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첫 번째 파견 임무.
“클레리아.”
어느새 해가 바뀌고, 클레리아가 치유사 일을 하게 된 지도 석 달째로 접어든 어느 날.
집무실에서 내근 중에 칼리에가 클레리아를 불렀다.
“네, 칼리에 님.”
그녀가 다가갔음에도 그녀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기…… 칼리에 님.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세요?”
그녀는 뭔가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있는 건지 썼던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쥐었다.
심상치 않은 행동에 잠시 딴짓을 하던 레인 또한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눈치를 살폈다.
“클레리아. 당신에게 파견 임무가 떨어졌군요.”
‘파견 임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올 것이 왔고, 언젠간 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연히 먼 훗날이라고 여기고만 있었는데.
파견 임무는 치유사들이 가장 많이 다치고는 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존재만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치유사는 보호가 약한 파견 임무 동안 많은 위협을 받고는 했다.
구호소의 일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보고서만 착실히 올리면 비품이든, 약품이든 부족하지 않게 바로바로 채워지는 곳에서의 생활을 치유사 생활의 전부라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칼리에의 말을 듣고 나니 미처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클레리아는 잠시 두 손을 모은 채 묵묵히 서 있다 입을 열었다.
“첫 파견 임무군요.”
“되도록 늦게 보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는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칼리에는 서류를 넘기며 파견 장소를 확인했다.
“서쪽 하란델 지방의 렝터 자작의 영지로군요. 자작이 보내오는 보고서는 문제가 없는데 영지민들이 호소문을 계속 보내는 모양이에요.”
“……비리일까요?”
“흠…… 그럴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영지민들이 겨울을 앞두고 잔병치레가 많아졌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는다고 하는군요. 그걸로 민심이 사나워진 것 같아요.”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이어 에단과 리암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 마침 왔군요. 에단 경, 리암 경.”
“안녕하십니까, 치유사님들.”
그들이 인사하자 칼리에가 마저 임무 사항을 알려 주었다.
“일단 영지민들의 치유를 우선으로 하고, 기사님들을 주축으로 렝터 자작과 영지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세요. 파견 일자는 모레입니다.”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 임무는 레인과 리암 경도 함께일 겁니다.”
그 말에 클레리아와 리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분과 함께요?”
칼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안타까운 일로 인해 혹여 모를 상황을 대비해 당분간 레인도, 클레리아도 단독 임무 파견은 금지됐습니다. 동행해서 행동하도록 하세요.”
쾅!
레인이 책상을 요란하게 내리쳤다.
“싫어요! 수도에 있을래요! 칼리에 님 혼자 여기 일을 어떻게 하세요.”
“당신과 클레리아가 수습을 도와준 덕에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칼리에의 단호한 말에 레인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리암을 바라봤다. 함께 가기 싫다는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레인의 시선에 움찔한 그가 울상이 되어 에단은 붙들었지만,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에단 역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 가는 데에 네 놈이 왜 따라와? 꺼져.’라고 하는 눈으로.
‘눈으로 욕하고 있어. 이 자식 나날이 말도 없이 눈으로 욕하는 것만 늘어간다니까!’
리암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둘 다 저한테 진짜 너무한 거 알죠? 난 가겠다고 우기지도 않았거든요?”
둘의 시선을 알아차린 클레리아만이 난감히 웃었다.
“하하, 그래도 리암 경도 레인 님도 함께 가시니 다행이에요. 마음이 놓여요.”
그 말에 레인은 클레리아 역시 홱 째려봤다.
“선배 부려먹어 참 좋겠다, 좋겠어. 어이구 내 팔자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클레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도 클레리아는 내심 기뻤다.
첫 파견 임무에서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데 둘만 간다는 게 걱정이었는데 일에 능숙한 레인에 리암 경까지 함께라면 안심이었다.
‘한편으로는…… 근래 수호 기사를 잃은 레인 님이 걱정되셨기 때문이겠지. 거기에 내 사정도 그리 녹록지는 않으니.’
리암에게 툴툴거리며 잔소리하는 레인과 여전히 그를 무섭게 쏘아보는 에단.
거기에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인지 생글생글 웃는 클레리아까지.
칼리에는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조합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났다.
‘새로운 젊은 피들 덕에 히리스벨라관이 더욱 활기를 띠겠어.’
