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52)

제26장. 예기치 못한 위기.

에단의 방에서 나온 후 대공의 방을 찾았다. 잠시 휴식시간인지 얼핏 보이는 대공의 방에 레인은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대공이 그녀를 불렀다.

“치유사님?”

“네? 무슨 일이신가요? 대공님?”

“너무 침대에 누워만 있어서 갑갑한데 바람을 좀 쐬면 안 될까요? 다른 치유사님도 한 시간 후에 다시 시작하자고 하셨고요.”

한 시간이라고 해 봤자 와서 다시 치료 준비를 마치려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다.

클레리아가 난감해할 때 뒤에서 ‘끼릭 끼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모시고 가죠.”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돌아보니 어느새인가 케일론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작은 휠체어를 끌고 대공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심하고 편히 계십시오.”

가볍게 플로릭을 들어 앉힌 케일론이 휠체어를 밀었다.

잘 다녀오겠거니 싶어 한쪽으로 비켜서는데 케일론이 말했다.

“프라이어스 영애께서도 함께 가시죠.”

“네, 그러시죠!”

“……예?”

맞장구치는 플로릭의 말에 순간 그녀는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왜 나까지…….’

끼릭 끼릭

천천히 밀리는 휠체어에 탄 플로릭이 기분 좋은 듯 환하게 웃었다.

밀어주는 케일론을 따라 클레리아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몇 주째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지라 정말 기분 좋군요. 라세르도 힘 좀 키워서 백작님처럼 절 좀 이렇게 산책시켜 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제 겨우 열여섯이지 않습니까. 더 나이를 먹으면 저보다도 건장해지실 겁니다.”

케일론의 말에 클레리아가 묘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라세르가 애써도 왠지 신체 조건은 에단과 케일론을 따라오기 힘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본인을 빗대는 건 좀 잔인하지 않을까요, 백작님.’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백작님, 치유사님.”

고용인이 다가와 그들을 불렀다.

“뭐지?”

“치유사 레인 님께서 후반 치료를 하신다고 대공 각하를 모셔오라십니다.”

그 말에 플로릭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즐거운 시간은 늘 너무 빠르군요.”

“다음에 또 시간이 나면 산책시켜 드리겠습니다.”

플로릭이 환히 웃으며 집사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산책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대공을 따라 자리를 피하려는데 케일론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바쁘십니까?”

“……네. 할 일이 남아서요.”

“그럼 조금만 미뤄 주십시오.”

에단이 불쾌해하는 것 같고, 그녀 역시 편치는 않아 피하려는데 케일론이 자꾸만 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미룰 수 없다면요?”

그녀의 말에 잠깐 케일론의 얼굴에 낙담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는 얼굴을 굳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저택의 주인으로서 청합니다. 시간을 내주십시오, 프라이어스 영애.”

처음 듣는 딱딱한 그의 말에 클레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반칙이잖아!

두 사람은 얕게 황색 잔디가 깔린 자리를 천천히 걸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거 아닌가요?”

결국,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클레리아가 물었다.

“예, 그것이…….”

모호한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케일론은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는 뭔가 굉장히 고심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얘길 꺼내려고?’

침묵이 길어지자 초조함은 더욱 커졌다. 에단이 이 모습을 볼까 봐 걱정도 됐다.

역시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케일론이 그녀를 바라봤다.

“영애, 제가 영애를 처음 본 건 시합 때 순위가 결정 나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스타디움에서요.”

‘그 이야길 지금 왜?’

“칼리스터 경을 응원하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눈이 부셨죠. 도저히 그냥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익히 소문으로만 듣던 당신을 그때 처음 제대로 봤죠. ……영애는 제가 본 여성분들 중 제일 아름다우셨습니다.”

입술이 벌어지고, 마주 잡고 있던 손이 차게 식었다.

케일론은 난생처음 보는 붉어진 얼굴로 클레리아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영애가 제 영지에 오신다고 들었을 때 기뻤습니다. 정말 뛸 듯이요. 만나 뵙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그의 까만 동공이 무게감 있게 스르륵 그녀를 향했다. 이제는 정말 터져 버릴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이었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혼을 전제로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숨이 막혔던 것 같다.

