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52)

제10장. 각오.

“치유사 전담 수호 기사 에단 칼리스터, 황실 근위대장 타이엔 프라이어스 경을 뵈러 왔다고 전하게.”

“예, 예! 알겠습니다!”

근위대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기사는 에단이 문에 다가올수록 넋을 놓더니, 마주 선 지금조차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분이 요번에 검술 시합에서 1위를 차지하신 그 에단 칼리스터 경? 근데 왜 근위대로 오지 않으시고 수호 기사로 가신 거지?”

“그분이 치유사가 되셨잖아.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못마땅한 시선을 주려던 때 문이 열렸다.

“아, 에단 경. 잘 왔군.”

타이엔이 손수 마중을 나오는 덕에 에단은 서둘러 신경을 껐다.

그의 안내와 함께 들어가자 점차 더 많은 근위대 기사들이 모여 타이엔의 집무실 앞을 서성거렸다.

“스승이 되어서 결승전도 참관을 못 하다니. 미안하게 됐다, 에단.”

“아닙니다. 오히려 보셨다면 혼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혼을 내다니? 내게 배운 일격으로 순식간에 제압했다고 들었는데?”

“아…… 그것만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에단은 타이엔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긁적였다.

클레리아가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 거의 두 시간 내내 살기와 위압감을 실은 오러만 흘리고 있었다는 걸 어찌 말할까.

타이엔이 알면 잔소리 세 시간 감이었으므로 그는 적당히 웃어넘겼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타이엔이 입을 열었다.

“에단, 마음은 고맙다만…… 후회하지 않겠느냐?”

“무엇을 말씀입니까?”

“수호 기사가 된 거 말이다. 너라면 명예와 권위, 부는 모두 손에 쥐고도 남을 텐데. 그 자리가 정계에 입지를 다져 주는 자리는 아니지 않으냐.”

그의 말에 에단은 미소 지었다.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존중해 주고 계시고요. 무엇보다 제가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저희 칼리스터 공작가가 흔들릴 일은 없습니다. 거기다 폐하는 이미 제가 한 선택에 충분한 이유를 들으셨고요.”

“그거야 그렇다만…….”

타이엔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근위대와 2기사단, 3기사단에는 이미 말이 퍼졌다. 템즈 경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그렇군요.”

치유사 전담 수호 기사는 실력이 보증된 이들을 바탕으로 구성되기에 템즈 경의 사망 소식은 기사단을 흔들기 충분했다.

아무리 몰락했던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의 실력을 알던 자들은 충격이 컸을 테니까.

“뭐, 싸우다 죽은 게 아니라 약자로 분장한 이에게 피습당한 거니 실력을 운운할 건 아니다만…… 만약 기사단에 계속 몸담고 있었다면 이상한 기운을 놓치지 않았겠지.”

타이엔은 침통한 듯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랫동안 어려운 이들을 도우러 다녔어. 그래서 그런 자들을 향한 의심이 무뎌진 거지.”

“하지만 템즈 경이 진짜 목표였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경고하는 시범처럼 보였달까요. 그를 죽이기 위해 10년을 공들여 경계가 약해질 때까지 기다렸을 리는 없으니까요.”

“내 생각도 그러해. 아까운 인재만 잃은 셈이야.”

타이엔은 물끄러미 에단을 바라봤다.

몇 년 전, 친구인 엘빈에게서 그를 맡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성장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에단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부족한 경험에서 오는 미숙함.

아무리 천재적인 실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에단, 엘빈도 말은 하지 않지만, 신경이 곤두섰을 거야.”

“……제가 목표가 될까 봐 말씀이십니까?”

“치유사를 노리려면 가장 가까이서 떨어지지 않는 귀찮은 존재가 바로 자네들이니까.”

“가르쳐 주신대로만 하면 전 잘 해낼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타이엔은 쓴웃음을 흘렸다.

“내가 놓친 것이 있을까 봐 걱정인 거지.”

