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반복되는 과거.
“후우…….”
어찌나 안절부절못했는지 아리스는 그녀를 새벽까지 어르고 달랬다.
상황이 그랬던 만큼 에단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란 것이 아리스의 말이었다.
마음을 자각한 모습이 귀여워 자신이 조금 놀린 것뿐이라는 아리스의 말에 겨우 진정은 했지만, 그때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서 더 잠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어릴 적에는 오랜만에 볼 때마다 키가 훅훅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 많이 달라졌다고 여기기만 했다.
그가 갑옷을 입거나 정복을 입고 나올 때면 영애들이 호들갑 떠는 것을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그러고 보면 연무장에서 입는 간편한 옷만으로도 그의 체격이 남다른 게 고스란히 드러나고는 했다.
‘동굴에서 봤던 몸을 떠올리면 왜 그랬는지도 이해가 갈 것도…….’
클레리아는 말없이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미쳤어, 정말. 자꾸만 그때 기억을 떠올리고.’
“하아…….”
왠지 당분간은 에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 같았다.
당분간 그를 만나는 건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똑똑
“응, 들어와.”
문이 열리고 아리스가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아가씨 황실에서 서신이 왔어요.”
“황실에서?”
서둘러 서신을 열어 확인하는 클레리아의 얼굴이 굳어 갔다.
<바모른 국에서 치유사 요청. 대공 플로릭 아이문트를 치유할 목적으로 앙테로트 지방에 블린트 백작령으로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와 레인 세릭스를 파견한다.
-누에른 펠리시아스>
‘플로릭 아이문트? 그리고…… 블린트?’
당혹감에 서신을 든 그녀의 손이 떨렸다.
블린트는 다름 아닌 회귀 전, 남편의 성이었다.
* * *
원형의 알현실 안에 마련된 찬란한 의자에 앉은 누에른이 언짢음을 드러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은 되나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라 어찌할 수 없이 그대를 불렀다. 이해하길 바란다, 프라이어스 영애.”
“아닙니다, 폐하. 소신은 이제 괜찮으니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누에른은 손잡이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뱉었다.
“국경을 마주한 바모른 국의 세노안 지방은 우리 앙테로트 지방과 함께 주 연료로 쓰이는 세듐광산이 가로질러 있다. 그래서 늘 신경전이 함께 하는 곳이지. 블린트가 경계를 잘 지켜내고 있으니 망정이나 성가시기 짝이 없어. 될 수 있으면 파견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가야 했다.
클레리아는 황제가 파견을 금지한다면 스스로 요청해 갈 요량이었다.
사실 바모른 국의 대공 플로릭의 병환 사건은 이미 그녀가 겪은 일이기도 했다.
회귀 전에.
그때는 새로운 치유사가 없어 파견할 인원이 모자랐고, 끝내 바모른 국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그 때문에 결국 플로릭은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라세르가 분노해 라스칸트 국경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앙테로트 지방은 블린트 백작가가 지키고 있는 가장 큰 국경 중 하나였고, 이 싸움은 케일론이 지방에 내려가 국경을 지키느라 수도의 집을 비우는 계기가 됐었다.
‘그러니 이번엔 가야 해. 가서 바모른 대공을 치료해서 국경이 침공되는 일은 막아야 해.’
비록 지금은 케일론 블린트와 결혼한 것은 아닌지라 무시한다면 할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회귀 전의 사건이 변함없이 일어났다는 것에 클레리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대가 타국에서 힘을 발현할 수 있게 된 이상, 엘라단 사건으로 우리는 몇 가지를 확실히 다른 나라들에게 못 박을 수 있게 되었다. 치유사가 내국이 아니면 힘을 못 쓴다는 의심을 잠재웠고, 더불어 그대의 힘으로 부상자를 치유했으니 입지가 단단해졌지.”
그러나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공교롭게도 이번 파견에도 그대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습격으로 그대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확인은 했지만, 자네의 공적이 아스칸 대륙에 파다하므로 바모른은 더욱 치유사 중 자네가 파견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을 것이야. 이해해 주길 바라네.”
