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장. 외면할 수 없는 마음 (2)
“하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클레리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차를 따랐다.
환자 입에서 나올 거라 상상도 못 한 ‘소고기 타령’에 노발대발하는 레인을 간신히 말린 여파였다.
플로릭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실없는 사람이었고, 불안해하다 못해 신경질적인 그의 아들과 온도 차가 심했다.
‘왠지 치유 기간 내내 부자간의 싸움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거지.’
그래도 라세르는 후계자 수업을 성실히 듣는 듯, 낮에는 바모른으로 돌아가 영지를 살폈다.
은근한 시비를 걸어 왔던 것도, 괜스레 떠보는 모습에서도 경솔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실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대공이 마음 놓고 저렇게 허점투성이처럼 구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회귀 전 라세르가 무턱대고 국경을 침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공격이 깨나 집요하고 길게 이어졌으니 그 정도의 전략을 짤 정도의 머리는 있다는 거겠지.
똑똑
차 한 모금 하려는데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문에는 케일론이 서 있었다.
‘전에도 엄청난 일 중독이었는데 이쯤 되면 국경 시찰 가야 하지 않나? 왜 자꾸 마주치지?’
밀려드는 불편함을 감추며 클레리아가 빙긋 웃었다.
“백작님이시군요.”
“쉬시는 중이시군요, 괜찮다면 저도 함께 차 한잔 가능할까요?”
하필 여기서?
같이?
과거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주로 보냈던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그의 태도에 난감했다.
그러나 그의 저택에서 안 된다 할 일이 무엇이랴.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론이 들어와 앉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간단한 식기가 마련된 곳에서 찻잔을 꺼내 왔다. 그리고 홍차를 따르고 우유 아주 살짝 섞어, 각설탕 두 개를 넣어 저었다.
탁
완성된 차를 내밀자 케일론이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봤다.
“안 드세요?”
“아뇨.”
이어 그가 한 모금 마셨다.
“……!”
차를 마신 그는 어딘가 감탄한 얼굴이 되더니 클레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심지어 입까지 벌리고.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클레리아가 몸을 살짝 뒤로 기울였다.
“왜…… 그러시죠?”
“어떻게 이렇게 제 취향을 잘 아십니까?”
‘취향이라고?’
“차까지 이렇게 손수 타 주실 줄이야, 게다가 평소 제가 마시는 그대로 딱 맞춰 주셨습니다.”
그의 말에 순간 클레리아의 얼굴이 화아악 달아올랐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억하고 있던 게 습관적으로……!’
3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그가 집을 비운 건 다 합쳐 2년이 넘었다. 근데도 아주 허울뿐인 시간은 아니었던지 클레리아는 그가 좋아하던 취향을 기억해 그대로 차를 타 준 것이었다.
‘이 바보 멍청이! 그래서 그렇게 뚫어지게 본 거였어!’
그는 감동한 얼굴이었으나 클레리아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누군가 타 준 차가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그런 그를 상대로 ‘내가 회귀하기 전 당신의 부인이라서 아는 거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클레리아는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케일론의 어머니는 일찍 사고로 돌아가셨으니 그에게 차를 많이 타 준 것은 아마도 아버지였을 터였다.
‘케일론이 백작위를 물려받는 때가 언제였더라? 지금과 시기가 비슷하긴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저택 근처가 너무 황량하지요? 다른 귀족분들의 저에 비하면 꾸민 것이 없어 보시기 좀 그러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뇨, 꼭 화려한 것만이 다는 아니죠. 백작님은 효율을 더 따지실 것도 같고요.”
“그렇습니까?”
“국경을 지키는 것에 소임을 다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저택의 주변을 꾸미지 않은 건 아마도 그 영향도 있겠죠.”
케일론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역시…… 듣던 대로 정말 똑똑하시군요. 방문자가 없긴 하지만 오셨던 귀빈 몇 분 중에 그걸 눈치채신 분은 프라이어스 영애가 유일합니다.”
‘뭐…… 나도 시집올 때 들은 거라서요.’
감격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굳이 밝힐 생각은 없기에 클레리아는 잠자코 들었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영애는 뵈면 뵐수록 정말 놀라운 분이시군요.”
클레리아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사실 그에 대해 놀라고 있는 건 그녀였다.
결혼했을 때는 무안할 정도로 말이 없던 그였다. 그녀만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에단과 신경전을 하던 것도, 이렇게 혼자 쉴 때 자꾸 찾아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 얘기가 지루하시지요? 하하, 죄송합니다. 늘 전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유머 감각도, 말재주도 좋질 못합니다.”
