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역시 나는……. 그러니까 당신도 그러길 바랄게.
다음 날, 아침부터 블린트 저는 분주했다.
다행스럽게도 플로릭은 많이 지친 기색이었지만, 의식을 찾았다.
다만 그는 내상으로 위에 고인 피 때문에 토악질을 해댔고, 레인의 치유를 받을 때마다 구토를 반복했다. 혈액석의 부작용으로 심한 어지럼증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오늘 대공 각하의 혈우병 인자를 전부 치환할 겁니다. 치유사도 힘들지만 그만큼 환자의 몸에도 무리가 가는 일이니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 겁니다.”
레인의 당부에 플로릭은 지친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방법이 성공한 후에도 각하께는 이후 10년 정도의 시간만이 보장될 겁니다. 워낙 인자가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세서 그 후에는 반드시 또다시 발병할 거예요. 그때는…… 저희 치유사들도 손을 써 드릴 수 없습니다. 탈리니아스 일가가 쓴 흑마법의 여파는 저희도 해결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지금 치유를 포기하셔도 얼마 못 버티실 거고요.”
클레리아의 침통한 말에도 플로릭은 웃었다.
“그게 제가 짊어져야 하는 대가겠지요.”
그는 평온하게 본인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럼 치유 시작하겠습니다.”
‘어…….’
클레리아는 몽롱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분명 플로릭의 방에 있던 것 같았는데 눈을 뜬 곳은 배정받은 방이었다.
놀란 클레리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핑 하고 머리가 돌아 순간 침대 난간을 비틀어 쥐었다.
고개를 몇 번 털고, 좀 괜찮아지자 그녀는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해가 져 한밤중이었다.
‘대공님은? 설마 나 중간에 쓰러졌나? 그래서 치유에 실패한 거야?’
등골이 오싹해져 서둘러 나가려 할 때, 탁자 위에 놓인 편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천천히 펼쳐 보니 레인이 메모가 쓰여 있었다.
[대공님의 인자 치환은 잘 마무리됐음. 넌 강한 힘을 순식간에 쏟아 내느라 후유증으로 혼절했어. 임무는 완수야! 푹 자라고 에단 경까지 못 들어가게 했으니까 괜히 혼자 놀라서 울지나 말라고, 하룻강아지! 수고했어!]
털썩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클레리아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엄청난 힘을 한꺼번에 방출하며 잠깐씩 정신을 잃었던 기억이 났다.
레인이 우려하며 불렀었고, 시도 세 번째에 엄청난 두통이 있던 걸 떠올렸다. 그 후는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아마도 그때 혼절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대공님을 제대로 치유했다니.’
그녀는 레인의 쪽지를 가슴팍에 묻은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온종일 곤히 잠만 자며 푹 쉬게 된 것 같았다.
한결 나아진 몸을 느끼며 클레리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둥그런 보름달이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밝게 느껴졌다.
지끈
그녀는 살짝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조금 걸을까. 아직 살짝 두통이 남은 것 같은데.’
그녀는 겉옷을 걸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
“하아…….”
바람을 쐬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비록 황량하긴 했지만, 자잘하게 덮은 잔디의 감촉이 좋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레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프라이어스 영애. 이제 괜찮으십니까?”
천천히 돌아서자 놀란 얼굴의 케일론이 서 있었다.
“백작님…….”
“갑자기 그렇게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서 계신 걸 보니 괜찮으신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 아이문트 대공의 치유는 잘 끝났습니다. 대공께서도 더는 통증을 느끼지 않으시고요.”
“그런가요? 정말 다행이네요.”
“괜찮은 걸 확인하시자마자 소고기 타령을 해 대셔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릅니다. 공자님이 화내시는 걸 중간에서 막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하하.”
안도한 탓일까. 곧잘 말을 쏟아 내는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백작님.”
“예?”