“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안전을 위해 레인 세릭스도 함께 보내는 거니 아무쪼록 임무를 잘 완수하게. 더불어 대공의 거취는 블린트 저로 정했으니 안전에 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예?”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필 아이문트 대공을 모시는 곳이 블린트 백작 저라고?
결혼을 한 건 아니니 지금은 아무 사이가 아니지만, 어딘가 난처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러지? 문제라도 있는가?”
“아뇨. 아닙니다, 폐하.”
“3기사로 인정받은 케일론 백작이 경계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백작령에 가 있는 상태니 너무 걱정 말게.”
“……예.”
산 넘어 산이었다.
회귀 전의 남편까지 그곳에 있다니.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상관은 없을 테지만…….’
찜찜함을 안은 채 클레리아는 알현실을 나왔다.
* * *
플로릭의 치유사 요청은 삽시간에 대륙에 퍼졌다. 거기에 더해 연료로 쓰이는 세듐의 최대 수출국이기도 한 바모른 국과 라스칸트의 외교적 관계도 시시각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일 정도면 플로릭 아이문트가 블린트 가로 이동하게 될 거야.’
싣고 갈 비상 약품을 확인하던 클레리아의 뒤로 칼리에가 조용히 다가왔다.
“준비는 잘 되어 가나요?”
“아, 칼리에 님.”
클레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칼리에가 아래위로 천천히, 그리고 애틋하게 살폈다. 그리고는 속상함을 애써 삼키며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정말이지 곤란한 일들만 연속으로 일어나니…… 폐하도 어찌하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 야속하네요.”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그녀는 옷 소매와 칼라, 깃. 머리칼까지 단정히 손으로 빗겨 주길 반복했다.
손길을 하나하나 느끼며 클레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꼭……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네.’
“당신을 잘 돌보겠다는 것처럼 굴어 놓고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해요.”
물기 어린 말투에 클레리아가 칼리에를 바라봤다.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녀의 코끝이 붉었다.
“이미 많은 걸 하셨는데요.”
그 말에 칼리에의 입술이 떨렸다.
“생각 같아서는 1년은 당신을 곁에 붙들어 놓고 싶은데.”
아쉬움이 가득 담긴 손길이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칼리에 님. 레인 님이랑 리암 경도 같이 가는걸요. 두 분 실력 잘 아시면서.”
“조심해야 해요. 응? 절대로 함부로 나서지 말고요.”
“그럴게요.”
물가에 내놓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마차에 오를 때까지 칼리에는 클레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칼리에 님이 어지간히 네가 걱정되나 보다.”
창밖을 보던 레인의 말에 클레리아가 멋쩍게 웃었다.
“괜찮으시다면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에단이 불쑥 창가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클레리아가 홱 뒤로 물러났다.
“네, 네. 아니, 응.”
‘까, 깜짝이야.’
그가 빙긋 웃고 멀어졌고, 레인이 물끄러미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지금 내가 잘못 본 건가?”
“뭐, 뭐를요?”
“……에단 경이 나타나자마자 너 펄쩍 뛰어 도망간 느낌인데. 아냐?”
“그, 그럴 리가요!”
레인의 눈썹이 꿈틀댔다.
“뭐…… 아니면 말고.”
그는 팔짱을 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휴…….’
소리죽여 숨을 고른 그녀도 반대편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
촥!
화들짝 놀란 레인이 뭐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클레리아가 다급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 이, 이쪽 햇볕이 너무 세네요.”
‘하필 에단이 있을 줄이야.’
그녀가 내다본 창문 곁에는 에단이 붙어 호위하던 중이었다.
“아휴, 이쪽이 그늘이라 눈이 하나도 안 부셔서 바깥 구경하기 좋네. 그렇죠? 레인 님? 하하하하.”
“…….”
아까보다 어딘가 더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곤 물었다.
“그나저나 너, 내가 전에 말해 줬던 거 연습하고 있어?”
“아…….”
클레리아는 예전 렝터 자작령에 다녀오고 나서 레인이 따로 당부했던 일을 떠올렸다.
