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2)

제1장. 클레리아, 치유사로 돌아오다.

툭. 투툭.

하얀 천 위로 붉은 핏자국이 번져 나갔다.

알록달록 노란색과 녹색으로 아기자기하게 놓이던 수 위로, 붉은색이 거침없이 퍼졌다. 그리고 그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져 옅은 원을 그렸다.

“아가씨!”

날카로운 아리스의 목소리도 마치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클레리아는 아리스의 목소리에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실을 쥔 손가락에 피가 방울방울 번지고 있었다.

대체 뭐지?

지금 나는…… 죽었던 게 아니었나?

내가 느꼈던 고통은.

내가 느꼈던 그 끔찍한 절망감은!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과는 달리,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되레 자신이 다친 듯 급하게 다가온 아리스가 서둘러 손수건으로 손을 감쌌다.

“아…… 리스.”

“정말! 왜 평소에 하지도 않는 실수를 하고 그러세요. 많이 아프세요? 그렇게 펑펑 우실 정도로 다치신 거예요?”

“왜…… 네가 여기에 있어? 나…… 죽은 거 아니야?”

아리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클레리아 아가씨, 죽다니 그런 끔찍한 소리가 어디 있어요. 갑자기 아가씨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이름이 불리고, 당했던 죽임이 끔찍한 소리란 말을 듣자 그제야 손에 난 상처의 통증이 엄습했다.

“흑…… 으흑.”

모르겠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

분명 내 몸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던 순간을 기억하는데…….

그때 눈앞을 한 장면이 스쳤다. 동시에 클레리아의 눈이 커졌다.

결국, 그녀는 목 놓아 비명 질러 버렸다.

장대에 꽂힌 채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머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클레리아는 수놓은 천을 떨어트리고 의자 아래로 주저앉았다.

“아가씨!”

평소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모습에 아리스가 울먹이며 그녀를 붙들었으나 소용없었다.

고작 수를 놓다 바늘에 찔려 울었다고 치기에는 클레리아가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도무지 클레리아의 우짖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검술 훈련으로 땀에 젖은 에단이 클레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 * *

“하아…… 하아…….”

쉴 새 없이 장장 세 시간 동안 검을 휘둘러 댔다. 그 덕에 등과 목덜미를 살짝 덮은 은빛을 띠는 연보랏빛 머리칼이 무겁게 물기를 머금었다.

한동안 크게 숨을 고르던 에단에게 프라이어스 저의 집사 엘튼이 수건을 들고 다가갔다.

“오늘도 열심히시군요. 이런 에단 님께서 수제자라는 사실을, 공작 각하께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수건을 건네받아 땀을 닦으며 에단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스승님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 고맙네, 엘튼. 그나저나 갈아입을 옷은 가져왔으니 욕실을 빌릴 수 있을까?”

“당연하지요, 따라오십시오.”

엘튼의 안내를 받으며 로비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아아악! 아니야! 안 돼, 제발! 제발!”

갑작스럽게 들린 비명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클레리아?”

“아가씨?”

한 번도 소란을 일으킨 적이 없는 그녀였다. 놀란 에단은 단숨에 2층에 클레리아의 방으로 달려갔다.

쾅!

“대체 무슨 일이야?”

예의도 잊은 채 다급히 문을 열어젖히자, 바닥에서 오열하는 클레리아와 그녀를 달래려 애쓰는 하녀 아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에단 님!”

아리스가 울먹이며 간신히 클레리아를 붙들고 있었으나 버거워 보였다.

“싫어! 싫어! 이럴 순 없어! 아니야! 아아악!”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통에 저택의 다른 고용인들까지 클레리아의 방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평소라면 주변을 물렸겠지만, 에단 역시 너무 놀라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클레리아의 비명은 이어졌다. 끔찍한 것을 목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질러 대는 탓에 모든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누구도 그녀가 이리도 발작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당혹스러움에서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잡은 에단이 나서서 클레리아를 붙들었다.

“그만해, 클레리아! 진정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으나 상상 이상의 힘으로 클레리아는 몸부림쳤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클레리아의 절규 같은 울부짖음에 의문을 더할 때였다.

쨍그랑!

강한 저항에 옆에 있던 티테이블이 부딪쳤고 그 위에 있던 화병과 찻잔들이 떨어져 산산이 조각 났다.

“이런!”

발버둥 치던 클레리아가 중심을 잃으며 순식간에 파편 위로 넘어졌다.

