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52)

제18장. 엘라단 아카데미로.

갈레노프로 들어서기 전, 잠시 마차를 정비하던 중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다소 격앙된 말투에 클레리아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취했다.

“에단은 이미 알고 있던 거지? 언제?”

클레리아는 대답 대신 재차 물었다. 혼자서 호위를 맡게 되었다면 당사자가 몰랐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몹시 못마땅했던지 에단은 고개를 돌린 채 인상을 쓸 뿐이었다.

“에단, 내 마음은 변함없어. 황녀 전하께서도 허해 주셨고.”

“내가 가서 물려 주시라 말씀드리겠어.”

“에단!”

바로 마차로 향하는 그의 팔을 클레리아가 붙들었다.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 어떤 의미로 왔는지. 우리가 라스칸트에서 어떤 위치인지 생각해.”

그녀의 말에 에단이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짜내어 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도 중요하지만, 가장 지켜야 할 건 황녀님이야, 3공작가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이건 우리의 사명인 거 알잖아.”

“…….”

불만이 가득해 보여도 그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전하를 잘 부탁해. 난 내가 알아서 잘할게. 아카데미는 기본적인 치안도 거의 우리 수도 수준이니 걱정하지 마.”

설마 그걸 걱정할까.

엘라단 아카데미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각국 귀빈의 방문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데에 엄청난 수고를 쏟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안이었다.

말 그대로 각국의 공주, 왕자. 공자, 공녀. 하물며 황녀도 있는데 그 기 싸움이 얼마나 세겠는가.

에단의 진짜 걱정은 클레리아가 자칫 그것에 휘말리거나, 음모에 빠져 원치 않는 외교 분쟁에 얽힐까 함이었다.

“정말 미치겠군. 사람 시험하는 데에는 아주 일가견이 있으신 황제 폐하야.”

에단이 짜증을 섞어 내뱉는 통에 클레리아가 깜짝 놀라 그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전하가 들으시면 어쩌려고.”

“맞는 말 했는데 뭐 어떠니. 게다가 공손히 폐하까지 붙였는데.”

세실리아가 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웃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친 클레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러나 에단은 어디서 나오는 오기인지 고개만 돌렸다.

클레리아가 사색이 되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오히려 세실리아는 그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정비가 다 되었습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에 클레리아가 마차로 돌아가려는데 에단이 그녀를 붙들었다.

“이거 가져가.”

에단은 자신의 허벅지 쪽에서 뭔가를 풀어 건넸다.

백색의 단검이 든 검집이었다. 푸른색의 세밀한 문양이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내 오라를 담은 단검이야. 아쉬운 대로 몸에 지니고 있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야 내가 조금이나마 안심해.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그의 망토 사이로 익숙한 것이 들어왔다.

그녀가 선물로 준 치유석이 박힌 검이었다.

잠시 멈칫하는 그녀를 에단이 쳐다봤다.

“에단도 검 절대로 몸에서 떼어 놓으면 안 돼?”

의외였던 듯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에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영애께서 잘 모르시나 본데 말입니다. 기사에게 검은 한 몸입니다. 받은 이후로 제게서 떨어트려 본 적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왤까.

그 말이 몹시도.

아주 몹시도 마음을, 귓가를 간질였다.

클레리아는 영문 모를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흐음……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런 얼굴일까.”

“벼, 별일 아닙니다. 전하.”

그렇게 답하며 시선을 피하는 클레리아를 보며 세실리아는 픽 웃음을 흘렸다.

* * *

빰빰빠-!

엄청난 인파가 나와 아카데미로 향하는 귀빈들의 마차 행렬을 축하했고, 금색 나팔들이 일제히 팡파르를 울렸다.

하늘에는 잘게 자른 색색의 종이가 끝없이 날렸다.

그저 입학일일 뿐인데 아카데미를 품은 갈레노프의 수도인 알펜도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클레리아는 일반적인 아카데미의 입학 모습이 아니어서 그 위세에 조금 눌려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얼떨떨해할 필요 없어. 빈 수레가 요란하거든. 자국인이 아카데미에 고작 10%도 못 미치니 저렇게 큰 환영식이라도 열어야 자신들의 면이 좀 서지 않겠니.”