“뭐, 사람 사는 데 그게 다는 아니니까요.”
그때 케일론이 말했다.
“제가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꼭 말해 주십시오. 사실…… 전 여성분과 제대로 대화하는 것이 이게 처음인지라.”
‘……뭐?’
순간 머리를 맞은 것처럼 띵해져 케일론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지금 이 남자가 그녀 말고는 다른 여자와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건가?
“서, 설마요. 이렇게 듬직하고 멋진 분인데 지금껏 연회나 모임에서 대화 나눈 영애가 있으셨겠죠.”
“아뇨, 황실 연회 말고는 참석한 적 없지만, 그때도 영 적응하기 힘들어 시간만 좀 보내고 바로 돌아왔죠. 그리고 사교 모임 같은 곳은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뭐, 뭘 또 이렇게 대화해 본 적 없다는 얘기를 똑 부러지게 해?’
당혹스러운 그녀와는 달리 케일론은 진지했다.
클레리아는 열심히 기억을 뒤졌다. 설마 결혼했을 때 그렇게도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던 게 숙맥이었기 때문이라는 건가?
혼란스러워하는데 케일론이 덧붙였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 많이 했는데, 영애가 먼저 말을 걸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클레리아는 그의 환한 웃음을 보며 무릎에 올려진 손을 조용히 말아 쥐었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눠 볼 기회도 별로 없이…… 많이도 어긋났던 사이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클레리아는 조용히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일어서도 될까요?”
“아…… 예.”
아쉬움이 가득한 말.
서투르다 보니 드러나는 것도 노골적일 정도로 직선적이었다.
케일론은 클레리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결혼 후, 몇 주씩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함께 하던 식사 자리에서 이유도 없이 지그시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것도.
화병의 꽃을 갈아 줄 때마다 꼭 곁을 지키며 마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것도.
모두가 서투른 그만의 표현 방식이었던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그녀는 억지스럽게 웃어 보이고는 휴게실을 나왔다. 그리고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저기, 혹시 일거리 없을까요?”
펄럭! 펄럭!
클레리아는 있는 힘껏 이불을 털었다. 그리고 빨랫줄에 널어 말끔하게 폈다.
“깨끗하다.”
하얗게 널어진 커다란 천을 보며 상쾌하다는 얼굴로 클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심란해진 마음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나 하던 도중, 그녀는 무작정 하녀들이 있는 곳으로 가 일거리를 찾았다.
갑자기 일을 요구하는 통에 당황한 고용인들이 한사코 말렸으나 클레리아는 막 빨래를 마친 빨랫감들을 자기가 널겠다며 가지고 나왔다.
이렇게 널고 있으니 구호소에서 한창 레인의 구박을 받으며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도 역시 잡념을 떨치기에는 단순 반복하는 일이 최고지.’
그녀는 죽기 전까지 케일론에게 사랑받은 적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화도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고, 그는 오기 무섭게 떠나기 바빴다. 게다가 잠자리조차 한 적이 없으니까.
그 삶이 그저 불행으로만 가득 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힘없이 빨래를 손으로 툭툭 털고 있을 때였다.
“왜 여기서 이걸 하고 있어?”
문득 넓게 널린 천 뒤로 그가 나타났다.
‘에단…….’
앞으로 나온 그가 클레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다른 빨래 더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빨랫줄에 빨래를 널었다.
그 모습을 클레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켜봤다.
“얼굴이 이상하네.”
그가 짓궂게 웃어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지 않았다.
남은 빨래를 다 널고 둘은 마주 섰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는 그녀를, 에단 역시 평소와 달리 조용히 지켜봤다.
“하고 싶은 말 있어?”
클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할까.
아무도 모를 과거에 사랑 같은 거 받은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그런 사람을 죽게 해서 죄책감이 들고. 정말 감사하게도 또 한 번 삶의 기회를 얻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제는 상관없는 그를 마냥 모른 척하기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긴 할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침묵하다 그녀가 천천히 에단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에단의 눈이 너무도 고요하고 메마른 탓이었다.
‘에단? ……왜 그런 눈으로?’
난생처음 보는 에단의 눈빛이었다. 조용했으나 날카롭고 서늘했다.
“에…… 단?”
“백작님과 나누는 대화…… 실례인 줄 알지만 어떻게 듣게 됐어.”
