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렝터 자작령의 비밀.
클레리아는 영지에 들어서면서부터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생각보다…… 영지의 상태는 괜찮아. 그런데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날 선 시선으로 마을로 들어서는 그들을 노려봤다.
콜록 콜록
콜록
그들은 한결같이 잔기침이나 가래 섞인 기침을 달고 있었다.
클레리아는 레인의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전체적으로 전염성 감기와 폐렴으로 보여요. 결핵도 있을까요?”
“글쎄, 그건 영주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아. 그냥 봐서는 아직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살피던 그때였다.
‘응?’
순간 앞서가는 이아스가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놀라 에단의 갑주를 꽉 붙들자 그가 물었다.
“왜?”
“아니…….”
에단이 말을 걸자마자 이아스는 시선을 거뒀다.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지만, 클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러나 에단이 그런 그의 행동을 모두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클레리아는 알지 못했다.
“꽤 유서 깊어 보이는 저택이네.”
렝터 자작의 저택 앞에 서서 클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저택은 크기가 큰 편이었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정교한 조각상, 장식은 없었고. 단조로움에 깔끔한 외관이었다.
거기에 벽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이나 낡은 창문 등이 고택이 가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이아스 경, 고맙네.”
연륜이 꽤 있어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안에서 나와 그들을 맞았다.
이상한 점은 이아스라는 사람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기사의 분위기가 풍긴다는 점이었다.
‘강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저 사람은 기사다. 어째서 저런 사람 밑에서 이아스 같은 자가…….’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에단은 일단 의문을 접었다.
중년의 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일행에게 각각 악수를 청했다.
“저는 찰스 렝터 자작님의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 라밀 프레스라고 합니다. 자작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저택의 2층으로 향했다.
똑똑
“자작님. 치유사님 일행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수상한 이는 없겠죠?”
순간 개미 소리만 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라밀이 멋쩍게 웃으며 문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예, 신분이 확인된 치유사님들과 그 호위 기사님들이십니다.”
철컥
툭, 투둑, 철컥
꽤 많은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드, 들어오세요!”
유약함이 철철 묻어나는 목소리가 기쁜 듯 답했다.
문의 안쪽에서 그들을 맞는 이를 보고 네 사람은 놀란 듯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귀, 귀여워.’
나이는 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될까.
찰스 렝터 자작은 순진무구한 작은 두 눈에 포동포동하고, 살이 잔뜩 오른 귀여운 볼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앙증맞고 작은 입술까지.
키도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곰 인형처럼 나온 배가 인상적이었다. 두드릴 때마다 탄성을 자랑할 것 같은 모습에 실례를 무릅쓰고 마구 찔러 보고 싶을 정도로.
“어서 오세요, 치유사님들! 호위 기사님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큽…….”
얼굴을 구기며 웃음을 터트리려는 레인을 클레리아가 말렸다.
“웃지 마세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찰스 렝터 자작님을 뵙습니다. 시일에 맞춰 도착해야 했는데 저희가 오면서 조금 안 좋은 일에 휘말려 이렇게 늦었습니다. 아량을 부탁드립니다.”
“저런, 어떤 일에 휘말리셨기에. 그래도 이렇게 와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앉으세요.”
그의 권유로 앉자 라밀이 차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본 클레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 집사님은…….”
“아, 집사도 고용인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신뢰하는 사람만 곁에 둡니다. 라밀만 남은 게 그 증거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아스 경이라는 유능한 인재 또한 절 돕고 있으니까요.”
이아스라는 말에 네 사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한눈에도 의심스러운 작자였는데 자작은 그를 신뢰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분위기가 싸해짐을 느낀 라밀이 빠르게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차를 내왔다.
곧 겉치레적인 말들이 오갔으나 클레리아는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딘가 찜찜함만 남는 자작의 말, 그리고 그와 지나치게 친해 보이는 라밀과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아스까지.
탐탁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레인이 물었다.
“자작님, 오면서 대충 봤습니다만 영지 상태나 영지민 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요. 가벼운 전염성 감기와 폐렴이 돌고 있는 듯한데. 맞습니까?”
그녀가 묻자 갑자기 자작은 책상에서 뭔가를 꺼내 와 손에 잔뜩 발랐다.
“아아, 예. 그렇죠. 겨울로 접어들면서 감기를 앓는 영지민들이 많아졌습니다.”
리암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유심히 보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소, 소독약입니다. 하하.”
“감기라면 이곳에도 약국이 있고, 의사가 있을 것 아닙니까. 영지민 전체가 그걸로 호소장을 수도까지 보낼 일은 없는 것 같은데요.”
“아, 그것이…….”
그녀의 물음에 찰스가 우물쭈물하자 라밀이 대신 답했다.
“영지에 약이 떨어졌나 본데 그게 해결이 안 되어 그런 모양입니다. 별일이 아닌데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해 죄송합니다.”
레인은 순간 인상을 썼다.
“그럼 우리가 헛걸음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병증이 오래가는 이들이 있으니 치유사님들께서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레인과 클레리아는 서로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했다.
영지 약이 떨어진 데다 아픈 영지민들이 호소장을 보내 치유사까지 오게 됐는데 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얘기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뭐지? 대체?’
그렇게 생각할 때 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 오느라 고생 많으셨을 테니 이만 쉬시고 내일부터 영지민들을 봐 주십시오. 라밀, 방을 안내해 드리세요.”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바로 사람들을 봤으면 합니다. 진료에 필요한 천막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안됩니다!”
찰스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클레리아 일행의 시선이 꽂히자 찰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런 물건도 없을 뿐더러 오늘은 날이 늦었습니다. 그러니 내일부터 해 주십시오.”
“하지만 영주님, 상황이 좋지 않다면 한시가 급한 일일…….”
“내일부터 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절 무시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찰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자작의 이상한 태도에 적잖이 놀란 클레리아가 대꾸했다.
하지만 찰스가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모두가 숨죽였다.
“그럼 제 말에 따라 주십시오. 여기는 제가. 이 찰스 렝터가! 영주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무시하지 마십시오! 저는…… 영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지막 말에 클레리아 일행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라밀이 나서 찰스의 등을 쓸어 주었다.
“이분들도 아십니다. 다른 뜻이 있어 말씀하신 게 아닐 겁니다.”
그가 변명에 동조하라는 듯한 눈치를 줘 일단 시선을 교환한 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영주이신 렝터 자작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일부터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찰스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처음 봤던 순둥순둥한 인상으로 돌아와 말했다.
“펴, 편히 쉬십시오.”
* * *
방 두 개를 배정받고 각각 에단과 리암이, 레인과 클레리아가 함께 묵게 되었다.
똑똑
“네?”
클레리아가 대답하자 라밀이 옷가지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잠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식당에 음식을 마련해 두었으니 조금 뒤 편한 복장으로 오셔서 드시면 됩니다.”
“저기…… 설마 음식도 기사님께서 하신 건가요?”
