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첫 번째 치유석의 주인은.
시합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대기실도, 이제는 허전할 정도로 거의 텅 비어 버렸다.
대기실에 들어선 에단은 빈 곳을 훑은 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조용히 부상 방지를 위한 붕대를 손목에 감았다.
‘결승까지 순조롭게 올라오긴 했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결승전이 아니었다.
‘클레리아는 역시…… 오지 못 할까. 그 아이가 치유사 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였는지 잘 아니 투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저도 모르게 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섭섭하다니.
공과 사를 구분 못 할 나이도 지났는데 어째서 그녀에 대한 일이라면 이리도 유치해지는 건지.
클레리아와 관련될 때마다 미숙해지는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찍 왔군?”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에단의 시선이 날카롭게 움직였다.
말을 건 건 레리안이었다.
“결승전에 올라갈 줄은 생각도 안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올라가게 됐어. 이번 시합, 생각보다 인재가 별로 없는가 봐?”
능구렁이 같은 그의 말에 에단은 반응하지 않았다. 묵묵히 붕대만 감을 뿐.
“네 녀석은 늘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나? 남이 말하는 게 말 같지 않은가 보지?”
그제야 에단은 손을 멈췄다.
그것을 본 레리안이 그제야 고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너 같은 인간들을 잘 알아. 선한 척, 정의로운 척, 올곧은 척, 고귀한 척. 하지만 결국, 너도 다른 놈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지. 얼마 안 가 천지에 네 오만과 가식이 밝혀질 거다, 에단 칼리스터.”
그제야 에단은 물끄러미 레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피해 의식에 절어 남을 폄하하고 재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너에게 설명할 의무도 마음도 없으니까.”
레리안은 모멸감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경기장에서 보자고.”
“좋을 대로.”
철컥
“좋은 아…… 침…….”
퍽!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리암이 반갑게 외치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레리안이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치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저래?”
에단의 곁으로 오며 물었으나 그 역시 대답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암이 뭔가 더 물으려 했으나 대기실로 나머지 후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그 역시 자리로 향했다.
* * *
“미안해요, 알만! 기다렸죠!”
마부 알만이 급하게 저택에서 나오는 클레리아를 보고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아가씨.”
“미안해요. 일이 좀 있어서. 서둘러서 가 주겠어요?”
그녀가 올라타자 마차는 다른 때보다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숨을 돌리던 그녀는 품에 소중히 넣어 놨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털자 안에서 알이 큰 분홍색 보석이 빠져나왔다.
클레리아는 보석을 조심스럽게 집어 마차 안에 비치는 햇빛에 비추었다. 그러자 영롱한 빛이 얽히며 스스로 발했다.
“내…… 첫 치유석.”
감격에 젖어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
순간 핑 도는 머리에 클레리아가 치유석을 쥐고 머리를 짚었다.
힘을 응집하는 걸 몇 번이고 실패해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감을 잡기 시작해 어느 정도 크기를 키웠을 때는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후였다. 밤을 새워 버린 것이다.
힘도 많이 쓴 데다 밤샘까지 겹쳐 어지럼증이 다른 때보다 심했다.
‘도착하면 칼리에 님께 적당히 기력 회복만 좀 부탁해야겠어. 지금 내 치유력으로 자가 회복하는 건 오히려 독일 거야.’
지친 기색이 가득했어도, 시간 맞춰 치유석을 완성했다는 것에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 *
“무리하지 말라니까.”
칼리에는 타이르는 듯 말하면서도 클레리아의 마음이 헤아려져 쓰게 웃어 버렸다.
“하긴 나도 참, 진작 알려 줄 것을. 너무 시간이 촉박했죠?”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좋은 선물을 가르쳐 주신 것만으로도 전 너무 좋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칼리에가 빙긋 웃으며 힘을 집중하자 희미한 빛이 마주 잡은 클레리아의 손으로 퍼졌다.
“하…….”
클레리아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탄성을 냈다.
