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장. 호의를 받는 자, 동정을 받는 자.
첸시아는 초조하게 들고 있던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일주일 전쯤, 황녀의 티 파티 때의 엘레나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참 이상했다.
그날 오랜만에 만난 프라이어스 영애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내가 엘레나 영애와 함께인 게 못마땅한 거야. 그런 분이라고 생각 안 했는데…….’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그 후, 티 파티 때 만난 엘레나의 모습이었다. 심하게 운 것 같은 얼굴에 내내 고개만 푹 숙인 채였다.
그때 엘레나가 몸이 좋지 않다며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첸시아 또한 따라서 빠르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클레리아 님이 날 만난 후에 엘레나 님을 만나서 내게 한 것처럼 불쾌한 소리를 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클레리아가 괘씸해졌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그렇게 불만이냐고 당장 따지러 가고 싶었지만, 일단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스레 혼자 씩씩거리다 심호흡하던 첸시아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레리안이 응접실로 들어갔다.
“데포렌 영애?”
“아?”
그녀는 들어서는 레리안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로 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캄스턴 영식이시군요. 이슬레이터 영애께서는……?”
레리안은 친절하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영애는 요즘 몸 상태가 좀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오늘도 함께하는 건 좀 무리이실 거라고.”
그의 말에 첸시아가 서운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렇군요, 요새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전에 뵀을 때도 안 좋아 보이셨거든요.”
“음…….”
그녀의 말에 레리안은 뭔가 있는 듯 난감히 웃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놓치지 않고 첸시아가 묻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칼리스터 영식을 아시지요? 요새 프라이어스 영애와 부쩍 친해졌는지 이슬레이터 영애를 홀대하셨죠.”
“그럴 수가!”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꽤 크시답니다.”
레리안은 씁쓸히 웃으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이건 비밀입니다. 퍼지면 3공작가에 안 좋은 소문이 돌 테니까요. 믿어도 되겠지요? 데포렌 영애? 그대는 엘레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니까요.”
첸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절대 안 하겠습니다. 그런데 칼리스터 영식이 그랬다니…… 무척 예의 바르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중앙 귀족들은 소문이 다가 아닌가 보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다 레리안을 흘끗흘끗 바라봤다.
“그런데 캄스턴 영식은 이슬레이터 영애를 이름으로 부르시는군요. 두 분이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얼굴을 붉힌 채 말하는 첸시아를 레리안이 싸늘하게 바라봤다. 마치 그 눈빛은 버러지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첸시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그런 빛을 거둬들였다.
“레이디 엘레나가 친절하시게도 그렇게 허락을 내려 주셔서 말이죠.”
레리안은 고민하는 듯한 안색을 하다 첸시아를 향해 웃었다.
“데포렌 영애께도 제가 그 영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첸시아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제가 영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군요.”
“그, 그런…… 저 같은 게 감히…….”
레리안은 천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영애가 뭐가 어때서 그러시지요? 데포렌 영애. 제게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너무도 달콤히 말해오는 그를 보며 첸시아는 미칠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
엘레나와 가까운 그였기에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두근거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름까지는 상관없겠지. 일일이 이슬레이터 영애한테 묻는 것도 거추장스러울 거고.’
첸시아는 천천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락하겠어요, 캄스턴 영식.”
“영광입니다.”
그는 웃으며 가볍게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아, 이거 몸의 기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차예요. 저희 영지의 특산품이랍니다. 품질이 우수하니 이슬레이터 영애가 드시고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네자 레리안이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세심하시군요. 엘레나도 첸시아의 이런 호의에 고마워할 겁니다. 하루빨리 두 분의 담소가 다시 있길 바랍니다.”
“저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
대답 후, 잠시 둘의 사이에 묘한 적막이 흘렀다.
레리안은 찻잎을 받아든 채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딱히 이렇다 할 대화는 더 오가지 않았다.
