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과거와 대면한다는 건.
“앞으로 치유사로서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겠네. 내일 라스칸트 전체에 새로운 치유사의 등장을 공표하는 게 좋겠군. 이틀 뒤가 영애의 생일이라 들었다. 그날 황실 연회를 열어 새로운 치유사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네. 그때 보도록 하지.”
정말 황제의 속전속결에 클레리아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황실 연회?
라스칸트 전체에 공표?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많은 일에 어지러웠으나 그녀는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녀 세실리아 역시 흡족했는지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고양이를 안았다.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구나, 프라이어스 영애. 기억해 두도록 하마.”
짧고 굵은 알현이 끝나고, 칼리에, 클레리아, 타이엔의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혔다.
“후우…….”
황제 일가 앞에서 힘을 쓰는 것도 그랬고, 파죽지세로 속결하는 황제의 결단력도 그렇고.
긴장한 상태로 휩쓸리던 정신을, 클레리아는 간신히 붙들었다.
“꽤 긴장했었나 보구나.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오랜만인걸?”
타이엔이 달래듯 등을 토닥였고, 클레리아가 멋쩍게 웃었다.
“황제 폐하 알현인걸요.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거기에 진행도 꽤 빨랐고요. 알현실 분위기도 좀…….”
“폐하께서도 검을 쓰시던 분이시니. 네가 상대하기에는 힘들었을 텐데 의연하게 잘 버티어 주었구나. 하지만 네가 그걸 힘들어하는 거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장하구나, 내 딸.”
“그렇게 보였나요.”
클레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칼리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영애께서 꽤 의연하셔서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거기에 폐하의 빠른 결정도 적응 못 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익숙해지시면 그만큼 시원시원한 성격도 없으시지만. 고생했어요, 프라이어스 영애.”
그 말에 클레리아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빙긋 미소 지었다.
“각하!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
그때 복도 끝쪽에서 한 기사가 그들에게 달려와 예를 갖췄다.
“음, 무슨 일이지?”
“기사단 일로 의논드릴 것이 있습니다.”
타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나는 먼저 가 봐야겠구나.”
“가셔야…… 해요?”
클레리아는 순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전 생에서의 끔찍한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불현듯 불안함이 그녀에게 엄습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타이엔이 놀란 눈을 하다 딸의 손을 다정히 잡아 주었다.
“함께 돌아갔으면 하느냐?”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아.
이번엔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아.
클레리아는 불안함에 어리광을 부렸단 생각에 멋쩍게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아뇨, 일 보셔야죠. 괜찮아요.”
그는 클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둘러 돌아가마.”
“네, 아버지. 걱정하지 말고 일 보세요.”
“그래. 칼리에 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저희 저택에서 식사라도 함께하시죠.”
“기쁘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묵례 후 타이엔은 서둘러 기사와 함께 사라졌다.
“프라이어스 영애,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군요.”
“네, 감사했습니다. 칼리에 님.”
클레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칼리에가 다가가 속삭였다.
“아직은 그 누구에게라도 영애의 힘을 보여 주지 마세요. 최대한 함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나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빙긋 웃어 보인 뒤 빠르게 클레리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함구라고…….”
뭔가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클레리아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 * *
‘아, 정말 넓다.’
알현실을 나서고, 클레리아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긴장했던 마음을 달랬다.
황궁 시종들이 방문자를 위한 산책로와 궁중 정원으로 안내해 준 까닭이었다.
‘회귀 전에는 늘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해서, 부담스러워 제대로 구경조차 못 했었지.’
황궁은 많은 이들의 보살핌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와는 상반된 기억에 클레리아는 가슴이 지끈거려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늘 안달하던 황녀 세실리아와 가식으로 넘쳐나는 귀족 영애들의 모임. 거기에 모함당해 죽음으로 내몰리던 기억까지.
충격의 사건들이 몰아쳤던 곳 치고 회귀 후의 황궁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 괴리감이 적응되지 않아 간혹 클레리아는 숨이 막혔다.
“오늘 황녀님의 태도는 예상외였어.”
전생에서 세실리아는 그녀를 보며 단 한 번도 웃었던 적이 없었다.
그 고양이가 그리도 귀했던 걸까?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 경계해야 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 중 하나인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저, 공녀님. 좀 더 계실 예정이시면 마실 것이라도 내올까요?”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주근깨가 가득한 한 시녀가 물었다.
“아, 괜찮아요. 이제 퇴궁할 거라서.”
“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클레리아가 빙긋 웃으며 정원 입구로 향하려 할 때였다.
쿵.
갑작스러운 소리에 뒤로 돌자 조금 전 물었던 시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봐요, 괜찮아요?”
서둘러 다가갔지만, 시녀는 ‘끅, 끅’ 소리를 내며 뻣뻣해진 사지만 떨 뿐이었다.
‘발작이야!’
클레리아는 서둘러 손수건을 말아 시녀의 입에 물렸다. 자칫 혀가 말려들어 기도를 막을 수 있으니까.
“여기 사람 좀! 아무도 없어요?”
다급히 외쳐도 이상하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 큰일 나겠어.’
자신도 모르게 치유력을 쓰려던 클레리아는 손을 멈칫했다. 힘을 들키지 말라는 칼리에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 이러다 더 나빠지면……!’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없어. 최대한 빨리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겠어.’
클레리아는 거품을 무는 시녀의 머리를 잘 고정한 뒤 힘을 쏟았다. 떨림과 사지 강직이 서서히 풀리는가 싶더니 이어 시녀는 눈물을 흘리며 발작을 멈췄다.
그녀가 완전히 진정된 것을 확인한 클레리아는 낮게 숨을 뱉으며 시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괜찮아요? 정신이 드나요? 이제 끝났어요.”
의식이 돌아왔는지 시녀는 흐느끼며 클레리아의 팔을 붙들었다.
“고, 공녀님……. 제가 또…… 지금 무슨 일이…….”
횡설수설하기는 해도 정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을 때였다.
파사삭.
시녀를 달래려던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소리와 함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너…… 아직 애송이 정도의 치유력을 지닌 게 아니었나?”
몸을 돌린 클레리아는 소스라칠 듯 놀랐다.
당신이 왜 여기에?
고고하고도 도도한 말투.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칼의 세실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그 뒤에는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는 칼리에도 함께.
“화, 황녀님…….”
“네가 지금 이 아이를 구한 게로구나? 그렇지?”
세실리아의 표정이 점차 기묘하게 변해 갔다. 뭔가 흥미로우면서도 놀랍다는 듯.
그때 칼리에가 나서서 클레리아의 곁에 다가왔다.
