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52)

프롤로그

그런 날이 있다.

불어오는 평범한 바람조차 가슴팍에 스며들어 헤집는 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조차 서늘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쾅!

평상시라면 절대 나지 않을 소리에 클레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등골이 서늘하다.

이어 들려오는 거친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우악스럽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얼굴이 잿빛이 된 남편 케일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

평소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단정했던 머리칼은 흐트러진 채였다.

그는 단숨에 클레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피신해야 하오, 부인.”

“피신이라뇨?”

“모함을 당했소. 일단 피한 뒤에 설명하지.”

모함이라니?

케일론이 서둘러 그녀에게 겉옷을 둘러 주려던 때였다.

푸욱.

섬뜩한 소리가 방에 울렸다. 이어 케일론의 가슴팍을 뚫고 나오는 시퍼런 검날.

“케일론!”

날카로운 클레리아의 비명과 함께 그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복식을 갖춘 기사들이 보였다.

“당신은…… 어째서 당신이!”

늘어진 케일론을 붙든 채 클레리아가 소리 질렀다.

그러나 시뻘건 피를 머금은 검을 들고 있는 이는 냉랭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는 절친 엘레나 이슬레이터의 호위 기사이자 이슬레티어 가의 부 기사단장 아슬로 헤론이었다.

“클레리아 블린트 백작 부인을 황녀 시해 미수죄와 역모죄로 체포한다.”

“시해라뇨? 역모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부인을 체포해라. 또한 케일론 블린트 백작의 시신 또한 효수를 위해 수거한다. 실시.”

효수?

효수라니……?

끔찍한 단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무도 큰 충격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거적때기를 끌고 가듯 남편의 시신이 끌려 나갔다.

동시에 중무장한 기사 둘이 클레리아의 양팔을 힘껏 붙들었다. 자칫 몸부림쳤다가는 팔이 두 동강이 날 정도로.

“헤론 경! 오해가 있을 거예요. 엘레나를 불러 주세요. 엘레나와 얘기해 보면 알 거라고요! 아니라면 에단에게라도!”

그 말에 아슬로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서렸다.

“감히 두 분의 이름을 반역자인 네깟 것의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라.”

경멸이 가득한 일축에 클레리아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마구잡이로 저택 밖으로 끌려나갔다.

구금 마차에 오를 때조차 저택의 하인 어느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저택의 주인인 백작의 시신이 마차에 쓰레기마냥 던져지고, 부인은 거의 반실성한 채 패대기쳐지듯 실렸다.

참혹한 광경에 집행하는 기사들조차 숨을 죽였다.

“황궁으로 간다!”

아슬로의 외침에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충격에 휩싸인 블린트 저택이 어둠 속에 점차 삼켜졌다.

* * *

“죽여라! 죽여!”

“그 마녀를 죽여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 거야.

축축하고 차가운 감옥 속에서 클레리아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동시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모함이라고.

오해라고.

결백을 외쳤지만, 믿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재판조차 없었다. 그저 죄를 확증하기 위한 자리였을 뿐.

황녀의 증언과 그녀를 보필하는 한 공작 부인의 증언이 있었고, 그들은 보란 듯이 증거 또한 들고 나왔다.

딸기주(酒).

클레리아가 작은 텃밭에서 키우는 딸기로 만든 술이었다. 친한 귀족가나 황가에 보내던 선물이었다.

결혼 전 담갔던 것이 방문했던 귀빈들께 찬사를 받아 간혹 만들어 선물로 돌렸다. 반응이 좋았던지라 올해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딸기주에 독이라니?

증인들이 가져온 술을 새에 뿌리자 새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클레리아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해명을 해 보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남편 케일론 블린트는 독을 밀수해 황가를 암살하려 했던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것을 돕고 계획을 처음 세운 것은 자신, 클레리아라 했다.

모든 것이 그녀를 향해 짜여 있는 판이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임에도 누구 하나 의문을 갖는 자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없었다.

증인이 다름 아닌 황녀 세실리아였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또 한 명.

