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52)

제7장. 첫 만남부터 미움을 사다.

“아, 리암 경. 먼저 도착해 계셨네요.”

치유사 전용 건물인 히리스벨라 관 앞에 리암이 서 있는 것을 클레리아가 발견했다.

“아, 영애. 일찍 오셨네요.”

클레리아는 치유사가 된 뒤,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오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칼리에가 치유사는 언제 어디서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고, 예정보다 일찍 도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탓이었다.

“네, 이렇게 오는 게 몸에 요즘 배어서요. 경께서도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 네. 이야기를 좀 들어서…….”

“이야기요?”

리암의 얼굴은 엊그제 보았던 것보다는 조금 어두웠다.

“사실 치유사 전담 수호 기사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에단이 어떻게 황제 폐하께 부탁드려서 낙하산으로 배정받은 건가 싶었거든요.”

“아…… 그것 때문에 조금…… 언짢으셨나요?”

리암은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정계와 손이 닿지 않는 별개 기관이다 보니, 복잡한 일에 얽혀 들 일도 없고, 명예도 따 놓은 당상인 자리니 마다할 리가 있나요.”

클레리아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무슨 소식을 들으셨기에?”

그녀의 물음에 리암이 다시 씁쓸히 웃었다.

“제 전에 계시던 템즈 하번 경이 독으로 급사하셨다더군요. 그래서 자리가 빈 거라 들었습니다. 그걸 들으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더군요.”

“독으로요?”

놀란 듯 클레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치유사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셨나요?”

“잠시 떨어졌을 때 그랬다고 합니다.”

“…….”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템즈 경에 대한 애도인지, 예상치 못한 소식에 대해 놀란 탓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템즈 경도 리암 경이 애도하는 걸 아실 거예요.”

그는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같은 기사의 사망 소식은 늘 쓸쓸하군요.”

그렇게 두 사람은 히리스벨라 관의 문을 열었다.

“……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집무실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너른 정원이자 공동묘지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날카롭게 가는 눈매에 얼굴선이 고운 여자였다. 그녀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리자, 새로 세워진 비석이 눈에 띄었다.

‘설마, 방금 대화한 템즈 경의 무덤인가.’

그때 여자는 들고 있던 한 다발의 꽃을 말없이 무덤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홱 돌아서 성큼성큼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이 그녀가 있던 곳으로 가자 과연 그 자리는 템즈 경의 무덤이었다.

“지인일까요?”

“글쎄요.”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클레리아는 옆에 있던 작은 꽃을 꺾어 무덤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편히 눈 감으시길.”

* * *

“그럼 전 기사단 쪽에 있다가 이따 바르서스 구호소 가실 때 맞춰 오겠습니다.”

“네, 이따 봬요, 리암 경.”

끼익

리암과 인사를 한 뒤 클레리아는 조심스럽게 치유사 집무실 문을 열었다. 보통 이 시간에는 혼자만 있는 경우가 많아 조용한 곳에 울리는 문소리조차 크게 느껴졌다.

“……누구?”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무실 안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복장은 치유사 복장인데. 설마 파견 임무를 나갔던 치유사 중 한 분이 돌아오신 건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 엎드려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어?”

아까 템즈 경 무덤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이었다.

“…….”

그녀는 들어선 클레리아를 말없이 노려봤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시선에 클레리아는 당혹감을 느꼈다.

“저…… 파견 가셨던 치유사님이신가요?”

용기를 내 물어도 여자는 인상을 쓴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클레리아가 무안함에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여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성큼성큼 클레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가 잔뜩 얼어 있을 때, 여자는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입술을 뒤틀었다.

“쯧, 거슬리게.”

클레리아가 자리를 비켜서자 여자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쾅!

“찬바람 들어오잖아, 추워 죽겠는데. 기본이 안 돼 있네.”

“죄,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길 막지 마.”

그녀는 걸걸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 처음 봤던 것처럼 다시금 책상에 엎드렸다.

기세가 완전히 눌린 클레리아는 조심스럽게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곧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끼니는 되도록 꼭 챙겨야 한다는 칼리에의 말에 따라 샌드위치를 싸 왔는데 먹을 엄두가 나질 않는 분위기인 탓이었다.

‘어떡해, 눈치 보여서 못 먹겠어. 늘 먹고 환기를 시켜 두었었는데.’

그때였다.

“이봐, 음식이라도 싸 온 거야?”

언제 일어났는지 여자가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아, 네. 그게 샌드위치를…….”

대답을 들은 여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먹을 거면 나가서 먹어. 냄새 풍기는 거 싫으니까.”

“네, 네!”