“아가씨!”

“꺄아아악!”

집사 엘튼과 하녀 아리스의 비명이 번갈아 저택을 울렸다.

“읏…….”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곧 사람들은 예상과는 다른 이유로 놀랐다.

다친 것은 클레리아가 아닌 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으로 파편 위를 짚고, 간신히 클레리아가 그 위로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 안은 것이었다.

카펫 위를 번져 가는 선혈에 놀란 여자 고용인들과는 달리, 엘튼이 서둘러 에단에게 다가가 클레리아를 함께 부축해 안전한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단 님!”

엘튼의 목소리에 에단은 괜찮다는 듯 다른 손을 들어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나 파편에서 서서히 떼는 그의 손은, 크고 작은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낭자했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 역시 놀랐는지, 그제야 소란 피우던 것을 뚝 멈췄다.

에단은 아리스가 손을 보려는 걸 막고, 수건을 건네받아 다친 손을 감췄다. 그리고 여전히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며 멍하니 울고 있는 클레리아에게 다가갔다.

“클레리아, 진정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해, 우리가 있잖아.”

그의 말에도 분홍빛 눈동자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고였다 흐르길 반복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에단의 손으로 향했다.

“에단…… 다친 거야?”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냐. 내 걱정은 하지 마.”

그 말에 다시금 클레리아의 뇌리에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에단까지도.

클레리아는 흐느끼며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다친 손을 잡았다.

“다치지 마. 다치면 안 돼. 너는…… 너만은 나를 위해서 다쳐서는…… 절대 안 돼.”

클레리아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붙들고 있던 에단의 손에서 빛이 났다.

“무슨……?”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그의 손을 물들였다. 그 기운에 마음마저 나른해지려 할 때쯤, 곧 빛이 사그라졌다.

이상한 기분에 에단이 서둘러 수건을 치웠을 때였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수건에는 손에 박혔던 유리 파편들이 깔끔하게 빠져 있었고, 더불어 핏자국은 남아 있었으나 상처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이건…… 설마? 하지만 클레리아는 마법에 능하지도, 다른 힘이 잠재되어 있음도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가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다행이다, 에단. 나아서…… 정말 다행이야.”

클레리아는 서글프게 웃으며 안심했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클레리아, 너 대체……?”

그러나 에단의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가 품으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클레리아를 가볍게 안아 든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엘튼, 가서 공작 각하를 모셔 오도록 하게. 그리고…….”

에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방 안에 있던 이들과 바깥에서 구경하는 이들까지 순식간에 빠르게 훑었다.

“이 일은 정리가 될 때까지 비밀에 부쳐야 해. 절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테니.”

“예, 입단속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에단 님.”

대답을 들은 그는 땀에 젖은 클레리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대체 네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클레리아.’

* * *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타이엔 프라이어스 공작은 외동딸의 방 안에서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오갔다.

“각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시다 클레리아 님께서 깨서 보기라도 하면 크게 걱정하실 겁니다.”

“지금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낮에 칼리스터 영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프라이어스 가의 주치의인 에녹스가 다녀가며 클레리아의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없다 진단 내렸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갑작스러운 딸의 행동에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에단에게 전해 들은 그 힘은……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그때였다.

멀리 검은색 마차가 조용히 프라이어스 저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공작은 참지 못하고 방문객을 맞으러 로비로 향했다.

도착하자 방문객은 이미 안으로 들어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 모자를 벗는 중이었다.

“늦은 시간에 모셔서 죄송합니다, 칼리에 님.”

공작이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머리칼을 단정히 쪽진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칼리스터 영식 덕분에 편히 왔는걸요.”

공작은 감사의 뜻으로 뒤에 있는 에단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에 에단 역시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영애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죠?”

“2층 방에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 타이엔, 칼리에가 클레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집사 엘튼은 셋만이 이야기 나누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방에 도착해 조심스레 문을 열자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 있는 클레리아가 보였다.

칼리에는 익숙한 듯 주저 없이 들어가 클레리아의 이마 온도를 재고 맥박을 확인하며 상태를 봤다.

“에녹스 님의 말씀대로 신체에는 이상이 없군요. 치유력을 발현했을 때 에단 님의 상처 정도는 어땠죠? 중상이었나요?”

그녀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줄까지 다친 느낌이 났습니다. 그냥 뒀다면 분명 중상이었을 테죠.”

칼리에가 낮게 숨을 내뱉었다.

