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52)

제28장. 그토록 바라는 사람은…….

다그닥 다그닥

어느 정도나 달렸을까.

세실리아의 말대로 금방 칼리스터 영지에 들어섰고, 거기에 좀 더 들어가자 그의 저택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클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 몇 번 아버지를 따라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 저택이었다.

“응, 나도 오랜만이네.”

클레리아가 묵은 적 없이 들렀다 간 것과는 달리, 에단은 어릴 적 수도에 있는 저택과 이곳을 자주 번갈아 가며 지냈었다. 한 달 중 열흘은 영지의 저택에서 보냈으니까.

그러나 공작가의 후계자 수업과 그 나름의 행보로 영지에 있는 저에 발길이 끊긴 지 어느덧 5년이었다.

간혹 칼리스터 공작이 영지 순찰을 위해 오갈 뿐, 에단 역시 실로 오랜만인 것이다.

“요즘 통 가 보지 못했지?”

“응,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그는 말을 모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점차 가까워지자 저택 앞으로 흐르는 제누아 강의 중류가 아름답게 빛을 반짝였다. 아름답기로 소문 난 제누아 강을 낀 칼리스터 저의 경관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모두 놀라겠는걸.”

서서히 저택으로 진입한 에단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히힝!

그가 중앙 현관의 정문에 말을 세우고, 클레리아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도련님!”

벌컥 문을 열고 나온 노년의 집사가 소리쳤다.

“오랜만이야, 토마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말에서 내리는 에단에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정말…… 정말 에단 도련님이시군요. 어쩜 이리도 늠름해지셨습니까?”

“하하, 세월이 그만큼이나 흘렀는데 설마 그대로이려고.”

장난스레 받아치는 에단과는 달리 집사는 감격을 쉽사리 떨치지 못했다. 그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지켜보는 사람도 느껴질 정도였다.

토마스라 불린 집사는 클레리아 역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안 대대로 칼리스터 가의 집사를 도맡던 일가의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중년의 중후함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하얗게 센 머리가 인상적인 노년의 집사로 변모해 있었다.

“어떻게 연통도 없이 오셨습니까?”

“그게…… 수도로 귀환 중에 황녀 전하의 명으로 갑자기 오게 된 거라.”

“황녀 전하요?”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가 왔는지 살폈지만,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수도로 가셨어. 여기 온 건 나와 프라이어스 영애뿐이야.”

집사의 시선이 그제야 클레리아에게 향했다.

“이분이 그 프라이어스 공녀님이시란 말입니까?”

“오랜만에 만나 군요, 토마스 집사.”

“두 분 다 정말 아름답게 자라셨군요.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의 말에 민망했는지 에단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낯 뜨거운 말은 이제 그만하고, 머물 방이나 좀 안내해 주겠어?”

“예, 당연하지요. 따라오십시오.”

저택에 들어서자 고용인이란 고용인은 다 나온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에단에게 인사했고, 그는 한 명 한 명 가벼운 포옹을 하며 답했다.

‘에단도, 이 사람들도 서로 많이 그리웠구나.’

클레리아는 빙긋 미소 지으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도련님, 공녀님께 방을 안내해 드렸습니다.”

“고생했어, 토마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놀랐을 텐데 역시 당신만큼 신뢰가 가는 사람은 없어.”

에단은 오랜만에 들어선 그의 방에서 갑옷을 벗으며 말했다.

보고를 마친 토마스는 나가지 않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덧 소년의 티를 벗고 늠름히 자란 모습에 탄복하는 얼굴이었다.

“왜?”

편한 옷차림이 된 에단이 그에게 물었다.

“……어릴 땐 늘 어딜 가셔도 제 손을 잡고 가시기 바빴는데, 이제는 제 손은커녕 다른 것도 필요 없으실 정도로 정말 의젓하십니다.”

“하하, 컸으니 당연한 거지. 뭘 그리 새삼스레…….”

웃으며 대꾸하던 에단은 말을 멈췄다.

저를 보고 있는 토마스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음을 봤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바쁘신 아버지를 대신해 내 곁을 지켰던 걸 기억해. 토마스, 당신은 내게 두 번째 아버지나 다름없어. 다 컸으니 어릴 적처럼 손을 잡고 다닐 일은 없겠지만. 그대가 내 곁에서 없는 일은 없을 거야, 고마워.”

“늙은이 눈에서 이제 눈물도 내게 할 줄 아시고. 많이 능숙해지셨습니다.”