클레리아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어느덧 늦가을인지라 옅은 입김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정말 추워졌구나, 정말 내 실수네. 뭔가 미움도 산 것 같고.”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어 버렸다.

대놓고 미움받는 상황, 오랜만이었다.

회귀 전, 엘레나의 그림자로 살았을 때는 어딜 가든 수군거리며 험담하는 무리를 견뎌야 했다.

‘회귀한다고 다들 날 좋아하리란 법도 없지만…….’

그녀가 씁쓸히 웃었다.

“역시 미움받는 건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냐.”

그렇게 중얼거린 클레리아는 차갑게 식은 벤치를 하나 골라 앉았다.

‘차라리 잘됐어. 혼자 있을 때나 먹고 환기했지,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있으면 민폐야. 내일부터는 되도록 먹고 오자.’

그렇게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아리스의 솜씨는 정말 좋았다.

간단하면서도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맛을 낸다.

그녀가 만들어주는 샌드위치를 참 좋아하면서도, 오늘은 왠지 그것이 다 먹히질 않았다.

‘아침부터 민폐 끼쳐서 그런가.’

피식 웃어 버린 그녀가 하나 남은 샌드위치를 다시 통에 넣으려 할 때였다.

“어? 프라이어스 영애, 왜 여기 계십니까? 그거 샌드위칩니까? 오! 정말 맛있게 보이는데 안 드실 거면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리암과 에단이 집무실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 리암 경. 이거 말인가요? 드실래요?”

“네! 주십시오!”

리암이 그렇게 말하며 달려올 때였다.

“우왁!”

순간 리암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이어 에단이 다가와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고맙게 먹겠습니다, 클레리아 님.”

“어?어? 하지만 리암 경이…….”

“야 인마! 다리는 왜 걸어? 어? 내 샌드위치!”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이미 샌드위치는 에단이 자기 입으로 다 밀어 넣은 후였다.

“야! 영애가 나 먹으라고 주시는 걸 왜 네가 먹어!”

“시끄러워, 이미 없어진 걸 어쩔 거야?”

“아, 너무해 진짜!”

클레리아는 방방 뛰는 리암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왠지 모르게 요즘 들어 에단이 그와 있을 때 심술궂어진다는 느낌이 들 뿐.

그때였다.

“너희 말이야.”

안에 있던 여자가 어느새 나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건가? 아니면 히리스벨라관을 그쪽들이 전세라도 냈어?”

그녀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클레리아가 허리를 숙여 사죄해도 그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형편없는 것들.”

한차례 힐난 후 그녀가 돌아섰을 때였다.

“……레인, 돌아온 건가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클레리아 무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 끝에는 경직된 칼리에가 서 있었다.

“레인이라면…… 설마 레인 세릭스 님?”

에단이 중얼거리자 클레리아도 리암도 어깨를 흠칫 떨었다.

10년 전 마지막 치유사로 발표되었던 사람.

13세 최연소 치유사이자 평민 출신이었기에 간단한 발표와 제국민에게 식량을 나누는 행사로 공표를 마쳤던 그 치유사였다.

‘그때는 긴 머리칼에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전혀 몰랐어.’

그것은 클레리아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리암과 에단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칼리에는 레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돌아왔군요, 힘들었지요. 고생 많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조금 전까지 싸늘하기 그지없었던 레인의 눈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그녀는 칼리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템즈 경이…… 죽었어요, 칼리에 님.”

“압니다. 어제 장례를 치렀다고 들었어요.”

“제 탓입니다.”

“아니에요, 비극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칼리에의 위로도 소용없는 듯했다.

“살리지 못했어요. 모두… 제 탓입니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정적이 흘렀다.

늘 그렇듯 칼리에는 장부를 보며 구호소에서 할 일을 확인 중이었고, 레인은 다리를 꼬고 눈을 감았다.

‘템즈 경이 맡고 계셨던 치유사님이 레인 님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떠들어 댔으니.’

바로 어제 장례식을 치른 사람에게는 거슬릴 법했다.

‘미움을 산 건 둘째치고 몰상식한 사람이 됐어. 상심이 크셨을 텐데 어떻게 사과하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구호소에 다다랐다.

칼리에가 먼저 내리고 뒤따라 클레리아가 내리려 할 때였다.

“그쪽이 요번에 폐하가 발표하신 그 치유사지?”

예상치 못한 레인의 물음이었다.

“예? 네.”

대답을 들은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그래서 그랬군. 귀족이란…….”

그렇게 비꼰 레인은 훌쩍 뛰어 마차에서 나가 버렸다.