클레리아의 물음에 라밀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그럴 재간까지는 없습니다. 마을에 내려가서 솜씨 좋은 곳에서 사 왔습니다. 좋은 음식을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몇 개월째 자작님은 그렇게 들고 계셔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머지 필요한 것은 이아스 경에게 말씀하십시오. 전 자작님을 전담으로 보필하고 있어서. 그럼.”
‘또 이아스?’
위계질서가 엉망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상하다 느끼지 않는지, 라밀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걸 지켜보던 레인이 말했다.
“나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야? 파견 많이 나가 봤지만, 이런 곳은 늘 마무리가 안 좋았는데. 라밀이란 사람은 그렇다 쳐도 이아스라는 사람까지 성이 아닌 이름에 경자를 붙이는 걸 보면 우리처럼 기사와 엄청 가깝게 지낸다는 뜻인데 누가 봐도 그 남자는 껄끄럽잖아? 왜 그런 사람을 친근하게…….”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위화감.
자작의 태도도 뭔가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고, 영지 상태가 꽤 괜찮음에도 사람들은 경계가 심하다.
‘뭔가 있어.’
해소되지 않은 찜찜함을 안은 채 클레리아가 겉옷을 벗고, 치유사 정복을 갈아입으려 단추를 풀었다.
“아, 잠깐 난 주변 좀 보고 올게.”
“레인?”
느닷없는 산책 선언에 클레리아가 바라봤으나 레인은 이미 나가 버린 뒤였다.
이제 식당으로 갈 건데 주변을 본다니? 왜 그러지?
클레리아는 고개만 갸웃거리며 레인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 * *
“다행이다, 임무 내내 옷도 못 갈아입는 건가 싶어서 우울했는데.”
리암은 라밀이 주고 간 옷을 보며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가장 안쪽 보호구는 벗지 마.”
에단의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암은 입을 ‘쩝.’하고 다셨다.
“역시 그래야겠지? 여기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에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2층으로 이어진 중앙 계단 벽에 있는 초상화 봤지?”
“응, 어째 지금 렝터 자작하고는 생긴 게 판이하던데.”
“선대 렝터 자작이겠지. 보아하니 지금 찰스 렝터 자작은 손자인 것 같고, 작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건이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에단은 시선을 낮게 내리깔며 조금 전 봤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마음에 맞는 이들만 곁에 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고용인을 극단적으로 두지 않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자작과 라밀 경은 저택 내에서만 칩거하는 것 같았고, 영지 업무를 이아스가 모두 담당하는 모습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연일 리 없어.’
리암은 심각해져 있는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일단은 뭐라도 좀 먹자. 우리 치유사님들 지켜 내려면 우리도 체력은 있어야 하니까.”
그의 말에 에단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으로 내려오자 이미 각 자리에 식사는 차려져 있었다.
“드신 뒤 그릇은 주방 설거지통에 넣어두시기만 하면 됩니다. 고용인들이 없어 그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밀은 간단히 안내를 마치고 사라졌다.
“어? 레인? 주변 보고 온다면서요?”
산책 간다던 레인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 그러려고 했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미리 와서 앉아 있었지. 자자, 그런 거 신경 끄고 얼른 먹자.”
뭔가 이상했지만, 클레리아 역시 배가 고픈 터라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와…….”
따뜻한 우유 수프와 빵. 훈제된 햄 몇 조각과 풍미 가득한 치즈. 거기에 으깬 감자와 반숙 달걀 프라이가 접시를 장식했다.
화려한 만찬까지는 아니었지만, 든든하고 정갈한 식사였다.
“맛있어.”
거기에 맛도 훌륭한 편이라 클레리아는 수프를 한 입 먹고는 두 눈이 하트로 변해 버렸다.
추위에 산길을 오래 걸었던 것도 이 식사가 풍요롭게 느껴지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흐르고.
그릇을 놓아두는 데에도 레인은 어찌나 재빠른지 몰랐다.
“나 먼저 올라간다!”
하고 외친 후, 그녀는 접시를 거의 던지듯 설거지통에 넣어 두고, 2층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오늘따라 레인 님이 좀 이상하시네.”
그녀가 사라진 곳을 함께 보던 에단이 클레리아를 돌아보았다.
“방은? 불편한 곳은 없고?”
“응, 관리가 잘된 방이야. 이렇게 편한 옷도 내주셨고.”
에단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너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이곳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응, 알아.”
“잘 때 방문 제대로 걸어놓고 자고. 문고리에 컵이라도 올려놔.”
그 말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클레리아가 수긍했다.
“응, 그럴게.”
어릴 적, 에단은 칼리스터 공작과 함께 자신들의 영지로 향하던 중 습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 신경이 곤두서 그는 엘레나와 클레리아에게 방문 손잡이에 컵을 올려 두고 자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조금 자란 뒤에는 자연스레 하지 않아서 그 말 더는 들을 줄 알았는데.’
그때 당시 자칫 죽을 위기를 겪은 그였기에, 클레리아는 그 시절 자주 하던 말을 하는 에단이 마음에 걸렸다.
당부 뒤 먼저 계단을 오르려던 에단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클레리아를 보고는 다시 내려왔다.
“왜 그래?”
“그 말…… 이제 안 할 거로 생각했었거든.”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그는 피식 웃으며 클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공포에 질려서 말하는 거 아냐. 정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그때 같은 꼬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마음이 놓여 클레리아 역시 그를 따라 빙긋 웃어 버렸다.
“어, 저기…… 방해해서 미안한데 저 좀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그때 리암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그를 보고 갑자기 낯빛이 확 변한 에단은 쿵쿵거리며 클레리아를 붙들고 2층으로 갔다.
“쉬어.”
“어…… 응.”
그녀를 문 앞에 데려다주고 에단은 거칠게 방문을 닫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클레리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따라 올라온 리암이 다시 인사했다.
“클레리아 님 오늘은 편한 침대에서 푹 쉬십시오.”
“네, 리암 경도요.”
그렇게 인사한 뒤 들어왔을 때였다.
“야! 문 왜 잠갔어!”
“시끄러워, 밖에서 자.”
한동안 리암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와 애절하게 비는 목소리가 번갈아 복도를 울렸다.
* * *
다음 날 역시 비슷한 아침 식사가 마련되었고, 클레리아 일행은 부족하지 않은 식사를 마쳤다.
한창 식사 중에 클레리아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레인 님, 어떻게 그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응? 나 배고프면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
클레리아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미 레인은 자리에 없었다. 이상히 여겨 준비하고 나오니 벌써 정복을 갖춘 그녀가 식당에 와 있던 것이다.
‘레인 님이 이렇게 밥에 집착이 크셨던가? 노숙할 때는 이러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이상했지만, 레인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따지고 들 수 없어 클레리아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자, 식사를 다 마치셨으면. 이제 마을 사람들을 보러 갈까요?”
클레리아의 말에 리암과 에단,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마을에 다다라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약국이었다.
“네, 이미 동난 지 오랩니다. 수급도 되질 않고 있고요.”