‘어쩜 손도 저리 고우실까. 여자보다 더 고우신 것 같네. 중앙 귀족답게 기품도 넘치셔. 캄스턴 영식은 정말 멋진 분이구나.’
첸시아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다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레리안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
몰래 보고 있던 것을 들켜 첸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실례고.”
“그러겠습니까?”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레리안은 그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첸시아는 머뭇거리며 이슬레이터 저를 나섰다.
첸시아가 마차를 탈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환한 얼굴로 바라보던 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래다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첸시아.”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화색이 돌았다.
‘다음에는 더 많은 대화를 영식과 나눌 수 있겠지?’
“아니에요, 영애를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첸시아가 탄 마차가 저택을 나가자 레리안의 얼굴에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표정이다 못해 싸늘했다.
그는 첸시아의 선물을 든 채 2층으로 향했다.
똑똑
이번에도 역시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엘레나는 침대에 누운 채였다.
“아직도 안 일어나는 겁니까? 그러다 정말 기력 쇠하십니다.”
“첸시아는 갔나요?”
그는 그녀가 주고 간 선물을 불쑥 내밀었다.
“데포렌 영애가 보내는 선물입니다.”
엘레나는 몸을 일으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향이 좋은 차가 들어 있었지만, 그녀는 인상을 쓰며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상자를 처박아 버렸다.
“누가 이딴 싸구려를 먹는다고.”
“와, 너무하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엘레나의 말에 레리안이 킥킥거렸다.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호의를 베푸는 건 상대방에게 지나친 오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상관없어요, 볼썽사납긴 하겠지만.”
“참을 수 있겠어요?”
“그 착각에 취해야 자신의 실수도 알아차리기 힘들겠죠. 그리고 그럴 때 나락으로 떨어지면…… 그때 가장 추해지겠죠. 그런 사람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없어요.”
“이야, 진짜 무서운걸요? 하지만…….”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엘레나의 얼굴선을 손가락으로 훑고, 뺨에 키스했다.
“배우는 게 빠르군요. 보람 있는데요?”
엘레나는 그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 * *
음산한 기운이 도는 어두운 방 한가운데, 앙상히 마른 남자는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잘 정렬된 찬장에서 뭔가를 꺼낸 그는 신중하게 투명한 유리 컵에 담긴 약물에 그것을 섞었다.
그러자 치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담긴 물약이 검붉은 투명한 색으로 바뀌었다.
스포이트로 뽑아낸 물약을 그는 천천히 책상에 묶인 쥐에게 떨어트렸다.
찌이익! 찍!
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사지를 떨다 곧 축 늘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던 찰나였다.
“안투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던 그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나가겠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뒤섞였다.
안투스는 서둘러 자신의 비밀방에서 나와 벽에 달린 장식물을 당겼다. 그러자 책장으로 위장해 놓은 문이 빠르게 닫혔다.
그는 옷을 갖춰 입고 누에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안내와 함께 황제의 방으로 안투스가 들어섰다.
“그래, 명령했던 서 제도와의 교역 건은 어찌 되었느냐?”
“……제국 내에서의 유통량을 따졌을 때 거래할 수 있는 목록들이 그다지 효율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좀 더 신중하게 하고자 보류했습니다.”
탕!
안투스의 대답에 누에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안투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철썩!
쿠당탕!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하는 버릇은 대체 언제 고칠 셈이냐! 교역 회의 때 참석조차 하지 않은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거냐!”
엄청난 힘에 그대로 나가떨어진 안투스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노인네 또 시작이군.’
그는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한 듯 보였다.
안투스는 낯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뒷짐 지고 다시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요즘 다시 후계자 수업에 시들하다 들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게냐! 적어도 뭔가를 해내는 걸 보여야 귀족들이 네게 힘을 실어 줄 것 아니냐!”
