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단 형식의 좌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무 명 남짓 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들어서는 세 사람에게 꽂혔다.
또각 또각 또각
세실리아의 높은 굽 소리가 묵직하게 강의실을 울렸다.
“흐음…….”
강연대에 선 그녀가 천천히 학생들을 훑었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간단히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나는 벌써 6년째 엘라단의 명예 교수직을 억지로 떠맡는 중인. 라스칸트의 황녀 세실리아 펠리시아스다.”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스루 드레스 덕에, 곳곳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강의가 대체 왜 듣고 싶은 건지, 원……. 그렇게 듣고 싶다니 해 주긴 하마.”
그녀는 짜증 섞인 혼잣말을 노골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강연대를 벗어나 자유롭게 강단을 걸으며 말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엘라단의 입학 시험을 뚫고 합격했으니 너희들은 지금 자신감과 콧대가 하늘을 찌르겠지. 그래,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다.”
천천히 학생들에게 향한 그녀가 대뜸 한 학생에게 들고 있던 부채를 향했다.
“넌 네가 훗날 뭐가 될 것 같니?”
“예, 예?”
이어 다른 이에게로 바로 부채가 옮겨 갔다.
“너는?”
전광석화처럼 옮겨 다니던 부채에 지적당한 한 학생이 말했다.
“전 왕자이니 왕이 되어 있을 겁니다.”
세실리아의 붉은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럼 넌 어떤 왕이 될 것 같으냐?”
학생이 멍한 얼굴을 했다.
왕이 왕이지 어떤 왕은 또 무슨 소리?
속마음이 그대로 비치는 표정에 세실리아는 묘한 미소를 남기며 천천히 강연대로 돌아갔다.
“여긴 건립 이래로 74년, 배출한 졸업생도 어마어마하다. 그 중엔 너희처럼 다양한 신분들이 있었지.”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자리엔 미래의 왕도, 유능한 충신도, 교역을 다스리는 무역왕도 나올 테지. 하지만 겨우 입학에서 만족하는 안일한 태도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실리아의 눈이 대답한 학생에게 향했다.
“어떤 왕이 되겠느냐 물었을 때 떠오른 게 없다면 넌 그저 그런 왕에 지나지 않을 거다. 그런 왕은 유능한 반역자를 만나 머리가 잘리기 마련이지.”
그 말에 강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따위 가소로운 성취감에 취할 정도라면 너희는 고작 그것이 끝이라는 거다.”
고귀한 신분과 영민한 두뇌를 갖고 입학한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독설이었다. 꿈에 부풀어 요청했던 것과 거리가 먼 날카로운 강의에 학생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세실리아는 점차 고고히 고개를 들고 학생들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이 고작 그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거라. 숨이나 축내는 버러지가 공부는 무엇하랴.”
그리고 그녀는 더없이 환하고 따스하게 웃었다.
“엘라단은 우수한 곳이다. 어떤 걸 얻어갈진 너희의 선택이지만.”
그녀는 천천히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과연 너희 중에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까? 내 강의는 이게 끝이다. 남은 시간은 자유 시간으로 알아서 각자 보내도록. 모욕적이라고 학교에 항의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이라도 청하는 양 눈을 감았다.
폭언의 폭풍이 몰아친 후, 갑작스레 이어진 자유 시간에 학생들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클레리아는 너무도 세실리아다운 강의에 혀를 내둘렀지만, 이어진 상황에 당혹스러운 건 학생들과 마찬가지였다.
호위 중인 에단을 제외하면 동석한 그녀의 위치가 붕 떠 버렸으니까.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세실리아가 대응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클레리아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런 상황까지 예견하고 보내진 거니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할 때 학생이 일어나 말했다.
“자유 시간을 주신 만큼 치유사님과 대담을 나눴으면 하는데요.”
“네, 그러시죠.”
“치유사님은…….”
막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클레리아가 손을 들어 물음을 저지했다.
비싼 드레스와 외향으로 보아하니 고위 신분 같은데, 세실리아의 폭언으로 불쾌한 기운이 눈빛에서부터 넘실거렸다. 그걸 화풀이하겠다는 심보가 노골적인 탓에 클레리아가 제동을 건 것이다.
회귀 전의 그녀였다면 모를까, 이렇게 적의가 역력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전 라스칸트에서 온 치유사이자 친선대사인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입니다. 학기 초 질문 전에는 자신의 소개는 기본일 텐데요.”
클레리아가 싸늘히 지적하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전 아에레의 왕녀, 앨리스 스카스라고 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클레리아는 그제야 싱긋, 인위적인 웃음으로 답했다.
“질문드릴게요. 치유사님은 프라이어스 공작가의 영애이시며, 영민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왜 엘라단에 입학하지 않으셨나요?”
새초롬하고 순진한 척 묻는 말 뒤에 깔린 저의에 클레리아는 코웃음이 났다.
세실리아의 불편한 강의에 뿔이 난 건 알겠지만, 이렇게 저열하고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비난하려 들다니.