세실리아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그제야 이해한 듯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노프에 왕족과 귀족을 모두 합한다고 해서 아카데미를 다 채울 수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엘라단은 수준 높은 입학 시험으로 악명이 높았다. 합격점을 받지 못하면 입학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그런 김에 궁금한 게 떠올랐는데 너희는 왜 엘라단에 입학하지 않은 거니? 뭐, 나야 황궁서 오가며 얼굴 마주치니 내 강의를 듣고 싶지는 않겠다만…… 다른 교수진들이라면 분명 관심이 있었을 텐데? 너희가 꽤 영특했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구나.”

세실리아의 물음에 클레리아가 ‘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클레리아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에단 또한 함께 엘라단 입학을 고려해 볼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똑똑했으니까.

문제는 바로 엘레나였다.

몇 번의 아카데미용 모의 시험을 치렀는데 모두 탈락해 버린 것이다.

그녀를 두고 둘이서만 가자니 엘레나의 소외감이 걱정되었고, 그렇다고 그녀가 통과하길 기다리자니 그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엘레나를 담당하던 과외 선생 세 명이 그만둘 정도였으니까.

공부도 따라가지 못했지만, 문제는 성격이었다. 더 가르치기 불가능할 정도라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미 제국에도 뛰어난 선생님들이 많으셨는걸요.”

세실리아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내 경험상 굳이 어릴 적부터 이런 낯선 곳에 떨어져 공부하는 건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닌 것 같구나. 수준도 뭐 제국과도 거기서 거긴 거 같고.”

그녀의 중얼거림에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황녀 전하가 워낙 수재였기에 그렇지 항간에 아무리 영재라 불린 이들도 엘라단에서 애먹기 일쑤랍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세실리아는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으로 성대한 축제 같은 바깥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아카데미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주아주 훨씬 컸다.

건물은 말할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명칭이 지정된 건물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제일 크게 놀랐던 것은 아카데미 앞 광장이었다.

일반 광장보다 훨씬 컸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각국의 귀빈이 데려온 호위단들이 빼곡하게 그곳을 메운 것이다.

계급이 낮아도 간혹 부를 이용해 과시하려는 귀족이나 평민들이 있는데. 이들이 과한 호위단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내부에 머물 수 있는 호위단이 한정되어 있어 외부에 머무르게 하는 비용을 전부 부담해야 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기가 눌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발버둥이였다.

‘어째 사교 파티의 거대 확장판 같은걸.’

클레리아는 수많은 인파에 진저리가 난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각기 마법 파동을 안정시켜 드리는 겁니다. 비상시 일정 보호막을 형성시키기도 하니 몸에서 떨어트려 놓지 마십시오.”

동행한 호위 마법사가 각각 보호 마법석이 박힌 목걸이를 주었다.

이는 아카데미에 있는 마법 학과 때문인데, 서투른 학생들의 마법이 돌발로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호위 마법사도 함께 꼭 지정되지만, 이번에는 내부 호위가 에단뿐이니 황실 마법사가 이렇게 준비한 것이었다.

이런 위험에도 1인 호위기사를 명한 건가 싶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에단이 마검사였으니까.

심지어 주문을 읊지 않아도 바로 발동시키는 마스터 급의. 그러니 황실 마법사의 준비도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

함께 한 근위대 일부 기사들이 에단에게 고개 숙였다.

“폐하께서 정하신 일이니 여러분이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나와 보고드릴 테니 문제가 생기면 바로 라스칸트로 연통 부탁드립니다.”

그들과의 정리가 끝났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녹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라스칸트에 광휘와 영광을. 황녀 세실리아 전하와 그 일행분들이지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러분을 담당할 에리카입니다. 이쪽으로.”

명랑해 보이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세실리아와 클레리아. 그리고 에단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라단 아카데미는 스무 개의 대형 서고와 공부하실 수 있는 열 개의 도서관. 각 과목에 따른 강의실이 예순세 개가 있고 활동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한 활동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영을 비롯한…….”