“응급 처치 잘했군요. 나머지는 내가 하도록 하죠. 아직 치유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고생했어요.”
그녀는 둘 사이에 더 질문이 오가지 않도록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프라이어스 영애는 저로 돌아가던 중이 아니었나요? 아까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셨지요?”
“네?”
세실리아에게 힘의 진상을 들킨 것에 당황한 클레리아를 칼리에가 붙들었다. 그녀의 눈이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라 하고 있었다.
“네, 네. 황녀 전하, 그리고 칼리에 님. 실례가 아니라면 이만 물러가고 싶습니다.”
칼리에의 태도와 클레리아의 모습을 보며 세실리아 뭔가 뚱한 얼굴이었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내 너를 붙들 이유가 없으니 막을 이유도 없지. 서둘러 돌아가 보렴.”
“그럼…….”
예를 올린 뒤 돌아서려 할 때 세실리아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당겼다.
“내가 영애를 흥미롭게 볼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대는 어떻지? 그대가 내 호기심을 자극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나?”
클레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위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세실리아의 눈만 바라봤다.
“장난이야, 이제 진짜 물러가도록 해.”
“가 보겠습니다, 전하.”
클레리아는 도망치듯 정원을 빠져나왔다.
“황궁에 자주 놀러 와, 프라이어스 영애.”
‘하필, 하필 그 세실리아에게.’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에 클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
황궁 입구에 서 있던 클레리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섰다.
‘황궁에 자주 놀러 오라니 그건 무슨 뜻이지?’
황녀의 마지막 말은 한숨이 절로 나게 했다.
회귀 전 그녀는 엘레나와 친근하게 지내며 클레리아를 고고하고 오만한 가식 덩어리라고 거듭 말했다. 얼굴 앞에 대고 너같이 착한 척, 순수한 척 구는 것들을 제일 경멸한다고도 했다.
대놓고 멸시했으니 귀족들 간에는 클레리아가 황녀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돌았고, 끝에는 엘레나에게 속아 클레리아를 죽음으로 모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황녀와는 대체 무슨 악연인 건지.’
한 가지 다행이라면 회귀 전과는 조금 달라진 그녀의 태도랄까.
그러나 수습 과정 후에야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다른 치유사들과 달리 이미 능력이 갖춰진 걸 들킨 건 낭패였다.
‘하필 그 세실리아 황녀에게.’
그러나 이미 들켜 버린 것,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차차 생각하자.’
두통이 엄습하는 통에 클레리아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그런데 마차는 왜 안 오지? 알만이 식사하러 간 건가?’
문지기에게 퇴궁을 알린 건 20분 전이었으므로 진작 마차가 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녀의 마차는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아? 네, 네. 수고가 많으세요.”
그 덕에 클레리아는 인사해 오는 기사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알만, 얼른 와요. 이런 시선들은 너무 부담스러워.’
그녀가 속으로 애타게 마부 알만을 부를 때였다.
“클레리아?”
익숙한 목소리.
낮고 울림이 좋은 데다 다정하기까지 한.
클레리아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황궁 계단을 내려오는 에단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황궁에는 어쩐 일이야?”
연보랏빛을 머금은 채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
하늘보다도 더 푸른 눈동자.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움을 남자가 지녔다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클레리아는 늘 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기억보다는 조금 앳된 얼굴의 그였다. 회귀 전의 그는 성숙했지만, 지금과는 달리 쓸쓸해 보였고, 말 수가 현저히 적었다.
‘우리가 멀어지기 전에 넌 그런 모습이었구나. 결혼 후 왕래가 줄어서 이렇게 마주 본 게 아득히 먼 옛날 같아.’
“왜 이러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그가 다가왔고, 클레리아는 움찔하며 정신 차렸다.
“아, 그게. 마부가 오질 않아서.”
“아까 오다가 들었는데 황실 마구간 쪽 문을 고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어. 고치는데 한두 시간쯤 더 걸릴 거라던데.”
“아…….”
그때 한 시종이 에단의 말을 끌고 왔다.
“태워 줄까?”
“아냐, 괜히 바쁜데 그럴 필요 없어.”
“바쁘진 않아, 나도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클레리아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상대가 다름 아닌 에단이었으니까.
회귀 전, 그와 제대로 말을 해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엘레나가 불편해하는 통에 묵례만 하고 먼발치서 지켜보던 세월만 3년.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이해가 될 리 없는 에단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라, 부탁하는 게 실례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되질 않아. 어쩌지.’
그때였다.
“……아?”
몸이 갑자기 붕 뜬다, 싶더니 클레리아의 몸이 사뿐히 말 안장에 올려졌다.
에단이 그녀를 들어 올려 앉힌 것이었다.
“에, 에단. 아직 결정을……!”
“됐으니까 타.”
그렇게 말한 후 그는 훌쩍 뛰어올라 말에 올라탔다.
“하!”
그의 짧은 외침과 함께 말이 달리길 시작했다. 출발과 함께 말이 흔들리자 클레리아는 의지와 상관없이 에단의 가슴팍에 폭 묻히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그녀는 목덜미부터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위험하니까 안장 손잡이 꼭 붙들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클레리아를 더욱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아. 나 왜 이러지?’
그녀는 애꿎은 안장 손잡이만 붙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히히힝!
힘찬 울음소리과 함께 에단이 능숙하게 말을 세웠다.
“다 왔어.”
그는 태웠을 때처럼 또다시 클레리아의 허리를 붙들고 가뿐하게 그녀를 말에서 내렸다.
함께 올 때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간질거림에 클레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불편하진 않았어? 마차보다는 흔들림이 심했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덕분에 편하게 왔어. 고마워.”
인사치레가 오간 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은 거야?”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의 이유를 몰라 당혹스러울 때, 에단이 나직이 물었다.
“응?”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그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했다.
‘아…….’
어색함과 뜻 모를 두근거림 사이에서 혼란하던 마음이 일순 천천히 안정을 찾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그 눈에 클레리아는 지금껏 어렵던 그에 대한 감정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아직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지만…… 응 좋아졌어. 고마워, 덕분이야.”
클레리아의 답에 에단이 입가가 살며시 움직였다. 다행이라는 듯 살짝 미소 지어진 그 표정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폐하를 뵙고 온 거지? 치유사에 관한 일로.”
“어떻게 알았어?”
“네 능력치를 측정한 날. 나도 곁에 있었거든.”
“그랬구나.”
둘 사이에 바람이 불었다.
은빛 머리칼과 백금발이 노을빛에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우리 무척 오랜만에 대화하는 거 같아. 정말 오랫동안 멀찍이 바라만 봤던 것 같은…….”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뱉어 버렸다.