결국, 저 말은 너 똑똑하다 들었는데 여기 못 들어온 거 보니 별거 아니구나?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마이나 여왕을 아십니까?”
대답 대신 나온 질문에 앨리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라하스 역사학을 배울 때 가장 처음 배우는 인물이지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선 넘는 참견과 말실수로 유명한 여왕입니다. 그녀가 한 연회에서 처음 만난 초면의 왕에게 실언한 이후 어찌 된 줄 아십니까?”
질문에 들어 본 적도 없는 역사학을 운운하자 앨리스는 모르겠단 얼굴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다음 날 그 젊은 왕의 나라에 침공당해 혀가 잘리고 가죽이 벗겨졌지요.”
인자한 얼굴과는 달리 나오는 서슬 퍼런 말에 학생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젊은 왕이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대가 사리 분별 못 하고 경박하게 입을 놀리는 걸 보니 그대의 나라도 그러할 것 같아 쉽게 보였노라고.”
생전 험한 말이라고는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여린 얼굴을 한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오이라하스 역사학은 일곱 살 전후로 배우는 내용이니 왕녀님도 의미하는 바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클레리아는 묘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혹…… 설마 모르시나요?”
쐐기였다.
사실 오이라하스 역사학은 제왕학이 보편화되어 있는대국의 귀족들만 배우는 역사학이었다. 소국인 아에레는 아예 교육으로 치지도 않는 분야인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엘라단에 들어온 이상 그 정도 머리는 있을 테니까.
“아뇨,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짜내듯 말한 그녀가 자리에 앉자 측근들이 몰려들어 위로했다.
‘주변을 보아하니 앨리스 왕녀는 좋은 인물로 자라긴 힘들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반대쪽에서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앨리스 쪽을 보며 자신의 측근들과 키득거리며 비웃고 있었다.
간결한 옷차림과 다부진 체격을 보아하니 예술과 마법이 발달한 아에레와는 상극인 나라의 사람 같았다.
“말씀하시죠.”
클레리아의 말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렌타 국의 셀림 노이드 공주입니다. 앞선 담화 재밌었습니다. 저는 조금 전과 달리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역시.
그녀는 무예와 체술로 유명한 에렌타 국의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아에레와는 상극인 나라였다.
‘그러니 아에레의 왕녀가 곤란한 걸 즐기고 있던 거구나.’
클레리아는 작위적인 미소 아래 깊은 한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앞사람을 비난하는 성정은 앨리스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명이라도 하듯 셀림은 팔짱을 끼며 왕족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했다.
“위대하고 자비롭기로 유명한 라스칸트가 어째서 치유사를 독점하는지 궁금합니다.”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듯 클레리아의 눈썹이 짧게 꿈틀댔다.
셀림은 자칫 외교 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으니까.
슬쩍 곁눈질하자 세실리아도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클레리아는 제 선에서 수습해야겠다 생각했다.
“독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르누엘룻을 섬기는 나라는 많지만 라스칸트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독점이라 표현하시는 건 어폐가 있지요.”
셀림은 잠시 눈을 굴리다 다시 말했다.
“제 표현이 잘못됐군요. 치유사 요청 시 굳이 환자를 라스칸트 내로 부르는 행위를 말한 겁니다. 치유사가 이웃국까지 파견되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텐데요? 그런 부당한 요구가 일종의 독점 아닐까요?”
“그렇기에 오시는 수고를 덜고자 최대한 가까운 국경에 모시는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라는 걸, 셀림 공주님도 아실 텐데요?”
그러나 셀림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패기 있는 건지, 아니면 때와 장소를 구분 못 하고 자존심이 높은 건지.
클레리아는 서늘한 시선으로 셀림을 쳐다보았다.
“가룸 여섯 명, 바슬롯 두 명. 아에레 한 명, 갈레노프 두 명. 그리고…… 에렌타 세 명. 이게 무슨 수인지 아십니까?”
셀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스칸트가 파견한 나라에서 죽은 치유사들의 숫자입니다. 그 외에도 많죠. 심지어 국경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셀림은 놀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어리니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클레리아는 타이르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라스칸트는 해당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교류를 유지하고자 파견을 중단치 않았습니다. 환자를 자국으로 이송하는 건 치유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죠.”
클레리아는 실망한 눈초리로 셀림을 바라봤다.
“공주님께서는 이런 부분을 독점이라 표현하실 정도로 양해를 구해주기 어려우십니까? 라스칸트는 소중한 인재를 잃었는데요.”
그러나 셀림은 같잖은 자존심에 오기를 부렸다.
“그, 그렇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받아가는 게 있을 거 아닌가요? 베푸는 것처럼 포장하는 게 싫은 겁니다!”
세실리아의 눈썹이 꿈틀댔다.
결국, 셀림이 실언을 한 것이다.