‘아…….’
미처 몰랐다는 얼굴로 클레리아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호감을 그녀도 느꼈는데, 에단도 들었다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즐거웠니?”
질문에 클레리아가 눈을 치켜떠 그를 봤다.
“백작님이 신경 쓰여?”
일말의 동요도 없는 듯이.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그의 눈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런 걸 왜 물어? 신경 쓰인 적 없어.”
그때 에단의 손이 천천히 클레리아의 양팔을 쥐었다.
“에……?”
재차 부르려 할 때, 클레리아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탓이었다.
팔을 붙든 그의 손이, 품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것 같으면서도 간신히 참아내듯 애달프게 둘 사이의 거리를 유지했다.
“근데 왜 난 네가 백작을 신경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전해지는 그의 숨결이, 목덜미와 귓가를 훑어 오르며 점차 멀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 반응에 클레리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다시 마주한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불에 덴 것 같이 작열감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어딘가 서글펐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걸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에단의 손이 그녀의 팔을 놓았다. 마치 날뛰는 감정을 딱 잘라내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에 클레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변하게 두지 말아 줘, 클레리아.”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에단은 그렇게 그녀의 앞에서 멀어졌다.
* * *
방으로 돌아온 에단은 천천히 문에 몸을 기댔다.
‘미치겠군.’
그는 곤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감정 하나 다루지 못해 클레리아에게 투정이나 부리고.
‘자제가 안 돼.’
그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것을 탓했다.
평소처럼 클레리아를 찾아 휴게실을 가던 차였다. 그때 열린 문 너머로 들려왔다. 이상하리만큼 거슬리는 케일론의 목소리와 클레리아의 목소리가.
그냥 평소처럼 자연스레 들어가도 됐을 것을. 왜 그 대화에 문득 발길을 멈췄는지, 그것을 그렇게 숨어 엿듣는 것마냥, 귀 기울이고 있었는지.
아직도 본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클레리아가 그가 좋아하는 취향의 차를 맞췄기 때문인가.’
새어 나오는 케일론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기쁨에 물든 그 목소리가 마치 당장에라도 클레리아를 뺏어가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던 남자는 없었는데.
“하아…… 고작 그따위 말 몇 마디에 이렇게 휘둘려선…….”
케일론을 탓하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예민해지기 시작한 건 엘라단 사건 이후부터였다.
그녀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클레리아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자 불안해졌다.
천천히.
그녀가 받아들일 때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고 수백 번 다짐했던 마음이 고작 대화 몇 분으로 흔들리다니.
에단은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점점 더 마음이 급해진다.
보고 싶고.
품에 안고 싶고.
행여나 손이라도 붙들면 놓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지…… 클레리아가 알기라도 하면 자신을 멀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려워할지도 모르지.’
에단은 자책이라도 하듯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상상이나 할까, 클레리아?’
조금 전 만났을 때도, 치기 어린 질투심에 눈이 멀어 괜스레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이젠 안 돼. 난 널 놓아줄 생각이 없어.’
늘 온화함을 잃지 않던 에단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내 못난 밑바닥이 드러나게 두지 마, 클레리아.”
* * *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클레리아는 다리가 풀린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그에게 붙들렸던 팔이 불에 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단의 그런 모습 처음 봤어.’
왜 그런 눈으로 본 걸까.
‘케일론과 함께 있어서 그런 걸까. 첫날부터 그를 보고 기겁을 했으니 그게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모르겠어, 정말.”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열을 식힐 때였다.
똑똑
“네?”
“클레리아, 시간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인이었다.
“레인 님.”
“얘기나 좀 할까 해서.”
그는 씩 웃으며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아까 저녁 먹을 때 영 어딘가 안 좋아 보여서. 대공님 치유하는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까다롭긴 해도 우리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치료는 아니니까. 다만 체력을 좀 많이 뺏겨서 그렇지.”
클레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때문인 건 아니에요.”
“그래?”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 그는 빙긋 웃으며 클레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그 모습에 그녀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레인이 픽 웃음을 흘렸다.
“혹시 에단 경하고 무슨 일 있었어?”
“네?”
“에단 경은 아예 저녁도 먹으러 오질 않고, 네 표정도 좋지 않아서. 출발할 때부터 영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아니, 정확히 클레리아가 이상하다고나 할까.”
정곡을 찔린 그녀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뭔 일이 있었긴 있었군. 블린트 백작을 대하는 에단의 태도도 그래서였고.’