“어지러운 게 훨씬 덜해졌어요. 고맙습니다, 칼리에 님.”
“그래도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환자들 돌보다가 시간 되면 경기장으로 가도록 해요. 알았죠? 나머진 나와 여기 보조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네.”
대답한 클레리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멀리 경기장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봤다.
점심 배식을 마치고, 환자들의 상태를 돌아보던 클레리아는 마지막 환자를 확인한 뒤 허리를 폈다.
“끝났다.”
그녀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보조사가 답하듯 활짝 웃었다.
“갔다가 금방 돌아올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칼리에 님께 들었어요. 어서 가 보세요.”
클레리아가 손 소독약을 바르며 나올 때였다.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칼리에 님! 클레리아 님! 좀 도와주세요!”
헌터의 달구지가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말을 모는 건 헌터가 아닌 펜리스였다.
뭔가 있음을 감지한 클레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달려오는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클레리아 님!”
히히히힝!
말의 거친 울음만큼이나 거칠게 멈춰선 달구지에서 펜리스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응급 환자인가요?”
“네, 그런데 그게.”
뒤로 간 그는 다급히 누군가를 안아 들고 내렸다.
“헌터?”
다친 이는 다름 아닌 헌터였다.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아이들 장난감을 내려 주겠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어요.”
“네?”
그가 다리에 올려 둔 천을 치우자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온 모습이 드러났다.
“세상에, 얼른 처치실로 데려가세요!”
클레리아는 치마를 찢어 피를 지혈하며 함께 이동했다.
처치실에 다다라 제대로 살핀 상황은 심각했다.
뼈가 어긋난 건 물론이고 부러지며 큰 혈관을 건드렸는지 출혈이 심했다.
‘그냥 보조사들의 도움을 받는 건 한계가 있겠어.’
“칼리에 님은?”
“칼리에 님께서도 지금 자상 환자를 보고 계셔서.”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해. 내가 해내지 않으면 안 돼.’
“으으윽!”
그사이에도 헌터는 푸르게 질려가며 끔찍한 신음을 냈다.
“보조사님, 펜리스. 지금부터 치료를 시작할 거니까 헌터의 팔다리를 꽉 붙들어 주세요. 반드시 헌터가 움직이지 않게 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마취석 준비해 주세요.”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피에 젖은 헌터의 바지를 찢었다.
“시작합니다.”
클레리아는 소독약과 마취석을 갈아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다치지 않은 부분을 붙들고 서서히 힘을 썼다. 그러자 희미한 빛이 그녀의 손에서 점차 다리로 퍼졌다.
클레리아는 손에서 뻗어 나가는 치유력을 선명하게 느끼며 정교하게 조종했다.
그녀의 의도대로 차례로 어긋난 세포들이 다시 맞물렸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지 헌터가 몸을 틀며 비명을 질렀다.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마취가 제대로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부림이 심한 덕에 그를 붙든 펜리스도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보조사와 잘 붙들어 준 덕에 클레리아는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
으득 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뼈가 맞춰져 살 안으로 들어갔고, 새어 나오던 출혈량도 서서히 줄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펜리스 역시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그의 눈에 바들바들 떨리는 클레리아의 손이 들어왔다. 아차 싶은 마음에 눈을 들자 보랏빛으로 질려 가는 클레리아의 입술이 들어왔다. 안색 역시 처음과는 달리 창백했다.
“클레리아 님?”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불렀으나 그녀는 그저 집중에 전념을 다 했다.
드디어 찢어진 살들이 맞물리고 보조사가 재빨리 소독된 천으로 상처를 닦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헌터의 다리는 건강한 혈색을 띠었다.
“치유사님 됐습니다. 끝났어요.”
보조사의 말에 클레리아는 서서히 눈을 떠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상처가 있던 부위에 손을 올려 마지막 점검까지 했다.
“누…… 나?”
정신이 든 헌터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클레리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다 끝났어, 헌터. 이제 아프지 않을…….”
