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신비한 곳은 신비로움(?)이 넘쳐난다.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아세란타가 탈 작은 가마를 내오자 부족민들이 모두 나와 그들의 안전을 빌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병색이 짙은 한 노인이 라기에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내 스승님 베냐오다.”
클레리아는 의뢰서에 쓰인 병치레하는 부족 의원이 그임을 깨달았다.
베냐오는 병환이 깊어 보임에도 부족의 큰일이다 보니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작은 항아리에서 어떤 물을 떠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는 그 물을 작은 그릇에 따라 출발하려는 이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족장 잇새가 먼저 마시고 아세란타와 라기에가 따라 마셨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것도 성스러운 의식의 순서인 것 같아 클레리아와 다른 이들도 따라 마셨다.
‘응?’
근데 마시자마자 신기하게도 몸속 깊은 곳부터 따스한 기운이 점차 퍼져 한결 추위가 누그러졌다.
“구오타를 데려올 때까지 이 성수가 우리 지킨다.”
라기에의 말과 함께 사람들의 배웅이 시작되었고, 리암 경이 제일 처음으로 아세란타가 탄 1인용 가마를 짊어졌다.
“왜죠. 왜 이런 궂은일의 첫 번째는 늘 저인 거죠. 다들 짜고 친 거 아닌가요. 왜 나만 이런 거죠.”
“시끄럽고, 정신 바짝 차려. 잘못하면 산모 위험해진다.”
리암의 슬픈 혼잣말을 레인이 단번에 제압하고 그들은 뮐 부족의 성스러운 장소로 발걸음을 뗐다.
* * *
뮐족이 사는 북쪽은 거대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는데 라스칸트는 이를 제국의 지붕, 케만산맥이라 불렀다.
다행히 뮐 성스러운 장소로 향하는 길은 평탄치는 않아도 잘 닦여 있는 편이라 가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어째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레인의 말처럼 싸라기눈으로 오던 것이 곧 함박눈으로. 그리고 눈보라로 바뀌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부족은 그들을 위해 전통 복장 몇 가지를 선물로 주었는데, 머리 전체를 감싸는 새하얀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두꺼운 털 겉옷이었다. 게다가 출발 전, 의식 때 마신 물이 효과가 있는지 몸의 온기는 계속 유지되어 견딜 만했다.
“추위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눈바람 때문에 힘드네요.”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마신 물 덕인지 몸이 따뜻해. 뮐 부족에게는 연금술이 없는 거로 아는데 거참 희한한 물이야.”
클레리아 역시 동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알린 바가 없기에 더 그랬다.
클레리아 일행 역시도 여기서 겪고, 본 것들은 모두 함구해 비밀 유지를 원칙으로 했다. 그것이 라스칸트에 편입되는 조건이었으니까.
그렇게 계속 향하던 그들 앞에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어느새 주변은 어둠이 내려앉고, 눈은 정강이까지 쌓여 발이 푹푹 빠졌다.
힘이 많이 빠진 리암과 에단이 아세란타의 가마를 교대했다.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꽉 붙든 채 산행이 이어졌고,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잇새와 라기에가 길을 만들며 앞장섰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마침내 해산할 뮐 부족의 성스러운 장소 입구에 도착했다. 다름 아닌 암벽 깊숙이 자리한 동굴이었다.
“이곳 지리 복잡하다. 길 잃으면 위험하다.”
들어서기에 앞서, 라기에는 꽤 심각한 얼굴로 클레리아 일행에게 경고했다.
“이곳에는 물길 있다. 빠지면 절대 안 된다. 순식간에 죽는다.”
죽어?
성스러운 곳이라 해서 뭔가 안전하고 묘한 기운이 도는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단어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만약 빠지면 물을 최대한 빨리 털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라기에 거짓말 아니다. 알겠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반복하는 통에 클레리아를 비롯한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인지 이제는 잇새가 아내의 가마를 메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점차 동굴의 험하고 좁아졌다. 더불어 라기에가 경고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기에 님, 혹시 저 소리가……?”
클레리아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대답하는 그의 옆얼굴이 꽤나 진중해 그 역시 물길이 등장하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느꼈다.