“하고는 있는데…….”
“꺼림칙해도 해야 해. 너나 나는 특히. 다른 치유사들은 몰라도 우리 둘은 그 방법을 쓰기도 쉬울 뿐더러, 여차할 때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 수단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젠 오히려 네가 필수로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레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레리아 역시 어딘지 숙연한 얼굴을 하다 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 *
“아우으, 허리야.”
마차에서 내려 몸을 풀며 레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클레리아 역시 내려 뻐근한 허리와 다리를 풀어주었다.
“그래도 이번 임무는 함께 하게 되어서 기쁘네요, 클레리아 님.”
리암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녀 역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네, 저도 이렇게 세 분과 함께 다니는 게 훨씬 마음이 놓여요.”
“나 혼자로는 불안하다는 뜻이야?”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레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어딘가 쀼루퉁한 얼굴의 에단이 물컵을 든 채 서 있었다.
“야야, 내가 있으니까 한결 더 든든하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거지. 내가 믿음직하잖냐. 그렇지 않습니까? 레인 님?”
“어, 그 입만 좀 다물면 더 믿음직할 텐데.”
“……너무하세요. 전 나름 우리 일행 중에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하고 있는 거라고요!”
“이상하군, 그럼 왜 난 리암 경이 입만 열면 짜증이 솟구치는 거지? 분위기 메이커 치고는 굉장한 능력인데?”
“그건 레인 님이 남자분이시니까 그런 겁니다. 클레리아 님 같이 아리따운 여성분이었다면 제 말에 분명 웃어 주실…… 으갸갸갸갹!”
“오냐, 남자 치유사는 불만이다, 이거냐?”
“마, 말이 헛나갔어요. 귀, 귀 좀 놔주세요! 레인 님!”
“시끄러워, 오늘 본때를 보여 주지.”
레인이 교활한 미소를 지은 채 리암의 귀를 잡고 멀리 가 버렸다.
한차례 두 사람의 폭풍이 지나가고, 에단이 컵을 내밀었다.
“자.”
“고, 고마워.”
물을 받아 든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마셨다. 어디서 구해 온 건지는 몰라도 참 시원하고 달았다.
“하…… 물맛 좋다.”
빈 컵을 받아든 그가 멀뚱히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왜?”
“대답. 안 해 줄 거야?”
“대답?”
“나로서는 불안한 거냐고.”
클레리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옷을 둘렀는데도 단단함이 묻어나는 체격과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는데 불안하냐니.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에단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씩 웃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 삐칠 뻔했어.”
“…….”
두근 두근 두근
아, 또다.
또 가슴이 제멋대로 빨리 뛰기 시작한다.
클레리아는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 숙였다.
“내…… 대답이 그렇게 중요해?”
“그럼 네 대답 말고 누구 말이 중요한데?”
마치 그녀의 의견 없이는 세상 누구의 의견도 필요 없다는 듯한 뉘앙스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클레리아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고, 이어 타려던 레인이 잠시 멈칫하다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무슨 일 있어?”
다시 출발한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클레리아를 향해 레인이 물었다.
“네?”
“에단하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그를 좋아해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무척이나.
하지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리 없었다.
클레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자 레인 역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에단은 서슴없이 표현하는구나.’
새삼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그간 에단의 마음을 몰랐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정도였다면 눈치 못 채던 그녀가 바보나 다름없었다.
솔직한 그의 모습에 기쁘고 설레었지만, 클레리아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다른 때도 아닌 특히나 지금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좋아하는 감정이란 것에 들떠 레인에게 솔직한 마음을 마구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이유는.
케일론 블린트.
회귀 전,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려 했었던 남자. 그 때문에 죽어 효수되어야 했던 사람.
지금 그를 만나러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비록 아무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마지막을 지켜본 남자였으니까.
실질적으로는 플로릭을 치료하러 가는 것이지만, 그의 저택에서 집주인을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건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했다.
케일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이 자신이란 생각에 클레리아는 더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별 대화 없이 인사치레 정도만으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바람도 모른 체 백작 저로 향하는 마차의 속도는 점점 더 붙기 시작했다.
