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52)

제8장. 좋은 사람들은…… 늘 바보들이야.

클레리아는 약을 봉투에 곱게 접어 넣었다.

“오늘부터 삼 일간은 이걸 끼니 후에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아셨죠? 절대 거르시면 안 돼요?”

“예, 치유사님. 감사합니다.”

가벼운 식중독 증상으로 왔던 환자는 어두워진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를 보내고 클레리아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수고 많았어요, 클레리아.”

“칼리에 님께서도 고생하셨어요.”

그때 레인이 휙 둘 사이를 가로질러 나갔다.

“레, 레인 님. 고생 많으셨어요.”

꾸벅 인사하는 클레리아를 흘긋 곁눈질로 본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칼리에를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칼리에 님.”

“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봐요, 레인.”

“레인 님! 저희 마차를 타고 가세요.”

클레리아의 외침에도 그녀는 이미 저만큼 멀어진 후였다.

“클레리아, 괜찮으니 그냥 둬요. 우리도 이제 돌아갑시다.”

“저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신 것 같아요.”

“물론 소중한 이를 잃고 나서 세 분의 행동이 거슬렸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화풀이해서도 안 되겠죠. 다만 지금은 많이 예민할 테니 클레리아가 이해해 주도록 해요.”

칼리에의 말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종일 날 선 시선을 받아 내는 게 얼마 만인지…….’

클레리아는 새삼 자신이 레인의 시선을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깨달았다.

‘풀 수 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 * *

[네가 귀족을 싫어하건 아니건 그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레인.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말도 안 되는 잣대를 들이밀어서 판단하지 마. 잘못된 미움 때문에 좋은 사람까지 밀어내지는 마.]

어두운 방 안에서 레인은 힘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바닥에 앉아 있었다.

템즈의 꿈을 꿨다.

어떤 마을로 파견을 갔을 때의 기억인데, 사건 해결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사람들에게 변명하기만 급급하던 귀족 영주를 만났었다.

순해 빠진 그 얼굴이 가면이라 믿었다. 그가 밤마다 노인과 아이들을 피습해 구타하고 죽이는 거라고.

그렇게 그를 증오하고 경멸했다.

그런 그녀를 템즈가 간신히 잡아 주었을 뿐.

치안대가 아니면 스스로라도 잡아내겠다며 벼르던 어느 날.

보란 듯이 그 귀족은 피습했던 일당을 소탕하고 상처를 입었다. 왼쪽 팔에 신경이 끊어지는 큰 부상이었음에도 그는 치료 중에 말했다. 약한 자들을 그렇게 괴롭힌 자들을 보니 화를 멈출 수 없었다고.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다친 줄도 몰랐다고 말이다.

더 늦었다면, 치유사인 레인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다시는 팔을 쓸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분명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의 탓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그의 선량함을 외면하고, 애초에 그가 제대로 사람들을 보호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타박했다.

그런 그녀에게 템즈는 늘 말했었다.

미움 때문에 좋은 사람까지는 밀어내지 말라고.

“……그래서 바보같이 어려운 사람 돕겠다고 나섰다가 그렇게 멍청하게 먼저 가 버린 거야?”

그녀는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템즈를 떠올렸다.

“귀족이 싫다는 건 변명이야. 사실 좋은 사람이 더 싫어. 좋은 사람은 늘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리잖아, 엄마나 당신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레인은 옆에 놓은 술병을 들어 입으로 들이부었다.

가슴팍과 옷을 적시며 술을 삼키던 그녀는 힘없이 손을 떨어트리며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 * *

“후…….”

제법 완연히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레인이 겉옷을 여몄다.

초겨울에 진입하니 기관지 환자가 좀 늘었을 뿐, 구호소에는 그다지 많은 환자가 몰리진 않았다.

클레리아와 칼리에는 황궁 반대편 쪽 또 다른 구호소의 상황을 보러 갔고, 에단이 호위를 맡아 함께 갔다.

바르서스 구호소에는 리암과 레인만이 남았다.