“그럴 리가요. 자작님께 말씀드리면 충분한 양을 구해다 주실 텐데요?”
클레리아의 물음에 약사는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러자 약사는 앙칼지게 노려보며 대꾸했다.
“쯧쯧, 그렇게 궁금하시면 그 자작에게 우리 대신 좀 물어봐 주십시오. 우리도 궁금하니까요! 몇 달째 우린 그 사람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날카롭게 반응하는 약사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찰이 필요한 영지민들 전부 교회로 오라고 해 주세요.”
약국을 나오자 레인이 투덜거렸다.
“뭐야, 자작이랑 대체 무슨 일이 있는데 우리한테 화풀이야? 게다가 같은 영지에 있으면서 몇 달 동안 아무도 자작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요. 그 일은 우선 제쳐 두고, 일단 오늘은 아픈 이들부터 회복시키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조촐히 차린 진료소에는 조금 지나자 마을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처방해 줄 약도 없었기에 오로지 그들의 치유력에 의존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목이 많이 부었네요. 많이 아팠겠구나, 아가. 오늘부터는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아이의 목에 닿은 클레리아의 손에서 빛이 났다.
그러자 울먹이던 아이는 놀란 얼굴로 곧 침을 꿀꺽 삼켰다.
“안 아파. 엄마 안 아파.”
“감사합니다. 콜록.”
“어머님도 이리 오세요.”
그렇게 거듭되는 진찰로 마을 사람들은 감기뿐이 아닌, 다양하고 비교적 가벼운 병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레인과 클레리아는 알게 되었다.
면역력 약화로 생기는 알레르기나, 수포. 소화 기능 장애와 가벼운 영양실조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퍼져 있었다.
병에 걸렸다가 나았음에도 약해진 몸으로 인해 다시 병증에 걸려 더욱 약해지는 과정이 반복되어 사람들 사이를 도는 듯했다.
“가서 끼니 잘 챙겨 드시고 푹 주무셔야 해요. 내일 한 번 더 나오시면 많이 회복되실 거예요.”
클레리아는 마지막 환자에게 당부한 뒤 허리를 두드리며 폈다.
정오가 되기 전부터, 시작된 진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오늘 못 하신 분들은 죄송하지만, 내일 봐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클레리아는 남은 이들에게 진통제를 나눠 주었다.
투덜거리는 이도,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막바지에 합류한 이아스와 그 기사단을 보고는 사람들은 별말 없이 돌아갔다.
“이상해, 단순한 감기 같은데 말을 들어 보니 걸렸다가 다시 걸린 이들도 많고. 대체로 면역력이랑 기력이 떨어져서 빨리빨리 낫지 않는 것 같아. 더 이상한 건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다들 영양 부족이었어.”
레인이 뻐근한 팔을 풀며 말했다.
클레리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외양은 괜찮은데, 하나같이 영양 불균형이었다.
“그러게요. 제가 본 환자들도 마찬가지라 병이 낫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때였다.
한 아이가 클레리아의 치맛자락을 잡고 당겼다. 그녀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응? 왜 그러니?”
“있죠, 언니. 자작님한테 욕심부리면 안 된다고 전해 주세요.”
아이는 고사리손을 모아 귀에 속삭였다.
“테, 테스! 얼른 와! 엄마가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그 순간 아이의 엄마가 사색이 되어 낚아채듯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
그것을 지켜보며 클레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작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그런데 아이의 말보다 더 이상한 건…….’
클레리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뒤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이아스를 느꼈다.
‘아이 엄마는 이아스 경을 보고 사색이 돼서 도망치듯 가 버렸어. 왜지?’
그녀는 가만히 치맛자락을 그러쥐었다.
‘아무래도 자작 저를 뒤져 봐야겠어.’
* * *
다시 맞이한 저녁은 유난히 조용했다.
리암과 레인이 가끔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에단과 클레리아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이 없었다.
“흐음…… 나 먼저 일어선다.”
이번에도 역시나 재빠르게 레인이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저, 저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리암 역시 어제 에단에게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의 그런 반응은 관심 없다는 듯 조용히 식사를 끝마친 클레리아가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고 돌아섰을 때였다.
“클레리아.”
“응. 왜? 에단?”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혼자서 이상한 생각하지 마. 돌아다니지도 말고. 위험한 짓은 더더욱 안 돼. 하지 마. 알았지? 무슨 일이 있으면 날 꼭 불러.”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클레리아는 난처하게 웃었다.
“나 혼자 뭘 어쩌겠어. 그리고 여긴 자작님의 저택인데 뭐가 위험하려고.”
“무슨 뜻인지 알잖아.”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안 할게. 걱정 안 시킬게. 그만 얼굴 펴, 에단. 응?”
그는 그제야 안도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응. 그럼 이제 우리도 올라가자.”
그렇게 앞서 걷는 에단을 바라보며 클레리아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에단. 나…… 자작님의 저택을 좀 둘러봐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게.’
클레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애먼 짓 하지 않겠다고 꼭 약속할게. 이번만은 이해해 줘.’
* * *
“크릉…… 크릉…… 크엉, 컥!”
낮게 코를 골던 레인이 숨이 막혔는지 컥컥거렸다.
잠들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이불을 쓰고 있던 클레리아는 움찔, 놀라 빼꼼히 눈만 내놓았다.
“푸후…….”
몇 번 입맛을 다시던 레인은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클레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향하고 난 뒤, 어언 4시간.
자정을 알리는 괘종 소리가 들린 지도 꽤 지났으니, 저택에 있는 이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
클레리아는 조심조심 일어나 초를 들었다.
“음냐…….”
성냥을 들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다시 흠칫 행동을 멈췄다.
잔뜩 긴장한 채 뒤로 돌자 다시 깊게 잠에 빠진 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레인 님, 심한 건 아닌데 잠버릇이 있으시네.’
자작의 저택에 온 뒤 줄기차게 먹고 자기만 하는 그녀를 보며 클레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최대한 문고리 소리를 줄여 닫은 뒤 복도로 돌아섰다.
커다란 창문에 비치는 푸른 달빛이 그대로 복도를 비춰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최대한 빠르게 살피고 돌아오는 거야. 아무리 방문객이라도 외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며 뒤지는 모습은 보기 좋지는 않을 테니.’
몇 번의 심호흡 뒤, 클레리아는 발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돌아다니길 몇 분, 클레리아는 자작의 방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무슨 일이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은밀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라밀 경. 영지에 약이 아직도 없습니까?”
“저도 몰랐는데 그런 모양입니다. 영지민들이 계속 병이 나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이아스 경이 잘 해결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는 했는데…… 뭐 어찌 됐든 치유사님들까지 오셨으니 더 이상 불만은 나오지 않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히 이아스 경이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겠지요?”
“그가 다 해결해 줄 겁니다.”
찰스와 라밀의 대화였는데 이상했다. 뭔가 자신이 영주라는 걸 강조하던 말과는 달리, 그는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영지 일을 이아스의 말에 모두 의존해서 믿는 걸로 보였다.