“오랫동안 멀찍이? 우리가?”
에단이 대화의 공백이 있던 3년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냥…… 그냥 그런 느낌이야.”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려던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쥔 탓이었다.
“난 절대 멀어지지 않아. 클레리아.”
온전히 자신에게 꽂힌 에단의 시선을 느끼며 클레리아는 그의 눈길에 데일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또 야, 심장이…… 오늘따라 제멋대로 뛰어.’
천천히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더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머리로 쏠리는 열기에 정신을 잃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 그, 그렇지. 우리는 라스칸트를 지키는 세 공작가의 후계자들이니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거야.”
에단은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 그녀의 머리칼을 놓아준 뒤 말에 올라탔다.
“쉬어.”
이제는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에단이 멀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클레리아는 끝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저택 대문에 기대었다.
* * *
다음 날 정오, 라스칸트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공문을 붙여 제국에 새로운 치유사를 알렸고, 더불어 3일간 황궁 창고를 개방해 곡물을 나눈다 공표했다. 때아닌 축제 때나 벌어지는 일에 나라가 들썩일 수밖에.
하지만 클레리아가 놀란 것은 다른 일 때문이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아침부터 휘황찬란한 드레스가 방으로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자, 모두 아가씨의 드레스예요.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 아이샨트 님의 최신 드레스들이랍니다. 아가씨께 제일 어울리는 걸 고르고 거기에 저희가 부가적인 치장을 할 거예요.”
“하, 하지만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다 입지도 못할 거고, 거기다 이 정도면 대체 얼마야.”
옷걸이 가득 걸려 있는 드레스를 보며 클레리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스는 손을 저었다.
“그간 아가씨가 어찌나 돈을 안 쓰셨는지 예산이 쌓여 있었다고요. 공작 각하께서도 오늘은 꼭 아가씨가 뭐라 하셔도 드레스를 마련하라고 엄명하셨고요. 그리고 제가 누구예요? 예산도 다 안 쓰고 일정 부분 남겨 놓았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 작정했구나.’
“우리도 아가씨 꾸며 드리고 싶다고요. 제발 이제 꾸미세요, 네? 내일은 더군다나 아가씨의 날이잖아요. 제국 전체가 축하하는 아가씨의 날!”
아리스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클레리아는 그녀의 정성에 두 손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내가 졌어. 아리스가 하자는 대로 할게.”
“꺄! 아가씨!”
그녀는 어찌나 기쁜지 함성까지 내지르며 클레리아를 끌어안았다.
“자, 당장 연회는 내일이라고요. 오늘 밤새워서 가봉을 마쳐야 하니까 고되더라도 아가씨께서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아, 뭔가 오늘 너무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벌써 지치는 느낌이었으나 전투적인 아리스를 보며 클레리아는 난감히 웃었다.
“바탕은 이 색이, 장식은 이게, 그리고…… 리본은 이 색이 나으려나?”
클레리아는 거울 앞에서 고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속 드레스만 걸친 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다 벗길 반복했다.
워낙 꾸미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수수하게 다니던 터라, 이런 일이 드물었던 고용인들은 외려 자신들이 더 들뜬 모양새였다.
‘이렇게 좋아들 하니 그만하자고 할 수도 없고.’
클레리아는 씁쓸히 웃어 버렸다.
그녀가 회귀 전 꾸미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엘레나 때문이었다. 그녀가 워낙 꾸미는 걸 좋아해 그걸로 주변을 쥐잡듯하는 것을 보고 질려 버린 탓이었다.
거기에 안부보다는 입고 온 드레스를 평가하거나 출처를 묻는 영애들이 귀찮기도 했고.
그 가식적인 시선이 답답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나저나 참 색 곱다. 어떤 면에서는 엘레나가 여기에 집착하는 것도 알 것 같아.’
고운 빛을 반사하는 비단이 미끄러지듯 손을 간질였다.
“에단 님께서도 오랜만에 정복을 입으시겠네요. 또 얼마나 많은 영애 입에 오르내리실지.”
툭.
아리스의 말에 순간 클레리아의 손에 있던 천이 떨어졌다.
“아가씨?”
“아, 미안해.”
아리스가 천을 주워 주며 바라봤으나 클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은 어제저녁 헤어졌던 에단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던 터였다.
‘가만히 머리칼을 그러쥐던 에단의 손길도, 말을 타고 사라지던 뒷모습도 지워지질 않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욱 선명해져. 대체 뭘까. 이런 적 없었는데.’
“이번 연회는 아가씨를 위해 열리는 거니까 에단 님께서 에스코트해 주실 거예요. 그렇죠?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릴 거예요.”
마치 그 모습을 본 것처럼 아리스가 황홀에 젖어 말하자 클레리아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어, 어울린다니 무슨 말이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을 때였다.
“만나야겠어!”
방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그러니까 공녀님, 아가씨께서는 지금…….”
“당장 비키지 못해? 지금 누구 앞을 막아?”
“응? 무슨 일이지?”
클레리아가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쾅!
그녀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고, 짙고 누런 금발을 만 여인이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이, 이슬레이터 공녀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드레스를 가봉 중이신데…….”
엘튼의 난처한 목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건 다름 아닌 엘레나였다.
“클레리아!”
카랑카랑하게 째지는 목소리가 클레리아를 불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일이냐고!”
“……엘레나.”
순간 정말 눈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가 속에서 폭발하듯 들끓었다.
클레리아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서신도 무시했고, 엘레나 정도의 인내력이라면 진작 이렇게 들이닥칠 걸 예상했어야 했다.
에단으로 마음이 어지럽던 통에 그녀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클레리아는 아리스가 건네는 가운을 입고 허리끈을 조였다.
“연통도 없이 오다니, 무슨 일이야? 엘레나.”
표정이란 표정은 모조리 얼굴에서 지운 클레리아가 단조롭게 물었다.
“말 그대로야. 내일 연회. 대체 뭐야?”
“뭐긴 뭐야. 황제 폐하가 여는 축하연이잖아. 각 귀족에게 명이 전달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소란을 부려?”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되니까 이렇게 내가 온 거잖아.”
“말이 안 되는 게 뭔데?”
“그러니까…….”
딱 봐도 자존심이 깎여 나간 그녀에게 클레리아가 재촉하듯 눈썹을 치켜떴다.
“네, 네가 치유사라니. 그게 말이 돼? 10년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필?”
‘하필 나라…….’
누가 들어도 무시하는 투의 말에 클레리아는 헛웃음 지었다.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폐하의 말씀을 의심하는 거야?”
“……다 나가!”