그의 올곧은 눈빛이.

미세하게 떨면서도 진심을 분명히 전달하려는 그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꽉 쥐어진 두 주먹이.

그의 행동 모든 것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래서 숨이 막혔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신다면 목숨 걸고 그대를 지키겠습니다.”

왜…… 왜 나를 위해 그런 말까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함께 점차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냥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던 것을 그렇게 굳이 날 구하러 왔었어요?’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오던 날카로운 검날이. 무너지며 빛을 잃고 흐려지던 두 눈동자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영애?”

‘나 때문에 그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죽었으면서… 어떻게 목숨을 걸고 날 지키겠다는 말에 내가 기뻐하겠어요. 당신은 이미 나 때문에 이미 한 번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결국, 클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란 케일론도 점차 얼굴이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기뻐서 우는 건가 싶었지만, 달랐다. 서럽고 애처롭게 떨리는 두 어깨가, 아무리 봐도 청혼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의 반응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케일론이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프라이어스 영애, 왜 그러십……?”

그 순간 누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칼리스터 경?”

그가 섬뜩한 얼굴을 하고 클레리아를 끌어당겨 뒤로 감췄다.

“……에단?”

“뭘 하신 겁니까?”

살기 그득한 목소리에 케일론이 멈칫 놀랐다. 그저 단순히 묻는 말일 뿐이었는데도 날카로이 벼려진 검이 목 언저리에 닿는 듯했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살짝 물러섰다.

“영애와 내 문제니 칼리스터 경은 잠시 물러나 있어 주면 좋겠군요.”

그의 말에 서슬 퍼런 에단의 눈이 케일론을 향해 매섭게 번뜩였다.

“무엇을 했냐 물었습니다.”

“간섭이 지나치군요. 물러서십시오.”

케일론이 그를 내치려 몸을 내밀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검을 뽑겠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하십시오. 뭐라 하셨습니까?”

“여긴 블린트, 내 영지요. 여기서 검을 뽑겠단 말입니까? 그런 경솔하기 짝이 없는 말을……!”

“뭐라 지껄였기에 클레리아가 우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그야말로 광기에 휩싸인 에단의 모습에 케일론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살기를 뿜어 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단! 그만해! 백작님이 그러신 게……!”

클레리아가 다급하게 그를 붙들어 말렸다. 살기 등등한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에단, 제발!”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가 닿았던 걸까. 광기에 휩싸인 것 같던 에단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방금 전의 기세는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그와 케일론 사이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창하던 순간이었다.

“치유사님! 치유사님!”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몰려나와 클레리아를 찾았다.

“왜 그러시죠?”

급히 눈물을 훔친 그녀가 묻자 사색이 된 고용인이 말했다.

“위급 상황입니다. 레인 치유사님과 대공 각하께서……!”

목덜미가 싸늘해짐을 느끼며 클레리아가 달렸다.

“레인 님!”

숨을 헐떡이며 플로릭의 방에 다다랐을 때, 끔찍한 광경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클레리아!”

언제나 위급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레인이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침대 위의 플로릭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온몸에 시커멓고 붉은 멍들이 크게 번져 있었고 흰자위의 핏줄은 모두 터져 있었다. 코와 입,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왜……?”

“인자 치환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클레리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서둘러 플로릭의 가슴팍에 손을 대 힘을 흘려 넣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때마침 들어오던 라세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플로릭을 발견했다.

“아, 아버지!”

하얗게 질린 그가 흡사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

“라세르 공자님을 바깥으로 모시세요! 응급 상황이니 보조 인력을 뺀 나머지 인원은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버지! 아버지!”

놀란 라세르가 발버둥 치자 리암과 에단, 케일론이 급하게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지금 당장 혈액 응고제와 수액 준비해 주시고,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혈액석을 가지고 오세요.”

혈액석이란 말에 흠칫 놀란 고용인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움직였다.

“클레리아, 이 상태면 혈액 응고제도 대량으로 써야 할 텐데 함부로 썼다가는…….”

“알아요, 그러니 힘을 계속해서 일정하게 흘려서 이상이 생기는 곳을 일일이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요.”