그는 에단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클레리아를 잘 부탁하네. 또한, 자네도 조심해.”

“염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 * *

터벅 터벅

클레리아는 황궁 계단 아래로 힘없이 발을 내디뎠다.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가 복잡하긴 했으나 지금은 그때와 이유가 달랐다.

‘좋은 친구가 될 거라니?’

황녀가 했던 말이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자신의 세상에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었기에 싫어했다니. 그건 대체 무슨 의미야?’

그녀가 말한 것들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황녀는 클레리아와는 달리, 솔직한 성격에 직설적인 언행을 일삼았으니까. 좀처럼 자중하고 속내를 감추고 말을 아끼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선에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으니 가식적인 가면을 쓴 두 얼굴의 인간이라고 여겼던 거겠지.

저런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회귀 전 그리도 박대해 놓고, 지금은 전혀 다르게 바뀐 태도가 클레리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현재로서는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회귀 전 일을 탓하는 건 조금 치사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클레리아에게는 그녀의 변화가 적응하기 힘들었다.

‘최고 높이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언행이 자유로웠던 사람과 내가 같을 거로 생각했었다는 건가? 황족은 변덕스럽다지만…… 종잡을 수가 없어.’

그녀는 가만히 쥐고 있던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문제는 이 선물을 주던 황녀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괜한 변덕으로 이런 걸 줄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좋아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엘레나와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 있다면 환영할 일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 때쯤 그녀는 자신의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오는 에단을 발견했다.

“에단, 아버지는 잘 뵈었어?”

그녀의 말에 그는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굽혔다.

“네,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는 잘 뵙고 왔습니다. 과분할 정도로 축하를 해 주셔서 감사하던 터였습니다.”

“아버지도 당연히 기쁘실 거야. 에단은 아버지의 수제자잖아.”

그녀의 말에 에단이 미소 지었다.

이어 그가 손을 내밀자 클레리아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낮에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평화로웠다.

날이 차갑기는 해도, 높은 하늘과 맑은 하늘 탓에 햇빛이 눈이 부셨다. 그러다 마차가 홀렌 강에 다다랐다.

드디어 치유사와 수호 기사로서의 임무를 내려놓은 시간.

에단이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저기, 클레리아. 오후 일정은 없었지?”

“응, 왜?”

“그럼 오랜만에 강가 산책은 어때?”

그의 제안에 클레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응!”

그렇게 두 사람은 홀렌 강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는 이 강가에서도 산책을 많이 했지.’

그녀의 눈에 세 사람의 어린 시절이 아른거렸다.

아직은 서로에 대한 시기도, 질투도. 미움도 없던 그때. 에단은 강으로 물수제비를 떴고 자신은 엘레나의 머리를 땋아 주며 웃고 즐겼던 그 시절.

클레리아는 씁쓸히 웃었다.

“오랜만에 여유롭다.”

“그렇네.”

클레리아는 그에게 말을 걸며 잠시 강가의 풍경을 감상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노상 카페가 많이 들어서 아이들보다는 차를 즐기려는 커플과 여인들로 북적였다.

‘만약 회귀 전이었다면 엘레나가 저기 있는 카페들이란 카페들은 다 가 보자며 졸라 댔겠지. 다디단 디저트들을 양팔 가득 사고도 모자라 식사처럼 배가 부르도록 먹었을 거야.’

클레리아는 헛웃음 지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간다 해도 알아 버린 엘레나의 진심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거란 생각에 허탈해졌다.

그녀는 생각을 떨치려 에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했어?”

“검술 시합 얘기도 했고…… 템즈 경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

그 말에 클레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뭐라셔?”

“그가 죽은 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치유사들도, 치유사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도 주의해야 할 거라고 당부하셨어.”

클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가 표적이 아니라 경고일 뿐이었다는 거구나.”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

그녀의 말에 에단은 아무런 대답 없이 씁쓸히 웃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강가를 걸었다.

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조금 새어 나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나 때문인 거지?”