“결혼해 달라고 하셨던 청……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의 진심이…… 정말 거짓 하나 없는 그 순수한 마음과 진심이 느껴져서 기뻤어요.”
그 말에 케일론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제 청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아뇨.”
생각보다 즉답이었고, 답을 들은 케일론 역시 짐작했는지 낙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 백작님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조금도, 더 고민해 보실 필요도 없는 정도입니까?”
클레리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 백작님께서 너무 좋은 분이시라 친구로는 지내고 싶지만 그건 제 욕심인 거죠. 어렵게 마음을 정하시고 청해 주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거 압니다. 그러니 저는 백작님의 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케일론은 정말로 완전히 거절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인 듯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케일론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클레리아는 있는 힘껏 눈물을 참았다.
거절하는 주제에 운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일까.
그녀는 최대한 밝게 웃었다.
“다시 한 번 그 마음……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마워요, 케일론. 그때도, 이번에도 날 순수하게 좋아해 줘서. 아껴 주려 해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때 알아 주지 못하고,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당신의 소중한 마음에 그저 적당함으로 대하는 건. 그건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니까. 그러니 행복하게 함께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분을 만나길 빌게요. 진심으로.’
케일론은 씁쓸히 웃으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끝까지 클레리아를 향한 예를 지켰다.
“영애께서도 꼭 그 마음 보답받으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탁
방으로 돌아온 에단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멍청이 같으니…….’
몇 번이고 클레리아의 방에 쳐들어가고 싶은 걸 억누르는데 창밖에 그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작정 달려나갔는데 하필 백작이 먼저 나와 있을 줄이야.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영 심상치 않음에 결국, 나가서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추한 짓거리를 해 버렸다.
마나로 청각을 키워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그런데…….
케일론이 클레리아에게 다시 한 번 회유했으나 어딘가 이미 그도 나올 대답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뇌리에서 계속 울려 대는 클레리아의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말. 그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 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그녀가 케일론을 거절했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말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기대해도…… 되는 걸까?
에단은 다리가 풀려 쓰러지듯 침대에 앉아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 * *
아침이 밝고, 플로릭은 식사로 스테이크 두 덩이를 해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오후에는 바모른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가족들의 등쌀에 더 못 먹을 것을 예상했는지 더욱 집요하게 소고기를 외쳐 댔다.
“저희 철부지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백작 각하.”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하신 모습이 보기 좋으시군요. 다 치유사님들 덕분입니다.”
케일론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새벽에 그런 거절을 당해놓고도 그 누구의 앞에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평상시와 똑같이 다정한 눈빛과 표정으로 일관했다.
‘흐음, 에단 경도 좋은 사람이고 그의 편을 들고 있긴 하지만, 케일론이란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레인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상한 관절은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당분간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시면 그때는 보조 지팡이를 꼭 짚고 다니셔야 해요. 그리고 휠체어를 벗어나시기 전까지는 너무 무거운 식사는 금물입니다. 살이 찌기도 하고 관절에 무리가 가니까요.”
클레리아가 당부하자 라세르가 옳다구나 하며 플로릭을 채근했다. 돌아가면 소고기부터 끊을 거라고 외치는 그의 말에 대공은 울상을 지었다.
어찌 됐든 치유는 성공적이었고, 후유증이나 관련된 사항도 잘 일렀으니 이번 임무는 잘 마무리된 셈이었다. 이번 일로 바모른 국과 세듐 광산 건의 일도 좀 더 좋은 쪽으로 협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함께 한 오찬이 끝나고, 플로릭과 라세르는 호위들과 타고 왔던 화려한 육두마차를 끌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치유사님들, 초반에 저질렀던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치기 어린 마음에 나온 뭣 모르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꾸벅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인사하는 모습에 레인은 팔짱을 끼고 끄덕였고, 클레리아는 손을 저었다.
“당장 내일모레 죽어도 상관없을 몸을 10년이나 살게 해 줘서 고맙소. 완치 못 했다고 행여 자책하지 말아요. 난 그대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아니까.”