‘대체 뭐지?’
의구심만 커진 채 클레리아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방을 나섰던 목적이 따로 있던 차였기에 클레리아는 서둘러 집 안 곳곳을 뒤졌다.
철컥
‘또 잠겼어. 사는 사람의 수보다 방이 많으니 안 쓰는 방은 잠가두는 게 편의상 더 좋을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집무실만 쓰는 건 아닐 텐데.’
저택 대부분의 방은 이상하게도 잠겨 있었다. 아무리 고용인들이 적다고는 하지만, 저택의 규모에 비하면 사용하는 방의 개수가 지극히 적었다.
클레리아는 1층으로 내려왔지만, 1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만 방으로 돌아가야 할까?”
2층을 올려다보며 고민했으나 아이가 했던 말이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있죠, 언니. 자작님한테 욕심부리면 안 된다고 전해 주세요.]
‘욕심이라…….’
그녀는 마지막 남은 끝 방 쪽을 바라봤다.
저택의 가장 끝에 자리해 서재나 다른 용도로 쓰이는지 꽤 큰 문이 자리한 곳이었다.
‘이왕 다 확인한 거 마지막 한 곳도 확인해서 문제될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클레리아는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더 크네.”
지금까지 확인했던 문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컸다.
뭔가 특별한 곳으로 쓰이는지 문에도 조금 더 화려한 양각이 새겨져 있었고.
클레리아가 문을 열어 보려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서늘하다 못해 살이 베이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목덜미에 꽂혀 있음을 느끼며 클레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돌아서시죠.”
‘당황하면 안 돼. 티 내지 마.’
클레리아는 소리 죽여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어 천천히 돌아서 자신을 붙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이아스 경!’
스산한 복도에서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는 그의 눈은,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욱 생기가 없어 보였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려 치맛자락을 살며시 쥐었다.
‘이 사람…… 위험해.’
그녀가 위협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이아스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어둠 속에서 마주친 이가 빛이 꺼진 눈으로 기묘하게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
소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수도에서 파견을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자작님의 저택입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시다니……. 수도의 여인들이 즐기는 새로운 취미입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그럼 치유사님께서 유별난 행동을 하고 계시다는 것에 동의하시겠군요.”
“…….”
꼭 쥔 손안에 땀이 가득 찼다.
‘왜 이 사람은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거지? 기사들이 쓰는 건물은 별관에 있을 텐데.’
“다시 한 번 묻죠. 자작님의 허락을 받고 방을 확인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방을 확인하고 다닌 게 아닙니다.”
“오호, 그럼 뭘 하고 계신 거죠?”
“그건…….”
“거짓을 고하면…… 아무리 치유사님이라고 해도 봐드릴 수 없습니다.”
이아스가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점차 다가왔다.
그에게 위협을 느끼며 조금씩 주춤주춤 클레리아가 뒷걸음질 칠 때였다.
“그러게 자기 전에 분명 화장실은 다녀오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순간 이아스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긴장한 둘의 눈이 뒤를 향했을 때, 그곳에는 에단이 서 있었다.
“에단?”
“이렇게 새벽에 화장실 가신다고 무작정 나가시면 지키는 기사도 피곤하단 말입니다. 중간에 깨야 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아십니까?”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이아스를 지나쳐 클레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가 무사한지 한눈에 훑었다.
“그리고 이쪽은 화장실이 아닙니다. 잠에 취해서 이상한 곳을 헤매다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나이가 몇인데 다 큰 숙녀께서 그런 실수를 하시려고.”
순간 너무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에 클레리아가 발끈했다.
“그, 그런 실수 안 해요!”
어깨를 으쓱한 그가 이아스를 바라봤다.
“이아스 경에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치유사님께서 잠에 취해 돌아다니시면 장소 분간을 못 하셔서 말이죠. 쉬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에단은 빠르게 클레리아의 손을 잡고 지나쳤다.
“잠에 취하셨다, 이 말씀입니까?”
역시 그냥 보내 줄 리 없다는 듯 이아스가 물었다.
“네 이 눈을 좀 보십시오. 어디 멀쩡한 눈입니까? 피곤함에 절은 눈이지.”
에단은 싸늘하게 답했지만, 그의 말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간 이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터질 듯한 긴장감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클레리아는 그 기운에 저도 모르게 뒤에서 눈을 꽉 감고 에단의 팔을 있는 힘껏 붙들었다.
“피곤함…… 이군요.”
이아스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천천히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자작님의 저에 있는 동안 오해받을 행동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클레리아를 한번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걸음을 뗐다.
“아, 그런데 말이죠.”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이아스가 발을 멈췄다.
“기사님께서는 이런 야밤에 호위하실 때도 검을 지니고 다니시나 봅니다. 여기 자작님의 저에서 무엇이 그리도 위험하기에?”
그의 말에 에단은 눈을 내리깔며 허리춤에 찬 검을 쥐었다.
“이거 말입니까? 그 어디서라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겠다고, 누구하고 약속해서 말이죠.”
빙긋 웃으며 답하는 그를 보며 이아스는 다시 복도를 걸어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에단은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단, 어떻게 알고 여기에……?”
클레리아가 겨우 입을 뗐을 때, 그는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2층 방 앞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 했지? 저 이아스라는 녀석 정말 위험한 놈이라고.”
그의 다그침에 클레리아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었어.”
“그런 게 있다면 진작 말해서 같이 움직였어야지.”
“혼자가 더 들키지 않을 것 같았어. 미안해.”
사과하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제때 발견해서 다행이야.”
“응, 무서웠어. 그 이아스라는 사람…….”
클레리아는 그의 기묘했던 웃음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 사람 내가 방을 확인하고 다녔다는 걸 알고 있었어.”
에단의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돌아다니던 거 처음부터 모두 지켜본 거야.”
클레리아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은 방에 가서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재깍 나랑 리암이 갈 테니까.”
“응. 고마워, 에단.”
“고맙긴.”
그렇게 들어가려던 클레리아가 다시 에단을 돌아봤다. 가슴이 진정되자 뒤늦게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근데 나 아까 서 있던 그곳에서 묘한 냄새를 맡았어.”
“묘한 냄새?”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냄새였는데?”
“식량과 약품 냄새. 그 둘이 섞여서 함께 났어.”
* * *
다음 날 교회에서는 다시 진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벽에 있던 일 때문인지 클레리아와 에단은 특별한 대화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무슨 일 있었나?”
“글쎄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레인과 리암이 속닥이며 말을 주고받아도 어딘가 딱딱히 굳은 클레리아의 얼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으나 리암과 레인도 곧 입을 다물었다.
쿨럭 쿨럭
묵직한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은 할아버지와 그 보호자로 보이는 아들이 클레리아의 앞에 앉았다.
“자, ‘아’ 해 보시겠어요? 기침 소리가 좋지 않은데 언제부터 하셨나요?”