* * *
아침에 출발한 일행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블린트 저에 근처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가면 백작 저에 도착할 겁니다.”
리암의 말에 클레리아는 커튼을 살짝 들어 밖을 바라봤다. 멀리 낯익은 건물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택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는데, 언제라도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장애 없이 받아 보거나 직접 감시하기 위해 저런 위치를 정했다고 들었었다.
회귀 전 클레리아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일로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점차 가까워져 오는 저택 모습에 괜스레 긴장돼 클레리아는 서둘러 들었던 커튼을 놓았다.
얼마 안 가 속도가 줄며 마차가 저택 앞에 섰다.
“치유사 일행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쪽에서도 꽤 분주했는지, 많은 고용인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대공을 모실 방은 2층에 마련되어 있으며 치유사님과 호위 기사님들의 방도 2층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방해되실까 해 2층은 그 외의 인원은 머물지 않을 예정이며, 대공님의 호위들도 역시 2층에서 머물 수 있게 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이웃 나라의 왕족을 모시는 일이니 다들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내부는 이미 정리가 끝난 듯했으나 몇 번이고 확인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시녀장과 집사가 확인의 확인을 거듭했다.
“싣고 오신 물품은 필요하실 때마다 찾기 쉬우시도록 1층 중앙현관 근처에 마련해 두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일단 2층 전체를 좀 둘러볼 테니까 리암 경과 에단 경도 도와주겠어? 클레리아는 대공님이 계실 방을 확인해 줘.”
“백작님은 계십니까?”
“백작님께서는 국경을 시찰하고 오겠다 하셔서 지금 저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밤늦게나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에단이 케일론에 대해 묻는 것을 듣고 잠시 클레리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택을 비운 듯해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짐은 고용인들에게 맡기고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공을 모실 방은 2층 제일 오른쪽 끝 방이었는데, 외부의 방해가 적고, 휴식에 용이해 보였다.
클레리아는 창문과 침구를 꼼꼼히 살폈다. 개인 욕실도 딸려 있어서 위생에도 좋을 것 같았다.
“음…… 이 정도면 대공께서 머무르시는데 불편할 건 없겠네. 고용인이 근처를 자주 지나다닐 것 같지 않고.”
“대공이시니 각별히 사적인 공간이 되도록 신경 썼는데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목덜미를 약간 덮는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머리칼. 그리고 올곧고 묵직한 시선. 말수가 적어 굳게 다문 입술까지.
기억보다 좀 더 앳되다는 것만 빼면 그대로였다.
열린 문 옆으로, 케일론 블린트가 서 있었다.
“…….”
잠시 머리가 멍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이렇게 멀쩡히 마주했다는 사실이 현실 같지 않아서.
클레리아는 그를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함을 느낀 케일론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치유사님?”
그가 가까이 오는 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져서. 두 손을 가슴에 맞잡은 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프라이어스 영애님 맞으시죠?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되었을 때였다.
케일론의 가슴을 뚫고 나오던 시퍼런 검날.
높은 창에 만신창이로 매달려 있던 그의 머리까지.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클레리아가 비틀거렸다.
“영애?”
케일론이 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하지만 클레리아는 회귀 전 그의 모습이 자꾸만 겹치는 통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심상치 않자 그가 제대로 부축하려 할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케일론의 등 뒤로 에단이 방에 들어섰다.
“에단…….”
힘없는 목소리에 그의 눈초리가 매섭게 케일론에게 향했다.
“치유사님께서 몸이 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에단은 성큼성큼 들어와 케일론의 손에서 클레리아를 빼내 부축했다.
“그런 것 같군요, 장시간 이동으로 좀 지치신 것 같습니다. 잠시 휴식 후에 다시 얘기하셨으면 좋겠군요. 실례지만…….”
그가 말끝을 흐리자 케일론이 살짝 묵례했다.
“기억 못 하시는가 보군요. 전 이 저택의 주인 케일론 블린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칼리스터 경. 저와 검술 시합도 함께 참여하셨지요.”