“클레리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먼저 다가가도록 해. 네가 관련된 일에는 에단 경이 미친 듯이 먼저 네게로 향하잖아? 한 번쯤은 먼저 화해하러 다가가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클레리아는 쓰게 웃었다.
“네, 그 말씀이 맞아요. 그러고 보니 전 에단을 먼저 달래 줬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둘은 서먹서먹한 사이 아니잖아. 너희가 그러고 있으면 우리가 다 불편하다고.”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딱히 신경 쓰인다기보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게 보기 좋으니까.”
그가 웃으며 한 말에 클레리아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보기 좋다고……?’
미묘히 변하는 표정을 보며 레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할게. 그냥 그 얘기 하러 들른 거야. 내일은 하룻강아지 차례니까 되도록 푹 자도록 하고.”
“네, 레인 님.”
그는 앉아 있는 클레리아의 머리를 벅벅 거칠게 쓰다듬었다.
“다가갈 거면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 늦으면 지치니까. 알았냐? 하룻강아지?”
너무 심하게 문댄 덕에 어리둥절한 클레리아를 남겨 두고, 레인은 방을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잠시 에단이 있는 옆 방을 바라봤다.
‘나중에 빚 갚으라고, 에단 경.’
혼자 키득거리던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예상했던 대로 체력 소모가 심했는지 레인은 정오가 될 때까지 잠에 빠졌고, 클레리아는 대공의 침실에서 그의 상태를 살피며 인자를 바꾸는 것에 집중했다.
환자도 지칠 수 있기에 중간중간 수액을 놓아 가며 천천히 진행해 나갔다.
‘레인 님의 말대로 그렇게 어렵진 않구나. 근데 아무래도 근본을 바꾸는 일이다 보니 바뀐 인자들이 좀 어색하게 맞물리는 느낌이긴 하네.’
“많이 힘드시지요?”
생각을 곱씹을 때 플로릭이 말을 걸었다.
“아뇨,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체력 소모가 많은 편이라 그 부분만 신경 쓰면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오늘은 해가 나기보다는 구름이 끼어 좀 흐린 날씨였다.
“엘라단 아카데미 사건으로 아스칸 전체가 떠들썩했는데 당사자시니 많이 겁나셨겠습니다.”
클레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사망자도 나왔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죠.”
“세실리아는…….”
‘응?’
갑작스레 나온 황녀의 이름에 클레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플로릭은 여전히 창 쪽을 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괜찮던가요? 그녀도 다쳤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우리 황녀님에 대해 묻으시지? 두 분이 접점이라도 있었나?’
호기심이 일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네, 팔을 좀 다치긴 하셨는데 괜찮으십니다. 별 탈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저기, 황녀 전하와 일면식이 있으셨나요?”
그러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함께 엘라단을 다녔었습니다. 녀석과 수석을 다투곤 했었죠. 제가 꽤 자존심이 상했던 시절이죠. 저보다 열 살이나 어린 녀석과 수석을 다퉈야 했었으니까. 제가 스물다섯쯤, 늦게 엘라단에 들어갔거든요.”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의외로 허점투성이로 보이는 플로릭이 세실리아와 함께 엘라단을 다니고, 수석 자리까지 경쟁했다니.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하긴 수석을 차지한 후의 스포트라이트만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뿐, 그 전후 사정까지 언급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머리가 비상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세실리아와 함께 공부하던 시절이 참 재밌었죠. 어떻게든 작업을 걸어 보려던 남자들을 세실리아가 보기 좋게 차 버리던 걸 구경하던 맛이 있었죠. 하하.”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던 것을 입을 가려 막았다.
‘역시 우리 황녀님. 그때부터 대단하셨구나.’
“어찌나 당차고 대단하던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곤 합니다.”
회상에 잠긴 듯한 그의 옆얼굴이, 어딘가 애달프고도 담담했다.
의외의 반응에 클레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설마 이 사람…….’
가만히 그의 맥을 짚어 치유력을 흘려보내던 클레리아가 나직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황녀 전하를 마음에 품으셨었나요?”
그 물음에 플로릭의 고개가 클레리아를 향했다.
기분이 상했겠거니 싶었는데, 그는 전혀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맑게 웃었다.
“그랬었죠, 워낙 멋진 사람이잖아요. 세실리아는. 사실 여기 올 때 혹여나 세실리아가 나오지는 않을까? 조금 기대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황녀니 올 틈은 없었겠죠.”
