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치유사 적응기와 에단의 검술 시합.
어느덧 치유사 첫 임무 수행 날이 다가왔다.
클레리아는 처음 입어보는 치유사 정복과 황제에게 하사받은 증표를 매만졌다.
전혀 의식도,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한다고 여기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칼리에가 다가오며 물었다.
“준비됐나요?”
“네.”
잔뜩 기합이 든 대답에 긴장한 기색이 묻어났다.
칼리에는 빙긋 웃으며 잔뜩 굳어 있는 클레리아를 살폈다.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는 깔끔히 땋아서 단단히 올려 묶었고, 배급받은 특수 치유사복도 잘 챙겨 입었다.
그녀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칼리에를 바라봤다.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주의 사항을 전달할 거예요. 주의해서 듣고, 곧장 외우도록 해요. 기본 중에서 기본이니까.”
“네, 칼리에 님.”
그녀는 클레리아의 옷매무새를 조금씩 다듬어 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분으로는 영애가 나보다 높은 위치지만, 치유사의 삶을 선택한 순간부터는 내가 상관입니다. 영애는 제 이름에 님 자를 붙여 부르고 전 영애의 이름을 부를 겁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으로 치유사는 지금까지 저까지 네 명이었고. 클레리아의 합류로 총 다섯이 되었습니다. 전 황실과 수도에서 임무 수행을 하고, 두 명은 국경에, 한 명은 지방에 파견되어 있습니다. 클레리아는 익숙해질 때까지는 나와 수도에서 보조 활동을 할 거예요. 함께 갈 곳은 민간인 구호소 바르서스입니다.”
‘다섯 명…… 라스칸트 건국 이래로 한 번에 열두 명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정말 현저히 적은 수이긴 하구나.’
이어 칼리에는 그녀가 입은 치유사복을 살짝 들어 겹겹이 겹쳐 있는 천을 보여 주었다.
“이건 특수복이에요. 거추장스럽더라도 치유사복은 반드시 갖춰 입도록 하세요. 일반 옷처럼 보이나 마법을 써 만든 얇고 간편한 옷이에요. 깨끗한 천이 필요할 때 대신 사용할 수 있기도 해요. 안에는 만일을 대비해 평상복을 갖춰 입고, 그 위에 입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칼리에는 클레리아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했다.
“내가 보낸 서신은 받았겠죠? 시도해 봤나요?”
그러자 클레리아는 조금 벅찬 얼굴을 하더니 서둘러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손에 아주 조심스럽게 털었다.
몇 번 반복하자 겨우 모래알만 한 크기의 투명한 돌이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잘것없이 작은, 흔한 모래알 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알갱이 같은 그 자그마한 것에도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에는 조금 감격한 듯 미소 지었다.
“몇 번이고 계속 실패만 했는데…… 어제 겨우 성공했어요.”
칼리에는 대견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눈이 정확했네요. 이렇게 빨리 해내다니. 다른 치유사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굳은 얼굴로 클레리아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지금 얘기는 당신만을 위한 말이에요. 잘 들어요.”
“네.”
“돌을 만드는 걸 성공한 건 정말 축하해요. 그러나 아직 제대로 된 힘이 담기진 않았으니 더 노력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아무리 타고났어도 지금 클레리아의 몸은 그걸 감당하지 못해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익숙해져야 해요.”
“아…….”
클레리아는 처음 회귀했던 날, 에단을 치유하자마자 쓰러졌던 것을 떠올렸다.
“구호소에서 간단한 업무를 다루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그리고 되도록 클레리아의 능력을 들키지 말아요.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요.”
“다른 네 명보다 클레리아는 위협받는 정도가 더 심할 거예요. 신분도 그렇고. 그러니 각오 단단히 하도록 해요. 알았죠?”
칼리에가 나서서 이렇게 경고할 정도면 정말 치유사를 이용하려 드는 세력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 수가 확연히 적으니 하나라도 포섭해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야.’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칼리에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에게 접근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울 테니. 또 첫 치유석 만드는 시도도 잊지 말고 꾸준히 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요?”
