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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91화 (91/92)

91화

수진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무슨 내용인지 말씀해주세요. 너무 궁금해요.”

그녀는 고기를 굽던 집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숲이 있었어. 말라붙은 숲이었어. 나무들은 잎도 열매도 떨어져 가지만 앙상했고. 개울도 물이 말라 애처로운 숲. 메마른 숲을 걷다 보니 한가운데 복숭아나무가 있었어. 참 이상하지. 그 나무 혼자 탐스러운 복숭아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중 하나를 따서 베어 물었지.”

그녀는 정말로 복숭아를 먹듯 깨무는 시늉을 했다.

“꿈속이었지만 얼마나 달던지. 난 그 자리에서 복숭아를 다 먹고 씨를 버렸지. 그런데 웬걸! 씨앗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숲이 살아났어. 소담하고 예쁜 숲으로. 개울이 다시 흐르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던 나무에서 잎이 돋고 열매가 열렸어.”

수진은 물론이고 처음에는 무심하게 듣던 한해까지 턱을 괴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새들까지 날아들어 지저귀고 하늘에도 구름이 물러가고 맑은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지. 마치 마법이 시작된 것 같았어. 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꿈이 깼어.”

대신 꾼 태몽을 전해준 그녀는 수진에게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다.

“넌 그런 아이를 낳을 거야. 주변 사람들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는 아이.”

수진은 감동을 넘어 전율하고 있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원래 내 꿈이 아니라 너에게 전달해줘야 할 꿈이니 최대한 자세히 말해주려고 했는데, 충분했니?”

수진은 촉촉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넘쳐요.”

비과학적인 것들을 질색하는 한해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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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랬어? 어쩐지 어머니를 꼭 만나 뵙고 싶더라니!”

숙소에 들어온 수진은 한해를 귀엽게 몰아붙였다.

할 말이 없어진 한해가 중얼거렸다.

“난 태몽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지.”

“아, 너무 좋다!”

수진은 침대에 두 팔 벌리고 벌러덩 누웠다.

한해도 그녀 옆에 누웠다.

“어머님이 너무 말씀을 잘해주셔서 정말 내가 그 꿈을 꾼 것처럼 생생해. 꿈을 선물 받은 셈이야.”

“우리 복숭아는 잘 크고 있나?”

한해는 수진의 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태명은 정해졌네.”

“그러게? 우리 태명 뭘로 할지 아직 못 정하고 있었잖아. 어머님이 정해주셨다!”

“복숭아. 아빠 목소리 들려? 할머니가 뱃속에 있는 네 이름을 정해주셨어. 이름이 마음에 드니?”

아기와 대화하는 아빠 목소리를 들으며 수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렁주렁 열매가 매달린 나무들 사이를 걷는 장면을 상상했다. 곁에는 한해가 있었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생명이 샘솟는 숲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감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는 종종 이렇게 깜짝 입맞춤을 선사했는데 그럴 때마다 짜릿하게 몸이 떨렸다.

입술에 머무르던 입술은 미끄러지듯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갔다.

“뭐야…….”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사실은 안고 싶었지만.

“엄마가 행복을 많이 느껴야 아기도 건강하게 자란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대체 그런 연구는 어디서 진행했대?”

“독일 쪽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으휴! 능글맞긴!”

장난을 치면서도 그의 손은 능숙하게 그녀의 옷을 덜어냈다.

손끝이 살결을 스칠 때마다 작은 환희가 물결처럼 일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고 달뜬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떨릴까?”

“나도 궁금해. 언제까지 이렇게 네가 고플지.”

“내가…… 고파?”

“엄청. 굶어죽을 것 같아.”

그녀는 키득거리며 그의 목을 감았다.

“사실 금방 태몽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 숲속에서 오빠랑 러브러브하는 상상을 했는데.”

그는 꿈결처럼 달콤한 입맞춤으로 그녀의 몸 곳곳을 일깨우다가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갑자기 왜?”

