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52)

제17장. 클레리아의 입지.

“뭐? 네가 거길 왜?”

“…….”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들여다봐도 서신 속 내용은 잘못 보거나 틀린 곳은 없었다.

‘폐하께서 곧 공표하실 내용이 있다고 하시더니 이거였나.’

클레리아는 서신을 고이 접으며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제 날 외교적 장치로 제대로 쓰실 모양이야.”

그녀가 난감히 웃었지만, 굳어 버린 에단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잘 해낼 거야. 걱정하지 마. 모두가 도와주고 계시고, 무엇보다.”

클레리아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에단도 곁에 있어 줄 거잖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는지 그의 표정이 단숨에 풀려 버렸다. 그리고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힘이 되어 줘. 함께 헤쳐 나가자.”

그의 파란 눈동자가 물결치듯 잠시 떨렸던 것 같다.

에단은 시선을 떨어트리며 웃어 버렸다.

“내가 알던 클레리아가 맞나. 어째 오늘은 안 하던 행동을 다 하고.”

그가 성큼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가까워져 지금껏 여유롭던 클레리아의 얼굴에도 놀란 빛이 서렸다.

“그래도…… 싫지만은 않네.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나의 레이디, 클레리아.”

빤히 다가온 얼굴을 올려다보다 그의 말에 더 참을 수 없어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에단이 ‘하하’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거리를 벌리고는 에단은 말로 향했다.

“함께 헤쳐 나가자. 쉬어, 클레리아.”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말에 올라 멀어져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클레리아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 * *

“너무 섣부른 결정 아니시겠습니까? 폐하?”

누에른이 말했다. 엘라단 아카데미로 향하는 그녀의 곁에 클레리아를 붙여 보내겠노라고.

세실리아는 엘라단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마법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영재 중의 영재인 그녀에게 갈레노프는 몇 년째 교수직을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그녀가 한 곳에 얽매이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이라도 있어 상대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귀찮은 일일지…….

상상조차 안 됐다.

그랬기에 그들의 제안을 몇 번이나 거절했고, 피했다. 능구렁이처럼 웃어넘겨 버리는 그녀의 화술이 그걸 가능케 했다.

하지만 수석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문제였다.

그 탓에 명예교수라는 직책은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었고, 그녀의 강의를 듣고 싶다는 학생들의 요청도 매해 쇄도했다.

올해 역시 연례행사처럼 그러겠거니 했는데, 느닷없이 누에른이 클레리아를 그녀의 수행원 겸, 친선 대사로 함께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섣부를지 모르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새로운 치유사의 부재가 컸어. 치유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큰 사건일진데, 황실을 떠받치는 3공작가 중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아스칸 대륙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이는…….”

누에른의 눈이 무거운 빛을 내며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그동안 나의 능력을 의심하던 이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어. 라스칸트가. 이 내가 건재하다는 걸 표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말에 세실리아는 낮은 콧바람을 내뱉었다.

“아버님의 힘을 과시하려다 애먼 아이를 잡는 게 아니신가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그녀의 탐탁지 않아 하는 말투에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구나. 넌 프라이어스 영애를 못마땅해하지 않았더냐?”

그녀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양 눈빛이 아득해졌다.

“……그랬었지요. 분명 그랬습니다. 그 아이는 다가가기도 전에 거절의 표정을 짓고 있었고요.”

세실리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눈을 하다 어딘가 허한 웃음을 흘렸다.

“저도 제가 어쩌다 그 아이를 위해 이런 말을 하게 됐는지 의문이군요.”

그녀는 클레리아가 몰래 시녀를 구하다 들켰을 때, 가감 없이 놀란 마음을 고스란히 얼굴에 내비친 걸 떠올렸다.

기분 나쁜 인형처럼 보였던 그 아이가 사람으로 느껴졌던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까.

하지만 황제가 그러겠다 하면 굳이 강하게 반대할 생각도 없던 세실리아였다.