“따라와, 리암 경. 임무 나가려면 챙길 게 한두 개가 아니야. 하룻강아지! 내가 오늘 중으로 너희 저택으로 서신 보낼 테니까 내일까지 준비 다 해, 알겠지?”
“자, 잠깐만요. 레인 님! 귀, 귀는 놓아주세요! 으갸갸갹!”
“리암 경은 행동이 굼떠. 내가 이렇게 안 하면 바로바로 안 따라오잖아! 빠릿빠릿해지면 그때 놔주도록 하지.”
“자, 잘할 수 있다니까요. 클레리아 님, 레인 님 좀 말려 주세요!”
“내가 저 녀석 말을 들을 것 같아? 벌써 태도가 글렀어. 얼른 오라니까?”
리암 경의 귓불을 잡고 끌고 나가는 레인을 보며 클레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훗…… 리암 녀석, 임자를 만났군. 철 좀 들겠어.”
클레리아는 순간 중얼거리는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리암 경만 근처에 있으면 못 보던 모습이 나온다니까.’
클레리아가 그를 눈을 끔뻑이며 쳐다봐도 정작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아휴, 언제쯤 철들는지.”
결국, 레인을 말리러 나서는 칼리에였다.
* * *
“뭐야, 공작가 영애가 치유사가 됐으니 좀 좋은 마차를 내줄까 했더니.”
레인은 허리에 팔짱을 끼고 입술을 내밀며 못마땅해했다.
그들의 짐이 실리는 마차는 일반 평민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와 다를 바가 없는 데다 오히려 조금 더 낡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마차를 타면 그만큼 습격받을 위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마침 다가오던 에단이 말했다.
“나도 알아, 그냥 좀 다를까 해서 기대했던 것뿐이라고.”
그 말에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먼저 와 계셨네요.”
클레리아가 다가오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허리 부서질 일만 남았는데 웃음이 나와?”
“레인 님이랑 리암 경이 함께니 안심이 돼서요.”
“하여간에 순둥순둥. 앞으로 고생길이 훤한데 속없긴…….”
클레리아는 에단을 바라봤다.
그 역시 파견 임무를 위해 망토가 바뀐 채였다.
갑옷은 그대로였으나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가벼운 회색 망토를 몸 전체에 둘렀다.
말에 안장이나 짐 보관함도 전부 평범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에단도 고생이 많네.”
“이 정도도 예상 안 하고 하겠다 나선 거 아니야.”
그가 빙긋 웃었다.
“레인 님! 말씀하신 거 챙겨 왔습니다.”
마침 리암 역시 채비를 마치고 나왔다.
레인은 일행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말했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 * *
다그닥 다그닥
평화로운 말발굽 소리와 박자를 맞추는 듯한 마차의 덜컹거림이 경쾌했다.
수도 시가지를 벗어나 외곽에 다다르자, 날이 추워져도 골목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의 풍경이 이어졌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홀렌 강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마치 그들을 배웅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클레리아의 가슴에 와닿았다.
“뭘 그렇게 행복하단 얼굴로 봐?”
자는 줄 알았던 레인이 물었다.
“그냥요. 전에도, 오늘도 이런 풍경들은 그대로였을 텐데…… 미처 잊고 살았어요.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말이에요.”
그녀는 귀족들의 틈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던 회귀 전의 생활을 떠올리며 씁쓸히 말했다.
그때는 아무리 화려한 생활과 귀금속을 봐도 기쁜 줄 몰랐다.
아름다운 줄도 몰랐다.
세 공작 가의 틈만을 노려 달려들려 하는 이들을 진작 쳐내던 통에 늘 피곤했다.
조용히 말을 아끼고 침묵을 지켰지만, 사실 속은 치열한 삶에 날 선 신경으로 여유가 없었다.
“맞아, 저런 모습은 나도 매번 임무를 나갈 때마다 감탄하고는 해.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지겹다. 나도 누가 해 주는 밥 먹고, 예쁜 옷이나 입고 수다나 떨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레인이 기지개를 켜며 하는 말에 클레리아는 씁쓸히 웃었다.
평민인 그녀의 눈에는 귀족들의 삶이 그렇게 비쳤을 거고, 또 일부는 맞았으니까.
평민들의 힘든 노동에 비하면 그들의 삶은 비교적 편할 것이다.
