갑자기 왜?’

궁금증도 잠시, 트리엔은 그대로 방을 나갔고 첸시아 역시 서둘러 통신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버지?”

<첸시아!>

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불길함을 느끼며 그녀가 기다리자 남작이 말을 이었다.

<회계사가 그러는데 네게 지급되는 비용이 계속 바닥이 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트리엔에 이어 아버지까지.

가뜩이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위해 신경이 곤두섰는데 이런 쓸데없는 질문들이 난무하는 삶에 첸시아는 회의감을 느꼈다.

“아버지, 어차피 그 돈은 제 돈인데 왜 참견하세요?”

<서 제도와 교류하던 상단 하나가 위태롭단다. 이제 지출하는 비용을 아껴야 한단 말이다.>

“그건 아버지 일이잖아요. 제게 말씀하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예전만 해도 네 비용을 차곡히 저금해 가문을 위해 조금씩 도와주던 네가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거냐?>

씁쓸한 남작의 말에도 첸시아는 그저 짜증만 났다.

“그저 돈, 사업, 돈, 사업! 언제까지 그렇게 아버지 일을 가족에게까지 미루실 건데요?”

<첸시아!>

“아버지, 제가 수도에서 어떤 분과 어울리고 있는지 아세요? 이슬레이터 영애예요. 3공작가의 이슬레이터 영애! 그러니 아버지. 조금만 버텨 보세요. 곧 돈 많은 공자가 줄줄이 청혼해 올 테니까요.”

<첸시아, 대체 그게 무슨…….>

“제가 꼭 우리 가문을 일으킬게요.”

<첸시아!>

그녀는 통신을 그대로 끊었다.

남들은 풍족한 삶에 여유를 즐긴다는데 왜 본인에게는 이런 일만 생기는지.

물론, 가업을 잇거나 사교계에서 나름의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도 이렇게 사교에서 그녀만의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도무지 주변인들이 못살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첸시아는 상심했다.

‘이번 티 파티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해 보이겠어. 이슬레이터 공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겠어.’

* * *

‘이 정도면 빈틈은 없어. 적어도 우리 쪽에서 변절자가 생기지 않는 이상. 내일이 기대되는군.’

레리안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어두워진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 그는 한 건물로 올라갔다.

“피곤하군.”

크라바트를 풀며 레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다.

퍼억!

무방비 상태였던 그는 눈앞이 번쩍하는 걸 느끼며 그대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어떤 새끼야!”

거칠게 외치며 일어난 그가 멈칫했다.

앞에는 싸늘한 눈을 한, 그를 똑 닮은 두 사람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 안에 퍼지는 비릿한 향을 느끼며 레리안이 중얼거렸다.

“아, 아버지. 형님.”

“누가 네 아버지고 형님이지?”

안경을 쓴 것을 빼면 정말 쌍둥이라 할 정도로 빼닮은 사내가 차갑게 내뱉었다.

캄스턴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장자인 레녹스였다. 그 뒤로는 못마땅함이 극에 달한 캄스턴 후작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경멸 가득 배인 시선을 하고 있었다.

레리안은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용케도 찾아내셨습니다? 본트리스를 모두 뒤지기라도 하셨습니까?”

“무려 열두 곳이었다. 네가 즐겨 쓰던 가명들로 빌려진 장소가. 대체 뒷구멍으로 뭘 하고 다니는 거냔 말이다! 감히 캄스턴의 이름에 먹칠할 셈이냐?”

퍼억!

다시 한 번 레녹스의 일격이 그의 뺨을 내리쳤다. 충격에 바닥을 구르던 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을 본 캄스턴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네 형에게 밀리고, 네 그 못난 열등감을 어떻게든 잘못 이용할 줄 알았지. 이슬레이터 공작께서 우릴 등지게 만들 셈이냐? 멍청한 놈.”

“하하하, 제가 그렇게 멍청했다면 아버님과 잘난 형님이 절 찾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을 리도 없지요.”

후작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리고 제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절 찾으려고 수도를 뒤지신 거고. 아닙니까? 멍청한 제 속도 못 읽으시면서 난척하시면 안 되죠.”

팍!

후작이 짚고 있던 지팡이가 가차 없이 그의 뺨을 휘갈겼다. 이번에는 기어이 입술이 찢어지고 말았다.

“네가 똑똑했다면 머리를 제대로 굴려 네 형을 보필해 캄스턴을 굳건히 했겠지. 너 같은 놈이 우리 가문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큭큭큭’거리며 웃는 레리안을 냉랭히 내려다보던 레녹스가 나직이 읊조렸다.

