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52)

제22장. 타격을 입다.

[……리아, 클레리아.]

눈도 제대로 뜨이질 않고,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주변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손끝 하나 움직여 주질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심장이 뛰는 것도.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쥐어짜여 간신히 이어 가고 있다는 느낌일 뿐, 그 어떤 것도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 모든 게 답답하고 괴롭기만 하구나.’

아주 가끔, 멀리서 울먹이는 칼리에 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늘 감정에 충실하던 레인의 목소리도 이상하리만큼 굳어 있었다.

[클레리아, 제발…… 눈을 뜨거라 내 딸.]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애원이 귓가에 맴돌기도 했다.

왜지?

왜 다들 분위기가 그렇게 무거운 거야?

모르겠어.

생각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지쳤어.

마치 공허함에 몸이 녹아들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레리아는 멍하니 대답했다.

<아이야, 네 삶은 많이 바뀌었느냐?>

“네, 아주 많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너는 그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아냐, 돌아오기 전보다 좋았던 건 확실해.

그런데…… 그런데 뭔가에 걸린 듯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자꾸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아요. 저 때문에…… 다치고 죽는 사람이 생겨요.”

클레리아의 눈이 점차 빛을 잃어갔다.

<그래서 후회하느냐? 돌아온 것을?>

아버지, 칼리에, 레인, 아리스, 세실리아, 리암, 찰스, 라기에, 셀림.

그리고 에단까지.

후회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그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며 천천히 고개가 떨구어졌다.

후회하느냐고? 처형대에서 목이 날아가던 순간 다시 돌아와 살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 제가 너무 이기적일까요?”

<…….>

“하지만…… 그렇다 해도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겪어 보지 못했던 상황.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건 없어요. 너무 이기적이라고 욕할지라도…… 나는 그걸 놓을 자신이 없어.”

<그럼 되었다. 네가 네 삶을 찾는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방은 고요했던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쭉 그래 왔던 것처럼.

‘나…… 지금 뭐하고 있었지?’

흐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클레리아.”

‘……힘들어.’

도무지 애를 써도 천근만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수척한 얼굴의 에단이 보였다.

“에…… 단?”

왠지 몸이 너무 나른하고 힘들었다. 덮고 있는 이불조차 무거워 갑갑할 정도였다.

곁에 앉아 있는 그는 애틋한 시선으로 클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게 식은 그 손이 간혹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돌아올 줄 알았어.”

숨 쉬는 것도 버거워 겨우 시선을 움직이자, 가운 안 그의 몸에 감겨 있는 붕대가 보였다.

클레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몸…… 괜찮아? 괜찮은 거야? 에단. 괜찮은…….”

힘없이 뻗어 버둥거리는 손을 그가 조심스럽게 잡아 주었다.

“응, 괜찮아. 네 덕분에.”

“왜 내 덕이야?”

에단의 눈이 커졌다.

클레리아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나 때문에…… 날 지키려다가 네가… 나 때문에……!”

모르겠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렸다. 이런 자책과 좌절. 지금은 많이 잊고 살았던 감정들이었는데.

그것들에 짓눌려 살았던 회귀 전의 나날로 순식간에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근위대든, 치안대든 어디든 네 자리로 돌아가, 제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감정을 마구잡이로 드러내다가는 늘 후회만 하는데.

파리한 에단의 얼굴을 보자 깊숙이 억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클레리아…….”

버둥거리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에단이 말렸으나 클레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도저히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내가 널 죽게 만들기 전에 제발 다른 곳으로 가……. 그렇게 해 줘.”

“갈 곳이 없어. 나는 네 곁이 아니면 그 어디도 갈 곳이 없어.”

그 순간 에단은 억척스레 클레리아가 얼굴을 가린 손을 끌어내렸다.

“널 지키기로 맹세한 날부터 나는 그 어디도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그런 날 다른 곳으로 내치는 건…… 그거야말로 날 죽이는 거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염치없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이런 말들을 끝내 놓을 수 없는 건…….

클레리아는 손에 전해지는 그의 온기에 눈을 감았다.