* * *
“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긴장된다.”
아켈리엔 백작가의 영식인 리암이 몸을 부르르 떨며 인상을 썼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얼굴색 하나 평소랑 다르질 않냐.”
“어차피 겪을 일이었는데 소란 피워서 뭐해.”
“와, 그래. 우승 후보자는 달라도 다르다 이거지. 너 잘났다, 인마.”
“그렇게 불평해댈 거면 뭐하러 시합에 나가겠다고 했어. 그냥 기사 시험 치르고 적당히 서임 받으면 될 것을.”
“그래도 궁금하잖냐! 내 실력이 제국 몇 위 정도 되는지는!”
“그럼, 말을 말아.”
“야!”
리암이 에단의 목을 조르자 에단이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놔라, 너 손에 땀 차서 기분 나빠.”
“크앗! 이 자식!”
“여유가 넘치네. 역시 재미 삼아 나온 이들은 달라도 달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리암이 에단에게서 떨어졌다.
에단은 그 목소리를 아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나타난 이를 바라봤다.
“캄스턴 영식.”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레리안이었다.
그 또한 참가자였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했다면 사과하도록 하지.”
“즐거운 시간도 아니고, 재미 삼아 나온 적도 없어. 비꼬는 말투가 거슬리는군, 공자.”
리암의 말에 레리안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거슬리게 하는 건 그쪽이겠지. 다들 경건한 자세로 준비에 임하는데 시끄러운 건 둘밖에 없잖아?”
“뭐?”
리암이 황당하다는 듯 앞으로 나서는 것을 에단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거슬렸다면 미안하네, 경솔했어. 조용히 하도록 하지. 시합 전에 마음을 다잡고 싶어 그러니 좀 가 주겠어? 여기서 돌아다니는 건 그쪽밖에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 대기실을 돌아다니는 건 레리안 그가 유일했다.
본인이 지적한 그대로 돌려받자 레리안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우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실례했어. 칼리스터 영식.”
그는 돌아서려다 문득 손뼉을 작게 쳤다.
“그러고 보니, 프라이어스 영애와 이슬레이터 영애와 친분이 두텁지? 자네는 두 명의 미인 사이에서 행복하겠어? 그런데 이슬레이터 가와 혼담이 오고 가는 중 아니었나? 요즘 이슬레이터 영애를 좀 홀대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레리안은 씩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대체 뭐야? 저 녀석. 평소에 말 한마디 안 섞다가 하필 오늘 같은 날 와서 이상한 시비나 걸고.”
“리암, 우리도 이제 슬슬 준비하자.”
“그래, 알았어.”
리암은 에단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손에 감던 붕대를 마저 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단은 레리안이 사라진 곳을 말없이 조용히 노려만 볼 뿐이었다.
보호구 착용이 끝나고 시합을 보러 온 관중의 함성이 대기실까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클레리아는 치유사 임무 수행 중이겠지.’
괜찮다고 했어도, 조금 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은 그런 마음을 달래려 손잡이에 매인 붉은 머리끈을 손으로 훑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허리에 찬 검과 부분 보호구를 점검했다. 그때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누군가 다가왔다.
“저…… 카, 칼리스터 공자님?”
“뭐지?”
“어떤 공녀께서 대기실 앞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꼭 전해드릴 것이 있다고…….”
“뭐?”
개회식 시작이 고작 몇 분 뒤인데 이런 시간에 대기실을 찾아오는 모자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시합 도우미로 보이는 이의 낯색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닦달을 당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에단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기실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엘레나…….”
그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나직이 부르자 금발이 홱 돌며 흔들렸다.
“에단! 이걸 전해 주지 못해서 말이야.”
머리칼과 똑같은 금색 리본이었다.
“에단의 무사와 우승을 빌었어. 꼭 1위 해야 해?”
그녀가 웃으며 내밀었으나 그는 성큼 받지 못했다.