“치유사가 자각하지 못한 채 힘을 쓰면 종종 이렇게 의식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영애의 능력치를 측정해 보도록 하죠.”

칼리에가 잠시 클레리아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희미한 하얀 빛이 맞잡은 두 손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길 몇 분, 서서히 빛이 사그라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칼리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입을 떼길 기다리던 타이엔은 애가 타 그녀를 재촉했다.

“어떻습니까? 칼리에 님. 클레리아는 정말 치유력을 타고난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능력치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물음에도 침묵을 지키던 칼리에는 천천히 클레리아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 주며 방에 있는 이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뗐다.

“측정이 불가합니다.”

그녀의 말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득 상기되어 있던 타이엔의 얼굴에 낙담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이어진 칼리에의 말은 그가 이해한 것과 조금 달랐다.

“영애께서는…… 치유사에 천재적인 자질을 갖고 계십니다. 그 능력치가 워낙 방대해 제대로 측정이 어렵습니다. 아가씨는…… 천부적인 치유사의 능력을 타고나셨어요.”

방 안에 있던 타이엔과 에단이 숨죽였다.

타이엔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과 감격에 겨운 것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에단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듯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클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칼리에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자신의 치유력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식은땀을 흘리던 클레리아의 얼굴이 한결 편하게 변했다.

“힘은 강력하시지만, 제대로 발휘하시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프라이어스 가는 훌륭한 후계자를 얻게 되겠군요.”

칼리에 역시 가슴 벅찬 얼굴을 했다.

“근 10년 만에 나타난, 그것도 최고의 치유사입니다. 아가씨는 제국 최고의 치유사가 되실 겁니다.”

그녀의 말에 클레리아를 바라보는 에단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치유사란 말이지…….’

클레리아는 햇볕이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었다.

자신은 스물두 살에 반역죄로 모함받아 죽은 후, 열여덟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회귀한 상태였다. 그리고 회귀 직후 정신을 잃고 무려 나흘이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치유사계의 일류 칼리에 에나스가 능력치를 측정했고, 의식이 돌아오는 것 역시 도왔다고.

‘의식이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클레리아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억은 흐릿했으나 피로 흥건했던 에단의 손은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빛이 나며 그의 손을 치료했던 것도.

‘나는 전생에서 치유사의 그 어떤 힘도 없었어. 치유 능력은 회귀하고 나서 얻게 된 거야.’

사실 이것이 생기게 된 연유에 대해 전혀 가늠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을 잃은 동안 그녀는 무수한 감정에 휩싸여 공허한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들려왔던 목소리가 있었다.

[나, 르누엘룻의 별을 타고 난 아이야, 너의 비극이 나를 침통케 하는구나. 남을 위하는 힘을 가지고 두 번째 삶으로 가거라. 거기서는 부디 내가 선사한 힘으로 진정한 네 삶을 찾을 수 있기를…….]

르누엘룻은 클레리아가 있는 현 신성제국인 라스칸트가 모시는 신이었다. 자애와 이타의 상징인 신인지라 그 축복을 받은 라스칸트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치유사였다.

전생에서 새로운 치유사는 10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고, 제국 전체가 그 이유로 침체했었다.

“그런데 내가 치유사라니.”

회귀해서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도 모자라, 나라 전체의 주목을 받을 치유사의 힘을 지녔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나지 않았다.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아. 하지만…….’

지금도 눈만 감으면 지독했던 사형장의 광경이 자꾸만 괴롭혔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목에 가져갔다. 그리고 손끝이 닿는 찰나.

‘스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차갑고 날카로운 도끼날이 느껴졌다.

너무도 생생했다.

클레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손을 말아 쥐었다.

떨치려 애써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서글픔과 공허함 가득한 가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죽마고우라고 여겼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죽어야만 했던 전생.

허망하고 허무한 삶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친우, 에단 칼리스터까지도 말도 몇 번 못 섞을 만큼 멀어졌다.

고작 엘레나의 치졸한 질투 때문에.

남편의 출타로 혼자 남은 클레리아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본인이 직접 에단을 대동하고 방문했으면서 말이다.

‘아무리 지원하고 사건 사고 뒷수습해 줘도 만족할 수 없던 거겠지, 엘레나. 거기에 친구로서 에단이 날 위하는 것조차 꼴 보기 싫었을 거고.’

클레리아는 억울함에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이전은 그렇게 당했지만, 지금은 아냐. 한 번 더 내게 기회가 주어진 이상, 이번 내 삶에서 엘레나, 넌 더는 없을 거야.”