“3주는 넘으셨어요. 증상이 호전됐다가 심해지길 벌써 세 번째인데, 객혈도 하십니다. 심한 악취도 나고요.”
“피의 색은 어땠죠? 검붉었나요?”
“아뇨, 선명한 선홍빛이었습니다.”
클레리아가 천천히 그의 목 쪽에 치유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노인의 폐에 작게 맺혀 있는 고름 덩어리가 느껴졌다.
‘폐농양이야.’
“6주가 되기 전에 진찰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일단 면역력도 떨어지셨고, 나이도 있으시니 치료 후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클레리아의 손 밑에서 희미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비교적 가벼운 병증만 치료하다 제대로 치유력이 필요한 환자는 처음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클레리아에게 꽂혔다.
진중히 감은 그녀의 눈꺼풀이 간혹 파르르 떨리길 몇 분.
곧 클레리아는 눈을 떴다.
“고름은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오늘부터는 기침도 없다시피 줄어들 거고, 불편하시던 것도 좋아질 거예요. 영양가 있는 식단으로 잘 챙겨 드시고, 따뜻한 물을 드셔서 부어 있는 기도를 진정시켜 주세요. 술 같은 건 절대 안 돼요. 아셨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아들은 노인을 부축하려다 갑자기 자신이 메고 왔던 가방을 들고, 이아스와 그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돌발 행동에 클레리아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팍!
이아스를 노려보던 남자는 있는 힘껏 가방을 그에게 던져 버렸다. 연달아 안에 있던 무언가가 터지며 일대를 하얗게 덮었다.
순간 몸을 움츠렸던 클레리아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와 이아스를 바라봤다.
남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대며 그를 쏘아봤다.
“영양가 있는 식단? 지금 치유사님이 하는 말 똑똑히 들었소? 영양가 있는 식단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재배한 식량을 모조리 다 강탈하고 이딴 밀가루 몇 포대 배급하면 다요? 밀죽만 먹어서 대체 어떻게 버티라고!”
‘강탈? 밀죽?’
순간 클레리아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치유사님, 당신들이 그 머저리 같은 자작 놈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자신은 저택에 꽁꽁 숨은 채 저 남자를 내세워 우릴 갈취하고 있단 말이오!”
“맞아요! 한창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아이에게 밀가루 푼 물만 먹이고 있다고요!”
“당신들이 잠든 밤에 기사 몇몇만 풀어서 낚시하거나 들에서 뜯은 나물들도 다 강탈해 갑니다! 기사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목숨만 부지할 수 있으면 답니까? 사람답게 살게 해 달란 말입니다! 우리가 호소장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치료도 받지 못했을 거라고요!”
남자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참았던 사람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아스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렝터 자작님의 아량을 이런 식으로 갚다니. 영지민이 식량을 제대로 구비해 놓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배급으로 바꿔 겨울을 나기 좋게 만드셨을 뿐이다. 지금 외부인을 들여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건가?”
순간 이아스의 눈이 번뜩였다.
이아스가 고갯짓하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나서서 남자에게 폭력을 행사해 제압했다.
“으억!”
“무슨 짓이에요, 이게!”
클레리아가 놀라 쓰러진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십시오. 자작님의 의도를 음해하는 자는 처벌해야 합니다.”
“이분이 기사님께 한 행동은 매우 무례했지만, 이 말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아스의 눈썹이 꿈틀댔다.
“마을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영양 실태가 나쁩니다. 이들 말대로 밀죽만 먹었다면 충분히 가능해요. 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대로라면 병이 낫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이어진 상황으로 보기에도 정황상 충분하고요.”
이아스는 냉랭한 시선으로 클레리아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설명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작님은 그러신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음해일 뿐입니다.”
클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둘의 대치를 바라보는 에단 역시 시시각각 눈초리가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언제라도 검을 뽑기 위해 그의 손이 검 자루를 그러쥐었다.
‘식량과 약품 냄새……. 분명 그것과 관련이 있어.’
“물러서지 않으면 치유사님 또한 공무 방해로 간주하겠습니다.”
이아스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몸이 떨렸지만, 클레리아는 지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줬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반드시 밝혀야 해. 밀리지 마, 클레리아. 넌 귀족으로서, 치유사로서 이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어!’
결심한 듯 그녀는 치유사를 상징하는 정복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바닥으로 벗어 던졌다.
안에 기본 원피스를 갖춰 입었다지만, 성인 여성으로서 지금 모습이 부끄러울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부릅뜬 눈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뿜어냈다.
“이아스 경, 지금 당장 렝터 자작에게로 가서 프라이어스 공작가가 정식으로 렝터 자작 저를 방문할 거라고 알리세요.”
“……클레리아?”
레인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클레리아의 눈은 이미 불을 머금은 채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십니까?”
이아스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묻자 평소와는 전혀 다른 클레리아가 눈을 부릅뜨며 명령했다.
“이제부터 나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는 치유사가 아닌 프라이어스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로 렝터 자작령을 확인하겠다. 당장 렝터 자작에게 아뢰도록!”
갑작스럽게 뻗어 나오는 기백에 순간 이아스는 움찔했다.
‘뭐지? 이 계집? 어제는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던 주제에 대체 어디서 이런 위압감을?’
이아스는 머릿속을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못마땅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몇의 기사를 데리고 가는 것을 확인한 클레리아가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 경. 칼리스터의 후계자로서 이번 일에 동참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 말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기꺼이. 나의 레이디.”
클레리아는 피식 웃으며 레인과 리암을 바라봤다.
“리암 경, 여길 부탁해도 되겠지요?”
그러자 그는 남아 있는 이아스의 부하들을 보며 웃었다.
“조무래기쯤 일도 아니죠.”
클레리아는 마지막으로 레인을 향해 말했다.
“레인 님, 사람들을 부탁드릴게요.”
“그래, 다녀와.”
레인이 웃으며 답하자 클레리아와 에단은 함께 말에 올랐다.
“핫!”
에단의 기합과 함께 두 사람은 빠르게 자작의 저로 향했다.
“온실 속의 화초인 줄만 알았더니…….”
레인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 * *
“치, 치유사님이? 대체 어째서?”
“모르겠습니다. 정 불쾌하시다면 폐하께 정식 항의를 하실 수도…….”
딱딱하게 보고하는 이아스를 보며 찰스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그냥 마을 사람들만 치료해 주고 가면 될 걸 굳이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방문하겠다는 거지?’
[네놈은 태도가 글렀어.]
[자작님도 인정 안 하시는 후계자가 무슨 후계자야? 당신이 여길 잘 통치할 수나 있을 것 같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자작님이 눈을 감으실 때까지 그리 걱정을 하신 게지.]
[저희는 찰스 렝터 님 같은 분을 모시려고 기사가 된 게 아닙니다. 저흰 선대 자작님 같은 분이 아니면 모실 수 없습니다.]