클레리아는 그녀가 나서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나라 간 당연히 이뤄지는 교류입니다. 설마 라스칸트는 무료로 베풀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국은 생명을 잃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차 싶은 셀림은 대꾸하지 못하고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잊으셨나 본데 라스칸트는 아스칸 대륙에서 제일 강한 대국입니다. 건국의 목표가 공존이기에 가만히 있는 것일 뿐. 공주님의 할아버님도 저희의 치료를 받았기에 공주님을 안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받은 대가는 에렌타 국의 무기 수입 기간 연장과 세금 인하 약간이 전부였습니다.”
이제 셀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스스로 무예와 공부에 뛰어날지라도, 아직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한 철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관용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셀림은 앨리스와는 달리 제대로 된 깍듯한 인사로 사죄했다.
“어린 나이에 치기 어린 감정이 앞선 것 같은데 프라이어스 영애가 잘 일렀으니 됐다. 셀림 공주는 앞으로 언사에 더 신중해야 할 것이야.”
댕 댕 댕
세실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이 울렸다.
앞서 나가는 세실리아의 뒤를 따르다 살짝 돌아보자, 셀림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 한 번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셀림 공주에게는 조금 기대를 걸어 볼 만할지도.’
강의실을 나서는 클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오후에 이어진 두 번째 강의 시간은 다른 의미로 훨씬 더 간단했다.
“내가 할 말은 첫 강의 때 모두 했으니 알고 싶다면 첫 강의를 들은 학생들을 통해 들어라, 이상.”
이렇게 말한 세실리아가 자유 시간을 통보해 버린 것이다.
학생도, 동석한 클레리아도 얼이 빠졌으나 그래도 전 시간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대부분 학생이 세실리아를 선망하는 편이었고 클레리아가 세실리아를 대신해 강의 내용을 간단히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또다시 클레리아가 나서 대담을 이어 갔지만. 날 선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왕국에도 와 주셨으면 좋겠다, 세실리아 같은 분을 이렇게 마주할 수 있어 기쁘다는 감탄이 대다수였다.
‘황녀님은 명예 교수직을 싫어하시지만, 요청이 끊길 일은 없어 보이는데.’
그녀의 파격성은 세실리아를 알고 있던 클레리아에게도 충격적이었으니 학생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클레리아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세실리아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두 번째 강의 시간도 지나고, 세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구나. 이 짓을 앞으로 9일은 더 해야 한다니.”
그녀의 짜증 섞인 말에 에단과 클레리아는 시선을 교환하며 웃어 버렸다.
‘어차피 자유 시간으로 그냥 넘겨 버리실 거면서.’
똑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저녁 식사를 가져온 에리카가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두 분 맛있게 드세요. 저도 식사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자연스레 자리를 피하는 클레리아였지만, 막상 그 모습에 에단과 세실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에리카가 나가자 세실리아가 불편한 표정으로에단에게 말했다.
“앉아라, 식사하자꾸나.”
“……예.”
어느 정도 아카데미 분위기에 익숙해진 클레리아는 능숙하게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오늘도 메뉴가 다양했는데 샐러드와 연어 스테이크, 입가심에 좋은 재스민차를 선택했다.
음식을 받고 돌아섰을 때, 문득 이상한 말로 작업 걸어 오던 남자가 떠올랐다. 빠르게 좌석을 훑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는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아예 2층으로 올라가 보려 계단을 올랐을 때였다.
“그대는 그럼 실수하지 않았단 말인가?”
“흥, 강대국이라고 자비로운 척, 자애로운 척. 어디 그 척 질이 하루 이틀이던가요? 제국의 난 체는 어느 시절이나 똑같습니다.”
위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에레의 왕녀 앨리스와 에렌타의 셀림 공주의 목소리였다.
“나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라스칸트가 강대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감을 품고 있지. 하지만 강의 시간에 들은 것과 같이 따지고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강대국의 패악질은 부리지 않았어. 간혹 있는 견제가 패악이라고 불릴 정도의 횡포는 아니었다.”
“그래서요? 당신이 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엉뚱한 데에 화풀이하시는 건가요?”
“……내가 실언했던 건 인정하지만, 그대는 나보다 더할 텐데?”
앨리스고 콧대를 치켜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제가 뭘요?”
“왕녀는 치유사님을 개인적으로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나. 공개된 자리에서 그렇게 남을 비방하려는 시도가 설마 일국의 왕녀가 할 짓이라고는 하지 않겠지?”
“지금 뭐라 했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타국이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물러서라! 왕녀님께 더 말을 했다간 그 혀를 잘라 주마!”
“예술이나 하는 그 곱디고운 손으로 어디까지 막아설 수 있을지 직접 대련해 주랴?”
예술과 미학을 최고로 치는 아에레 사람들은 에렌타의 땀 흘림과 육체적 활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에렌타 역시 아에레의 고상한 취향이 맞지 않았고. 이러다간 서로의 나라를 향한 비난의 강도가 점점 거세질 것 같았다.
‘하…….’
참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클레리아는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들어 보니 그녀도 아예 관련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차마 외면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결국, 크게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천천히 남은 계단을 올라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다 그만하세요.”