“난 몸만 자란 게 아니라고.”

그 말에 ‘허허’ 웃던 토마스가 나직이 다시 말했다.

“프라이어스 공녀님께서도 실로 아주 오랜만에 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분으로 자라셨더군요. 도련님께서 그분의 수호 기사가 되셨다지요?”

“응, 공작가는 서로의 등을 지켜야 하기도 하고…….”

그가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끌었다.

“클레리아는 내가 지키고 싶거든.”

작은 주인을 지켜보던 토마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쉬십시오, 도련님. 필요하신 게 있거나 요깃거리가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응, 고마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토마스의 얼굴에 아버지와도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칼리스터 저는 정말 경관이 좋구나.”

드넓게 펼쳐진 경관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의 조화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런 곳을 아침에 눈 떠 바로 볼 수 있다니.

저택의 위치 하나는 정말 좋다고 클레리아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황녀님은 대체 왜 그러신 거람. 레인 님도 그렇고.”

상극인 두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하나라도 된 양 놀려 대던 것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걸어오는 짓궂은 장난 역시 어찌나 그렇게 잘 통하는지.

‘그런데 레인 님 역시 눈치채고 계셨구나. 케일론에 대해서.’

클레리아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레인이 케일론의 노골적인 호감은 목격했어도, 그의 마음을 클레리아가 확실히 거절했다는 건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정말, 또 놀리시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녀는 단번에 자신을 들어 올려 말에 태우던 에단이 떠올렸다.

‘음… 과거에도 몇 번 그렇게 탔지만 요즘 유독…… 부끄러워.’

그때였다.

똑똑

돌아서자 간편한 차림의 에단이 문을 열고 있었다.

“방은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좋아. 창밖 풍경도 정말 마음에 들고.”

안으로 들어온 그가 곁에 나란히 서서 밖을 내다봤다.

“우리 저택의 풍경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긴 해.”

“하하.”

‘하필 어떻게 딱 맞춰서…….’

클레리아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시선을 돌렸다.

“쉴 거야?”

“응? 글쎄. 뭐, 많이 피곤하진 않은데.”

“그럼 가자.”

에단은 손을 내밀었다.

“저택 구경시켜 줄게. 나도 오랜만이라 좀 둘러보고 싶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넘실거리는 것 같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클레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응.”

* * *

에단은 오랫동안 오지 못했던 집에서 본인의 자취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살폈다. 기억을 더듬어 그가 이끄는 대로, 클레리아는 그를 따랐다.

에단은 여기저기를 보았다.

어린 시절 햇볕이 강하면 틀어박혀 책을 읽던 서재도.

검술을 좋아해 일찍부터 목검을 들고 연습하던 작은 연무장도.

머물 때면 수도에 있는 클레리아와 엘레나에게 편지를 쓰던 방도.

에단은 고용인들이 놀랍도록 잘 관리해 놓은 장소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런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하게 물드는 느낌이었다.

“음…… 이제 마지막으로 그곳에 가자.”

“그곳?”

“내가 이 저택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

그는 그렇게 말한 후, 거침없이 그녀를 이끌었다.

본 영지에 지어진 칼리스터 저는 대단히 큰 편이었는데. 커다란 세 개의 건물이 중간과 각 꼭대기 층에 구름다리로 사이사이를 이어 놓을 정도였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건물 꼭대기에 다다랐다. 사주 경계를 위해 높게 올린 난간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더 가야 해?”

“다 왔어. 힘들었지? 하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을 거야.”

무릎을 짚고 한참 숨을 고르는데 그녀와는 달리 멀쩡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심술이 났다.

“보람 없기만 해봐.”

잔뜩 부은 얼굴로 말하자 에단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 더 심호흡한 뒤 서서히 허리를 편 클레리아는 앞을 바라봤다.

“와.”

난간 밖을 바라보자 방에서 봤던 풍경과는 새삼 또 다른 경관이 펼쳐졌다.

건물을 옮겼기 때문일까.

다른 산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드러나 광활한 들판이 노을을 머금고 반짝였다.

“별로야?”

그러나 클레리아의 반응이 예상보다 밋밋한 듯 에단이 당황해 물었다.

“아냐, 멋져. 단지…….”

클레리아가 민망한 얼굴로 앞에 있는 난간을 가리켰다.

“이거 때문에 사실 많이 보이는 건 아니라서.”