클레리아의 멍한 시선이 천천히 황녀 옆에 있는 인물을 향했다.

아주 악독한 범죄자를 보았다는 눈빛으로 마치 정의의 심판을 내리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

엘레나.

둘도 없는 자신의 친우.

그녀의 확신 어린 눈빛에 클레리아는 정말 자신이 진짜 황녀 독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착각까지 할 뻔했다.

어떻게 네가?

말이 트기 전부터 함께했던 사이였다. 가문을 떠나 더없이 친한 친우였다.

그런 네가 어째서?

“그래, 그 말이 사실이더냐? 엘레나 칼리스터 공작 부인?”

“그렇습니다. 매번 제게 딸기주를 황실에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유독 이번만은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했사옵니다. 황녀님께 직접 드릴 때도 함께 있었기에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황제 폐하.”

아니야.

매번 황실에 딸기주를 가져간 것도 네가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잖아.

이제껏 네가 황녀와 친분을 쌓고 싶다고 해서 그랬잖아. 그리고 이번만큼은 인사도 드릴 겸 직접 황녀님께 전달해 드리라고……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 건 전부 너였잖아!

너무나 많은 말들이 떠올라서. 한꺼번에 몰려드는 통에 끅, 끅 하는 목 울림만 반복했다.

사람이 너무나 억울할 때는 오히려 말도 나오질 않는다는 걸, 클레리아는 그때 깨달았다.

“쯧…… 개국 공신 중 하나인 프라이어스, 국경을 책임지고 충성으로 지키던 블린트라면 내 황권을 더욱 튼튼히 해 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배반을 하다니.”

프라이어스 가문이라는 말에 클레리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블린트 백작가로 시집오기 전 자신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뒤로 계략을 꾸미는 족속들은 말을 아끼는 법이지요.”

황녀의 말에 클레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수가 없는 자신의 아버지와 그를 빼닮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 분명했기 때문에.

‘황녀님…… 그대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지요.’

황녀가 클레리아를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은 차라리 납득하기 쉬웠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사형시켜라. 여지를 남겨 두지 마.”

황제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얼굴로 손짓했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재판장에 들어서지 단 십 분, 고작 십 분 동안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단숨에 클레리아와 블린트 가문, 프라이어스 가문의 멸문을 결정지었다.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

다른 이들은 상관없었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다 이해해도 그녀만은, 그녀의 말만큼은 듣고 싶었다.

악을 쓰며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클레리아는 그 이름을 외쳤다.

덧없는 그 이름을 질렀다.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클레리아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아 있었다.

역한 습기와 냉기가 그녀의 손과 발을 하얗게 질리게 했다.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흐려진 클레리아의 눈꺼풀이 가끔 떨렸다.

사형 집행까지는 겨우 한 시간쯤 남았을 뿐이다.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을 감추려는지 속전속결로 그들의 집행은 이어졌다.

섬뜩한 칼날 소리와 무언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 사람들은 그때마다 끔찍하게도 환호성을 질러 댔다.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유희는 저것이 다인 것처럼.

끼익.

“사형수 클레리아 블린트. 면회다.”

더럽고 추한 바닥을 하얗고 아름다운 레이스 자락이 쓸었다.

클레리아는 지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려 쇠창살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엘레나.”

로브의 두건을 벗으며 얼굴을 드러낸 것은 엘레나였다.

“클레리아.”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한동안 맞받았다.

“왜야?”

결국, 참을 수 없던 클레리아가 침묵을 깼다.

“뭐가?”

“하…….”

너무도 뻔뻔한 되물음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날 모함한 거야? 내 남편과 내 가문까지…… 대체 왜?”

“모든 게 네 탓이야. 난 잘못 없어.”

“나는……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엘레나,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너는… 너는 나한테 이럴 수 없어. 넌 나한테 이럴 리 없다고!”

“뻔뻔하구나. 그러게, 남편을 따라 변방 국경으로 가서 눌러앉을 것이지…… 구태여 왜 여기 남았던 거야? 클레리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내가 그렇게 가 버리면 난 널 거의 볼 수도 없을 텐데.”