“클레리아 님!”
“치유사님!”
힘이 빠진 클레리아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 * *
부우우
엄청난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함성이 스타디움을 울렸다. 경기장 입구에 줄지어 서 있던 후보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에단의 옆에 서 있던 리암 역시 크게 숨을 고르며 몸을 털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긴장을 풀려 애쓰는 가운데, 에단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몸 안 풀어?”
리암이 물어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이, 왜 그래? 이제 곧 결승전 시작인데 얼이 빠져서는?”
그가 툭 건들자 그제야 에단이 리암을 바라봤다.
“응. 왜?”
“뭐에 그렇게 정신이 빠져 있어? 사람이 말하는데 듣지도 못하고.”
“아…… 그냥 좀.”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리암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천하의 에단 칼리스터가 긴장하는 거야? 엉? 그래? 진짜? 정말로?”
“시끄럽다. 다른 사람들도 있어.”
“세상에, 천하의 에단이 긴장하는 것도 다 보네. 결승전이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긴장한 거 아냐, 그냥 좀 왔을까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응?”
호들갑 떨던 리암은 싱겁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이슬레이터 영애는 당연히 왔을 거고. 아… 프라이어스 영애는 참석 못 했겠구나. 바르서스 구호소로 나간다고 들었지, 아마? 근데 그 바르서스 쪽에 요즘 환자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치유사가 충당됐으니 뭐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됐으니까 준비나 해.”
에단이 손을 털자 잠시 뒤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
“안 봐준다.”
“살살 해라, 살살.”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둘의 얼굴로, 열리는 문 사이로 비치는 빛이 쏟아졌다.
* * *
쓰러진 클레리아를 보면서 헌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나 설마 못 깨는 건 아니죠?”
“그렇지는 않아. 그냥 너무 지쳐서 그런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말렴, 헌터.”
“나 때문에 누나가 쓰러진 건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헌터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였다.
“바보같이 누가 그러게 그렇게 무리하래! 그냥 놔뒀음 됐을걸. 이 미련퉁이야!”
“헌터!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렇게 무례하게 굴래?”
속상한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펜리스가 나무랐다.
결국, 헌터는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누나, 내가 미안해. 앞으로 까불고 돌아다니면서 다치지 않을게, 눈 좀 떠 봐.”
“헌터, 클레리아가 좀 쉴 수 있도록 나가 있는 게 좋겠다.”
보다못한 칼리에가 그를 달래며 나가려 할 때였다.
“헌터? ……왜 울어?”
나른한 목소리에 돌아서자 클레리아가 허옇게 질린 얼굴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칼리에가 몸을 일으켜 주는 것을 도와주고, 헌터는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헌터, 왜 그래? 다리 아픈 거야? 칼리에 님, 제가 잘못 치료한 건가요?”
클레리아가 묻자 칼리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치료는 완벽했어요. 다쳤는지도 모를 만큼요. 지금 헌터가 우는 건 아마 다른 이유일 걸요?”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자 칼리에가 그녀의 이마를 짚고, 눈동자를 살폈다.
“머리는 좀 어때요? 일단 홍채 반응은 정상이네요.”
“아… 좀 멍해서. 정신없어요. 집중이 잘 안 되는 것 같은.”
“일단 몸 전체가 쇼크 상태나 마찬가지니까 귀가하도록 해요. 내일까지 쉬기로 하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요. 오히려 클레리아 덕에 큰 고비를 넘긴 거나 마찬가지니까.”
다정한 말에 클레리아는 빙긋 힘없이 웃는 것으로 답했다. 그녀는 아직도 훌쩍이는 헌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좀 미숙해서 그런 것뿐이야. 헌터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인제 그만 울어. 응?”
그 말에 헌터는 퉁퉁 부은 얼굴을 들었다.
“이제 괜찮아 누나?”
“응, 집으로 가서도 푹 쉴 거니까 걱정하지 마.”
“모레 내가 확인하러 온다?”
