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엘레나와 레리안.
믿고 싶지 않았다.
표끈을 전해 주러 갔을 때 그렇게 나왔을지언정. 클레리아의 표끈이 먼저 검 자루에 매달렸을지언정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미하다고. 그저 죽마고우인 우정 정도에 비하다고 말이다.
엘레나는 핼쑥해진 얼굴과 탁해진 눈으로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봤다.
한동안 빗질도, 꾸미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아 곱슬기가 있는 머리칼은 엉망이었다.
피부 역시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푸석거렸다.
쨍그랑!
“아가씨!”
하녀 레이나가 놀라 급하게 화장대에서 그녀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벌써 일곱 개째 부수는 거울.
악다문 입술이 맞물려 바르르 떨렸다.
에단을 가슴에 품은 지 어언 5년.
그의 얼굴은 제국 지방까지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다정하면서 재치 있는 성격은 누구나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황실 근위대의 기사단장인 타이엔에게 훈련받으며 실력 역시 수제자로 거듭났고, 다부진 체격과 훤칠한 키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래서 귀족 영애로서 가십거리가 될 일이란 걸 알면서도 선언했다.
“에단과 정혼을 염두에 두고 교제하고 싶습니다.”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참을성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
당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어도 거절하진 않았다. 칼리스터 가에서도 별말 없었다.
아버지는 오히려 영특하다며 칭찬까지 했다.
그렇게 에단을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확정해 뒀다고 엘레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늘 클레리아가 불안했다. 이성에 눈뜨며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이 자연스레 싫어졌다.
클레리아는 지극히 어릴 적부터 이미 귀족의 예까지 터득해 주변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찻잔을 드는 손짓, 얘기를 경청하는 표정.
듣는 이조차 기분 좋아지는 웃음소리와 다정한 눈빛까지.
영민한 데다 우아하고 단아한 행동거지는 엘레나 자신의 것과 너무도 달랐다.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어느 곳에 있던지 클레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에 비해 클레리아가 해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들을, 엘레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짧은 인내심 덕에 좀처럼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언사도 늘 지적받기 일쑤였다.
어차피 모든 이들이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는데 왜 그런 것에다 열심이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쁜 드레스나 화려한 귀금속을 구경하고 모조리 사 모으는 것이 더 큰 기쁨의 연속인데.
그토록 판이하니 엘레나가 그녀를 시기 질투한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클레리아가 꾸미는 걸 죄악처럼 싫어하는 통에 화려하게 꾸미면 꾸밀수록 엘레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엘레나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보루였다.
하지만 축하 연회 날, 이제는 그것마저도 무너졌다.
그래도 에단의 약혼녀는 자신이라고.
끊임없이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에단이 청한 기사단 소식도 기가 막히는데 아버지, 카이론이 들고 온 소식은 더 청천벽력이었다.
“칼리스터 가에서 정식 요청이 있었다. 구두로라도 거론되던 우리와의 약혼을 이제 확실히 무효로 처리해 달라고 말이지.”
“그럴 리가 없어요! 에단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요! 설사 그랬다 해도 칼리스터 공작 각하는 나무라셨을 거예요.”
“칼리스터 공작 역시 동의했다. 아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더구나.”
그 일이 있고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방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던지고 깨부쉈고, 며칠간 뜯어말리던 카이론 역시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다시금 엘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네? 몸 상하세요.”
레이나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으나 엘레나는 그녀를 밀어 버렸다.
“네깟 게 내 마음을 알아?”
그렇게 중얼거린 엘레나는 무기력하게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뚜벅뚜벅
빠르게 복도를 뛰거나 하녀들의 가벼운 발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카이론과도 다른 그 발소리는 어느덧 엘레나의 방 앞에 다다른 뒤, 방을 치우는 하녀들 사이로 성큼 들어섰다.
엘레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레리안, 그 남자였다.
“오늘도 불쌍한 거울에 화풀이하신 겁니까?”