에단은 ‘아.’하며 기억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관심이 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일단 치유사님을 방에 모셔드리고 마저 얘기하지요, 백작 각하.”
묵례를 교환하고 에단은 서둘러 클레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클레리아? 무슨 일이야? 아직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괜찮은지 살피려 그가 계속해서 눈을 마주하려 했으나 클레리아는 무슨 일에선지 계속해서 시선을 피했다. 거기에 여전히 몸의 떨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긴 한데…….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아까 그 블린트 백작이 네게 해코지한 거야?”
혹여나 싶은 마음에 싸늘하게 묻는 그에게 클레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그런 거. 그냥 준비된 방이 적당하냐고 물으셨어. 그뿐이야.”
“근데 왜 그래?”
“그건…….”
클레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고, 에단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당장 내일 대공이 올 테니 오늘 안에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일단 그는 침대에 클레리아를 앉혔다.
“그럼 우선 좀 쉬고 있어. 대충 정리되면 보러 올 테니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에단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고, 그가 사라진 후 클레리아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자꾸 빛을 잃었던 그의 눈이 겹쳐서…… 끔찍했던 그 사람의 결말이 자꾸 보여서. 어떻게 해…….’
무거운 한숨이 방에 내려앉았다.
* * *
다행스럽게도 자정을 넘기기 전에 대공 아이문트를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만 아니라면 대응할 준비는 모두 마친 것 같군요.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케일론의 말을 듣던 레인이 힐끗 에단을 바라봤다.
“아까 보니 클레리아가 좀 이상하던데 지금도 안 보이네? 무슨 일 있어? 몸이 안 좋다고 해?”
“네 상태가 좀 안 좋은 듯해 먼저 쉬라고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내가 가서…….”
레인이 급히 말을 멈췄다. 케일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씀 중에 실례했습니다.”
“아뇨, 전달할 건 모두 했습니다. 저택을 방문해 주신 분들을 늦은 시간까지 피치 못하게 부려먹은 모양새가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상황이니까요.”
레인의 말에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모였던 고용인들은 그제야 해산해 뿔뿔이 흩어졌다.
“혹여 허기가 지신다면 일행분들이 간단히 드실 뭔가 준비해 드릴까요?”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에단이 순간 멈칫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우유 한 잔을 따뜻하게 데워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대답과 함께 멀어지는 케일론을 바라보며 에단을 비롯한 레인과 리암도 2층에 마련된 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가 상태를 봐야겠어. 혹 그 녀석 다 안 나았는데 무리하는 걸지도 몰라.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해.”
레인이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에단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냥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단 경.”
“왠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녀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건 오히려 레인보다 에단 쪽이었다.
그러나 아까 클레리아의 반응이 너무나 생소했다. 지금껏 누군가를, 특히나 남자를 보고 그런 반응을 했던 적이 없었다.
‘뭐지……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어. 하지만 뭔가……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에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빠졌다.
블린트 백작과 클레리아가 따로 만난 적은 분명 없을 텐데. 근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그럼 경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
탐탁지는 않았으나 그의 의견을 존중한 레인이 말했다.
“클레리아가 잠드는 것만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에 레인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 푼수.’
그러나 걱정하는 사람을 데리고 골릴 생각은 들지 않아 그 또한 방으로 향했다.
“에단, 필요하면 바로 불러.”
리암은 레인이나 그가 골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재빠르게 방에 들어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에단은 말없이 클레리아의 방 앞에 서서 복도를 비추는 달을 바라봤다.
‘내일부터 또 긴장의 연속일 테니 잠이라도 푹 자야 할 텐데.’
뚜벅뚜벅
몇 분쯤 흘렀을까.
누군가의 발소리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케일론이었다.
그의 손에는 손수 데우기라도 한 건지 쟁반에 곱게 올린 우유 한잔이 들려 있었다.
부탁하긴 했어도 고용인을 부릴 줄 알았는데, 설마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올 줄이야.