“저…….”

그때 리암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사실 어제 그녀에게 데인 건 클레리아와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온종일 냉기를 뿜으며 지적하고, 단답하고, 무시하고.

결국, 지친 리암이 에단을 졸졸 쫓아다니며 하소연했더랬다.

‘애쓰는군. 진작 적당히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성은 알아줘야겠군.’

다시금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는 걸 통에 싸늘히 바라보자 리암이 흠칫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레, 레인 님. 어제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그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정자세를 취했다.

“템즈 하번 경의 임무를 인계받아 앞으로 레인 세릭스 님의 호위를 맡게 된 리암 아켈리엔이라고 합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백색 갑옷. 거기에 붉은 머리칼과 갑옷을 입어도 드러나는 다부진 체격.

서글서글한 인상.

그렇게 리암을 훑던 그녀는 끝에 템즈를 떠올렸다.

잠시 레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을 본 리암이 오히려 당황한 기색이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리암 아켈리엔?”

레인의 물음이었다.

“예?”

“내 수호 기사는 파렴치하고 악해야 해. 그럴 수 있겠어?”

“……?”

알 수 없는 말에 리암이 되물으려 할 때였다.

히히힝!

그때 멀리 말 울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달구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여, 펜리스.”

“레인 님, 오랜만에 뵙네요. 거의 3년 만인가요?”

“응, 그 정도. 웬 꼬마지?”

마부석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헌터를 보며 레인이 물었다. 헌터는 그녀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누구 보고 꼬마래?”

“허, 고놈 말버릇 보게.”

그녀가 쥐어박으려 하자 헌터는 쪼르르 뒤로 달려가 사람들 내리는 걸 돕기 시작했다.

“하하, 저래 봬도 말 모는 솜씨 하난 끝내줍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는 펜리스의 뒤에 입을 삐죽이던 그녀는 리암에게 고갯짓을 했다.

“도와줘.”

“아, 네.”

리암은 서둘러 달구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구호소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던 레인에게 헌터가 물었다.

“클레리아 누나는? 어디 갔어?”

“무슨 사이기에 그 사람을 찾아?”

그 말에 헌터는 혀를 차며 레인을 바라봤다.

“뭐 어때서? 보고 싶으니까 찾지?”

“칼리에 님과 다른 곳에 출타 중이다.”

할머니가 비틀거리는 걸 붙들어 도운 헌터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럼 오늘 못 보려나.”

꽤 친근히 말하는 녀석을 보고 레인이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물었다.

“왜 보고 싶은 건데? 그 사람?”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니까!”

“꼬마 주제에 조숙하네. 벌써부터 여자 따지고.”

퍽!

레인의 말에 헌터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때렸다.

“그런 거 아냐! 클레리아 누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그 말에 잠시 비아냥거리며 웃던 레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클레리아 누나는 목숨을 걸고 날 고쳐 줬거든. 그리고 여기 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해.”

“그건 여기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이 그래.”

“아닌데?”

헌터가 척! 하고 손가락을 들어 레인을 가리켰다.

“누나는 아니잖아!”

레인은 인상을 쓰며 헌터의 손가락을 밀쳤다.

“꼬마가 겁도 없이 못 하는 말이 없어.”

헌터가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렇게 함께 구호소 밖 풍경을 바라보다 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그 사람이?”

“응!”

“그럼……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

“왜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

레인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좋은 사람은 일찍 죽거든. 그 사람이 오래 살길 바라면 그런 소리 하지 마.”

“……지, 진짜야?”

헌터가 기겁하며 물어도 레인은 대답하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펜리스가 인사했지만, 옆에서 고삐를 쥔 헌터는 심각한 얼굴로 뚱한 표정이었다.

“헌터, 인사 안 해?”

펜리스의 재촉에도 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젓고는 고삐를 움직였다.

“이랴!”

영문을 알 리 없는 펜리스가 당황한 모습이었으나 레인은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그녀는 한참을 지켜봤다.

