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52)

제25장. 외면할 수 없는 마음.

부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낯선 나팔 소리에 클레리아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블린트 저를 감싸듯 모든 고용인과 기사들이 가로로 늘어섰다. 역시 마찬가지로 치유사와 호위 기사들도 그 앞에 중앙에 일렬횡대로 섰다.

케일론은 일부 기사단을 이끌고 아침 일찍 국경으로 대공 아이문트를 맞이하러 나갔다.

국가 간의 조약에 따라 근방에는 위협이나 간섭이 될 만한 인구는 모조리 임시 이주 되었으며, 블린트 저 주변에는 오직 그들과 아이문트 가에서 온 호위들이 전부가 될 참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살벌하네.”

지방 파견을 많이 나갔던 레인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는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에단이 가져다준 우유를 마시고 잠을 좀 청한 클레리아도 긴 이동을 했던 어제보다 몸 상태는 좋았다.

‘케일론을 마주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일찍 저택을 비웠다는 소리에 더 안도한 것도 있지만…….’

쿠구구구구

이제 멀리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아이문트 무리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허한 들판 사이에서 점차 바모른국의 상징인 남색 깃발과 금색 술이 점차 솟아났고, 그들의 모습도 드러났다.

제일 앞장선 사람은 역시 케일론이었고, 그 옆에 또 다른 이가 함께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클레리아가 중얼거리자 눈을 가늘게 뜨며 지켜보던 에단이 못마땅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플로릭 아이문트의 아들 라세르 아이문트로군.”

“뭐?”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그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병환을 우려해 동행한 듯싶은데, 언질이 없었기에 마중을 나간 케일론도 당혹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함께 오는 걸 보면 거절하지 못한 것 같으니, 괜한 오기를 칼같이 자르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난감하네.”

“쉿, 들어온다. 나중에…….”

에단의 말에 클레리아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푸르르르

화려하게 장식된 육두 마차가 천천히 저택 내로 들어섰고, 그 뒤를 무장한 기사들이 따랐다.

남색 빛의 갑주는 어딘가 모르게 묵직한 위압감을 풍겼고, 플로릭을 태운 마차 역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라세르가 말을 몰아 치유사들의 앞으로 나오자 클레리아와 레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바모른 국의 대공 플로릭 아이문트와 그 아드님 라세르 아이문트를 뵙습니다.”

케일론 역시 말에서 내리고 그들 앞으로 가 고개를 숙였다.

“부디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고개 숙인 그들을 한 차례 고고히 훑은 라세르가 말에서 내렸다.

“우리야말로 요청을 받아 주어 고맙소. 그대들이야말로 아버님의 치료에 능력 절제 없이 최선을 다해 눈속임 없이 임해 주길 바라오.”

“…….”

순간 레인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아오르는 것을 클레리아가 적당히 붙들어 막았다.

“저 젖비린내도 안 가신 것 같은 어린놈이…….”

“레인.”

누가 들어도 너희가 제대로 치료 안 하려 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엄포였다. 클레리아 일행은 도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럼 공자님, 이쪽으로.”

그 와중에 케일론은 무표정으로 그를 안내했다.

‘하긴 전에도 일적으로 불만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황량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지.’

케일론은 민감할 수 있는 사항을 원만히 처리하기에는 최적화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바모른국 기사들이 천천히 플로릭을 옮겼다.

그의 모습은 한 눈에도 안 좋아 보였다. 온몸은 비쩍 말랐고, 기력이 쇠해 약한 경련이 잦았다.

“생각보다 까다롭겠어.”

그를 훑어본 레인의 말에 클레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플로릭이 옮겨지고, 바모른의 기사들 정리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타국의 왕족이 방문하자 고용인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플로릭의 침실에는 치유사 일행, 여섯 명의 바모른 기사들. 플로릭의 아들과 케일론이 남았다.

엄숙한 가운데 클레리아가 말했다.

“이제부터 아드님이신 라세르 공자님의 입회 아래 아이문트 대공님의 병환에 대한 진단이 있겠습니다. 저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와 여기 계신 레인 세릭스 님이 함께 수고해 주실 겁니다.”

안내와 함께 몇 번의 심호흡 후, 두 사람은 천천히 각자 플로릭의 손목을 잡고 치유력을 흘려 넣었다.

그의 상태는 위중했다.

과거에도 치유사 요청 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던 것처럼, 그는 쇠약해져 있었다.

특이점이 있는 혈우병을 앓아 심한 빈혈과 근육 약화가 있었고. 그로 인한 내상도 있어 영양이 부족해 회복도 느렸다.