딱 들어도 어마어마한 크기와 수의 아카데미 시설 설명이었다.

저렇게 많은 것들을 외우느라 이 사람들은 정말 몇 달을 고생하지 않았을까?

귀빈들에게 설명하는 안내자들을 지나치며 클레리아가 질린 얼굴을 했다.

이어 화려하게 꾸민 건물에 들어섰다.

“이곳이 귀빈들께서 묵게 되실 기숙사인데요. 라스칸트의 귀빈들께서는 펜트하우스에서 묵으실 겁니다.”

마법으로 이동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순식간에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제국 귀빈을 위한 곳이라 그런지 곳곳이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고급 카페트와 가구가 가득했다.

응접실이자 거실에는 거대한 통유리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외곽에 있는 건물에, 고층이라 그런지 담장 너머의 갈레노프 수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 아카데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갈레노프는 파산했겠어.’

그 화려함과 대단함에 클레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의 랜드마크이니 갈레노프 국민이 그렇게 나와서 환호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들의 가장 큰 경제활동의 중심 중 하나일 테니까.

“원하시면 이곳으로 따로 식사가 배달되기도 하지만, 되도록 황녀님을 제외한 분들은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여기서조차 구분은 있었다.

하지만 황녀와 밥까지 먹으면 체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 클레리아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 피곤한 일이 될 줄은 모르고 말이다.

“오늘 하루는 입학하시는 분들로 분주하고, 내일부터 정식 일정이 시작됩니다. 일정 사항으로는 이쪽에 마련되어 있으니 읽어 보시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통화석으로 문의해 주십시오. 갈레노프의 빛이 사방에 닿기를.”

노골적인 마지막 인사에 에단과 클레리아는 순간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각국 구석구석의 귀빈이 이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저 노골적인 마무리 인사가 어색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참으로 솔직한 갈레노프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이걸로 별다른 행사는 없을 테니 둘도 쉬도록 해라.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야. 오늘의 여유를 만끽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 세실리아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거실에는 에단과 클레리아만이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잠시 거실을 둘러보던 클레리아의 발길은 통유리창에서 멈췄다.

마법이라도 쓴 건지, 아니면 정말 인력을 써서 하는 건지. 날리는 색색의 종잇조각은 멈출 줄 몰랐다. 아카데미로 연이어 들어오는 행렬도 여전했다.

“오후 여섯 시까지 입학생들을 받는다지?”

“응, 그렇다고 해.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접수하는 인원도 많아서 온종일 받는 게 일반적이라고 하더라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대답했다.

열흘.

이 엘라단 아카데미에서 머물게 된 시간은 열흘이다.

새 학기 시즌을 맞이해 세실리아가 명예교수로 특설 강의만 맡았으므로, 그렇게 긴 시간 머물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짧은 일정이나 그사이 저 많은 이들과 어떤 인연이 생길지. 아니라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없을지.

여러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인원수에 맞춰 방이 마련된 것 같지만, 난 거실을 써야 하니까 클레리아가 마음에 드는 방을 골라서 써.”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에서 들리는 에단의 목소리에 클레리아는 현실로 돌아왔다.

“응?”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서 쉬라고.”

돌아서자 격식을 위해 두껍게 갖춰 입었던 갑옷을 벗는 에단이 보였다.

“무슨 소리야? 거실을 쓴다니? 왜 방에 가지 않고?”

“전하가 이동하시거나 강의 중이실 때 호위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 숙소로 돌아온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야. 침입자는 없는지. 위급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는 있을지를 고려해야 하니 바로 반응할 수 있는 거리가 좋아.”

그는 기다란 소파를 자신의 침대로 찜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웠다.

“나머지 방에는 물건 정도만 둘 거니까 편하게 골라.”

“하지만 에단, 제대로 안 쉬면 호위할 때 몸 상태가 나빠질 수도…….”

“클레리아.”

묵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걱정으로 다그치던 클레리아가 뚝 멈췄다.