경계를 위해 쌓은 것이다 보니 난간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탓이었다.

물론, 키가 큰 에단 같은 남자에겐 별문제 될 일이 없지만,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클레리아는 높은 난간을 넘어 경관을 감상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도 눈만 빼꼼 내민 채 겨우 살펴본 상태니까.

“큽…… 너 키…… 작구나.”

“우, 웃지 마! 그냥 방에서도 봐도 되는 걸 굳이 이렇게 끌고 올라온 사람이 누군데! 됐어, 돌아갈래!”

결국, 서러움 반 심술 반이 터진 클레리아가 잔뜩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미안해, 화내지 마. 여긴 방에서 보는 거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곳이란 말이야.”

“됐다니까! 그런 거 안 봐도 상관 없……!”

그의 손을 피하려 버둥거리는데, 에단은 간단히 그것을 피해 버리고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

그리고 순식간에 들어 올려 그가 옆에 있는 넓은 난간 위로 그녀를 앉혔다.

“지금 뭐…….”

“클레리아, 나 말고 옆을 봐.”

그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와아……!”

커다랗게 눈을 뜬 클레리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봄에 완전히 접어든 덕에 강줄기 근처를 따라 봄꽃이 만발했다.

굽이치는 줄기를 따라 금빛으로 반짝이는 강 물결.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푸른 녹음에 어우러진 각색의 꽃들까지.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날리는 꽃잎이 장관을 더해 줬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멋지지?”

“응, 네가…… 가장 좋아할 만해.”

풍경을 바라보는 클레리아의 머리칼이 노을빛으로 반짝이며 바람을 따라 굽이쳤다.

“언젠가 보여 줘야지, 보여 줘야지 하면서. 결국, 내가 먼저 이곳에 발길이 끊겼어. 그래도……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야.”

그의 말도.

이 아름다운 장관도.

왠지 모를 벅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클레리아가 나직이 말했다.

“새삼…… 우리가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했구나 싶어.”

“그렇지.”

“그래서 다 안다고 생각했어. 매일 같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함께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그 말에 풍경을 바라보던 에단이 서서히 고개를 클레리아에게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풍경에 시선을 둔 채였다.

“널 따라다니며 봤던 오늘…… 짓궂기도, 조용하기도 한 너를…… 처음 보게 됐어.”

“……클레리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파란 눈동자가 떨렸다.

“누구도 모를 널 알게 된 것 같아 기뻐.”

왜일까.

진심을 말하면서도 이렇게 울컥거리는 마음은.

심장이 아프도록 뛰고, 손발이 떨릴 정도로 차게 식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밑바닥까지 꾹꾹 억눌러 버렸던 그에 대한 마음을.

하지만 마주한 얼굴도, 그의 시선도 견딜 수 없이 너무 부끄러웠다.

클레리아는 시선을 피한 채 무릎에 올린 두 손을 있는 힘껏 맞잡았다.

“네게 그동안 제대로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어. 늘 네가 있어 주는 게…… 너와 함께하는 게 너무도 당연해서.”

“…….”

“널 다치게 하고, 상처투성이가 되게 만들었지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 난 네가 아니면 안 되겠어.”

말을 듣는 내내 굳게 다물어졌던 에단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다른 어느 누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내 곁에 있는 건 너 아닌 다른 누구도 안 될 것 같아.”

왜야. 눈물이 난다.

울려고 꺼낸 말이 아닌데.

너무도 벅찬 가슴이, 제어되지 않는 떨림이.

눈물이 끝내 터져 버려도 좋으니 그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내 옆에 있는 게…… 에단 너였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결국, 클레리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리지 않고는 도저히 이 순간을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잖아.”

응?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서서히 눈을 떠 바라본 그 순간, 에단은 그녀를 끌어당겨 품 안 가득 안았다.

“기다렸어.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어, 클레리아.”

기쁨에 젖어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너무도 벅차서 클레리아 역시 그의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 클레리아. 나도 네 옆이 아닌 곳은 싫어.”

끝끝내 참고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리고 이런 순간이 그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기쁨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바보같이 왜 울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뭐, 죽을 것 같긴 했지만.”

죽을 거?

클레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녀 또한 민망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은 건 마찬가지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는 에단의 얼굴을 보는 건… 근래 처음인 것 같아서 그녀는 따라 웃고 말았다.

“이 풍경 다음에도…… 꼭 다시 보러 오자. 둘이서.”

“응.”