“……그래. 그런데 엘레나. 지금 여긴 잔뜩 민감해진 예비 기사들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는 건 실례야. 지금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지만 에단에게 리본을 주지 못했는걸!”
“마음은 알고 있으니 괜찮잖아. 이러면 내가 곤란해.”
“그래서 내가 온 게 잘못됐다는 거야? 공작가의 공녀인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말의 의도가 전혀 먹히질 않자 에단이 꾹꾹 눌러 한숨을 쉬며 리본을 받았다.
“아냐, 고마워. 어서 관중석으로 돌아가.”
“그래.”
금세 마음이 풀린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그렇게 그를 보내려던 찰나, 엘레나가 굳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에단.”
“왜?”
그가 돌자 허리에 찬 검에 묶인 붉은 리본이 흔들렸다.
“그거……?”
“클레리아가 준 거야.”
그 말에 엘레나는 금방이라도 화를 내며 울 것 같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금색 리본을 확 낚아챘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에단이 황당한 얼굴을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복도를 뛰쳐나가 버렸다.
엘레나의 행동에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에단 역시 얼굴을 굳힌 채 대기실로 들어갔다.
* * *
바르서스 구호소로 가는 길은 무척 화창했다.
선선한 공기와 맑은 하늘. 내리쬐는 햇살까지 눈부셨다.
“날씨가 정말 좋네요.”
마차가 달리는 길마다 햇살이 부서졌다.
노점상과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에 활기가 돌았다.
길목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구호소에 도착했다.
“이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말과 함께 칼리에는 내리자마자 싣고 온 구급 약품들을 나눠 정비하기 시작했다.
클레리아 역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비품을 구분했다.
도착하자마자 구호소 안을 꽉 채운 사람들에 클레리아는 숨돌릴 틈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수도는 치안도 좋고, 거리의 환경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라. 중증 환자보다는 일상에서 다치거나 가벼운 병명의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칼리에와 함께 여러 병실을 돌며 보조를 했다. 가벼운 찰과상, 해열, 어지럼증 등은 직접 치유하기도 했다.
와아아아아
한창 이어지던 진료를 마쳤는데, 갑자기 저편에서 많은 사람의 함성이 들려왔다.
“뭐죠? 저 소리는…….”
“검술 시합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발목 접질림을 치료받았던 환자가 나오며 말했다.
“아, 검술 시합이요?”
“예, 올해는 또 어떤 대단한 기사님이 나오실까요. 치료 감사합니다, 치유사님.”
“예,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고, 클레리아는 조금 멍한 얼굴로 답했다.
‘검술 대회라…… 에단이 저기 있겠지.’
그녀는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에단의 눈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금세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르겠어, 대체 뭐야. 에단을 생각하거나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클레리아는 자신의 머리끈에 얼굴을 묻던 그가 떠올랐다.
‘숨도 못 쉴 것 같아.’
눈을 감으면 감을수록 그가 내밀던 손이, 바라보던 눈빛이.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그를 보며 이런 적이 없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저기, 손목이 아픈데.”
그때 한 노파가 다가왔다. 그제야 클레리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네.”
“욱신대고 한쪽으로 움직일 때만 무척 아파.”
“아, 아마 염좌가 생겼나 보네요. 제가 금방 치료해 드릴게요.”
그녀는 노파의 손목을 살피며 입술을 꼭 물었다.
‘미쳤어, 정말. 한 번 에단 생각만 하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라. 정신 차려, 클레리아. 넌 지금 환자들을 돌보는 중이라고! 거기다 치유사 임무 첫날!’
그녀가 고개를 마구 휘젓자 노파가 빙그레 웃었다.
“생각이 많은가 보구려.”
“예?”
“괜찮아요, 괴롭거나 힘든 것이 아니면 생각쯤은 조금 많아도 괜찮아.”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이 따스하게 들려왔다.
“역시 힘든 게 아니면 그렇게 여겨도 되겠죠?”
“물론이지.”
노파의 말에 클레리아는 활짝 웃어 버렸다.