“응, 얼마든지.”
그제야 헌터는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자, 이 말썽꾼아. 치유사님 쉬시게 이만 우리는 나가자.”
펜리스가 미안하다는 듯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클레리아는 손을 저었다.
그들이 막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클레리아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다급히 물었다.
“저, 저기! 지금 몇 시죠?”
“지금…… 4시 40분 정도 됐습니다. 왜 그러시죠?”
낭패라는 듯 그녀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에단의 시합…… 검술 시합에 늦었어요.”
다섯 시가 경기 마무리 시간이었다. 지금 가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힘들었다.
‘결국, 에단의 경기에 못 가겠어. 어떡하지.’
클레리아가 낙담한 얼굴로 시무룩해져 있자 방을 나갔던 헌터가 다시 들어왔다.
“왜? 왜? 무슨 일인데? 누나 어디 가야 해?”
“아냐, 괜찮아.”
“말해 봐! 어디 가야 하는데?”
“……아스트란 스타디움.”
머뭇거리며 클레리아가 대답하자 헌터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가자, 내가 십 분 만에 데려다줄게!”
* * *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되겠습니다. 후보 열다섯 명은 원형으로 대기하게 되겠고, 토너먼트로 진행되던 어제와는 달리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되겠습니다. 11위부터 15위는 아쉽게도 견습 기사의 자격으로 머물겠고요. 10위부터 1위까지는 경기 진행 불능 상태가 되는 순서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겠습니다!”
안내자의 말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장내에 긴장이 서렸다.
많은 이들이 숨을 고르며 상대를 관찰하는 가운데, 에단의 눈은 그저 관중석을 죽 훑기 바빴다. 대놓고 살피는 것은 아니었으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참관 중인 엘레나는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클레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못 오는 건가.’
그는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이제 세시 정각에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 벽을 차지하는 커다란 시계에 몰렸다.
뎅!
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스르릉.
여기저기서 검을 뽑는 소리가 나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하앗!”
그때 한쪽에 있던 기사가 다른 기사에게 덤벼들었고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출발을 끊은 둘에게 한동안 가 있던 시선은 터질듯한 긴장감과 함께 서 있는 나머지에 돌아갔다.
시선을 맞받던 그들이 눈치 싸움을 하며 달려들 기회만 엿보고 있던 그때.
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에단이 검을 뽑아 땅에 꽂았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경기장 내에 흘렸다.
일순 그 기운에 좌중도 압도되어 숨소리조차 죽였다.
칼을 맞대며 겨루던 기사들조차 곁눈질하며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으니까.
‘뭐야, 에단 이 자식. 초반부터 살기에 가까운 오러를 흘리면 어떡해? 살벌해서 쳐다도 못 보겠네.’
리암이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승 후보로 지목되는 몇몇이 에단과 함께 땅에 검을 박아 넣은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장 강력한 후보로 지목되는 에단이 저러고 있으니 꿍꿍이가 있는가 싶어 나머지 역시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기세에 눌려 빠르게 하위권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리암은 주춤주춤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를 보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결국, 대어 말고 피라미부터 상대하겠다? 그리고 난 그 피라미 쪽이고? 우습게 보인 게 아쉬워도 어쩌겠어 상대해 드려야지!”
카캉!
엄청난 검기와 함께 경기장이 울렸다.
‘리암 녀석은 벌써 시작이군. 뭐, 녀석이 워낙 가볍게 싸우는지라 만만히 보고 달려드는 녀석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에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끝내 버릴 것인가, 그래도 혹시 모를 클레리아를 기다려 볼 것인가.
그가 그런 고민에 빠진 줄도 모르고, 주변에 있는 다른 기사들은 에단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압도되어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뭐지? 왜 안 싸우는 거야? 녀석이 웃도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일대일은 힘들고. 딴 녀석이 진이라도 빼놓으면 가세하려고 했는데 이건 뭐…….’
레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에단을 노려봤다.