“기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한다는 건 그런 거야. 힘들어도 제대로 쉴 수 없고, 수면 부족으로 눈이 감겨도 제대로 잘 수 없어. 어떤 순간이든, 어디서든. 최대한으로 신경을 끌어올려 곤두세워야만 해. 그래야…….”

그는 천천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클레리아를 올려다봤다.

“기사의 의무를 다할 수 있어. 그렇게 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거야.”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것을 가만히 떨리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그의 손을 살짝 붙들었다.

“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운이 좋아 조건이 조금 다르지만, 다른 기사들은 매일같이 겪고 있는 거니 혼자 게을러지고 싶지 않아.”

“……응.”

네 뜻이 그렇다면야.

이 경우는 다르다고. 지금 상황이 같으냐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클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를 잠시 간직하듯 느끼다 놓아주었다.

“난 여기 이 방을 쓸 테니까 나머지 방에 에단의 물건을 두도록 해.”

“……들어가 보지도 않고 정해?”

클레리아는 빙긋 웃어 보였다.

“침실이야 잘 마련되어 있겠지. 나도 쉴 수 있는 공간이기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하고 들어가는 그녀를 에단은 말없이 지켜봤다.

어느 정도 짐을 정리하고 안내인 에리카가 말했던 일정표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첫날은 전체 입학 축하연에서 축사하고, 황녀와 함께 두 번의 강의에 동행하게 됐다. 나머지도 하루에 한두 번씩 중요 강의 참관 및 질의응답 정도가 다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일정이네. 나머지 자유 시간에는 뭘 해야 하나.’

그녀는 검지로 잠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서고와 도서관이랑 휴식 공간도 많다고 했었으니 구경할 곳은 많을 것 같았다.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도 많다고 했지? 쉴 땐 그곳에 한 번 가 볼까.’

일정표 옆에는 거의 웬만한 책 두께의 아카데미 안내서가 있었다. 클레리아가 지도를 보기 위해 안내서를 들었을 때였다.

딸랑

소리와 함께 들어왔던 문이 열렸다.

“라스칸트의 귀빈들을 뵙습니다. 입학 날은 분주하고, 실내가 복잡하기에 각 방으로 식사를 배정해 드리고 있습니다.”

안내인 에리카가 음식이 담긴 작은 카트를 끌고 왔다. 담아 온 식사를 탁자에 차리고, 덮어 놓은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스테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도 정갈하고 맛깔스러워 보였다.

다만, 이상한 거라면 두 사람의 분량밖에 없다는 것일 뿐.

“근데 왜 두 사람의 것만?”

“아, 저희 아카데미의 규율상 황족과 왕족, 또는 특별 초청을 받으신 분 외의 분들은 카페테리아에서 드시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말인즉, 치유사로 온 클레리아만이 황녀와 함께 이곳에서 식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에리카가 깍듯하게 저녁 식사 차림을 마쳤다는 듯, 고개 숙여 인사했다.

클레리아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마침 에단은 욕실에 가 있던 차였다.

그녀는 서둘러 에리카를 붙들었다.

“칼리스터 경이 나오면 식사는 칼리스터 경과 황녀 전하의 것만 전달하는 거라고 말하세요. 전 카페테리아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예? 하지만…….”

“황녀 전하의 호위를 한시라도 떨어트리는 게 마음에 걸리니, 두 분이 함께 드시는 게 맞습니다. 라스칸트 측의 요청이라고 아카데미에 그리 일러두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에리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스터 경이 곧 나올 겁니다. 잘 전달 부탁드립니다. 전 카페테리아에 가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뒤 클레리아는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며, 에리카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왕족이나 초청인들은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저 사람은…….

“뭡니까?”

그때 나오던 에단이 물어 에리카는 황급히 자세를 고치고 환하게 웃었다.

“고귀하신 라스칸트의 귀빈들께 식사를 내왔습니다.”

* * *

‘생각보다 분주하지는 않네.’

카페테리아 역시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줄이라는 것은 존재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회전율도 좋았다. 각 신입생이 괜스레 신경전을 하지 않도록 자리도 크고 넓고, 많은 곳에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니 누군가 다가왔다.