과거의 치욕스러웠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찰스는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또다. 그놈의 선대 자작, 선대 자작! 할아버님이 통치를 잘하셨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렇게 되어 주려고 노력했잖아! 꼴도 보기 싫은 놈이라고 해서 눈앞에서 사라져주고, 뛰어난 이아스 경을 통해서만 통치하겠다는데 이제 와서 뭐가 불만인 건데!’
그는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급히 1층으로 향했다.
1층 복도 제일 안쪽, 불필요한 것들을 쌓아 두는 자작 저 금고 앞에 있는 라밀과 클레리아, 에단을 발견했다.
“라밀? 치유사님? 왜 그곳에 계십니까?”
그의 물음에 클레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프라이어스 영애라고 부르십시오. 렝터 자작. 이곳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찰스는 멈칫했다. 이아스 경이 관리하는 곳이었다.
‘함부로 손대시면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걸로 간주하고 영지민들을 돌보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신경 쓸 일이 많아 힘든데 자작님까지 믿어 주지 않으시면, 제가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하던 이아스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이아스 경이 없다면 영지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자신은 매번 욕만 먹는 머저리였는데…….
찰스는 펄쩍 뛰며 노발대발 화를 질렀다.
“이, 이건 모욕입니다!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 하셔도 이렇게 개인 사유지를 명령으로 개방하시는 건 귀족 모욕입니다!”
“이곳에서 비리가 의심되는 흔적을 발견했으니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확인 뒤, 오해였다면 프라이어스 공작가의 이름으로 정식 사죄하고 보상하겠습니다.”
“그, 그래도…….”
찰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보는 클레리아의 눈이 더욱더 싸늘해졌다.
“렝터 자작. 자작이 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직접 열까요. 이건 명령입니다.”
“히익…….”
그녀의 기세에 눌린 찰스는 결국 바들바들 떨며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렇게 문으로 다가간 그는 덜덜 떠는 손으로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
“여세요.”
클레리아가 차갑게 다시 한 번 내뱉고 나서야 그는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커다란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규모의 방 안에 온갖 빵, 생선, 육류, 조미료, 곡식 등이 쌓여 있었다.
거기에 한쪽에는 갖은 종류의 천이 보관되어 있고, 약국에 있어야 할 약들이 온통 벽 한쪽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서 약품 냄새랑 식량 냄새가 같이 났던 거였어.’
클레리아는 분노로 차갑게 식은 손을 천천히 쥐었다.
에단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밀과 찰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이게 왜 대체 여기에?
못 볼 걸 봤다는 듯 그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말도 하지 못했다. 낯빛을 보아하니 그들도 이런 경위를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 이게 다 어찌된 겁니까? 이아스 경?”
찰스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에 있는 이아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노골적인 불쾌감만을 드러내며 인상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게 다 뭐란 말입니까? 당신이 관리한다며 다른 사람은 일절 접근도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작님과 나조차도!”
라밀이 다시 한 번 다그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지에서 나온 식량 및 생필품과 비품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왜 여기 있느냔 말입니까!”
“영지 업무를 보라 하셨잖습니까.”
그의 무뚝뚝한 말에 찰스와 라밀이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제가 이 자작령에 왔을 때 영지민은 어처구니없게도 자작님을 하대하고 있었고, 저택의 고용인들 역시 항의와 무시의 일환으로 일제히 그만둬 버렸죠. 저는 자작님의 위신을 높였을 뿐입니다.”
철썩!
그 순간 창고를 울리는 소리에 모두의 어깨가 움찔했다.
클레리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사이에 끼어들어 이아스의 뺨을 손으로 내리친 것이었다.
“어떻게 눈 하나 꿈쩍 않고 지금 자작님을 위해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러고도 당신이 기사인가요?”
어찌나 분에 겨운지 주먹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아스는 서늘하게 노려보며 입가에 밴 피를 닦을 뿐이었다.
클레리아의 끼어듦으로 조금 제정신을 차린 찰스가 그녀를 뒤로 물리고 이아스 앞에 섰다.
“이런 연유가 뭡니까? 당신은 날 돕기 위해 왔던 게 아닌가요?”
“성실히 돕고 있던 중입니다. 영지민들이 우습게 여기며 땅에 떨어진 당신의 위신을 그대로 뒀다면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저들은 자작 저로 쳐들어와 당신을 끌어내리고 죽여 재산을 강탈했을 겁니다. 말 그대로 봉기란 말입니다.”
찰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지, 아니면 자신도 그 지경까지 생각은 해 봤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늘어뜨렸던 손을 주먹 쥐었다.
“그렇다고 난 그들을 강탈하길 원했던 게 아니에요. 호소문으로 치유사님이 왔을 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신은 내게 말했지만……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군요. 전 당신이 잘하고 있을 줄 믿고 있었는데…….”
그의 말에도 이아스는 조금도 뉘우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시각각 더욱 냉랭해질 뿐이었다.
“이아스 경, 별관으로 기사들과 함께 돌아가세요. 당신의 처분은 일단 영지 상태를 파악한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침통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자작을 대신해 라밀이 말했다. 그러자 이아스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났다.
전혀 반성의 모습이 없는 그를, 에단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봤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클레리아가 입술을 열었다.
“이아스 경의 잘못이 크다고 해도, 실질적인 책임이 자작님께 없는 건 아닙니다.”
그녀의 따끔한 질책에 찰스가 고개를 숙였다.
“영지를 제대로 돌볼 생각이 있었다면 보고라도 확실히 들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미도 보이질 않았어요. 이아스 경이 제멋대로 휘두르는 걸 라밀 경도 모르는 것 같더군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겁니까?”
클레리아가 조곤조곤 채근하자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던 찰스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영지민들이 무서웠습니다. 이아스 경의 말대로…… 그들이 날 죽일 것만 같았으니까요.”
터무니없는 소리라 여겨 흘려들었던 말을 그가 다시 꺼내자 클레리아와 에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도…… 나도 나름 노력했습니다! 운영 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 인정하지 않았고, 할아버님의 기사들도 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멸시하고 조롱할 뿐이었죠. 이런 내가……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제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그를, 라밀이 다가와 다독였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모든 건 제 잘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잘 독려해서 자작님의 말을 따르게 해야 했는데……. 기사들도, 고용인들도. 영지 업무를 맡던 다른 이들도 자작님께 반대하다 한꺼번에 그만두는 바람에 저와 자작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단이 되물었다.
“한꺼번에 그 고용인들이 전부 그만뒀단 말입니까?”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정말 이아스의 말대로 자칫 봉기로 이어져 난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도 개입할 것이고, 그 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작에게도, 영지민에게도 끝이 좋을 리는 없었다.
“사람들과 대화하세요.”
클레리아의 말에 찰스가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영주는 권위와 모범을 보여야 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영지민들에게 충성과 존경을 이끌어 내는 일 역시 영주로서의 책임이에요.”
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그의 경우는 나름의 노력했음에도 클레리아가 말한 것들을 얻지 못한 케이스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영지민들의 편견 없는 자원이 받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결국은 서로가 도와야만 공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녀의 말에 뭔가 묵직한 분위기가 방안에 감돌았다.