험담하던 당사자가 등장하자 앨리스가 움찔 놀랐다. 그에 반해 셀림은 한쪽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클레리아는 가벼운 묵례로 그녀의 인사를 받은 후 앨리스를 바라봤다.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세요. 두 분이 언쟁을 일으킬 만한 내용도 아닙니다.”
“……공녀께서는 하려던 식사나 마저 하시지요. 저와 에렌타 공주의 일입니다.”
“앨리스 왕녀! 그 무슨 무례한……!”
셀림이 버럭 그녀를 나무랐지만, 앨리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스카스 왕가는 앨리스 왕녀의 저 무례함을 고치지 못하면 고생깨나 하겠는데.’
그녀의 오만한 태도에도 클레리아는 대꾸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뭐하세요? 비키지 않으시고? 또 그 잘난 역사학이라도 가르치시려고요?”
인상이 써질 찰나,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클레리아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뇨, 역사까지 갈 필요도 없겠네요. 왕녀님께서는 세실리아 황녀님이 강의 때 하셨던 말을 되새겨보심이 좋을 듯하군요. 부디 유능한 신하를 만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앨리스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클레리아의 말은 세실리아의 ‘그저 그런 왕은 유능한 반역자를 만나 머리가 잘린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었으니까.
앨리스의 얼굴이 치욕에 물들어갈 때쯤, 클레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시끄러워.”
“그렇네, 천박하게…….”
순간 나른함의 결정체 같은 남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클레리아는 멈칫하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 끝에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바알리시안의 공주와 왕자였다.
* * *
“바알리시안…….”
클레리아는 잘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침대에 앉아 카페테리아에서 있던 일을 곱씹었다.
바알리시안은 소국이라고 하기에는 크지만 그렇다고 대국의 축에 끼지는 못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왕조만큼은 아스칸 대륙에서 라스칸트보다도 훨씬 유래가 깊은 나라였다.
‘그 왕실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어. 바알리시안은 워낙 다른 나라와 교류가 없는 나라니까.’
대외적인 일이 있을 때는 사절과 서신으로 소통하는 것이 다였기에 굉장히 폐쇄적인 곳으로 알려진 나라였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들의 등장과 함께 마치 클레리아가 보란 듯 다가가 갖은 아양을 떨었다. 바알리시안 왕족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데도.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타국 귀족들과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알리시안 왕족의 아름다움은 아스칸 대륙에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티끌도 없을 것 같은 새하얀 머리칼과 하얀 피부. 거기에 신비함을 자아내는 은안까지. 그 외모를 지키기 위해 바알리시안 왕족은 유일하게 근친혼을 했다. 아까 본 그 남매도 분명 훗날 혈통을 위해 결혼을 할 사이로 보였다.
‘그 겉모습에 현혹되어 그들을 우상시하는 이들이 많긴 하지. 하지만 근친혼으로 생긴 유전병이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것까지는 모르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에 그들이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라스칸트와 바알리시안은 아주 밀접하고도 불편한 사이였다. 그 때문에 그들을 마주친 것이 계속해서 잔상처럼 남았다.
클레리아는 답답한 얼굴로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향했다.
“발광석을 많이 쓰나 보네.”
갈레노프는 라스칸트에서 발광석을 다량 수입하는 편인데 거리의 가로등에 많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수도 알펜도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잠이 안 와?”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클레리아는 깜짝 놀라 뒤로 돌아섰다.
맞다, 에단이 거실을 쓰고 있었지.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니, 어차피 깊게 잠들지도 않았어.”
그가 소파에서 내려와 천천히 클레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물끄러미 살피던 그가 물었을 때, 잠깐 클레리아는 고민했다.
말해야 할까. 알게 된다면 그도 탐탁지 않아 할 텐데.
하기야 어차피 내일은 세실리아에게도 언질은 해야 할 것이다. 불편하더라도 그녀 또한 알고 있어야 할 테니.
클레리아는 잠시 말을 끌다 입을 열었다.
“바알리시안 공주와 왕자를 봤어. 그들도 올해 입학했나 봐.”
“바알리시안? 다른 나라로는 잘 나오지 않는 그 폐쇄적인 사람들이?”
클레리아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 기묘한 외향에 사람들이 끌리는 모양이야. 하긴 특이하긴 하지. 그런 모습이라면……. 하지만 사람들은 다 잊은 것 같아. 그들이 아스칸 대륙을 지배할 때 사람들에게 어떤 패악질을 했는지. 오히려 라스칸트가 강대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몰아낸 우리를 더 경계하고 있어.”
에단 역시 클레리아의 말에 생각이 많아졌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실 라스칸트는 바알리시안을 몰아내고 건국된 나라였다.
그들은 아스칸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 혈통을 중시하고, 신분 고하의 격차를 심화했으며. 왕족의 신격화와 타국들에게 섬김과 인간 공물을 강요했던 나라였다. 바쳐진 인간들은 제물이나 노예가 되었고, 개중에는 타국의 평민과 천민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것을 참다못한 이들이 나서게 되었는데 그것이 펠리시아스 일가와 지금의 라스칸트를 떠받치는 3공작가였다.
