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달라진 것과 달리 보게 된 것.
연회가 끝난 뒤 정식 활동 전까지 열흘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클레리아는 그동안 휴식을 취하며 치유사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생겼고.
그녀는 지난밤 저택으로 온 서신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칼리에가 보낸 서신이었다.
힘은 완벽하나,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해 힘을 쓸 때마다 몸이 부담을 느낄 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과제를 하나 내겠다고.
클레리아는 칼리에가 품에서 꺼내던 펜던트를 떠올렸다.
‘녹색의 영롱한 보석. 마치 살아 있는 빛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어. 정말…… 신비로웠어.’
과제는 바로 클레리아 또한 첫 번째 치유석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 보는 것.
클레리아는 종이에 쓰인 대로 약간의 공간이 생기도록 손을 말아 책상에 엎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몸에 퍼진 따스한 기운이 점차 손으로 모여들었고, 그 부피가 점차 커졌다.
하지만 그 기운들은 안정되지 않고 길을 잃은 듯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참 집중하던 클레리아의 입에서 ‘하!’ 하는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기운은 순식간에 전신에서 빠져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손을 들자 그 아래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한 번에는 무리구나.”
그때, 핑하고 도는 어지럼에 클레리아가 책상을 붙들었다.
“이래서 연습을……. 갈 길이 멀겠어.”
클레리아는 어지럼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쓰게 웃었다.
* * *
“그러니까… 이 서신이 황녀님께서 보내신 거라고요?”
“그래, 방금 왔구나. 뭐라 쓰였지?”
클레리아는 타이엔의 물음에 낮게 헛웃음 지었다.
“궁에 오라시네요.”
그녀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타이엔이 서신을 주기에 뜯어 본 터였다. 그런데 그게 하필 세실리아 황녀가 보낸 서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연회가 끝난 지 겨우 이틀인데, 또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이다니.
특이한 것은 황녀궁으로 불렀다는 점이었다.
‘설마 황녀가 나랑 독대하길 원한다는 건가. 회귀 전에는 말 한 번 섞는 것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어째서?’
순간적으로 서신을 구겨 얼굴을 묻을 뻔한 것을 클레리아는 가까스로 참았다.
‘놀러 오라 했어도 갈 생각도 없고, 놀러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더군다나 황녀와 마주할 생각은 더더욱 없는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통 세실리아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날 싫어했잖아. 심지어 경멸했잖아! 그래서 회귀 전 그냥 죽으라고 증언까지 했잖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몸이…… 아프다고 하면…… 안 되겠죠? 하하.”
난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타이엔 역시 멋쩍게 웃었다.
“그러는 건 상관없을 거다. 하지만…….”
“하지만?”
“아마 칼리에 님을 보내 몸을 고쳐 주고 다시 오라고 하시지 않을까 싶구나. 황녀 전하라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니.”
“아…….”
클레리아는 탄식하며 책상에 이마를 내려찍고 말았다. 불손한 태도인 건 알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해하는지 타이엔도 굳이 뭐라 하진 않았다.
“황녀 전하가…… 대하기 좀 어려운 분이기는 하지. 하지만 설마 네게 아무 이유 없이 해코지하려고 부르시지는 않을 거다.”
‘했어요, 해코지. 단단히 벼르고 해코지해서 아버지와 저, 모두 처형대로 끌려갔답니다.’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되뇌며 클레리아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타이엔은 그런 그녀의 등을 툭툭 다독여 주고 방을 빠져나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아리스, 나 황궁 가기 싫어.”
“하, 하지만 황녀 전하의 부름인걸요.”
“가야겠지?”
“당연하죠.”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던 클레리아의 칭얼거림에 아리스는 놀라움과 귀여움이 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자, 아가씨. 얼른 씻으세요. 제가 예쁘게 단장해 드릴게요?”
“최대한 늦게 해 줘.”
“안 돼요. 전하의 부름에 지각이라뇨.”
“아……!”
결국, 클레리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아리스의 등 떠밂에 욕실로 향했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클레리아는 황녀의 서신을 곱씹으며 몇 번이고 읽었다.