레인은 비교적 빠르게 진단을 끝냈지만, 클레리아는 좀 더 꼼꼼하게 살폈다.

조금 뒤 눈을 뜬 그녀는 레인과 조용히 속삭여 의견을 교환하고 라세르를 바라봤다.

“대공 각하의 정확한 병명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심각한 혈우병으로 인한 합병증이라고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클레리아가 잠시 레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가를 말하기 고심하는 눈빛이었다.

“뭐냐? 새로 알아낸 것이 있으면 솔직히 고하라! 감히 왕족의 앞에서 진실을 감추려 하는 것이냐!”

그의 호통에 클레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는 아주 특이한…… 아이문트 가문에서만 나타나는 유전적 혈우병을 앓고 계십니다. 게다가 변종이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화를 냈다.

“감히 우리 왕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누구도 아버님과 같은 증세를 겪었던 자는 없다!”

“아뇨, 있습니다. 일찍이 저희가 치료를 했고, 왕실 내부에서 쉬쉬했을 뿐. 왕족이시라면 왕실 족보 이력에 대해서는 배우셨겠지요?”

그 말에 라세르가 순간 숨이 턱 막힌 듯 채근하려던 걸 멈췄다.

바모른국은 과거 라스칸트가 바알리시안에게 반기를 들 때 바알리시안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가가 세운 나라였다. 즉, 근친하던 조상을 둔 왕족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세대가 꽤 지났으므로,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운 나쁘게도 대공께 그 질환이 발병한 겁니다.”

“라스칸트가 그렇게 자랑하는 치유사니, 아버질 고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또다시 선을 넘는 그의 발언에 클레리아의 눈썹이 꿈틀댔다.

“까다로운 치료이기에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니…….”

그녀는 내리깔았던 눈을 서서히 치켜떠 라세르를 바라봤다.

“공자께서도 머무시는 동안 일국의 왕족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뭐……?”

지적당한 것에 수치를 느낀 라세르가 버럭 대꾸하려 했으나 그녀와 눈을 마주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클레리아의 눈빛이 범상치 않은 탓이었다.

“환자가 계신 곳입니다. 정숙, 또 정숙해 주십시오.”

순간 둘의 사이로 케일론이 끼어들어 시선을 차단했다. 그리고 라세르보다 배는 큰 체격으로 그를 압박했다.

역시 아직 소년에 불과한 라세르는 잠시 분 섞인 숨을 내뱉다 방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클레리아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어떻게 된 게 귀족 놈들은 하나같이 다 행실이 못돼먹은 거야?”

“레인 님…….”

클레리아가 자중하라는 듯 말하자 레인은 주변 기사들과 플로릭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실 ……수.”

다행인 건 플로릭은 지금 의식이 없어 이 말을 못 들었다는 부분이랄까.

하지만 그들의 착각이었다.

“뭐, 인정합니다. 라세르가 버릇없는 건 맞지요.”

“으아악!”

순간 옆에서 들린 말에 레인과 클레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를 바라봤다. 레인은 소리까지 질렀다.

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 침대에 플로릭이 ‘허허’ 웃고 있었다.

실언을 들켜 버린 레인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케일론과 리암,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말을 들은 플로릭 본인은 ‘껄껄.’하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라세르가 저랑 영 반대라 제가 휘둘릴 때도 많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기력이 쇠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잘하고.

대공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표정으로 보아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아 넷은 살짝 안도했다.

“며칠을 통증에 시달려서 피곤했는데 모처럼 잠을 좀 잤군요.”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혈우병으로 인한 멍이 보였다. 이 정도면 관절에 다른 통증도 심했을 것이다.

“일단 응고 인자가 든 수액을 맞으면서 내상 입은 부분들의 출혈을 좀 막고, 소화 기관으로 흘러 들어간 혈액 때문에 구역질 나는 걸 좀 최소화할 겁니다. 좀 부담스러우셔도 하루 정도 참아 주세요.”

“그럼요, 치유사님들이 그러라 하시면 그래야지요. 고쳐 주신다는데.”

플로릭이 이런 이미지였나.

과거에 그를 만나 본 이력이 없으니 의아하기도 했다.

아들은 다혈질인데 아버지는 서글서글한 성품이라니. 어쩌면 이런 다정한 아버지였기에 아들이 그의 죽음에 더 좌절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클레리아와 레인이 일어섰다.