엘레나가 소리쳤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고용인들이 눈치를 살피며 나갔고, 아리스 역시 뒤따르려 할 때였다.
“아리스는 여기 있어.”
“둘만 할 얘기가 있으니 나가.”
“여기 있어. 엘레나 넌 내가 드레스 가봉할 때 말도 없이 들이닥쳤어. 일을 마무리할 시중이 필요해. 아리스는 남아.”
평소 다정한 모습과는 달리 클레리아는 권위 있는 귀족의 위압감을 뿜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기운에 압도된 아리스가 조용히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레나는 못마땅함에 미간을 구겼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다시 입을 열었다.
“검술도, 마법에도 소질이 나타난 적 없는 네가 하루아침에 치유사라니 이상하잖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폐하께서 공표하신 거잖아. 폐하의 인정이 곧 인증이니까.”
클레리아의 당당한 태도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엘레나가 인상을 썼다.
“그럼 내 사교 모임은? 응? 내 사교 모임은 어쩌고! 원래 네 축하 파티가 아니라 내 사교 모임이 열리기로 했잖아!”
‘하…….’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황제의 명도 자기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에 혀가 내둘러졌다.
그녀가 방으로 막 들어왔을 때 느꼈던 내장이 끊어질 듯 뒤틀리는 통증도. 배신당한 아픔과 치졸한 질투에 분노로 격동하던 심장도.
상대하는 것이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음에 클레리아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리도…… 이리도 어리석은 아이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됐었다니.’
“당연히 취소지. 안 그래도 오늘 서신을 넣을 생각이었어.”
“네가 폐하께 날짜를 미루자고 했으면 됐잖아.”
“설마 폐하의 하명보다 네 사교 모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클레리아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이만 나가 줄래? 가봉이 아직 덜 끝났거든. 너무 실망하지는 마. 내일 연회에 많은 사람이 올 테니까. 너도 얼른 가서 네가 좋아하는 드레스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아리스가 재빨리 나와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빗기려 할 때, 엘레나가 밀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클레리아의 턱을 쥐고 자신에게 돌렸다.
“무슨……?”
“너 무슨 일이야? 꿈이라도 꾼 거야? 아니면 심하게 아파서 정신이라도 놓은 거야? 대체 왜 이래?”
클레리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엘레나의 손을 밀었다.
“무슨 소리야?”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일은 착오가 있으셨던 게 분명해. 그리고 클레리아 넌 나한테 대하는 태도가 왜 그래? 마치 딴 사람처럼?”
믿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건지.
엘레나는 망언을 내뱉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막무가내인 그 태도를, 클레리아는 냉담하게 바라봤다.
“딴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지.”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너 같은 걸 위해 희생할 나는, 더는 없을 테니까.’
판이해진 클레리아의 태도에 엘레나는 혼란과 분이 뒤섞인 얼굴로 씩씩댔다.
“아리스, 영애가 나가는 걸 도와드려.”
클레리아의 말에 아리스가 문 쪽으로 안내하려 섰을 때였다.
“나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해. 이 건방진 게 나서길 어딜 나서?”
순식간에 치켜든 엘레나의 손이 무참히 아리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걸 본 클레리아의 눈에 불이 일었다. 클레리아는 재빨리 그사이에 뛰어들며 엘레나의 손을 쳐냈다.
“너 미쳤어? 내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해?”
“하지만 클레리아! 이 같잖은 게 지금……!”
엘레나가 되려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과거에 넌 기강을 잡겠다고 내 고용인들에게 멋대로 손을 댔지. 다시는 그런 꼴 안 봐. 그렇게는 안 둬!’
“이슬레이터 저에서는 그게 고용인을 다루는 법일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아냐. 아리스는 내 하인이야. 너희 고용인을 다루듯 함부로 대하지 마. 한 번만 더 이러면 이슬레이터 공작 각하께 내가 직접 아뢰겠어. 알겠어?”
엘레나가 수치로 치마를 쥔 채 떨었다.
클레리아는 싸늘히 방문을 열었다.
“더 보고 싶지 않으니 내 방에서 나가, 이슬레이터 영애.”
결국, 엘레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방을 달려나갔다.
* * *
“하…….”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클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급전개되는 것도 그랬지만, 엘레나를 본 잔상이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혔다.
‘아무리 뻔할 행동이었어도 역시 엘레나를 마주한다는 건 끔찍했어.’
감옥에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파렴치한 얼굴을 들이밀던 것이 생생했다.
부부 사이를 방해할까 봐 함부로 연통을 넣지도 못했었는데.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뒤를 처리해 달라며 부정을 저지르던 그녀.
엘레나가 찾아오는 날은 스스로의 행동에 찔린 그녀가 제 반응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클레리아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에단을 대동해 쓸쓸한 친구를 위로차 방문한다는 겉치레를 그리도 강조했던 거고.
‘정말이지 나쁜 쪽으로만 머리를 굴리는 아이야.’
어제 그녀를 내쫓다시피 보낸 게 언짢기는 해도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시원했다.
이슬레이터 공작이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으나 겨우 그런 것으로 혈맹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못마땅함을 표한다면 클레리아는 정식으로 엘레나의 태도를 항의할 것이고.
“더 엮이고 싶지도 않지만, 봐줄 생각도 없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마차는 점차 황궁에 다다랐다.
* * *
“…….”
클레리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황실 초대장을 조금 더 밀어 보였으나 문지기는 그녀를 뚫어지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여기 황실 초대장을…….”
“…….”
“크흠! 흠흠! 에헤헤헴!”
여전히 말이 없자 뒤에 있던 마부 알만이 듣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헛기침했다. 문지기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허둥댔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들어가십시오!”
“이름 확인 안 하시나요?”
“어? 아 그게… 아! 프라이어스 가의 영애… 프라이어스?”
초대장 이름과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확인하던 문지기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드, 들어가십시오. 프라이어스 영애.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알림에 그제야 클레리아는 발을 옮겼다.
그러다 뭔가 이상함을 느껴 돌아보자 정면만 보고 있어야 할 문지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입을 벌리고.
민망해진 클레리아는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녀가 연회장 입구에 도착해 안내인에게 이름을 말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노련하게 곧 허리를 숙였다.
“프라이어스 영애, 폐하께서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할 때까지 마련해 놓은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시라 명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예, 따라오시지요.”
갑작스러운 대우가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클레리아는 안내인을 따라갔다.
“그럼 편히 계시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종을 울려 주십시오.”
“……설마 정말 여기에서?”
클레리아가 채 다 묻기도 전에 이미 문은 닫혀 버렸다.
“대체 왜……?”
