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눈이 가득한 북부의 땅으로.
첸시아와 마주친 클레리아도. 엘레나와 레리안과 마주친 에단도 꽤 심란했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한쪽은 안다 해서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또 다른 한쪽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후에 탈이 없기만을 바라는 수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적당히 자신의 일과에 몰두하는 쪽을 선택했다.
“치유사 요청이 왔군요.”
오랜만에 구호소가 아닌, 집무실에 있던 칼리에의 말이었다.
한창 비품 명단을 정리하다 졸던 레인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이제 서서히 날도 따뜻해지는데 안에서 조는 것보다야 파견이 낫겠어요. 지역은 어딘가요?”
그녀의 말에 칼리에가 잠시 뜸 들이다 말했다.
“제국의 북부군요. 뮐 부족의 요청이에요.”
그녀의 말에 레인이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뮐? 뮐 부족이요?”
놀란 얼굴을 한 건 클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뮐 부족은 제국의 북쪽, 그것도 극지방에 살다가 제국에 편입되는 쪽을 선택한 부족이었다.
워낙 험한 산지가 영역이고, 365일 내내 눈에 파묻힌 곳에서 사는 소수 민족이기에 제국민이 된 후에도 생활상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뮐 부족은 외부인은 잘 안 들이지 않나요?”
“네. 그런데 이번에 부족장의 아내가 해산할 모양인데, 마을의 의원은 병세로 누워 있고 그 수제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는군요. 워낙 중대한 일이라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전 안 가요!”
조용히 수긍하는데 순간 레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레인 님?”
클레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그녀는 질색하며 멀찍이 떨어져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클레리아가 칼리에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래도 소용없다는 듯 레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글쎄 전 안 간다니까요! 절대 안 가요! 절대! 꼭! 반드시! 기필코!”
“클레리아, 레인 두 사람이 함께 가라고 직접 지시가 내려와서 어쩔 수 없어요, 레인.”
“아, 왜! 왜요! 싫어요!”
레인은 책상에 엎드려 우는 시늉을 했고 한바탕 난리통에 클레리아만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둘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때 칼리에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전에 뮐 부족 사는 곳 근처로 파견 나갔다가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그곳에서 닷새가량 조난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하.
클레리아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레인은 ‘두 번은 안 돼’라며 허탈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별수 있으랴. 황제의 명인데.
결국, 다음 날 두 사람은 수호 기사들과 함께 북부로 길을 떠났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클레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레인을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치유사 정복은 마법이 걸려 있어 안에 어떤 것을 갖춰 입어도 움직이기 편하다. 그 덕에 추위를 대비해 챙겨 입은 것이 많음에도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근데 레인은 어찌나 안에 많이 껴입었는지 치유사복을 입은 것도 부해 보였다.
누가 봐도 추위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할까.
“레인 님…… 저기 불편하진…… 않으신 거죠?”
마스크까지 한 그녀는 클레리아의 물음에 쓸데없는 비장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템즈 경이랑 조난당했을 때…… 그때 진짜 두 번 다시 북부는 안 오겠다고 다짐했거든. 거기 추위는 정말 차원이 달라,”
뭘 떠올리는지는 모르겠으나 레인은 징글맞다는 얼굴로 진저리쳤다.
“아무튼…… 움직이는 건 괜찮아. 뭐 좀, 과…… 해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괜찮아. 하룻강아지, 너야말로 그 정도로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혹시 몰라 두꺼운 겉옷도 준비하긴 했지만요.”
“그래. 하…… 수도는 이제 겨울도 끝나가는데 하필 북쪽이라니.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첫 파견 이후로는 계속 별 무리 없던 의뢰가 이어졌기 때문일까.
클레리아는 이번 요청도 큰 사건 사고 없이 잘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해산이라고 했지.’
그녀가 걱정되는 건 다름 아닌 아이를 낳는 걸 도우러 가는 부분이었다.
귀족 영애로만 살았을 때도 아이의 탄생은 전해 듣기만 했고. 치유사 일을 시작한 후에도 임산부를 맡아 본 적은 없었다. 기본적인 지식은 익혔다지만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응급 상황이 일어나진 않겠지. 레인 님도 계시고…….’
클레리아는 초조한 손을 맞잡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세상에…….”
“빌어먹을 추위!”
북부에 도착하자 차원이 달라진 추위에 클레리아와 레인이 각각 경악에 찬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차 겉은 허연 서리가 꼈고, 안도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냉기가 돌았다.