궁으로 부르는 건 맞는데 조금 특이한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나리를 따라 걷다 보면 노란 두 눈을 만나 하늘을 보게 될지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나리를 따라 걷다가 노란 눈을 만나고 하늘을 본다니? 수수께끼인가? 아니, 수수께끼이건 뭐건 왜 나한테 이런 걸 보내는 건데?’
생각하면 할수록 세실리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안투스 황태자 눈에 띄지 말라고 해 놓고 황궁으로 부르다니……. 이렇게 들락거리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라는 거야? 정말 속을 모르겠어.’
그 순간 마차가 멈췄고, 궁에 다다랐는지 마부 알만이 문을 열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알만.”
대리석과 금빛이 번쩍이는 궁 앞에서 클레리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일주일 안에 황궁을 대체 몇 번이나 오는 거야.’
거북함을 넘어 이제는 불쾌할 지경이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부름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클레리아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길은…… 전에 황궁 알현실로 가던 길인데. 황녀님의 궁은 이쪽이 아니지 않나?”
워낙 방대한 크기의 궁전이기도 했고, 전생에도 연회장만 다녔지 황녀궁이나 다른 궁은 구경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경비가 나타나면 물어야겠단 생각으로 그녀가 계속 발을 옮길 때였다.
전에 쓰러졌던 시녀를 구했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 잘 지내시려나, 몸 관리 잘하셔야 할 텐데.”
무심코 정원에 들어서 중얼거리던 클레리아는 다시 복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하얀 나리를 따라 걷다 보면 노란 두 눈을 만나 하늘을 보게 될지니.>
황녀의 서신에 쓰여 있던 문장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재빠르게 돌렸다.
“하얀…… 나리…….”
구석진 곳에서 하얀 꽃잎이 일렁이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도 힘든 곳인지라 조심스레 향하니, 백합이 양옆으로 가득 핀 오솔길이 보였다.
“설마…….”
황녀의 수수께끼는 단순한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길로 들어섰다.
* * *
길은 아치형의 작은 수풀로 지붕이 만들어져 있어 아늑했지만, 은밀해 보이기도 했다.
길지는 않은 길이였기에 클레리아는 금세 끝에 다다랐다.
딸랑.
“야옹.”
그때 갑자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어?”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을 때 알아차렸다. 응시하는 녀석의 두 눈이 샛노란 색이란 것을.
클레리아가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을 때였다.
순식간에 고양이의 눈으로 빨려들 것 같은 착각이 일더니 이내 눈앞에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아……?”
솨아아
엄청난 바람에 클레리아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붙들었다.
주변은 다양한 꽃과 풀이 가득한 아까와는 다른 모습의 정원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중, 뒤에서 다시 고양이 소리가 났다.
“냐아.”
재빠르게 눈으로 좇자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드는 세실리아가 보였다.
“화, 황녀 전하.”
“마법이야. 나하고 친한 황실 마법사가 만들어 준 거란다.”
“네?”
“지금 여기로 온 거 말이야. 내가 만들어 둔 비밀 문을 잘 찾았구나.”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비교적 편한 옷차림은 손님을 맞이할 의지가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나 정도는 손님으로 여길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클레리아를 긴장시켰다.
그건 바로 편해도 너무 편한 세실리아의 옷 때문이었다. 하늘하늘하고, 안이 비치는 통에 관능적인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클레리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좀 전보다 한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떠니?”
“……예?”
인사를 받는 말이 아닌 물음에 클레리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턱짓으로 방금 그녀가 서 있던 정원을 가리켰다.
“내 공중 정원 말이야. 본 소감이 어떠냐고.”
‘공중 정원?’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아 클레리아가 머뭇거리며 정원으로 향했고, 세실리아는 조용히 그것을 지켜봤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정원 난간에 선 클레리아의 입에서 감탄이 터졌다.
“와아…….”
높다란 황궁 중간에 있는 그곳은, 라스칸트의 수도 본트리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런 높이에서 이런 풍경을 본다는 건 수도에서 황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어때?”
수도 전경과 푸른 하늘, 그리고 하얀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각양각색의 꽃이 가득히 꾸며진 정원.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을까.
클레리아는 잠시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 세실리아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경계가 풀려 버렸다.
“정말 아름다워요.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건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세실리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고는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그만 들어오지 않겠니?”
“아? 네. 죄송합니다.”