“치유사가 라스칸트를 벗어나면 힘을 못 쓰는 약점을 들키지 않게 단단히 채비하셨길 바랍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이미 손을 써 뒀으니까.”

놀란 듯 눈을 치켜떴지만, 곧 시선을 내렸다.

치밀하기 유명한 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하셨을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평소라면 분명 누군가를 데리고 가라 해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을 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귀찮게 일 늘리지 말라 하겠지. 본인은 신경 쓰기 싫으니 알아서 하라고.

그런데 오늘 세실리아는 누에른의 눈에도 조금 달랐다. 언제나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던 딸의 변화가 그 역시 싫지만은 않았다.

누에른은 어쩌면 이 이일이 여럿에게 탁월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그시 웃음 지었다.

* * *

누에른은 며칠 뒤 새 학기를 맞이해 엘라단 아카데미로 세실리아와 클레리아의 공동 파견을 공표했다.

클레리아 역시 잠자코 있었기에 칼리에와 레인 역시 놀라고 말았다.

그녀를 이용한 외교 정치가 생각보다 일찍이라고 칼리에가 항의하러 나서겠다는 걸 말리느라 클레리아는 진이 다 빠질 정도였다.

결국, 사전에 모든 준비를 황제께서 은밀히 다 행해 놓으셨다는 설득 후에야, 간신히 노발대발하는 칼리에를 막을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제국민들은 긍지 높은 엘라단 아카데미로 세실리아와 클레리아가 함께한다는 것을 기뻐했다.

자긍심과 애국심을 높이는 만큼 그녀의 행보는 환영받는 분위기였다. 동맹국들에게도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3공작가의 일원으로서는…… 오히려 지금 상황은 매우 긍정적인 편이겠지. 황가와 3공작가의 연대가 굳건해지는 모습으로 보일 테니.’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지만, 부담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황실의 대대적인 행사라 그런 걸까.

치유사로서의 임무를 띤 게 아니라서 클레리아는 특별히 준비할 것이 없었다. 그저 황실에서 준비해 주는 것을 바탕으로 몸만 가면 됐으니까.

그렇게 제국의 무게를 짊어진 엘라단 아카데미로 향하는 날이 다가왔다.

와아!

‘황녀님이 명예교수로 가실 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반겼었나?’

황궁 앞 중앙 광장으로 모여든 제국민들의 환호가 열렬했다.

이미 세실리아가 명예교수로 아카데미에 갔다온 지 다섯 번이 넘었다. 그때마다 파견식을 축하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성대하게 느껴지진 않은 것이다.

앞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건 황족 일가였는데 왠지 모르게 따가운 시선을 느끼는 건 클레리아였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도록 더욱 고개를 수그렸다.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클레리아는 세실리아의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구나. 이제 한시름 돌려도 된다.”

베일 커튼을 창에 치며 세실리아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사실 마차에 오른다고 느껴지는 부담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황녀와 단둘이 있는 거니까.

따로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검소한 모습을 강조한다며 황녀와 같은 마차를 타게 됐다. 치유사의 허울을 벗어도 클레리아 역시 중요 귀빈이었으니 아주 이상할 건 아니었다.

딱딱히 굳은 클레리아를 보며 세실리아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다시금 과거의 클레리아가 나온 탓에. 그것이 못마땅한 그녀가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흠…… 또 불편한 얼굴을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알고 있니? 원래도 최소한으로 호위를 데리고 간다만, 이번에는 아카데미 내에서 한 명의 호위만 둘 예정이다.”

순간 멍해져 클레리아는 멀뚱히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예?”

아무리 검소하다고 해도 황족이 타국에 가는 것이다. 호위를 조촐하게 하는 것도 반대였는데 더 줄였다니?

“그 한 명이 누굴 것 같니?”

그녀가 창틀에 팔을 얹어 턱을 괴며 묘하게 물었다.

‘설마…….’