손목을 치료하며 잠시 시합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언장담한 대로 꼭 이기고 와, 에단.”
그녀의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 맑은 햇살이 클레리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이번 시합의 우승자, 에단 칼리스터!”
이름이 호명되자 경기장 가득한 관중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들의 달뜬 열기도 에단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저분이 그 에단 칼리스터지? 만나는 상대마다 검 한 번 못 써 보고 그대로 당해서 탈락한다는.”
“오늘 있던 두 경기 모두 5분도 안 돼서 이겼다는데 표정은 왜 저러지? 정말 살벌하네.”
조용히 보호대를 푸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경기 이긴 티를 방방곡곡 내는 성격은 아니기에, 평소라면 그는 무표정을 고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에단은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클레리아 녀석…… 시합 시작 5일째인데 한 번도 못 오는군. 구호소 쪽 일이 많이 바쁜 건가.’
사정이야 알고 있었고, 이해도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못내 아쉬운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을 때 리암이 다가왔다.
“너 오늘도 5분도 안 돼서 승리했다며? 아니,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길 수 있지? 난 시합 시간 20분도 빠듯하던데.”
“내가 지나치게 운이 좋은 걸 수도 있지. 대진도 그렇고.”
“아, 운으로 그걸 덮겠다? 진짜 부럽다, 이 자식아! 아악! 나도 실력 좋아서 너처럼 거만해 보고 싶어! 네 얼굴 반만 따라가서 그딴 소리 해도 안 재수 없고 싶어!”
리암이 서럽다는 듯 소리치자 에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인즉슨, 난 거만하고 얼굴만 반반한데 재수까지 없는 놈이다?”
“모든 걸 가졌으니 그 정도는 들어도 상관없잖아.”
“나도 사람이라 기분은 나쁘거든요? 정도를 지키시죠, 아켈리엔 영식.”
리암의 팔을 뒤로 꺾으며 골리던 에단이 잠시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손을 놓았다.
“내일까지가 토너먼트 형식 시합인가?”
“아오, 내 팔. 그래, 결승전 겨우 출전하게 됐는데 나 꼴등 하면 네 탓이다.”
“하고서 따져. 그리고 혼나기 싫으면 까불지를 말든가.”
“흥!”
리암은 입이 댓 발 나와 뒤에서 구시렁댔으나 에단은 그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때 리암이 의외라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레리안 캄스턴, 그 녀석도 올라갔더라.”
“그렇군.”
“좀 의외네. 그 녀석 방탕한 생활 덕에 검술이나 공부 쪽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잘하는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에단은 그렇게 말하는 에단의 눈초리가 살짝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에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리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오늘은 푹 쉬어 둬. 마지막 결승전은 치열할 거야. 열다섯 명이 동시에 치르는 서바이벌 시합이니까.”
“그러게, 벌써 걱정이다. 근데 아이고…… 누구 때문에 꼴등 하겠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팔이 안 움직이네.”
팔 좀 살짝 꺾은 것 가지고 엄살은. 평소 훈련 양으로 치면 스트레칭에 가까울 거면서.
그래도 리암 덕에 얼굴을 피는 에단이었다.
* * *
“하아…….”
한참 동안 빨래가 가득한 커다란 솥에 얼굴을 묻고 있던 클레리아가 허리를 펴며 신음을 냈다.
“많이 힘들죠?”
칼리에가 묻자 그녀는 민망하다는 얼굴을 했다.
“남을 돕는다는 게 이렇게 고된지 몰랐어요. 정말 제가 온실 속에서만 지냈네요.”
“그래도 클레리아는 이 삶으로 뛰어들었잖아요? 치유사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민폐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잘 배우고 있는 거여야 할 텐데.”
“잘하고 있어요. 요 며칠 오간 사람 중 클레리아만 찾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칼리에의 칭찬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 이제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클레리아는 가서 새로운 환자들을 받으세요.”
“환자요?”