고양이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농염한 자태로 앉은 그녀가 다가온 클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황녀 전하, 무슨 일로 불러 주셨는지요?”
그녀의 물음에 세실리아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왜겠니? 내 피부 미용을 위해서지. 칼리에가 맡고는 있었지만, 네 실력이 궁금해서 말이야. 요즘 칼리에가 대충 하는 것도 같고. 이따 다과회를 열기로 했거든.”
그녀는 거울을 보며 불만인 듯 입술을 쭉 내밀며 특유의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피부 미용? 설마 치유력을 그런 일에도 쓴다는 거?’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로 이해도 됐다.
대대로 치유사의 악용을 막기 위해 황제 일가 역시 치유사 독점을 제한했다. 그렇다 해도 황족이 대대로 장수한 거나 미모가 빼어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실 여인들이라면 미용에도 관심이 많았을 테니 치유사를 그런 일에 부리지 않을 이유도 없었을 테지.
대충 상황 굴러가는 것은 파악했지만, 클레리아는 아직 정식으로 활동 이력이 쌓이기도 전에 이런 일에 불리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다.
“자, 이리 와서 봐 주렴.”
세실리아의 말에 클레리아는 주변에 있던 작은 의자를 그녀의 앞에 놓고 앉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황녀의 얼굴에 손을 대다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을 하려니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못하겠다 말해서 변덕스러운 세실리아의 심기를 건드는 것은 삼가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세실리아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고, 손길을 따라 빛이 발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끝났습니다, 전하.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세실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거울을 들었다.
클레리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녀의 미소는 언제나 도도함과 차가움을 지녔다. 그것을 볼 때면 언제나 클레리아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너 정말 잘하는구나. 울긋불긋하던 것도 사라졌고, 건조하던 것도 없어. 역시 칼리에가 대충 했던 거구나. 내가 너무 풀어 줬던 걸까.”
황녀의 말에 클레리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칼리에 님께서도 분명 최선을 다하셨던 걸 겁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전하.”
‘황녀의 얼굴을 내가 손댄 탓에 칼리에 님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럴 순 없어. 그건 절대 안 돼!’
갑작스러운 클레리아의 반응에 세실리아는 놀란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풋… 하하하하핫.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니? 내가 칼리에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서 이러는 거니?”
갑자기 깔깔거리며 크게 웃는 황녀 덕에 하얗게 질린 클레리아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좀 즉흥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칼리에를 건들지는 않아. 그랬다가 폐하의 미움이라도 사면 어떡해?”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일어나 붉은 숄을 찾아 걸치고 침대에 엎드려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 얼굴. 넌 언제나 날 보면 그 눈을 하고 보고는 했지.”
세실리아의 표정은 회귀 전, 늘 클레리아를 향했던 싸늘하고 메마른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쥔 채 침을 삼켰다.
“그거 아니? 난 네 그 눈이 싫었어.”
클레리아는 혈관을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왜 지금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데 며칠 넌 나를 독대할 때 그 눈을 하지 않더구나. 물론, 내 깜짝 등장으로 놀란 경향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뭐……?’
세실리아는 어느새 붉은 입술 가득 미소 짓고 있었다.
“신기했단다, 내가 아는 프라이어스 영애는 무엇이든 완벽해지려는 인형 같았거든. 처음으로 사람이라 느껴졌지. 그래서 좀 더 대화를 해 보고 싶어서 부른 것뿐이란다. 그렇게 굳을 것 없어. 내가 비공식으로 사람 여럿 잡았다만 지금은 그럴 생각 없으니까. 하하하.”
쉽게 긴장이 풀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더 친해지면 앞으로 좋지 않겠니? 연금술사는 치유사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으니 말이야.”
클레리아는 그제야 세실리아가 제국에서 손꼽는 실력의 연금술사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치유사가 직접 능력을 이용해 치유한다면, 연금술사가 만드는 포션으로 치유의 보조나 응급 처치를 도울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만드는 포션은 치유사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닌다 들었다.
“설마 황녀 전하의 포션을 제게 주시겠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아직 나와 그대 사이에는 신뢰라는 것이 생긴 적이 없잖아? 그리고…….”
세실리아는 검지를 손에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난 아직 그대에게 있어 비밀을 밝힐 만한 신뢰 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치?”