“그랬어야지!”

“……뭐?”

뭔가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그랬어야 했다니?

어째서?

“결혼했으면 조신하게 내조했으면 됐잖아. 언제나 먼저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다 알아서 빠지는 너답게 살았으면 됐을 텐데……. 어째서 우리 곁에 남아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거야? 에단의 짝은 나야. 바로 이 엘레나 이슬레이터란 말이야! 근데 왜 여기 남아 에단이 널 걱정하게 만들어? 날 이렇게 만든 건 결국, 클레리아 너라고! 감히 에단과 나 사이에 끼어들다니…….진작 멀리했으면 될 것을 넌 대체 애가 왜 그 모양이야?”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눈물이 났다.

“에단과 너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어떻게…… 어떻게 친구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에단이 날 걱정하는 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서 그랬던 거잖아. 내가, 내가 언제 너희 사이에 끼어들었단 거야?”

에단과 클레리아, 그리고 엘레나. 이 셋은 말이 트이기도 전부터 알아 왔다.

세 가문이 개국 공신 가문인 데다 황권 강화에 일임하던 중요 가문들이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그들의 영애, 영식인 셋이 친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소꿉친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드러내길 좋아하는 이슬레이터 덕에 다른 두 가문은 조용히 뒤에서 뒷받침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구도는 셋의 사이에서도 유효했다.

주목받고, 나서고, 사람들 사이에 끼기 좋아하는 엘레나를 뒤에서 조용히 챙기며 보살피는 것은 클레리아였다.

유일한 남자였던 에단은 장난꾸러기였던 어렸을 때와 다르게 매너 좋은 명문 공작가의 영식으로 자라나 둘을 보호하는 역을 자처했고.

엘레나는 그런 에단을 좋아했다. 그를 보며 들뜨는 엘레나를 위해 클레리아는 둘을 밀어주었고, 결혼까지 성사되었다.

그런 둘을 기쁘게 축복했는데…….

일 중독인 블린트 가문의 공자와 클레리아 역시 결혼했으나 늘 외로웠다. 그를 따라 국경에까지 가 버리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수도에 남았다. 틈이 나면 그리운 친우 둘을 보기 위해. 둘도 없는 벗이니까.

그런데…….

클레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물이 났다.

기가 막히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견딜 수가 없자 눈물이 터져 버렸다. 피가 나도록 깨물리던 입술이 비틀리며 웃음을 흘렸다.

“말해 봐, 엘레나. 솔직해져. 단 한 번도 에단이 먼저 내게 위로를 건넨 적 없었고, 네 주도하에 날 달래려 셋이 모여서 다과 몇 번 한 게 다야. 그것도 한 달에 한두 번! 길면 삼십 분! 그게……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애초에 네가 먼저 날 달래겠다며 에단을 끌고 왔잖아! 왜 내 탓을 해?”

“그러기 싫었어. 난 널 달래고 위로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에단 근처에 있는 것도. 곁에 있는 나보다도 너에 대해 걱정하는 에단을 보는 것도 싫었어!”

“에단을 몰라서 그래? 블린트 백작님의 성격을 아니까 걱정했던 것뿐이야. 넌 바로 곁에서 달래 줄 수 있지만 나는 아니니까.”

“그게 싫었단 말이야!”

히스테릭하게 소리 지르는 그녀를 보며 클레리아는 허망함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겨우 치정으로 깨질 유리그릇 같은 우정이었단 말인가?

멍하니 있던 클레리아의 머리에 문득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친구라 믿었던 엘레나가 자신을 치워 버리고 싶어 했을 만한 진짜 이유…….

“그렇게 에단을 사랑하면서 왜 부정을 저지른 거야? 엘레나?”

클레리아의 물음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다 알면서도 네 애원에 난 입 다물었어. 네가 얼마나 에단을 사랑하는지 아니까. 그런데 어째서 정부를 두었던 거야! 에단에게 수십 번씩 얘기하고 싶어도…… 네가 실수라고, 정리한다고 말했잖아. 우리의 우정이 끝나는 게 두려워서 난 네가 스스로 정리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네가 내 탓을 해?”