“더는 가문에 폐를 끼치지 마라. 이슬레이터에도 눈 밖에 날 짓 하지 마. 한 번만 더 걸렸다간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길 테니 계산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섬뜩한 위협과 함께 레녹스와 후작은 모습을 감췄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레리안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언제 내가 가진 것이나 있었습니까? 진작 내버려 놓고 터진 주둥이라고 잘도 나불대는군요. 두고 보십시오. 내일 후로는 날 이런 식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그대로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버렸다.

* * *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엘레나가 귀찮은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에단의 폭탄 발언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이딴 촌극에 연기까지 맞춰 줘야 한다니.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첸시아의 같잖은 행동을 웃으며 받아 줘야 한다는 게 더 짜증 났다.

‘그래도 이 짓거리도 오늘이면 끝이니까.’

똑똑

문을 두드린 레리안이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숙녀가 드레스를 갖춰 입는데 들어오다니. 매너가 없군요.”

받아치던 엘레나가 순간 멈칫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 얼굴 왜 그러죠?”

“이거 참, 이제야 발견하시고. 서운합니다. 고운 얼굴에 난 상처 정도는 빠르게 발견해 주셨으면 했는데.”

마침 옷에 리본 마감이 마무리되었고, 엘레나는 들었던 팔을 내리며 손짓했다.

“가서 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의 말에 레리안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하녀가 들고 온 상자를 받은 엘레나가 소파 옆을 툭툭 쳤다.

“이리 와요.”

“허…… 엘레나가 직접 치료해 주시는 겁니까? 이거 감동인데요?”

“감동은 무슨, 연고 하나 바르는 건데. 오늘 중요한 날인데 이런 얼굴로 갈 생각이었어요? 당신이란 남자 정말 대책 없군요.”

그 말에 레리안은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엘레나의 간호를 받지 않습니까. 제 딴에는 아주 좋은 일이죠.”

서둘러 반창고로 마무리한 그녀가 레리안의 가슴팍에 상자를 안겨 팍, 밀어 버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나저나 그거 가져왔어요?”

그녀의 물음에 레리안은 씩 웃으며 품에서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물론이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데.”

받아 들어 빛에 비춰 보던 엘레나가 곁눈질해 그를 노려봤다.

“정말 제대로 된 해독제겠죠? 만약 날 속이는 거라면…… 내 아버지가 당신의 배를 가를 거예요.”

“어휴우, 무서워라. 어떻게 그런 곱상한 얼굴에 그리도 살벌한 말이 나오는지. 정말 엘레나는 알면 알수록 반전 매력이 넘친다니까요?”

능청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것도 잊지 마세요.”

그는 빨간색의 액체가 든 환도 내밀었다.

“다과가 시작되면 차를 소개하고 품평하겠다며 제일 먼저 차를 마셔야 합니다. 엘라단과 같은 도박을 할 수는 없어 차 자체에 독을 넣었으니까요. 차를 마시기 전 부채로 입을 가리고 이 약을 입 안에 숨기십시오. 그리고 차를 마신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빨간약을 바라보던 엘레나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번졌다.

“이를테면 이 촌극의 절정이라는 건가요?”

레리안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를 길게 찢어 웃었다.

* * *

또각또각

마차에서 내린 클레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앞에 있는 저택을 바라봤다.

이슬레이터 저.

얼마 만에 왔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해 낯설 지경이었다.

“아가씨, 언제쯤 모시러 오면 될까요?”

“오래 있지 않을 거예요. 한 시간 뒤에 와 줘요. 혹시 그 전에 전령을 보낼지도 모르니 되도록 자리 비우지 말고요.”

“예.”

마부의 말과 함께 그녀가 타고 온 마차가 점차 멀어졌다.

‘내가 나타나면 엘레나가 노발대발하려나. 괜히 온 건 아닐까.’

여전한 께름칙함에 마른침을 삼킬 때 현관에 있던 집사 레이먼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클레리아 님 아니십니까!”

“잘 지냈나요, 레이먼.”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의 활약도 모두 전해 듣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고마워요. 레이먼 나와의 대화는 이쯤 하도록 해요. 엘레나가 보면 그대에게 좋지 않을 거예요.”

그는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말이 맞기에 서둘러 티 파티 장소인 유리 하우스로 안내했다.

‘와…… 첸시아가 정말 심혈을 기울이긴 했구나.’

하우스 안은 각양각색의 향긋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녹음이 어우러져 화사하고 따스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초대받은 영애들이 모이면 그야말로 꽃밭에 꽃이 있는 걸로 보일 정도랄까.