사실 그가 내뿜은 위압감이 상상 이상이라 그 역시 움찔하며 그대로 압도되어 버렸다. 먼저 달려들 전의를 상실했달까.
레리안은 못마땅한 듯 입을 이죽거리며 옆을 봤다.
갈색 머리칼을 단정히 넘긴 훤칠한 사내가,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장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블린트 백작가였던가? 이름이 케일론…… 블린트? 저 녀석하고는 해볼 만할 것 같은데. 흠……. 일단 나서지 않는 편이 좋겠어. 상위권 누구라도 붙으면 그때 가세해야겠군.’
레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이랴!”
“허, 헌터! 너무 빠른 거 아냐? 여긴 시가지라고!”
클레리아가 휘날리는 머리칼을 붙들며 만류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지 않았다.
“나만 믿어! 난 그 어떤 길도 아주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고! 비켜요! 앞에 비켜!”
“아앗!”
덜컹대는 마부석에서 클레리아가 중심을 잃자 펜리스가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좀 거칠긴 해도 믿어 보세요. 우리 용병단에서 헌터만큼 말을 잘 모는 녀석은 없으니까.”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헌터를 바라봤다.
정말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경기장은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히히힝!
쉬지 않고 달린 말이 ‘푸르르’ 소리를 내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
“자, 얼른 내려!”
클레리아가 조심스럽게 뛰어내렸고, 헌터가 그녀의 손을 끌고 뛰었다.
“달구지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잘 모셔드리고 와!”
펜리스가 소리치자 헌터는 엄지를 치켜 보였다.
“고마워요, 펜리스!”
클레리아의 외침에 그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누나! 서둘러! 이러다가 경기 끝나겠어!”
“알았어. 잠깐, 잠깐만.”
클레리아는 헉헉대며 계단 난간을 붙들고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멍한 데다 정신없이 뛰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많이 힘들어? 그럼 그냥 쉴까?”
“아냐, 괜찮아. 갈 수 있어.”
그녀의 말에 헌터는 클레리아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다.
‘에단…….’
그의 이름을 되뇌며, 그녀가 힘겹게 관중석 입구에서 나온 순간.
눈이 부신 햇살과 그 아래 광활히 펼쳐진 경기장이 보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에 헐떡이면서도 클레리아의 눈은 빠르게 장내를 훑었다.
“자, 이제 네 명만이 건재합니다.”
안내자의 긴장감 서린 말이 나직이 울렸다.
“아!”
클레리아는 한쪽에 검 자루 위에 손을 얹고 서 있는 에단을 발견했다. 검 손잡이에 묶인 클레리아의 붉은 머리끈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난간에 매달리듯 바싹 붙었다.
“이제 경기 마무리까지 오 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안에 순위가 정해지지 않은 분은 모두 탈락자로 처리됩니다.”
“에단? 왜 가만히 있어?”
그가 꼼짝도 하지 않음에 클레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왜 싸우지 않지? 이러다 탈락하면 어쩌려고?’
난간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면…… 지면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에단 칼리스터!”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외쳤다.
퍽!
“으읏!”
6위의 기사를 제압했을 때, 누군가 리암의 옆구리를 엄청난 힘으로 강타했다.
순간 숨이 턱 막힌 그가 검을 쥔 채 무릎 꿇었고, 동시에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경기 중지! 경기 진행 불가능! 리암 아켈리엔 5위 확정!”
확정 선언이 되자 리암은 끝났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옆구리를 감싸 쥔 채 자신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레리안을 바라봤다.
“거 싸우는 게 좀 야비하시네, 네 명이나 동시에 정리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와서 등 뒤를 노리다니.”
“이것도 다 전략이지. 전장에서 적이 차례대로 덤벼들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리암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할 만큼 했으니 이번엔 내가 졌어.”
리암은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이 보이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 에단 녀석. 무슨 생각인 거야.”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경기장을 지켜볼 때였다.
“지면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에단 칼리스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인상을 썼을 때였다.