결국, 클레리아도 버티다 버티다 챙겨 온 두꺼운 코트를 입었다.
“두 사람, 괜찮아요?”
마차 바깥은 눈보라도 치고 있어서, 클레리아는 마부석에 있는 리암과 에단이 걱정돼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응, 괜찮아. 두 분이야말로 괜찮은 거야? 괜히 아끼지 말고 발열석 써. 첫 마을에서 말 좀 보수하고, 식사하고 다시 출발해야 하니까.”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멀쩡한 모습으로 에단이 대꾸했다.
물론 그들도 이번에 새롭게 보급받은 망토와 그 위에 로브를 입고 있긴 했는데, 난리를 치는 레인과 클레리아보다 훨씬 괜찮아 보인 것이다.
“문 닫아아아아아! 추워어어어어!”
레인의 절규에 황급히 창문을 닫은 클레리아가 발열석을 발동했다. 그제야 두 사람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깥 녀석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에 보급 받은 갑옷용 로브에 추위 대비로 발열석 가루가 들어갔다더라.”
클레리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레인이 덧붙였다.
‘그랬구나.’
레인의 세심함에 감사하며 그들은 뮐 부족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도착했다.
말과 마차를 보수하고, 정비한 네 사람은 떠나기 전, 여관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거 수도에서 오시는 분들입니까?”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관 주인이 걸걸하게 물었다.
“네, 뮐 부족에게 가는 길이에요.”
“허…… 뮐 부족이라. 뭐 가는 길은 험난하지 않은데.”
그가 턱을 쓸며 중얼거리자 에단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부족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한 곳인데, 동굴을 통과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폭설이 예고돼서 말이죠. 근처에 크고 작은 산사태가 많아서요.”
그 말에 식사하던 이들의 손길이 멈칫했다.
“하하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동굴 입구는 100년 동안 막혀 본 적이 없거든!”
그렇게 웃으며 다른 테이블로 가는 주인의 말이 클레리아는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레인과 리암과 괜찮을 거라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 * *
입구인 동굴에 도착하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저길 지나가야 한다는 거지?”
“그…… 렇죠?”
그들 앞에는 거대한 고드름이 가득 매달린 동굴 입구가 떡하니 자리했다.
“맞으면 즉사하겠는데.”
리암이 중얼거렸고, 에단은 로브를 더욱 여몄다.
“다른 수가 있나, 빠르게 지나가도록 하죠.”
마차에 속도가 붙고, 꽤 긴 터널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쿠구구구구
불길한 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그 울림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점차 커지던 소리는 이젠 굉음이 되어 버렸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진동으로 땅과 굴이 흔들렸다.
푸콱!
“으아아아악! 뭐야!”
순간 매달려 있던 고드름이 마차로 떨어지며 천장을 뚫었다. 레인이 놀라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바깥은 눈사태가 벌어져 굴 안으로 눈더미와 얼음덩이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에단이 마차에 속도를 가했고, 떨어지는 흉기 같은 고드름에 리암과 클레리아가 기겁했다.
콰가각!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눈더미에 마차는 휘말려 전복되어 버리고 말았다.
몇 분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도, 바람도 사그라졌을 때.
클레리아는 자신의 몸이 불규칙하게 흔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흐려진 눈을 떴다.
‘응? 뭐지?’
푹
차가운 눈 속에 얼굴이 묻히며 살짝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일로 어지러웠던 그녀는 흐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늑대?’
웬 커다란 늑대가 뭔가를 물어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레인을 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모두를 나른 늑대가 홱 클레리아를 돌아봤다.
그르르르
낮은 소리와 스스로 발광하는 것 같은 눈동자.
클레리아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리아! 정신 차려 봐 클레리아!”
격한 흔들림과 목소리에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에…… 단?”
눈을 뜨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것이 보였다.
클레리아는 뺨에 손을 가져갔다. 쓰러져 있는 동안 눈에 파묻혀 얼음장이 되어 버린 뺨이 느껴졌다.
“다른 분들은? 리암 경이랑 레인 님은?”
“모두 무사해. 깨어나는 게 네가 제일 늦었어.”
그녀가 깨어난 걸 본 레인이 다가와 클레리아의 머리를 살폈다.
“역시 머리를 좀 부딪쳤네.”