“어머, 프라이어스 영애! 바쁘실 줄 알았는데 참석하셨군요!”

먼저 도착한 다른 영애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네, 어쩌다 보니 시간도 남고 초대도…… 받아서요.”

내키지 않는 말을 하려니 영, 입안이 꺼끌꺼끌했다.

그때였다.

“오셨군요? 프라이어스 영애?”

지나치게 도도하려 애쓰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첸시아가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정말 말 그대로 기고만장의 끝을 달리는 모습이었다. 얼굴과 몸짓에는 자만과 자신감이 과하게 넘쳐,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초대를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오셨다니 다행이에요.”

“……마침 시간이 되더군요.”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순간 경직된 목소리가 하우스를 울렸다.

엘레나였다.

그녀는 클레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묘한 눈길로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엘레나는 사실 버릇처럼 손이 먼저 올라갈 뻔했지만, 주위의 다른 영애들의 시선 덕에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부채를 펼쳐 느리게 부채질하며 말했다.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귀한 분 아니었어? 그래서 난 당연히 참여 못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오랫동안 연락 한 번 주지 않은 절친을 위한 배려니?”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날이 서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클레리아만이 아닌 주변 영애들까지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엘레나는 웃으며 클레리아의 드레스 곳곳을 살살 털어 주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오랜만에라도 내 파티에 참석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넌 제국에서 제일 바쁜 분이잖아. 무례한 일이긴 하지만,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뜬다 해도 이해할게.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능청스럽게 주변 영애들을 향해 묻자, 그들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이러지 말고 앉도록 해요.”

엘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이끌었고, 영애들은 클레리아와 엘레나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아무리 근래 첸시아와 자주 어울린다고 해도 클레리아와는 여전히 우정이 돈독한 줄 알았는데.

웃으며 말해도 어딘가 날 선 말투에 주변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첸시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엘레나에게 자연스레 팔짱을 끼며 말했다.

“프라이어스 영애는 저와 이슬레이터 영애가 절친한 사이가 된 걸 직접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셨답니다. 옛. 절. 친.인데 그 정도는 예의 아니겠어요? 오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사교계에서 추한 투기를 한다고 오해가 생겼을 거예요. 그렇죠? 이슬레이터 영애?”

첸시아의 말에 기가 막힌 듯 엘레나의 얼굴 위로 질색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따라 웃었다.

“흠, 정말 그렇겠군요.”

“어차피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금방 돌아가야 하니까.”

엘레나는 멀뚱히 바라보다 홱 돌아 마련된 자리로 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초대된 인원 전원이 유리 하우스를 채웠다.

사실 초대장에 적힌 첸시아의 이름을 보고 대부분은 뭔 웃기지도 않은 짓이냐 했지만, 장소가 이슬레이터 저인 이상 마다한 이는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첸시아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온종일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프라이어스 영애께서 참석하실 줄은 몰랐군요.”

“아,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혹여 괜찮으시다면 저희 영지에 들러주 시겠습니까? 영지민들을 살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제게 의뢰서만 갖춰 보내 주신다면 고려하겠습니다.”

제국 전체에 클레리아의 활약이 퍼졌기에 참석한 공자들의 인사치레가 이어졌다.

그 모습을 엘레나가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몇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정성껏 만들어진 다과와 차를 하녀들이 차례로 내오기 시작했다.

온실 안으로 따스한 차의 향기가 퍼졌다.

차려지는 다과를 보며 클레리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향…….’

고용인들이 차가 담긴 잔을 공녀와 공자들에게 올린 뒤.

엘레나가 자연스레 부채를 펼쳐 ‘훗’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빨간 약을 입 안에 넣었다.

“오늘 모여 주신 공자, 공녀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제대로 된 사교 모임을 열고 싶었는데 요즘 몸 상태가 영 좋지 못해서 아쉬웠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첸시아가 절 대신해 멋진 티 파티를 열어 주다니…… 이걸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한 공자가 말했다.

“네, 섬세하고도 정말 화사한 자리입니다. 이슬레이터 영애의 총애를 받는 분답게 감각이 정말 뛰어나시군요.”

입에 발린 소리가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 아부하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첸시아 양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의미로, 데포렌 남작가에서 나는 특산품인 차를 준비해 봤답니다. 여러분께 소개도 할 겸 준비한 자리니 맛보시고 다들 자주 애용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차를 마시려 했다.

그때 엘레나가 만류했다.

“잠시만요. 드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맛을 보고 이 차가 어떤지에 대해 평을 좀 해 드려도 될까요? 첸시아 양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밖에 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공자와 공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 파티의 주최자나 다름없는 그녀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예의 없이 차를 먼저 마시겠는가.