“어?”
리암은 똑똑히 보았다.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 * *
퍼억!
리암이 쓰러지자 에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뒤를 공격해도 상관없는 서바이벌이지만…… 레리안, 저 녀석은 이렇게 사람들 눈이 많아도 뒤를 치는 것에 망설임도 없군.’
리암이 5위로 확정되는 것을 지켜보며 에단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뒤틀었다.
레리안의 급습만 아니었어도 리암의 실력이면 4위는 했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슬슬 승부를 봐야 하는 건가.”
경기 마무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더는 기다리는 것도 무리였다.
후에 만나면 잔뜩 투정이나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그때. 그토록 기다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
“지면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에단 칼리스터!”
‘……이제야.’
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진짜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주다니.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너는 정말…….
그제야 에단은 땅에 박았던 검을 뽑았다. 그것을 본 나머지 셋이 대응할 태세를 갖췄다.
그것을 확인한 레리안이 상황을 주시하던 그때.
스캉!
레리안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순식간에 오른쪽을 찔러 들어온 검을 쳐냈다. 돌진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케일론 블린트였다.
“나 말고 칼리스터를 공격하는 건 어때?”
“어째서 그래야 하지?”
돌아온 대답이 원하던 것이 아니자 레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때 케일론이 순식간에 돌아 자신의 뒤를 노리고 오는 검을 받아 냈다.
카캉!
타일러 윈터펠로운이었다.
그러나 케일론은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강한 힘으로 밀어내고 다시금 레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둘이 붙었으면 둘이 싸울 것이지 왜 나한테 들러붙어?”
“내가 싸우고 싶은 건 레리안 캄스턴, 그대니까. 뒤에서 급습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 기사는 실력이 어떤지 궁금해서 말이지.”
케일론은 적당히 대꾸하고 레리안을 몰아세웠다. 강한 힘과 빠른 손놀림에 레리안은 그의 공격을 받아치기에 바빴다.
“싸움에 급습이고 나발이고가 어디 있어! 이기지 않으면 죽을 텐데.”
“그야 전장이라면 그렇겠지.”
레리안은 케일론의 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젠장, 칼리스터를 공격하기에는 그의 실력이 너무나 앞선다는 걸 파악한 건가? 제길 이건 내 계획과는 전혀 다르다고!’
레리안은 작정한 듯 온 힘을 다해 케일론의 검을 쳐내며 그를 밀쳐냈다. 그러자 뒤를 쫓던 테일러 역시 순간적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네놈들이 피한다면 내가 상대하마, 사내 자격도 없는 놈들.”
말과 함께 레리안이 엄청난 속도로 에단에게 향했다.
달려드는 그를 보며 에단 역시 자세를 잡았고, 레리안이 빠르게 그의 허리 쪽을 노리고 들어간 순간.
콰아앙!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났고, 경기장 안은 바람과 흙먼지에 휩싸였다.
관중들이 기침하며 손을 저었다. 이어 서서히 뿌연 시야가 걷힐 때쯤, 사람들은 말을 잃고 정적에 휩싸였다.
타일러 윈터펠로운은 이미 저편에 나가떨어져 의식을 잃은 채였고, 케일론은 검을 붙든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찰캉!
레리안만이 서 있었으나 그 역시 검을 떨어뜨린 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더 놀라운 건 분명 그가 에단 가까이 까지 달려들었던 게 분명한데 지금은 경기장 중앙까지 밀려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뭐, 뭐야 저 괴물은? 저놈은…… 대체? 이래서 녀석들이 덤비는 걸 피했다는 건가? 이럴 줄은…… 이 정도일 줄은! 심지어!’
레리안은 천천히 옆에 떨어진 자신의 검으로 시선을 내렸다.
‘검은 맞부딪친 적도 없어! 그냥 단 한 번 휘두른 검기로 우리 셋을 날려 버린 거라니……!’
결국, 레리안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사람들 모두 넋이 나가 버린 듯 한참이나 경기장은 고요했다.