“카페테리아를 처음 방문하셨다면 이용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밝은 웃음이 귀여운 앳된 남자였다.

“네, 부탁해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싱긋 웃으며 앞장섰다.

식사는 각국의 전통식과 일반식.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먹고 싶은 걸 주문해도 바로바로 준비되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도우미들이 따끈따끈 음식들을 바로 가져다주는 것이다.

‘구호소 배급과 비슷하네. 고급 버전이긴 하지만.’

저녁이었으니 무겁게 식사하고 싶지는 않아 샐러드와 따뜻한 크림 수프. 그리고 향이 좋은 홍차 한 잔을 주문했다.

‘어디서 먹는 게 좋을까.’

클레리아가 이리저리 살피다 창가 쪽에 Y자 형태로 내려오는 계단에 마련된 자리가 보였다. 그곳이라면 카페테리아 내부 전경도, 바깥도 함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에 올라 자리를 잡자 예상처럼 한 눈에 전경이 훤하게 들어왔다.

어딘가 어색한 모습들, 원래 아는 사이인지 새롭게 친해진 건지. 삼삼오오 벌써 짝을 이룬 사람들. 아니면 벌써 식사 중에도 책이 코를 박고 공부 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신기하네.”

그녀는 개인 교사를 두고 가르침을 받은 케이스라 이런 광경이 진기하게 느껴졌다.

뭐, 엘라단 아카데미라면 평범한 학교하고도 차이가 있겠지만.

꼬르륵

주린 배에서 소리가 나자 그제야 배고픈 걸 깨달은 클레리아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운 샐러드를 한입 베어 물자 생과일을 착즙 해 넣은 드레싱이 입 안에 상쾌하게 퍼졌다. 게다가 따듯한 수프는 생야채의 거침을 완화해 줬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입가심으로 차까지 마시자 금상첨화였다. 외지에서의 식사에서 집이 연상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찻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그대는 어디 사는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이지?”

와장창.

“큽…… 흠흠. 크흠!”

그야말로 만약 분위기라는 것이 사물이었다면 이 느끼하고, 같잖은 말투에 못 견뎌 와장창하고 스스로 불살랐으리라.

사례 걸린 목을 가다듬은 후 클레리아가 천천히 테이블 옆에 선 사람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덩치. 있는 대로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갈색 머리.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찬 웃음을 활짝 지은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완벽한 나를 보고 그만 넋을 잃은 건가?”

그가 손을 뻗어 클레리아의 턱에 손을 대려 했다.

“그만.”

클레리아는 손을 들어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런 부끄럼을 많이 타는군.”

“신사분은 숙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본인의 말만 하시는군요? 인내심도, 여성에게 말을 건네는 법도 많이 부족하신 듯싶습니다.”

이런 접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해 딱딱하기 짝이 없는 말투가 반사적으로 나오고 말았다.

클레리아에게서 순간적으로 귀족적 기백과 단호한 말투가 흘러나오자 남자는 잠시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그…… 숙녀분의 말을 막았다면 미안하오.”

앞뒤 분간 없이 들이대는 것치고 상대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테이블 곁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이 가라앉는 것도 아닌지라 클레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학 첫날이라 어수선한데 신사분께서도 식사를 끝내셨다면 그만 기숙사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 먼저 일어나죠.”

그녀가 쟁반을 들려 할 때였다.

“첫날이니 더 즐겨야지. 내일부터는 학업에 매진하느라 더욱 바쁠 거 아니요. 하하하. 이리 주시오. 이런 건 대신 들어 드리겠소.”

그가 뒤로 고개를 까딱하자 뒤쪽에 있던 그의 호위가 쟁반을 들려 했다.

그러자 클레리아는 놀라 쟁반을 쭉 반대로 밀어 버렸다.

“무례하군요. 말도 행동도, 그 어느 것 하나 상대의 존중도 없고. 하물며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함부로 행동하다뇨!”

그리고 대체 그 하오체는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엉망진창에 느끼해서 들어줄 수가 없네!

클레리아는 목구멍을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눌렀다.

“내, 내가 그렇게 무례했소?”