“바싹 붙어라.”
그는 짧게 주의 준 뒤 계속해서 앞섰다.
암벽으로 이루어졌던 동굴은 깊게 들어갈수록 공기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에 보이기 시작한 물길과 함께,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세상에…….”
들어선 클레리아와 레인, 리암과 에단은 놀라움에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엄청난 크기의 얼음 동굴이었는데 곳곳에 물이 흘렀고, 하얗고 투명한 얼음 기둥과 벽이 자리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얼음 스스로 빛을 내, 들고 왔던 횃불이 필요 없었다.
신비로움이 동굴 자체로 줄줄 넘쳐 흘렀다.
“생명, 우리는 아티카라고 부른다.”
자연적인 얼음 동굴 사이를 흐르는 물과 스스로 발광하는 모습이 그 생명이라는 말과 잘 어울렸다.
“으윽…….”
그때 아세란타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놀란 레인이 다가가 살피고는 표정을 굳혔다.
“진통이 시작됐어.”
황홀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클레리아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걸리죠?”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아름다운 광경도 잠시, 그들은 장소로 서둘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제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려는지 아세란타의 이마에 땀이 맺히며 고통스러워했다.
또한, 가는 길에 물길도 점점 넓어졌으므로, 내딛는 걸음에도 신중해야 했다.
구르르릉
그때 머리 위쪽 먼 곳에서 들리는 묵직한 소리가 모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무슨 소리지? 설마…… 산에서 또 산사태라도 난 건가.”
리암의 말에 레인이 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소리…… 뭔가 불안한 건 나뿐인 거 아니지?”
무섭게 천장 쪽을 노려보던 라기에가 다시 서둘렀다.
그 뒤를 잇새와 리암이 따랐을 때였다.
쿠궁!
날카롭고도 강한 소리와 함께 동굴이 흔들렸다.
“어, 어?”
큰 진동에 날카롭게 매달려 있던 고드름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콱! 콰콱!
자칫 머리에 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하다!”
라기에의 외침 소리에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푹!
섬뜩한 소리에 클레리아가 뒤를 돌아봤다.
“레인!”
클레리아의 비명이 날카롭게 동굴을 울렸다.
날카로운 고드름이 레인의 어깨에 꽂혀 버린 것이었다.
“…….”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신음도 내지 못한 레인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쿠콱!
그때 또다시 그들 발아래의 얼음이 내려앉았다.
놀라 레인을 붙들었던 클레리아와 그녀가 기우뚱 기울었다.
첨벙!
“클레리아!”
순식간이었다.
“들어가면 안 돼!”
이어 두 사람은 그대로 물에 빠져 버렸고, 놀란 에단이 라기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쿠구구구구
곧 그 위로 천장에서 깨진 얼음들이 떨어져 내렸다.
* * *
“일어나! ……잃으면 안 돼! 클레리아!”
몽롱한 정신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귓가를 때렸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려 뜨자 거칠게 몸을 흔드는 에단이 보였다.
“에…… 단? 윽!”
순간 클레리아는 수백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옷 벗어야 해! 안 그랬다간 순식간에 동사해! 도와줄 테니까 얼른 벗고 레인 님을 벗겨야 해!”
속옷만 입은 채 나신으로 있는 그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다 곧 이유를 깨달았다.
에단의 말대로 물에 젖은 몸에 허연 살얼음이 끼고 있었다. 손끝과 발이 아픈 걸 떠나 통증도 무뎌지기 시작했다. 어물쩍거렸다간 정말 동상으로 손발을 잃을 기세였다.
클레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에단은 서둘러 클레리아의 옷에서 발열석을 찾아내 쌓아둔 천 위에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발열석이 무섭게 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발열석은 더 쓰지 못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간신히 옷을 벗은 클레리아를 서둘러 에단이 발열석 근처로 옮기고 몸을 문질러 안아 주었다.
“조금만 참아, 레인 님도 얼른 옷을 벗겨야 해.”
“레, ……레인.”
입이 얼어 말도 안 나왔다.