헤어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던 모습의 플로릭은 이별의 시간이 와서야 조금 믿음직한 대공의 모습으로 말했다.
그가 그렇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여전한 그 소고기 타령으로 내 신하들을 곤욕스럽게 했다지? 몸도 비실비실하면서 당최 고기는 뭘 그리 찾는지.”
나른하고 고혹적인 목소리.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시선이 향한 곳에서, 하얀 승마 바지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 전하!”
“세실리아!”
모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녀가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천천히 플로릭의 마차로 다가왔다.
“많이 늙었네, 플로릭.”
“넌 여전하네, 세실리아.”
“나야 더욱 농염해졌지. 내 외모가 어디 가나.”
도도한 말에 플로릭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라세르는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연상녀가 풍기는 고혹미에 정신 못 차리는 얼굴이었다. 얼이 빠진 그를 바라보며 세실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비를 안 닮아 괜찮게 생겼구나. 리다가 구제해 준 걸 영광으로 알고 살아, 플로릭.”
“암, 당연하지. 리다는 내 인생의 은인인걸.”
타국의 대공에게 저렇게 허물없이 말하는 모습에 세실리아의 대단함이 여실히 묻어났다. 결혼할 때 진심을 담아 축하해 줬다더니 정말인지 프롤릭은 ‘헤헤’ 바보 같은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자.”
그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던지듯 플로릭의 품에 안겼다.
“리다가 잘 체하잖아. 특별히 만든 소화제랑 내가 만든 발광석 좋아했으니까 몇 개 만들어 넣었어. 가져다주도록 해.”
“리다가 정말 좋아할 거야! 고마워!”
“당연한 소릴.”
세실리아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서둘러 돌아가셔야 충분한 휴식을 취하실 테니 대공을 서둘러 배웅해 드리도록 해라.”
그 말에 이제 정말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처음 왔던 장엄한 모습으로 플로릭의 마차와 라세르가 멀어졌다. 그들을 배웅하러 나가는 케일론의 뒷모습도 점차 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세실리아가 클레리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안 돌아갈 거니? 갈 길이 멀다. 서두르자.”
“가, 같이 돌아가시려고요?”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세실리아의 등장에 환하게 웃을 수 있던 클레리아였다.
* * *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으로 수도로 귀환하는 길은 조금 부산스러워졌다.
황녀가 움직이는 것임에도, 고작 간추린 호위 몇 명만을 데리고 나타난 까닭이었다.
엘라단 사건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큰일이라도 나면 어쩔 뻔했느냐는 클레리아의 야단에 세실리아는 성가신 얼굴을 했다.
“전하의 몸에 위해가 가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전하께 변고라도 생기면 정말 못 견딜 겁니다. 신중해 주세요.”
클레리아의 말에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자 세실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팔목이 긴 오페라 글러브로 옅게 남은 흉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유사들이 며칠을 매달렸으나 엘라단 사건 때의 상처는 그 흔적을 결국, 남겨 버렸다. 치유사들 탓이 아니란 걸 알기에 세실리아도 받아들였지만, 클레리아가 이렇게 상심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머, 멀쩡히 왔으니 된 거 아니냐. 오냐오냐하니 말이 많다. 언제부터 내 앞에서 그리 말이 는 게니. 줄여라.”
퉁명스레 내뱉어도 황녀의 말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너무 충동적인 행동에 할 말이 산더미지만 일단 무탈하게 만났으니 된 거라 생각하며 클레리아도 더 채근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말을 몰고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 전용 마차로 움직이셨다면 돌아가시는 길은 좀 더 편하게 모셨을 텐데.”
클레리아의 말에 세실리아가 빙긋 웃었다.
“그런 마차를 끌고 왔다면 번거롭고 눈에 띄어서 플로릭도 제때 못 만났을 거다. 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거지. 다 얻을 수 없지 않겠니?”