창틀을 쥔 클레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칵.

그때 아리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아가씨. 깨어 계셨어요? 죄송해요, 노크할 것을. 아직 주무실 줄 알았어요.”

“괜찮아, 아리스.”

클레리아가 미소 지으며 웃자 그녀가 안심한 듯 세숫물과 수건을 내려놓았다.

“에녹스님께서 뜨거운 욕탕은 현기증이 일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대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드릴게요?”

그녀는 이어 클레리아의 손과 얼굴, 목덜미를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며칠을 깨지 않아서 아가씨가 어떻게 되시는 줄 알고 놀랐다니까요.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리스. 항상 고마워.”

“제가 더 고마운걸요? 우리 클레리아 아가씨처럼 좋은 분은 절대로 못 만날 거라고요. 다시는 아프지 마세요?”

고마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클레리아의 눈이 더없이 따스했다.

“아, 이슬레이터 영애께서 보내신 서신이 있어요. 내일모레 있을 아가씨 생일 축하연을 대신 준비해 주고 계셨잖아요. 영애께서도 걱정 많으셨던 것 같아요.”

순간 클레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막 그녀와 얽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얽혀 든다.

‘정말이지 내가 헛짓을 요란하게도 했구나.’

단순하고 감정적인 그녀가 안타까워 돌봤던 것이 벼랑 끝으로 몰 줄이야.

‘축하연부터 당장 취소해야겠어.’

이 시기는 사교계에 데뷔한 엘레나가 주목받지 못해 안달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 축하연을 대신 준비해 영애들에게 잘 보이라고 귀띔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었다.

클레리아는 아리스 손에 들린 편지를 외면했다.

“그냥 둬. 나중에 시간 되면 읽어 보도록 할게.”

그러자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협탁 위에 서신을 두었다.

“아가씨. 식사하시겠어요? 아니면 요깃거리 갖다 드릴까요?”

“으응. 식사는 생각 없어. 간단한 다과만 부탁해.”

“네.”

아리스가 돌아가려 문을 열자 앞에 엘튼이 서 있었다.

“흠흠, 아가씨는 일어나셨나?”

“엘튼, 무슨 일이죠?”

클레리아가 레이스 가운을 여미며 물었다.

“칼리에 에나스님께서 아가씨를 만나 뵙고자 방문하셨습니다.”

말과 동시에 집사 뒤에 있던 칼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라이어스 영애, 칼리에 에나스라고 합니다. 의식을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클레리아가 일어나 고개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칼리에 님.”

엘튼과 아리스는 그들의 담소를 위해 방문을 닫고 나갔다.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칼리에 님 덕분입니다.”

두 사람은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지금쯤 황실에 영애의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라는 건 예측하셨겠지요?”

근 10년 만에 나타난 치유사다. 이런 뉴스가 황가에 보고되지 않을 리 없지.

클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 급하신 황제 폐하께서 무엇을 하명하셨는지도 예상하셨겠군요.”

칼리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금장으로 장식된 고급 양피지 봉투에 커다란 밀랍 인이 찍혀 있었다.

붉은 장미와 가시덩굴. 그리고 그 중심에서 왕관을 쓴 채 포효하는 사자의 얼굴.

“이건……?”

펠리시아스 황가의 서신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서신입니다.”

칼리에의 말에 클레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귀한 치유사의 등장이지만, 황제가 직접 서신을 보낼 줄이야.

신성제국인 만큼 각 대에 나타나는 치유사가 많을수록 왕권이 굳건해지니 황제도 어지간히 애가 닳은 모양이다.

긴장감에 심장이 날뛰었다.

클레리아는 침착하게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황가 알현? 이렇게 빨리?’

아무래도 세 공작 가문 중 하나에서 치유사가 나왔다는 것에 주목하는 듯했다.

‘하긴 이것만큼 강한 황권 강화는 없겠지. 황제의 수족 가문에서 귀한 치유사가 나왔다는데 토를 달 자는 없을 테니까.’

“부르심을 받을 줄은…… 다만 날짜가.”

클레리아가 난처한 얼굴을 하자 칼리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이죠. 하하, 폐하가 좀 성격이 급한 편이신지라. 그래서 제가 온 거랍니다.”

칼리에는 이미 익숙한 듯 웃음으로 자연스레 상황을 넘겼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녹색의 영롱한 빛을 스스로 발하는 것 같은 펜던트였다.