발열석 열로 따뜻함도 느껴지긴 했지만, 동시에 이상한 힘이 있는지 물이 닿았던 자리는 더욱 아프고, 시렸다.
레인의 몸 또한 벌써 허연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래서 라기에가 최대한 빨리 물을 털어내라고 했던 거였다
에단이 억척스럽게 레인을 발열석 근처로 끌고 왔고, 클레리아 또한 본능적으로 그녀의 옷을 마구잡이로 찢듯 벗겨냈다. 털옷이 엉겨 얼어붙어 있어 떼기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어깨에 박힌 얼음은 박혔을 때보다 물을 머금어 더 두껍게 얼어붙었다.
간신히 털옷을 벗겼을 때, 레인이 눈을 떴다.
“레, 레인! 저, 정신 드, 들어요?”
클레리아가 추위에 떨리는 손으로 레인의 얼굴에 온기를 전했다.
그녀도 정신이 바로 들지 않는지 어지럽게 시선을 돌리다 그들을 바라봤다.
“둘…… 왜 버, 벗고 있어?”
“레인도 벗어야…… 해요! 안 그럼 도, 동사해요!”
그제야 레인은 둘이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레인은 동상으로 몸이 둔해진 사람답지 않게 놀라운 속도로 벌떡 일어났다.
“나, 난 안 벗어!”
“무슨 소, 소리예요! 그거 입고 있으면 죽, 죽는다니까요!”
클레리아가 만류해도 레인은 뒷걸음질 치며 얼어붙은 옷을 꽉 잡았다.
“저, 절대 안 돼! 아직…… 안 돼!”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이러다 정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클레리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지만, 레인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그때였다.
둘보다는 좀 더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에단이 그녀의 뒤를 재빠르게 잡았다.
“치유사님, 실례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클레리아, 안 볼 테니 얼른 치유사님 옷 벗겨!”
“아, 안 돼!”
“고, 고집부릴 때 아니란 말이에요! 이러다 정말 크, 큰일 난다고요!”
클레리아 또한 달려들어 레인의 가슴팍 옷을 풀었다.
“…….”
한순간,벗지 않겠다는 몸부림과 벗기고야 말겠다는 야단법석이 짠 것처럼 순간 뚝 멈췄다. 그리고 이어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클레리아?”
뒤쪽에서 억지로 겉옷을 벗기고 있던 에단이 행동을 멈춘 그녀를 불렀다.
“……뭔가 이상한데.”
“뭐?”
갑자기 움직임이 멈춘 탓에 에단은 손쉽게 겉옷을 벗기고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
눈을 멀뚱멀뚱 뜬 채 클레리아가 레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어딘가 몹시 찔리듯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클레리아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금 레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
손이 얼어 버려서 감각을 느낄 수가 없는 건가?
이번엔 자신의 가슴팍을 문질문질했다가 레인의 가슴팍을 꾹꾹 눌러 봤다.
딱딱해.
밋밋해.
이게 뭐지?
여자도 수많은 사람이 그런 경우가 있지만 뭔가 느낌이…… 느낌이 달라, 이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상황들이 이리저리 얽혀 그녀의 머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레인은 치유사 여성 정복을 입고 다닌다.
유독 같이 방을 쓸 때만 이상하게 행동했다.
옷을 벗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먼저 일어나고 먼저 잠들었다.
생각해 보니 여자치고는 힘이 좀 좋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현실과 머릿속의 생각이 도통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클레리아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정말 심각한 얼굴로 한참 동안 레인의 가슴팍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의 머릿속은 결국, 부정하고 부정하던 결과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클레리아는 기겁을 하고 레인에게서 떨어졌다.
“서, 설마 레인 남……!”
그러나 클레리아보다 에단이 더 빨랐다. 싸늘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의 앞에 서서 내려다봤다.
“저, 저기 그러니까…… 에, 에단 경? 이게 그러니까.”
“……그랬군요. 레인 님은…… 그러니까 남. 자. 분이셨던 거군요. ‘여성용’ 치유정복을 입고 다니고 ‘여성 치유사’와 같이 방을 쓰면서도 말입니다.”
레인은 조금 전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추웠던 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질 뿐.