클레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 방 안을 바라봤다,
‘여긴…….’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있는 방은 다름 아닌 황족 전용 휴게실이었다.
“이런 데서 편히 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가 울고 싶은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가구는 100년 이상 된 고급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커튼이며 바닥에 깔린 카펫은 이웃 나라의 최고급 특산품이었다.
카펫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스치는 감촉도 나지 않았고, 디딘 발도 너무도 편안했다.
황제가 기뻐도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휴게실을 선뜻 내어 준 것을 보면.
하지만 그의 의도가 어찌 됐든, 황가에 대한 불편함과 이 휘황찬란한 고급스러움은 그녀를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게 했다.
클레리아는 조심조심 걸어 소파에 겨우 앉았다.
아무도 없는 걸 아는 데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어쩌면 이건 쉬는 게 아니라 고문인지도 몰라.”
그녀는 더 피곤해지는 몸을 느끼며 차라리 방을 배회하는 걸 택했다.
그렇게 방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클레이아는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뚝 멈춰섰다.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 본 건 처음이야.’
새삼 목에 걸린 목걸이도, 선명하지만 과하지 않게 된 메이크업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돌아가면 아리스를 더 칭찬해 줘야겠어.’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었을 때였다.
스슥
순간 한쪽 가림막 뒤에서 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섰다. 뒤에서 난 소리는 점점 커져 이내 발소리로 바뀌었다.
‘뭐야?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어? 누구? 설마 황실 사람인가?’
클레리아는 화들짝 놀라 문까지 물러섰다. 여차하면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설마 프라이어스 영애?”
‘뭐지? 이 익숙하지만… 꺼림칙한 목소리는.’
천천히 문에서 돌아섰을 때였다.
클레리아는 작게 경직된 탄성을 흘렸다.
가림막 뒤에서 나온 것은 회귀 전, 엘레나의 정부 중 하나였던 레리안 캄스턴이었다.
그는 나른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클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꾸미셔서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프라이어스 영애가 맞으시는군요. 좀…… 놀랐습니다.”
그의 불순한 시선이 클레리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문제 삼을 정신이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여기서 맞닥뜨린 것에 더 놀랐으니까.
“폐하가 연회 시작 전까지 머물라 명하셔서 안내받았어요. 그나저나 캄스턴 영식께서는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이 방은 저만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요.”
레리안은 별생각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쉴 곳을 찾다 보니 말이죠.”
쉴 곳을 찾아?
아무리 그래도 여긴 황가 전용 휴게실인데 이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쓰다니.
대범한 건지, 생각이 짧은 건지.
“여긴 황가 전용 휴게실 아닌가요?”
“뭐, 영애께서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라고 못 쓸 이유가 있나요?”
황당함을 넘어 기가 막혔다.
저런 안하무인의 태도는 엘레나에게 배운 건가? 아니, 아직 만났을 리는 없으니 그냥 기본으로 탑재되어있는 거?
무엇이든 간에 엘레나와 그가 왜 죽이 맞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레리안은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히죽이며 클레리아가 있는 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인 채 계속해서 불량한 시선으로 클레리아를 훑었다.
“왜 그러시죠?”
“어째서 진작 꾸미지 않으셨죠?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아, 항상 함께 다니시는 이슬레이터 영애가 너무 평범하니 불쌍해서 일부러 그러셨나?”
“뭐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무례한 말을 생각 한번 거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유명한 망나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막말을 일삼을 줄 몰랐다.
엘레나의 일을 무마하며 몇 번 대면했음에도 이 정도였을 줄은…….
“쉬시던 거, 마저 쉬시죠. 제가 나가 드릴 테니.”
클레리아가 문을 열자 레리안이 성큼 다가와 문을 닫았다.
탁.
“뭐 하는 거죠?”
놀란 그녀가 묻자 레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뭐,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나름대로 뒷배가 있음이니 그렇게 작정하고 싫어하는 티 낼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어요, 제가 나가는 게 낫다고 여겨 나가려는 것일 뿐, 캄스턴 영식께서는 마저 쉬시죠.”
클레리아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레리안이 피식 웃으며 서서히 떨어졌다.
“아닙니다, 영애를 위한 공간을 제가 마음대로 쓰고 있던 거니 제가 떠나는 것이 맞죠. 전 술과 아름다운 레이디들을 뵈러 이만.”
레리안은 클레리아를 지나쳐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말이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큭’ 하는 웃음을 흘리며 멀어져 갔다.
그가 멀어진 걸 확인한 클레리아는 경직됐던 몸이 풀리는 걸 느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칭찬이야, 비웃는 거야? 비웃는 거겠지.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거슬리게 하는 법을 잘 아는 남자였다. 정말 알면 알수록 불쾌해지는.
클레리아는 처음 방에 왔을 때 긴장했던 건 잊고 소파에 털썩 앉아 버렸다.
회귀한 뒤 내내 당혹스러움과 혼란한 일의 연속이다.
연회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진 그녀는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숨을 골랐다.
* * *
“이슬레이터 가의 엘레나 이슬레이터 영애가 드십니다!”
시종의 안내에 미리 연회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화려한 장신구와 드레스로 치장한 그녀가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섰다.
“어머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이슬레이터 영애.”
“오늘 여실 사교 파티를 기대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뵈니 기쁘군요.”
이슬레이터의 명성을 익히 아는 귀족들은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어 웃음꽃을 피웠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갖은 짜증과 신경질을 내던 그녀는 이제야 좀 마음이 풀어졌다.
‘역시 내가 어울리는 곳은 바로 이런 곳이지. 클레리아 이 바보 같은 것. 다른 때였다면 신경 좀 써 줬겠지만, 오늘은 턱도 없어. 어제 날 그렇게 대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가 즐거운 마음으로 귀족들을 대할 때, 한 남작 영애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이슬레이터 영애, 정말 기쁘시겠어요. 절친하신 프라이어스 영애가 치유사가 되셨다니. 제국에도 큰 경사인데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하던 남작 영애는 순간 ‘읍’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멈췄다.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는 엘레나의 시선이 무던히도 서슬 퍼런 탓이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딱딱하고 매서운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말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다. 슬금슬금 물러서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렇네요.”
딱 한 마디 내뱉은 엘레나는 차갑게 외면한 뒤 그 무리를 빠져나갔다.
“영애, 괜찮아요? 이제 숨 쉬어요.”
그녀가 사라지자 다른 귀족이 남작 영애를 달랬고, 이내 그 영애는 울음까지 터트려 버렸다.
“희한한 일이군.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 두 분이 절친한 사이가 아니셨던가? 저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응에 귀족들이 수군거렸으나 이슬레이터 가를 상대로 더 입을 놀리는 자는 없었다.