그녀는 치유력을 써 부어 있던 클레리아의 머리를 치료했다.
“어지럼증이나 균형 감각이 이상하면 재깍 말하고. 별 탈 없길 바랐는데 또 아니나 다를까 또 일이 터지는구만.”
레인이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바깥의 산사태가 입구로 밀려 들어와 마차가 전복됐어. 그 바람에 다들 여기저기 튕겨 나간 거고. 눈이 푹신하게 쌓여 있길 망정이지.”
에단은 레인이 곁을 지키는 걸 확인하고 리암에게 다가가 망가진 마차를 살폈다.
클레리아는 어렴풋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 보았던 늑대의 모습을 떠올리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그 늑대는…… 늑대는 어디로 갔나요? 늑대한테 다친 사람은 없는 거고요?”
“늑대?”
모두의 시선이 클레리아를 향했다.
“무슨 소리야? 늑대라니?”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에 분명… 엄청 큰 늑대를 봤어요. 그 늑대가 한 명씩 물어서 옮기는 걸 봤는데.”
“클레리아 님, 늑대는 없었어요. 어슬렁거리는 녀석이 있었다면 발자국이라도 있을 텐데 여긴 우리뿐입니다.”
클레리아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본 걸까?
분명 그르렁거리던 소리도, 뜨거운 숨을 뿜어내던 모습도 생생한데.
“갑작스러운 일에 머리까지 부딪쳤으니 헛것이 보일 수도 있어. 그러니 몸 추스르는 거에 집중해.”
“네.”
잘못 본 거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이상한 감이 있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딸랑
헥헥 헥헥
멀리서부터 청량함이 가득 묻어나는 소리가 동물의 낮은 헉헉거림과 맞물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곧 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물의 털가죽을 온몸에 감싼 사람 몇몇이 덩치가 꽤 큰 개들이 이끄는 썰매를 타고 온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그들이 어리둥절해 있자, 도착한 이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라스칸트 의원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갸웃하던 와중 클레리아가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는 라스칸트에서 뮐 부족께 친선의 의미로 파견된 치유사들입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곁에 선 또다른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키도 훤칠했고, 체격도 굉장히 좋았다.
“우린 뮐 사람. 나는 라기에, 여기 이 사람 아그난타 잇새다. 그가 말하길 뮐 부족 땅에 온 걸 환영한다.”
뮐 부족의 언어는 잘 몰랐지만, 가장 중요한 아그난타(족장)와 아세란타(족장의 아내)는 알아 뒀기에 클레리아 일행은 능숙하게 예를 갖췄다.
“뮐 부족의 아그난타께 인사드립니다.”
“여기부터 우리 썰매 타고 간다.”
그제야 그들은 뮐 부족이 자신들을 맞이하러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마차도 부서진 참에 다행이라 여기며 클레리아 일행은 두 썰매를 나눠 탔다.
“잡아라.”
우우우우
라기에의 말에 일제히 개들이 발을 굴렀고 썰매는 빠르게 움직였다.
클레리아는 휘청이다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말이 안 통하면 어쩌나 했는데, 어색하긴 해도 통역사가 있다는 것에 그녀는 안심했다.
* * *
마을에 도착한 후, 클레리아 일행은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뮐 부족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어서 어떨까 했는데 고유문화가 잘 발달한 편이었다.
지어진 집들은 나무와 흙으로 만든 부분들이 절묘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비로운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는데.
새까만 머리칼과 어두운 피부색. 평상복인 듯 입고 있는 털옷은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들의 눈이 정말 특이했다. 마치 프리즘에 빛을 비춘 것처럼 여러 색으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붉은색도, 푸른색도, 노란색도. 갖가지 색이 보석처럼 빛났다.
사람들의 수가 적어 그런지 부족민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알려진 바가 없고,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니어서 그 신비함에 클레리아는 은연중 계속 감탄했다.
이어 클레리아 일행은 잇새가 해주는 환영식에 참석했다.
모든 부족민의 환영을 받고 난 뒤, 그들은 잇새의 집으로 안내받았다. 방으로 들어서자 배부른 여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세란타인 듯 보였다.
라기에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세란타. 우리 아그난타의 구오타 가졌다. 소중한 사람이다.”
“구오타…… 라면?”
레인이 중얼거리자 클레리아가 말했다.
“후계자라고 알고 있어요.”
“아하.”