클레리아는 사색이 되어 자세를 고쳤다.

“황녀 전하, 명을 물려 주세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녀가 말하는 호위는 다름 아닌 에단이었던 것이다.

명실상부 제국의 실력 1인자가 되었고, 클레리아의 전담 수호 기사였으니까 그가 함께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위뿐만이 아니라 황녀의 호위까지 맡아야 한다니. 황녀의 호위를 맡으면 24시간 내내 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제야 표정이 제대로구나.”

지금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하의 호위로 가뜩이나 날이 서 있을 텐데 쉴 여유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내 말이 그거다. 하지만 어쩌겠니.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라 폐하의 명이시다.”

‘폐하의…….’

거부할 수준이 아니란 걸 알게 되자 클레리아가 망연자실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 얼굴은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 자란 죽마고우를 위한 것이니, 아니면 또 다른 연유가 있는 얼굴이니?”

다시금 고개를 들자 세실리아가 재밌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웃고 있었다.

“잘 들어, 클레리아. 이번 나의 파견은 겉치레다.”

“예?”

“나는 허울뿐이라는 거다. 이번 방문의 주인공은 너다.”

세실리아는 붉게 칠해진 손톱이 유난히 반짝이는 검지를 들어 클레리아를 가리켰다.

“네 시험 무대라는 거다. 치유사는 타국에서 절대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규칙인데, 치유력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치유사를 굳이 나라 밖으로 보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외교적 치유사의 파견은 늘 요청이 들어올 때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3공작가의 일원이 더욱 중요 인물이 되었으니 어떤 인물인지 공개적으로 살피겠다는 거군요. 중요 귀족들 외에는 늘 소문으로만 접하는 이들이니까요.”

클레리아가 나직이 말했다.

“역시 똑똑한 아이라 이해가 빠르구나. 누구랑은 다르게.”

‘……누구?’

클레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세실리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반응을 살피던 클레리아는 몇 번 입을 달싹이다 결정한 듯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전하, 청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른침을 삼킨 클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칼리스터 경의 호위는 전하만으로, 저를 제해 주세요.”

세실리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이라도 아카데미 내에서 호위를 거느리지 않는 귀족은 없다. 심지어 우수함으로 들어온 평민들까지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개인 호위를 둘 정도니까.

“네 호위를 포기하겠다는 거냐?”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황녀의 호위는 당연히 중요하다. 치유사인 클레리아의 입지도 중요하지만, 황녀보다 중요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이중 호위라는 부담을 에단에게 지울 수 없었다.

‘이건 나뿐이 아닌 에단을 향한 시험이기도 해. 한 나라의 1기사이자 칼리스터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우리보다 체력적인 부담이 심할 텐데 그냥 둘 순 없어.’

“그러다 네게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폐하께 경을 친다. 절대 안 될 일이야.”

“각국 귀빈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제게 함부로 대할 자가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아니죠. 그리고…….”

클레리아는 강직한 눈초리로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황녀 전하는 우리 라스칸트의 귀빈이십니다. 제게도 마찬가지세요. 그러니 이리 하는 게 맞습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도 못 견딜 겁니다.”

진담이었다.

프라이어스의 몇 대가 황실에 충정했고, 그녀 역시 그리 배우며 자랐다. 또한, 그것은 라스칸트를 사랑하는 그녀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회귀 전에 황녀가 자신을 죽이는 데 일조했어도 지금은 달랐다. 그녀가 위험해져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건 싫었다.

의외의 상황이었는지 세실리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듯 클레리아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참으로 넌 이상한 아이다. 뻔한 아첨으로 들릴 말을 어찌 그리…….”

진중하고 진솔하게 해.

마지막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진정한 속내를 비치는 건 세실리아 역시 익숙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괜찮겠니?”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제가 겪어야 할 몫이니 감당하겠습니다.”

세실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책스럽게도 자꾸만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 해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클레리아는 청을 허해 준 황녀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그때 세실리아가 덧붙였다.