“하룻강아지, 너 말이야. 하는 짓이 애늙은이야. 그건 알아?”
레인의 말에 클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레인이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격은 순둥순둥이라 사고 칠까 걱정인데, 그렇다고 말하는 건 가끔 살면서 볼 건 다 본 것 같은 늙은이 같이 말하고. 종잡을 수가 없어. 그래서 재밌어.”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질리기 전에 많이 봐 둬라.”
“네.”
클레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안이 조용하네.”
에단의 말에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 마부까지 동행할 수는 없는지라 에단과 리암의 말로 마차를 끌고, 두 사람이 마부석에 앉아 모는 중이었다.
뭐 그렇게 하는 편이 위장하기도 훨씬 쉽고.
“레인 님이 클레리아를 답답해하면서 호통이라도 치실까 했는데.”
에단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리암이 쀼루퉁한 얼굴을 했다.
“레인 님이 말이랑 행동이 좀 거칠긴 하시지만, 막무가내로 시비 거는 분은 아니야.”
그의 말에 에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이미 경험했던 것 같은데. 너도 첫날부터 무섭다고 나한테 온종일 징징대지 않았어? 그래도 이제 모시는 분이라고 레인 님 편드는 거야?”
그 말에 리암이 ‘하하.’하고 웃었다.
“대화해 볼수록 그냥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았거든. 좀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화내고 말부터 거칠게 나가는 건, 사람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서 그런 것 같단 느낌을 받았어. 떠날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
“레인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많은 일을 겪으신 분이니까.”
에단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나저나 얘들이 말을 잘 따라 줘서 다행이다. 늘 혼자 달려 버릇해서 마차는 힘들 줄 알았는데.”
리암은 대견하다는 듯 말들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에단의 말처럼 그들은 이제 수도의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너른 들판 뒤로 울창한 숲길이 보였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
“하란델 지방은 그다지 멀진 않아.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정도의 거리일까. 문제는 숲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거지. 사주 경계 잘해라.”
“너야말로 마차나 잘 몰아.”
에단이 고삐를 단단히 쥐며 말하자 리암도 지지 않았다.
“야, 그러고 보니 요즘 너 레인 님이나 클레리아 님만 옆에 있으면 나 구박하고 엄청나게 째려보더라?”
“……시끄러워.”
“말 나온 김에…… 우왁!”
갑자기 빨라지는 통에 리암이 마부석 난간을 붙들었다.
“에단!”
“갈 길이 멀다. 투덜대지 마.”
리암이 원망하듯 외쳤지만, 그저 웃어 넘겨 버리는 에단이었다.
* * *
“으아아……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고작 노숙 하루 했을 뿐인데 벌써 퀭한 얼굴을 한 리암이 울상을 지었다.
“산적이라도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야. 노숙이야 근처에 마을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숲에서 자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어.”
“치유사랑 같이 다니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리암은 갑작스러운 호통에 움찔하며 떨었다.
그의 말을 들은 레인이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친 탓이었다.
“더 투덜대면 입을 때려 줄 거야!”
“네, 네. 죄송합니다.”
에단은 그가 혼나는 걸 보고 킥킥거렸다.
“이제 이 산 하나만 넘으면 렝터 자작의 영지야.”
“가장 큰 산이 남았구나.”
둘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순간 리암의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길옆, 높다란 언덕을 바라봤다. 그는 한참이나 지켜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에단, 경계해. 인기척이 있다.”
그의 말에 이미 에단 역시 눈매가 매서워져 있었다.
“알아, 느꼈어. 서두르자. 하앗!”
순식간에 마차에 속도가 붙었다.
* * *
“음? 마차에 갑자기 속도가 붙는 것 같네요.”
“그러게.”
그렇게 대답한 레인이 잠시 커튼을 살짝 들어 창밖을 살폈다.
그 순간.
콱!
화살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마차 안에 꽂혔다.
“뭐, 뭐야!”
기적에 가까운 반사 신경으로 피한 레인이 놀라 몸을 바싹 낮췄다.
클레리아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 의자를 꽉 쥐었을 때였다.
콱! 콰콰콱!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말발굽 근처의 땅과 마차에 위협적으로 연달아 박혔다.