“임신 초기에는 너무 과격한 사랑이 위험할 수도 있대.”

한해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지만 수지는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요즘 공부 중이라고.”

“누가 보면 오빠가 임신한 줄 알겠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또 하나의 선물 같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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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들은 펜션에 딸린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카페에서 밀크셰이크를 한 잔씩 빼들고 근처 조각공원을 산책했다.

사진도 찍고 복숭아에게 서로 말도 걸어주면서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땅에서 솟아오른 손 모양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해봤는데 또 선상 결혼식을 하면 감동이 줄어들 것 같아.”

수진의 말에 한해는 반색했다.

“나도 그 생각했어. 대신 알아본 데도 있는데.”

“어디?”

그는 핸드폰을 꺼내 링크로 담아둔 결혼식장을 보여주었다.

“바닷가에 있는 호텔이야. 서울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선상 결혼식 느낌도 나고.”

한해의 폰을 받아 꼼꼼하게 살펴본 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좋다. 우리 오빠님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

“예쁨 받으려고.”

“더 예뻐해줄 순 없는데?”

문득 어젯밤의 뜨거운 시간이 떠올라 옅은 열기가 퍼졌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하객이 많지 않으니까 예식장이 클 필요는 없어.”

“응. 주례는 사토시 씨에게 부탁할까 해.”

“좋다! 축가는 역시 소월 씨랑 레오가 좋겠지?”

“응. 지난번에 보니까 정말 잘하더라.”

“하객이 좀 겹치진 하겠다.”

한해는 잠시 망설이다가 민감한 얘기를 꺼냈다.

“강이랑 레이나도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서로에게 다른 짝이 생겼다 해도 한때 부부였던 사이인 사람을 결혼식에 불러도 괜찮을지.

하지만 계속 피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수진이 먼저 말하기는 불편하겠다 싶어 한해가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수진은 밀크셰이크 빨대를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양새는 웃기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이미 좋은 관계로 정리가 되었는데.

“오빠는 어때?”

“난 좋지. 나 역시 그 둘이 결혼할 때 불러주면 기꺼이 갈 거고.”

“나도 그래. 그럼 한번 강이 오빠에게 물어봐. 그쪽에서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레이나 씨 입장도 있는 거고.”

늘 주저함이 없는 한해가 바로 강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수진이 막았다.

“워워. 나중에 연락해. 지금은 나랑 복숭아에게 집중해달라고. 우리 나름 여행 온 거야.”

한해는 키득거리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조각상 벤치 위에서 입 맞추는 연인의 모습이 한 장의 엽서 같았다.

*

뒤늦게 뉴스가 퍼졌다.

‘태화 건설 이태화 회장, 청부살인미수 혐의로 복역 중’

사회면에서 가장 많이 본 뉴스 상위권에 오른 헤드라인이었다.

집무실에서 모니터를 보던 강은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재판이 열렸던 당시에는 최대한 손을 써서 기사를 막았다. 다행이도 피해자인 한해 측에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사건을 키우고, 이태화 회장은 물론이고 태화 그룹 전체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도 한해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강은 한해가 왜 그렇게 참아주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태화 회장이 수감되면 그룹의 경영을 맡아야 할 강을 위해, 최악의 카드는 내밀지 않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미 재판이 끝나고 복역 중인 상황에서 아버지 기사가 나오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룹 홍보실은 난리가 났겠군.

예상대로 홍보실장이 다급하게 집무실을 찾아와 대책을 논의했다.

강의 태도는 침착하고 분명했다.

“숨길 것도 과장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개인적인 일로 청부 폭력을 지시한 일이고, 마땅히 벌 받아야 할 범죄입니다.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계시고요.”

“네. 그런데 기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그 개인적인 일이 뭔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입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사생활이죠. 그러니 회사 홍보실에서도 알 필요 없고요.”