레인은 에단을 향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에, 에단 경 좀 진정을 하고.”
“진정이라뇨? 전 지금 아주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레인의 허리끈을 꽉 쥐었다.
“패션 감각이 그렇게 뛰어나신 줄은 몰랐습니다. 여성복이 아주 잘 어울리던데요. 저희를 감쪽같이 속이시고 여자 행세를 하신 걸 보면 말이죠, 하. 하. 하. 하.”
레인의 허리끈을 쥔 에단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대담하신 분이라면 제가 벗기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실 테죠. 안 그렇습니까? 상. 남. 자. 레인 님?”
“우와아악! 에단 경! 잠깐만!”
이어 에단은 정말 레인을 번쩍 들어 탈탈 털어 버리듯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벗겨 버렸다.
발열석의 온기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공간에는, 충격에 혼이 빠져나가 버린 클레리아와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레인. 그리고 씩씩거리는 에단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리했다.
다행스럽게도 레인의 어깨에 꽂힌 고드름도 발열석의 온기에 녹아 사라졌다.
“저기…… 상처 치료를…….”
“스스로 하시죠. 뛰어나신 치유사님 아닙니까?”
마른 옷을 클레리아에게 덮어 주던 에단이 웃으면서 살기 등등하게 말했다. 누가 봐도 그 이상 더 클레리아에게 접근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예.”
‘클레리아에게 맡기겠단 말을 하면 아주 죽일 기세로구만, 죽일 기세야.’
자가 치유야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닌지라 레인은 빠르게 회복했다.
하지만 이제 진짜 문제는 그곳에 갇혀 버렸다는 것이었다.
발열석이 내던 열기와 떨어진 얼음들이 녹아 붙어 다시 얼어 얼음 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유일하게 흐르는 물길뿐이었다.
“큰일이군, 다시 물로 뛰어들 수도 없고.”
에단이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한 번씩 노려보기까지 하는 통에 레인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였다.
그때였다.
콱콱콱콱콱
벽 안쪽에서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을 깨는 소리 같은데…… 리암 경이랑 잇새 님과 라기에 님일까?”
레인이 중얼거려도 무섭게 노려볼 뿐,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식은땀을 무수히 흘리고 있던 그때, 얼음을 부수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에단은 클레리아를 옷으로 감싸며 물러섰고, 레인 또한 뒤로 물러났다.
쿠구구!
그들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음벽이 무너졌고, 그 사이로 커다란 늑대가 눈을 털며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
“아, 그때 그 동굴 입구에서……!”
정신이 든 것 같은 클레리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산사태로 부서진 마차에서 그들을 끌어냈던, 그녀가 본 늑대가 분명했다.
“그때 말한 늑대가 이 늑대라고?”
“응! 마차가 전복됐을 때 밖으로 꺼내 준 게 저 늑대였어.”
에단의 물음에 클레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엄청난 열감과 함께 늑대 주변에 수증기가 끓더니 곧 거대했던 늑대의 몸집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람 크기가 되었다.
이어 증기 사이에서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라기에였다.
“라, 라기에 님이 그 늑대였다고요?”
“무사한가?”
그때 그의 뒤로 리암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레인 님! 클레리아 님! 에단! 모두 무사해?”
급하게 왔는지 그는 헐떡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다들 벗고 있으시죠? 레인 님은…… 어이쿠! 레인 님! 남사스럽게 웃옷까지 그렇게 벗어 던지시면 어떡합…… 응?”
순간 말을 잇던 리암의 말이 뚝 끊겼다.
허허벌판처럼 드넓은 그의 가슴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지.
이어 리암의 눈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떨리는 눈동자로 레인의 얼굴과 아래로 오르내리는 걸 반복하길 몇 번…….
못 볼 걸 봤다는 듯 리암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아아아! 왜 레인 님의 아래쪽에 그런 흉측(?)한 것이!”
비통(?)하고 애통(?)한 절규가 동굴을 가득 울렸다.
그런 그에게 레인은 다가가 다정히 웃었다.
“죽여 버린다, 리암 경.”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보다 레인이 남자였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은 클레리아 일행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라기에뿐이었다.