침묵을 지키던 클레리아가 물었다.

당혹감에 에단이 답하려 할 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새로운 치유사가 나타났기 때문에 황가에 반발하던 무리가 레인 님께 시선을 향한 거고…… 그래서 템즈 경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구나. 나 때문에……. 레인 님을 어떻게 봐야 하지.”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어도 벌어질 일이었어. 오히려 그간 치유사가 나오지 않은 덕에 그들이 항간에 폐하가 르누엘룻 님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소문을 퍼트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 이번 일에 자극받은 건 당연했어.”

“내가 공작가 출신이 아니고…… 지금이 아닌 5년 전에 나타났다고 해도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녀의 물음에 에단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황가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개국 공신 가문에서 나온 치유사는 눈엣가시일 게 불 보듯 뻔하니까.

반발세력은 분명 펠리시아스의 황권이 강화되는 걸 못마땅히 여겼기에 레인과 템즈를 노렸을 것이다.

클레리아의 말이 틀림이 없기에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 해도 치유사의 주변은 언제 어디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그간 이런 시도가 없었을 것 같아? 호위 기사 덕에 묻힌 사건만 수백 개야.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고.”

그의 말에도 클레리아는 낙담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왜 내가 그걸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까.”

그녀는 충격이 큰 듯 고개를 숙였다.

“네가 수호 기사로 온 것이 기뻐서…… 익숙하고 친근한 이가 와 주었다는 것이 마냥 좋아서 네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생각지 못했어. 바보같이……. 널 위험에 빠뜨려 놓고 좋아했다니.”

클레리아의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에단이 그녀를 달랬다.

“너나 나나 각자가 이 길을 선택했을 때 이미 그건 정해져 있었어. 누구도 시키지 않고 스스로 택한 거야,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그러나 클레리아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달라. 네 목숨까지 위험해진다면…… 그건 얘기가 다르단 말이야.”

그녀의 표정을 본 에단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그는 이를 악물었다.

클레리아는 성큼성큼 에단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지금이라도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 응? 근위대든 2기사단이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여기에 있지 말고.”

“거기로 간다고 해서 위험이 없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다른 기사가 수호 기사로 오면 그 사람은 죽어도 되고?”

“그런 말이 아니란 거 알잖아! 네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그녀가 울먹이며 다그쳤다.

“나도 내가 널 못 지키는 건 싫어.”

에단은 망토를 들어 허리춤을 보였다. 그의 검 손잡이에는 클레리아가 줬던 치유석이 박혀 세공되어 있었다.

“이게 있으니까 나는 끄떡없어.”

클레리아는 놀란 얼굴로 다가가 검 자루를 만졌다.

“치유석을 받고, 어떻게 간직해야 하나 고민하다 황실 대장장이한테 이걸 부탁했어. 얼마 전에 완성되어서 받은 거야.”

자신의 눈 색과 똑같은 투명한 분홍색 치유석.

클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만능이 아니야.”

“알아.”

“고집…… 안 꺾을 거지?”

“응, 못 가. 나는…….”

에단은 무척이나 쓸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 곁에서 못 떨어져.”

그런 그를 바라보던 클레리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곁에 없을 땐 이 검 절대로 품에서 놓으면 안 돼.”

“그럴게.”

“잘 때도 그 어느 때도!”

“당연히.”

상냥하게 웃어 주는 그의 얼굴 위로, 레인의 얼굴이 겹쳤다.

아아, 이제야…… 레인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울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것을 본 에단은 못 말린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같이 왜 울어. 앞으로는 우는 거로는 못 놀리겠네.”

“약속해, 절대 이 검 몸에서 떼 놓지 않겠다고!”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식으로 울어 버리면 반칙이잖아…….”

그는 조심스럽게 클레리아를 안았다.

“맹세할게, 절대 떼어 놓지 않겠다고.”

“……응.”

클레리아는 눈물 젖은 뺨을 그의 가슴에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2권에서 계속

공녀, 치유사로 살다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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