“그 어떤 나라더라도 왕과 국민. 서로가 없으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어요.”
그녀의 나직한 말과 함께 찰스의 흐느낌이 방을 메웠다.
* * *
렝터 자작과 마을 사람들은 교회 앞에서 마주 섰다.
분노한 영지민들은 당장에라도 그를 향해 달려들 기세였고, 그동안 패악을 방관한 것에 면목이 없는 렝터 자작은 몸을 잔뜩 움츠려 말았다.
“자작님께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클레리아의 말에, 낮에 밀가루 포대를 던진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을 말입니까! 저런 놈은 당장 잡아가 주십시오!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놈!”
퍽!
그 순간 자작을 향해 돌이 날아들었다.
비틀거리는 찰스를 향해 다시 한 번 성난 영지민의 고함이 이어졌다.
“폐하께 데려가서 혼쭐을 내주세요!”
퍽!
다시 한 번 돌이 날아들었고, 그 숫자가 점차 늘었다.
그때, 에단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영지민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겁니다. 단, 지금 사태의 진위를 밝히기 위함이니 묻는 것에 진실 되게 상세히 밝히십시오.”
그의 말에 날아드는 돌이 멈추자 클레리아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작이 이아스 경에게 영지를 맡기고 방관했다는 건 이미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일을 들었습니다. 자작이 작위를 물려받은 후, 영지민들께서 자작을 무시하며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데 사실입니까?”
그 순간 일대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 보기 바빴고, 몇몇 부모들은 혹시 모를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찰스의 말도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 볼멘소리를 했다.
“선대 노르디 렝터 자작님조차 저런 놈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우리 역시 곱게 보일 리 있겠습니까?”
그 말에 돌에 맞아 피를 흘리던 찰스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런 그를 보던 클레리아가 사람들을 다시 진정시키려 했을 때였다.
“당신들이 맞습니다. 나는 부족한 자작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찰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머리의 상처를 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선대 자작님이신 할아버지조차 절 못 미더워했고, 작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난 이렇다 할 일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전 무능합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고 사람들 하나하나를 바라봤다.
“선대를 모시던 고용인들이 하루아침에 나 같은 사람은 주인으로 받들 수 없다며 그만둬 버렸고,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수많은 일이 날벼락처럼 떨어졌습니다. 제가 어찌해야 했습니까?”
그의 애통한 물음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아무도 날 인정하지 않고, 날 도와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나는 무서웠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우스웠겠지만, 나는 당신들이 내 저택으로 쳐들어와 무능하다며 당장이라도 날 죽일까 봐 두려웠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도와주겠다고 온 이아스 경을…… 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당신이 깨어 있었다면 그 방법의 잘잘못은 가렸겠죠.”
옆에서 클레리아가 지적하자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두려웠더라도 제 선택은 잘못됐습니다. 그가 당신들에게 이 정도로 굴 줄은 정말 몰랐어요. 부탁드립니다. 제게…… 기회를 주세요.”
그의 서러운 울먹임이 침묵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그래, 잘못은 분명 자작, 아니…… 찰스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있어.”
그때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아스 경이 오고 패악을 부린 건 맞지만. 당신들도 인제 그만 좀 해. 지금 자작은 찰스고 노르디 님과 아무리 비교한들 그분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건 잘 알잖아.”
그녀의 나무람에 사람들은 가책을 느끼는 듯 시선을 피했다.
“로, 로딜리아.”
찰스가 서글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울었다.
“당신은……?”
“전 로딜리아. 찰스의 유모였고, 지금은 식사를 담당하면서 마을에 살고 있죠.”
‘아……!’
정체를 물었던 클레리아는 그들의 식사를 만든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르디 렝터 자작님은 마을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분이었지만…… 자신의 하나뿐인 손주에게는 지독한 분이었어요.”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듯 한숨을 내뱉었다.
“하도 엄한 덕에 학대에 가까운 훈육을 했다는 건 너도 알잖니, 지스.”
그녀가 꾸짖듯 화를 내던 남자에게 말하자 그는 뭔가 찔리던지 눈을 피했다.
“이제 서로 그만할 때가 됐어요.”
무거운 침묵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날 줄 몰랐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이라 여긴 클레리아가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제가 보기엔 렝터 자작령에는 많은 문제가 있군요.”
그녀는 차분하고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폐하께 고해, 자작령의 회복을 돕는 것. 이 경우, 이곳은 새로운 귀족에게 편입되거나 새 영주가 부임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클레리아는 영지민을 훑었다.
“또한, 가장 태도가 불량했던 영지민을 차출해 귀족 모욕죄로써 벌을 내리시겠죠.”
그 말에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또 하나는…….”
그녀의 눈은 질끈 감은 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찰스를 향했다.
“다시 한 번 자작과 영지민이 서로를 도와 자작령을 회복시키는 겁니다.”
그 말에 자작과 영지민들이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찰스 렝터 자작은 분명 잘못을 했습니다. 그가 부족한 사람인 것도 맞고, 영주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할 제안을 받아들여 여러분을 탄압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영지민의 도움이 없이는 그 역시 좋은 통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찰스를 바라봤다.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느냐는 듯한 눈빛에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창고를 개방하겠습니다. 여러분께 강탈했던 것 외에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것 모두 나누겠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진심입니까?”
지스라고 불린 사람이 묻자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떨지 않고, 똑바로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저와 의논해 주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해 나가겠습니다. 할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분이 여러분을 지켰던 것의 반이라도 따라가도록 여러분이 절 도와주세요.”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일궈 온, 자신이 물려받은 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클레리아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지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고, 표정도 훨씬 온화해졌다.
“제대로 따르려고조차 하지 않은 우리도 잘못했습니다. 자작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스가 나서서 렝터 자작에게 악수를 청했고,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도…… 열심히 영지를 돌보겠습니다.”
찰스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고 라밀이 안도하자 클레리아는 그제야 찰스의 유모라 했던 여인에게 다가갔다.
“로딜리아?”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세웠다.
“지금 이 상태가 계속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라요. 로딜리아가 렝터 자작을 라밀 경과 함께 보좌해 주세요. 그리고 3개월에 한 번, 프라이어스 공작가로 보고서를 올려 주십시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녀의 되물음에 클레리아는 빙긋 웃으며 로딜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저녁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면…… 분명 언제라도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로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도록 해 볼게요.”
이어 라밀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멀찍이 물러나 있던 이아스에게 다가갔다.
“이아스 경. 빈자리를 메워 준 것은 고맙소. 하지만 이제 그대들은 이 영지에서 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소. 무엇보다 자작님의 곁에 더 있지 않아도 될 듯싶소. 이른 시일 내에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그러자 이아스는 불쾌한 시선으로 눈만 굴려 그를 바라봤다.
에단은 라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돌아가라니, 이아스 경은 여기에 소속된 기사가 아니었습니까?”