약간의 비꼬는 투로 물어도 엘레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 안에 몸을 더 동그랗게 말 뿐.
들어선 이는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 분주한 하녀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있길 몇 분.
고용인들이 파편과 깨진 거울을 치우자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닫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작정입니까?”
“당신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사랑의 아픔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말에 엘레나가 일어나 홱 노려봤다.
그래도 레리안은 능글맞게 웃으며 조금도 개의치지 않았다.
“뭐, 칼리스터 영식의 행보가 놀라웠던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렇게 애써 1순위를 차지했으면서도 고작 원한 것이 치유사 호위 기사라니.”
그의 말에 다시금 엘레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레리안은 능숙하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아이, 아니 그 계집애가 뭔가 한 게 틀림없어요, 수작을 건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에단이 나에게 이럴 리 없어요.”
“자꾸 그렇게 서글피 우실 겁니까? 눈앞에 있는 2순위 기사 서운합니다.”
그의 농담에도 엘레나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레리안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쥐고는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대로 정중하고, 로맨틱하게 입 맞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엘레나는 인상을 쓴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모습에 레리안은 그저 피식 웃었다.
“무슨 짓이에요?”
놀라다 못해 날 선 질문이었다.
하지만 레리안 역시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영애가 귀여워서 그만.”
“무례하네요.”
“그럼 뿌리치지 그랬습니까?”
“…….”
엘레나는 쀼루퉁한 얼굴을 한 채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의 행동이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내게 그런 행동을 해요? 하려면 클레리아 같은 애한테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전 그 영애 별로였는데요?”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아름다운 건 맞지요. 하지만 개성이 없어요. 겉치레에 가식만 가득하고요. 고귀한 척, 선량한 척. 난 그런 사람은 영 불쾌해요. 오히려 내겐 당신 같은…… 솔직한 사람이 더 매력적인데요?”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매력적이라고요?”
“제 소문 영애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고. 그런 제 눈에는 당신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엘레나.”
레리안은 엘레나의 손을 들어 손등에 키스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조금 우쭐대듯 웃었다.
“그러니 자, 이제 곱게 치장하시고 황녀님이 여는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게 어떠십니까?”
“황녀님이요? 지금 연금술 세미나에 참석차 갈레노프국에 가신 거로 아는데.”
“새벽에 오셨다더군요. 오늘 오후에 티 파티를 여신다니까 함께 가시죠.”
엘레나는 파티란 말에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망설였다.
“하지만 얼굴도 엉망이고…….”
“그런 모습이 또 다른 영애들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아주 그만이죠.”
레리안이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집사 레이먼이 뭔가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건?”
“북쪽 케만 산맥에서만 나는 포도로 만든 귀한 포도주입니다. 영애들과 황녀님께 선물로 드리십시오. 인상을 남기기에 아주 적절할 겁니다.”
케만 산맥의 포도라 하면 얼음 동굴에서 3년에 한 번씩 재배되는 과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소량으로.
엘레나는 상자들을 바라보다 레리안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 주죠?”
“관심이 있으니까.”
그 말에 만족한 듯 그녀는 야망이 가득한 눈으로 상자를 쓸었다.
“준비할게요. 미안하지만 캄스턴 영식,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러도록 하죠, 레이디.”
그가 인사한 뒤 나가려 할 때였다.
“레리안이라고 부를게요. 당신도 엘레나라고 불러요.”
그 말에 레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러죠, 엘레나.”
그렇게 나온 레리안은 방 안으로 치장을 도우러 들어가는 하녀들을 바라봤다.
“쿡…….”
가볍게 웃은 그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이슬레이터의 딸이 뒷배라… 일이 재밌어지겠군.’
* * *
모처럼 구호소가 아닌 내근을 하게 된 치유사들은 여유가 넘쳤다.
칼리에는 차를 마시며 서류를 정리했고, 레인은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잠을 잤다.
클레리아는 비상용 치유석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묘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이윽고 손을 옮기자 그 아래 투명한 분홍색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되어 가나요? 얼마나 만들었죠?”