“겨, 경기 끝. 순위가 정해졌습니다. 4위 타일러 윈터펠로운, 3위 케일론 블린트, 2위 레리안 캄스턴.”
안내자의 시선이 두려움 반, 경이로움 반이 뒤섞인 채 에단에게 향했다.
“1위는 에단 칼리스터. 이상 검술 시합이 종료되었음을 알립니다.”
와아아아!
검술 시합 역사상 이런 장관은 연출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받으며 에단은 단 한 곳만을 응시했다.
클레리아.
그녀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에단.”
“치료도 중요하지만 네 몸도 좀 챙겨. 남을 치유한다는 사람이 왜 자기 몸 관리는 안 해?”
“……에단!”
“밥은 먹었어? 약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칼리에 님이 혹시 와서 상태 봐 주신다고 하신 거야?”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며 그는 계속해서 걱정을 토로했다.
“이미 기력은 회복시켜 주셨어. 하루 푹 쉬면서 안정만 하면 돼. 그보다 에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눕혀진 클레리아는 그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정말 왜 넌 매번 스스로는 뒷전인지……! 후…… 왜?”
클레리아가 쓰러졌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잔뜩 날이 선 그가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후 대답했다.
“에단, 축하해. 검술 시합 우승한 거. 이제 명실상부 신임 기사 중 라스칸트 1위네. 에단이 라스칸트의 최고야.”
그는 잠시 쭈뼛거리다 한숨을 푹 쉬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고마워.”
그녀가 오기만 주야장천 기다린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팠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 오라고 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운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꼭 와 달라는 말에 무리한 거겠지.’
계속해서 잔소리하거나 화낼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없자 클레리아가 눈치를 살폈다.
“내가 미숙해서 그런 거니까 그만 화 풀어, 응?”
“그래.”
사과해도 좀체 마음이 풀리지 않는지 에단은 클레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지 말걸.”
갑작스러운 말에 에단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간 게 창피한 거지?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게 됐어. 나도 내가 그 정도로 흥분할 줄은 몰랐어. 앞으로 에단에게 그런 큰일이 있을 때 안 가도록 할게.”
슬쩍 쀼루퉁한 얼굴로 말하자 에단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창피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사과하는데도 안 받아 주고 화내는 거잖아. 알았어, 이제 에단이 난처하지 않도록 가지 않을게.”
뜻밖의 반응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펄펄 뛰었다.
“아냐, 창피한 게 아니라……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가 난 건! 하…… 그게 그러니까!”
클레리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바라보자 결국, 에단은 얼굴을 문지르고는 체념한 표정으로 다시 앉았다.
“알았어, 계속 화내서 미안해.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네가…… 내가 오라고 한 것 때문에 무리하느라 그런 걸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클레리아를 창피해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조금 놀리려 한 거였는데 너무도 순순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클레리아였다.
반응이 너무 진지해 그녀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응 이제 화는 풀었으면 좋겠어.”
“응, 그래.”
대화가 멈추고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 에단의 실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클레리아가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내가 1위 할 자신 있다고 할 때도 농담하는 줄 알았어?”
“자신이야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 그렇게 압도적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 말에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1위 한 건 다 네 덕이야, 클레리아.”
“무슨 소리야, 그게. 분수대에 소원 빌어 준 게 다인데. 순전히 에단의 실력이야. 정말 축하해.”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던 에단의 시선에 클레리아의 손에 미처 닦이지 않은 핏자국이 들어왔다.
“응? 에단? 왜 그래?”
말없이 일어난 그는 수건에 물을 적셔 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클레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 번도 네게 이 말을 했던 적이 없던 것 같아.”
“무슨 말?”
그는 천천히 클레리아의 손에 있는 핏자국을 닦아주었다.
“생명을 살린다, 정말 고귀한 일이야. 너하고 잘 어울려, 클레리아. 치유사가 된 거 정말 축하해.”
그 말에 클레리아는 활짝 웃었다.