경증의 혈우병 환자는 피가 멎지 않을 시 약간의 응고제로 처치할 수 있지만, 플로릭 같은 중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렇게 심한 다량의 멍과 출혈이 있다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당장 출혈부터 막지 않으면 막대한 혈액 손실 때문에 죽음에 이를 게 분명했다.

“관절 기능이 거의 바닥이나 다름없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레인 님?”

“모르겠어. 준비를 마치고 다시 힘을 흘려 넣는데 갑자기…… 이제까지 치환했던 인자들에 변형이 오더니 급속도로 원래 발병 인자로 돌아갔어. 그러면서 갑자기 그 수가 급증했지. 마치 정상 부분까지 먹어 치우는 것처럼 말이야.”

“그럴 리가…….”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잡아낼 수조차 없었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의식을 잃은 플로릭은 창백해져 있었다.

그때 나갔던 고용인이 응고제와 혈액석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단 수액에 혈액석 가루를 섞어 투여해 주시고, 그 후 레인 님과 제가 검진하면서 살피는 것으로 해요. 지금 당장은 출혈이 많아서 공급부터 하는 게 맞아요. 그 후 바로 응고제 정맥 주사 준비해 주세요.”

“클레리아…….”

레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혈액석은 위중한 환자에게만 쓰는 물건으로, 과다 출혈인 환자에게 쓰면 혈액이 자가 복제되어 잃었던 피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신 단기간의 혼수 상태, 기억 상실,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 등의 부작용이 있기에 정말 위급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극약 처방이었다.

치유 중에 이웃 나라의 대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어떻게 될까.

도우려던 의도와 그간의 노력은 수포가 되고. 무엇보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플로릭의 죽음을 똑같이 맞게 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힘드시겠지만, 레인 님. 버텨 주세요. 그리고 고용인분들, 긴 밤이 될 겁니다. 깨끗한 수건을 최대한 준비해 주세요. 피가 완전히 멎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이미 일반적인 의사였다면 진작 포기했을 거고 그랬다면 프롤릭은 한 시간도 채 못 돼 숨을 거둘 상황이었다.

치유사였기에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버릴 수는 없었다.

“알았어.”

클레리아와 레인의 불안한 눈빛을 받으며 노란 수액 속으로 핏빛 혈액석 가루가 섞여 들었다.

* * *

레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지평선 위로 점차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하루 만에 파리해진 안색은 그가 지난밤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그대로 보여 줬다.

레인과 달리 클레리아는 제법 나쁘지 않은 얼굴로 플로릭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밤이 어떻게 지나가 버린 건지도 모르겠군.’

방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불안함이 가득한 라세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아, 아버지는…….”

밤새 울기라도 한 건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에게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세르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왔다.

“아버지이.”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플로릭의 상태는 너무 끔찍했으니까.

원래 피부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커다란 멍에 뒤덮여 있었고, 눈, 코, 입뿐이 아닌 귀에서까지 피를 철철 흘렸다. 병이 발병해 앓던 몇 년 동안에도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을 게 분명했다.

‘아직…… 아버지를 잃는 게 너무도 두려운 아이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리아가 나직이 말했다.

“가장 위험한 고비는 끝났습니다. 다행히 대공 각하가 잘 버텨 주셔서 일단 상황은 안정된 상탭니다. 그러나 치료했던 인자가 한 번에 원래대로 돌아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사이 케일론이 들어와 라세르에게 그만 나오기를 권했다.

아버지를 두고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는 묵묵히 그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레인 님도 가서 숨 조금 돌리세요.”

“너만 두고 어떻게 가.”

“그러셔도 돼요.”

너무도 완고한 시선에 레인이 잠시 주춤하며 말하길 머뭇거렸다.

“하지만 너 혼자서는…….”

“전 괜찮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

애매한 말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레인은 곧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설마 폭주 이후로 좀 달라진 건가?’

그 역시 폭주 후 다른 치유사들보다 능숙하게 치유력을 더 잘 다루게 되었다. 심지어 클레리아는 폭주뿐이 아닌 타국에서까지도 힘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사실 치료 중에도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힘을 더 많이 흘려 넣은 게 그녀였다.

결국,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한숨 돌리고 올게. 클레리아, 얼마까지 버틸 수 있겠어?”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칼리에 님과도 상의해야 할 것 같아.”