순간 클레리아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명석하기로 유명한 세실리아는 그녀의 능력치에 대해 눈치챈 게 분명했다.
“우리 앞으로 더 많은 교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와 같은 생각이지? 클레리아?”
세실리아는 웃으며 일어나 굳어 있는 클레리아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음을 또 기약하기로 해.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아, 그리고 내가 보내는 서신을 통해서만 오도록 해. 그래야 눈에 띌 일이 없을 테니.”
* * *
‘대체 요 한두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모르겠어.’
멍한 얼굴로 처음 왔던 오솔길을 나오자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온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도 마법인가?’
이런 고위 마법을 처음 접하는지라 그녀는 한동안 얼빠진 얼굴을 펴지 못했다.
‘돌아가자, 이러다 다른 귀족이나 아는 얼굴을 만나면 더 피곤해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 차리고자 클레리아는 두 손으로 탁탁 뺨을 쳤다.
그렇게 서둘러 정원 입구로 향했을 때였다.
황녀의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어째서 나쁜 일은 겹치기만 하는 걸까.
하지만 그 생각은 클레리아와 마주친 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클레리아를 본 순간 우뚝 자리에 멈추어 쳐다보았다.
둘은 한동안 서로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러다 엘레나가 먼저 새초롬한 표정으로 클레리아를 외면했다.
‘그렇게 나와 주는 게 차라리 나도 편하니까.’
의도를 알겠다는 듯 클레리아는 그녀를 지나쳐 가려 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무래도 엘레나는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일이 있어서 왔어.”
“또 그 잘난 치유사 일이겠지.”
엘레나의 빈정거림에 클레리아는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돌아갈게. 일 봐.”
“연회 때 어떻게 돌아갔느냐는 안부도 안 물어?”
그 말에 지나치려던 클레리아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러자 엘레나는 옳다구나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신나니? 기뻐서 하늘이라도 훨훨 나는 것 같아? 모든 사람과 폐하까지 축하해 주니 이제 네가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구나. 그 기세가 언제까지 갈 것 같아?”
‘하, 정말 얘는 바뀌지를 않는다.’
“어떻게 돌아갔느냐는 안부도 안 묻는다기에 물으려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속내를 쏟아붓는 거니?”
“속내를 쏟아붓다니?”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착각한다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깎아내리는 네 수준도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 그런 얘기 할 거라면 나한테 말 걸지 마.”
“클레리아! 내가 없는 말 한 거 아니잖아? 너무 오랜만에 나타났으니 그런 대접이지 그게 아니라면 황제 폐하께서 고작 치유사 하나를 위해 연회까지 여실 것 같아? 그 관심 오래 안 가. 그러니 너도 정신 차려.”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클레리아는 인상을 쓰며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폐하의 관심이 오래가든 가지 않든 난 궁금하지 않아. 내가 주제를 모르고 착각에 빠진 것 같아 충고하는 거니? 그런데 어쩌지? 내가 보기엔 넌 내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으로밖엔 안 보여.”
“내가 널 부러워해? 웃기지 마!”
탁!
순식간에 쳐든 엘레나의 손을 클레리아가 막아 냈다.
“난 네가 뭐라 하든 관심 없어.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난 그저 내 삶에 충실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부탁 하나만 하자. 제발 내게 신경 끄고 네 길 가 줘. 가서 사교계의 중심이 되든, 네가 그토록 원하는 황녀님의 사랑을 받든 제발 난 빼고 네가 알아서 해. 네 일에 난 눈곱만큼도 관심 없으니까.”
가슴에 담아 뒀던 말들을 망설임 없이 토해 내고, 클레리아는 던지듯 엘레나의 손목을 놨다.
돌아서는 그녀의 뒤로, 엘레나가 악다구니를 썼다.
“후회할 거야. 넌 엄연히 사교계에서 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했어. 그러겠다고 약속한 것도 너고! 먼저 배신한 건 너야!”
클레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니, 먼저 배신한 건 너야. 네가 원하는 삶을 친구로서 살아 줬음에도…… 그런 날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너야.’
“배신한 적도 없고, 남 뒤치다꺼리하고 살 생각도 없어.”
클레리아는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 넌 나보다 모든 게 뛰어나니까 내 도움 필요 없잖아. 왜 그렇게 집착이야?”