“몸…… 정말 괜찮은 거야?”

간신히 진정한 클레리아가 훌쩍이며 묻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응, 칼리에 님이 매일 집중 치료를 해 주고 계셔.”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몸이 무거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녀가 애쓰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너도 지금 상태가 안 좋아. 그러니 그냥 쉬어.”

“나…… 왜 이러는 건데?”

에단의 얼굴이 잠시 당혹감에 휩싸였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잠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그가 어렵사리 열었다.

“클레리아. 넌 폭렬석이 터지고 난 후, 치유력이 폭주했어.”

“폭주?”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아니, 못하는 건가?

게다가 그녀는 어느새 라스칸트의 프라이어스 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엘라단 아카데미의 숙소에서 세실리아와 있던 것이었는데.

정신이 멍했던 것도.

몸이 이상하리만큼 무겁고 무기력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인 건가?

“레인 님이 발견될 때 폭주 상태였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고?”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산 거야, 네 덕분에.”

아무래도 누워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클레리아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거리는 팔을 억척스럽게 세워 일어나려 고집을 부렸다.

“그러지 말라니까.”

“일으켜 줘. 부탁해, 에단.”

단호한 그녀를 본 그는 짧은 한숨을 토한 뒤 도와 앉혀 주었다.

“치유사는 타국에서 힘을 발휘 못 하잖아. 그런데 내가 폭주를 했다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 거지? 대체 어떻게?’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던 에단은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아직 진상 파악 중이니까 넌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 써. 네가 치유력을 발현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기도 했으니까. 정확한 이야기는 회복된 후에 하자.”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은 클레리아가 고민하는 듯했으나 역시 힘에 부친 듯 고개를 휘휘 털었다.

“응, 그래야겠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에단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클레리아?”

당황한 그가 그대로 클레리아의 침대에 딸려 갔다.

‘칼리에 님이라면 알아서 잘해 주고 계시겠지만.’

“네 상태 확인하고 싶어. 내 눈으로 봐야겠어.”

“됐어, 몸도 성치 않으면서 무슨.”

“확인할 거야! 그래야겠어!”

강경한 반응에 결국 에단은 침대에 클레리아와 마주 걸터앉았다.

걸치고 있던 가운을 내리자 붕대로 온몸이 칭칭 감겨 있는 그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클레리아는 곁을 스쳐 쓰러지던 그가 겹쳐져 잠시 몸을 떨었다.

팔. 어깨. 목.

치유력을 흘려보내자 회복 중인 그의 상태가 클레리아에게 전달됐다.

“…….”

에단의 눈이 묵묵히 치유에 집중해 있는 클레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길게 내려진 속눈썹도, 파리한 안색이나 지그시 집중한 표정도. 마치 눈 안에 각인이라도 하듯 그는 조용히, 그리고 깊게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클레리아가 그의 몸을 돌리려 했다.

“이제 됐어. 회복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잖아.”

가운을 입으려는 그를 클레리아가 말렸다.

“등 쪽은 확인 못 했어. 등이 제일 심했잖아!”

“괜찮다니까. 네 힘이 폭주한 덕에 바로 치료됐어. 나 그때 정신도 차렸었다니까.”

거의 빈사 상태이긴 했지만.

어물쩍 넘어가려는 그의 시도에도 클레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만있으라니까!”

“……!”

이렇게까지 버럭 소리 지르는 건 처음인지라 에단은 그녀의 기세에 그만 눌리고 말았다.

결국, 등을 허락하자 클레리아가 붕대가 감긴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뭔가…… 좀 쑥스러운데 금방 끝내겠지.’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클레리아의 진찰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그의 등을 본 그녀의 반응은 달랐다. 붕대 위로도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감촉. 치유력이 흘러 들어가자 난감할 정도로 얼기설기 어지럽게 얽힌 세포들.

클레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등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살짝 걷어 내렸다.

“…….”

그냥 보기에도 엉망으로 결합 된 피부들에 큰 흉들이 가득했다. 이건 제대로 된 치유가 아니라 그저 상처를 봉합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모습이었다. 그것도 마구잡이로.