칼리에는 대답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클레리아는 일단 구호소 정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서성이며 살피고 있을 때 저쪽에서 꽤 큰 달구지가 사람들을 태우고 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걸 말씀하신 건가?”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는 듯 달구지는 곧장 구호소 앞으로 와 멈춰 섰다.
“어?”
달구지를 몰고 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클레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고작 13살 정도 되었을까?
꽤 앳된 얼굴의 소년이 그 커다란 달구지를 혼자 몰고 온 것이다.
“어이! 처음 보는 얼굴이네?”
소년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헌터, 한 눈에도 너보다 누님인데 예는 갖춰라.”
달구지 뒤쪽에서 훤칠한 남자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사람들 내리는 것을 도왔다.
“저도 도울게요!”
클레리아가 재빨리 다가갔으나 소년이 훨씬 빠르게 뛰어내려 클레리아를 밀쳤다.
“내리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쪽은 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들것이나 가져와. 그렇게 호리호리해서 어떻게 사람들 부축을 하겠다고.”
어린 것치고 거침없는 언사에 클레리아는 그가 말할 때마다 움찔움찔 놀랐다.
딱콩!
“아! 왜 때려!”
“내가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했지? 자꾸 그러면 용병단에서 쫓아내 버린다? 용병단 얼굴에 먹칠할 셈이야?”
결국, 소년에게 알밤을 한 대 쥐어박은 남자가 타박하자 소년은 이마를 감싸 쥔 뒤 달구지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여간 어린 녀석이 마음만 앞서 가지곤. 죄송합니다. 녀석이 워낙 무례해요. 정 거슬리면 제게 말해 주세요. 쥐어박아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아이를 때리고 싶진 않아요.”
“저도 내키지는 않지만, 녀석이 워낙 제멋대로라 가끔 쥐어박게 되네요. 철없는 동생 같아서.”
“동생분이 아닌가요?”
“저 녀석이요? 천만에요. 절대 사양입니다.”
“나도 사양이야! 누가 펜리스 같은 사람을 형으로 바랄까 봐!”
듣고 있었는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람들 틈에서 소년이 나와 혀를 쏙 내밀고 사라졌다.
‘애는 애구나.’
클레리아가 난감하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람들을 데리고 올게요.”
“예.”
클레리아는 서둘러 구호소 안으로 들어갔다.
“요 며칠 전보다는 약간 중증의 환자들이 많네요.”
클레리아가 턱에 맺히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저와 헌터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만 모아서 구호소로 데려오거든요. 아, 참고로 저는 펜리스, 저 버릇없는 꼬마 녀석은 헌터입니다.”
“고마우신 분들이네요. 덕분에 방치될 분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되셨어요.”
“하하, 뭐…… 누군가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근데 아까 들으니 용병단에 계신 것 같은데 이런 일을 하세요? 누가 의뢰한 건가요?”
클레리아의 물음에 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희 용병단이 가진 신조랄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가난하거나 약한 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돈이 돼도 부당한 일은 되도록 하지 말자는.”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조금 감명받은 얼굴을 했다.
“용병단의 신조가 정말 멋지네요. 사람들이 무척 감사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펜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런데 아까 헌터의 말처럼 정말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새로 오신 건가요?”
“예. 저도 하루빨리 이 일에 익숙해져서 칼리에 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는 게 목표랍니다. 전 새로 온 치유사 클레리아라고 합니다.”
“설마…… 그쪽이 얼마 전에 폐하가 공표하신 그 치유사이십니까?”
“부끄럽지만 그래요.”
“세상에 제국의 기적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반갑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펜리스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클레리아의 손을 붙들고 격하게 흔들어 댔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것처럼 구석에서 핀잔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거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얼른 와서 도와! 펜리스 여자랑 놀아난 거 돌아가면 대장한테 다 일러바친다!”
“뭐가 어쩌고 어째? 야! 너 이리 안 와!”
부리나케 쫓아가는 펜리스와는 달리 클레리아는 그만 둘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머리가 조금 어질하네.”