“공작가는 이걸로 크게 흔들릴 거야. 이건 모두 다 네 탓이야!”
“네 투정 정도로 흔들릴 가벼운 혈맹이 아니야.”
그렇게 멀어져 가는 클레리아의 모습을 보며 엘레나는 손에 든 부채를 피가 나도록 짓이겼다.
* * *
“요번 그라치아에 다녀오신 아버님께서 황녀님이 좋아하실 거라며 사 오신 고급 향수입니다.”
장인이 세공한 크리스털 유리 상자와 단지에 담긴 연고 형태의 향수는 한눈에 봐도 고급이었다.
“손가락 체온으로 녹여 귀밑과 목덜미. 손목에 묻혀 놓으시면 맥박이 뛸 때마다 은은하게 향이 퍼지실 겁니다.”
교역 및 사절로 활동하는 델토른 후작가의 트리엔 영애가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고맙구나. 내, 다음 사교 모임 때 꼭 써보도록 하마.”
“델토른 영애는 매번 그렇게 외국의 진귀한 물품을 빠르게 받아 보시니 참 좋으시겠어요. 후작님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별말씀을요. 다음엔 영애들의 물건도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트리엔은 목적을 이뤘다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엘레나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이슬레이터 영애께서는 프라이어스 영애께 어떤 선물을 하셨나요? 이번에 특별한 선물로 축하드렸겠군요.”
쏠리는 이목에 무덤덤한 얼굴로 차를 마시던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네?”
“그렇잖아요. 치유사의 탄생이 제국의 경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는데 두 분이 죽마고우시기까지 하니 그냥 넘어가진 않으셨을 거 아니에요?”
“하하…… 그렇지요.”
“역시 그랬군요, 어떤 걸 선물하셨나요? 특별한 것이었겠지요?”
공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선물? 선물은 무슨. 내가 왜 걔한테 선물을 줘야 하는데? 아니, 애초에 선물 받을 태도조차 안 된 애라고. 다들 그깟 치유사 따위에 헛바람이 들어서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훑은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둘만의 비밀이랍니다. 특별한 선물이니까요.”
공녀들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렇군요, 궁금했는데 아쉽네요. 그래도 보기 좋습니다. 그런 비밀도 있고요.”
“그렇지요.”
‘비밀은 무슨…… 선물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어, 그 계집애에 대해 더 언급도 하기 싫으니까 이만 신경들 끄시지.’
엘레나는 흩어지는 시선을 의식하며 다시 찻잔에 코를 박았다.
황녀가 연 사교 파티에 초대받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 모임 시작 전에 클레리아를 만나 기분을 잡칠 건 뭐람.
그녀는 찻잔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직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때 세실리아가 나직이 물었다.
“좋아했느냐?”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황녀에게 꽂혔다.
“프라이어스 영애가 선물을 받고 좋아했느냐 물었다.”
미처 세실리아가 질문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터라 엘레나는 쭈뼛쭈뼛 답했다.
“네, 네. 물론…… 이죠, 전하.”
“흐음.”
세실리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안고 있던 고양이의 등을 한껏 쓸었다.
“내 보기엔 선물 같은 거로 쉽게 좋아할 것 같진 않던데. 프라이어스 영애는 그대가 그동안 내게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더구나.”
“다…… 르다니요?”
“글쎄, 흥미로웠달까.”
“……예?”
엘레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 우리 이제 내가 황실 요리사에게 특별히 주문한 디저트를 맛보자꾸나.”
엘레나의 되물음은 상관 않는다는 듯 황녀는 공녀들의 시선을 단숨에 돌렸다.
그 속에서 엘레나만이 황녀의 말에 사로잡혀 굳어 버렸다.
‘다르다니? 흥미롭다니? 무슨 뜻이야? 황녀님과 클레리아 사이에 내가 모르는 거라도 있는 거야?’
그러나 알 길은 없었다.
가끔 클레리아에 대해 언급될 때마다 내켜 하지 않는 황녀의 모습에, ‘정석밖에 모르는 아이라 그렇다’, ‘요령이 없다’, ‘그래도 착한 아이다’ 이런 식으로 달래 오던 엘레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고? 그동안 내가 한 말이랑?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데?
“세상에, 어쩜 이렇게 색도 곱고 예쁠까. 이슬레이터 영애, 어서 오세요.”
