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52)

제20장. 드리우는 그림자.

“엘라단 아카데미에 새 학기가 시작한 모양이군요.”

레리안이 어떤 서신을 들고 읽어내려가면 중얼거렸다.

“그런 고리타분한 곳 알게 뭐예요.”

엘레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녀는 이슬레이터 공작에게 단언한 대로 별채에서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뭐, 그래 봤자 저택 내에 있는 별채이고, 하녀들도 그대로나 레리안은 살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그녀가 자신 때문에 이러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그 일로 레리안은 그녀를 제법 기특하게 여겼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죠. 우리 동업자인 사이러스님이 그곳에 있는데.”

“아, 그렇다고 했었죠.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다던가요?”

“그렇다마다요. 엘레나도 우리의 치밀함 알잖아요?”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계획 진행을 위해 한 가지 물품을 보내야 하는데 말이죠.”

엘레나는 무심코 ‘그래요?’라고 대꾸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일전에 첸시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함께 있는 것이 너무도 지루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혹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상형이 있느냐는.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첸시아의 반응이 너무 진지했다.

얼굴을 붉히며 주저하던 그녀가 내뱉은 사람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서제도 레이셋의 4왕자 사이러스 울렌가르.

지방 귀족 영애 주제에 그런 높은 사람을 언급하기에 캐물으니, 바닷가와 맞닿은 데포렌 영지에서 해상 무역을 하며 먼발치에서 몇 번 본 모양이었다.

엘레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 물품을 전달해 줄 좋은 이동책이 떠올랐는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레리안이 눈썹을 치켜떴다.

“데포렌 영애를요?”

“그럼 발신인도 훨씬 추적하기 어려워질 거고, 우리에게 여유도 생길 거예요. 어때요?”

레리안 역시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엘레나 덕에 좀 더 계획이 견고해지겠군요.”

“보내려는 물품은 뭐죠?”

그는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진귀한 보석이 들어 있었다.

“값싼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걸 보내나요?”

“그 아래를 봐요.”

그가 살짝 아래 판을 들어 올리자 고운 가루가 보였다.

“이게 진짜 물품이랍니다.”

그를 살짝 곁눈질한 엘레나가 씩 웃었다.

“잘됐네요. 첸시아는 마침 오후에 들르라고 했어요. 곧 올 겁니다.”

똑똑

“아가씨, 데포렌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녀는 레리안을 보고 웃으며 일어섰다.

“잘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응접실로 모셔!”

그렇게 외친 엘레나는 상자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레리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영악해진다니까. 가르칠 맛이 난다고 할까.”

그는 그녀가 내려놓고 간 찻잔에 입이 닿았던 곳을 손끝으로 어딘가 외설적이게 훑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게 점점 더 즐거워져, 엘레나.”

그렇게 레리안은 한참 그녀가 앉아 있던 곳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

* * *

“데포렌 영애?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나요?”

엘레나는 새침하게 웃으며 첸시아가 앉아 있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뇨, 방금 왔는걸요.”

첸시아는 엘레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과거 수수하고 침울했던 분위기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웃음소리도 전과 달리 쾌활하고 커졌다. 모든 것이 엘레나와 함께한 이후 생긴 변화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사교 모임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문은 그저 서쪽 바닷길을 낀 영지 하나를 뺀다면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녀는 수도 사교 파티에는 초대될 일조차 없는 시골 귀족의 공녀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수도 중앙 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큰소리를 내는 걸 좋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첸시아의 곁에 엘레나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간혹 캄스턴 공자까지 함께 있으니 더욱 그랬다.

어찌 됐든 화려한 수도의 삶을 동경하던 그녀에게는 근래가 최고의 나날이였다.

사실 엘레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아버지가 주는 용돈을 모두 다 끌어모아 치장하는 것에 쓰고 있지만, 후회는 없었다.

수도에서 자리를 잡고 좋은 혼처를 얻어 결혼한다면 오히려 집안에 경사일 것이다.

첸시아는 무역을 간신히 유지하기 위해 밤낮을 고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제가 반드시 빛을 보게 해 드릴게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우리 영지에 이목이 쏠리게 할게요. 그럼 좋은 혼처는 덤으로 찾아오겠지요?’

생글거리는 첸시아를 보는 엘레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가씨, 차를 내왔습니다.”

하녀가 내려놓고 간 찻잔을 보며 엘레나는 조용히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향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차는 첸시아가 전에 선물해 준 물건이었다.

“저희 영지의 특산품이로군요. 어떠세요? 향이 참 좋지요?”

“네, 그렇네요. 데포렌 영애가 선물해 준 이후로 꾸준히 마시고 있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엘레나는 술술 내뱉었다.

‘마시긴 개뿔, 이딴 걸 특산품이라고…… 쯧쯧. 그러니 너희가 빌빌 기는 이유가 있는 거야.’

속내와는 달리 엘레나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데포렌의 특산품 차는 그렇게 인상적인 품목이 아니었다. 데포렌 남작은 장사 수완도, 무역 수완도 좋지 않아 이상한 것에 투자하거나 밀어붙이기 일쑤였고, 그래서 늘 적자거나 간신히 그것을 면했다.

‘똑똑한 영애라면 아버지의 그런 점을 보완하며 가문을 돌봤을 터인데…….’

아무리 엘레나가 클레리아나 에단에 비해 뒤처진다고는 하나 그녀 또한 공작가의 영애였다. 이 정도 흐름과 눈치는 기본이었다.

