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52)

제13장. 예상치 못한 균열.

첫 파견 임무 후, 클레리아에게는 먼 거리에 가는 임무나 까다로운 의뢰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제국의 위치가 안정적인 탓에 시국이 평탄했기 때문이었다.

클레리아와 레인은 근 두 달간 마차로 두 시간 정도 되는 근거리 임무만을 받았고, 덕분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좋은 아침.”

여느 때처럼 문을 열고 레인이 인사하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네, 레인 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젠 제법 치유사 태가 확실한 클레리아도 웃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오늘도 근거리 임무려나? 구호소 쪽은 어떻대?”

“보조사님들과 칼리에 님만으로도 충분히 운영 가능한 것 같아요. 추가 투입 요청은 없네요.”

“평화의 시대구만.”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는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제님?”

전에 서신을 전달했던 그 앳된 사제였다. 그런데…….

“치유사님. 안녕하셨나요?”

여전히 앳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그는 그때보다 키가 훌쩍 커 있었다.

“키가 크셨네요? 뵌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네, 요즘에 잠이 쏟아져서 죽겠네요. 밤엔 관절도 삐걱삐걱거려요.”

그가 우는소리하는 앳된 얼굴은 귀엽기만 했다.

“근데 무슨 일로?”

“아, 치유사님 앞으로 서신이 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익숙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봉투를 꺼냈다.

‘……또 때가 됐나?’

레인은 슬쩍 클레리아에게 내밀어지는 서신을 훔쳐보고는 알았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또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세실리아의 서신이었던 것이다.

“치유사님은 황실의 총애를 받고 있으시네요.”

속도 모르고 사제가 환하게 웃었다.

“예, 그러네요. 하하…….”

기운 없이 대답하는 그녀를 사제는 갸웃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 * *

솨아아아!

또다시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녹음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묘한 수수께끼를 풀어 오는 방식은 이제 괜찮아졌는데 이 바람은 영 익숙해지질 않네.‘

거세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클레리아가 붙들었다.

“오랜만이구나.”

고혹적인 말투에 클레리아가 뒤로 돌아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자 매혹적이고 야릇한 미소를 지은 세실리아가 고양이를 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이리 오렴.”

한겨울에 사방이 트인 정원에 있음에도 그녀는 얇은 실크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추운 걸 잘 못 느끼시나. 그러고 보니 여기서 냉기를 느껴 본 적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러니?”

의아함을 누르고 다가가는데 세실리아가 물었다.

“송구하옵니다만…… 겨울에 이렇게 열린 정원인데도 추위를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아, 마법과 연금술의 공동 작품이랄까?”

그녀가 웃으며 벽을 가리고 있는 길쭉한 관상수의 잎을 치우자 벽에 부착된 발열석이 드러났다.

“이 녀석 덕에 온실 효과가 나거든. 지금껏 여기서 사교 파티는 많이 했지만, 이걸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구나.”

클레리아는 세실리아가 외모나 치장 말고 꽤 심혈을 기울여 가꾸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자기 자신밖에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옮기던 클레리아는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치고는 멈칫했다.

난생처음 보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가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세실리아는 꽤 감명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설마 내가 그걸 물어봐 줘서 기뻤던 걸까?

그녀가 민망하지 않게 클레리아 역시 따라 빙긋 웃어 보이고, 세실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새 관리를 못 받은 것 같아서 불렀단다. 오후에 티 파티가 있기도 하거든.”

“예, 저도 오랜만에 부르셨다 느꼈습니다.”

의자에 앉던 세실리아가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클레리아, 너도 기다렸다고 생각해도 될까?”

갑작스러운 살가움이 의아했지만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송합니다, 전하.”

그 후는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클레리아는 피부 관리에 집중했고, 세실리아 다른 말은 더 없었다.

‘아무래도…… 잘 보이기 위한 말들 위주로 살았기 때문일까.’

회귀 전, 클레리아 역시 사교 모임에서 늘 보석 얘기, 어느 귀족이 사업이나 영지가 늘었다는 이야기, 누군가의 불륜 이야기를 위주로 들었다.

그녀가 그랬는데 세실리아는 훨씬 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고작 정원에 관해 묻는 것에 그런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클레리리아는 지난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세실리아가 조금은 측은해졌다.

“다 됐습니다. 살펴보시겠습니까?”