“칼리스터 가의 에단 칼리스터 영식 드십니다!”
엘레나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단의 이름도 연회장에 울렸다.
시종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그가 들어서자 일순 장내는 여성들의 감탄 섞인 탄성으로 술렁였다.
사교계에는 좀처럼 모습을 비추지 않는지라 정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꽤 오랜만이었다.
백색 바탕에 간간이 칼리스터의 색인 보라색으로 포인트를 준 연회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거기에 훤칠한 키와 뚜렷하고도 선이 분명한 얼굴은 가히 보고 있는 남자들까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세상에, 칼리스터 영식은 어떻게 볼 때마다 저렇게 멋질 수가 있죠?”
“정말 이런저런 사교 모임만 다니다가 이렇게 큰 연회에서 공자님을 뵈면 눈이 다 밝아지는 것 같다니까요?”
“공자님의 인사, 한 번 받는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저런 분하고 약혼 얘기가 오가는 이슬레이터 영애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혈맹인 걸 떠나서 저라면 아마 행복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귀부인이고, 영애고 할 것 없이 그의 등장에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칼리스터 공작 각하께서 뿌듯하시겠군. 외모도 빼닮았지만 저렇게 영애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니.”
“마치 전성기 적의 날 보는 것 같지 않나? 허허허.”
남자 귀족들까지 실없는 농담을 하며 온통 감상에 빠졌다.
그 이야기들을 잠자코 듣던 엘레나는 미소 지으며 천천히 에단에게로 향했다.
‘그래, 클레리아가 치유사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슬레이터의 힘은 막강해. 거기다 난 에단이라는 카드가 있잖아? 클레리아는 국경으로 임무를 위해 떠나게 될 뿐이야. 어차피 여기서 중심이 되는 건 나야.’
생각을 마친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배시시 번졌다.
콧대가 설 대로 선 그녀가 에단의 앞에 다다랐다.
“칼리스터 영식?”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자 에단은 잠시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가볍게 키스했다.
“오늘도 에스코트 잘 부탁해?”
그녀가 웃으며 팔짱을 끼려 할 때였다.
에단은 몸을 살짝 뒤로 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한데 오늘은 안 돼.”
“……뭐?”
순간 엘레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오늘 에스코트를 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거든.”
예상치 못한 말에 엘레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깐만, 에단. 그게 대체 무슨 뜻……?”
엘레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내 시종이 입을 열었다.
“프라이어스 가의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영애 드십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입구로 쏠리고 연달아 ‘와아’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탄성을 따라 곧 클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일순 연회장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잔잔히 연주되던 곡도 멈춰 버렸고, 술을 따르던 시종도 잠시 넋을 잃고 문 쪽에 시선을 뺏겼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백금발.
머리 곳곳에 과하지 않게 장식된 작은 꽃과 반짝이는 핀.
거기에 입고 있는 드레스는 하얀색을 바탕으로 살구색과 분홍색, 금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뤘고, 투명한 베일과 엉덩이 쪽 리본이 풍성함을 더했다. 스퀘어 라인의 목 부분은 그녀의 여성스러움을 한껏 강조시켜 주었다.
클레리아는 자신을 보고 굳어 버린 사람들을 보며 눈만 굴렸다.
‘바, 반응이 왜 이러지.’
이런 식의 눈길은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 또한 뭔가 잘못됐나 싶어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펴, 평소에 보던 영애의 모습이 아니로군요.”
“수수하게 다니셔도 아름답다고 유명하긴 했지만…… 지금 프라이어스 영애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로군요.”
“라스칸트 제국 전체를 아울러 감히 견줄 자가 없다 해도 믿겠어요.”
많은 이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엘레나만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저게 그 클레리아라고? 꾸미는 건 죄처럼 여기던 그 아이? 아니, 그렇다 쳐도 저 모습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클레리아를 보고 숨죽여 감탄하고 넋이 나간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에단만이 그 분위기를 조용히 즐겼다.
좀처럼 장내의 충격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가 클레리아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프라이어스 영애, 제게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에단?”
엘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에단이 자신이 아닌 클레리아를 에스코트한다고?
클레리아만을 바라보는 에단은 그 순간 엘레나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다가온 그를 보고 클레리아는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미소 덕에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손발에 조금씩 피가 돌았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에단의 손을 잡았다.
“부탁드릴게요, 칼리스터 영식.”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클레리아와 엘레나는 서로를 마주했다.
여전히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아플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장.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클레리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엘레나를 볼 때마다 장대 높이 매달리던 아버지의 머리를.
재판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모함당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그 수모는 시간을 역행해도 마음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때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지만, 그때처럼 엮이지도 않을 거다.
클레리아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묵례했다.
“오셨네요, 이슬레이터 영애.”
그러나 엘레나는 맞절도 하지 않고,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거기까지 예상한 클레리아 역시 더 말하지 않았다.
한참을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엘레나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너무도 의외의 모습에 주변 귀족들이 수군댔으나 클레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물론, 옆에 있던 에단 역시 끼어들지 않았고.
그렇게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엘레나를 둘은 묵묵히 지켜봤다.
* *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뭘?”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다 조금 한가해졌을 때 클레리아가 물었다.
“어째서 엘레나에게 그렇게 냉랭하느냐고. 왜 그렇게 홀대하느냐 안 물어?”
“두 분의 일에 함부로 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의 말에 클레리아는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할 리가.
방금 상황은 사실 대외적으로 좋진 않았다. 사람들이 3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 테니까.
하지만 겨우 엘레나의 아집으로 깨질 동맹도 아니었고, 깨진다 해도 이슬레이터의 입장에서도 그다지 좋은 모양새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세간이 좀 시끄러울 거야.’
그때였다.
“누에른 펠리시아스 황제 폐하. 안투스 펠리시아스 황태자 전하. 세실리아 펠리시아스 1황녀 전하 납십니다! 이어 칼리에 에나스 님도 함께하십니다!”
시종의 안내와 함께 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자 웅장한 나팔 소리와 함께 금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민 황제와 황태자, 황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아 다부진 체격인 황제와 붉은 머리칼을 높게 묶고 특유의 요염함을 뿜어내는 세실리아 황녀. 거기에 비쩍 말랐으나 눈빛은 매서워 날카로움을 풍기는 황태자까지.
셋의 등장은 장내를 압도했다.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도 나오셨군.”
제국의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니만큼 후계자 수업으로 일정이 빠듯하다는 안투스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역시 같은 치유사를 축하하는 자리인지라, 칼리에 역시 참석해 뒤를 지켰다.