클레리아도 그 말에 동의했다.

타고난 근본을 바꾸는 건 치유사만이 할 수 있는 치료였다. 치유력을 사용하는 만큼 바뀐 인자가 극단적으로 반발력이 생겨 되돌아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큰 문제만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후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것 같아요. 된다면 잠도 좀 보충하고 오세요.”

“하룻강아지한테 면목이 없네.”

“뭘 면목씩이나요. 우린 같은 치유사잖아요.”

그 말에 레인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나오자 밖에서 자리를 지키던 리암과 에단, 케일론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그러니 다들 긴장 푸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리암이 안도한 듯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에단과 케일론의 심각해진 눈매는 풀어질 줄 몰랐다.

‘클레리아가 이 둘과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레인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백작님, 간단한 식사를 내어 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이죠.”

“그리고 영지에 국립 도서관이 있지요?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도서관엔 왜……?”

“백작님 명의를 빌려 수도로 통화경을 사용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나 케일론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남아 있을 클레리아와 에단이 신경 쓰였으니까.

레인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랬기에 적당히 그를 끌고 자리를 비켜 주려 한 것이다.

모른 척 시치미 뚝 떼고 레인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끝내 케일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곧 채비하죠.”

그렇게 레인은 호위인 리암까지 데리고 플로릭의 방에서 멀어졌다.

똑똑

상황이 급박했던 지라 경비까지 내보낸 뒤여서 클레리아는 안정된 분위기에 경비가 다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에단이었다.

“…….”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에단이 먼저 조심스럽게 들어와 클레리아의 곁에 앉았다.

“대공님은 좀 어떠셔?”

“아주 큰 고비는 넘기셨는데 치료가 허사가 되어 버렸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

그 말에 살짝 놀란 눈치던 그는 고개를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그리고 컵을 내밀었다.

“허기질 것 같아서, 우유 같은 것보다 좀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있을까 찾다가…….”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수프였다. 크루통이 들어간 따뜻하고 걸쭉한 수프를 간편히 마실 수 있도록 컵에 담아 온 것이다. 치유력을 계속 흘려보내야 해서 플로릭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나름 고심했을 게 보여 클레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 이 방법 유용한데? 자주 써먹어야겠어.”

그제야 에단 역시 픽 웃음을 흘렸다.

‘아, 이제 내가 아는 에단의 얼굴이다.’

그녀는 수프를 한 모금 마시며 따뜻한 온기를 음미했다.

“샌드위치 잘 먹었어?”

그녀의 물음에 에단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생각나더라. 네가 자주 해 줬잖아.”

둘은 같은 과거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동시에 빙긋 미소 지었다.

“…….”

“…….”

그리고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없어졌다.

잠시 각각 다른 곳에 시선을 던지던 중, 에단이 입을 열었다.

“왜 운 거야?”

클레리아는 가슴 한구석이 쿡 뭔가로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역시 그 질문이구나.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일어날 리 없는 과거에, 그녀를 위해 케일론이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이라는 걸.

마음도 몰라주었고, 제대로 이해조차 받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던 그의 마지막이 너무도 비참해서.

그래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조용히 침통한 얼굴로 있는데, 에단의 손이 클레리아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쪽으로 돌렸다.

“눈물 보인 거…… 어째서야, 클레리아?”

마주한 에단의 눈이 몹시도 아팠다.

행여나 그녀의 입에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까 봐.

두렵고 두려우면서도 참을 수 없음에 겨우 용기를 내서 묻는 그의 표정에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처형대를 향해 절규하며 달려오던 그의 얼굴도 겹쳤다.

‘그래도 역시 나는…….’

클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이 일이 끝나면 말할게. 조금만 기다려 줘, 에단. 그때 말할게.”

그 말에 그의 파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에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마든지. 기다릴게.”

* * *

아침 일찍 나선 레인은 점심이 되어서야 올 줄 알았지만 훨씬 빠르게 블린트 저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외의 물건을 가지고.

“짜잔!”

그녀가 가져온 것은 통화경이었다.

