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52)

제16장. 이제는 때가 된 걸까?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구호소를 찾아오는 인원도 줄었고, 모처럼 지원 요청도 없었기에 치유사들은 히리스벨라 관의 집무실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구호소에만 묶여 있던 칼리에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점심을 같이했다.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차 한잔을 하려던 그때였다.

황제의 명을 하달하러 온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에, 클레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

갑옷을 정갈히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그간 각자가 바쁜 덕에 저택에서조차 제대로 마주했던 시간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일터로 타이엔이 방문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반가움이 컸다.

잠시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던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클레리아. 치유사로서의 직무는 잘하고 있는 거냐?”

“네, 많이 부족하지만, 모두가 잘 가르쳐 주고 계세요.”

대답을 들은 타이엔이 클레리아의 등을 툭툭 다독였다.

그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는 서넛의 근위대원들을 발견하고 클레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놀란 듯 몇은 눈을 동그랗게, 몇은 동요한 것 같았다.

“클레리아가 잘 적응하고 있다니, 칼리에 님과 레인 님의 수고가 많으십니다.”

“클레리아가 따라와 주는 게 빨라 힘든 것도 없는걸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녀의 물음에 타이엔의 시선이 클레리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따스한 눈길로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잠시 딸을 좀 빌려 가고 싶습니다. 간단히 의논을 좀 해야할 것 같아서요.”

“지금 말인가요?”

“외근 중 잠시 짬이 났는데 요새 통 바빠서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날 것 같지 않구나. 괜찮다면 황궁에 있는 내 집무실에서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정도라면 급하거나 분명 중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클레리아가 칼리에를 돌아봤다.

“그렇군요, 아직 일정이 남아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클레리아를 다시 히리스벨라관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네, 변경이 있다면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칼리에가 끄덕이자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시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나 타이에는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갖는 부녀의 시간이니 자네가 조금 이해해 줬으면 하는데?”

평소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가 아니었기에 에단 역시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둘 사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클레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과 동시에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다른 기사들을 보며 클레리아는 순간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격식을 차릴 거라 생각한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타이엔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고, 클레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꼈다.

“다녀오겠습니다.”

* * *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히리스벨라관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황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면서도 타이엔은 별말이 없었다.

혹 정말 중요한 얘기라 집무실 외에서는 조심하시는 걸까.

잠자코 기다리는데 그를 따라가는 와중, 클레리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황궁에 들어선 후, 그의 집무실이 아닌 굉장히 외지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다른 길로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 집무실 방향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요?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사뭇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클레리아가 경직된 채 묻자 타이엔이 빙긋 웃었다.

“본의 아니게 속여 죄송합니다. 치유사님은 지금 황제 폐하를 뵈러 가는 중입니다.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하는 일인지라 제대로 설명해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폐, 폐하를요? 지금?”

“그렇습니다. 폐하를 뵙고 난 후의 일은 기밀이니 치유사님께서도 함구하셔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놀라기도 했지만, 심상치 않은 일에 클레리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근위대원들을 대동하신 거구나. 에단도 따라오지 못하게 막으신 거고.’

그렇게 있었는지도 모를 처음 보는 문 몇 개를 지난 후, 음각 문양이 새겨져 있는 외딴 문 앞에 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보며 심호흡하며 웃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묵직한 돌문이 열리고, 그녀는 순간 안에 있던 누에른과 눈이 마주쳤다.

“왔군.”

그의 말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전체가 마디마디 굳는데, 몸에 밴 행동은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방 안으로 이끌었다.

쿠구구궁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비밀스럽게 불렀으니 많이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염려 말게.”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그제야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

방은 황궁을 자주 드나든 그녀 또한 처음 보는 방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일에 은밀하게 쓰이는 곳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누에른 말고도 귀빈이 있었으니까.

“갈레노프 국의 일리아르 공작 부부, 그리고 서제도의 4왕자 사이러스 울렌가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부가 그녀를 보고 환히 웃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는 입가만 살짝 끌어올린 채 형식적인 미소를 보이고 왕족답게 표정을 지웠다.