“다들 알겠지만, 근래 제국 라스칸트에는 아주 큰 경사가 있었소. 그토록 기다리던 새로운 치유사가 나타났으니 말이오.”
황제는 기쁜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클레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손길을 따라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향했다.
“개국 공신이자 짐을 도와 이 나라를 받치는 프라이어스 가에서 치유사가 나왔다니, 이 얼마나 큰 기적이오. 모두 이 젊은 새로운 치유사를 기쁨으로 맞아 주길 바라오.”
그가 말하자 사람들이 길을 텄고, 에단이 앞서 손뼉 치기 시작했다.
연달아 사람들의 박수 물결이 이어졌고, 클레리아는 묵례 뒤 트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스칸트와 펠리시아스 가에 주신 르누엘룻의 축복을!”
“새로운 기적에게 영광을!”
여기저기서 그녀를 축복하는 언사가 터져 나왔다.
클레리아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황제가 내려다보고 있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이어 칼리에가 고급스러운 쿠션 위 얹힌 목걸이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붉은 비단 위 목걸이의 중앙에는 금색 십자가가, 그리고 중심에는 황제가 승인해야만 쓸 수 있는 펠리시아스 상징 보석인 루비가 박혀 있었다.
“새로운 치유사에게 내 펠리시아스의 보석과 치유사 증표를 하사하겠네.”
누에른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며 낮게 읊조렸다.
“자네에게 매우 기대가 커. 자네는 내 세대의 통치가 얼마나 축복받았는지에 대한 지표가 될 테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황제는 천천히 클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선이 아니라 최고지. 그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네. 알겠나? 프라이어스 영애.”
역시나 황제는 만만치 않았다.
성격이 급한 것만큼 그의 기대치 또한 극명했다.
회귀 전에도 겪었고, 며칠 전 알현할 때도 겪은 바였다. 클레리아는 되도록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다짐했다.
칼리에가 경고한 대로 능력치에 대해 완급 조절을 해 가며.
황제가 천천히 떨어져 박수 치려다 누군가를 발견한 듯 화색이 돌았다.
“오! 저기 마침 이슬레이터 영애가 있군.”
그의 말에 엘레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
‘모두가…… 클레리아를 보고 있어. 에단도, 황제 일가도. 연회장 내 모든 사람이.’
무리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엘레나는 못마땅함에 입술을 뒤틀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눈에는 헛된 일에 대한 설레발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치유사가 다 뭐라고? 10년 만에 이제 겨우 하나가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치유사가 원래 없던 것도 아니잖아. 클레리아가 추가된다고 지금까지와 크게 달라질 것도 없어. 가여우신 황제 폐하. 얼마나 그것에 목마르셨으면 겨우 클레리아 같은 치유사 하나에게 이런 과소비를 하실까.’
그렇게 여겨도 주먹 쥔 그녀의 손은 생각과 다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에단, 왜 너는 거기서 웃고 있는 거야? 어째서 오늘 내 에스코트를 거부한 거지? 클레리아 그 계집애가 뭐라고 구워삶았기에? 내가 아는 에단은 이럴 리 없어. 분명 클레리아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함성 속에 있는 클레리아를 노려봤다.
그러나 축복받는 그녀를 보는 건 힘들었다. 엘레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오! 저기 마침 이슬레이터 영애가 있군.”
누가 들어도 그녀를 지목하는 목소리에 그대로 발이 뚝 멈췄다.
누에른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의 든든한 수족 중 하나인 이슬레이터. 그대들의 동맹인 프라이어스의 경사에 당연히 축사 한마디 해야겠지? 이슬레이터를 대표해 한마디 해 보게, 영애.”
차갑게 식은 엘레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싫어.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 저 여우 같은 클레리아를 위해 축사를 하라고? 못해, 나는…… 안 해. 할 수 없어. 나는……!’
“못…… 해. 나는 할 수 없어…….”
엘레나는 클레리아를 인정할 수 없음에서 오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누에른이 당장 듣기라도 하면 경을 칠 말을 웅얼거렸다.
‘뭐? 지금 이 여자 뭐라는 거야?’
클레리아를 본 뒤 엘레나 역시 궁금해져 가까이 뒤에 붙어 있던 레리안만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한쪽 눈썹을 치떴다.
이상한 그녀의 모습에 귀족들은 영문을 몰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주시했다.
“이슬레이터 영애?”
황제가 마지막 기회라는 듯 나직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엘레나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클레리아를 바라봤다.
“나는……!”
“죽습니다. 중얼거리던 말 내뱉으면 즉결 처형이에요.”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엘레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죽마고우가 잘돼서 배알이 뒤틀리는 건 알겠지만, 말도 장소를 가리셔야죠. 목을 부지하세요.”
그제야 히스테리로 가득했던 머리가 조금씩 눈앞의 상황을 인지했다.
엘레나는 자신이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귀족과 더불어 황제의 시선까지 자신에게 닿아 있었다.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 안의 볼을 깨물며,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위해 힘겹게 웃었다.
“송…… 구합니다, 폐하. 제가 잠시 감격에 말이 막혀…… 서.”
“허허, 그럴 수 있지. 살가운 친우의 일이니 그럴 수 있네. 하하하.”
누에른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을 풀었다.
엘레나는 이를 악물며 환하게 웃었다.
“저의 둘도 없는 친우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그녀를…… 모두 축복해 주십시오. 새로운 치유사에게…… 르누엘룻의 광휘와 영광을…….”
이어 많은 사람의 축하와 환호성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애쓰는구나.’
멀리서도 보이는 엘레나의 억지웃음에 클레리아는 쓴 입맛을 다셨다.
이전 생부터 그녀와 붙어 다닌 시간만 20년이 넘는다. 엘레나가 진심으로 한 말인지 아닌지는 눈 감고도 구별할 수 있었다.
‘오늘 일을 아마 평생 잊지 않겠지.’
머지않아 이 일이 후환이 될 거란 예상이 들자 급격히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서 자네를 축하하는 인사들과 덕담을 나누게. 오늘은 자네의 날이니 온전히 즐기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클레리아가 예를 갖춘 뒤 내려가려 할 때였다.
“붉은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세실리아가 붉은 입술에 잔뜩 호선을 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실 일가가 보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래, 전에 말한 대로 황궁에 자주 놀러 오고.”
그렇게 말한 뒤 돌아서려던 그녀가 방향을 바꿔 클레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끈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동생 안투스 눈에 띄는 건 피하도록 해.”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다시 한번 농염한 미소를 짓고는 물러섰다.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본능적으로 안투스 쪽을 봤지만, 어느 새인지 그는 자취를 감추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봐서는 아마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가 버린 것 같은데.