마법과 연금술의 합작으로 평범한 거울로 보이지만, 원하는 상대를 떠올리고 마력을 흘려보내면 멀리 떨어진 상대와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고가의 물건인지라 제국에서 직접 세운 지정 도서관에서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쓸 수 있는데 그걸 레인이 저택으로 들고 온 것이었다.

“어, 어떻게 이걸 가져왔어요?”

“아무래도 칼리에 님과 상의할 거라면 함께 듣는 게 낫지 싶어서. 블린트 백작님도 계시는 겸 빽 좀 썼지.”

옆에 서 있던 케일론이 어딘가 기운 빠진 웃음을 흘렸다. 통화경을 꺼내 오려고 어지간히 힘들게 도서관 측을 설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통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고유 마나석이 없으면 소용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우리한테는 걸어 다니는 마나 전지가 셋이나 있는데. 특히나 기운 세고 오래가는 짱짱한 이 사람이.”

레인이 에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리암 경도 있고, 블린트 백작님도 계시지만. 무엇보다 에단 경이 있잖아. 그것도 술식 없이도 바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이런 인간 마나 전지가 있는데 마나석이 왜 필요해?”

“풉!”

리암이 뒤에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케일론 역시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었다.

클레리아도 순간 입을 꼭 깨물었다.

당사자인 에단만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할 뿐.

“너, 너의 화, 활약이 돋보일 때라고 친구. 뭔가 구호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이건 어때? 가라! 마나 전지! 프하하하!”

결국, 에단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음을 터트리던 리암의 손을 에단이 보기 좋게 꺾었다.

“우아악! 야야야!”

“엔간히 해라.”

“아아, 시끄러워. 대공님이 계시는데 죽고 싶어?”

이번에는 레인이 리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꺄올!’ 하는 이상한 비명을 지른 그는 결국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에단 경, 부탁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던 그도 별수 없던지 통화경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잠시 후 거울에 칼리에의 얼굴이 나타났다.

“칼리에 님!”

<클레리아, 레인. 아까 간단히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나도 지금 막 자료를 찾아온 중입니다.>

역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빠르게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화가 점점 심각해지는 걸 느낀 케일론은 어딘가 자신이 껴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히 방을 나왔다.

저택의 주인이라는 입장으로, 대공을 치유하는 임무를 맡은 중요 인물 중 하나를 이유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어딘가 그들 사이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도움이 돼야 할 텐데.’

살짝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즉…… 바알리시안 왕가인 탈리니아스 일가의 핏줄 때문이라는 거군요.”

클레리아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오래된 기록을 뒤져 겨우 찾아낸 거예요. 그들이 어째서 유전병이 발병한 자식들을 일말의 죄책감 없이 죽였는지에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칼리에의 말하면 이러했다.

바알리시안을 다스린 탈리니아스 왕가는 근친 때문에 유전병이 만연했는데, 그것을 안정시키고 강해지기 위해 손을 댄 것이 흑마법이었다.

그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유전병을 극복한 것 같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시 발병한 유전병은 흑마법의 기운을 받아 더욱 강하고 병세가 깊어진 것이다. 심지어 전염력을 가지는 것들도 생겨났다.

그걸 제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프라이드가 높을 대로 높은 탈리니아스 가문은 발병 환자를 말살로 대처한 것이다.

하지만 흑마법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었기에 그 친인척인 아이문트 일가에게도 아직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요?”

레인이 걱정스럽게 묻자 칼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있지만, 어쨌든 대공께서는 시한부 인생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에요.>

얼마간의 의논을 마치고 그들은 통화경을 껐다.

“그러니까 인자가 가지고 있는 흑마법의 성격을 잃도록 한 번에 압도할 만큼의 치유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거네. 저번처럼 조금씩이 아니라.”

“네, 근본적인 걸 단번에 바꿔야 한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방법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레인이 입을 잠시 삐죽거렸다.

하지만 칼리에의 말대로 다른 수가 없었기에 대공이 깨어나는 대로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일단 각하의 체력 회복을 해 놓을 테니까 레인 님은 가서 주무시고 오세요.”

“뭐? 너 밤까지 샜는데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나 클레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칼리에 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인자에 많은 치유력을 쏟아부어야 해요. 이런 말 드리긴 뭐 하지만 레인 님보다는 제가 지닌 치유량이 큰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 일은 제가 주를 이뤄야 할 것 같고요.”