그렇게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산등성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 * *

두 사람은 다음 날 점심 식사 후, 칼리스터 저를 나섰다.

“좀 더 머무르지 않으시고요?”

토마스도, 몰려나온 고용인들도 아쉬운 얼굴이었다.

“미안해, 수도에서의 일을 마냥 놀릴 수는 없어서.”

그 말에 집사는 씁쓸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도련님이 유능한 걸 서운해하면 안 되겠지요.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응,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오도록 할게. 어제 저택을 둘러보다 보니 내가 여길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게 됐거든. 그리고.”

그는 앞에 앉은 클레리아를 다정히 바라봤다.

“다음 방문 때도 외롭진 않을 것 같고.”

쿡!

민망해진 클레리아가 팔꿈치로 찔렀으나 그는 그저 ‘하하하!’ 하고 소탈이 웃었다.

“저희는 늘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윽고 에단의 말이 출발하자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칼리스터 저의 고용인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클레리아가 몸을 바로 하며 중얼거렸다.

“고용인분들은 에단을 무척 아끼는구나.”

“내가 좀 사랑받는 타입이거든. 앞에 계신 레이디에게 받듯이 말이야.”

“그, 그만 좀 해!”

클레리아가 못 말린다는 듯 그를 때리며 버둥거리다 휘청였다.

“으앗!”

“그러다 떨어집니다, 레이디. 말 위에서 칠칠치 못한 행동은 삼가시죠.”

“뭐어!”

에단은 키득거리며 그녀를 더욱 품 안 깊숙이 끌어안았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긴장됐었는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가슴속을 울리는 고동을 느꼈다.

“기분 좋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에단은 달리는 말에 더욱 속도를 올렸다.

“그래도 거리가 멀지는 않아서 금방 도착했네.”

“응, 덕분에 편하게 왔어. 고마워. 에단도 얼른 돌아가서 쉬어.”

“그래, 클레리아도.”

인사를 나누던 에단의 얼굴이 서서히 클레리아에게 다가왔다.

“……?”

서로의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모은 두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잔뜩 얼어 버린 그녀를 바라보던 에단은 픽 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가볍게 클레리아의 뺨에 키스하고 거리를 벌렸다.

“들어가.”

쿵 쿵 쿵 쿵

멀어지는 그를 보며 멍하니 넋을 놔 버린 클레리아의 심장 고동만이 귓가를 메아리칠 뿐이었다.

털썩

걸터앉은 침대가 출렁였다.

“아가씨?”

돌아온 클레리아가 좀처럼 상태가 이상해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녀는 에단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리스, 나 에단이 너무 좋아. 정말 너무너무.”

그런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아리스였다.

* * *

“음…….”

“흠흠흠.”

거의 열흘 만에 돌아온 작은 주인인 에단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어릴 때 이후로는 하지 않던 콧노래를 흥얼거리질 않나. 연신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질 않나.

집사인 안드레는 그의 변화에 당혹감을 느꼈다.

“저, 도련님?”

“응?”

“무슨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임무를 다녀오시면 늘 바로 씻고 주무셨는데 오늘은 어딘가 기운이 넘치시는 모습이군요.”

“내가 그랬나?”

남 일처럼 답하는 와중에도 미소는 여전했다.

“안드레, 돌아오는 길에 영지에 다녀왔어.”

“……?”

안드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몇 년간 에단은 통 영지에 내려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안드레가 놀란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의 형인 토마스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는 건강해. 걱정하지 마.”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에단이 덧붙였다. 그러자 안드레는 빙긋이 웃었다.

“예,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내게 좋은 일이 있었거든. 당분간 얼빠진 얼굴 해도 좀 이해하고. 목욕물 좀 받아 주겠어?”

좋은 일이라고?

궁금했지만, 안드레는 고개를 숙였다.

“예,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짐을 정리하는 내내 에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질 줄 몰랐다.

저택 옥상에서 간절한 마음을 전하려 떨던 클레리아의 그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투툭

그가 행복감에 젖어 있던 그때, 뭔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에단이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열리자마자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그의 방 안에 무릎을 꿇은 채 나타났다.

칼리스터 가에서 제국 사방에 뿌려놓은 눈이자 소식통인 까마귀 중 하나였다.

“돌아오시길 꼬박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이지?”

“엘라단 아카데미에 관련된 일입니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 댔다.

“말해 봐.”