“클레리아, 태도에 신경 쓰거라. 이번 여행에서 내게 즐거움은 너뿐일 테니까.”

* * *

“어서 오세요, 캄스턴 공자님.”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하녀들을 보며 레리안은 빙긋이 웃었다.

“시내에 있는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거다. 예쁜 접시에 담아 아가씨 방으로 내오도록 하고. 다른 봉투에 있는 것들은 너희들끼리 나눠 먹도록 해라.”

그의 능구렁이 같은 말에 하녀들은 화색이 돌았다. 누가 그들에게 이리 귀한 것들을 턱턱 내놓는단 말인가.

레리안은 이런 사탕발림과 매너로 이슬레이터 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점수를 따 놓은 상태였다.

“공자님.”

그때 뒤에서 집사 레이먼이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레리안이 여유롭게 답했을 때였다.

“레이먼, 물러나게. 내가 마저 얘기하도록 하지.”

순간 굵직하고 냉랭한 목소리에 레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레이먼이 옆으로 비켜서자 멀찍이 뒤에 서 있는 이슬레이터 공작이 드러난 것이다.

“그간 집에 내 신경을 못 썼는데, 손님이 자주 찾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 그것도 귀한 후작의 영식이 말이야.”

석고상이 말해도 이것보다는 더 부드러울 것 같았다.

멸시가 가득한 눈초리에 레리안은 어금니를 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를 뵙니다. 각하께서 계신 줄 모르고 결례를 범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재빨리 돌아가려 하자 카이론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냥 온 게 아니라 내 여식과 요즘 친밀히 지낸다지? 사교 모임에도 자주 에스코트하고. 언젠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되었군.”

그가 상황을 간신히 참아 주고 있다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같이 담소나 나누지. 내 서재로 가세.”

일부러 이슬레이터 저 근처에 사람을 심어 공작이 집을 비운 때만 공략했는데.

어느새 그것을 간파당한 모양이다.

레리안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난처하게 웃었다.

그의 목적은 모자라 보이는 엘레나를 구워삶는 것뿐이지 공작과 얽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슬레이터 공작 역시 3공작가 중 하나답게 만만치 않았고.

‘칫, 어찌 됐든 장단은 적당히 맞춰야겠군.’

그는 기세를 숨길 생각도 없는 듯 카이론이 올라간 곳을 무섭게 노려보며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 불편할 때가 있을까.

카이론은 레리안을 마주한 뒤 단 한 번의 표정도 내보이지 않은 채 석고상처럼 움직였다.

코트를 벗고, 가지고 온 서류를 책상에 뒀으며 건조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 태도가 너무도 사무적이라 손님을 맞이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레리안은 그에게 손님이 아닐지도.

그는 책상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레리안을 바라봤다.

앉으라는 말 한마디, 차를 마시겠냐는 권유조차 없었다.

3공작가는 각기 가진 다른 성품이 유명했다.

타이엔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위압감을. 엘빈은 유들유들하고 유쾌한 분위기 뒤에 감춘 촌철살인을.

레리안은 앞에 있는 카이론을 바라보며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에 있는 이슬레이터 공작은 내내 사람의 기가 질려 버리게 하는 무감각한 무시로 상대를 압도했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진저리나게 하는 건 아마 누에른도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레리안은 자신이 카이론의 손끝으로 눌러 터트려 죽어도 상관없을 버러지가 된 느낌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차피 곱게 볼 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 차라리 그딴 시선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생글생글 눈웃음쳤다.

“공작 저에 많이 방문했는데 한 번도 뵙지를 못해 너무 아쉬웠습니다. 세 공작 각하들께서 워낙 바쁘신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나른하고 못마땅한 시선과 평범해 보이는 입가마저도 불편함이 가득했다.

레리안은 다시 심기일전하고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영지에 가 계시다죠? 제가 여성분들이 좋아하시는 물건을 보는 눈이 좀 좋아서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

‘제기랄…….’