정곡을 찔린 탓에 레인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는 걸 보면 클레리아는 치유력을 다루는 데 있어 완벽히 변해 버렸다. 심지어 대공의 체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스스로 기력을 복구하는 듯도 했으니까.

“대공님의 체력을 돌려놓고 저도 푹 쉬고 올게요. 시간을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어 보이니 하루 만에 끝내야 할 것 같아요.”

“도와야 할 일은 네게 다 미뤄 버린 것 같네, 미안.”

시무룩해진 레인의 말에 클레리아가 웃었다.

“우리 둘 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알았어, 그럼 네가 기력 제대로 회복할 때까지 버티도록 내가 보조할 준비해 놓을게. 미안.”

“그런 말 말래도요.”

* * *

‘조금만 더…….’

어느새 시간은 흘러 블린트 저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이제 슬슬 클레리아도 체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꼬박 만 하루가 넘게 치유력을 보내고 있으니, 아무리 자가 회복을 한다 해도 무리이긴 했다.

“클레리아. 대공님도 이제 완전히 안정을 찾으신 것 같아. 그리고 조금 있으면 레인 님도 오실 거고. 이제 그만해도 돼.”

클레리아가 흐린 눈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대공의 몸을 진단하는 그녀의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음먹은 것은 쉽게 번복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에단은 입을 꾹 다문 채 진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제 됐어.”

느리게 말하는 그녀가 몽롱한 시선을 들어 플로릭의 얼굴을 바라봤다.

“체력도, 기력도 다 회복되셨어. 당분간은 염려 없으실…….”

순간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클레리아를 에단이 붙들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어느새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기우뚱하는 그녀를 보고 움찔했던 케일론도 에단이 안아 드는 것을 보고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클레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향하는데 마침 휴식을 마친 레인도 나오고 있었다.

서로를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발을 향했다.

끼익

조심스럽게 클레리아를 침대에 눕히고, 에단은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안 나가십니까?”

“그건 제가 칼리스터 경께 물을 말인데요.”

나직이 묻는 에단의 말에 케일론도 덤덤히 답했다.

에단이 짜증 섞인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가 클레리아의 곁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에 케일론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우리 이러지 말죠. 괜한 싸움으로 영애가 곤란해하는 걸 보는 게 싫은 건 나나 경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케일론의 말에 에단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뒤에 있는 그를 노려봤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으셨지요?”

“…….”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청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청혼이겠군요.”

순간 에단은 심장이 밑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케일론을 돌아봤다. 그러자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경께서 어찌하시라는 건 아닙니다. 궁금해하셨으니 답해 드리는 겁니다.”

에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감이 있는 건 알았지만, 설마 청혼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클레리아는 그 말을 듣고 울었다는 건가?

왜?

갑작스레 불안해졌다.

눈물이라니. 대체 왜? 설마…… 클레리아도 마음이…….

에단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것을 본 케일론이 시선을 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듣고 영애께서는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기뻐서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설마 이런 나라도 기뻐 받아 주시는 건가 하고 들뜬 것도 잠시……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영애의 눈물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에단은 클레리아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케일론을 돌아봤다.

“영애가 왜 눈물을 보이셨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칼리스터 경은 그 눈물의 의미를 아십니까?”

쓸쓸했다.

케일론의 표정은 애달프고 서글펐다.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는 이미 그 눈물에 상처받은 것 같았다.

“그걸 왜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저도 클레리아에 대해서는 전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많이 지친 듯 클레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는 대답을 들을 겁니다.”

“이런 얘기를 왜 제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해하실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에단은 인상을 썼다.

“그저…… 난 클레리아의 뜻을 존중할 뿐입니다.”

케일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뜻, 저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럼 영애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그가 나갔고, 에단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대체 저 블린트 백작이라는 녀석…… 뭘 바라고 저런 소릴 해 대는 거지?’

에단은 낮에 왜 울었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던 클레리아를 떠올렸다.

“클레리아, 넌…… 어디를 보고 있어?”

나직한 물음이 고요한 방의 허공으로 흩어졌다.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에단의 옆얼굴을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하얗게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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