폭주로 에단을 고쳤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에단을 치유했다고? 내가?

그 아래의 조직들은 제대로 된 조치를 받았는지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겉은 너무도 다름에 충격이 컸다.

치유력은 어느 정도 되돌리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한번 남아 버린 흉터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집중력을 요해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고.

클레리아는 천천히 붕대를 돌려놓았다.

“맞지? 네가 이런 거 알면 칼리에 님이 섭섭해하신다.”

에단은 가운을 서둘러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게.”

이런 몸을 하고도…… 내가 본인을 치유해 줬다고 하는 거야? 이딴 것도 치유라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그녀는 간신히 울컥 올라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역시 칼리에 님이셔.”

눈물을 보일 염치도 없어서.

그래서 웃었다.

울었다간 오히려 에단이 더 안절부절못하며 달래겠지. 내 탓인 걸 그렇지 않다고 하며 세상에 있는 온갖 다정한 말로 위로하려 들겠지.

그걸 받을 자격도 없어. 그러니 웃어.

웃어, 클레리아.

“아카데미도, 습격과 너에 대한 일도 제대로 정리된 게 없어.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제대로 진상 파악하자. 그러니 그때까지 제대로 쉬어. 그때가 되면 또 엄청 바쁠 테니까.”

“응, 그럴게.”

에단이 돌아가고, 클레리아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가씨!”

아리스가 울먹이며 들어와 손을 붙들고 한참을 울고, 얼굴을 닦아 주고 머리를 빗겨 줘도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보름이나 깨지 않으셔서 아가씨가 죽는 줄만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아가씨, 아직도 많이 힘드시죠? 제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까 하루빨리 기운 차리세요. 네?”

“……아리스.”

그녀를 애타게 걱정하는 아리스를 보다가 클레리아는 울컥하는 속마음을 입 밖에 냈다.

“내가 에단을 망가트렸어. 어떡하면 좋지?”

“아가씨?”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걸 갚을 수 있지? 내가 어떻게 해야…….”

“아니에요, 아가씨. 아가씨는 그분의 생명을 구하셨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구한 게 아니야.”

“아가씨…….”

과호흡에 발작하듯 떠는 클레리아를 끌어안고, 그런 아리스에게 매달려 클레리아는 밤새 절규했다.

* * *

똑똑똑

노크 소리에 침대에 있던 레리안이 귀찮은 표정을 짓고 문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지?”

“서신이 도착했……!”

순간 편지를 전달하던 하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돌아섰다.

레리안이 반라의 상태로 나온 탓이었다.

“그래, 돌아가라.”

서신을 받아들고 당황한 그녀와는 달리 레리안은 자연스럽게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왔다.

편하게 누워 편지를 읽는 그의 옆으로 뭔가가 꿈틀대다 이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에요?”

역시나 마찬가지로 반라의 모습을 한 엘레나였다.

“……일이 좀 틀어졌군요.”

레리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엘레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에 있는 서신을 낚아챘다. 그리고 읽어 내려가다 불같이 화를 냈다.

“에단이 다쳤어요?”

“뭐, 계산에는 다 포함되어 있던 겁니다만.”

“에단이 다친다는 소린 없었잖아요!”

그녀가 세차게 던지는 서신을 간단히 피하며 레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멀리 봤을 때 칼리스터 영식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니 손을 써 둘 필요는 있지요.”

“건드리지 말아요. 에단은 안 돼!”

“어째서요?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에단 칼리스터는 당신이 가장 경멸하는 여자에게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사는데?”

“…….”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레리안은 다정하게 엘레나를 끌어안았다.

“속상하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겨누는 칼날의 상대는 제대로 하셔야죠. 그는 살았습니다. 3공작가의 공자인데 당연히 최고의 의료진이 붙어 치료하겠죠. 당신이 생각할 문제는 그가 아니라 이번에도 숨이 붙어 있는 프라이어스 영애입니다.”

레리안은 분함에 꼭 깨물고 있는 엘레나의 입술을 엄지로 살며시 훑었다.