강의 단호한 대답에 홍보실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혹시 부회장님에게 개인적으로 기자가 연락이 오거나 하면 저한테 돌려주시면 됩니다.”

“제 개인번호를 아는 기자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또 모릅니다. 기자들은 워낙 수완이 좋아서.”

“알겠습니다. 혹시 연락이 오면 그렇게 하죠.”

“아예 필요 없는 시간에는 꺼놓는 것도 방법이고요.”

홍보실장이 물러난 뒤 강은 핸드폰을 끌까말까 고민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한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본 모양이군.

“어, 한해 형.”

“뒤늦게 기사가 났더라. 회사는 괜찮아?”

“홍보팀에서는 난리가 났지. 나는 뭐…… 어차피 당할 망신이었지.”

“결과적으로 미안하게 됐다.”

“형이 왜 사과해. 형은 피해자인데. 말 안 해도 알아. 재판하면서 형이 기자들한테 전혀 알리지 않고 참은 거.”

“알아주니 고맙다.”

“고맙다고 말할 타이밍은 놓쳤지만, 이제라도 말할게. 고마웠어.”

“끝까지 기사가 안 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회장님 체면도 그렇고.”

“흠. 아버지는 요즘 약간 달관 모드이던걸?”

“그래?”

“자식으로서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오히려 이번 일이 아버지에게는 새 인생을 살 계기가 된 것 같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강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면회를 갔을 때도 아버지는 오히려 회사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레이나 씨하고 같이 한번 저녁이나 할까?”

한해의 제안에 강은 잠시 고민했다.

이제쯤 괜찮아졌을까? 우리 사이의 감정들이.

“그래. 같이 본 지 오래되었네.”

한해의 안도하는 숨소리가 핸드폰을 통해서도 들릴 만큼 컸다..

정말로 내가 보고 싶었구나. 사실은 나도 그래.

강은 후련함을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모니터에 떠 있는 기사를 지워버렸다.

당분간은 시끄럽겠지만 곧 잠잠해지겠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그런 계절이 왔어.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어디에나 계급은 존재한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똑같은 수의를 입고 똑같은 방에서 사는 교도소에서도 마찬가지.

사회에서 돈이나 권력을 갖고 있던 재소자들은 범털로 불리며 교도소 내에서도 특별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개털로 분류되어 그 안에서도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낸다.

그런데 이태화 회장은 단 한 번도 범털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재벌들이 흔히 말하는 집사 변호사를 불러 접견실에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이 회장은 그런 것도 없었다.

다른 재소자와 함께 교도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과 산책을 하고, 여가시간에는 책을 읽고, 심지어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설업의 특성상 기업 총수라고 해도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폐쇄된 사회일수록 소문은 가속도가 붙는 법.

그가 국내 굴지의 건설사 회장이라는 사실이 교도소 내에 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태화 건설 밑에서 하도급으로 일하던 작은 건설사 사장이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 역시 회사 대표 출신으로 교도소 내에 손꼽히는 범털 대접을 받았는데, 이 회장과 마주쳤을 때는 이마가 땅에 닿게 인사를 했다.

“아이고! 회장님이 여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서 범털이 이렇게 꼼짝도 못 하고 우러러보나 싶었던 재소자들은 이 회장의 정체를 알고 기겁했다. 대표 얼굴은 몰라도 태화 건설이라는 회사 이름은 다들 들어봤으니까.

그 뒤로 사람들이 이 회장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눈만 마주쳐도 인사를 했고 감방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운동 시간에도 특별대우는 마찬가지. 그가 걸어가는 길에서는 늘 재소자들이 비켜주었고, 벤치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그를 신기해하는 재소자들이 다가오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오후 운동 시간에 운동장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는데 재소자들이 줄지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 회장이 귀찮다며 인상이라도 한번 썼으면 감히 다가올 엄두를 못 냈을 텐데 그는 재소자들의 인사를 다 받아주었다.