그녀의 신랄한 혐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인과의 만남이 험난한 것만 같아 클레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

찰과상 입은 환자에게 거즈를 덧대려 할 때 레인이 클레리아를 밀쳤다.

“치유사가 힘을 아끼면 어디에 쓰려는 거지? 국이라도 끓여 먹을 건가?”

“네? 하지만 칼리에 님께서…….”

“스스로 판단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칼리에 님을 귀찮게 할 생각인데?”

“그렇지만…….”

분명 칼리에는 치유력은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쓰고, 되도록 가벼운 병증의 환자는 적절한 처치를 하라고 가르쳤다.

클레리아가 난처한 기색이어도 레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환자에게 힘을 써 찰과상을 말끔히 치료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환자를 돌려보내는 그녀를 보며 클레리아는 그저 자리를 내주고 피했다.

“어디가?”

“네? 다른 환자를 살피러 가는데요.”

“갈 필요 없어. 내가 할 테니까 그쪽은 가서 비품 정리해. 환자들이 쓰고 난 붕대랑 옷가지도 빨고.”

레인은 다른 환자의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를 홱 클레리아의 가슴팍에 던졌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맞긴 했지만, 레인의 태도에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그녀에게 실수했던 걸 떠올리며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면 풀리실지도 모르니 그때 가서 말을 좀 붙여 보자.’

“네, 그럴게요.”

그녀는 방에 있던 환자복과 이불, 침대 커버를 싹 걷어들고 나갔다.

그 모습에 구호소 보조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레인과 클레리아가 나간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 저는 클레리아 님을 도우러 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요?”

보조사 한 명이 나가려는데 레인이 날카롭게 그녀를 불렀다.

“제가 치유하는 거 보조 안 할 건가요? 돌아오세요.”

“하, 하지만 클레리아 님 혼자 하시기엔 무리가…….”

“오시라니까요?”

결국, 보조사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치유사는 어떤 급박한 일에 마주칠지 몰라요. 저 정도가 어려우면 자격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레인은 다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으쌰!”

클레리아는 산더미같이 쌓인 침대 커버들을 커다란 솥에 겨우 욱여넣었다. 기다린 막대기로 사이사이를 헤집어 풀며 불을 확인했다. 이어 탈수를 마친 빨래를 낑낑거리며 들었다.

“이걸 혼자서 다 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돕고 돌아오던 에단이 다가왔다.

“응, 오늘 내로 다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라.”

“보조사들은?”

“바쁘셔.”

“…….”

뭔가 불만인 듯 말없이 서 있던 그는 클레리아가 들고 있던 빨래들을 받아 들었다.

“어? 그러지 마, 에단.”

그녀의 만류에도 그는 빨래 더미를 들어 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레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 덕분에 수월해졌어.”

“……필요하면 부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에단은 애써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선택한 길이니 어떤 처지가 되어도 존중하기로 했다.

‘적당히 지켜보며 적절한 때에 나서면 돼.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마, 에단 칼리스터. 어리숙하게 굴지 마라.’

그렇게 스스로를 자중한 뒤 그가 구호소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무슨……?’

딱 봐도 넘쳐 나는 수의 보조사가 레인의 곁에 바글바글 모여 있던 것이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에단이 그곳으로 향했다.

“레인 님.”

“왜 그러지?”

“왜 보조사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겁니까?”

“에단 경이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그만한 사유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레인 님, 저희가 아침에 무례를 저질렀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건…….”

“이봐, 에단 칼리스터 경.”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 봤다.

“당신이 클레리아에게 무슨 감정이 있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이곳에서 사적인 감정은 접어 둬. 여긴 당신들이 소꿉놀이하던 저택 정원이 아니야. 치유사 일을 해도 내가 10년은 더 했어. 그러니 잠자코 물러나 있어.”

에단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도가 지나친 비난이란 걸 알았으나 여기서 더 말을 꺼내 봤자 클레리아에게 좋을 일은 없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간단히 고개를 숙인 뒤 물러섰다.

그렇게 돌아나가는 그를 향해 레인이 덧붙였다.

“둘이 살가운 건 알겠는데 이제 치유사와 수호 기사 사이가 되었으면 존칭과 높임말은 제대로 쓰는 게 좋겠어.”

우뚝 섰던 에단은 묵례로 답한 뒤 구호소를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흘겨보던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레인.”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보조사들이 강물이 갈라지듯 갈라섰다.

“칼리에 님.”

레인이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따라와요.”

언짢은 표정을 보아하니 에단에게 하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귀찮아졌다는 듯 레인은 짧게 한숨을 내뱉은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빈방에 들어간 칼리에는 덥석 레인의 손부터 붙들었다.