* * *

“좋은 사람이라……”

밤새 잠을 설친 레인은 퀭한 얼굴로 구호소를 향해 걸었다.

헌터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레리아라는 여자는 칼리에의 지침을 따르며 구호소 일에도 성실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귀족이란 직분을 생각해 봤을 때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높은 신분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면은 템즈와 조금 닮았으려나.’

그러다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

“닮기는 무슨.”

그녀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템즈는 아버지 대신이었고, 가족이었고, 스승과도 같았다. 그런 그를 털끝만큼이라도 닮은 사람이 있을 리가,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을까.

“당신이 없으면 난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데…… 템즈.”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지 않아, 레인.]

그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과 칼리에 님을 제외하면… 난 아무도 안 믿어, 안 믿을 거야.”

그녀는 그 언젠가 슬픈 눈으로 보던 그를 향해서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 * *

쏴아아.

큰 탈 없이 며칠이 지나갔다.

여전히 바쁜 구호소 일에 치이는 레인은 입원 환자를 점검하고, 가제 수건과 가위 등 소독이 필요한 물건들을 세탁했다.

한참을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흘끗 돌아보자 세탁물을 정리하러 들어온 클레리아였다.

헌터와의 대화 이후 왠지 모르게 자꾸 그녀가 신경 쓰이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템즈가 떠올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레인이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나가려 할 때였다.

“레인 님!”

클레리아가 불쑥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환자들을 처치했던 것들인데 맨손으로 하면 안 좋아요.”

클레리아는 레인의 손을 손 소독제로 씻긴 뒤 특수 장갑을 하나 꺼내 끼워 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인은 그대로 얼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기분 나쁘셨어요? 하지만 그래도 맨손으로 세탁물을 빠시는 건 좋지 않아요.”

“……하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다가오지 마!”

급작스레 울컥한 레인이 소리를 질렀고, 클레리아도 흠칫 놀라 물러섰다.

“죄송합…….”

클레리아가 사과하려 했지만, 레인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크게 낙담한 클레리아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레인은 급하게 허겁지겁 구호소를 빠져나갔다.

[맨손으로 세탁물을 빠는 건 안 좋아.]

언젠가 했던 템즈의 목소리가 클레리아와 겹쳤다.

‘그 여자는 템즈가 아냐, 닮은 것도 아니야! 근데 왜, 왜 자꾸! 제길, 제길…… 제기랄!’

자꾸만 떠오르는 다정한 손길을 떨치려 레인은 달리고 또 달렸다.

* * *

“괜찮아?”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던 에단이 물었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둘러댔음에도 그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레인 님 때문이구나.”

클레리아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에단에겐 거짓말 못 하겠다.”

그녀는 조용히 맞잡은 두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미움을 노골적으로 받은 건 오랜만이라. 안 겪어 본 것도 아닌데 유독 요즘은 힘드네. 전에는 어떻게 견딘 건가 싶어.”

“대놓고 싫어하는데 그걸 견디는 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어. 힘든 게 당연해.”

에단은 고생 많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다정하고 걱정스러워서, 클레리아는 조용히 그 손길에 위로받았다.

“에단이 머리 쓰다듬어 주니까 한결 기분이 좀 낫다.”

“그러라고 하는 거야. 기특해서.”

“고맙습니다.”

“별걸 다 고마워하십니다.”

“하하하하.”

그제야 클레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래도 레인 님한테 다가가는 거 포기는 안 할래. 이제 함께 일하게 됐고, 또 사실 레인 님이 날 피하는 게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거든. 오해가 있다면 꼭 풀고 싶어. 더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피하기 싫어.”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응, 에단이 응원해 줘.”

“그건 좀…… 그러다 나까지 불똥 튀면…….”

“뭐어?”

“농담이야, 농담. 응원 안 할 리가 없잖아.”

그제야 에단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구호소에서 레인 님의 눈치 보느라 늘 긴장해 있더니…… 웃으니까 이제야 보기 좋네.”