“프라이어스 영애가 살아 있는 한 에단은 계속해서 위험해질 겁니다. 그를 구하고 싶으면 곁에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맞지요.”

“……심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물론, 에단에게요.”

“물론입니다.”

그는 가볍게 엘레나의 이마로, 뺨으로. 그리고 목덜미와 쇄골로 차례로 입을 맞춰 내려갔다. 그녀 또한 자연스레 그의 리드에 맞춰 서서히 침대로 몸을 눕혔다.

* * *

“클레리아!”

“칼리에 님? 레인 님?”

간단한 식사 후 책을 읽고 있는데, 칼리에와 레인이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로 처음 보는지라 칼리에의 반응이 특히 격했다.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달음에 달려와 와락 클레리아를 끌어안았다.

“흑…… 클레리아. 괜찮은가요? 어디 더 이상한 곳 없어요?”

칼리에가 상태를 살폈다 끌어안기를 반복했다.

“네, 괜찮아요. 아직 기력이 좀 달리긴 하지만 아프지 않아요. 칼리에 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두 사람 다 거의 시체가 되어서……. 그렇게 불러댔는데도 반응도 없고!”

“레인.”

칼리에가 자제시키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 였구나.

한껏 숙연해진 클레리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두 분이 국경에 오신 건가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폐하께서 파견하셨어요. 상태가 워낙 위중했던지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클레리아가 다시 물었다.

“혹시 그럼…… 제가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정확하질 않아서. 정말 두 분을 본 걸 수도 있겠네요.”

“그 당시 의식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현실하고 많이 혼동이 왔을 거예요. 아버님이신 공작 각하도 오셨었는데…… 모르셨나요?”

그때 귓가에 그녀를 붙들고 애원하던 타이엔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알고는 있었으나 생각 이상으로 안 좋았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보름이나 의식이 없던 사람치고는 쌩쌩하네? 여전히 예쁘기도 하고.”

응?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말에 클레리아와 칼리에가 멀뚱히 레인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한 레인이 먼저 버럭 소리 질렀다.

“참나, 그래요. 안 돼 보여서 안 어울리는 소리 좀 했습니다. 하룻강아지는 이해하겠는데 칼리에 님까지 그러시면 섭섭해요, 진짜!”

“그런가요? 훗, 난 또 클레리아가 아픈 후로 레인도 못 고칠 병에 걸렸나 놀랐네요.”

“칼리에 님!”

그의 우는소리에 클레리아도 칼리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구호소 쪽을 돌보러 칼리에가 먼저 일어섰다.

“몸 잘 추스르고. 알았죠? 폐하도 완전히 낫기 전까진 절대 찾지 마시라고 신신당부 드렸으니까 편하게 쉬어요.”

“네, 고맙습니다. 칼리에 님.”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의 당부를 반복하고 프라이어스 저를 떠났다.

“레인 님은 안 가 보셔도 되나요?”

칼리에가 나간 후, 문을 조용히 닫은 레인이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단둘이……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둘이서만이요?”

클레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인은 천천히 그녀의 곁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응, 네 폭주에 대해서.”

“……그래서 치유사의 폭주가 무서운 거야.”

차분히 그의 설명을 듣던 클레리아가 레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에단의 등이 그렇게 엉망이었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상처를 걷어 내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살리려는 본능이 워낙 강한 폭주로 엉겨 든 피부 조직이었어. 오히려 잘못 건드렸다가 상황만 더 나빠질 것 같았지. 그래서 그냥 두고 남아 있는 내상과 부상을 치유한 거야.”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때 상황을 떠올리는 걸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넌 이제 네 마음을 제대로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안 돼. 한 번 폭주했던 이는 다시 일으킬 가능성도 높거든. 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본능이 눈 떴다고나 할까. 단 한 번, 스위치가 켜지는 건 어렵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아.”

몸이 위험한 상태가 됐다는 것에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그리고…….”

레인은 할 말이 아직 남았는지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지금까지 얘기할 때와는 모습이 사뭇 달랐다.

마치 깊고 어두운.