“레인 님 목소리가 좀 걸걸한 편이긴 하셔도…… 체형은 분명!”
리암이 중얼거리다 옷을 걸치는 레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레인은 ‘뭘 봐? 죽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쏘아봤고, 리암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골격…… 이 굵직하신데 마르셔서 호리호리한 편이시구나…….”
어딘가 허탈하고 허무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리암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반응들이군. 물었을 때 분명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라기에의 말에 클레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괜찮다고 했다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리아는 그의 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받았던 적이…….
“아!”
순간 클레리아는 건물을 안내받았을 때 잇새와 라기에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꾸 묻고 쳐다본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그 방에 관해 물을 때 말씀하시는 건가요?”
라기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위풍당당하게 레인을 가리켰다.
“카미드(남자).”
그제야 자꾸 이상한 눈초리를 하던 것이 이해가 갔다.
남자인 레인이 클레리아와 방을 쓰니 그들 눈에도 이상해 보인 것이다.
허탈함에 ‘탁’ 소리가 나게 클레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또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오긴 했지만, 사실상 아이들과 놀아 줄 때를 떠올려 보면. 아이들은 분명 남자인 라기에와 에단, 리암 경. 또는 다른 부족 남자들과 놀았다.
“설마 레인 님께 아이들이 달려든 것도 애들은 전부 레인 님이 남자인 걸 알기 때문이었다는 건가요?”
라기에는 그걸 뭘 이제야 깨달았냐는 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세상에……. 칼리에 님은 알고 계신 건가? 칼리에 님도 속고 계신 거 아니야? 설마?’
솔직하게 말해서 레인은 여성복이 너무 잘 어울려 그가 남자일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성별을 느낄 정도로 크게 불편함을 느끼거나 레인이 도덕적인 선을 넘었던 건 아니지만, 크게 배신당한 이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시선이 느껴져 눈을 돌리니 레인이 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노려보자 레인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악!”
그때 라기에의 뒤로 비명이 들려왔다.
“아, 아세란타!”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녀의 진통이 시작됐었지.
클레리아는 한시라도 빨리 환자를 먼저 떠올리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일단 됐으니 얼른 아세란타께 먼저 가요! 그쪽이 우선이에요!”
다급한 클레리아의 외침에 모두가 일제히 서둘러 신음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으으…….”
도착하자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는 아세란타를 잇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챙기고 있었다.
클레리아도 급한 대로 가장 먼저 마른 기본 원피스만을 입고 아세란타의 상태를 살폈다.
“다른 문제는 없어 보여요. 통증 때문에 과호흡이 올 것 같으니 호흡이 편하게 도와드릴게요. 레인 님은 아이의 상태를 봐 주세요.”
“……괜찮아. 잘 자리 잡은 것 같아. 이제 제대로 힘만 주면 돼. 라기에가 아이를 쌀 깨끗한 천과 소독된 칼을 준비해 줘요. 그리고 아세란타의 힘이 부족하면 배를 눌러 도와야 하니까 힘 조절하고요.”
세 사람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윽고 뮐 부족의 성스러운 장소에서 아세란타의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치유력은 보통 남발되는 걸 막기 위해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쓰이지만, 아무래도 이번은 라기에의 경험 때문에도 적당한 보조는 필요했다.
레인과 클레리아는 적당히 치유력을 아세란타의 몸속으로 흘려 넣으며 그녀의 분만이 수월하도록 도왔다.
“아아아악!”
“으아아앙!”
마지막 있는 힘껏 내지른 그녀의 비명 뒤, 아이의 울음이 동굴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약간 떨어져서 기다리던 리암과 에단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아이를 받는 것은 라기에가 했다.
다음 부족 의원을 맡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전통대로 아이의 안녕을 살피고 부모에게 건네기 위함이었다.
체격도, 모습도 투박하고 건장해 보이던 잇새도 첫 아이인 탓인지 손을 떨며 탯줄을 잘랐다.
아이를 받아 산모의 품에 안겨 주며 라기에와 클레리아, 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뱉었다.
“예쁜 여자아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클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더불어 눈시울은 조금 붉어졌다.