그들은 바알리시안의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았고, 그들을 옹호하며 패악질에 가담한 나라들을 집어삼켰다.
결국, 궁지에 몰린 바알리시안 왕은 굴욕적이게도 그들 앞에 엎드려 빌었고, 지금의 영토만을 가지고 저들끼리만 폐쇄적으로 지내게 된 것이다.
“세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이제 라스칸트가 건국되었던 의미를 체감 못 하는 이들이 더 많겠지. 알아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도 있을 거고. 겪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의미는 쇠퇴하기 마련이야.”
“알아, 아는데…… 그래도 조금 속상해.”
클레리아의 말에 에단은 위로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라스칸트의 영광은 계속될 거야. 아까 낮에 봤는데 3공작가에 어떤 영애께서 장난이 아니더라고.”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클레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노려봤다.
“노, 놀리지 마!”
“진짠데? 난 오히려 좋았어. 클레리아의 그 압도적인 면이……. 언제나 참아 주고, 피하고, 물러나기만 하던 네가……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정말…….”
희열을 느낄 정도였달까.
에단은 바랐다.
좀 더.
더더욱.
보고 싶다, 그녀의 성장을.
그런 그녀를 지지하고, 곁을 지키고 싶었다.
다시 야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뒤로, 에단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해…… 클레리아.’
전달될 리 없음에도 알아차려 주길, 아주 조금은 바랐던 것도 같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아주 많이. 정말 많이.
하지만 혹여나 그것이 그와는 다른 의미일까 봐. 어떤 날은 막연한 확신이 들다가도 클레리아의 성격을 알기에 그것과는 다를까 봐 무서웠다.
겁이 났다.
그렇다 해도 클레리아가 다른 남자와 이어지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생각에 침울해 있는데, 클레리아가 그를 돌아봤다.
“왜?”
문득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일부터는 혼자지? 단검 떨어트려 놓지 마.”
“지금도 가지고 있는걸?”
품에서 꺼내는 것을 보고 에단은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언젠가 어렸을 적처럼, 늦은 시간까지 야경을 함께 구경했다.
* * *
드디어 혼자 일정을 소화하는 날이 밝았다. 다행인 것은 아침 일찍 도우미 에리카 씨가 방문해, 갈레노프의 왕비가 한 요청을 알렸다는 점이었다.
그 덕에 낮의 일정은 갈레노프 왕비와의 오찬이 되었다.
달칵
화려한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갈레노프의 왕비 루비나가 인자하게 웃었다.
“황제께서 이렇게 타국까지 선뜻 치유사님을 보내 주신 것에 크게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어느덧 머리가 백발이 된 노년의 여인이었다.
“양국의 친분과 신뢰가 두터우니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런 자리는 황녀님께서 오시는 게 맞을 텐데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황녀님도 그렇지만 치유사님의 방문도 무척 기쁩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목소리를 낮췄다.
“일전에 일리아스 공작을 치료해 주셨지요. 그는 제 사촌 오라비입니다. 그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 방계셨군요.”
“네, 그리하여 저희 갈레노프는 기존에 라스칸트에서 수입하던 연금술 물품과 약제와 발광석 수입을 5년 더 연장하려 합니다. 그리고 관세도 조금 더 인하할 생각이고요.”
그 말에 클레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거, 참 좋은 소식이군요. 저희 국민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라스칸트는 연금술사가 많고 약제도 잘 발달한 나라였다. 그만큼 종사하는 이들도 많으니 좋은 일이었다.
“아, 그리고 국왕께서 브리즈 반도에 철도를 놓는 것을 고려하고 계시는데, 라스칸트에서 권하셨던 그 횡단 열차의 철도를 그쪽으로 하는 건 어떨까 하시더군요.”
“횡단 열차요?”
클레리아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펠리시아스 가는 오래전부터 아스칸 대륙 나라들의 화합을 위해 거대 관광 철도를 놓자고 재차 제안해 왔었다. 모든 국가를 관통하는 열차를 두어 개발 및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전에도 말했듯 견제하는 몇 국가들 덕에 몇 년째 말만 나오고 있던 사업이었다. 소국에서 부족한 비용은 대국에서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에도 눈치만 보고 있었고.
그 제안에 갈레노프가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이 소식을 듣는다면 누에른이 기뻐할 게 분명했다.
“진심이십니까?”
루비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되도록 빨리 착수했으면 합니다.”
승낙을 넘어 서두르기까지 하는 말이다.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가 갸웃하자 루비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제 아들에게 양위한 후 바로 완공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라스칸트와의 동맹도 굳건히 할 겸.”
그렇구나.
클레리아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노프는 새로운 왕이 즉위할 시기가 된 것이다.
‘발렌도르 국왕 부부는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 후세를 늦게 보기도 했고,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 자리 잡기 전까지 모반의 위험도 있으니 라스칸트의 확고한 동맹이자 지원군이 필요한 거야.’