본인조차 숨기고 싶어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클레리아 네 원래의 명이 좀 줄었을 거야. 에단이 꽤 빠르게 그걸 막은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명이…… 줄다뇨?”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갑자기 왜 수명 얘기가 나오는 거지?

“엄청난 파급력이 있는 폭주는 경증의 사람들을 단번에 치유해 버리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지. 그런 힘에 대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레인의 메마른 시선이 클레리아를 깊이 꿰뚫듯 꽂혔다.

“평소에 왜 치유사가 자신의 체력이나 기력을 잘 관리하는 거겠어? 치유력을 쓸 때 치유사의 생명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야. 잘 관리해서 적당히 쓰면 상관없지만, 폭주는 달라. 말 그대로…… 치유사의 수명이 줄어들어.”

몰랐던 사실에 클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런…… 일이.’

얼마일지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수명이 깎여 나갔다는 건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심장 박동이 점차 거세졌다.

그 와중, 문득 예전에 들었던 레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잠깐, 나는 그래도 에단이 빨리 막아 줬다는데…… 레인은? 레인은 분명……!

클레리아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레인 님은……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건데요?”

그렇게도 평소에 잘 웃던 레인이.

그렇게나 시끄럽고 화내고, 감정이 풍부했던 그가 황량한 사막같이 메마른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레인 님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곁에서 폭주하다 구해졌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그런 건데요? 몇 시간이나 그랬는데요?”

“…….”

그의 시선이 이제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다급해진 클레리아가 그를 불렀다.

“레인!”

“반일 정도.”

그의 대답에 클레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루의 절반?

“정확한 시간을 재 본 게 아니지만, 어머니가 저녁에 돌아가시고 구해진 건 다음 날 아침이니 그 정도 되겠지.”

머리가 멍해졌다.

이제야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아마 난 40 정도에 죽을 거라고 했어. 운이 나쁘면 그전에, 관리를 잘한다면 조금 넘을까?”

“왜 얘기 안 했어요!”

“얘기한다고 달라지나 뭐.”

“왜 얘기 안 했느냐고요! 같이 방법을 찾아보면…… 그럼 다를 수도 있잖아요!”

“영원히 말할 일 없을 줄 알았거든.”

“…….”

왜 이렇게 불행한 일들은 한꺼번에 닥쳐오는 것 같을까.

쇠해진 몸과 정신은 이런 충격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

툭 투둑

말없이 앉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레인이 쓰게 웃었다.

“바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고. 널 울린 걸 알면 에단 경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그러나 클레리아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레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문질렀다.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닌데 이거 참.”

“칼리에 님은 알고 계세요?”

“응.”

클레리아가 눈물 젖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분은 우리에 대해 거의 모든 걸 알고 계셔. 그래서 한 명 한 명 다 자식처럼 여기시는 거지.”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양 한쪽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가져와 클레리아의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아 주었다.

“아무튼, 알고 있으라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칼리에 님도 나도, 경험자가 얘기해 주는 게 이해가 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그 말 하려고 남은 거야.”

“네, 알겠어요. 하지만 레인 님도 포기하지 말아요! 같이 꼭 방법 찾아요!”

그 말에 레인이 난감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 그래, 알았어. 그 건은 하룻강아지에게 맡길게. 그러니 나 오래오래 살게 해 줄 방법 알아와 봐, 알았어?”

클레리아는 또다시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해 눈을 꼭 감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환자는 쉬라며 방을 나서려던 레인이 잠시 멈칫 돌아섰다.

“아, 그리고. 지금 황실은 너희 둘, 그리고 황녀를 상대로 한 습격과 부상에 매우 신경이 곤두서 있어. 특히나…… 네가 타국에서 힘이 발휘된 안건에 대해서 말이지. 그러니 그 정도는 생각해 보고 있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하고 있을 테니까.”

그는 작게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그래, 이번 사건으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내가 타국에서 치유력이 발현됐다는 사실이야.’

클레리아는 가만히 두 손을 내려다봤다.

생각해 보니 정신을 차린 이후 왠지 모르게 그녀 안에 내재된 치유력이 훨씬 매끄럽고 활발해진 것 같았다.

그저 폭주로 인한 일시적인 영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관련이 있는 걸까?