“내일도 잘 부탁해.”

클레리아가 그렇게 말하자 에단은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클레리아 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에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내일은 꼭 레인 님과 조금 더 친해지자.”

* * *

“윽…….”

구호소로 들어가려던 리암이 하얗게 질리며 돌아 나왔다.

그 모습에 클레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안 들어가세요?”

“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부, 분위기 때문에.”

리암의 울상 짓는 모습에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자, 거의 살기에 가까운 기운을 내뿜는 레인이 보였다.

“어,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저기압이신 것 같은데요.”

“말 걸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야, 에단. 오늘만 내가 클레리아 님 호위 맡자. 무서워 죽겠어.”

“……그냥 죽어.”

“너무한다! 진짜!”

하지만 리암의 말에는 클레리아도 공감했다.

지난 저녁, 괜한 호의가 심기를 건드린 건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서들 들어가지 않고 뭐하나요?”

그때 도착한 칼리에가 들어서자 나머지 셋도 어쩔 수 없이 뒤따랐다.

나름 조심조심 걷는다고 걸었는데, 들어가자마자 클레리아는 레인과 눈이 딱 맞아 버렸다.

그대로 굳어 버린 클레리아와는 달리, 이상하게도 레인은 묘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할 바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그녀가 먼저 클레리아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뭐지? 눈이 부으신 것 같은데.’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어 클레리아는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 * *

“나이 때문도 그렇고, 아무래도 몸이 차서 그러신 것 같아요. 계속 소화는 더딜 거고요. 오늘 구호소에서 담요 두 개를 더 드릴 테니 주무실 때 꼭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찻잎도 챙겨 드릴게요.”

“고맙소, 치유사 선생.”

노파의 손을 꼭 붙들며 클레리아는 웃었다.

겨울을 앞두고 노약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하나하나 상세히 들으며 대답하는 그녀를, 레인은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명 한 명 응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체력이 부치는 일이니 인상 한 번 쓸 법한데도 클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이 일을 10년째 해 오고 있는 자신조차도 그러기 힘들었는데.

그 순간 레인은 눈을 크게 떴다.

클레리아의 모습에서 순간 템즈의 모습이 겹친 탓이었다. 사람들에게 웃어 주는 그녀 옆에 나란히 그가 서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얀 백색 갑옷을 정갈히 갖춘 그가.

그러다 그 잔영은 갑자기 레인을 향해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레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템즈가 계속해서 보이는 이유는 분명해. 저 여자는…… 그 사람을 닮았어.’

그렇게 생각하며 레인은 자리를 피했다.

“이제 점심을 준비할 테니 모두 드시고 가세요, 아셨죠?”

사람들에게 알리던 클레리아의 눈에 밖으로 나가는 레인이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는 서둘러 레인을 뒤쫓아 나갔다.

“저기, 레인 님.”

“…….”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클레리아는 왠지 모를 무안함을 느꼈다. 전에는 날카롭게 지적이라도 했는데 요즘의 그녀는 그조차도. 심지어 말까지 아끼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감자 수프를 하려고 해요. 감자 수프 좋아하세요?”

끄덕.

단조로운 반응에 클레리아가 무안한 얼굴로 ‘그렇구나.’ 하며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더 붙이고 싶은데, 반응이 이러니 좀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레인은 클레리아를 거부하고 있었다.

조금의 틈도 허락지 않는 아주 완강한 거부.

“되도록…….”

“네?”

마침내 들은 레인의 목소리에 클레리아가 화색을 띤 채 대답했다.

“꼭 필요한 일 아니면 나한테 말 걸지 마. 난 그쪽이… …싫어.”

조금이나마 했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게 말한 레인은 메마른 얼굴로 클레리아의 곁을 지나쳤다.

* * *

레인의 외면은 나날이 심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녀는 멀리서 클레리아를 조용히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면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정말…… 사람을 사귀는 거에 너무 서툴러서 원. 언제쯤 나아질는지.”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러 모인 자리에서 칼리에가 근심 가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오래가는 레인의 상태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기, 그날 레인 님의 심기를 너무 건드린 건 아닐까요?”