그러나 당황한 건 에단만이 아닌 듯했다. 클레리아의 방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케일론 역시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칼리스터 경. 왜 여기 계십니까?”
멀뚱히 묻는 그의 말에 에단이 표정을 굳혔다.
“제 치유사님을 호위 중입니다.”
“아…….”
의외의 상황에 조금 당황한 듯 그가 멋쩍은 얼굴로 어눌하게 말했다.
“저, 잠시 비켜 주시면 아까 부탁하신 우유를 영애께 드리고 싶습니다만.”
순간 에단은 머릿속에 힘줄이 서는 느낌이었다.
부탁하긴 했는데 그걸 당신이 왜 직접 클레리아한테 주려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에단이 양손을 내밀었다.
“한 달 좀 넘은 엘라단 아카데미 사건을 기억하시겠죠? 그때 이후로 치유사님께 가는 모든 음식과 물건은 호위 기사인 절 통해야 합니다. 호의는 감사드리나 백작님의 접근은 실례지만 여기서 멈춰 주십시오.”
쌀쌀맞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케일론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대대로 폐하께 충성하고 있는 블린트 가의 백작인 제게도 말입니까? 솔직히 좀 의외군요.”
“불쾌하십니까?”
파스슷
그들의 시선이 부딪치며 스파크가 이는 듯했다.
그러나 에단은 비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케일론은 강제적으로 그를 움직이게 할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케일론은 에단에게 컵이 든 쟁반을 건넸다.
“영애께 부디 마음 편히 지내시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알려 주십사 전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뭔가 찜찜한 얼굴을 한 케일론이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에단 역시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데 케일론이 돌아섰다.
“제 기억이 조금 잘못됐던 듯싶군요. 시합 때 봤던 칼리스터 경은 이렇게까지 이유 없이 의심부터 하는 분이 아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불편하셨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지 불과 한 달 조금 지난 일에 불과한지라.”
그러자 비로소 납득하는 얼굴로 케일론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무섭게 노려보던 에단은 클레리아의 방에 노크하고 곧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 녀석 좀 보게. 라이벌은 초장에 없애겠다. 이건가? 아주 그냥 살벌하기 짝이 없네.’
말소리에 문틈으로 엿보던 레인이 혀를 내둘렀다.
케일론이 손수 우유를 가지고 온 건 의외였으나 에단의 반응 역시 기가 찼기 때문이었다. 클레리아를 위해 선을 긋는 척했지만…….
‘뒷모습은 그야말로 근처에 더 다가왔다간 다 작살내 버리겠다는 호랑이 그 자체였다고.’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레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은 이제 점점 더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은데…… 클레리아 녀석 어떻게 감당하려고, 쯧쯧.’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방문을 닫았다.
* * *
“클레리아, 자?”
에단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에단?”
“아무것도 안 먹고, 잠도 못 잘까 싶어서.”
내미는 우유 잔을 클레리아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실은 누가 가져왔는지 이미 안다.
‘방문 앞에서 싸우면 다 들린다고!’
난감했지만 애써 모른 척 웃으며 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에단.”
“기분은 좀 진정됐어? 몸이 아픈 건 아냐?”
“응, 아까 좀 안 좋았었나 봐.”
그녀는 천천히 우유를 들이켰다. 속이 따뜻해지자 경직됐던 몸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좀 놀랐네. 케일론이 저렇게까지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들었어.’
에단과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클레리아는 어딘가 좀 다른 그를 느꼈다.
하긴 그녀 또한 회귀하며 많이 바뀌었으니, 주변인도 바뀌지 말란 법은 없겠지.
‘다만…… 다시 마주치면 그땐 좀 더 노련하게 대해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 그 엘라단 테러도 잘 이겨낸 너잖아? 대공을 치료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레인 님도 계시고, 리암과 나도 있고.”
따스하게 웃어 주는 그를 보며 클레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런 종류의 걱정이 아니라 이건 오롯이 나의 문제인데…….’
클레리아는 겨우 입가를 움직여 웃었다.
그는 알지도, 이해할 수도 없을 문제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응, 알았어. 고마워, 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