모두가 수긍의 침묵을 하자 엘레나는 빙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꿀꺽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우스에 오기 전 충분한 양의 해독제는 이미 마셨다. 그러니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될 리는 없겠지.’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자 레리안이 서서 그녀에게 건배라도 하듯 잔을 높여 보였다.

그의 미소에 마음이 편해진 엘레나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딘가 묘해. 이 차 계속 마음에 걸려. 대체 뭐지?’

클레리아는 미간을 좁힌 채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차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잠깐, 이건 분명히 엘라단에서의 그……!’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코를 떼었을 때였다.

쨍그랑!

“이슬레이터 공녀님?”

“웁……!”

엘레나의 입에서 피가 새어 나와 드레스가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더니 다시금 피를 한가득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공녀님!”

“꺄아아아악!”

사람들이 패닉이 되어 사색으로 질렸을 때, 클레리아가 한달음에 엘레나에게 달려갔다.

“엘레나! 엘레나! 정신 차려!”

그녀를 안고 치유력을 막 흘려 넣으려던 그때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구석에 있던 레리안이 빠르게 다가와 클레리아를 밀어내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슬레이터 가의 주치의를 불러! 당장!”

이어 고함에 놀란 레이먼이 들어와 엘레나를 업고 나갔고, 하우스 안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 가만! 움직이지 마십시오. 당장 찻잔을 내려놓으세요! 차에 독이 든 게 분명합니다!”

그 말에 엘레나를 보고 얼어 버린 첸시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의 눈이 레리안을 천천히 향했다. 그러자 그는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용의자니 심문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니 한 명이라도 자리를 이탈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이슬레이터 영애를 살해하려 한 살해 용의자로 간주하겠습니다.”

‘살해 용의자?’

첸시아는 순간 ‘끅’ 하며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얗게 질려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향해 레리안이 못 박듯 말했다.

“첸시아, 당신은 이 일과 관련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 *

이슬레이터 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공작이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달려온 것은 물론, 황실 소속 조사관까지 파견될 정도였으니까.

모든 공녀와 공자들이 심문을 마쳤고, 마지막으로 첸시아가 조사받으러 들어갔다.

그녀가 가는 것을 보며 클레리아는 상황을 정리하는 레리안에게로 향했다.

“엘레나는 어떻죠? 무사한가요?”

“다행히 극소량을 마신 것이라 큰 무리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더군요.”

“……제가 그냥 응급 처치하게 두셨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그녀의 말에 레리안이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그저 나중에 엘레나가 깨어났을 때 후폭풍을 면코자 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 게 먼저지 않을까요?”

“영애, 우리 이런 시답잖은 일로 열 내지 말죠. 영애와 엘레나는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그런 당신이 이 기회를 노려 해코지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죠?”

“내가 엘레나를 해칠 거란 말인가요?”

클레리아가 날카롭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과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도 두 분 사이에는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설마 모두가 느낀 걸 본인만 못 느꼈다 하시진 않겠지요? 3공작가는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런 신경전이나 하고 있으니 당신이 사소한 심술을 부릴지 아닐지 어떻게 장담하죠?”

“사람 목숨을 두고 장난치는 일은 없어요. 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거야 모르죠.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겁니다. 프라이어스 영애.”

그의 적의 가득한 비난에 클레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친 사람을 두고 유치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

“혹여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요청해 주세요. 저희는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치우치는 일은 없으니까.”

클레리아의 말에 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희도 독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분이 있어서 말이죠. 치유사처럼 빠르게는 아니어도 천천히 완쾌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엘레나에게서 신경 꺼 주는 게 영애가 할 일입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이 남자, 정말 끝까지.’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지만, 원래 그런 사람을 데리고 무슨 대화를 하랴.

클레리아는 서둘러 로비로 향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마차를 타러 나오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심문받으러 들어갔던 첸시아가 기사들에게 끌려 조사원의 마차에 태워지던 것이다. 그것도 이슬레이터 저의 부기사단장인 헤론 경의 지휘 아래.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에 클레리아는 뒷덜미가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죠?”

다급히 묻자 기사 하나가 답했다.

“엘레나 이슬레이터 영애의 독살 혐의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그런 게……!”

눈에 핏발이 선 첸시아가 악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마차에 태워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프라이어스 영애…….”

클레리아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대로 조사원의 마차에 탄 채 이슬레이터 저에서 멀어져 갔다.

* * *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이슬레이터 영애가 그렇게 쓰러질 일은…… 그런 일은 분명 없어야 하는데!