히히히힝!놀란 말들이 날뛰었고, 순간 마차가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우왕좌왕하는 말들 덕에 마차는 점차 중심을 잃고 비탈과 맞닿은 길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어어?”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레인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차 위에 잔뜩 실려 있던 침낭과 붕대, 각종 약품으로 가득 찬 짐들이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에단!”
리암이 계속해서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에단 역시 고삐를 틀어쥔 채 고군분투하긴 마찬가지였다.
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던 마차는 산비탈 바로 앞까지 끌려갔다.
“뛰어내려!”
레인이 문을 박차 열었지만, 그 반동에 안쪽으로 굴러 버렸다.
리암은 먼저 뛰어내려 말과 연결된 줄들을 붙들었고, 에단은 레인과 클레리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기울기 시작한 마차는 점차 넘어지는 속도가 붙어, 안에 있던 클레리아와 레인은 엉망으로 구르기만 했다.
간신히 먼저 입구를 붙든 클레리아가 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레인! 빨리요!”
가까스로 손을 잡은 레인이 간신히 탈출해 길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더 기다렸다가는 마차에 딸려 모두가 떨어질 판이었다. 보다 못한 리암이 일단 연결된 말들의 줄을 단칼에 잘랐다.
마차가 완전히 넘어가 산비탈로 질질 끌려가자, 레인이 사색이 되어 소리 질렀다.
“클레리아가 아직 안에 있어!”
그 소리에 뛰어내리려던 에단이 단숨에 마차 입구로 올랐다.
“클레리아! 손!”
그제야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그녀가 에단에게 손을 뻗었다.
스콱!
순간 에단의 손등을 스치고 클레리아의 머리칼 몇 가닥이 동강 나며 화살이 날아들었다.
핏방울이 튀었지만, 에단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잡아끌어 밖으로 함께 몸을 던졌다.
쿠콰광!
그들이 흙바닥으로 구름과 동시에 마차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비탈을 따라 마구잡이로 굴러떨어졌다.
그제야 흙투성이로 지켜보던 레인이 안도했을 때, 동시에 또다시 화살이 그들 주변에 박혔다.
챙!
매서워질 대로 매서워진 리암이 순식간에 날아드는 화살을 베었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살기 가득한 엄청난 오러가 쏟아졌다.
리암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화살이 날아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리암 경.”
순간 말릴 틈도 없이 가버린 그를 보며 레인이 몸을 떨었다.
콰가가각!
그 순간 위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리며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에단…… 손이…….”
클레리아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리암이 사라진 곳만 노려봤다.
잠시 후.
꽤 높은 곳임에도 가볍게 뛰어내린 리암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찾았나?”
“아니, 놈들이 몸을 숨겼던 일대를 날렸는데도 자취를 감췄어. 기척도 숨겼고. 치고 빠지는 게 능숙한 놈들이야.”
‘상대 역시 기사급이라는 거군. 아니면 오러를 쓸 수 있는 용병이라던가.’
에단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습격이라니.
마을이 인접해 있어 자칫 지원을 요청할 수 있음에도 상대는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 있거나, 들켜도 상관이 없거나.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사이 클레리아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에단을 지켜봤다.
이토록 무서운 얼굴을 하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살인이라도 낼 것만 같은 표정이라니. 게다가 그가 쥔 주먹에서 뚝뚝 흐르는 핏방울까지.
클레리아는 천천히,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에단의 손을 붙들었다.
“에단, 손…… 치료하자.”
그제야 그가 흠칫, 클레리아를 봤다. 그리고 평소에 그녀가 아는 에단의 얼굴로 돌아왔다.
“괜찮아? 다친 곳 없어?”
“난 괜찮아. 하지만 네 손…… 치료해야 해.”
그는 비로소 자신의 손이 피범벅인 것을 깨달았다.
“……응.”
클레리아가 에단의 손을 치유하는 동안, 그들 사이에서는 말이 없었다.
템즈 경의 일이 이제 겨우 석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습격이라니. 아무리 그걸 대비해 치유사 두 명을 나란히 보냈다지만, 첫 파견에서 벌써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침묵만큼 복잡한 심경이 각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에단,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겠다.”
“무슨 일이야?”
“말들이 놀라서 발굽이 망가진 것 같아. 이대로는 달리는 건 무리야.”
마지막 산 하나를 남겨 두고 이렇게 되다니.