황태자 안투스 눈에 띄지 말라니?
회귀 전에도 황태자와는 대면한 적도 없고, 얽혀 본 적도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 스칠 우연도 있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세실리아가 이렇게 다가와 언질 주는 것도 의아한 일이었으며 또한 그게 경고라는 것 역시 마음을 찜찜하게 했다.
“갈까?”
에단의 말에 클레리아는 미처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인파 속으로 발을 옮겼다.
꺼림칙한 느낌은 여전한 채.
* * *
그렇게 많은 인사를 받았음에도 클레리아와 에단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인파에 잠시도 쉬지 못했다.
“흠흠.”
지친 기색으로 목을 가다듬는 그녀를 눈치챈 에단이 조심스레 클레리아의 앞을 막았다.
“죄송합니다만 영애의 구두에 작은 문제가 생겨 잠시 자리를 떠야 할 것 같군요. 조금 뒤 다시 인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연회가 길 텐데 발이 불편하면 큰일이지요.”
끝이 보이지 않던 인사 행렬이 멈추고, 에단이 이끄는 대로 클레리아는 2층 테라스로 향했다.
탁.
“하아!”
조용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테라스에 도착하자마자 클레리아가 크게 한숨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기 앉아.”
“고마워, 에단이 중간에 멈춰 주지 않았으면 나 거기서 쓰러졌을지도 몰라.”
그녀답지 않은 엄살 어린 말에 에단은 픽 웃어 버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또 처음이네.”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힘들지. 계속 웃느라 볼이 다 떨릴 정도야. 아파.”
에단은 그저 그녀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클레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단? 뭐 하는 거야?”
“마사지. 아직 축하 인사가 한참 남았는데 버티려면 풀어야지.”
“자, 잠깐, 잠깐만!”
그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구두를 신은 클레리아의 발목 뒤를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그,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할게. 내가 할 테니까 에단도 그만 앉아서 쉬어!”
“안 잡아먹으니까 가만 앉아서 받아. 훈련할 때 배운 건데, 발이 한결 가벼워질 테니 그냥 받아.”
“하지만……!”
에단이 순간 야단치듯 그녀를 흘겨보았고, 클레리아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에단은 그녀의 발목과 발등 부분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시원하고 기분 좋아. 근데 뭔가…… 무척 부끄러워!’
그는 그냥 마사지를 해 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한 건지.
클레리아는 또다시 간질거리는 느낌에 눈을 꼭 감았다.
“이제 그냥 좀 쉬면 더 나을 거야. 아마 내일 아침에는 발이 많이 부을 테니까 저택에서 족욕하고 자고.”
“……응.”
클레리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얼음이 든 물잔을 그녀에게 건네고, 자신 역시 벌컥벌컥 마시며 앉았다.
밖은 축하연답게 성대한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폐하가 이리도 과분하도록 위해 주실 줄 몰랐어.”
“치유사는 르누엘룻의 축복을 받은 우리 라스칸트에서만 나타나는 존재니까. 각 황제의 세대마다 치유사가 얼마나 나타났냐로 그 시대가 풍요로웠는지 판단하기도 하니 기뻐하실 만도 해.”
그의 말에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쉽지 않을 거야.”
잠시간이 흐른 뒤, 에단의 말이었다.
“응.”
“예상보다 더욱 위험할 거고.”
“그렇겠지.”
“공작가의 공녀이면서 새로운 치유사인 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무리도 이제 생길 거야.”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능력으로 새 삶을 살게 된 것은 기쁘다.
그러나 그만큼 예전의 삶에서는 겪지 못했던 새로운 위험도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타국에서도 널 주목할 거야, 클레리아. 너는…… 이 아스칸 대륙에서 가장 주목받겠지.”
자국뿐이 아니라 타국에서까지 주목을 받는다.
에단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새삼 이렇게 분명히 짚어서 듣게 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치유사는 라스칸트를 벗어나면 힘을 잃어. 하지만 이웃국은 그 사실을 모르지. 국경에 파견되는 일이 많을 너한테 예상보다 더욱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클레리아는 물끄러미 손에 들린 컵에 시선을 던졌다.
수도에서만 살고, 늘 익숙한 이들과만 지냈던 내가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클레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칼을 날렸다.
에단은 그 모습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 바람을 맞던 클레리아는 에단을 바라보며 웃었다.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구나. 가볍게 생각했다간 큰일 나겠어. 고마워, 에단. 내가 대비할 수 있도록 알려 줘서.”
그렇게 말하고 티 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에단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지키고 싶어. 언제까지든, 어디에서든 상관없어. 나 에단은…….’
그는 입을 다물며 이를 악물었다.
‘나 에단 칼리스터는 클레리아, 널 지킬 거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는 오랫동안 클레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프라이어스 공작님, 공작 각하들께서는 일이 바빠 참석하지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 오셨군요.”
“하하, 그래도 딸을 위한 폐하의 축하연인데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말입니다.”
누가 봐도 헐레벌떡 뛰어온 티가 나는 타이엔은 숨을 고르며 시종이 가져다주는 칵테일을 연달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하이라이트를 놓치셨네요. 프라이어스 영애가 폐하께 증표를 하사받을 때는 정말 눈이 부셨답니다. 오늘 영애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셨어요. 무척 기쁘시겠습니다, 공작 각하.”
클라온 후작 부인의 말에 타이엔은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영애께서 돌아가신 공작 부인을 빼닮으셨더군요.”
나직이 말하는 클라운 후작을 보며 타이엔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딸아이가 들으면 무척이나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돌리던 그는 2층 테라스에 있는 클레리아를 발견했다. 그녀를 본 타이엔 역시 잠깐 말을 잃었다.
‘내 딸이 저렇게나 아름다웠던가. 그건 그렇다 쳐도 저다지도…… 제 엄마를 닮았던가.’
그는 클레리아가 13살 때 생을 달리한 자신의 부인, 리리안이 언뜻 겹쳐 보였다.
연회장으로 달려올 때만 해도 도착하면 딸 아이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그는 새삼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리리안, 당신도 하늘에서 자랑스럽겠지? 우리 딸은 잘 헤쳐나가고 있소. 당신이 그 아이를 잘 지켜 주시오.”
타이엔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돌아섰다.
“프라이어스 공작 각하. 벌써 떠나시는 겁니까?”
“일이 많은 것을 무리해서 뺐던지라 말이죠. 그리고…….”
그는 빙긋 웃었다.
“지금은 이미 저 말고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군요. 저는 후에 저택에서 제 딸과 마음껏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타이엔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