태어난 생명은 하나인데 그 기적에 감명해 우는 건 여럿이었다.
잇새는 감격한 얼굴로 아세란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한없이 비비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 모습을 감명받은 얼굴로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다시 일어나 산모의 배에 손을 얹었다.
출혈도 멎고, 태반도 다 빠져나온 걸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기에는 짐에서 성수를 들고 와 레인과 클레리아의 손에 씻을 수 있도록 부어 주었다.
“고맙다, 덕분에 구오타 무사히 맞이했다. 나도 많이 배웠다.”
“축하드립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빙긋 웃는 클레리아를 보며 라기에 역시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라기에는 새로운 후계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치렀다.
클레리아를 비롯한 네 사람은 뒤에서 행복이 넘쳐나는 세 사람을 묵묵히 지켜봤다.
“잘 자라겠지?”
“그럼, 누가 돌봐 줬는데.”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에단이 답했다.
클레리아는 놀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금 잇새의 가족에게 눈길을 돌렸다.
“전에는 아이란 존재에 그다지 큰 감명은 없었는데 이상하지. 그 조그맣고 뜨거운 아이가 손에 닿으니까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 ……아세란타 님의 아이, 참 예쁜 것 같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에단도 다시 시선을 잇새 가족에게 돌렸다.
“클레리아의 아이도 엄청 예쁠걸. 널 닮으면.”
응?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단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왠지 모를 어색함과 두근거림이 교차했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아이를 바라봤다.
“음…… 아무래도 우리가 있는 건 잊은 것 같지?”
레인이 낯간지러운 걸 못 견디겠다는 듯 못마땅하게 리암에게 말하자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병풍 생활 이미 오랜데요, 뭐.”
그렇게 그들은 뮐 부족의 새로운 구오타의 탄생을 축하했다.
* * *
그들은 두어 시간 정도 아세란타의 기력을 회복시킨 후,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아세란타는 리암과 에단이 번갈아 맡기로 했고, 아기는 라기에가 맡기로 했는데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아까 얼음 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며 이곳저곳이 막힌 탓이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요?”
걱정스럽게 클레리아가 물었을 때, 라기에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필요 없다. 곧 나가게 된다.”
그의 눈에는 앞을 꽉 막아 버린 얼음덩이가 보이지 않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걸 넘어서 태평한 모습에 의구심이 생겨날 찰나였다.
갑자기 잇새가 크게 호흡하며 몸을 들썩였다.
“물러서라.”
놀라, 라기에의 말대로 물러나자 잇새의 몸이 점차 커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 봤던 라기에의 늑대보다 더 거대한 흑곰이 증기 사이로 포효하며 일어났다.
“세상에…….”
이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번이나 보다니.
제국 외에도 마법을 사용해 동물로 변하는 건 몇 번 본 적 있지만, 이렇게 거대하고 강력하게 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켜볼 때 에단이 낮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드루이드였구나.”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드루이드? 설마 고대 아스칸 대륙을 다스렸다는 그 종족?”
“응,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뮐 부족은 그들의 후예가 분명한 것 같아.”
그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는 고대 종족을 본 것에 놀란 듯했다.
드루이드는 오래전 아스칸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종족인데, 주로 동물로 변신하며 그 크기가 특별히 거대했다고 알려졌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치유술과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전투에도 능하다고 한다.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은 거의 곰, 늑대, 사자나 호랑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나 매까지도 가능하다고 전해졌다.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되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지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뮐 부족이 그들의 후예였다니.
그들의 놀람 아래 곰으로 변한 잇새는 거침없이 얼음벽을 부숴 허물기 시작했다.
콰악! 콱! 쿠르르르.
거대한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얼음벽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때 클레리아가 문득 눈사태로 막혔던 동굴 입구를 떠올렸다.
“설마…… 라기에 님. 눈사태가 잦다고 들었는데 매번 이렇게 변신해서 입구를 뚫으셨던 건가요?”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족에겐 일상이다. 일과나 다름없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마어마하다못해 기묘한 광경이기도 해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던 거구나.