에단의 눈이 다시금 살기를 머금었다.
“최대한 이동하고, 길을 피해서 야영하도록 하자.”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히 클레리아 일행은 다른 일 없이 렝터 자작의 영지까지 거리를 최대한 좁힐 수 있었다.
거기에 야영을 위해 숲에 들어갔을 때도 다행히 그들을 쫓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말들을 한쪽에 진정시켜 세워 놓은 리암이 에둘러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 앉으세요.”
레인과 클레리아는 그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추위에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그 와중에도 클레리아는 깊은 숲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못했다.
에단이 뒤에 남아 마차에서 건질 수 있는 것들을 확보한 뒤 뒤따르겠다고 자청해, 셋만 먼저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해가 져 버린 숲은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름달이 떠 약간의 시야는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클레리아 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오러를 일정하게 흘리고 있으니, 에단이라면 잘 찾아올 겁니다.”
리암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그래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숲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레인과 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리암, 정말 불은 못 피우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은신을 들킬 위험이 있어 오늘 밤은 모닥불 없이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인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봐, 클레리아. 치유석은 잘 가져왔겠지? 아무래도 내일은 서로 기력 회복을 해 줘야겠다. 이렇게 추위에서 떨다가는 사람들 치유할 힘도 안 남겠어.”
“네.”
코가 아릴 정도의 추위에 손끝과 발끝마저 얼얼했다.
멀리 음산히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와 가끔가다 위협적으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움찔움찔 몸이 떨렸다.
리암 경이 있으니 산짐승이 주변에 올 리는 없었다. 다만 이 어둠 속에서 혼자 헤매고 있을 에단을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부스럭
바라보던 방향에서 나는 낙엽 소리에 리암이 순간 검 자루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를 만류한 클레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에단이에요.”
정말 그녀의 말대로 조금 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기다렸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지고 온 것들을 풀었다.
“약품들은 모두 깨져서 건질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구해 온 건 마취석과 해열석. 그리고 통에 담아 온 위장약과 진통제는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소독약도 모조리 깨졌는데, 다행히 소독분은 괜찮더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것을 챙겨 온 그에게 레인은 감탄했다.
“난 거기서 건질 건 한 개도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에단 경 정말 대단한데? 풍비박산 난 마차를 다 뒤지기라도 한 거야?”
“최대한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할 테니까요.”
“대단하다, 진짜. 템즈도 그건 뒤질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에단이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담요를 건넸다.
“침낭이나 여분의 옷들은 모두 흙투성이가 되었거나 찢겼더군요. 힘드시겠지만 오늘은 이걸로 버티십시오.”
하지만 그가 건네는 담요는 레인과 클레리아의 것, 두 장뿐이었다.
멍하니 받아든 담요를 내려다보던 클레리아가 물었다.
“리암 경과 에단 거는?”
“가져올 만한 건 두 장뿐이었어. 우린 망토가 있으니 괜찮아. 기본적인 비나 눈,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그야 그 말이 맞긴 하나 망토 하나로 이 추위가 감당될 리 만무했다.
레인은 얼씨구나 하고 바로 둘렀지만, 클레리아는 차마 덮지 못했다.
“아!”
순간 뭔가 떠오른 듯 품을 뒤지던 그녀가 옷의 깊은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이거 쓰면 될 거야.”
그녀가 화색이 돌며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세실리아가 준 발열석이자 발광석이었다.
“이 귀한 걸 어디서 얻었어?”
레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저번에 황녀님께 받았어요. 왜 저한테 이걸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쓸 수 있겠네요.”
“그 여자가? 웬일이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귀한 걸 턱 내놨대? 하룻강아지, 황녀 계집애를 홀리기라도 했어?”
“…….”
순간 레인을 제외한 일동이 침묵에 휩싸였다.
발열석의 등장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황족을 모욕하는 무차별적 언사 폭격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왜 조용해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뒤늦게 입을 가렸다.
“아하, 실수. 야, 없는 자리에서는 욕 안 할 상대가 없다던데 너희 너무 물러터진 거 아니야?”
레인이 오히려 뿔이 난 듯 투덜거렸지만, 황실의 주요 귀족인 셋은 그러질 못했다.
“어이구, 됐다 됐어. 가만있지 말고 발열석이나 켜 봐. 추워 돌아가시겠다.”