“네가 어련히 잘해 주었을 것을 뭣 하러 확인이 필요하겠니? 고맙구나. 오늘은 이만 가 봐도 좋다.”

그녀에게 예를 갖춘 뒤 돌아서려던 클레리아가 머뭇거리다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전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응? 무엇이?”

“일전에 주셨던 발광석을 무척 귀히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작 그 정도로.”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가 손을 휘휘 저었을 때였다.

왠지 모르게…… 세실리아의 미소가 클레리아의 마음에 걸렸다.

그랬기에.

‘비록 전생에서 우리가 악연이었다 해도 지금은…… 그때와 달리 진심 어린 모습에 답 정도는 드리고 싶어.’

클레리아는 환하게 진심을 담아 웃었다.

“아뇨, 고작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주신 그 돌이 제 첫 파견의 한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렇게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랬다니 정말…… 기쁘구나. 이만 돌아가렴. 바쁜 널 더 붙들고 있다가 폐하의 책망을 듣고 싶진 않으니.”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세실리아를 보며 클레리아는 조용히 방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뜻 모를 뿌듯함이 가슴 전체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세실리아는 분명 더없이 감동한 얼굴이었다.

* * *

“그런 황녀님의 얼굴은 처음이야.”

클레리아는 사라진 마법 문 쪽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황녀의 가면이 아닌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에 어딘가 마음이 설렜다.

“그러고 보니…… 나도 황녀 전하를 보며 그렇게 웃었던 적이 처음인 것 같네.”

조금은 민망해져 그녀는 슬쩍 볼을 긁적였다.

만약…… 정말 만약에 엘레나가 설치기 전, 그 과거에서 황녀와 자신이 진심을 내보이며 서로 다가갔다면 그때도 이랬을까? 억울하게 누군가 죽는 걸 보는 일은 없게 됐을까?

복잡한 얼굴로 천천히 나가는데 복도 쪽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원래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화려한 차림새에 선뜻 나서지 못했던 그때, 그 여성이 홱 돌아섰다.

차림새는 기억하던 것과 다르게 화려했지만, 역시 첸시아 데포렌 영애였다.

클레리아는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불렀다.

“데포렌 영애!”

“아, 프라이어스 영애!”

그녀 역시 여전히 반갑게 클레리아를 맞았다.

“황녀전하의 티 파티에 초대받으신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다른 분이 초대해 주셨어요.”

“아, 그럼 친척이라던 그분이?”

“아뇨, 프라이어스 영애도 잘 아시는 분, 이슬레이터 영애요!”

반가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슴 한복판에서 사그라져 버렸다.

그렇게 감정이 빠르게 사그라질 수도 있음에 클레리아는 새삼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티 낼 수는 없었다.

데포렌 영애는 너무도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그…… 렇군요. 잘 됐어요. 이렇게 자주 가다 보면 분명 다음에는 황녀 전하의 초대를 직접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몸에 밴 습관은 쉽사리 사라질 줄 몰랐다.

과거 그 시절의 그때처럼, 클레리아는 표정을 적절히 꾸며 내고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첸시아를 축하했다.

“고맙습니다. 절친이라시더니 이슬레이터 영애는 프라이어스 영애만큼이나 정말 친절하시고 좋은 분이더군요!”

순수한 저 말에 입 안이 쓰고 온몸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그건 가면이고 저열한 술수예요! 라고 말이 터져 나갈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데포렌 영애? 이슬레이터 영애와는 어떻게……?”

“아, 전에 있던 황녀 전하 티 파티 때 제가 기죽어 있는 모습을 눈여겨보셨다고 하셨어요. 안타까웠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첸시아는 클레리아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프라이어스 영애가 떠올랐다고요. 영애도 늘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가슴 아팠는데, 저 또한 그래서 꼭 도와주고 싶으셨다고 그러셨어요.”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교 모임에서 동떨어져 있을 때, 엘레나가 신경이나 썼던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시선을 클레리아에게 돌려본 적 없었다. 그런 그녀가 첸시아가 클레리아와 비슷해서 너무도 안타까웠다는 말 따위 진심일 리 없었다.

가슴 한구석을 누군가 칼로 찔러 후벼대는 것처럼 진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클레리아는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데포렌 영애, 티 파티에 가면 이슬레이터 영애도 그렇지만, 다른 영애들하고도 관계를 많이 넓혀 두세요. 사교 모임은 그런 목적이니까요.”