차가운 감옥 구석에 몸을 말아 웅크린 첸시아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까득까득 피가 나도록 손톱을 깨물며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뜯다 세차게 젓길 반복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일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첸시아의 말이 멈췄다.

“설마…… 설마 내가 잘 되는 걸 막으려고!”

그녀의 머릿속에 친척인 트리엔과 예전 엘레나의 친우인 클레리아가 떠올랐다.

그 두 사람이라면 완벽했던 다과회를 망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 그 둘 중 한 사람이 이슬레이터 영애의 환심을 산 나를 투기해 벌인 일이 틀림없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한시라도 여길 빨리 빠져나가서! 이슬레이터 영애께 알려 드려야 해!

“꺼내 줘요! 꺼내 주세요! 진범을 알아요! 이슬레이터 영애께 해를 끼친 진범을 안다고요! 내가 아니라 저 밖에 진범이 있어요!”

목청이 쉬어라 소리 질렀음에도 간수나 그 누구의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꼬박 몇 시간이나 외치던 첸시아는 결국, 제풀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제발…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전 진범이…….”

목이 쉬어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것도 아팠다. 창살을 내리치던 손은 퉁퉁 부어올라 경련을 일으켰다.

“흑…….”

끝내 그녀는 눈물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확신에 차 외쳤으나 점차 그 말을 내뱉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정말 트리엔과 프라이어스 영애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그런 짓을 꾸몄을까?

답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트리엔은 그녀가 잘되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고, 클레리아 또한 그런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저 당혹감과 절망감에 빠진 자신이 만들어 낸 억지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누가 내 억울함을 좀 알아 줘.’

잘나가는 공자와 혼담이 오고 갈 꿈에만 부풀었는데 모든 것이 부서지고 말았다.

첸시아가 몸을 웅크린 채 흐느끼던 그때였다.

끼익

문소리에 흘긋 바라보자 레리안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캄스턴 영식!”

첸시아는 허겁지겁 달려가 창살에 매달렸다.

“카, 캄스턴 영식. 와 주셨군요. 영식이라면 아시죠? 제가 아니에요. 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의 애원에 레리안은 눈을 내리깔며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 몸을 뒤로 뺐다.

“엘레나가 괜찮은지 어떤지 묻지도 않는군요? 데포렌 영애.”

그제야 첸시아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진정했다.

“이슬레이터 영애께서는……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셨나요? 별일 있는 건 아니죠?”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뻔뻔하군요. 엘레나가 그렇게까지 아끼고 보살펴 주었는데도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구는 걸 보면. 난 그대가 최소한의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날 보는 순간 사죄의 말부터 꺼낼 줄 알았습니다.”

“……예?”

첸시아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뻔뻔하다니?

사죄라니?

자신은 사죄할 일이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엘레나는 우리의 빠른 조치로 무사합니다.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아 유감이군요. 그간 추하게 뒤로 엘레나를 시기하고 미워했던 거, 모를 줄 알았습니까?”

아냐. 아냐!

그런 적 없어!

난 이슬레이터 영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은 적 없어!

“아니에요! 영식이 더 잘 아시잖아요! 은덕을 베푼 이슬레이터 영애께 제가 어떻게 감히! 제가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그러나 레리안은 동조하는 빛 하나 없이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봤다.

“당신의 가문과 주변에 대한 조사가 들어갔습니다. 일거수일투족 하나까지! 단 하나의 증거만 나와도 끝입니다. 이런 일을 벌일 때 각오는 했겠지만요. 아, 그리고 하녀 중 하나에게 며칠 전 엘레나와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그럴 리가! 난 영애와 언성을 높여 본 적도 없어요! 레리안! 나는 엘레나에게 절대 그런 짓을……!”

“닥쳐.”

다급히 외친 그녀에게 레리안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네 더러운 입에 나와 엘레나의 이름을 올리다니, 제정신이야? 천박한 게.”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레리안의 모습에 첸시아가 벌벌 떨며 창살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그녀는 충격에 사색이 된 채 공포에 질려 그를 바라봤다.

“주제를 알아야지. 얌전히 네 처분이나 기다려라. 양심을 기대한 내가 바보로군.”

차갑게 내뱉고 돌아서는 그의 입가를 타고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까지 몰아세웠으니 재판에서는 더욱 횡설수설하겠지. 이것으로 완벽하다.’

매몰찬 걸음과 함께 그가 나가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은 첸시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우리. 나…… 이제 어떻게…….”

흐려진 그녀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솟았다.

-4권에서 계속

공녀, 치유사로 살다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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