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장. 각자의 저의
“이거 진짜 나도 함께여도 괜찮은 거야?”
리암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실전에는 긴장도 안 하면서 들어가기 전에는 엄청 설레발이네. 같이 갔다 왔고, 함께 목격했으니 폐하를 알현할 이유는 충분해.”
“하지만 나 알현실에서 황제 폐하를 뵙는 건 처음이라고.”
그의 말에 에단은 그저 피식 웃어 버렸다.
“들어가십시오.”
그때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고, 에단과 잔뜩 굳은 리암이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에단 칼리스터와 리암 아켈리엔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오, 이번 수호 기사를 맡은 이들이군. 며칠 전에 함께 첫 파견 임무를 다녀왔다지? 그래, 감회가 어땠는가?”
여전히 위엄이 넘치는 누에른이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거친 임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에단의 말에 누에른의 눈이 번뜩였다.
“무엇을 보았지?”
에단이 품에 손을 넣자 갑자기 그들을 둘러싼 기둥 뒤에서 ‘스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리암이 두리번거렸고, 에단이 손을 멈추자 누에른이 직접 자신의 손을 펴 들었다.
“계속하게.”
그의 말에 에단은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화살 깃대를 부러트려 가져온 것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왼쪽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이것은 저희가 렝터 자작령에 도착하기 전, 공격을 받았을 때 쓰인 화살 깃대입니다.”
이어 손가락은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게 제가 출발하기 전, 렝터 자작의 저로 온 기사대가 머물렀던 별관에서 발견한 화살의 깃대입니다.”
“똑같군.”
떠나기 직전 찜찜함이 좀체 떨어지지 않아 혼자 이아스와 그 기사들이 머물렀던 별관을 살핀 에단이었다.
마치 있었던 흔적을 없애려 했던 것처럼 깨끗했던 그곳에, 몇 없던 가구 뒤에 떨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렝터 자작의 사주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렝터 자작이 그럴 동기는 없을 뿐더러 오히려 누군가 그의 사정을 알고 호의로 배치한 것처럼 꾸몄더군요.”
이어 리암이 덧붙였다.
“추천서와 서신을 확인하니 샤도레 남작이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그런 이름이 없다는 걸 자작 쪽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흐음…… 누군가 미리 작당해 놨다는 거로군.”
황제는 시름이 깊어지는 듯 턱을 매만졌다.
“에단 경. 그대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 임무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꽤 민감할 수는 있겠으나 저쪽에서도 지켜보고 위협만 할 뿐,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프라이어스 영애를 계속해서 파견하는 건 역시 위험하지 않겠나? 그쪽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거나 다름없으니.”
“저희가 그들의 움직임을 문제 삼아 바로 태도를 바꾼다면, 외려 그들이 이쪽의 저의를 의심할 겁니다.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행세하고 저희도 저쪽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렇군. 영애는 괜찮은가?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의 물음에 에단은 치유사 정복을 벗어 던지고 명하던 클레리아를 떠올렸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프라이어스 영애는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누에른의 눈이 리암을 향했다.
그러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도 얼른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의 생각입니다. 프라이어스 영애는 매우 강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누에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프라이어스 영애의 지속적인 활동을 허락하마. 에단 경이 곁에서 수고하게. 그리고 치유사가 공격받은 일은 새어나가지 않게 철저히 단속하도록. 그들의 존재를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자극해야 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 * *
“칼리에 님은?”
“구호소에 가셨대요.”
“우리는 안 가고?”
“레인 님과 저는 내근을 하라셨어요.”
“흠…….”
자신의 책상에 가서 앉던 레인은 뭔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클레리아에게 다가갔다.
“이봐, 하룻강아지. 칼리에 님이 오늘 히리스벨라관으로 돌아오실까?”
“음…… 그곳에서 그대로 퇴근하실 것 같던데요. 왜 그러세요? 뭔가 전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클레리아의 말에 레인은 의자를 끌어와 그녀 곁에 앉았다.
“좋아, 잘됐다. 너 이번 파견 임무에서 뭐 느끼는 거 없었어?”