“에단하고 같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에단이 고개를 기울였다.
“기사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잖아. 앞으로 에단은 기사가 되어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쓸 거고. 우리는 같은 일을 하는 거야.”
“기사는 죽이는 일을 더 많이 할걸.”
“지키기 위해서일 거야.”
에단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기사이기에 누군가를 죽이게 될 일은 피치 못할 수 있어. 하지만, 에단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살리기 위해 검을 쓸 거야. 난 믿어.”
에단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으로 가져갔다.
클레리아는 그가 뭘 하려는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뺨 근처를 맴돌던 손은, 결국 방향을 바꿔 클레리아의 머리를 다정히 쓸었다.
“고마워, 책임이 크네.”
“응!”
에단은 조심스럽게 손을 말아쥔 채 그녀에게서 뗐다.
“있지, 1위를 축하해. 경기를 무사히 잘 마친 기념으로 줄 선물이 있어.”
“응? 선물?”
클레리아는 품에 넣어 뒀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손 이리 줘 봐.”
에단이 손을 내밀자 주머니를 톡톡 쳐 흔들었다.
이어 분홍색의 영롱한 보석이 도르륵, 그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말없이 내려다보다, 보석의 정체를 직감한 에단의 미간이 좁아졌다.
“클레리아, 설마 이건…….”
“표끈도 준비를 못 했고, 경기 일정 내내 에단의 시합을 보러 가지도 못했고. 내가 치유사가 되던 날 에스코트해 준 것조차 제대로 고맙다고 보답도 못 했어.”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그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정말 날 위하는 마음에 그렇게 자진해서 나서 줬다는 거. 그래서 나도 정말 도움이 되고, 값진 걸 해 주고 싶었어.”
클레리아는 보석을 받은 그의 손을 말아 쥐여 주었다.
“아까도 말했듯 에단은 앞으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를 거니까. 그런 널 지켜 주라고, 그래서 주고 싶었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치유사가 됐지만, 내가 필요한 순간에 정작 네 곁에 내가 없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난 이걸 너에게 줄 수밖에 없어. 줘야만 해.”
라스칸트에서 치유사의 치유석을 받은 기사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황제조차 받은 적이 없으니까.
치유사가 없어도 그 의지를 이어받아 스스로 힘을 발동하는 돌.
첫 치유석을 준다는 것은 그 치유사에게 정말 소중한 이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에단?”
순식간이었다.
에단은 잠시 아무런 말도 않더니 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일이라 클레리아는 그대로 그의 품에 딸려 안겼다.
“이,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그저 그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러는 것이라 여겼다.
치유석을 받은 이는 드물다고 칼리에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안고 있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저, 저기 에단. 인제 그만 놔줘도 될 것 같은데.”
어지간히 크게 감명받은 걸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품 안 가득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조금 더 참던 클레리아가 나직이 속삭였다.
“에단…… 나 허리 아파.”
그제야 그는 천천히 클레리아를 놓아주었다.
떨어지고 나서야 한숨 돌리는 클레리아의 눈에 상기되어 있는 에단의 얼굴이 들어왔다.
뭔가 애틋하면서도 무척이나 기쁜 얼굴이었다.
순간 클레리아는 ‘쿵.’하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알아 온 세월 동안 에단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본 탓이었다.
“네 눈 색이랑 똑같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응, 치유사의 성질에 따라 보통 눈 색을 닮는다고 해. 분홍색이라 에단이 지니고 다니기에는 조금 유치할까?”
“아니, 완벽해. 이것보다 완벽한 건 세상에 없을 거야. 고마워, 클레리아. 소중히 간직할게.”
‘기뻐하니 정말 다행이다.’
클레리아는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웃었다.
자신의 손안에서 반짝이는 치유석을 보며, 에단 역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끝은 항상 같았다.
‘클레리아, 반드시 갚을게. 내 목숨을 다해 널 지키고. 네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도록.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그 어떤 것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