‘라스칸트에 타국 귀빈이 방문한다는 발표는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궁금증을 누르며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대도 알다시피 갈레노프와 서제도는 우리의 가장 힘 있는 동맹국 중 하나이다. 조만간 친선의 의미로 한 가지 발표가 있을 진데. 그 전에 우리의 동맹에 힘을 싣는 신뢰를 하나 표하기 위해 그대를 이 자리에 불렀네.”

클레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타국의 귀빈이 방문 소식도 없이 온 데다 그곳에 은밀히 그녀를 불렀다?

이건 안 봐도 외교적 문제라는 것이었다.

클레리아는 3공작가의 주축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스칸 대륙의 많은 국가가 국교로 르누엘룻을 섬긴다.

라스칸트 역시 그러했고, 그 축복의 증거로 유일하게 치유사가 나왔기에 제국으로 클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는데.

누에른이 즉위한 후, 치유사가 좀처럼 나오질 않았으니 동맹에 대한 체면이 낮아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비공식적으로라도 날 통해 신뢰를 다지고 체면을 세우겠다는 거구나.’

갈레노프는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나 큰 나라였고, 서제도는 서쪽 바닷길을 거의 통제하고 있는 중요한 동맹이었다.

“갈레노프의 공작 부부와 서제도의 4 왕자님을 뵙습니다.”

능란하게 인사를 올리자 누에른이 기분이 좋은 듯 ‘허허’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어차피 서로서로 비공식적인 자리에 임한 것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치유사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라스칸트 친선의 의미로 일리아스 공작과 4황자의 오랜 지병을 고치도록 하라.”

역시.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련되어 있는 좌석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황제 폐하의 배려로 이런 복을 누려 보는군요.”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옷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통증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드러났다.

“귀빈께 감히 손을 대는 결례를 범합니다. 치료를 위한 과정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짧은 당부와 함께 클레리아는 천천히 치유력을 흘려 상태를 진단했다.

‘노환으로 인한 퇴행성 관절염과 합병증이 함께 일어났어. 이대로 두면 올해 안에 팔을 아주 못 쓰게 됐겠네.’

원인을 파악한 후 문제가 있는 곳에 그녀의 치유력이 집중됐다.

따스한 온기와 빛이 희미하게 팔 전체를 감쌌다.

그렇게 있길 몇 분, 클레리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동시에 일리아스 공작이 자신의 팔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며 탄복했다.

그가 감격해 누에른을 바라보며 경외에 찬 인사를 올렸다.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부인 역시 연신 놀라움을 토했다.

이번에는 서제도의 4왕자 차례였다.

검은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외알 금테 안경을 쓴 모습에서 냉랭함이 묻어났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고고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왕자님께서 불편한 곳은 어디신가요?”

그는 조용히 외알 안경을 벗어 내려놨다.

‘얼굴…… 인가?’

조금 전보다는 클레리아의 손이 더욱 경직됐다.

황실이 그러하듯 왕실 사람의 얼굴에 손을 대는 건 굉장히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그의 눈에 손을 얹고 힘을 흘려 넣었을 때였다.

‘설마…… 한쪽 눈 상태가 실명? 아니, 실명은 아니야.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눈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그때 사이러스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클레리아는 순간 어금니를 조용히 물었다.

마치 제도의 바닷가를 연상케 하는 진한 녹색 눈동자에서 왠지 모를 냉기가 느껴졌다.

그의 눈빛에서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클레리아는 집중하려 시선을 내렸다.

‘세포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기능을 살려야 해. 쉽지 않겠어.’

점차 클레리아의 힘이 사이러스의 한쪽 눈에 주입되기 시작했다.

공작의 치료는 비교적 금방 끝난 것에 비해 사이러스의 치료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체력 소모도 심하여 클레리아의 얼굴에도 땀이 맺혔다.