“느낀 거요?”
생각만큼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레인이 답답하다는 듯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탕!
“너 습격받은 거 말이야.”
기밀로 하라는 당부를 들었기에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낮춰 강조했다.
“아…… 그거요. 하지만 레인 님도 함께 있었잖아요. 리암 경이랑 에단도.”
“너 그거 지금 웃으라고 하는 소리지? 근데 하나도 안 웃기거든? 누가 봐도 널 노린 거였어. 인정하기 싫겠지만, 현실이 그러니 빠르게 그냥 수긍하는 게 좋아.”
클레리아는 쓰게 웃어 버렸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너한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주신다고요?”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듣고 나면 백이면 백, 너한테 이로울 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절대로,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말해선 안 돼. 절대적으로 너만의 것이어야 해. 알겠어?”
레인이 워낙 이렇게 진지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클레리아는 그녀의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네…… 명심할게요.”
“너희 부모님에게도 말해선 안 돼. 대답해.”
“네.”
“에단 경도 마찬가지야. 절대로 안 돼.”
무슨 일 때문인지 알 길이 없어 클레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클레리아. 대답해. 이번만은 날 믿어 봐.”
진심 어린 말투.
곧은 눈빛.
레인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뭣 때문에 그러세요?”
* * *
“하하하, 그러게나 말이에요. 제가 동쪽 지방에 여행을 갔을 때는 어휴… 출발 날에 산적 주의령이 내렸지 뭐예요? 진귀한 걸 잔뜩 사 오려고 금화를 가득 싣고 출발했는데 말이에요.”
“세상에, 너무나 불안하셨겠어요.”
“하지만 저희 가문에 든든한 기사님들이 많아서 뭐, 어렵지 않게 쇼핑을 할 수 있었죠. 어찌나 감사하던지.”
“역시 이슬레이터 가의 기사님들이세요. 영애께서 아주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엘레나는 웃으며 자신의 서랍장으로 가서 맨 위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이게 그 동쪽 지방 여행 갔을 때 사 온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거랍니다.”
그녀가 뚜껑을 열자 화려한 보석들이 가득 박힌 목걸이가 드러났다.
“세상에, 정말 아름답네요. 이슬레이터 영애와 정말 잘 어울려요.”
“이게요?”
엘레나는 피식 웃으며 목걸이를 들었다.
“주변에서 그렇다고들 많이 듣긴 했지만, 제 생각은 다르답니다. 이 물건은 아직 제 주인을 못 만났어요.”
이어 엘레나는 목걸이를 천천히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여인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목 언저리에 대 주었다.
“보세요, 목걸이가 주인을 찾았네요.”
“네?”
“데포렌 영애에게 딱이에요.”
첸시아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제, 제가요? 그럴 리가요.”
“쑥스러워하지 말아요. 해 버릇하지 않아서 어색할 뿐이에요. 자, 돌아보세요.”
그렇게 말한 엘레나는 능숙하게 첸시아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방 한쪽에 있던 거울을 들고 와 보여 줬다.
“어때요? 내 말이 딱 맞죠?”
첸시아는 놀라고, 과분한 듯 손을 떨었지만, 한편으로 거울 안에 비치는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재되고 억눌려 있어야만 했던 그녀의 소유욕과 허영심이 한층 강해지고 있었다.
‘주인을 찾긴 개뿔…….’
그런 그녀를 보며 엘레나는 일순 눈빛이 싸늘해졌다.
‘적당한 하급 보석을 잔뜩 박아 화려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저 목걸이는 다른 고가의 귀금속을 사며 거저 받은 물건이지. 애초에 이런 데에 지식이 많았다면 저걸 보고 눈이 돌아갈 일도 없을 텐데. 쯧쯧.’
뭣도 모르고 겉모습에만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첸시아를 보며 엘레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뭐…… 공들인 거에 비하면 제법 빨리 넘어온 편이야. 벌써 우리 쪽 계획에 일조도 했고. 적당히 써먹고 위험하다 싶으면 뒤집어씌워서 버려야겠어.’