목을 조이는 크라바트를 당장에라도 풀어 버리고 싶었다.

“… 제가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

타인의 넓은 서재에 멀뚱히 선 채, 손님으로서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그 어떤 대접도 없다.

하지만 더욱 불쾌한 것은 축객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

마치 집에 들어온 걸 허락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고, 널 위해 내놓을 것도 없다는 박대가 머리 위로 퍼부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기분이 이렇게까지 역겨운 이유는, 카이론에게서 나온 어떤 말이 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태도와 시선만으로 레리안 그, 스스로가 모멸감에 떨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레리안은 분에 겨워 낮게 그르릉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렸다.

카이론은 그제야 그의 기세가 꺾였음을 감지했다.

“기사 시합에 나가 2등을 차지했음에도 귀족 서작만 받고 어떤 기사단에도 입단하지 않았더군.”

“전 제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지, 어디 소속의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마침내 건 말 덕에 레리안이 안심하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성실히 무언가에 임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진작 그의 한량 기질은 카이론도 알아봤다. 현 캄스턴 후작이 레리안에 대한 언급만 있어도 머리 아파하는 걸 봐 왔으니까.

‘적당히 상대해서는 떨어져 나가지 않겠군.’

계산을 마친 카이론이 싸늘하게 뱉었다.

“……리나 로트만.”

갑작스레 들려온 이름에 레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멜리사 록스, 앤 테일러, 비비안 샬로엔, 글로리아 허먼, 피비 젠슨…….”

끊임없이 나열되는 이름에 레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더 읊어야 하나? 캄스턴 공자?”

물음에 레리안은 답하지 못했다.

카이론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모두 그와 연관이 있었으니까.

방탕하기 짝이 없는 생활에 빠져 살 때, 모두 그를 스쳐 간 여자들이었다.

아니, 스쳐 갔다고 생각한 건 그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중에는 결말이 좋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으니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고 덤비고, 얼굴만 반반하다면 평민도, 천민도, 귀족도 가리지 않지. 병으로 요절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야.”

카이론은 천천히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분위기는 완전히 그에게 넘어간 듯했다.

“내가 왜 이들을 언급하는지 알겠나?”

레리안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후작 가에서도 이미 내놓은 자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랬기에 방탕히 살아온 것도 후회는 없다. 그를 자식 취급도 안 하는 집안에서 유희라도 쫓지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살랴.

주제 모른 채 날뛰고, 경거망동하는 건 그의 특기 아니던가.

정체성을 되새기자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제가 따님 곁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시겠죠. 그 쉬운 말을 뭘 그리 빙빙 돌려 말씀하십니까? 제가 지나온 여자들을 줄줄 나열하면 저의 뭐가 좀 달라질 줄 아셨습니까?”

태도가 180도 바뀐 그의 모습에 카이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안하무인인 걸 아셨다면 제가 그런 말에도 반응이 없을 것도 아셨어야지요.”

“본색이 나오니 차라리 대하기 쉽군. 두 번 다시 내 저택에 발 들이지 마라. 엘레나에게서 떨어져. 외향으로 따지자면 프라이어스 영애가 훨씬 취향일 텐데?”

“크큽…… 하하하하! 공작 각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순간 그의 말에 레리안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도 넘은 무례함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웃다 눈에 고인 눈물을 찍어냈다.

“공작가는 유대가 강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그 말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가 들으셨다면 얼굴이 꽤 볼만했을 텐데요. 아니면 결국, 각하도 자기 자식이 중요하다, 뭐 이런 겁니까?”

카이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노려봤다.

“제가 바본 줄 아십니까? 숱한 여자를 만났지만. 저도 제 말재간에 넘어갈 여자가 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불량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비웃듯 카이론을 바라봤다.