그녀의 담담한 말에 클레리아 역시 동의하듯 미소 지었다.
‘정신 나간 여자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깜짝!
옆에 앉은 레인이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하는 말에 클레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하! 하하하. 황녀 전하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새삼 꿈 같아서요!”
“원, 녀석도.”
레인의 옷소매를 거칠게 끌어 내리는 걸 눈치 못 챈 세실리아는 나름 만족한 것 같았다.
“흐음…… 치유사 일이 다 그렇긴 하겠다만, 이번 일도 만만치 않았겠구나.”
“네,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어서 레인 님도 저도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라서 잘 넘길 수 있었어요.”
그 말에 세실리아는 생각이 많아지는 얼굴을 했다.
“왕의 방계이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플로릭에게 발병하다니. 옛날부터 그랬지만, 녀석은 참 운이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어딘가 쓸쓸히 느껴졌다.
클레리아 또한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플로릭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뭐, 한차례 무사히 잘 지나갔으니 됐고.”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세실리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블린트 저에서 별일은 없었느냐?”
클레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특별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뭔가 아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흐응’ 하는 콧소리를 냈다. 이어 그녀의 눈동자가 옆에 앉은 레인에게 향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저를 떠나올 때 널 보는 블린트 백작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던데.”
“……!”
애써 떠나오며 그의 시선을 피했는데 황녀는 그걸 다 눈치챘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잘못 생각하신 듯합니다. 백작님께서 굉장히 친절한 분이시긴 했지만요.”
“그래? 세릭스, 네 생각도 그러하냐?”
“흠흠, 전하의 의견에 저도 조금은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레인?’
깜짝 놀라 홱 돌아봐도 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대공님을 치료하는 동안 백작님께서 하룻강…… 아니, 클레리아에게 꽤 호감 가득한 행동을 하셨었죠.”
“호오, 그래? 우리 클레리아가 그런 쪽엔 좀 무딘 모양이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칼리스터 경은 말이 없더냐? 곁에서 다 지켜봤을 텐데.”
순간 에단의 이야기에 클레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어쩐지 케일론의 이야기 다음에 바로 나오는 그의 이름은, 그녀를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만들었다.
“뭐 어딘가 불쾌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별 반응 없었지요? 아마?”
레인이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
“그게 그러니까!”
세실리아와 레인의 몰아치는 장난에 클레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미해져 갔다.
“하여간 정말…….”
짓궂게 웃은 세실리아는 커튼을 열고 밖을 향해 말했다.
“칼리스터 경?”
“예, 전하.”
“아직 블린트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지?”
“그러합니다.”
“여기서 세르비안 지방으로 우회하면 너희 영지가 아니더냐?”
에단의 눈썹이 꿈틀댔다.
세실리아의 꿍꿍이가 뭔지 알 수 없음에서였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내 너희 영지에 아주 훌륭한 온천이 많다 들어서 말이다.”
“……?”
에단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상관도 하지 않고, 부채로 마차 창틀을 탁탁 쳤다. 그러자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내 특별히 너희에게 포상 휴가를 줄 터이니 프라이어스 영애와 칼리스터 경은 근처 세르비안 지방의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거라.”
“……예?”
느닷없는 내리는 명에 클레리아가 이해도 하기 전, 세실리아는 문을 열고 그녀를 등 떠밀었다.
“저, 전하?”
“마차는 내가 써야 하니 넌 말을 타고 가렴.”
“하, 하지만 전하! 고생은 리암 경과 레인 님도 함께 하셨는걸요. 그런 포상 휴가라면 당연히 두 분도 함께!”
“이 녀석은…….”
레인에게 부채를 향한 세실리아는 잠시 고뇌했다. 클레리아를 놀리느라 잠시 죽이 맞은 건 사실이지만, 딱히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하기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피부 관리를 할 생각인데 이 녀석에게 맡겨 볼 요량이다.”
“예에?”