누에른은 발렌도르 국왕 부부도, 지금 왕세자인 그들의 아들도 좋아했다.
‘왕자는 꽤 똑똑했으니 라스칸트와도 잘 지내겠지.’
클레리아는 루비나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스칸트는 왕자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겁니다.”
루비나의 얼굴에 안도감이 자리했다.
클레리아는 자신의 방문으로 인해 두 나라의 동맹까지 확고해지는 것에 막중함을 느꼈다.
그렇게 몇 가지의 약속과 함께, 두 사람의 담소가 이어졌다.
* * *
한편 세실리아와 에단은 아카데미 중앙 안뜰 잔디밭에 나와 야외 강연을 즐겼다.
아니, 즐긴 건 세실리아 혼자이고, 그녀가 볕이 좋아 나가서 하자고 권유하고서는 어제와 같은 플레이를 이어 나갔다. ‘알고 싶으면 첫 강의 때 들은 애들에게 전해 들어라.’ 하는.
덕분에 어리둥절한 학생들만 이게 뭔 일인가 싶어 하면서도. 결국, 그녀를 따라 모두 일광욕을 하며 저들끼리 자유 시간을 즐겼다.
“여기까지 나와서 그러고 서 있으면 다리 아프지 않니? 너도 이리 와서 일광욕이나 좀 하도록 해라.”
햇빛 가림막까지 챙겨 온 세실리아가 에단에게 핀잔 주듯 말했다.
그러나 뒷짐 진 그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심드렁하기 짝이 없게 대꾸했다.
“전하야말로 계속 강의 시간을 이런 식으로 때우셔도 됩니까? 라스칸트에 누가 되지 않을는지요?”
“누가 되면 날 명예 교수 지목에서 빼면 될 거 아니냐?”
에단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싫으면 싫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했다. 했는데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걸 어쩌란 말이냐.”
“뭐, 그럼 패악 한 번 부리시죠. 전하의 성격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
거침없이 내뱉던 에단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세실리아가 그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뭐, 제 입에서 이런 말 나올 줄 모르고 계신 거 아니지 않습니까. 새삼스럽게 그리 보지 마십시오.”
황녀를 대하는 에단의 태도는 꽤 가벼웠다.
사실 둘은 에단이 어린 시절부터 비밀리에 아버지 엘빈을 따라 황궁에 자주 드나드느라 친해지게 된 사이였다. 세실리아도 맞받아치는 그의 말을 노여워하지 않았다. 에단 역시 황녀에게 워낙 어렸을 때라 그런지 무심하게 대하는 편이었고.
그런 그들의 사이를 사람들은 대부분 몰랐다. 대외적으로는 말 한마디 거의 나누지 않았으니까.
물론, 성격이 워낙 상극인지라 더욱 그런 것도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는 늘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 때가 많았으니.
지금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생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이런 두 사람의 이 애정 어린(?) 대화는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네 녀석은 어릴 적부터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구나. 쯧쯧, 여자아이들보다 대화 상대로 편해 그냥 둔 게 실수다. 어찌 나를 그렇게 무서워하질 않는지.”
“전하가 무서울 게 있습니까. 그저 불편할 뿐이지요.”
세실리아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홱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에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면피를 유지했다.
‘고얀 것. 어릴 때였다면 머리라도 쥐어박았을 것을. 언제 저리 덩치만 커서.’
“흠흠!”
그녀는 불만 가득한 콧소리를 내며 올렸던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자꾸만 밉살스럽게 대답하는 그를 어떻게 골릴까 고심하던 찰나였다.
멀리 클레리아가 안뜰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세실리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멀리 그녀가 그들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함에 세실리아는 여유 있게 부채를 가볍게 흔들어 답했다.
“클레리아는 정말 해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구나.”
“…….”
잘도 받아치던 에단이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종들이 하는 얘길 듣자 하니, 카페테리아에서 클레리아에게 대시한 남자가 있다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에단의 심기가 지금 매우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세실리아는 그 상황을 즐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방문을 마치면 어쩌면 본격적으로 클레리아에게도 혼담이 오갈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
그녀가 슬쩍 에단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낮게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노려봤다.
‘황족에게 저 오만불손한 눈빛 좀 보게. 뭐, 에단의 그런 점이 놀리기 재밌는 거지만.’
“오랜 죽마고우니 잘 알 테지? 클레리아가 좋아하는 남성상은 어떠하냐? 돈이 많은 남자? 잘생긴 사람? 성격이 다정다감한 사람? 아니면 거칠고 야성미 넘치는 남자?”
에단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언제까지 하나 한 번 보자는 듯이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낮게 입술을 가만히 두고 말했다.
“표정 관리 좀 하지 그러니, 보는 눈이 많구나?”
에단은 곧 고개를 홱 돌리고는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세실리아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부채로 가리며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고민에 빠진 것처럼 부채로 톡톡, 느리게 입술을 두드렸다.