“본격적인 치유는 내일부터 들어갈 겁니다. 아무래도 유전병인지라 발병 인자들을 고쳐 치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시간도, 체력도 꽤 소모되는 일이니 대공님께서는 안정을 우선으로 하십시오.”

“네네, 그러지요.”

그렇게 나오려는데 레인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 니다.”

그러나 플로릭은 여전히 ‘허허’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 뿐이었다.

탁.

문이 닫히며 레인이 거의 녹아내릴 듯 비틀거렸다.

“목 날아가는 줄 알았네.”

“레인 님은 칼리에 님이 경고하시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 아무 때나 하는 건 좀 고쳐 주세요. 특히나 귀족에 관한 거요.”

“칫, 알았다고.”

힘은 들겠지만, 첫날부터 바쁠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클레리아는 2층 중앙 쪽에 마련되어 있는 휴게 공간에서 황실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하기로 했다.

‘라세르…… 섣불리 라스칸트 국경을 침략했던 과거처럼 성정이 급해 보이긴 했어.’

그녀는 펜대를 움직이며 기억을 곱씹었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가 국경을 침공하지 않아 케일론이 수도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과거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니 저절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그렇게 됐다면 조금 달랐으려나.’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던 때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이 요번 엘라단 사건 때 그 치유사 맞지?”

고개를 들자 어느새 라세르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합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클레리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불량하고 무례한 시선이었으나 그녀는 낯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폐하의 총애를 입은 모양이구나. 피해가 컸다는데 멀쩡한 걸 보니 그대의 기사가 재주가 좋았나 봐?”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반 주검 상태의 에단이 눈앞을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면 혹여 영웅담처럼 보이려 라스칸트에서 이야기를 부풀렸나? 그런 큰 사건을 겪은 것치고는 둘 다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여유롭게 말하던 라세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클레리아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허…… 이 계집…….’

“그 자리에서 직접 목도하신 것도 아닐 뿐더러, 그런 위중한 일을 가지고 말장난할 라스칸트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 일로 생사를 넘나들었습니다. 공자님께서 입에 가벼이 놀리실 일이 아닙니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를 보며 라세르는 말실수했음을 직감했다.

클레리아라는 치유사의 대단함이 파다하기에 나름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나올 줄이야.

그가 발언을 수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때 누군가 뒤에서 나타났다.

“라세르 공자님께서는 언행에 좀 더 신중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케일론?’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공자님께서 타국에서 오신 귀빈이듯이 치유사님과 그 일행 또한 임무를 위함이긴 해도 제 귀빈이십니다. 행동거지를 조심하십시오.”

갑작스레 나타난 그는 싸늘히 경고했고, 라세르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미안하오…….”

그래도 악의를 담고 말했던 건 아니었는지, 그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과를 던지고 서둘러 휴게실에서 나가 버렸다.

라세르가 나간 방향을 지켜보던 케일론이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문트 대공이 어렵게 가진 외아들인지라 엄한 교육은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아, 라세르 공자님은 혼자신가요?”

“네, 다섯 번의 유산 후에 어렵게 가진 분이라고 하더군요.”

‘다섯 번이나?’

클레리아는 놀라 입을 살짝 가렸다.

그 정도면 부인의 정신도 몸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타국에서까지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건 자제를 시키셔야 할 텐데…….”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었다.

왠지 아까 본 플로릭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 뒤집어엎는 아들을 보고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일 것 같았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케일론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봤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예?”

물음에 클레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절 보고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순간 들린 말에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케일론은 멀거니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 사실은 놀랐다. 그저 라세르의 행실에 반응이 치우쳐 미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첫날 마주쳤던 것처럼 아주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었고.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할 말을 찾았다.

“역시 제가 불편하신 거로군요.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아뇨!”

다급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백작님이 불편하거나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엄청나게 불편하고, 매우 어렵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오롯이 그녀만이 지니고 있고, 그걸 알 리 없는 이 불쌍한 사람은 반응에 상처 입겠지.

‘처신을 잘해야 해. 지금은 일어난 일이 아니니 의식하지 않아도 돼. 내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이 사람의 미래도 다를 거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럼…… 역시 제 생김새 때문에 그러시군요.”

응?

기억에서 돌아와 그를 쳐다보자 본인의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당혹스러워하는 케일론이 보였다.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다고 했잖아. 지금 저 반응은 뭔데?’

이해가 되질 않아 고개를 갸웃하고 바라보자 그가 낙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좀 무섭게 생긴지라 보고 두려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가? 누가 무서워?

클레리아는 경악했다.