“지금까지…… 총 세 개요. 많이 만들지는 못했어요.”
“꾸준히 만들어 두도록 해요. 비상 치유석은 우리의 치유력이 부족하거나 힘을 증폭시켜야 하는 순간에 꼭 필요하니까 많이 만들어 두면 둘수록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칼리에 님.”
“근데 겨우 그 정도에서 멈추려고?”
자는 줄만 알았던 레인이 끼어들었다.
구호소 소동 이후, 두 사람은 꽤 가까워졌다.
레인은 책상 위에 있는 클레리아의 치유석을 들어 유심히 살폈다.
“더 크게 만들어. 어차피 치유석은 크게 만들어도 무게가 별로 안 나가니까 부담스럽지 않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요?”
“충분하긴. 더 크게 만들어도 상관없어. 오히려 크면 클수록 힘도 많이 담기니 여유도 생기고. 첫 치유석만큼 무한한 힘이 있는 게 아니라서 크기도 신경 쓰는 게 맞아. 넌 아직 서툴러서 무리려나?”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받아서 안을 보자 정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치유석이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클레리아의 것은 겨우 손톱만 한 크기였다.
“그렇네요. 더 크게 만들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레인 님.”
클레리아가 웃으며 답하자 레인은 잠시 딴 곳을 바라보다 홱 돌아섰다.
“하룻강아지는 모르는 게 많구먼. 칼리에 님, 숙제 좀 팍팍 내요!”
그 말에 칼리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치유사 집무실 문을 두드렸고, 곧 르누엘룻 신전의 수습 사제가 들어왔다.
“저, 치유사 클레리아 님을 찾는데요?”
“전데 무슨 일이시죠?”
클레리아가 일어서자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사제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치유사님 앞으로 이게 왔습니다.”
그가 전하는 것을 받아든 클레리아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뭔데 표정이 그래?”
다가온 레인이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는 정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게 여기에? 그것도 하필 이 사람에게서?”
레인이 의외라는 듯 말했지만, 클레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황가의 서신이었다.
‘남들은 1년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한다는 황가 서신을 대체 근래만 몇 번을 받는 거지? 이번엔 또 뭐라 쓰여 있으려고?’
“그럼 전달 드린 것으로 알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클레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습 사제는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 집무실을 나갔다.
클레리아는 낮게 숨을 내뱉으며 서신을 뜯었다.
[오늘 오후에 티타임이 있을 예정이니 와서 피부 관리 할 것.
ps. 금으로 수 놓인 붉은 융단이 다섯 번째 햇빛을 받으면…….]
대면하고 있지 않아도,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아래, 새로운 수수께끼 같은 글 역시 여전했고.
“……황녀님은 지금 출타 중 아니셨나요?”
“아…… 연금술 세미나 차 갈레노프국에 가셨었죠. 새벽에 돌아오셨다는 것 같았는데. 황녀 전하의 서신인가요?”
클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에는 안경을 쓰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관리를 너무 열심히 해 드렸군요.”
그 말에 레인이 깜짝 놀라며 클레리아를 봤다.
“칼리에 님이 하시던 걸 하룻강아지가 한다고? 웬일이래.”
“그럼 레인 님께서 대신 가 주실래요?”
“미쳤어?”
레인은 다시 책상에 다리를 올렸다.
“귀족도 싫은데 황족은 더 꼴 보기 싫지! 난 그 여자가 만드는 포션이나 돌 말고는 관심 없어. 근데 왜 그 여자가 네게 관심을 가져? 그거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는데. 역시 공작가 정도 되는 사람은 황녀도 막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냥 한 번 권했는데 너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도중에 듣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말이 나온 것 같은데.
“레인…… 제발 부탁인데 말조심해 주지 않겠어요? 이러다 우리 모두 황실 모욕죄로 사형당하기 딱 좋겠네요.”
“아, 실수.”
그런 말을 하면서도 레인의 얼굴에는 실수했다는 기색이 없이 당당했다.