그녀는 차를 무척이나 기분 좋게 음미하는 첸시아를 살짝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특별할 거 없는 물건에 저리도 자부심을 품다니.

엘레나는 벌써부터 그녀와의 대화가 따분해지려 했다.

슬쩍 맛없는 차를 멀찍이 밀어놓은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어머, 처음 보는 옷이네요? 혹시 내가 말한 곳에서 산 새 드레스인가요?”

“네! 역시 이슬레이터 영애께서는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영애 덕에 안목이 좀 생겨서 이번에 새롭게 주문해서 산 드레스랍니다.”

“잘 어울려요. 역시 살짝 귀띔만 해 줘도 감각이 좋아서 곧잘 고르네요.”

엘레나는 일어나 머리핀 하나를 가져왔다.

“내가 뭐라고 했죠? 좋은 외향은 장식품에서 완성된다고 했었죠?”

그렇게 말하며 첸시아의 머리에 핀을 꽂아 주었다.

“세상에…… 아니에요, 영애. 이런 걸 또 받을 순 없어요!”

엘레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거짓말.’

야망이 큰 만큼 첸시아도 곧잘 철면피가 되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곤 했다. 같잖아도 뭐 아직까지는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당장 뺨을 올려치고 내쫓았겠지만, 엘레나는 용케 그러한 욕망을 참아 냈다.

“아뇨, 내 친구인 첸시아에게 주는 거니 하나도 아깝지 않답니다. 받아 줘요.”

“이슬레이터 영애…….”

감동한 척 울먹였으나 첸시아 역시 속으로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프라이어스 영애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했노라고 확신했으니까.

한껏 미안한 듯 아양을 떨면서도 그녀의 손은 머리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앉아서 다시 찻잔을 들려던 엘레나가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러고 보니 데포렌 남작께서 서제도와 교역 중이시라고 했지요?”

“예, 그런데요?”

스윽

엘레나는 레리안에게서 받은 상자를 내밀었다.

“중요한 분이 엘라단 아카데미에 올해 입학을 했는데 축하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워낙 고대하던 합격이었던 만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데 그냥 보내면 보낸 사람을 알아차릴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아, 살짝 돌려서 보내고 싶으신 거군요?”

첸시아의 말에 엘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게 맡겨 주세요. 내일 서제도로 향하는 상단이 있으니 그쪽을 통하면 육로를 이용하는 거랑 하루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날 거고, 받으시는 분도 의아하실 테니 만족스러운 깜짝 선물이 될 거예요!”

그녀의 대답에 엘레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데포렌 영애 덕분에 아주 좋은 선물을 할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알려 드릴까요?”

“좋은 소식이요?”

엘레나는 첸시아에 귓가에 속삭였다.

“영애가 관심 있다던 그 사이러스 왕자님이 엘라단에 교수로 재직 중이시라고 해요. 그쪽으로 물건을 보내는 참에 왕자님께 작은 카드라도 써서 한 번 마음을 전해 보시는 건 어때요?”

“예, 예?”

“뭐, 그렇게 멋진 분이면 사모하는 편지는 꽤 받으실 테니 이참에 살짝 공녀의 마음을 전해 봐요. 큰 기대는 하지 않더라도 시도는 해볼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거잖아요?”

첸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 같은 이가 함부로 그래도 될지 여전히 망설여졌으나 왠지 묘하게 자꾸만 그 말에 신경이 쓰였다.

‘이슬레이터 영애의 말처럼 정말 그런 편지를 많이 받으셨다면 내 것 하나 정도 더 받으셔도 상관없지 않을까?’

첸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그, 그래 볼까요?”

그러자 엘레나 역시 환하게 웃으며 독려했다.

“그렇게 해요. 더불어 내가 부탁한 물품도 잘 부탁하고요?”

드디어.

드디어!

엘레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을 부탁받았다. 그녀 또한 명실상부 단짝으로 첸시아를 인정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중요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소중한 친우로 말이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첸시아는 상자를 소중히 가슴에 안았다.

“맡겨만 주세요! 이슬레이터 영애!”

* * *

저택을 나서는 첸시아의 마차를 레리안과 엘레나가 물끄러미 창을 통해 바라봤다.

“잘 전달했나요? 뭐라던가요?”

“전달 잘 하겠다고 먼저 나서서 얘기하던걸요.”

“쿡, 그러던가요? 일단 물건이 서제도에 도착하면 우리 연줄이 받아 적당히 발신자를 위조하고 배달될 겁니다. 파헤쳐도 우리 이름이 나올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안 해요, 어디 하루 이틀이에요? 그나저나 대체 레리안이 함께 하는 그분은 언제 뵙게 해 줄 거예요? 이렇게 계속 질질 끌면 재미없을 텐데요?”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엘레나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번 일이 잘되면 뵐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골내지 말아요. 재촉하는 여자, 전 별로입니다.”

“레리안의 마음에 들고 싶은 마음 털끝만큼도 없어요.”

“이런 섭섭하게.”

그의 능청에 엘레나도 ‘흥!’하는 콧소리와 함께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둘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일까.

에단과 함께 있을 때는 늘 먼저 말 걸고, 떼를 써야 했는데 레리안은 아니다.

어딘가 에단을 생각하니 먹먹해졌지만, 엘레나는 레리안을 보며 웃었다. 함께 있을 때 훨씬 재밌는 건 그였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갖은 앙탈을 부리며 오후 시간 내내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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