그는 곧 에단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듣던 와중, 그가 기묘하게 얼굴을 구겼다.

“뭐?”

매섭게 되묻는 말투에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다시 말했다.

“추적 중 데포렌 남작 가가 몇 번 언급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와중에 이슬레이터 역시 잠깐 언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방 남작인 데포렌이 엘라단 사건에서 언급된 것도 모자라 이슬레이터 공작 가의 이름까지 거론됐다고?

잠깐일 뿐이지만, 가벼이 여겼다간 후에 무슨 걸림돌로 변모할지 몰랐다.

“알겠다. 이번 보고는 확인되기 전까지 절대 새어나가서는 안 돼. 폐하께도.”

“예, 알겠습니다.”

그는 방에 들어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도약해 모습을 감췄다.

열렸던 창문을 닫는 에단의 얼굴이 어두웠다.

* * *

똑똑똑

“들어와.”

퉁명스러운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선 하녀가 상기된 얼굴로 알렸다.

“아가씨, 칼리스터 공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 칼리스터? 에단이 왔어?”

하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클레리아가 치유사가 된 후 아예 발길을 끊었다 싶었던 에단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감격스러우면서도 괘씸했고, 미우면서도 기뻤다.

“안으로 모시도록 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최대한 격한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말했다.

끼익

곧 에단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엘레나.”

당장에라도 달려가 예전처럼 목덜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클레리아 때문에 자신을 등한시한 시간이 얼마던가. 사과한다 해도 분이 풀릴 만큼 충분하게 받은 다음 화를 풀어 줄 테다.

“오랜만이구나? 에단. 이슬레이터 저에 발을 끊은 줄 알았는데?”

쀼루퉁한 말에도 에단은 옛날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해 줬으면 좋겠어.”

“왜 별채에서 지내? 저택을 두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네가 전처럼 내게 신경 썼다면 왜 그랬는지 진작 알았겠지.”

흥, 이제야 신경 쓰는 척하는 거야? 모질게 굴었던 거 눈물 쏙 뺄 정도로 후회하게 해 주겠어.

여전한 모습을 보며 에단은 낮은 한숨을 소리 죽여 내뱉었다.

“엘레나, 혹시 데포렌 남작가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다음은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 엘레나는 인상을 썼다.

“뭐? 그딴 걸 왜 물어?”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를 뵙고 오는 길인데 각하는 모르시는 눈치셔서 말이지.”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중요한 일이야.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줘, 엘레나.”

원하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음에 가증스럽다는 듯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래, 요즘 내가 자주 어울리는 영애가 데포렌 남작 영애야. 문제 있어?”

그녀의 대답에 에단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뿐이야? 어울리는 것뿐?”

순간 엘레나는 마음 언저리가 뜨끔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저런 걸 묻지? 느닷없이 찾아와서? 사과하는 것보다도 저딴 질문이 중요하다는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엘레나는 더욱 쏘아붙이는 것으로 속내를 감추기로 했다.

“그럼 그 외에 뭘 하는데? 너와 클레리아가 날 떠나지 않았다면 그런 가문과 어울릴 일도 없었을 것을 이제 와 따지고 드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앙칼진 말투에 에단이 인상을 썼다.

“그냥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어울리는 것뿐이라면 알았어.”

“참 뻔뻔하구나. 클레리아랑 어울리더니 그렇게 철면피가 된 거야? 이렇게 오랜만에 찾았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클레리아 그 계집애가 널 다 버려 놨어.”

그 말에 순간 그의 얼굴이 무섭게 싸늘해졌다.

내키는 대로 내뱉으며 힐난하던 엘레나 역시 그 표정을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말이 지나쳐, 엘레나. 클레리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거 알잖아.”

그러나 그런 기세에 억눌릴 그녀가 아니었다.

엘레나는 더욱 목에 핏대를 세워 비난했다.

“아니! 걔가 아니었으면 네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약혼을 깰 리도 없다고!”

에단은 가만히 그러쥔 주먹에 힘을 실었다.

“엘레나, 클레리아에 대해 말 가려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날 위해서.”

“…….”

순간 엘레나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뜻이야? 널 위해서라니?”

기분 나쁜 예감이 스물스물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묻잖아! 설마 너희 둘……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그래?”

생전 처음 보는. 전혀 알지 못한 에단의 낯선 눈이 그녀를 향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어째서?

“엘레나, 난 오래전부터도.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나 클레리아뿐이었어.”

엘레나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