새삼 클레리아는 레인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 * *
모처럼 구호소를 가지 않아 여유가 생겼다 싶었는데…….
클레리아는 마차에서 내려 화려한 황궁을 바라봤다.
‘걸려도 잘못 걸린 게 분명해. 회귀 전에는 접점이 없어서 간혹 보는 사교 모임에서 눈총만 참으면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쓰게 웃었다.
“하긴 눈총뿐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안 좋았던가.”
그녀는 문득 회귀 전 재판장에서 봤던 황녀를 떠올렸다.
“무슨 소리야? 마지막까지 안 좋았다니?”
“아!”
순간 클레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에 에단이 함께 있다는 것을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녀가 황급히 무마하자 의아하게 바라보던 에단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곧 예를 갖춰 허리를 굽혔다.
“다녀오십시오, 클레리아 님. 그동안 전 잠시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를 뵈러 다녀오겠습니다. 두 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아버지를 뵈러 가게?”
그녀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안부도 전해 드려 줘. 요즘 얼굴을 제대로 못 뵌 지 오래됐어.”
“그러겠습니다.”
인사하는 그를 보는 클레리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밝은 태양 아래 백색 갑옷을 갖춰 입고 답하는 에단은 눈이 부셨다.
“이따 봐요, 에단 경.”
클레리아는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한 계단, 두 계단.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뒤를 돌아보자 아직 그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킨 채 지켜보고 있었다.
떨리기 시작한 가슴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클레리아는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황궁으로 향했다.
* * *
‘금으로 수놓인 붉은 융단이 다섯 번째 햇빛을 받는다고?’
황실 바닥의 융단은 금색 융단이다.
황족의 길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깔린 곳으로 가려면 전에 봤던 정원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이러다 길 잃는 건 아니겠지.”
난감한 빛으로 중얼거리며 걷던 클레리아는, 복도에 누군가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귀족인 것 같았으나 드레스나 장신구가 그다지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 저분은?’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클레리아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첸시아 데포렌 남작 영애였다.
그녀는 라스칸트 서쪽 지방에 아주 작은 영지를 가진 알버트 데포렌 남작의 딸이었는데, 가문도, 가진 것도 미미해 늘 존재감 없이 구석에 자리했었다.
귀금속이나 값비싼 옷감 등이 늘 화두에 올랐던 사교 모임에서 늘 멀찍이 떨어져 있던 클레리아와 그녀가 동지애를 느낀 건, 비단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데포렌 영애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새삼 반가움에 화색이 도는 클레리아와는 달리 창밖을 바라보는 영애의 얼굴은 어두웠다.
지금도 사교 모임에는 열심히 참석하지만, 성과는 없는 듯해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클레리아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첸시아 데포렌 영애 아니신가요?”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프라이어스 영애 아니신가요! 오랜만에 뵈어요.”
결혼 전에도 간혹 모임에서 대화를 나눴으니 그녀 역시 클레리아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황녀님의 티 파티에 오신 건가요?”
첸시아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저 말고, 제 16촌 친척인 트리엔 델토른 후작 영애가 초대받아 마침 방문했던 저까지 함께 왔답니다. 영애가 저번에 황녀님께 고급 향수를 선물한 모양인데 그게 마음에 드셔서 다시 부르셨다나 봐요.”
“아… 그러셨군요.”
클레리아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16촌이라는 먼 친척의 호의가 있어야 이런 모임에 참여해 볼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하긴 귀족이 몇인데 황녀가 세세하게 다 알리도 없고, 힘도 없고 가난해 이름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면 초대받는다는 건 더욱 꿈같은 이야기일 터였다.
“델토른 영애에게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늘 즐겁게 지내신다면 앞으론 선물은 필요도 없으실 거예요.”