“아마도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구나. 클레리아의 성격상 말이지. 아니야, 혹 성격이 얌전한 편이니 반대로 거칠고 야성미 넘치는 사람을 좋아할지도 모르지? 예를 들어 밤에 여인을 확 사로잡아서 이기는(?)…….”
그다음 에단을 바라봤을 때 세실리아는 정말로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가 그야말로 ‘놀고 있네, 놀고 있어.’ 하는 한심한 얼굴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실리아는 결국, 부채를 펴 얼굴을 가리고 ‘푸흐흐흐’ 하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멀리서 그녀가 가린 부채가 떨리는 걸 보고 학생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전하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돕니다.”
짜내듯 하는 말에 세실리아가 버럭 소릴 질렀다.
“이게 다 네가 호위로 따라와서 그런 거 아니냐!”
그녀는 소리 지른 것이 민망한 얼굴로 연신 부채질하다 에단을 살며시 노려봤다.
그는 눈을 감고 오히려 이제 상대하기 싫다는 듯 평안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네가 클레리아가 아닌 날 호위하게 한 것에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니, 네가 1기사가 되는 바람에 네 힘을 견제하려고 호위는 너 하나만 들였으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와 버렸잖니.”
“전하를 탓한 적 없습니다.”
“안다, 그저…….”
내가 미안해서 그런 거다.
그녀는 멀리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에단은 어린 시절 늘 그녀에게 묻고는 했었다. 황녀님은 왜 클레리아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않느냐고.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어릴 때는 딱딱하기만 한 클레리아를 보고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그녀로 에단을 놀릴 정도로… 황녀는 자신이 클레리아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두 사람이 무척 잘 어울린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는걸.’
세실리아는 얄궂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 네 녀석이 클레리아 눈에 찰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만.”
근데 이게 웬일?
또 뱁새눈을 하고 노려볼 걸 예상했는데 의외로 에단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오히려 황녀에게까지 그리 지적을 당하니 정말 그런 건가 싶어 충격받은 것 같았다.
‘이,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이 녀석 설마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있던 건가?’
이상한 데서 충격을 받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세실리아는 헛기침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그녀는 조금 일찍 강의를 마친다고 발표했고, 숙소로 도망치듯 서둘러 향했다.
‘다른 때는 그렇게 잘만 받아치더니 반응이 왜 저런담. 하여간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저런 바보도 없다니까. 멍청한 것… 쯧쯧. 고생 좀 하겠구나, 에단 칼리스터.’
* * *
루비나 왕후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에리카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치유사님. 왕후님께서 오늘 고생 많으셨을 테니 오후는 자유 일정으로 보내게 하시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일정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루비나가 배려해 준 듯했다.
“마땅히 하실 것이 없다면 아카데미 내부를 구경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도서관이나 휴게실, 안뜰과 정원도 저희가 자랑하고 있는 곳이랍니다.”
잠시 고민하던 클레리아는 아카데미에 오고 난 뒤 산책을 못 한 것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안뜰에 가 보고 싶네요.”
“네, 그럼 안내해 드릴게요.”
“와…….”
에리카의 말대로 중앙 안뜰은 정말로 멋진 곳이었다. 크기도 컸고, 곳곳에 멋들어진 분수도 있었다. 게다가 바닥 전체가 전부 잔디인지라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문의하실 것이 있으면 곳곳에 저희 도우미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네, 그럴게요.”
뜰은 오로지 나무와 잔디 관상수 정도로만 꾸며져 있어 녹음이 짙은 곳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광활한 녹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걸으며 분수대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발끝으로 잔디를 쓸어 보기도 하며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곳곳에 야외 수업을 진행하는 듯한 모임도 보였고, 나와 있는 학생들도 휴식을 취하느라 특별히 그녀에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후우…….”
문득 꺾어 들어가려 하던 곳에서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누구……?’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니 일전에 카페테리아에서 이상한 말을 날려 곤욕스럽게 했던 그 남자였다.
“후하아…….”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가려는데 또다시 떠나가라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클레리아는 어렵게 발을 멈췄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피해 버리고 싶은데 저러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무시해 버리기가 힘들었다.
하, 정말. 이 쓸데없는 오지랖이란…….
이리저리 방향 바꾸기를 몇 번, 결국 결정을 내린 듯, 클레리아는 남자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말소리에 그가 홱 고개를 들었다.
“어? 어어!”
어찌나 놀란 반응인지 말을 건 클레리아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노골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는 통에 서로 당황해 있다 클레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러시나 했는데 아니라면 그냥 가겠습니다.”
상대가 놀라도 너무 놀라자 더 놀라 버린 클레리아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돌아섰다.
“저…… 저 치유사님! 이, 일전에…… 죄송했습니다. 실례가 많았어요.”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사과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클레리아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저, 저는 유명한 공녀님이신 줄 모르고…… 그냥 너무 예쁘셔서……. 다, 다른 뜻이 있던 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귀족분들이 더 많으시다는 걸 제대로 인지해야 했는데……. 제 실수입니다.”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시무룩해져서 하는 사과에 거짓이나 꾸밈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거리는 벌리고 있었지만,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은 더는 들지 않았다.