“각하의 따님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에 다가간 것뿐입니다. 제 탓하지 마십시오. 제 말재간에 넘어올 정도로 딸을 만만히 키우신 각하께서 오히려 문제이시죠.”

카이론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손을 말아 쥐었다.

“무뢰한인 줄은 알았지만, 아주 개차반이야. 멋대로 지껄이면 입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경험하길 바라나?”

무감각을 일관하던 그가 동요하는 걸 보며 레리안은 째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가 무뢰한은 맞으나 진정하십시오, 각하. 제 과거를 캐내 먼저 모욕하신 건 각하십니다. 생쥐도 몰리면 무는 법이죠.”

“물어도 그 생쥐가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지.”

팽팽한 기 싸움으로 두 사람의 시선에 불이 일었다.

하지만 레리안은 악랄함과 동시에 영리했다.

“각하, 지난 과거 일로 서로 무뢰배가 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불한당 같은 삶을 정리한 건 오래입니다. 지금은 그저 엘레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친우로서. 그리고 먼발치서 그녀를 애달파하는 한 남자일 뿐입니다.”

“엘레나? 감히 내 딸의 이름을 그 입에 담지 마라!”

어찌나 하는 말마다 망언인지 카이론은 결국,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보며 레리안이 쓰게 웃었다.

“저런. 하나 각하께서는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 엘레나에게 전 가장 큰 위로이자 힘입니다. 그녀에게서 절 떼어내는 건 따님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세요. 저 역시 제 삶에서 더는 엘레나가 없어서는 안 되고요.”

조롱과 함께 가책도 없는 거짓말을 섞는 꼬락서니가 기가 막혔다.

엘레나가 없어서는 안 돼?

감히 그런 같잖은 말을……!

“캄스턴 후작의 낯을 봐서라도 타이르려 했는데. 인제 보니 그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말을 하던 게 사실이군. 잘못 지은 정도가 아니라 실패야. 이 정도면 온 제국민의 원성을 사도 할 말이 없겠어.”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레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것을 확인한 카이론이 쐐기를 박았다.

“왜 형인 레녹스가 후계자가 되었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군. 안 그런가?”

레리안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 나갈 때였다.

쾅!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서재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엘레나가 들어왔다.

“제 손님에게 이런 무례라니요!”

“무례? 두 사람의 행보 자체가 잘못이란 생각은 안 드는 거냐?”

노여움 가득한 카이론의 말에 엘레나는 무섭게 노려보다 레리안의 손을 잡아챘다.

“나와요. 아버지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죠.”

“엘레나 이슬레이터!”

어리석어도 어찌 이 정도일까.

하필 저런 놈 때문에 아버지와 대치 중인 상황에도 사리 분별 못 하는 꼴이라니.

카이론은 너무 늦게 관여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제게 누가 남았죠? 절 뒷받침해 주겠다 했던 클레리아는 치유사가 되어 떠났고, 약혼자였던 에단도 상의 한마디 없이 그 아이에게 붙어 날 따돌렸어요. 이럴 때 아버지는 뭘 하셨느냐고요!”

“네가 스스로 준비하지 않은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게냐?”

“이것 보세요! 아버지조차 절 외면하시면서 좋은 소릴 기대하세요? 제 곁에서 절 도운 건 레리안뿐이에요! 이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시는 건 절대 못 참아요! 저택에 오는 것도 막으실 수 없어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까닭일까? 명문 일가의 자제답게 그래도 눈치껏, 친우들을 보고 배우는 게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도 아니라면 너무 오냐오냐하며 허영심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 컸을까.

카이론은 상상 이상인 엘레나의 행동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전 당분간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으니 별채에서 머물겠어요. 더 뭐라 하시면 나갈 거예요. 제가 집 나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저흴 내버려 두세요.”

기가 차다 못해 쓰러질 지경이다.

딸의 손에 이끌려 서재를 나가는 레리안이 그를 향해 소리 없는 입 모양으로 ‘그것 보십시오’라 말했다.

카이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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