클레리아가 조심스레 묻자 칼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는 없는 아이예요.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도통…….”

그녀가 턱을 괴며 한숨을 내뱉었다.

에단 역시 궁금한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저기, 칼리에 님. 레인 님과 템즈 경은 어쩌다 그렇게 되신 건가요?”

칼리에는 따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레인의 아버지는 영주 때문에 직장을 잃고, 레인과 어머니를 탓하며 무차별적으로 때렸어요. 결국 레인을 발견했을 때, 레인은 죽은 어머니를 품에 안고 치유력이 폭주하고 있었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쓴 입맛을 다셨다.

“열악했던 환경 덕에 레인의 성격은 많이 비틀려 있었어요. 게다가 어린애를 떠맡기는 셈이었으니 기사 중에 나서는 이가 없었죠. 결국, 실력은 뛰어나나 몰락한 귀족 출신이었던 템즈 경이 그녀를 맡게 됐어요.”

칼리에의 설명에 리암과 에단, 클레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템즈 경이 함께 파견 임무를 다니면서 많이 가르쳤죠. 레인에게 유일한 가족이었을 겁니다.”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그때 한 보조사가 뛰어와 그들을 불렀다.

“치유사님!”

“무슨 일이죠?”

“그게…… 밖에.”

나가 보자 한 노숙자가 술에 절어 만신창이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레인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보조사님, 술 깨는 약 먹이고, 필요하면 결박해 두세요. 그리고 상황 보고 괜찮으면 돌려보내세요.”

그에게서 나는 악취와 행색에 레인이 인상을 썼다.

한창 소란을 피우던 노숙자가 발을 접질렸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크게 넘어졌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가 수건을 들고 달려 나왔다.

“이봐, 가벼운 뇌진탕 정도일 테니 물러나. 리암 경이 와서 포박할 때까지 건드리지 마.”

레인의 말에도 클레리아는 그를 붙들고 살폈다. 노숙자는 정신도 이상한지, 말을 중얼거리고 수시로 몸을 떨었다.

클레리아의 눈에는 그를 빨리 처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깨끗한 물수건으로 닦고, 찢어진 머리 부분에 치유력을 쏟았다.

“씁…… 하여간 말 진짜 안 듣지. 그 사람한테서 떨어지라니까? 위험해.”

레인의 말에도 클레리아는 개의치지 않았다.

“머리에 출혈이 있으니 빨리 상태를 봐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그의 출혈을 멈추고, 뇌진탕이 있는지 확인까지 한 후에야 클레리아는 안도했다.

“이런 이들이 갱생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해. 그리고 실패하면 며칠 뒤 다시 여기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레인이 쌀쌀맞게 말하며 클레리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녀는 레인의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아픈 사람을 보면 치료해야죠. 여긴 그러려고 있는 구호소고, 전 치유사잖아요.”

클레리아가 단호히 대꾸했다.

“비록 다시 이런 몰골로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을 무관심하게 버려 둬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끝까지 지켜봐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네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난 분명히 경고했…….”

말을 채 끝마치지 않은 레인이 클레리아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노숙자가 깨진 술병을 들고 휘두른 까닭이었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눈이 뒤집힐 듯 화를 내며 레인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리암 경! 저 사람 빨리 결박해!”

소리를 듣고 나온 에단과 리암이 서둘러 그를 제압해 묶었다.

“너같이 멍청한 것들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 위험하다고 했어, 안 했어?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죽고 싶어서 이래?”

레인은 클레리아의 양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며 다그쳤다. 그녀는 거의 발작에 가깝게 윽박질러 댔다.

“죄송해요, 손에 뭘 들었는지 확인을 못 했어요.”

“죄송하면 다야? 너 같은 것들이 난 제일 싫어. 너같이 착해 빠져서 앞뒤 분간 못 하는 것들이 제일 싫다고!”

레인은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클레리아를 밀쳤다.