안투스는 눈을 가늘게 내리깐 채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도 귀족들을 두려워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신과 같을 진데 황제 명이면 죽는시늉도 해야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 아닙니까? 어째서 그들의 눈에 들도록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누에른이 안투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나라는 황제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지? 내가 널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벌써 잊은 게냐? 안정적으로 황위를 물려받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자신보다 몇 배는 크고 강한 누에른의 이런 억압이 반복될 때마다 안투스는 숨이 막혔다. 무엇보다 독대할 때마다 하는 저 소리! 저 말이 너무도 지겨웠다.
누에른이 황위에 오를 때 안투스의 외할아버지 바알론이 큰 공을 세워 그 보답으로 그의 딸인 디알로나, 안투스의 어머니를 황후로 세웠다.
그녀는 원체 조용한 성격인 데다 건강도 좋지 못해서 어렵게 안투스를 낳고 그대로 세상을 등져 버렸다.
누에른은 그렇게 남아 버린 그를 안타까이 여겨 후계자로 밀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것에 나름의 보상이랄까.
그러나 야단침과 반복되는 이야기에 안투스는 오히려 반감만 강해졌다.
“아직 내가 건재하기에 널 미는 것에 대해 무리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난 무력해진다. 네 자리를 찾고 싶다면…… 내 말을 기억해라. 안투스.”
“……예.”
누에른의 염려에 안투스는 짜내어 대답했다.
그런 아들을 보는 누에른의 눈에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얽혔다.
그는 아들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는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안투스는 예를 갖춘 뒤 황제의 방을 나섰다.
한시라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 빠르게 벗어나던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때 기척도 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그의 심복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노인네인 주제에 어찌나 팔팔한지. 이대로 뒀다가는 내가 늙어 빠질 때까지 뒈지기나 할지 걱정이군.”
그는 ‘퉤!’ 하며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레리안에게 연통을 넣어라. 서 제도 건에 관해 의논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남자는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안투스는 지나온 황제의 방 쪽을 노려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폐하를 따로 뵌 지도 꽤 되었지.’
세실리아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화목함이 특기인 가족상은 아니어서. 그리고 세실리아 스스로도 살가운 성격은 아닌지라 황제와 독대 자리를 많이 갖지는 않았다.
황제도, 황녀로서도 각자의 영역에서 바쁘다 보니 벌써 제대로 본지도 꽤 지난 것 같아 세실리아는 오랜만에 황제의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응?”
그때 그녀는 맞은편에서 불쾌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오는 안투스를 발견했다.
“흠…….”
첫 선대 황후의 자식인 안투스에 대한 황제의 애정을 그녀는 알았다.
황후에게 후사가 없어 두 번째로 그녀의 어머니를 맞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황후를 신경 썼다. 간신히 안투스를 가지고도 명을 달리했으니 남겨진 자식인 안투스에 대한 황제의 애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아도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그녀 또한 안투스를 안타까이 여겼다. 자신은 어머니와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런 걸 누려 본 적도 없으니까.
그 후 누에른은 후계자 싸움으로 자식들이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 세실리아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을 때 더는 황후를 맞지 않겠다 선언했다.
그런 전례로, 모든 면에서 뛰어났음에도 세실리아는 스스로 후계자 경쟁에서 물러섰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로 추대받는 누에른의 그런 애정이 아버지로서의 유일한 모습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실리아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안투스 앞에 멈춰 섰다.
“아버님을 뵙고 오니?”
그녀의 목소리에 안투스가 발걸음을 뚝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님.”
어여쁜 동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엣가시 같은 동생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를 살피다 천천히 손을 뻗어 부어오른 뺨을 훑어 주었다.
“또 아버님께서 손찌검하셨니? 다 큰 자식들을 대체 어찌 보시고, 쯧쯧.”
안투스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그래, 가서 쉬어라.”
그녀는 동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가던 길로 보냈다.
‘……불쌍한 것.’
세실리아는 묵묵히 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다시 누에른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