거울에 이리저리 목을 비춰 보는 그녀를 엘레나는 잠시 외면했다.
‘그때까지 레리안의 말대로 충실한 개로 만들어 두는 게 좋겠지.’
“이슬레이터 영애.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호의를 어찌 다 갚을까요. 이미 드레스도 많이 주셨는데.”
“제가 호의를 바라고 이러는 것 같나요? 섭섭하네요.”
엘레나가 과장된 표정으로 침울한 표정을 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영애는 고귀한 공작가의 공녀님이시잖아요. 저는 정말 보잘것없고, 이름도 거의 모르는 남작 영애일 뿐인데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프라이어스 영애도, 이슬레이터 영애도. 정말 공작가의 영애님들은 자애로우세요.”
첸시아가 울먹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은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클레리아의 얘기가 나오고 엘레나가 표정을 싸늘히 굳힌 건 눈치채지도 못한 채.
‘알긴 아니? 모르니까 클레리아를 또 들먹거렸겠지.’
속으로 중얼거린 엘레나는 따스하게 웃으며 첸시아의 손을 잡았다.
“난 첸시아가 좋아요. 좋아하는 이에게 베푸는 것에 신분이 뭐가 중요한가요? 그리고 여긴 나하고 있잖아요. 우리 딴사람 얘기는 하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첸시아가 환히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와요.”
엘레나의 말에 문이 열렸고, 레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아름다운 두 영애가 담소 중이셨군요. 인사드립니다. 캄스턴 후작 가의 차남 레리안 캄스턴입니다.”
“카, 캄스턴 영식?”
놀란 첸시아와는 달리 엘레나는 여유 있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캄스턴 영식,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하시더니 잘 다녀오셨나요.”
“네, 덕분에. 아…… 데포렌 영애?”
그는 첸시아의 앞에 가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주 잠시만 이슬레이터 영애를 모셔가도 될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 네. 물론이죠.”
상위 귀족 영애들은 물론, 영식들과도 말을 섞을 수 없던 첸시아는 레리안과 대화하는 것이 가히 영광인 듯 보였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영애?”
엘레나와 레리안은 그녀를 보고 싱긋 웃으며 테라스로 나갔다.
“그래서. 계획하던 건 어찌 되셨나요?”
“이런 이런.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이러다 데포렌 영애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공작 저의 저택이 그리 우습게 지어졌는 줄 아나요? 여기서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들릴 일 없어요.”
엘레나의 말에 레리안은 피식 웃었다.
“일은? 계획했다는 일…… 잘 치른 거예요?”
“뭐, 그렇지요. 아직 조금 더 만들어 보기는 해야겠지만, 출발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만족한 듯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리안이 모시고 있다는 그분은요? 그분께서는 만족하셨나요?”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며 묘하고도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만족하셨습니다. 흥미가 더욱 높아지셨다더군요.”
그 말에 엘레나 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이른 시일에 그분을 꼭 소개해 주어야 할 거예요. 이 라스칸트에서 공작가가 신경을 써야 할 정도의 거물이라니. 내가 만나 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큭,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레나의 마음에도 꼭 들 테니까.”
레리안은 방에 남겨진 첸시아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없는 동안 엘레나도 일을 잘 진행한 것 같군요. 싸구려 목걸이로 신뢰도도 높이고.”
“약간의 투자만 더 하면 아주 완전히 넘어올 거예요. 목숨까지도 바칠 정도의 충실한 개로 만들어야죠.”
레리안이 무섭다는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와…… 아주 무서운 소릴 하는군요? 엘레나?”
“그러는 레리안도 내 덕에 이미 데포렌 영애를 이용해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잖아요?”
그 말에 인정한다는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이내 뜨이는 그의 눈이 비열함을 가득 담은 채 첸시아를 향했다.
“위장 서류를 만들어 밝히긴 꽤 어려울 테지만, 추적한다 해도 배후는 데포렌 남작 쪽으로 밝혀질 겁니다.”
엘레나는 흡족한 얼굴로 부채질을 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