“네, 사과 받아들일게요.”
그제야 남자는 안심한 듯한 얼굴로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걸 끝으로 돌아가려다 뒤통수 너머로 다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클레리아는 짜내듯 숨을 고르고 그에게 다가갔다.
“저한테 사과하려고 그렇게 고뇌하고 계셨던 건 아닐 테고…… 무슨 일 있으셨나요?”
물음에 잠시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앨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뭔 일이 있었구나 싶어 클레리아는 천천히 곁으로 다가가 벤치에 앉았다.
‘응?’
그때 저편에서 학생들과 함께 잇는 세실리아와 에단이 보였다.
‘황녀님도 야외 수업하시나?’
꾸벅 인사하자 세실리아도 부채를 흔들며 답해 주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남자를 바라봤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제야 앨런은 자신이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얼른 대답했다.
“앨런 테일러입니다.”
이름을 들을 클레리아는 조금 놀란 눈초리로 입을 가렸다.
“설마 그 거대 무역상 테일러 가의 자제신가요?”
“아시는군요. 쑥스럽지만 예, 맞습니다.”
‘아, 그 테일러 가의 3남 중 막내인 건가? 나머지 두 명은 서제도와 교역 때 얼굴을 봤는데.’
“열아홉으로, 형제 중 막내입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려고 네 번이나 시도했죠.”
묻지 않았음에도 앨런은 술술 자신의 신상을 밝혔다.
“그래도 들어오셨으니 된 거죠. 그렇게 노력해도 못 들어오는 사람도 많은걸요. 엘라단은 나이 제한이 없잖아요?”
유명한 일화로 엘라단 아카데미 시험에 무려 40년을 바친 남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끝까지 통과하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비극으로 끝이 났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적응하기 힘드네요.”
하도 침울해하는 모습에 안타깝다가 클레리아는 일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슬쩍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또 다른 여자분께 대시했나요?”
그러자 앨런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죠?”
이런 변이 있나.
클레리아는 하마터면 그의 면전에 대놓고 손으로 머리를 짚을 뻔했다. 저 말인즉슨 또 다른 여자에게도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반복했다는 거 아닌가.
“설마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셨나요?”
“아뇨!”
너무 강하게 하는 부정에 클레리아가 의심의 눈초리로 빤히 쳐다봤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지 않던가.
그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야, 약간은…… 그러니까 나름…… 조금 변형해서…….”
“테일러 씨, 여성에게 말을 걸고 싶으면 일전에 했던 말은 다 잊으세요.”
“예? 모, 모두 다요?”
“네, 모두 다요. 그런 말은 하시면 안 돼요. 역효과만 날 거고 제가 장담하는데 그 어떤 여성도 테일러 씨와 말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쿠궁!
그가 충격받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정말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다면 정중한 인사부터 시작하고, 정말 평범한 이야기를 하세요. 뭔가 유심히 보고 있다면 그것에 관심이 있느냐 뭐 이런……. 전에 제게 꺼내셨던 말만 하지 않아도 괜찮으실 거예요. 과시도 하지 마시고요.”
그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 말아야 할 게 많군요. 가진 게 있는데 과시하지 말라니… 통 이해하기가…….”
“거짓말 아니니 믿어 보세요. 동년배나 같은 동성 친구들에게도 그런 말 하지 마시고요.”
내키지는 않아 보였지만,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녀님께서 조언 주신대로 한 번 해보겠습니다.”
구시렁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어느 정도 반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앨런은 금방 백기를 들었다.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며 클레리아의 얼굴에 그를 만난 후로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어딘가 모르게…… 앨런을 보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점에서 찰스 랭터 자작이 떠오르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기 혹시…… 공녀님. 나중에라도 괜찮으시면 저랑 차 한잔이라도…….”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충고해 주고 몇 분이나 지났다고 또!
앨런은 아무래도 외모가 자신의 취향인 여자라면 일단 대시부터 하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쓸데없는 집념도 더해서. 괜히 4년 내내 아카데미 도전을 한 게 아닌 모양이다.
클레리아가 진심이냐는 얼굴로 노려보자 앨런의 말이 점점 기어들어 갔다.
“아니, 저는 다른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시면…….”
“아뇨, 저에게는…….”
순간 클레리아가 멈칫하며 말을 멈췄다. 그러자 앨런이 멍하니 바라봤고,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던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는 테일러 씨와 차를 마실 생각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확실한 거절에 앨런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죄송합니다.”
“테일러 씨랑 잘 맞는 분 꼭 찾으세요.”
그녀의 말에 앨런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클레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앨런의 말을 거절하며 순간적으로 내뱉을 뻔했던 말. 간신히 멈췄으나 계속해서 혀끝에서 맴돌던 그 이름.
‘……에단.’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내뱉을 뻔했다는 사실에 클레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를 정말 좋아하지만…… 정말 정말 좋아하지만 그건…….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쉽게 내뱉을 뻔하다니.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3권에서 계속...
공녀, 치유사로 살다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