마지막 욕창 환자까지 마무리하고 나서야 겨우 쉬는 시간이 생겼다.
펜리스와 헌터가 데려온 환자들은 확실히 스스로 찾아올 수 없는 상태다 보니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힘을 쓰는 게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지나야 할까. 얼마나 숙달돼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는 건지.’
그녀는 현기증이 일어 아찔하게 보이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쪽이 새로운 치유사라며?”
언제인지도 모르게 헌터가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꽤 민첩하고, 기척을 숨기는 것도 능한 것 같았다.
“응? 응.”
“치유사치고 영 행동이 영 굼뜨네? 칼리에 님은 안 그러던데, 치유사란 거, 그렇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마음 한구석으로 늘 찔리던 것을 가감 없이 지적당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클레리아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어린아이에게도 그렇게 보인다니 난감할 뿐이었다.
“뭐…… 그러게. 나도 내가 어쩌다 이런 귀한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잠시 입을 쭉 내밀고 눈치를 살피던 헌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도 아까 사람들 치료하는 거 보니까 치유사가 맞긴 하더라. 그렇게 기죽을 필요는 없어.”
“그래?”
클레리아의 얼굴이 환해지며 되묻자 헌터는 양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그래! 근데, 그래도 앞으로 더 노력 좀 해야겠어!”
꾸짖기라도 하는 양 말하던 헌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클레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도 귀족인 거지?”
“……응.”
“혹시…… 영지민한테 손찌검해?”
순간, 클레리아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헌터는 순수한 눈망울 그대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농사 망쳤다고 때려? 괘씸하다고 세금 대신 집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가져가기도 해?”
클레리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나는…… 우리 가문은 그러지 않아.”
그 말에 헌터는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그렇지? 그래도 치유사라니까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걸까.
그러나 어렴풋이.
굳이 묻지 않아도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아 서글퍼졌다.
“그런 걸 당했었니?”
“엄마가 죽었어. 맞아서.”
너무도 덤덤히 나오는 말에 클레리아는 가슴 한쪽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해해. 사실 내가 살던 영지의 주인도 좋은 분이었다고 알거든. 그 나으리가 영지를 맡긴 대리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독했어. 높은 분이 알았겠어? 몰랐겠지. 그런 줄 몰랐으니 맡겼을 거야.”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클레리아는 조용히 쓴 미소를 지은 채 헌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어머님은 자랑스러우실 거야. 헌터는 이렇게 약한 자들을 돕는 정의로운 사람이 됐잖아. 나쁜 마음 먹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서 무척 기쁘실 거야.”
그녀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클레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킁킁하는 소리와 함께 옷소매로 거칠게 코를 문댔다.
“귀족들은 말재간이 좋다더니 너도 그렇네. 맘에 없는 말도 잘하겠다?”
“……응, 그랬지. 한때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야. 하지만 이제 안 해. 못 해. 맘에 없는 말은…… 더는 하지 않기로 했어. 꼭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려고 해.”
‘하하’하고 웃어 버리는 클레리아를 보다 헌터는 얼굴을 구겼다.
‘민망해서 일부러 비꽜는데 반응이 왜 이리 진지해? 괜히 더 미안해지게.’
“그, 그렇게 마음먹었으면 꼭 그렇게 하도록 해!”
헌터가 미안해하는 걸 알아차린 클레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뭐가 그렇게 웃겨! 인제 보니 웃음도 헤프네!”
여전히 클레리아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어쩜 이리도 센 척을 하려 드는지.
용병단이라는 곳에서 생활하니 강한 어른들 사이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 일찍 허세를 익힌 걸까.
클레리아가 겨우 웃음을 참아가던 중이었다.
꼬르르륵
웃지 말라며 날뛰던 헌터의 배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찌나 컸는지 둘 다 놀라 눈만 말똥히 뜨고 바라볼 정도였다.
“하하. 배고프지? 오늘은 구호소에서 저녁밥도 배식할 거니까 헌터도 먹고 가.”