케일론은 덩치가 꽤 클 뿐이지 생긴 건 전혀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부드럽게 생겨서 거친 국경을 문제없이 돌보고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할 따름이지.

그런데 사람들이 종종 무서워한다니?

그녀는 머리를 짚은 채 결국, 회귀 전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뛰어난 기사이기도 했던 케일론은 기척 숨기는 것을 잘했고, 종종 저택에 돌아와 쉴 때조차 그 상태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덕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그를 보고 이따금 기겁하는 고용인들이 생겨났다.

클레리아 역시 결혼하고 몇 번 겪어 화병을 몇 개나 깼는지 모른다.

그때도 그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기척을 숨기는 통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그저 무섭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댁처럼 덤덤한 얼굴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거울도 안 보나요?’

그녀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고 간섭지 않으려던 먹었던 마음을 돌렸다.

“백작님이 무섭게 생기셔서 그런 게 아니에요.”

“……예?”

어리둥절한 그를 향해 클레리아가 말했다.

“백작님이 기척을 내지 않고 나타나시기에 그런 거였어요.”

그녀가 어제 놀란 건 이 때문이 아니지만,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했다.

“아……?”

그는 갸웃거리다 겨우 이해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였군요. 죄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기사는 기척 지우는 걸 숨 쉬듯 해야 한다고 아버지께 배운 터라…….”

그 말 역시…… 들은 적이 있지.

놀라서 일곱 번째 화병을 깨트렸던 날, 그는 멋쩍은 얼굴을 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어딘가…… 서글퍼졌다.

“이제 아셨으니 됐어요.”

이런 사람을 내가 죽게 했구나.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자 가슴 한구석을 누군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려 왔다.

클레리아는 웃었으나 그 웃음에는 아까와는 달리 기운이 없었다.

“실례지만 백작님. 대공의 상태를 황실에 보고해야 해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보고서에 민감한 얘기가 섞일 수도 있는지라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영애의 시간을 뺏었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케일론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 주며 말했다.

그는 완전히 벗어나기 전, 조심스레 그녀를 엿보았다.

‘그래도 아까는 표정이나 말투가 자연스러우셨는데, 방금은…… 어딘가 맥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그가 시선을 돌려 계단을 막 내려가려 할 때였다.

“……!”

몇 계단 아래 에단이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칼리스터 경. 치유사님을 찾으시는 거라면 중앙 휴게실에 계십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러나 대답과는 달리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케일론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케일론은 영문은 알 수 없었다.

“치유사님과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아, 네. 약간의 담소…… 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눴습니다. 오래전부터 좀 뵙고 싶었던지라.”

에단의 물음에 케일론은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답했다.

순간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이 시시각각 냉랭해지고 있다는 것도 케일론은 모르는 것 같았다.

“즐거우셨나 보군요.”

“예, 프라이어스 영애는 라스칸트의 보물이지 않습니까. 공작가의 영애이시기도 하고, 엘라단의 부상자를 치료하셨기도 하니 궁금했죠. 후유증이 심하신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

말하는 도중 그의 얼굴이 살짝, 아주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에단은 분노로 거칠어지려는 숨을 천천히, 묵직하게 골랐다.

“시합 때는 몰랐는데 의외로 백작님께서는 말이 많으신 편이군요. 그분께 관심이 있으십니까?”

돌직구였다.

그야말로 몸쪽으로 꽉 찬 돌직구.

그의 말에 잠깐 당황한 빛이던 케일론이 담담히 대꾸했다.

“예, 아름다운 분이시니까…….”

돌직구 질문에 이어 돌직구 답변이었다.

푸쉬시

머리 뒤쪽으로 열기 가득한 김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으나 에단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 네.”

그것이 끝이었다.

에단은 그걸 끝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고, 살짝 당황한 케일론이 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뭐지? 대체?’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에 뭔가 실수했나 싶었지만, 딱히 그럴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한 죽마고우였으니 언급된 게 좀 거슬리신 건가. 시합 때보다 많이 날카로우신 것 같은데.’

그 순간 그의 뇌리로 무언가가 스쳤다. 그는 곧 실수했다는 얼굴로 주먹으로 손바닥을 살짝 쳤다.

“아하, 엘라단에서의 일 때문에 아직 신경이 날카로우신 거군! 자꾸 까먹는군, 이런…….”

그는 난처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에단?”

“…….”

어딘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불러도, 이유를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가는 문 쪽만 쏘아볼 뿐.

‘무슨 일이지.’