그녀의 말에 에단이 잠시 클레리아의 손을 막았다.
“발광석이기도 해서 그냥 켜면 위치가 발각될 겁니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돌을 세 겹 네 겹 감쌌다. 다행히 빛의 투과가 심한 재질이 아니라 두툼히 싸였다.
이어 에단이 툭툭 쳐 발열석을 자극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돌을 감싼 망토에 열이 오르며 그들이 있는 주변까지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열기는 그들이 둘러앉아 있는 곳까지 적당히 퍼져 유지됐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다.”
레인이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클레리아도 서서히 풀어지는 코끝을 느끼며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위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제는 망토도 없는 에단을 바라봤고,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발열석 온기가 있으니까 염려 안 해도 돼.”
달램에도 그녀의 얼굴이 나아지지 않자 리암이 자신의 망토를 들어 에단에게 말했다.
“에단, 그럼 내 쪽으로…….”
“치워. 안 가. 거절이다.”
단칼에 자르는 그를 보며 리암은 생각했다.
“말 끝나지도 않았어, 이 자식아. 맨날 나만 갖고 그래.”
그때 리암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에단 옆으로 클레리아가 자리를 옮겼다.
“클레리아?”
놀란 그의 기색과는 달리 그녀는 담요를 크게 둘러 에단과 자신의 몸을 덮었다.
“클레리아, 이럴 필요 없어.”
“발열석이 있다고 안 추울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단의 옆에 꼭 붙어 앉았다. 마치 체온을 나누려는 듯이.
그 모습을 리암과 레인은 멀뚱히 지켜봤다.
리암이 ‘우리도?’하는 시선으로 레인을 쳐다봤다.
“꿈도 꾸지 마. 나 혼자 덮을 거야.”
으르렁거리는 그녀 덕에 리암은 서러움의 눈물을 삼켰다.
‘예에……. 기대도 안 했습니다. 난 그저 추운 게 싫었을 뿐이라고요. 다들 나한테만 그래!’
그는 자신의 망토를 돌돌 감아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에단도 돌아왔고, 추위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어서였을까.
클레리아가 꾸벅꾸벅 조는 쪽으로 에단이 슬쩍 어깨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가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나 졸음에 취한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음산하고, 무섭게만 들리던 산짐승들의 소리도 지금은 아늑하게 들려온다고 느낄 뿐.
‘뭔가…… 굉장히 안심되는 느낌이야.’
클레리아는 그런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리다 완전히 잠들었다.
낮에 받은 습격과 예정에 없이 걸은 탓에 노곤함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을 터였다.
에단은 작아지는 그녀의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곧 그들 사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리암도, 레인도 고단함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오직 에단만이 조용히 발열석에 시선을 던질 뿐.
클레리아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그는, 그녀를 천천히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그러자 클레리아의 얼굴로 아까의 화살에 잘려나간 몇 가닥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아무 말 없이 그 머리칼을 쓸어넘긴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잘 자, 클레리아.”
* * *
“으음…….”
오랜만에 어린 시절 꿈을 꾸었다.
봄꽃이 가득 핀 들판에서 엘레나는 나비를 따라 천방지축 뛰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에단은 재미없다며 누워 꽃을 입에 물고 잠을 청했다.
클레리아는 그런 둘을 보며 웃었고,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들려 하는 에단의 이마를 장난스레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 시절이 눈앞에 몽롱하게 아른거릴 때, 누군가 클레리아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클레리아, 이제 일어나.”
낮은 목소리.
하지만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 좋은 목소리.
그녀가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잘 잤어? 배고플 텐데 빵 먹어.”
순간 그녀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 분명 앉아서 잔 것 같은데?
몸은 왜 이렇게 편하고, 에단의 얼굴은 왜 위에 있는 거지?
깜짝 놀란 그녀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미 빵을 한가득 물고 있는 레인이 손을 흔들었다.
“나, 나 어제 앉아서 자지 않았어?”
얼굴이 빨개져 묻는 그녀에게 에단이 빵을 내밀었다.
“아, 영 자세가 불편해 보여서 내가 눕혔어.”
말을 더듬는 그녀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조금 안도했다.