그녀는 일어서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꼬르륵 소리가 어지간히도 창피했는지 배를 움켜쥔 채 어찌할 줄 모르던 헌터가 나지막이 말했다.
“고, 고마워. ……누나.”
* * *
“내일 또 봐!”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멀어지는 달구지를 향해 클레리아도 손을 흔들었다.
“헌터랑 친해졌나 보네요?”
칼리에가 다가와 물었다.
“네, 귀여운 아이예요.”
“대견하죠. 어린 나이에 여러모로 어른스럽고요.”
“네, 그렇더라고요.”
“그나저나 내일이죠?”
“예?”
클레리아가 모르겠단 얼굴로 되묻자 칼리에가 웃었다.
“칼리스터 영식의 결승전 날이요. 이미 진작부터 검술 시합 1위 후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걸요? 영식이 그날은 꼭 와 달라고 했다면서요.”
“아, 네. 내일 에단의 결승전만은 꼭 보고 싶어요. 시합 시작하고 한 번도 응원을 못 가서…….”
“미안하게 됐어요. 구호소가 워낙 바쁘니 신경도 못 써 줬네요. 그냥 귀족 영애로 남았다면 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클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매일 새로운 것을 보고 배워요.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죠. 처음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돕고요. 그 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전 절대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해요.”
그녀의 말에 칼리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되도록 시간을 비워 볼 테니 결승전 보고 와요.”
“고맙습니다, 칼리에 님.”
돌아서 구호소로 마무리하러 가려는 클레리아에게 칼리에가 넌지시 물었다.
“근데 시합을 잘 치렀다는 의미의 선물은 준비했나요?”
그 말에 클레리아는 다시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미처 준비할 틈이 없었어요. 만들 틈도 없었고.”
그 말에 칼리에가 묘한 얼굴을 했다.
“흠, 그랬군요. 1등을 하든 못하든 경기를 마친 기념으로 선물을 준다면 참 좋을 텐데요.”
클레리아는 그 말에 더욱 주눅 들었다.
‘역시 칼리에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지금 당장 마련할 수 있는 건 에단 역시 구할 수 있는 것들뿐일 텐데. 그런 것보다는 특별한 걸 주고 싶은데 마땅한 게…….’
축 처진 그녀를 보다 못한 칼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클레리아, 치유석은 어떻게 됐죠? 완성했나요?”
“아! 네. 엄지손톱 정도의 크기가 됐는데 칼리에 님의 것과 비슷한 빛을 내요. 좀 더 하면 그 크기와 엇비슷해질 것 같아요.”
“거의 다 완성시켰군요. 첫 번째 치유석이 지닌 능력, 알고 있나요?”
“치유사의 의지를 이어받았고, 만든 이의 눈 색을 닮는다는 정도는요.”
칼리에는 클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첫 번째 치유석은 유일하게 스스로 치유력을 발휘하는 돌이에요. 그래서 소중한 이에게 선물하는 전통이 있죠. 이건 황제 폐하조차 어쩌지 못하는 불문율이에요.”
“돌 스스로 말인가요?”
칼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치유석을 만든 이가 허락해야만 돌이 제 기능을 하죠. 강제로 빼앗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황제 폐하조차 치유사가 드리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으신 거고요.”
클레리아는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많이 다칠지도 모르는 사람이 지닌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예를 들면 검을 쓴다던가.”
그 말에 클레리아는 순간 칼리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에 칼리에가 작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떠먹여 줘야 할 줄 몰랐는걸요?”
“고맙습니다, 칼리에 님! 좋은 선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별말씀을. 앞으로도 다른 치유석을 꾸준히 만들도록 해요. 비상시에 치유사의 힘을 보태는 데 써야 하니까.”
언질 후 돌아가는 칼리에를 보며 클레리아는 잔뜩 들떴다.
‘분명 에단에게라면 치유석이 유용할 거야. 드디어 제대로 된 선물을 할 수 있겠어. 에단에게라면 첫 번째 치유석이라도 아깝지 않아.’
부푼 마음에 온종일 내내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