받는 사람 역시 그 시간이 곤욕일 게 분명한데 사이러스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표정을 유지했다.

하나하나 신경을 확인한 후에 마침내 클레리아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작게 참았던 숨을 흘렸다.

“눈 떠 보시겠습니까, 왕자님?”

그 말에 사이러스가 서서히 눈을 떴다.

움찔

그의 눈썹이 작게 파장을 일으켰다.

온기 없던 그의 얼굴에서 몇 번의 동요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상태 파악이 끝나자 그는 탁자 위 외알 안경을 집어 재킷 앞주머니에 넣었다.

“실로 놀라운 힘입니다. 라스칸트가 최강국이 된 것은 역시 르누엘룻 님의 뜻입니다. 서 제도 레이셋 전체가 폐하께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누에른이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것으로 우리의 단결이 더욱 두터워졌길 바라겠소.”

“곧 좋은 소식을 드릴 걸 약조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클레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았던 눈이 보이게 됨이 아팠던 팔이 나았던 것보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임에도, 그의 얼굴은 큰 감정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대의 힘으로 시력을 회복했으니 입은 은혜가 크군. 앞으로 그대가 라스칸트를 위해 활약할 것을 기대하지.”

사이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누에른은 손으로 가볍게 의자를 두드렸다.

쿠구구구

들어왔던 돌문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클레리아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참으로 훌륭한 수족입니다. 치유사들의 수장인 칼리에 님도 대단하다 들었는데 이번 치유사님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군요. 확실히 그 유명한 3공작가답습니다.”

서늘한 기운.

목덜미 뒤쪽으로 순간 섬뜩하고 차가운 손이 닿는 느낌이었다.

<클레리아의 능력을 들키지 말아요.>

예전, 칼리에가 했던 경고가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클레리아가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고 시선이 맞았을 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껏 큰 변화가 없던 사이러스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유사님, 이쪽으로.”

문이 열리며 다시 드러난 타이엔이 말했고, 더 지체할 수 없음에 클레리아는 발을 움직였다.

“폐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겠군요.”

사이러스의 말이 나직이 들리며 문이 닫혔다.

* * *

은밀히 이뤄진 외교 일이었으므로, 클레리아는 황궁 적당한 곳으로 안내받아 혼자 돌아가게 되었다.

“오늘 일은 비밀, 또 비밀이다. 폐하께서 특별히 신경 쓰는 나라가 있다는 게 소문이 나면 다른 나라에서 항의가 들어올 거다. 발언권이 있었을 때 가장 영향력이 있을 나라들을 먼저 달랜 것이니, 너 또한 현명하게 처신하거라.”

헤어지기 전 타이엔이 그녀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네, 알아요. 오늘 일은 치유사 내부에도 알리지 않으려고요. 만약을 대비해 아는 인원이 적은 게 나으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타이엔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지었다.

“흠흠.”

그가 어색하게 헛기침하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딸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주었다.

“항상 건강 조심하거라.”

“아버지도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안위를 당부하고 헤어졌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깊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큰일에 불려간 탓에 심하게 긴장한 탓이었다.

다행히 보는 사람이 없어 그녀는 터덜터덜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황궁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궁을 나섰을 때, 익숙한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에단?”

그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클레리아의 발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역시, 에단. 그가 맞았다.

다가가자 인기척에 그가 흠칫 급히 돌아섰다.

“클레리아.”

“어떻게 온 거야? 알아서 돌아갔을 텐데.”

물었으나 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빠르게 그녀가 무사한지부터 훑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오늘은 일찍 해산하라 명을 하달하셔서 일은 끝났어. 그래서 데리러 온 거야.”

“아…….”

아무래도 오늘 있던 일로 포상차 명하신 걸까.

클레리아는 눈썹을 들썩였다.

설사 정말 그렇다 해도 그런 갑작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에 대한 위로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작님과는 잘 대화한 거야?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너무 못 봐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러셨대.”