타국에서 발현되는 현상과도?

‘생각해 보니 에단의 상태를 확인할 때도 그랬어. 원래 그런 중증은 무척 집중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냥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쉬웠어.’

“나…… 괜찮은 거겠지?”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 * *

“프라이어스 영애가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집무를 보던 황제의 펜 깃대가 잠시 멈췄다. 이야기를 나누던 세실리아의 눈초리가 살짝 뜨인 것도 그때였다.

사각사각

다시금 펜 깃대가 움직였다.

“다행이군. 정기적으로 들러 살피라고 칼리에에게 고하라.”

“예.”

시종이 보고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그래서? 짐작 가는 곳은 있고?”

“……솔직히 없습니다. 그래서 미치도록 답답할 지경이고요.”

누에른은 동공을 움직여 딸을 바라봤다.

세실리아는 분이 가라앉지 않는 얼굴로 무서운 눈초리를 한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꼭 나를 빼다 박았단 말이지.’

“습격을 당한 건 유감이나 그것으로 프라이어스 영애의 폭주와 타국에서의 힘 발현을 한 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예상도, 그 어떤 예비도 못 한 일이라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피해가 엄청났을 겁니다. 전 그 아이가 더 걱정이긴 합니다만.”

“황녀가 있음에도 습격의 1순위가 아니었고, 문제는 동행한 수행원들까지도 함께 암살하려 했던 행적이다.”

“셋 중 누가 죽어도 이득이라는 듯한 행동거지였습니다. 셋 모두 죽어 주면 더 좋았을 거고요.”

공격은 황녀를 향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모두를 향해 있었다.

에단이 호위였기에 그가 맞부딪치는 일은 많았지만, 한 명이 목적이 아닌 듯 괴한의 공격이 근거리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처리한 뒤 황녀를 노리기로 했다고 쳐도 집요치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고. 일행이 있는 걸로 보아 함께 습격했다면 달라졌을 일이었다.

‘뭘 뜻하는 걸까.’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고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프라이어스 영애가 폭주하지 않았다면 필시 한 명은 죽었을 테지? 그 이상이 됐을 수도 있고.”

누에른의 말에 세실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영애의 폭주가 돌발 상황인 거다. 그들도 예측하지 못한 거지. 그쪽도 계획이 틀어진 거다.”

하긴…… 폭렬석의 위력이 대단했다.

구석으로 피신해 있던 세실리아였지만 후에 나타난 동료가 먼저 살해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폭렬석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일을 끝내고 시신에 남는 증거를 없애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폭발만 일으키는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세실리아의 눈이 붕대가 감긴 그녀의 양팔로 향했다.

폭렬석이 터지며 분산된 파편이 튄 자리가 녹아내렸다. 그래서 에단도 부상이 훨씬 치명적이었던 것이고.

“하하…… 셋이 나란히, 마치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간 셈이군요. 놈들에게 만찬을 제대로 차려 준 격이니 꼴이 우습게 됐습니다.”

그녀의 말에 누에른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는 아십니까? 누가 저를 해하려 하는지요.”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을까? 당장 그치의 사지를 찢어발기지 않고?”

그러나 세실리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일찍이 후계자 경쟁에서 물러나 바람처럼 산 접니다. 정말…… 절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를 모르십니까? 아니면 모른 체하시는 겁니까!”

단 한 번도 세실리아는 누에른의 앞에서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낸 적도, 큰 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그만큼 이번 암살 위협은 충격이었고, 공포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만에 하나라도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스스로 그의 마음을 헤아려 산 그녀를 조금이라도 애틋하게 여긴다면!

“세실리아, 정말 나는 모른다. 그렇기에 나도 이렇게 치가 떨리는 거란 말이다.”

누에른의 얼굴은 어느새 아버지의 빛이 서렸다.

황제가 아닌 진짜 한 여인의 아버지가.

그의 진심을 알아차린 세실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그가 관련이 없음에 남모를 안도와 함께 세실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집무실을 나가고, 문을 가만히 지켜보던 누에른은 답답한 얼굴로 펜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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