그 말에 첸시아는 잡았던 클레리아의 손을 놓으며 살며시 몸을 뒤로 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슬레이터 영애가 많이 지도해 주고 계신답니다.”

또…… 엘레나.

그녀의 입에서 엘레나가 언급될 때마다 클레리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데포렌 영애가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죠. 그냥 이슬레이터 영애에게 의존하기에는 데포렌 영애는 매력이 넘치는 분이기에 한 말이었어요.”

그 말에 첸시아의 턱이 조금 더 들렸다. 그리고 눈빛은 싸늘해졌다.

“이런 말 드리기 뭐하지만, 프라이어스 영애. 설마…… 영애의 자리를 제가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평소 알았던 데포렌 영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이었다.

“데포렌 영애, 전 그런 뜻이…….”

“프라이어스 영애는 지금 보니 매우 이기적인 분이시네요. 영애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지 않으셨나요? 이슬레이터 영애 역시 친구의 자리가 비어 슬퍼하시던 와중에 제게 위로받으시고, 저 역시 보답하는 중일 뿐이에요. 프라이어스 영애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제가 은혜 입은 이슬레이터 영애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심장이 뛰고는 있는 걸까.

싸하게 식어 가는 가슴을 느끼며 클레리아는 첸시아를 황망히 바라봤다.

“제 앞길은 제가 챙길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절 도와주실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더 그런 말은 말아 주세요. 불쾌합니다. 프라이어스 영애가 이슬레이터 영애 곁을 떠난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클레리아는 더는 첸시아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한다 해도 선의를 담은 걱정으로 들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죄송합니다. 두 분을 모욕하려던 건 아니에요. 실례했습니다.”

클레리아는 짧게 묵례로 인사했다.

“오늘 티 파티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데포렌 영애.”

그렇게 말하고 지나치려는데 첸시아가 덧붙였다.

“프라이어스 영애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가식적인 다른 영애들과 같으시군요. 절친을 뺏겼다고 투기라니요. 추합니다.”

그렇게 쏘아붙인 첸시아는 빠르게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클레리아는 그렇게 멀어지는 첸시아를 돌아보았다.

대체 엘레나가 무엇을 어떻게 구슬렸기에 첸시아가 저리 변해 버린 걸까.

아니, 가난하고 이름 없는 하위 귀족인데도 황녀의 티 파티를 탐내던 걸 보면. 첸시아의 야심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엘레나는 하필 저런 아무것도 모르고, 겉보기 화려함에만 빠진 영애를.

클레리아는 황궁 밖으로 향하는 발길에 속도를 올렸다.

엘레나는 비어 버린 클레리아의 자리에 다른 이가 필요했을 거다.

하지만 혈맹과 우정이란 이름으로 조건 없는 희생을 해 주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을 테지. 그래서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포섭했을 터였다.

그게 첸시아가 된 것이고.

‘내가 조금 더 첸시아를 챙겼다면…… 엘레나와 엮이는 건 막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일은 일어났고, 이런 생각은 부질없었다.

클레리아는 서글픈 마음을 안고 서둘러 황궁을 벗어났다.

* * *

‘세상에, 가르친 보람이 있네?’

엘레나는 첸시아가 클레리아에게 쏘아붙이는 걸 엿듣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근처에 있다가 그걸 보고 고소해하는 모습이라도 들키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어쩜.’

가진 것도 없이 야망만 높다고 생각했던 첸시아가 제법 그럴듯하게 클레리아를 한 방 먹였다.

고고한 척 해 대는 클레리아가 저런 지위 낮은 영애에게서 ‘추하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막혀했을지.

‘꺅’하고 소리 지르며 손뼉이 절로 나는 걸 참느라 아주 애먹었다. 지금도 배실배실 입가에 웃음이 번져 참기 어려웠다.

“그래, 클레리아. 내가 너 없다고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여겼다면 오산…….”

“엘레나?”

문득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리웠던 인영이 눈앞에 있었다.

“……에단?”

보석처럼 반짝이는 백금발. 성기사단의 백색 갑옷을 두른 늠름한 모습.

여전했다.

엘레나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에단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게다가 무엇보다 평소처럼 온화하게 바라보는 그 눈길은…….

“오랜만이야. 사교 파티라도 있어?”