클레리아와 에단은 라기에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던 자신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심각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잇새의 활약으로 그들은 무사히 아세란타와 구오타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자 뮐 부족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부족민의 잔치에서 빠져 주려 일찍 출발하려 했지만, 사람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말리는 통에 클레리아 일행은 하루 머물며 잔치에 참여했다.
부족민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창고에 저장해 둔 음식도 아낌없이 내왔다.
마을 중심 쪽에서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와 춤이 이어졌다.
클레리아와 그 일행도 조용히 참석하려 했지만, 레인은 이번에도 아이들이 몰려드는 통에 실패하고 말았다.
리암이 놀아 준 것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그까지 아이들 손에 끌려 나가고 말았다.
여전히 아이들 등쌀에 ‘억!억!’ 소리를 내며 휘청이는 레인을 보던 클레리아가 라기에에게 물었다.
“저기 설마…… 아이들도 드루이드의 핏줄이라 혹시 힘이 기본적으로 센 건가요?”
“그렇다. 우리 뮐 부족 대부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힘이 세다.”
‘그랬구나. 어쩐지 레인 님이 애들 손짓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휘둘리는 것 같더라니.’
그들이 변신하던 흑곰과 늑대를 떠올리니 아이들의 장난이 새삼 평범한 장난으로 보이지 않았다.
난감히 웃던 그녀에게 라기에가 말했다.
“우리 오랫동안 숨었다. 우리 변한 거. 본 사람 당신들이 처음이다.”
그 말에 클레리아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한다.”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빙긋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라기에는 힐끔 옆에 앉은 에단을 바라봤다.
“당신도 좋은 구오타를 얻어라.”
“……?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던 클레리아는 호의로 건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고마워요. 언젠가는요.”
“그리고 우리 아그난타가 전달하는 말 있다. 이번에 우리 도와주었으니 언젠가 단 한 번. 당신들 위험할 때 우리가 구해주겠다.”
클레리아가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걸 원해서 한 게 아닙니다. 부족이 위험해질 일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라기에는 고개를 젓고 웃었다.
“우리 위험해지지 않는다. 당신들 구한다.”
왜 이렇게 부족이 위험해질 정도의 답례를 하려는 걸까.
사실 이번 치유사 파견과 그들의 도움 요청은 뮐 부족이 라스칸트에 편입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사적인 일이긴 해도 그들이 사라진 줄 알았던 드루이드 민족이라는 걸 알고 나니 쉽사리 답례를 받겠다 말할 수 없었다.
드루이드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만, 마법사는 자연을 이용한다.
드루이드들은 무차별적인 자연 갈취로 힘을 키운 마법사들에게 멸망했다는 게 역사 기록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선의가 그들을 위협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라기에는 뜻을 물릴 의도가 없어 보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답례하려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고스란히 클레리아에게 전해졌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건네는 호의에 순수하게 감사하기로 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라기에 님.”
* * *
뮐족의 배웅을 받고 새 마차까지 구한 클레리아 일행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클레리아가 먼저 마차에 올라탄 후, 레인이 선뜻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클레리아? 나 함께 타도…… 될까?”
그의 말에 잠시 눈을 흘기던 클레리아가 시선을 거뒀다.
“마부석에 자리가 부족할 테니 할 수 없죠, 타세요.”
클레리아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만들 기세인 에단의 눈총을 받으며. 레인은 서둘러 올라탔다.
이어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안은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클레리아는 창밖을 바라봤고, 레인은 멀찍이 앉아 초조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저…… 클레리아. 속이려고 속인 건 아닌데, 미안하게 됐어.”
클레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며 입술 양 끝을 내렸다.
사실 아세란타의 해산과 마을 잔치까지 겪으며 레인에 대한 마음은 얼떨결에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괘씸한 마음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함께 죽을 고비도 넘겼는데 그렇게 못 미더웠던 걸까. 나름, 신뢰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성향을 존중하지 않을 그녀도 아니었다.
“됐어요, 제가 못 미더웠으니 그러셨겠죠. 이해해요.”