황녀보다 더 질색하며 되물은 건 오히려 레인이었다.
세실리아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닥쳐라, 죽기 싫으면’이라고 속삭였고. 레인 역시 입을 댓발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다녀와. 이번에 더 힘을 많이 쓴 것도 너니까.”
“어머, 그랬니? 내 그럴 줄 알았다. 선배라는 녀석이 나서서 리드는 못할망정. 쯧쯧.”
그러자 레인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웅얼거렸다.
“전하. 거, 두 사람 같이 밀어주고 있는데 적당히 하시죠.”
그러나 세실리아가 누구던가.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다시 입을 소리 없이 오므렸다.
‘너야말로 클레리아 없었으면 경을 쳤다.’
그런 살벌한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당황한 낯빛의 클레리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곁에 있던 리암이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전하, 저도 온천욕 좋아하는데…… 임무도 성실히…… 임했습니다만.”
‘헤헤’ 웃는 그를 보고 레인과 세실리아의 표정이 동시에 싸늘해졌다.
“닥쳐, 리암 경.”
“입 다물라, 아켈리엔 경.”
동시에 터져 나오는 말에 ‘히잉.’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어깨를 늘어트리고 다시 마차 뒤로 갔다.
“다들 나만 미워해.”
세실리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녀인 내가 특별히 허하는 거니 그렇게 떨 거 없어. 가서 피로나 좀 풀고 오렴.”
이윽고 마차 문이 닫혔고, 다른 호위들과 함께 그들은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멀어져 버렸다.
갑작스레 마차에서 내몰린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진짜 가 버리는 그들을 보고 클레리아가 입을 벌린 채 황망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정말 우리 버리고 그냥 가 버리셨어.”
“대체 무슨 바람인 건데?”
황당한 건 에단도 마찬가지인 듯 기가 막힌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봤다.
“어, 어떡해? 에단?”
“나 참, 진짜. 심보 고약한 건 정말…….”
세실리아 흉을 보려던 그는 옆에 클레리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하는 수 없나.’
그는 잠시 고민하다 클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칼리스터 저택에 가서 잠시 머물고 가자.”
“그래도 되는 걸까?”
그녀의 불안한 물음에 에단은 씩 웃었다.
“별수 없잖아.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 하신 특별 명에 감히 누가 토를 달려고?”
“…….”
그러나 마차에서 느닷없이 내쫓긴 것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클레리아의 얼굴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서 마차를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은 그녀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은 에단은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말 위에 앉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클레리아는 잠시 황녀에게 떠밀린 충격에서 벗어났다.
에단의 품에 안기듯 말에 탄 클레리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세실리아 님도, 레인 님도. 속을 모르겠어, 정말.’
“가실까요? 프라이어스 영애?”
“……네.”
장난스레 묻는 에단의 말에 클레리아가 웃었다.
* * *
“에효, 이렇게까지 자리를 만들어 줬는데. 설마 에단 경이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죠?”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녀석이 멍청하니까.”
“허…….”
레인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에단 경을 멍청하다고 하시는 분은 전하가 처음이십니다.”
“멍청한 걸 멍청하다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 그 녀석은 잘난 체만 하지 정작 제일 중요한 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는데. 내게 부리는 패기 절반만 따라가도 좋았을 것을.”
세실리아가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을 본 레인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흠, 과연 그럴까요. 황녀 전하께서 블린트 저에 함께 계셨다면 의외의 볼거리에 좋아하셨을지도 몰랐겠네요.”
그 말에 세실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게 무슨 소리니? 에단이 좀 달리 반응이라도 했다는 거냐?”
그 말에 레인은 거만히 웃으며 팔짱을 꼈다.
“뭐, 옆에서 본 바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의 말에 세실리아가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한번 고해 보아라.”
“제 이야기 비쌉니다, 전하?”
“또, 또. 경을 치려고?”
그녀의 말에 레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곧 열린 레인의 입에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