“아, 네. 선대 자작님의 기사들이 떠나 버리고, 선대 자작님과 친분이 있던 남작님이 도움을 주시겠다며 임시로 보내 주셨던 기사들입니다.”
그는 돌아서서 흘긋 이아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사실 자작님께서 더욱 집에 틀어박혀 모든 걸 일임하게 된 데에는 이아스 경의 입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고요.”
그 말에 에단은 이아스를 바라봤고, 그 역시 에단을 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마주쳤다.
에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돌려 라밀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이른 시일이 아니라 내일 당장 내보내십시오, 라밀 경.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을 말하지 않는 기사는 신용할 수 없다는 거 말입니다. 그리고 내일 저 기사들을 보냈다는 남작의 서신도 보여 주십시오.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그의 말에 라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를 지켜보는 클레리아 곁으로 레인이 다가왔다.
“이렇게 그냥 맡겨 버려도 되겠어?”
클레리아는 피식 웃었다.
“처음이 어렵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계속 지켜볼 거예요. 진전이 없으면 영지를 몰수해야죠.”
그녀의 말에 레인이 몸을 뒤로 뺐다.
“어휴,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웃는 낯으로 무서운 소릴 하네? 하룻강아지 다시 봐야겠어.”
“하하하.”
클레리아는 과장된 얼굴로 장난치는 레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하니까요. 레인.’
“사람들은 대부분 치료해뒀으니 내일쯤은 약 배분하고 그러면 이번 일은 끝이야.”
“수고하셨어요. 레인 님.”
“너도, 첫 파견 임무치고 잘했어. 하룻강아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비로소 웃는 자작을 지켜봤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찰스는 마을 사람들을 자작 저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각 가정에 넉넉한 식량과 비품을 나눠 주었고, 약품도 넉넉히 보급했다.
리암과 라밀, 에단 역시 마을 보수라던가 무거운 짐을 나르는 등 바쁜 아침을 시작했다.
한창 짐을 나르던 중 에단이 물었다.
“라밀 경. 이아스 경이 안 보이는데 설마 떠나라고 했다고 나오지 않은 겁니까?”
라밀은 오트밀 포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사단 전체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떠난 것 같더군요.”
그의 말에 리암과 에단이 시선을 교환했다.
“라밀 경. 지금 당장 그 기사단 추천서와 서신을 보여 주십시오.”
서류를 살펴본 에단과 리암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 서류는 가짜입니다. 라스칸트 제국 어디에도 샤도레라는 남작은 없습니다.”
“뭐, 뭐라고요? 그럼 정체도 모르는 이들을 저희가 자작 소속의 기사단으로 썼었다는 겁니까? 그럼 대체 그들은 누구죠?”
“용병…… 이겠죠.”
‘더러운 일도 가리지 않는.’
에단은 뒷말을 삼켰다.
“일단 그들이 떠났으니 다행입니다. 이제 막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자작님이 크게 동요할 수 있으니 차후에 천천히 알리십시오. 그리고 저희가 떠나면 바로 출신지가 확실한 기사들을 모집해서 기사단을 꾸리십시오.”
“정말 면목이 없군요.”
라밀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리암과 에단도 차마 뭐라 위로하지는 못했다.
라밀은 검술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통솔에 특출난 것도 아니다. 그저 뛰어난 충직함 하나가 제일일 뿐.
‘그의 충직함이 자작에게 큰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그렇게 세 사람은 로비로 내려왔다.
“리암 경, 에단 경. 이곳도 이제 마무리되었어요. 우리가 더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클레리아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요.”
“버, 벌써 가십니까?”
찰스가 붙잡듯 물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고, 일은 마쳤으니 저희도 이제 돌아가야지요.”
찰스는 부쩍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렝터 자작님, 가문을 통한 압박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클레리아의 말에 그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뇨, 프라이어스 영애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바뀌는 게 없었겠죠.”
“도움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프라이어스 공작가로 서신을 보내세요.”
그는 뭔가 감격한 얼굴을 하다 눈시울을 붉혔다.
“네, 감사합니다.”
정오쯤 되어 네 사람은 로딜리아가 준비한 마지막 식사를 한 뒤 짐을 챙겨 나왔다.
렝터 자작이 흔쾌히 작은 마차를 내주어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편할 듯했다.
“리암 경? 에단은요?”
클레리아의 물음에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찰나, 별관 쪽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단? 짐은 다 실었어?”
“아,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레인과 클레리아는 마차에 올랐고, 리암과 에단은 마부석에 탔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렝터 자작님. 선대 자작님만큼 분명히 이 영지를 잘 다스리실 거예요.”
클레리아의 말에 찰스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어 마차는 출발했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사이 보이는 사람마다 나와 손을 흔들었다.
‘첫 파견 임무……. 절대 잊지 못하겠지.’
멀어져 가는 마을에 클레리아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자작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근무에 두 사람은 겨우 숨을 돌렸다.
“라밀 경도 고생했어요. 그분들이 와 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정말 감사한 분들이었죠. 자, 따뜻한 차라도 드시면서 한숨 돌리실까요?”
“그거 좋죠.”
라밀이 웃으며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푸욱
섬뜩한 소리에 찰스의 어깨가 떨렸다.
“라밀 경?”
뭔가 이상함을 느낀 찰스가 나직이 라밀을 불렀다.
쿵
그러나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슬 퍼런 눈의 이아스였다.
“이, 이아스 경? 도, 돌아간 게…… 아니었습니까?”
찰스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보며 이아스는 검에 묻은 시뻘건 피를 털어 냈다.
“자작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분께서도 자작의 노고에 고마워하실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 자작…… 님. 도망치…….”
쓰러진 라밀이 이아스의 발을 붙들었다.
그런 그를 힐끔 곁눈질한 이아스의 손이 움직였다.
콱!
“으, 으…… 으아아아아! 라밀 경!”
이아스의 검이 라밀의 머리를 꿰뚫고 바닥에 꽂혔다. 이어 그는 검을 뽑아내고 천천히 찰스에게 다가갔다.
“오늘부로 이 영지는 이 이아스가 대리를 맡아 운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촤악!
순식간에 휘둘러진 검을 따라 집무실 벽에 피가 흩뿌려졌다.
쿵
눈도 감지 못하고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찰스가 목을 쥔 채 서서히 바닥으로 무너졌다.
“서신이 오가는 통로를 전부 차단하고, 마을을 빠져나가려 하는 이들은 모두 즉결 처형해라. 그리고…… 그분께 정리되었다고 연통하고.”
“예.”
이아스는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 * *
“흠…… 보고가 흥미롭군요. 그저 참한 줄만 알았던 프라이어스 영애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니.”
장갑을 낀 손이 서신을 읽은 후, 난롯불에 그대로 던져 넣었다.
“완벽해지려고만 하던 전과는 다르군. 확실히 재밌어. 이 정도는 돼야 주시할 맛이 나지. 그대의 계획이 나쁘지 않았어, 레리안.”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감사 인사를 하듯 허리를 굽힌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럼 다음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안투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