또, 또, 또!

팍 구겨지려는 인상을 펴며, 클레리아가 팔짱을 꼈다.

“알고 싶으신 것 같으니 짚어드리죠. 첫째, 통성명은 고사하고 본인의 신분조차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테이블의 먼저 앉아 있던 손님에게 양해도 없이 먼저 다가와 멋대로 손을 대려 하는 등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셋째, 돌려 말한 거절의 의사를 무시하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쭉쭉 읊자 기세에 눌린 듯 남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밖에도 많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이쯤 하겠습니다. 전 돌아가서 쉬어야겠네요.”

클레리아가 짧게 묵례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멍청히 서 있는 그의 호위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자, 그녀의 기백에 놀란 그들이 서둘러 길을 열었다.

그녀가 쟁반을 든 채 지나치려던 그 순간, 이상한 느낌에 클레리아는 발길을 멈췄다.

길을 연 사람 중 하나에게서 어딘가 묘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클레리아가 올려다보자 온몸을 검은 옷으로 칭칭 감고, 눈빛조차 거의 보이지 않게 가린 이와 시선이 맞았다. 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서로를 보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이 사람…… 느낌이 이상해.’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었으므로 클레리아는 지체 않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저 사람 미쳤나 봐, 감히 저분한테 함부로 말을 걸다니.”

“누군데?”

“그분이잖아! 라스칸트의 3공작가!”

그때 다른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영애.”

남자가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이 놀라 술렁였다.

치유사로 얻은 명성에 비해 비교적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이런 식으로 밝혀지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클레리아는 서둘러 카페테리아를 나갔다.

* * *

“괜찮은 거야? 클레리아?”

“응, 괜찮아.”

클레리아는 곤란한 기색을 하고서도 조용히 웃기만 했다.

어제 본의 아니게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카페테리아를 나옴과 동시에 소란이 더욱 커지는 걸 들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걸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쯤은 어제 일을 전해 들은 사람이 꽤 되겠지.’

제국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역시 타국인지라 쏠린 이목이 사소하지는 않았다.

‘여기 오면 당연히 벌어질 일이란 건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니…….’

등에 식은땀이 줄줄 났다.

차라리 초청받은 친선대사라고 소개되어 일찍이 알려지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제 같은 일에 휘말릴 일도 드물 거고, 괜한 이야기가 도는 것도 적었을 텐데.

그런 영문을 알 리 없는 에단만이 도리질하다 한숨 쉬길 반복하는 클레리아를 보며 이상히 여겼다.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칼리스터 경의 말처럼 내 보기에도 별일이 있었던 듯싶구나. 딱히 말하고 싶은 것 같지 않으니 캐묻지는 않겠다만, 오늘부터 시선을 몰고 다닐 텐데 속도 든든하게 안 챙기고?”

어느덧 준비를 마친 세실리아가 나오며 말했다.

식사는 에단과 그녀의 것만 전달되니 클레리아는 카페테리아로 아침을 먹으러 가야 했는데, 어제 일로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속이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아침을 거르기로 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전하. 탈이 나서 전하의 일정에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세실리아가 불만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몸 전체에 달라붙는 세련된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고혹적이면서도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풍겼다.

“뭐, 네가 그리 긴장하고 있다면야 그게 좋을 듯도 싶지만…….”

그녀는 고민하듯, 검지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다 발을 뗐다. 그녀를 따라 에단과 클레리아의 시선이 움직였다.

쪼르르

“어차피 너도 불편한 상황은 겪을 대로 겪었으니 이 상황도 곧 익숙해질 터. 그러면 허기도 몰려올 거다. 그렇다면 마땅히 달랠 상황이 있을지 장담도 못 해.”

그녀는 찻잔에 홍차를 우려 찻잎을 뺐다. 그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를 들어 그 잔에 부었다.

“이거라도 마셔 두렴.”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두 사람이 굳어 버렸다.

황녀가 밀크티를 탔다고?

그것도 신하 먹이려고 직접?

다른 사람도 아닌 클레리아를 위해서?