‘아, 민폐를 끼친 건 아닌가 봐. 그런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에단이 아무렇지도 않은 게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이유를 알 수 없음에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조용히 빵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 식사 후, 그들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오늘은 자작령에 무조건 도착해야 합니다. 이 날씨에 침낭도 없이 연속으로 야영한다는 건 무리가 있고, 다들 체력적으로도 좋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에단은 발열석을 쥐고 가볍게 툭툭 내리쳤다. 그러자 점차 온기가 사라지며 평범한 돌로 돌아왔다.
“갑시다.”
리암의 말에 네 사람은 서둘러 발을 재촉했다.
“도착하면 말발굽부터 갈아야겠어.”
말을 끌고 오는 리암이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두 분은 괜찮으십니까?”
“우리야 뭐, 정 안 좋으면 치유력을 써서 회복하면 되니까 두 사람이나 조심해요. 아픈 곳 있으면 재깍 말하고.”
레인은 말하는 것이 거침없고 직설적일 뿐이지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클레리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레인과 클레리아를 앞세우고 리암과 에단이 뒤를 따랐다.
“에단, 어제 미처 말할 틈이 없어서 말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어제 습격.”
그 말에 에단이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아꼈다.
“레인 님도 위험했던 건 맞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클레리아를 노렸어.”
나직한 에단의 말에 리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작위로 날아들었던 화살들이 유독 마지막, 클레리아를 구할 때만 정확히 그녀의 머리를 노렸다.
날아오는 화살들이 거의 위협용인지라 다 쳐내긴 했어도 클레리아가 탈출하기 직전까지는 직접 겨눈 것은 없었다.
에단과 리암이 상처 입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로 마차를 버리고 클레리아를 지키려 했다면 더 위험했을 거라는 거군.”
에단이 중얼거리자 리암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이 정확했기에 딱히 돌려 말할 수도 없었다.
“레인 님도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아.”
“그러시겠지. 이 일을 오래 다니셨으니 이런 상황이면 돌아가는 상황을 우리보다 더 빨리 상황을 알아차리실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은 앞에서 조용히 걷는 클레리아에게 꽂혔다.
* * *
“마을이다.”
레인이 반가운 마음에 뛰어 언덕 위에 섰다.
“정말 다행이네요, 슬슬 발이 아팠는데.”
클레리아 역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기뻐했다.
산길이 험한지라 추위에도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잠시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던 그때, 레인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레인 님?”
왜 그러느냐는 듯 묻자 그녀는 클레리아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저기 오는 거…… 기사단 같은데.”
그 말에 에단과 리암이 바로 앞으로 나섰다.
습격을 받았던 터라 그것이 어떤 자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니 둘은 최대한 경계 태세를 하며 검에 손을 올렸다.
“두 분 다 저희 뒤에 계십시오.”
그렇게 말할 때쯤, 자작령에서 나오는 듯한 기사단은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은 클레리아 일행 앞에 와 멈췄다. 이어 제일 앞에 말을 탄 자가 투구를 벗었다.
“수도에서 파견되신 치유사님들과 그 일행분입니까?”
약간은 덥수룩하게 뒷머리를 덮는 갈색 머리칼. 온기라고는 없는 눈의 사내가 물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밝히십시오.”
리암의 말에 사내는 눈알만 굴려 그를 바라봤다.
“렝터 자작님의 호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이아스라고 합니다.”
순간 에단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치유사님들이 도착 시한에 늦으셔서 마중을 나가 보라 명하시어 이렇게 나왔습니다. 자작님의 저택까지 저희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그가 손짓하자, 다른 기사가 와서 말을 바꿔 주었다.
이아스는 말을 몰아 클레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치유사님, 제 말로 모시겠습니다. 손을.”
그러나 그 앞을 에단이 막아섰다.
“말을 바꿔 주셨으니 치유사님은 저희가 계속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아스는 한참 에단을 바라보다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편할 대로 하십시오.”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그가 물러가자 가만히 에단의 망토를 쥐었다.
“저 사람…… 눈에 생기가 없어.”
에단은 경계 가득한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잠행이나 일찍이 엘빈을 따라 여러 사건을 목도하기 시작했던 에단은 이아스 같은 이의 눈을 잘 알았다.
‘그건…… 살인자의 눈이다. 기사가 아니라…….’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그렇게 그들은 이아스가 내준 말을 타고 렝터 자작령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