그가 물으며 다가왔고, 엘레나는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힘이 빠진 그녀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만 보는 통에 이상하게 여기며 에단이 부채를 주워 주었다.

“엘레나, 괜찮은 거야?”

내미는 부채를 받아 들다 그녀는 퍼뜩 그가 자신과의 정혼을 깼다는 걸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엘레나는 부채를 낚아채고 물러섰다.

“엘레나?”

그는 오랜만에 만났음에 반가워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눈시울이 뜨끈해져 오는 통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에단은 알아차린 듯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화내지 마, 엘레나. 우리 오랜만에 본 건데 싸우지 말자.”

“싸워? 싸우는 것도 애정이 남아야 싸우는 거지. 그런 게 우리 사이에 남아 있어?”

그녀가 앙칼지게 묻자 에단이 표정을 굳혔다.

“정혼을 깬 것 때문이라면 너 역시 왜 그랬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더 설명하지 않을게.”

“그것뿐인 것 같아? 어떻게……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녀가 우물거리며 서러움을 삼키자 에단은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엘레나는 기가 막혔다.

모른다는 건가? 정말 몰라?

내가 서러운 이유를?

“성기사단으로 가 버렸잖아! 그것도 치유사 전담 수호 기사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치유사 전담 수호 기사는 매우 영예로운 자리야, 엘레나. 우리 3공작가에게는 더없이 이로운 일이란 거 너도 알잖아.”

그가 달래듯 말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엘레나는 그것을 쳐냈다.

“그게 아니야! 내가 말한 건 어떻게…… 어떻게 둘이서……!”

엘레나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을 때, 누군가 그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어휴, 레이디를 울리다니…… 전부터 매너가 꽝인 건 알았지만, 적당히 좀 하시죠. 칼리스터 영식.”

“……캄스턴?”

레리안이 천천히 나와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엘레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에단과 떼어 놓았다.

“아, 이제는 칼리스터 경이던가?”

에단은 잠시 그를 무섭게 노려보다 다시 엘레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네게 의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굳이 말하지 않은 건 어떤 선택이든 공작가에 이로울 선택이었고. 너 역시 그것에 동의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야. 엘레나, 네가 서운했다면 미안해.”

“자자, 오늘은 황녀 전하가 여신 사교 티 파티가 있는 날이라고요. 영애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면 어떡합니까! 자, 이슬레이터 영애. 어서 들어가서 화장을 손보세요.”

엘레나는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레리안은 적당히 그녀를 떠밀어 자리에서 벗어나게 했다.

어차피 저렇게 울면서 말한들 그녀 본인한테도 도움이 안 될 거고.

엘레나가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에단은 레리안을 노려보았다.

“……네가 요즘 이슬레이터 저를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보군. 엘레나와 그렇게 가까워졌는지 몰랐는데?”

“둘이서 붙어 다니느라 혼자 남겨진 영애를 달래 겨우 수습해 놨는데 그렇게 대놓고 난색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달래? 수습? 너와 좀 더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하지, 그래. 무슨 의도로 접근하는지는 모르겠다만, 3공작가를 이간질하려는 거면 그만둬라.”

에단의 경고에 레리안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대놓고 붙는 건 그쪽들이면서 나한테 이간질? 편을 가른 건 본인들이면서 나한테 덮어씌우다니, 양심이 없네?”

그 순간이었다.

퍼억!

에단의 손이 순식간에 레리안의 목을 잡아채 벽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크웁! 뭐, 뭐 하는 거야?”

“네가 네 입으로 무슨 말을 놀리건 내 알 바 아니다만…… 혈맹은 그따위에 좌지우지될 가벼운 게 아니야. 엘레나도 그쯤은 알아. 곁에 붙어서 괜한 말로 사람 들쑤셔서 눈 흐리지 마라.”

그때 바쁘게 복도로 들어섰던 시종이 두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

에단은 레리안의 목을 조이던 손을 놓았다.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나직하게 경고하고 복도를 벗어났다.

“괘, 괜찮으세요?”

콜록거리는 레리안에게 시종이 다가왔지만, 그는 거칠게 시종의 손을 뿌리치며 에단이 사라진 곳을 노려봤다.

“어쩔 건데? 어차피 치유사 계집하고 희희낙락거릴 놈이.”

그는 씩씩대며 엘레나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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