다른 이들의 부름에 엘레나는 뻣뻣하게 다가가 사이에 꼈다.
그러나 그녀의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사교 파티는 끝날 때까지 클레리아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 * *
‘정말이지 엉망이야.’
파티는 정말 최악이었다.
어떻게 끝날 때까지 클레리아의 얘기뿐일 수 있는지.
돌아갈 때조차 다른 영애들은 엘레나에게 ‘프라이어스 영애께 축하드린다고 제 안부도 꼭 전해 주세요!’라며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어떻게 끝까지 나한테 이래. 치유사 따위 국경 전쟁터로 가서 다 죽었으면 좋겠어.”
엘레나는 훌쩍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그리 슬퍼서 이런 곳에서 울고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불쑥 손수건 하나가 앞에 들이밀어졌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올려다보자 짙은 갈색 머리칼을 쓸어 올린 사내가 보였다.
“당신은……?”
“연회 때 제게 신세 지셨죠?”
“아!”
엘레나는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클레리아에 대한 분과 질투에 이성이 끊어졌을 때, 간신히 실언을 막아 주었던 사람.
“당신…… 이군요. 여긴 어쩐 일이시죠?”
“뭐, 나름 방문할 이유가 있었으니 있겠지요? 그나저나 우리 제대로 통성명이나 할까요?”
그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캄스턴 후작가의 차남. 레리안 캄스턴이라고 합니다.”
엘레나는 심술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잡았다.
“이슬레이터 공작가의 엘레나 이슬레이터라고 합니다.”
그녀의 반응이 재밌는지 그는 연신 웃음을 흘리며 엘레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무슨 일이시기에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공자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서운한데요? 목숨을 빚진 것 치고는 대우가 좀 박하군요.”
“혼자서도 잘 대처했을 거예요! 우쭐대지 마시죠.”
그 말에 레리안은 ‘하!’하고 웃어버렸다.
“대처요? 폐하가 들으셨다가는 처형이었을 겁니다. 즉, 결, 처, 형. 본인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말은 인정하는지 엘레나는 잔뜩 부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엘레나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말해 보세요. 뭐 때문에 여기서 그리 울고 있는 건지. 프라이어스 영애 때문이죠?”
엘레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레리안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 *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알만.”
클레리아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뒤 잠시 한숨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황녀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엘레나가 화려한 마무리를 해 줬다.
‘이걸로…… 엘레나와는 절교한 것과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세 공작가에 흔들림은 없겠지만……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균열은 불가피한 일이겠지.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을 해야 해.’
방자한 태도의 엘레나가 정신을 차린다면 관계 개선에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상 이슬레이터는 떨어져 나갈 게 불 보듯 뻔했다.
‘나로서는 그게 편하지만…… 이슬레이터 가문을 통째로 적으로 만들기에는…….’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을 담아 허탈하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클레리아?”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서자 에단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에단? 무슨 일이야?”
“잠깐 얼굴이나 볼까 하고.”
그가 말에서 내려, 집사 엘튼에게 고삐를 넘겼다.
“응접실로 갈까?”
“금방 돌아가야 해.”
“그럼 정원 산책?”
클레리아의 제안에 에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완연한 가을이 된 덕에 프라이어스 저의 정원은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곳곳에 우거져 낙엽을 뿌렸다.
손질 잘 된 관상목에 잠시 시선을 던지던 두 사람은 중앙에 자리한 분수대 앞에서 멈췄다.
“무슨 일로 온 거야?”
“한동안 바쁠 것 같아서.”
“아아, 하긴 나도 일주일 뒤에는 치유사 정식 임무에 파견돼.”
“일주일 뒤?”
“응, 왜?”
되묻는 그의 모양새가 이상함에 클레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술 대회 개회식에는 못 오겠구나.”
“어……? 맞다, 에단의 검술 대회가 그날이구나!”
요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클레리아가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다른 것도 아니고 네 첫 임무 수행인데.”
“하지만……. 아, 정말! 미안해 에단,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깜빡했어.”
이런 중요 행사는 절대 까먹는 일이 없었는데.
자신의 실수에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클레리아는 연신 낙담했다.
그것이 그저 귀여운 듯 에단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장난스레 턱 얹고 쓰다듬었다.