앞으로 내민 찻잔을 놀란 얼굴로 가만히 내려다보는 클레리아에게 세실리아가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드니? 그럼 그냥 버리고.”

“아, 아닙니다! 전하! 그저…… 그저 너무 감사해서요.”

발열석을 서슴없이 주었을 때도 놀랐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수 차를 타 주기까지?

세실리아에 대한 반감에 비해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행동들은 늘 당황스러웠다. 왜 이러지? 싶다가도 그 변화가 두려울 만큼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클레리아는 그녀에게서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그러자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딴청을 부리던 세실리아가 힐긋힐긋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맛은…… 괜찮으냐?”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네, 무척이요. 무척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아주 좋아요.”

보는 사람조차 화사해지는 것 같은 웃음에 세실리아가 시선을 돌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내 차 우리는 솜씨가 나쁘지는 않단다.”

두 사람을 지켜본 에단은 조용히 한발 물러나 웃음을 감췄다.

몸 깊은 곳까지 따스함이 퍼지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예기치 못한 차 한 잔에 괜한 걱정들로 어수선했던 머리가 정리됐다.

차로 따뜻하게 배를 채운 뒤, 세 사람은 입학식이 시작하는 대강당으로 향했다.

* * *

“저 사람이야? 어제 프라이어스 영애께 작업을 걸었다는 사람이?”

“작업? 그 정도면 수작질이지.”

“간도 크네, 뭐 얼굴이 유명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 실수면 라스칸트에서 당장 죽이라고 난리 치는 거 아니야?”

“우리도 몰랐는데 평민이라고 알았겠어? 저 사람 그 평민 중에 유명한 부자 있잖아. 거부 테일러 가의 막내라지?”

강당에 빼곡히 앉은 사람들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앨런 테일러는 둔한 건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그저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하…… 그런 귀한 분이신 줄도 모르고, 이거 참……. 하지만 내가 뭐 실수하진 않았잖아? 꽤 고심해서 고른 멘트들이었으니까. 응?”

그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의 호위를 바라봤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천으로 휘휘 두른 그들은 조금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응? 응?”

“…….”

재촉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는 불만 가득하게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참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네. 아버님이 실력 뛰어난 자들이라 했으니 망정이지, 그거 아니면 진작 경을 쳤을 줄 알아.”

그때였다.

“아카데미 총장 제럴드 크레인 님과 교수진 분들께서 입장하십니다.”

안내와 동시에 어수선하던 대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어 머리가 새하얀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고, 그 뒤를 이어 교수진이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엘라단의 자랑스러운 졸업생이자 이번에도 명예 교수로 초청되신 라스칸트의 세실리아 펠리시아스 황녀님, 친선 대사로 오신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영애, 호위 기사로 오신 에단 칼리스터 경이십니다.”

원래 호위의 성명까지 발표되진 않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에단의 이름까지 발표됐다.

세 사람은 천천히 그들을 따라 강단으로 올라섰다.

짝짝짝짝짝

총장이나 교수진이 들어설 때도 없었던 기립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우리 황녀님 인기 많으시구나…….’

열정적으로 박수 치는 남학생들과 동경의 눈으로 황녀를 바라보는 여학생들을 보고 클레리아는 새삼 그녀의 인기를 실감했다.

라스칸트 안에서도 세실리아의 인기는 좋은 편이지만, 황태자인 안투스 때문에 쉬쉬하는 편이니 이런 분위기가 새삼 놀라웠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는 세실리아에게만 쏟아진 게 아니었다.

“세상에…….”

“꺄악, 어떡해!”

온갖 감탄사가 남녀 사이에서 작게 터져 나왔다. 일부는 클레리아 때문에. 일부는 에단 때문이었다.

소동은 전해 들었어도, 얼굴을 못 본 남학생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어 교수진까지 당황할 정도였다.

게다가 먼 곳에 선 에단을 보고 여학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하니 대강당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잔뜩 벼르고 있던 앨런 테일러도 주변 반응에 절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흠흠, 정숙해 주십시오. 입학식 중입니다.”