“공작 각하가 그러시는 건 처음 봤어. 정말 널 많이 아끼시는구나. 별일이 없다니 다행이야.”

그렇다고 답하려던 그녀는 순간 말을 멈췄다.

서제도 4왕자의 말과 태도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찝찝한 사람이야. 태도도 불분명하고 의도도 가늠이 안 되고.’

“클레리아?”

말이 없는 그녀에게 이상함을 느낀 에단이 불렀다.

“아냐, 아무것도.”

웃으며 답했지만, 에단의 표정은 어딘가 찜찜해 보였다.

그래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당부도 그러했고, 만약 알렸다가 후에 무슨 일이라도 나서 그가 얽히게 되는 건 싫었다.

클레리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양 갸웃하며 웃자 에단이 시선을 내렸다.

“그래, 있어 봐. 마차를 불러올게.”

그때였다.

왜였을까.

칼리에가 늘상 우려했고, 에단 역시 경고했던 일이 시작됐다. 이것이 시작일 터였다.

앞으로 많으면 많았지, 덜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에단을 보자 유일하게 숨통이 트였다. 그래서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싫었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마차 부르지 마.”

팔을 붙잡은 클레리아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에단이 물었다.

“왜? 피곤할 텐데 편하게…….”

“그냥 돌아가자. 옛날처럼.”

“…….”

“그래, 그때처럼. 에단도 기사 시합 전이고. 나도 치유사에 완전히 몸담기 전처럼 말이야.”

그녀의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단은 천천히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애가 원하신다면.”

그때처럼 에단은 클레리아를 순식간에 들어 자신의 말 위에 올렸고, 자신도 올랐다.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였다. 아직 선선한 바람이긴 했지만, 워낙 볕이 좋아 적당하게 느껴졌다.

클레리아는 에단의 말을 타고 가면서 점차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생각보다 더욱 힘들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그 행동에 본인이 더 소스라치게 놀랐을 텐데. 지금은 마음도 몸도 그에게서 전달되는 온기에 평온해졌다.

“피곤했구나?”

문득 그가 물었다.

“……응.”

머리로는 분명 ‘아냐’라고 답하려 했는데 입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놀라진 않았다. 외려 뱉고 나니 더 시원해졌달까.

두근 두근 두근

‘아, 에단의 심장 소리다.’

어딘가 모르게 기분 좋은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르르 눈을 감은 클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에단이랑 있으니까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아.”

“…….”

두근두근두근두근

어딘가 모르게 심장 소리가 빨라지는 느낌이다.

불편한가?

슬쩍 눈을 들어 얼굴을 봤지만, 에단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몰 뿐이었다.

클레리아는 어깨를 들썩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클레리아, 도착했어.”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

잠들어 버렸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 위에서 그랬다는 것에 놀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에단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개의치지 않고, 허리를 붙들어 안전하게 말에서 내려 주었다.

“나 잠들었던 거지?”

“응, 많이 지쳤었나 봐. 얼른 들어가서 일찍 쉬어.”

“응, 오늘 에단이 아니었으면 편히 못 돌아왔겠어. 고마워.”

“별말씀을.”

그가 웃으며 답하고 말에 다시 오르려던 때였다.

히히힝!

멀리 전령이 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의문에 말 타려던 것을 멈춘 그도 클레리아와 함께 전령을 기다렸다.

“황실로부터의 전갈입니다.”

도착한 그가 서신을 내밀었다.

또?

명을 받아 갔다 온 게 바로 조금 전인데.

“요즘 황실 서신을 무척 자주 받는 느낌이네.”

어딘가 질린 느낌으로 클레리아가 중얼거리자 에단 역시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서신을 열어 읽어내려갔다.

“뭐라고 쓰여 있어?”

다 읽은 듯 천천히 손을 내리는 클레리아를 향해 에단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어딘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곧 새학기가 시작되는 엘라단 아카데미에 황녀님이 명예교수가 되셨는데…… 나를 함께 보내시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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