클레리아가 손을 잡으며 말하자 첸시아는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가끔 모임에서 프라이어스 영애를 봬서 외롭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있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에게 말 붙여 줄 말동무가 사라진 것에 클레리아 역시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정신 좀 봐! 그래도 너무나 영광되고 기쁜 일로 가신 건데. 제가 주책이었어요.”
“아니에요, 저도 영애와 나누던 대화가 즐거웠는걸요. 저 역시 섭섭해요. 데포렌 영애, 다음에 또 수도에 오시면 프라이어스 저에 서신을 주시겠어요? 제가 쉬는 날과 맞는다면 영애를 초대할게요.”
그 말에 첸시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도 같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친절하세요, 프라이어스 영애.”
클레리아는 그녀의 손을 두어 번 쓸고 놓아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데포렌 영애.”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자 첸시아는 한참이나 클레리아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멀어지는 클레리아를 보며 무척이나 속상한 듯 치맛자락을 쥐었다.
“흐음…….”
그런 그녀를 복도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조각상 뒤에 몸을 숨긴 두 사람.
엘레나와 레리안이었다.
“데포렌 영애는 여전히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못 하네요. 격식 떨어지게.”
“뭐, 황녀님이 그런 사람을 내치는 분은 아니니 어쩌겠습니까.”
“이만 가요, 못 볼 걸 봐서 눈 버렸으니 꽃이라도 봐야겠어요.”
그녀의 말에도 레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첸시아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그새 낚을 물고기라도 발견한 얼굴이네요.”
“엘레나. 난 남자로서 사교 모임에 일일이 참석할 수가 없으니 당신은 프라이어스 영애가 없는 지금, 당신을 뒷받침해줄 사람을 찾는 게 좋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레리안은 첸시아를 가리켰다.
“우리 가난하지만, 야망 있는 사람을 조금 키워 보면 어떨까 해서 말이죠. ……충실하게요.”
그의 말에 엘레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썩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 * *
파아앗
오늘도 수수께끼를 맞추자 신비로운 마법으로 순식간에 황녀의 궁에 들어섰다.
강한 바람과 함께 다시 공중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봐도 정말 감탄이 나오는 곳이야.’
머리칼을 붙든 채 바람이 잔잔해지길 기다렸다.
“오늘도 잘 찾아왔구나.”
뒤에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
돌아서자 조금 피곤한 기색의 세실리아가 보였다.
“황녀 전하.”
클레리아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자 그녀는 여전한 묘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원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있는 강아지 하나를 안아 들어 얼굴을 비볐다.
“이번 세미나도 역시 지루했단다. 특별히 혁신적인 발전이나 발견도 없으면서 그런 건 왜 정기적으로 여나 몰라. 그럴 바에야 집에서 연금술로 필요한 거나 만드는 게 낫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오늘은 어떻게 봐 드릴까요?”
“너무 지루한 곳에 있다 보니 답답해서 이따 오후에 티 파티를 열기로 했단다. 기력 회복이랑…….”
세실리아는 클레리아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늘 하는 피부 관리지 뭐. 특별히 바랄 게 있겠니. 이 미모 신경 쓸 거밖에 더 있으려고.”
클레리아는 순간 팔 위로 오소소 닭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몇 번 봤다고 나한테 왜 교태야? 대체 무슨 꿍꿍이지?’
여전히 반감에 혼란스러운 그녀와는 다르게, 세실리아는 클레리아가 제법 재밌는 눈치였다.
뭐,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으니 클레리아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세실리아의 얼굴 위에 손을 올렸다.
“타국을 다녀오시느라 여독이 좀 쌓이셨네요. 근육 뭉침도 있으시고요. 전체적으로 기력 회복과 균형을 맞춰 드릴게요. 피부는 조금 지치신 것뿐이라 금방 효과를 보실 겁니다.”
클레리아의 말에 세실리아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을 즐기던 세실리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지, 난 네가 무척 싫었단다, 프라이어스 영애.”
클레리아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크게 동요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알현실에서 널 본 날, 조금은 흥미가 생겼어. 치유력을 증명하고 난 너의 눈…… 예전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의지가 담겨 있더구나. 신기했어. 어떻게 그렇게 바뀐 건가 싶어서. 그래서 널 불러들였어. 기분 나빴니?”