마음이 남기라도 한 걸까.
그의 솔직한 말에 공감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 황녀 전하에게 마음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데 플로릭의 반응은 상상과 달랐다. 말하는 투로는 그녀를 아직도 많이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저도 고백해 봤지만, 다른 남자들처럼 보기 좋게 차였죠. 뭐, 별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도 세실리아에게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 어울릴 것 같으니까.”
정말 말처럼 그는 정말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한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티끌 없이 순수하게 행복해하는 저런 얼굴을…… 나도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 관한 기억을 정말 소중히 자신의 삶에 한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오히려 지금 아내를 만나 세실리아에 관한 사랑은 너무도 안일했고, 가벼웠다는 걸 알았죠. 물론, 장난이나 한순간의 흥미로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진정한 짝에 비하면 오히려 섣부른 판단으로 폐를 끼친 건 내가 아닐까 싶더군요.”
폐를 끼쳤다고…….
왠지 모르게 클레리아는 케일론이 떠올랐다. 향한 마음이 케일론과 같지 않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안일하게 판단했었으니까.
“세실리아가 정말 무서운 게 그런 마음까지 다 헤아리고 있더군요. 정말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아내와 결혼할 때 더욱 기쁘게 축하해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오랜만에 얼굴 정도는 보고 싶네요.”
“그렇 군요. 두 분이 정말 사이좋은 친우셨다는 게 저도 느껴집니다.”
클레리아는 두 사람의 우정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영애께도 그런 사람이 반드시 생길 겁니다. 아니, 벌써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플로릭을 만나고 처음으로 진심 섞인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는 인정이 느껴져 좋았다.
‘황녀님이 그래서 대공님을 좋아하셨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과 함께 방 안에는 다시 평온한 침묵이 찾아왔다.
* * *
어제 그 일이 있고, 다음 날이 되어도 에단은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고용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니니 맡은 임무는 제대로 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침에 방까지 찾아갔으나 저택 주변을 일찍 정찰하러 나갔는지 그는 없었다.
오전 내내 레인의 곁을 지키던 클레리아는 오후가 된 후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치유사님?”
어제에 이어 다시 방문한 그녀를 보고 고용인들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졸랐어도 손님인 그녀에게 일감을 주었다는 것이 걸리는 모습이었다.
“어제처럼 곤란하게 하려는 거 아니니 긴장 푸세요.”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웃자 하인들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혹시 칼리스터 경께서 식사하셨는지 궁금해서요.”
물음에 고용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결국, 시녀장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치유사님. 기사님께서 계속해서 가져다드리는 식사도 거부하고 계셔서…….”
클레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밥을 계속 굶으면 어떡해. 환자 더 늘릴 셈인 거야? 에단 칼리스터?’
그녀는 짜내듯 한숨을 내뱉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주방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순수한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또다시 고용인들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주방을 빌린다고 말은 했지만, 준비한 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히 빵을 데우고 버터와 설탕, 겨자, 레몬즙을 잘 섞어 발랐다. 그리고 그 위에 신선한 채소와 베이컨, 달걀을 올려 올리브유와 통후추 간 것을 뿌려 간단한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 놀다가 허기가 질 때면 그녀가 엘레나와 에단을 위해 곧잘 만들어 내오던 음식이었다.
따뜻한 홍차 한 잔까지 우려낸 후, 그녀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에단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에단?”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변 정찰 나간 건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있다! 아, 오전 내내 시찰하고 잠시 잠든 건가?’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메마른 방 안 공기를 타고 옅은 홍차 향이 번졌다.
그의 곁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클레리아는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채 잠든 에단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 줘, 혼자 앓지 말고.”
클레리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동안 언제나 에단이 양보해 주고, 먼저 다가와 줘서 네가 화가 났을 때 난 널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녀는 느리게 손을 뻗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금 넘겼다.
“이런 식으로 굶거나 하지는 말아 줘. 네가 다시 아픈 건 싫어.”
그렇게 한동안 잠든 에단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그의 눈이 뜨였다.
에단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을 들어 가렸다.
‘책임질 거라니.’
그의 시선이 스르륵 옅은 김을 내는 쟁반으로 향했다. 몸을 일으켜 다가가자 어릴 적 클레리아가 종종 내오던 샌드위치가 홍차와 함께 놓여 있었다.
에단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자꾸 이러면 내가 널 무슨 얼굴로 봐야 하냐고.”
오랫동안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