괜스레 쀼루퉁해져 쏘아붙이자 레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사실…… 이러고 지낸 게 오래되어서 말할 때를 놓쳤달까.”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아닌지라, 그가 정말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리아는 그게 귀여우면서도 신기했다. 흔치 않은 기회에 조금 더 놀려 볼까 싶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으로 하시는 거 보고 생각해 볼게요.”
시험 삼아 던져 본 말이었는데 레인은 오히려 그 말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클레리아는 살짝 미안해져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여성용 치유정복을 입게 되신 거예요?”
“그게… 사실 귀족들은 남자 치유사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평민들은 대부분 치유사는 여성만 있다고 알고 있거든. 그래서 지방으로 파견 나갈 때 남자일 경우 자주 의심을 받아. 아이들도 무서워하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지.”
나름, 일리 있는 말인지라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뮐 부족의 마을에서도 벌써 아이가 에단에게 다가서는 것에서 한차례 망설이는 게 보였으니까.
더군다나 주사나 약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치유사는 무서운 선입견부터 생기게 되겠지.
그녀 또한 바르서스 구호소에서 치료했던 몇몇 아이들이 주사를 놓을까 봐 자신을 보고 지레 겁먹어 울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봐서 알겠지만, 내가 좀 꽤 여성복이 잘 어울리는 편이잖아?”
그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은 파견 나갔는데 한 녀석이 자지러지게 우는 거야. 며칠을 말이야. 다른 사람들 치유에 방해가 될 정도로 울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 어머니가 가져다준 적당한 여성 카디건을 걸쳤더니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추더라고. 그래서 여성 치유사 정복을 더 선호하게 됐어. 정말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정말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에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어버렸다.
남자 치유사들에게 그런 고충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하긴, 이번 세대의 치유사는 수도 훨씬 적으니 평민들은 남자 치유사들을 정말 못 봤겠구나. 레인 님을 비롯해 장기 파견 나가 계신 한 분뿐이니까.
게다가 사실 치유사 정복은 배색도 그렇고 여자 쪽에 훨씬 잘 어울리게 디자인된 건 사실이니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클레리아도 ‘흐음’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사실 레인이 예쁘장하게 생긴 건 맞잖아? 제복처럼 딱딱 틀이 잡힌 남자 정복도 잘 어울렸겠지만…….
머리칼도 약간 다듬어진 단발에 여자처럼 하얀 피부. 게다가 호리호리한 체격은 확실히 여자 쪽 정복이 잘 어울리는 것은 맞았다.
“끄응…….”
“그렇지? 응?”
딱 잘라 아니라고 못 박을 수 없음에 클레리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레인은 더욱 신이 났다.
“설사 그렇다 해도 속인 게 아닌 게 되진 않아요. 설마 칼리에 님도 속이고 계신 거예요?”
“칼리에 님은 진작 알고 계셨지.”
“그런데 그냥 두신다고요? 제게 언질도 없이요?”
“뭐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이상한 짓 할 놈은 아니란 걸 진작 알고 계신 분인지라.”
이번에는 칼리에 님에게까지 뭔가 배신감이 들었다.
그랬다면 언질이라도 한 번 주시지, 칼리에 님도.
레인은 가감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난 너무 아름답게 태어난 게 죄일 뿐이야. 어울리는 걸 입었을 뿐이라고.”
얼굴에 철면피를 깔기 시작한 그가 기가 막혀 클레리아가 소리쳤다.
“아름답긴, 아름다운 거로 치면 그건 에단……!”
순간 클레리아는 말을 끊고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여기서 그런 말이 왜 나와? 게다가 평소 생각만 하고 있던 게 왜 갑자기 입 밖으로 튀어나오냐고!
그녀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채 입을 막고 있자 멀뚱히 바라보던 레인이 물었다.
“……에단 경도 여자 옷 입는 취미가 있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바보 레인 님!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이제 더 대화 안 할 거야!
작은 창문 커튼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클레리아는 마차 창문으로 코를 박았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가리고 있자 멀뚱한 표정을 짓던 레인은 점차 묘하게 씨익 미소 지었다.
‘요 녀석들 보게.’
여전히 목까지 새빨간 클레리아를 보며 레인은 들리지 않게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마부석 쪽을 힐끔 바라봤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레인은 조용히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