“그러지 말아요, 레인. 10년 만에 나타난 동료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전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칼리에 님.”

냉랭한 태도에 칼리에는 낮게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남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해서 지적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제 구호소 일도 익숙할 텐데 융통성 없게 자꾸 칼리에 님께 의지하려 해서 한마디 한 것뿐이고요.”

“아뇨, 레인. 설사 레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신의 태도는 문제가 있어요. 언제나 템즈 경과 내가 지적하던 부분 아니던가요? 이러면 그가 슬퍼할 거란 거…… 알잖아요.”

그 말에 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만있길 원하시면 그렇게 하죠.”

칼리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우린 그대의 적이 아니라 동료예요. 레인은 혼자가 아니에요.”

차분히 달랜 칼리에가 방을 나서자 레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안녕?]

반나절.

잠시 기다리란 말과 함께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진 지 반나절이었다.

아침 일찍 떠 있던 해는 어느새 기울었고,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오래 기다렸겠구나. 방이 좀 추운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손을 비비더니 곧 난로에 장작을 넣고 헤집었다.

꺼져 가던 불씨는 그의 손놀림에 몇 번 흩날리더니 나무를 태우며 열을 냈다.

[밥 먹지 않았구나.]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음에도 그는 말없이 쟁반에 들린 음식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어디서 주전자를 가져와 난로 위에 걸었다.

조금 뒤 김을 뿜기 시작하자 내리고, 차를 가져왔다.

[일단 이거라도 마시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자.]

가지런히 무릎에 모아 둔 손에 온기를 품을 찻잔이 쥐여졌다.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온기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템즈 경, 식사를 데워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받아 온 쟁반을 들고 와 앞에 내려놓았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그제야 검은 긴 머리칼 사이로 퀭한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였다.

자신과 같은 까만 머리칼.

거기에 말끔한 얼굴과 인자한 미소.

저렇게 다정한 표정을 본 게 언제였더라?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템즈는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빵을 찢고, 수프에 적셨다.

[자, 아 해 봐.]

이 사람은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이러는 게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럼에도 배고픔이란 본능에 입은 자연히 벌어졌다.

[옳지.]

부드럽고 고소한 수프가 따뜻함을 머금어 쫄깃한 빵과 함께 목으로 넘어갔다.

[이름이 뭐니?]

[……레인 세릭스.]

[난 템즈 하번이라고 해. 오늘부터 네 호위를 맡은 수호 기사란다. 잘 부탁해.]

몇 번 넘기는 것을 본 그가 수저를 손에 쥐여 주며 웃었다.

[당신 귀족이야?]

그 말에 템즈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지, 기사 서임을 받으면 백작이나 자작 정도의 계급을 주거든. 그러니 귀족이 맞지.]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을 울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가 깨진 그릇 사이로 퍼지는 것을 템즈는 말없이 지켜봤다.

[수호 기사 같은 거 필요 없어. 나 떠맡기 싫어서 애물단지로 여기는 거 알아. 당신도 그렇잖아? 그니까 이딴 거 할 필요 없어, 가 버려.]

그러나 그는 조용히 바닥에 나뒹구는 쟁반을 챙겨 깨진 조각을 담고, 수건으로 바닥을 훔쳤다.

[맞아, 나도 원해서 온 건 아니야. 그저 돌고 돌아 배정받아서 온 것일 뿐. 하지만 난 일단 내가 맡은 책임은 다할 거야. 그리고 지금 이렇게 보니…… 널 거절하는 건 내가 사양하고 싶다.]

레인은 달려가 템즈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쩍 마르고 야윈 아이의 손길은 그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귀족이 아빠를 이상하게 만들었어! 엄마를 죽게 하고 날 아프게 했어! 귀족은 질색이야, 귀족이 내 옆에 오는 건 싫어! 그러니까 나가! 나가 죽어 버려! 귀족 따위 다 죽어 버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발과 손도 그렇게 여릴 수 없었다.

템즈는 천천히 레인의 손을 붙들고 품으로 당겼다.

[아팠구나. 미안하다, 레인. 더 일찍 구해 주지 못해서…… 네 가족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레인. 미안해.]

왜일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사람이 끔찍한 고통을 줬던 사람들 대신 사과를 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왈칵 눈물이 났다.

[엄마…… 엄마아…….]

결국, 그의 품에서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눈물이 쉴새 없이 뺨을 흘렀다.

레인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제는 너무도 아득한, 그와의 첫 만남.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늦가을이었지.’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다 환자들을 응대하고 있는 클레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는 걸까.’

말없이 지켜보던 그녀는 다시금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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