클레리아는 조심스럽게 족장과 그의 아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일단 뵌 김에 아내분의 상태를 살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라기에가 설명했고, 족장과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들은 클레리아는 다가가 조심스럽게 부푼 배에 손을 올렸다.
쿵 쿵 쿵 쿵
엄청 빠른 심장 박동이 손끝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는 괜찮았고, 산모도 건강했다. 해산만 잘 끝낸다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할 것 같았다.
클레리아가 이상 없다는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잇새의 얼굴도 환하게 물들었다.
둘을 바라보던 라기에가 다시 클레리아 일행에게 손짓했다.
“묵을 곳 알려 준다. 따라와라.”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정중앙에 있는 건물로 안내받았다. 귀한 손님을 안전을 위해 가장 가운데에 모신다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 일행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굵직한 통나무들이 집의 골격을 잡아 주는 광경도 놀랍긴 했지만, 무엇보다 바닥과 벽에 커다란 짐승의 털가죽이 잘 손질되어 놓인 것이 충격이었다. 제국민들도 사냥을 즐기긴 하지만, 이렇게 큰 짐승의 털가죽은 보기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일까 난방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라기에와 족장이 클레리아 일행의 반응을 살폈다. 귀빈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둘씩 지낼 수 있는 커다란 방 두 개에. 각자가 쓰는 욕실 두 개. 작은 거실까지 갖춰져 있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웃으며 인사하는 클레리아를 보며 라기에가 양쪽 방을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괜찮나? 거기?”
그냥 앞뒤 설명도 없이 묻는 통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남자 여자가 같은 집을 쓰면 안 되나?
레인은 알까 싶어 돌아봤으나 그녀 또한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상관없나?”
다시 한 번 라기에가 물었다.
말은 어느 정도 통하지만 서로의 문화를 알 수 없으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클레리아가 적당히 헤아려 답했다. 아마 방이 충분히 넓으냐 물어보는 거겠지.
“방은 충분합니다. 저희가 쓰기에 적당해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더 덧붙이지 않았다.
“잇새 아세란타 걱정해서 간다. 나는 라기에다. 옆 건물에 있으니 필요하면 불러라.”
“여기 의원님과 그 수제자님을 뵙고 싶은데요.”
클레리아의 요청에 라기에가 엄지를 척 치켜들고 자신을 가리켰다.
“의원님 병환이라 못 만난다. 그리고 수제자 나다.”
아하?
그는 본인의 위치에 어지간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말 할 때보다도 지금 소개하며 하는 행동에 아주 아주 자신이 차 있었으니까.
클레리아 또래로 보이니 젊은 그 역시 혈기도, 자신감도 등등한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나가는 걸 배웅했다.
건물을 완전히 나서기 직전 라기에는 다시 한 번 돌아서서 물었다.
뭔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정말 괜찮은가? 아미드?”
또 저 얼굴.
아까 족장 잇새와 함께 짓던 묘한 표정이었다.
아미드는 그들의 말로 여자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통성명을 하지 않아 적당히 성별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클레리아는 자신과 온 일행을 설명했다.
“저는 클레리아입니다. 다른 분은 레인이고요. 기사님들 중 머리칼이 붉으신 분은 리암이고 다른 분은 에단입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면 돼요. 그리고 머물 곳은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괜찮습니다.”
여전히 불편한 얼굴이었으나 라기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옆 건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클레리아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계속 저렇게 묻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지만 정말 네 사람이 둘씩 방을 나눠 쓰기에는 정말 부족함이 없었다.
클레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부족민이 가져다준 저녁을 먹은 뒤, 클레리아는 황급히 방으로 향하는 레인을 불렀다.
“레인 님, 벌써 주무실 건가요?”
“어? 어! 그러려고. 추운 데서 너무 떨었더니 피곤하네.”
클레리아는 피식 웃으며 렝터 자작저에서의 그녀를 떠올렸다.
“전 잠시 산책하려고 하니까 마음 놓으시고 방 편히 쓰다 주무세요. 방해 안 할게요.”
“어, 어?”
레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제안을 거절까지 하기는 좀 아쉬웠던 모양이다.
“고마워.”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 그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클레리아는 식기들을 내놓으려 문으로 향했다.
“산책한다고?”
어느새 따라온 에단이 물었다.
“응, 레인 님이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신 것도 같고. 북부에 또 언제 올까 싶어서.”
“같이 가자.”