“아뇨. 다만 황녀님이 제게 어려우신 분이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습니다. 저와 살갑게 대화하신 적은 없으시니까요.”
클레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회귀 전이였다면 아마 여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났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녀가 가지고 있는 혐오감에 대해 더는 모른 척,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다는 게 맞았다. 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꾸해야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세실리아는 조용히 눈을 떠 치유에 집중하고 있는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변했구나, 예전의 너라면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아닙니다, 하고 순순히 대답하고 말았을 텐데.”
클레리아는 순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세실리아에게 조금 소름이 끼쳤다.
“내가 널 왜 싫어한 것 같으니?”
“지금 말씀하신 대로 가식적이기 때문이 아니셨을까 합니다.”
그 말에 세실리아는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키지 않는 상대에게 딱딱한 태도는 여전하구나.”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클레리아는 그녀에게 놀라고 있었다.
그저 무작정 싫어하고 거리를 두고. 무관심하다고만 생각했던 황녀가 이렇게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왜지? 말하는 것만 보면, 황녀는 날 오랫동안 지켜봤다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생각할 때쯤 세실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내게는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허상이었거든.”
그제야 클레리아의 눈이 세실리아의 눈과 마주쳤다.
“난 오히려 너보다 이슬레이터 영애가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 그 영애는 본능에 충실했으니까. 험담하고 싶으면 험담하고, 잘 보이고 싶어서 아부할 거면 아부하고. 속과 겉이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 겉과 속이 같은 건 그대 같아. 프라이어스 영애. 바로 그대가 말이야.”
클레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치유력을 내는 손이 조금 떨리기도 했다.
잠시 뒤 그녀는 황녀의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다 됐습니다, 황녀님. 확인해 보시겠어요?”
일어난 세실리아는 손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만족스럽다. 몸도 아까보다 훨씬 개운하구나. 고마워.”
클레리아가 일어서려 할 때였다.
세실리아의 붉은 손톱이 천천히 움직여 클레리아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앞으로 내가 그대에게 클레리아…… 라고 불러도 되겠지?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게 불편할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클레리아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따를 겁니다.”
가까스로 대답하자 세실리아는 씩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그대는 날 보면 마치 죽음의 문턱 앞에 선 것처럼 사색이 돼. 그러면서도 두 눈은 피하는 법 없이 똑바로 마주치지. 그 점이 정말 재미있어.”
세실리아의 말을 들으며 클레리아는 그녀에게 잡혔던 손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손을 잡다니. 대체 이건 무슨 뜻인 걸까.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런 클레리아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급하게 불러서 많이 난처했을 텐데 고맙구나. 덕분에 티타임을 즐겁게 보내겠어.”
그렇게 말한 황녀는 클레리아를 향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전하, 이것은……?”
“기특해서 주는 선물이다.”
받아서 열어 보니 안에는 따뜻한 노란빛이 도는 발광석이 담겨 있었다.
“발광석(發光石)이자 발열석(發熱石)이란다. 가지고 있다 보면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이야.”
연금술사가 만드는 돌이나 포션은 굉장히 고가였기에 클레리아는 그것을 받아 든 채 어쩔 줄 몰랐다. 거기다 이 물건은 제국에서 알아주는 실력자 세실리아가 만든 것이 아닌가.
“하지만, 황녀님. 이 귀한 걸 제가 감히 어찌 받을지…….”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건데 뭐 어떠니? 난 발에 차이는 것들이 그건데. 걱정하지 말고 받으렴.”
그렇게 말한 세실리아는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 종을 흔들어 치장을 도울 시녀들을 불렀다.
클레리아가 예를 갖춘 뒤 왔던 것처럼 돌아가려 할 때 세실리아가 덧붙였다.
“네가 내게 마음을 여는 날이 기대되는구나.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거다, 클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