“회장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것도 다 살 궁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자꾸 다단계 쪽으로 발길이 갑니다. 자격증 같은 걸 따보려고 해도 영 공부에 소질도 없고…….”

신세 한탄에 인생 상담을 하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이 회장은 도인처럼 한마디씩 답을 주곤 했다.

“그것도 재주니까 재주를 살려서 영업직에 도전해봐.”

그는 단순한 범털이 아니라 큰 어른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전혀 그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권위와 재력을 과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주었다.

그날도 그는 볕 좋은 운동장에 앉아 재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어왔다.

일과 시간이 거의 끝날 때쯤이었는데 면회신청이 들어왔다.

변호사들에게는 오지 말라고 일렀고, 강과 레이나는 얼마 전에 다녀갔고, 회사 사람인가 싶었는데…….

교도관이 전해준 면회신청인의 이름은 윤삼순.

접견실에 들어가니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늘 무기력하고 눈에 초점이 없던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목소리엔 힘이 느껴진다.

집밖에도 거의 못 나가던 사람이 혼자 여길 찾아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뭘 하러 여기까지 왔어. 강이한테 얘기해놨는데. 변호사 통해서 진행하면 된다고.”

“여전하네요. 저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시는 건.”

“아니…… 걱정되어 그렇지.”

이 회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 말은 처음이네요. 제가 걱정된다는 말.”

긴장해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뭘 진행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저도 당신이 걱정되어서. 잘 지내나 보러 온 거예요.”

이 회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

“말도 없이 집 나가서 미안해요.”

나에게 미안하다고? 아내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그중에서 정말로 미안할 만한 일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돌아보면 미안한 짓을 더 많이 저지른 사람은 그였다.

그냥 더 많다는 표현은 너무 완곡하다. 대부분의 잘못은 그가 저질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아내의 잘못은 단 하나.

원죄를 문신처럼 새기고 그녀는 평생 죄인으로 살았다.

“얼굴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내의 음성은 차분했다.

“사실 당신이 징역을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그동안 날 괴롭힌 벌을 받는 거라고…….”

평생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던 그녀는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는 이를 꽉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물어보라고.

“지은이가 그렇게 된 일이…… 정말로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회장은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날 이후, 그 질문으로부터 도망 다니는 일이 제 인생의 전부였어요. 이제야 당신한테 물어보네요. 말해줘요.”

이 회장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말이 맞아. 나는 죗값을 치러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그녀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처음 들어보는 고해성사였다.

“참 재미있는 건 말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억울하다고 해. 나 빼고 전부. 나는 억울하지 않아. 난 여기 갇혀 있어도 마땅하지.”

“여보…….”

“여긴 시간이 참 많은 곳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 돌아보고 또 돌아봤지. 지은이 일도…… 여전히 다시 떠올리기 너무 아픈 일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봤어.”

이 회장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이었어. 하늘을 원망하고 나도 원망하고…… 그리고 누구보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당신을 원망했지.”

그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못을 따지자면 부실공사로 그 백화점을 지은 놈의 잘못이겠지. 당신은 잘못이 없어. 운이 없었을 뿐이야.”

그녀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평생 듣고 싶었던 말 한마디였다.

“미안해, 여보.”

그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제 아내를 여보라고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픔은 더 깊어졌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오열을 쏟아냈다. 겨우 진정이 되었을 때 그녀도 고백했다.

“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은이를 혼자 놔둔 제 자신을 원망해요. 제 잘못이 맞아요. 그래도 당신한테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딱 한 번만이라도.”

“아니야. 당신 잘못이 아니야.”

투명 플라스틱판을 사이에 놓고 두 부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접견시간이 끝났다.

교도관은 재촉하지 않았지만 이 회장은 남은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겨우 진정된 톤으로 말했다.

“당신이 진행하기 어려우면 우리 변호사를 시켜 서류 준비하라고 할게.”

수의 차림의 그가 돌아서는 순간,

“잠깐만요!”

그녀의 주름진 손이 플라스틱 칸막이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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