놀랐다 해도 지나친 행동에 에단이 그녀를 말리려 할 때였다.

“레인 님……?”

클레리아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레인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약한 사람들 돕겠다고 왜 나서서… 그냥 귀족이면 남들처럼 잘 먹고 잘살 것이지 뭐하러 이런 데 따라와서!”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렇게 착해 빠져서 왜 이런 길바닥에서 그렇게 개죽음당하냔 말이야. 왜 나 같은 걸 지키겠다고!”

클레리아는 그제야 레인이 템즈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뻗어 레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흐느끼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요, 레인이 말한 대로 조심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으흐윽…… 템즈!”

정말 어린애처럼 레인은 목청이 터져라, 울음을 터트렸다.

* * *

“잘살 수 있었어. 몰락한 귀족이라도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서 다시 올라간 사람이었거든.”

그 소동이 있고 난 후, 레인은 클레리아를 데리고 히리스벨라관에 있는 템즈의 무덤을 찾았다. 그녀는 덤덤한 시선으로 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날 친동생처럼 챙겨 줬어. 아니, 아버지랄까. 제대로 된 아버지가 있다면 아마 그 사람 같았을 거야.”

클레리아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바보같이 사람만 좋아서…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될 것을 나 같은 걸 떠맡아서는.”

레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무덤 위로 떨어진 낙엽을 치웠다.

“오늘 너랑 같았어. 의뢰를 마치고 묵고 있던 여관에 있었는데 한 노숙자가 다쳐서 들어온 거야. 정복을 벗고 있어서 깨끗한 천을 떼오려고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나 대신 템즈가 공격을 받은 거지.”

순간 클레리아의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노숙자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제압했지만, 템즈의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졌어. 찌른 건 깊지 않았는데 단검에 독이 묻은 걸 몰랐거든. 치유력도 통하질 않았어. 퍼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자리를 비운 그 잠깐이 치명적이었던 거야.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러 나서더니…… 그렇게 가 버렸어.”

그녀는 템즈 하번이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치유사들이 쓰는 이 건물 이름이 히리스벨라지? 무슨 뜻인지 알아?”

“르누엘룻 님의…… 자장가라고 알고 있어요.”

그 말에 레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템즈가 여기 묻혀서 다행이야.”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고, 클레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노숙자는 어떻게 됐죠?”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건 알아냈는데, 치안대로 이동 중에 독약을 더 숨겼었는지 그대로 독사했어. 얻은 게 없지.”

클레리아는 물끄러미 무덤을 바라보다 품에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저번에 제대로 조문하지 못해서요.”

레인은 클레리아를 향해 섰다,

“저랑 에단과 리암을 못마땅해하신 거…… 상심하셨을 때 너무 소란피워서 그러신 거예요?”

“아니, 솔직히…… 귀족에게 반감이 있었기도 했고. 사실은.”

레인은 클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나 말이 없자 클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도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인 걸 알았거든.’

레인은 시선을 거뒀다.

“난 바보들을 잘 알아보는 편이거든.”

클레리아는 졌다는 듯 웃었다.

“그 후엔 제가 템즈 님처럼 행동해서 싫으셨던 거고요?”

“……넌 템즈를 닮았어. 그게…… 싫었던 건 아냐.”

클레리아는 따스하게 웃었다.

“전 템즈 님 발끝도 못 따라갈 거예요.”

“맞아, 못 따라가.”

클레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전처럼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응, 바보짓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하하, 네. 그럴게요.”

그렇게 말하고 클레리아는 꾸벅 인사했다.

먼저 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레인이 소리쳤다.

“봐주겠다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네.”

“잔소리도 다시 시작할 거야!”

“네, 가르쳐 주세요.”

웃으며 답하는 클레리아를 보며 레인은 피식 자신도 웃음을 흘렸다.

“실없이 웃는 것도 닮았네. 둘 다 바보야, 정말.”

그녀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훔쳤다.

[행복하게 살아.]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템즈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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