결국, 안내자의 경고 후에 대강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제럴드는 축사를 위해 단상에 섰다.

“올해도 많은 분이 이 엘라단 아카데미에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졸업하실 때까지 원하는 성취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특별 초청으로 오신 친선 대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영애의 축사도 간단히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이 불리자 클레리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에단은 기운 내라는 듯 웃어 주었고, 세실리아는 올해는 그녀 덕에 축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단상에 섰다.

300명이나 되는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몰렸다. 저 멀리, 카페테리아에서 당황스럽게 했던 남성도 있었다. 비싼 털목도리에 덩치가 저리 크니 눈에 띄지 않을 리도 만무하지만.

그녀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라단 아카데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지만, 와 본 것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왜 갈레노프 제일의 자랑이며, 이곳을 졸업한 분들의 긍지가 대단한지 알겠더군요. 목표하신 아카데미를 훌륭하게 입학하신 것처럼, 모든 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해 졸업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한 번 학생들의 손뼉이 이어졌다.

“각 학생은 담당 강의실로 가 주시고, 담당 교수님들의 안내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총장과 클레리아 일행은 잠시 담소를 나눴다.

“황녀님을 비롯해 두 공자, 공녀님을 뵈니 참으로 기쁩니다.”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제럴드가 인자하게 웃었다.

“특히나 새로운 치유사님이 친선 대사로 오신 게 참으로 기쁘군요. 이런 영광된 방문이 설레면서도 혹여 베푸실 자애로움을 기대하게 되는군요.”

실눈처럼 가늘게 호선을 그리던 그의 눈이 살짝 뜨였다.

그 속내를 파악한 클레리아는 적당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세실리아는 성가심이 가득한 한숨을 노골적으로 내뱉었다.

그의 말은, 곧 클레리아에게서 치유력이 발현되는 걸 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라스칸트가 제국령으로 타국에서 치유력 사용을 금지했다는 걸 알면서도 늘 이런 수작이 난무한다. 제국을 따르지만, 견제가 깔린 의구심도 동시에 보내는 것이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는 외국에서 치유사가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에 의심의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캐내려 작정하기에는 제국과 척을 지게 되기에 잠자코 있을 뿐.

치유사이기 전에 그녀도 공녀였다. 이런 것에는 훤했기에 클레리아는 싱긋 제럴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치유사의 힘을 그렇게 높이 사시시니 기쁘지만…….”

그녀는 서서히 눈을 떠 제럴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르누엘룻 님의 축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 갈레노프의 국교기도 하니 이미 알고 계시겠네요.”

그 말에 제럴드의 온화하던 얼굴이 잠깐 경직됐다.

르누엘룻의 축복.

제국과 같이 신 르누엘룻을 국교로 삼은 나라는 많지만, 증거로 치유사가 나타나는 건 라스칸트뿐이다.

클레리아의 말은 같은 국교를 지녔어도, 치유사는 결국 라스칸트만의 고유의 것이며 그 외는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즉, 라스칸트의 위치를 함부로 넘보지 말 것이며,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제럴드는 능숙하게 다시 평온한 얼굴을 되찾았다.

“그렇지요. 역시 르누엘룻 님의 축복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표정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같은 국교임에도 치유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치욕적으로 생각하니까.

예전 멸망한 나라 중 하나에선 치유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인체 실험까지 하기도 했다.

제럴드의 같잖은 시도에 짜증이 나 있던 세실리아도 기분이 풀린 듯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클레리아가 웃는 얼굴로 단박에 내쳤으니 그럴 수밖에.

‘이럴 때는 이 아이가 황실 편의 영애라는 게 새삼 뿌듯하단 말이지.’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나른하게 말했다.

“오늘은 총장께서도 바쁘시겠군요. 저도 이제 곧 첫 강의 시간이라 가 보지요.”

“예,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럴드가 허리를 깍듯이 숙여 인사했다.

“부탁은… 총장님 제 스타일 아시면서.”

그렇게 대꾸한 세실리아가 앞서 지나갔고, 클레리아와 에단 역시 뒤를 따랐다.

뒷덜미로 묵직한 제럴드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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