“어…… 정말 주변만 볼 거라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소화 좀 시키려고 그래. 왜? 설마 싫어?”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를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에단의 눈이 그제야 호선을 그렸다.
“가자.”
느닷없이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클레리아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설렜다. 오랜 시간 늘 제국을 지키는 동료로, 친우로만 생각했던 그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옳은 건가 싶을 정도로.
클레리아는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행여 들킬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조금 돌아다니며 구경한 결과, 뮐 부족의 마을도 사는 모습은 비슷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다니며 놀았고, 이웃이 서로 돕고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수가 적어 모든 이들이 알고 지내며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에서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의 라스칸트는 철저한 계급 사회가 만연해 모든 계층이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긴 힘드니까.
그때 집에서 나오는 라기에와 다시 마주쳤다.
“보내 주신 저녁 잘 먹었어요.”
“우리 부족 음식 잘한다. 더 줄 수 있다.”
“아뇨, 충분히 먹었습니다. 감사해요.”
클레리아의 말에 흐뭇한 얼굴을 하던 라기에는 옆에 있던 에단을 바라봤다. 그는 묵직한 시선으로 에단을 아래위로 훑었다. 무례한 시선이 아닌, 찬찬히 주의 깊게 살피는 모습에 에단 역시 묵묵히 그의 눈길을 받아냈다.
“좋은 카미드다. 눈빛 좋다. 우리 부족에 있었다면 전사였을 거다.”
카미드는 남자라는 뜻인데 라기에 역시 그가 훌륭한 기사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에단이 ‘감사합니다’라고 라기에에게 답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클레리아가 퍼뜩 막혀 버린 입구를 떠올렸다.
“아, 라기에 님! 아까 저희가 왔을 때 마을로 들어오는 동굴 입구가 막혔어요. 아시나요?”
라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흔하다. 막힌 거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말에 에단과 클레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막힌 걸 뚫으려면 며칠이 필요할 것 같던데요?”
하지만 라기에는 고개를 저었다.
“툭하면 막힌다. 제국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집으로 홀연히 들어가 버렸다.
“흔…… 하다고?”
“지금 툭하면 막힌다고 하신 거 맞지?”
에단과 클레리아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음에 흔들렸다.
여관 주인은 분명 100년 동안 한 번도 막힌 적이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답해 줄 사람이 없으니 의문은 더 미궁에 빠져들었다.
라기에와는 입구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더 말해 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 * *
아세란타의 해산은 순조롭게 이뤄질 것 같았다. 예정일도 좀 더 남아 있고.
그러나 클레리아 일행은 다른 이유로 놀라고 말았다. 잠시 일정을 의논하던 차에 라기에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다.
“우리 뮐족의 아그난타는 성스러운 곳에서 구오타를 맞이한다.”
라기에의 말에 레인과 클레리아가 귀를 의심했다.
“마을에서 아이를 낳는 게 아닌가요?”
그는 창문을 열어 눈으로 덮인 산중을 가리켰다.
“전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곳에서 구오타 맞는다. 아그난타, 아세란타. 나 라기에. 그리고 당신들 다 가야 한다. 그래야 구오타 안전하다.”
그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클레리아 일행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 이런 말 없었잖아. 저런 산 중턱이면 가는 것도 힘들 텐데 당장 애가 나올 것 같은 산모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고?”
레인이 정색하며 말하자 라기에는 훨씬 더 정색했다.
“뮐족 전통이다. 따른다.”
워낙 예상도 못 했던 일이라 당혹을 넘어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라스칸트에 우호적으로 다가왔던 소수 민족이고, 제국은 그들의 전통성을 인정해 주고, 보호해 주기로 약조했다. 여기서 이 일을 거부해 버리면 그 조약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가려고?”
레인이 기막힌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남자분들께서 수고해 주시는 수밖에요.”
클레리아가 미안한 얼굴로 리암과 에단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죠. 이런 일을 위해 저희가 함께하는 건데요.”
리암이 웃자 레인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구나, 그럼 리암 경이 내일 아세란타 옮기는 첫 타자를 하면 되겠어. 그치?”
“제, 제 말은 그런 뜻이…… 순서는 제발 다시 정해 주세요!”
“말하는 거 보게? 누가 들으면 내가 수호 기사 부려먹는 악덕 치유사인 줄 알겠어?”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리암 경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어!”
“에단…….”