“괜찮대도 그러네. 그렇게 미안하면 그거나 해 줘.”
“그거라니?”
팅!
물음과 동시에 그가 뭔가를 튕겨 클레리아에게 던졌다.
동전이었다.
“어릴 때 여기서 많이 했잖아. 동전 던지고 소원 빌기.”
그 말에 잠시 어린 시절을 떠올렸는지 클레리아가 빙긋 웃었다.
“맞다, 그랬었지. 그래서? 뭘 빌었으면 하는데?”
“에단이 잘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어 줘.”
“뭐야, 너무 거만한 거 아닌가요?”
“할 자신 있으니까 신경 안 써.”
“……그거 남들이 들으면 정떨어지는 발언인 거 알지?”
질색하는 얼굴로 클레리아가 정색하자 에단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원하는 걸 이루게 해달라고 빌어 줘.”
“응.”
그제야 클레리아는 동전을 던지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 모습을 에단은 조용히 미소 지은 채 물끄러미 지켜봤다.
“다 했어!”
그녀가 기도를 마치고 활짝 웃자 그는 잠시 시선을 분수대로 돌렸다.
“아직도 별일 아닌 것에 열심이다, 너는.”
“응?”
클레리아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으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치유사 첫 임무가 대회 의료단 임무인 건 아니지?”
“응, 그건 아닌 것 같아.”
대답에 에단은 뭔가가 불만인지 잠시 쀼루퉁한 얼굴을 했다.
“치유사가 개입하려면 부상이 심각해야 하나?”
“그렇겠지? 아마 의료단이 손 쓸 수 없을 정도여야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그 정도로 다치면 되겠군.”
“뭐어?”
순간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클레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에단의 팔을 때렸다.
“지금 일부러 다치겠다는 소리야? 그러기만 해! 가만 안 둬!”
“그래야만 온다면서?”
시큰둥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클레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치유사를 부르려고 다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대체 그런 바보 같은 발상은 어디서 나와?”
“왜 치유사를 부르려 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한 에단은 빙긋 웃으며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클레리아의 손을 잡았다.
“치유사가 아니라 널 부르려는 거잖아.”
“…….”
클레리아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에단의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밀려 들어와 가슴 안, 깊숙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애, 애도 아니고 제발 철 좀 들어! 에단 칼리스터!”
도저히 눈을 마주치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녀는 버둥거리며 에단의 손을 빠져나왔다.
그때 갑자기 그가 손가락을 튕겨 가볍게 클레리아의 이마를 때렸다.
딱!
“아야!”
“어차피 살상은 절대 금기인 대회라 그 정도 부상을 낼 힘은 봉인 당하네요. 누가 바보인지를 모르겠네, 정말. 공부 좀 더 하시죠, 프라이어스 영애.”
“에단!”
후환이 두려운지 그는 멀찍이 떨어져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얼굴 좀 풀어.”
그가 달래도 여전히 클레리아는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쀼루퉁한 얼굴로 연신 손부채질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에단은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노을로 짙게 하늘이 물들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돌아서다 다시금 클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미를 몰라 클레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표끈, 안 줄 거야?”
‘아…….’
이번에도 클레리아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무사와 무탈을 빌어 주는 표끈 역시 준비를 못 한 탓이었다.
그러나 에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지금 매고 있는 머리끈을 줘.”
“응? 이건 쓰던 거라 좀 해졌을 텐데.”
“상관없어.”
그 말에 클레리아가 묶고 있던 붉은 머리끈을 풀어 그에게 건넸다. 에단은 기쁜 듯 웃으며 짧게 끈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잠시 손에 쥔 끈을 내려다봤다.
“향…….”
“응?”
“아카시아 향. 클레리아의 향이 나. 끈 가득히…….”
잠깐의 침묵 뒤 나온 에단의 말에 클레리아는 불에 덴 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고마워, 이 끈이 부끄럽지 않게 할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서서히 멀어졌다.
“참, 개회식에는 못 와도 결승전에는 꼭 와 줘.”
“……결승전에 올라갈 수는 있고?”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말에도 그는 웃었다.
“꼭 와.”
그렇게 터질 듯한 가슴에 손을 모은 채 클레리아는 점차 멀어지는 에단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