에단이 입을 닫고 열지 않을 때는 꽤 고집이 대단해서 클레리아도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싶어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거슬려.”

“응? 뭐가?”

알 수 없는 말만 던진 채 그의 시선이 클레리아를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는 휴게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상한 반응에 황당한 건 오히려 클레리아였다.

“뭐야? 정말?”

* * *

다음 날, 본격적인 대공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대공뿐만이 아니라 치유사의 체력 싸움도 될 것 같은 양상에 레인과 클레리아가 번갈아 격일로 치유하기로 결정되었다.

질병 인자의 성질을 바꾸는 어려운 일인지라 고생길이 훤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생길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치, 치유사님 전 식사에 소고기가 없으면 통 넘어가질 않아요.”

“…….”

그의 성격이 만만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레인은 노골적으로 ‘뭔 똥강아지가 풀 뜯는 소리야’ 하는 얼굴로 치유 중이었다.

클레리아 역시 헛웃음만 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치유사니임.”

당신 마흔 중반 넘은 중년 아저씨 아니야? 아재가 무슨 애교야 애교가?

질색하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플로릭은 계속해서 어울리지 않는 슬픈 눈망울로 바라봤다.

“소고기 먹고 싶어요.”

“대공님께서는 내부 장기가 약해졌을뿐더러 출혈도 있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친 음식을 드시는 건 좋은 선택도 아니고, 고기처럼 소화가 늦는 음식은 삼가셔야 합니다. 내상이 완전히 치유된 후에 다시 얘기하는 것으로 하시죠.”

“하지만…….”

금방이라도 서운함에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망울로 그가 시무룩해졌다.

세상에, 아저씨가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징그럽게!

눈 딱 감고 듣는 척도 안 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였다.

“치유사님, 꼭 소고기를…….”

“치유사님들이 안 된다잖습니까아아!”

갑작스레 들려온 고함에 클레리아와 레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주인공은 분노로 씩씩대는 라세르였다.

“아버지 또 그놈의 소고기 타령입니까? 병 한창 악화했을 때도 무리해서 소고기 먹고 탈 나서 혼절하셨잖아요! 소고기 먹다 체해서 약해진 위장에 내상 입고, 또 소고기 몰래 먹다 식도 상하고! 수프 드렸더니 거기에 또 소고기 넣어 몰래 먹다가 위에 찬 피로 실신하셨던 거 벌써 잊으신 겁니까?”

전생에 소고기랑 서로 사랑하다 주변의 만류로 눈물 없인 못 볼 생이별이라도 하신 건가.

클레리아와 레인이 ‘당신 그 정도로 소고기 타령한 거야?’ 하는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미 플로릭의 소고기 사랑은 유명한지 방의 각 구석에서 보초를 서던 기사들도 얼굴을 붉히고 외면했다.

‘이봐요, 그쪽 부하들도 창피해하잖아. 이 정도면 병이야. 당신 진짜 심하다고.’

그러나 플로릭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아, 소고기라고. 세상 최고의 진미란 말이다. 포기할 수 없어.”

“이 화상아!”

‘크아앙!’하는 포효와 함께 라세르가 옆에 놓인 수프가 담긴 쟁반을 날려 버렸다.

쨍그랑!

“대공님! 안정!”

“공자님! 대공님의 안정을!”

“히이익!”

기사들이 흥분한 라세르를 뜯어말리느라 여간 소란이 아니었다.

‘상을 뒤집어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클레리아는 고용인들이 치우는 접시를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저런 철부지 아버지라면 다혈질로 자란 게 이해가 될지도…….’

“어후! 남의 나라까지 와서 내가 정말! 이러니 안 따라오고 배깁니까? 한 나라의 대공이시면 대공답게 행동하시라고요! 치유사님들, 절대로 아버지께 고기 드리지 마십시오!”

결국, 씩씩대며 라세르가 나갔고, 잔뜩 움츠려 있던 플로릭이 ‘히잉’ 소리를 냈다. 그도 고집이 어지간한지 끝까지 ‘소고기…….’하고 중얼거리자 결국 레인이 발끈했다.

“이 멍……!”

그 순간 클레리아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솔직히 실언해도 이해할 만한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까.

“대공님, 아드님의 말씀대로 내상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거친 음식은 안 됩니다. 다만 가벼운 경증이 되면 고민해 보도록 하죠.”

“이거 참, 정말 고맙군요!”

구시렁대던 그가 그제야 환히 웃었다.

입이 막혀 붉으락푸르락하는 레인을 달래며 클레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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