울먹이며 리암이 부르자 에단은 그에게서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시죠, 클레리아 님. 내일 아세란타를 옮길 당번은 정해진 것 같군요.”
“야아! 다들 정말 나한테만 너무해!”
그 모습에 웃으며, 클레리아는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라기에에게 물었다.
“그럼 그 신성한 곳으로는 언제 출발하게 되나요?”
“내일 저녁에 출발한다.”
역시…….
의뢰를 온 이상 그들의 방식에 맞춰야 할 건 예상했으나 그것도 밤중에 산행이라니.
그 말에 기겁하는 레인과 공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클레리아아아!”
“치유사니임!”
레인과 리암이 우는소리를 했으나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을 뿐이었다.
계획을 알린 라기에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갈 뿐.
어느새 서로 부둥켜안은 채 신세 한탄하는 레인과 리암을 뒤로 하고, 클레리아는 에단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매번 고생시키네.”
“이럴 거 예상 못 했으면 치유사 수호 기사 자격 실격이지. 클레리아 님이야말로 단단히 채비하십시오.”
그의 말에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네, 기사님.”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마을 전체가 함께 드리는 의식에 참여하고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그 후, 라기에의 통역과 함께 아세란타의 건강 상태를 듣는데,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뮐 부족 아이란 아이는 전부 나와서 레인에게 몰려든 것이다.
아이들이 뭐라고 외쳐 댔지만, 워낙 동시에 소리치는 통에 그녀는 정신 차리지 못했다.
그때 라기에가 말했다.
“우리 부족은 아이들과 놀아 준다. 식사 후에 항상 한다.”
그는 능숙하게 한 아이를 안아 들며 무리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몇몇은 그에게 갔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레인에게 붙어 있었다. 외부인이어서 호기심이 잔뜩 동한 것 같았다.
“아니, 클레리아도 있고 리암 경이랑 에단 경도 있는데 다들 왜 나한테만 이래!”
그녀가 절규해도 몰려드는 아이들은 팔다리를 붙들고 꺄르륵거릴 뿐이었다.
애들이 무슨 힘이 그리 좋은지 레인이 아이들의 손길에 휘청휘청했다.
“레인 님이 인기가 좋네.”
그 관심이 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해서 클레리아는 에단 옆에 붙었다.
“그러게. 레인 님 당황하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하…… 이 얼마 만에 레인 님의 호통에서 벗어나 느끼는 자유인가.”
리암도 두 사람 곁에서 감격스레 중얼거렸지만, 그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리암 경, 당장 이리 안 와?”
몰래 킥킥거리며 구경하던 리암은 결국, 레인에게 차출당해 아이들과 놀아 주러 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인기는 레인이 여전해서 그녀는 목마를 태우며 안아 주며 정신없어 보였다.
그때 또 다른 몇몇 아이들이 에단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보아하니 그에게도 놀아 달라 하고 싶은데 상대적으로 뭔가 날카로운 분위기라 꺼려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용감한 아이 몇이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접어 줄까?”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해는 못 해도 의도는 전달된 것 같았다.
아이들은 곧 에단의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그가 접어 주는 종이를 구경했다. 또 어떤 아이는 아주 능숙(?)하게 곁에 있는 클레리아의 품을 의자 삼아 앉아 구경하기도 했다.
종이로 제법 여러 가지를 접는 에단의 모습에 클레리아는 감탄했다.
“언제 이렇게 종이접기를 많이 알았어?”
“기억 안 나?”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그는 막 마무리된 종이를 들어 클레리아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어릴 때 만들어서 이렇게 해 줬었잖아.”
순간 얼굴에 오르는 열기로 클레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맞다, 그랬지.
그런 적도 있었지.
에단은 늘 엘레나에게는 배나 꽃을 접어 주고 그녀에게는 이렇게 왕관이나 리본 등을 접어 머리에 얹어 주곤 했었다.
다 잊고 살았다니.
그전 삶은 참 메말랐던 모양이다. 이런 어릴 적 기억도 아득하다니.
둘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라기에가 다가와 아이를 목마 태우고 뭐라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순식간에 손을 흔들며 집으로 흩어졌다.
“후아, 살…… 려줘.”
레인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수고했다는 듯 라기에는 레인과 리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밥 먹을 시간이다. 들어가자.”
“밥…… 밥이다.”
아이들을 연신 목마 태워 주던 리암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결국, 다리가 풀려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