“그건 이 일과 상관없는 일이야. 중요한 건 네가 네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 이 사달이 났다는 거지.”

“내 주제를 모르다니 그게 무슨 뜻인데!”

답답함에 클레리아가 윽박지르자, 엘레나는 고고한 척 얼굴을 가렸던 부채를 내리며 눈을 부릅떴다.

“적당히 내 인생을 빛냈으면 그만 빠질 것이지 넌 눈치도 없이 우리 곁에서 사라지질 않았잖아!”

“네 인생을 빛내고 빠져야 할 인물이었다고? 내가…… 고작 너의 들러리였다는 거야?”

엘레나는 숨을 몰아쉬며 거만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희 가문은 우리 가문을 위해 늘 그래 왔어. 그럼 너와 내 관계도 당연히 그렇게 흘러가는 게 맞는 거지. 인제 와서 몰랐다는 양 순진한 척 굴지 마.”

“넌 정말…… 정말 이기적이고 독살스럽구나. 그 선량한 얼굴 뒤에 숨어서! 추악하기 짝이 없어.”

분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며 엘레나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했다.

“네 주제를 알려 준 것뿐이야. 난 잘못한 거 없어.”

“에단은…… 에단은 이 상황 아는 거야?”

그가 알았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칼리스터 가문 역시.

“……에단에겐 네가 이미 수도를 빠져나가 피신하고 있다고 말했어. 그걸 돕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는 중이지.”

“하…….”

이제는 정말 서럽고 억울해서 도저히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울음이 가슴 밑바닥부터 넘치고 넘쳐 목구멍을 쉴 새 없이 타고 넘어왔다.

에단이 이 일을 막을 것까지 계산해 그를 멀리 보내 버리기까지…….

와아!

갑작스레 지금까지와는 다른 함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클레리아는 천천히 소란스런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버지? 케일론?’

피로 엉망이 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높다란 긴 창에 꽂힌 채.

“아아아아아악!”

난생처음 내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비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소리가.

놀란 엘레나가 벽으로 바싹 물러섰을 때, 문이 열리며 기사 둘이 들어왔다.

“사형수 클레리아 블린트. 사형대에 오를 시간이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아니야!”

프라이어스 공작가의 조용하고 단아함이 넘치던 영애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 사교계 사이에서 그렇게 불리던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발악했다. 발버둥 치고 우짖으며 거칠게 끌려 나갔다.

그렇게 무참히 끌려 나가는 중에도 클레리아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화려함을 좋아하던 친구를 뒤에서 응원하고 싶었을 뿐이다.

멋지고 늠름하게 자란 다른 친구를 사랑하던 친구의 행복을 빌었을 뿐이다.

그저 조용히.

눈에 띄지 않아도 그 둘만 곁에 있다면.

다른 이들이 없어도 셋만이 영원하다면, 자신은 뒤에서 둘을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강압적인 기사 두 명에게 끌려 밖으로 나오자 성난 군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 사이로 난 길을 질질 끌려 사형대 앞에 서자, 핏물에 젖어 곳곳에 웅덩이진 바닥이 보였다.

그 참혹함에 클레리아는 몸의 모든 힘이 빠져 버렸다.

억척스레 끌려 올라갈 때조차 사람들의 성난 함성도 아득히 아주 먼 곳에서. 자신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집행!”

기사 두 명에게 팔이 붙들린 채 무릎 꿇려질 때, 그녀의 시야로 긴 창대에 꽂힌 아버지의 머리가 들어왔다.

클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채가 잡힌 채 투박한 나무 밑동에 머리가 짓눌리고, 아름답던 백금발이 빛을 잃은 채 초라하게 흐트러졌다.

콱!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흐린 하늘.

환호하는 군중.

냉담히 바라보는 황제와 그 일가.

그리고…….

뒤집히는 세상 속에서도 그가 보였다.

에단.

그가 절규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만약 다음 세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때는.

……에단.

클레리아 리안 프라이어스의 목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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