그것을 본 클레리아는 시선을 빼앗겨 뚫어지게 바라봤다.

“신비로운 물건이죠? 이건 치유석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클레리아 님도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이게 그 귀하다는 치유석이군요.”

“네, 다만…….”

칼리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조금 특별한 치유석이죠. 저의 첫 번째 치유석이랍니다.”

“첫 번째 치유석?”

그녀가 돌을 쥔 손으로 클레리아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가 싶더니 클레리아는 지쳐 있던 심신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에가 손을 놓았을 때, 그녀는 몸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벼워졌다.

“어떻게……. 기분이 굉장히 상쾌해졌어요.”

“치유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친구의 힘이기도 하죠.”

그녀는 다시 한 번 치유석을 보여 주었다.

녹색의 투명한 돌 안에는 살아 있는 것 같은 빛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발했다.

“조만간 이것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죠. 그전에 우선.”

칼리에가 빙긋 웃었다.

“황궁으로 가실 준비를 하실까요?”

“……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클레리아는 난감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꿀꺽.

클레리아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오는 곳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새삼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도, 하얀 대리석과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실내 장식도 불편했다.

‘단 십 분 만에 나와 내 가문을 멸문으로 내몰았던 기억 때문일까.’

클레리아는 거북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복도 끝에서 타이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클레리아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달려가 손을 덥석 잡았다.

‘아버지, 아버지야. 내…… 다정하고 강한 아버지.’

생각해 보니 정신이 들고 그를 제대로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먹먹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네가 정신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어 저택에 들르려 했다만, 입궁 소식을 듣고 황궁으로 왔다. 클레리아, 몸은 좀 괜찮은 거냐?”

그의 물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클레리아는 웃어 보이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 전 아버지가 있어만 주시면 괜찮아요.”

타이엔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가서 좀 더 이야기하자꾸나.”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면 제가 바로 봐 드릴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칼리에 님. 자, 준비됐느냐?”

“네.”

칼리에도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프라이어스 공작과 그의 딸, 그리고 칼리에 에나스 님이 알현을 청한다고 전하게.”

곧 문지기의 손에 육중한 문이 열렸다.

클레리아는 숨을 천천히 크게 골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럽고 화려한 의자 셋에 황실 일가가 앉아 있었다.

가운데에는 누에른 펠리시아스, 그리고 오른쪽에는 1황자 안투스, 왼쪽에는 1황녀 세실리아가 나란히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익숙한 듯 프라이어스 공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제국 라스칸트의 태양, 누에른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뵙습니다.”

그를 따라 칼리에와 클레리아 역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짐은 뭐든지 속전속결이라 영애의 몸 상태도 생각지 않고 불러들였네. 하지만 그 덕에 귀한 칼리에의 치유력도 경험해 봤을 테니 괜찮겠지, 안 그런가?”

“하해와 같은 폐하의 은덕에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염려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 투자는 투자도 아니야. 10년 만에 나타난 귀한 치유사가 아닌가. 그게 진짜라면 말이지.”

현처럼 휘어져 있던 누에른의 눈이 뜨였다.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압력과 함께 매서운 그의 위압감이 클레리아를 덮쳤다.

그 탓에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을 그녀는 안간힘을 써 억눌렀다.

그때 기사들이 다친 고양이 한 마리를 내왔다.

“내가 무척 아끼는 아이 중 하나야. 며칠 전에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지 뭐니. 실력 발휘 좀 해 줄래?”

나른하게 말하는 세실리아의 말에 클레리아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회귀 전 재판장과 겹치는 분위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숨이 막혔다.

그때 칼리에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클레리아는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칼리에와 시선을 교환한 그녀는 천천히 고양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친 다리에 손을 얹은 뒤 눈을 감았다.

모두가 숨죽인 그때, 클레리아의 손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뒤.

“냐아.”

누워 있던 고양이는 다리를 쭉 늘리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냐!”

그리고는 반갑다는 듯 세실리아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진짜로군. 틀림없는 치유력이야. 경사다, 이 라스칸트 제국의 경사! 르누엘룻께서 우릴 저버리지 않으셨다!”

환희에 젖은 누에른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이 높으신 덕입니다.”

공작의 말에 클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떨려 오는 두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르누엘룻의 축복에서 태어난 치유사. 이게 이제부터 내가 나아가게 될 치유사의 길. 나의 길이야.’

그녀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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